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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양의 목자이신 여호와
2023년 9월 10일 / 시 23:1-6
시 23:1-6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그 무엇이 부족하리오. 2) 편히 쉬라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시고 고이 쉬라 시원한 시냇가로 데려가시네. 3) 내게 생기 불어넣으시고 똑바른 길로만 이끌어 주시니 주님이 아니고서야 주님의 이름 아니고서야 어찌 그러리. 4) 나 죽음 그늘 드리운 깊은 골짜기 지난다 해도 아무런 두려움없이 가리라. 주께서 내 곁에 함께 계시니 목자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와 막대기처럼 인도하여 주시니 하고 많은 시름 사라져 버리고 이 마음 이렇듯 든든하여라. 5) 원수들 두 눈 뜨고 쳐다보는데 보란듯 이것 앞에 잔칫상 차려 주시고 귀한 손님 대접하듯 기름 발라주시며 잔이 흘러 넘치라 하고 부어 주시네. 6) 아, 그 누가 이렇듯 행복하리오. 이처럼 포근하리오. 주님의 손길 살아 생전 끊이지 않으리니 이 목숨 살아 숨쉴 동안에 주님의 전에 오래도록 살으리이다.
시편 23편은 시편의 나이팅게일, 시편의 진주로 여겨지는 불멸의 노래이다. 이 시의 한 줄 한 줄 속에는 다윗이 평생동안 체험한 강렬한 시적 영상들과 고백이 가득하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1-3) 본문은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로 시작하여 ‘자기 이름’으로 마친다. 목자라는 칭호는 히브리인의 전통에서 하나님에 대한 가장 오래된 칭호 중 하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4개의 동작을 통해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다.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소생’, 즉 다시 생기를 주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신앙고백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나의 목자’와 ‘나의 영혼’은 짝을 이루고 ‘푸른 풀밭’과 ‘의의 길’이 그 대칭으로서 짝을 이루며, 목자가 양을 이끌어 가는 곳과 양의 복된 모습을 고백하고 있다. 양은 목자를 순순히 따를 때 안정과 평안이 보장된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4) 다윗은 ‘비록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라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십니다’라고 말하며 인생의 극심한 위험 중에서도 늘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하였다. 다윗은 더 이상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 머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나라이기는 하였지만 공중의 권세잡은 악한 영과 인간들이 사는 곳이기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야 했다. 그럴지라도 그는 최대의 위기 속에서 위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가 신앙인인 다윗의 중심축이다. 사망, 음침함, 두려움은 전쟁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이며 지팡이와 막대기는 목자의 무기로서 목자의 거룩한 군사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임마누엘의 모습이다.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5-6) 다윗은 자신을 영화롭게 해주신 하나님을 잔칫상을 베푸는 친절한 주인으로 노래하고 있다. 전쟁의 승리자들을 위하여 베푸는 축하 잔치를 의미한다. 한편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잔치에서 특별히 귀중한 손님들에게 머리에 향기로운 기름을 발라주는 풍습이 있었다(시 133:2).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을 매우 귀한 존재로 여기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본 단락에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집으로 글을 맺는다.
복음서에 예수님은 자신이 모든 신자들을 양으로 말씀하시고 자신은 목자로 조명해 주셨다.
농촌 출신으로 돼지, 개, 닭 … 여러 가지 동물을 기른 ◯◯◯ 목사의 글이다.
양은 우리들의 모습처럼 여러 가지 나쁜 특성이 있다.
❶ 방향 감각이 둔해서 스스로 갈 길을 찾지 못한다. 반드시 목자가 데리고 다녀야 하는 동물이 양이다. 진돗개는 수백 리 밖에 갖다가 몰래 집어 던져도 제 집을 찾아온다. 하다못해 저 산속의 숲의 새들도 그 넓고 넓은 산에 손바닥만 한 둥지를 지어두었어도 찾아온다. 하지만 양은 찾지 못한다. 양의 시력은 정확히 보이는 게 10m이고, 희미하게 보이는 게 20m이다. 방향 감각이 없다. 어디로 갈지 모른다. 그래서 위험에서 피할 줄도 모른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모든 동물이 얼마나 재빨리 자기 위험을 감지하고 재빠르게 피하는지. 그러나 양은 피하지 못한다. 땅벌이 나와서 쏘면 빨리 도망가야 한다. 그런데 양은 가만히 앉아서 그것을 다 맞고 죽는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미련하게 영혼이 금방 죽을 자리인데도 빨리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았다가 죽는다. 사람들에게서도 이런 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❷ 양은 방어 무기가 없다. 하다못해 개미도 자기를 해치려는 적에게 아주 공격적 일침을 가하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양은 없다. 친구 목사는 낚시 취미를 가지고 있는데 월요일 아침이면 새벽기도를 마치고 벌써 낚시터에 간다. 어느 날 아주 맛있는 고기를 낚아서 좋아했다. 그게 넙치인지 가오리인지 잘 모르겠는데, 둥그렇고 끝에 꼬랑지가 나와 있는 큰 고기를 잡았다. 너무 좋아서 ‘이야! 내가 오늘 이걸 다 잡다니!’ 아주 맛있게 생각을 하고 그 아가미에 걸려있는 낚시 바늘을 신나게 뽑고 있었다. 드러누워 있던 가오리가 꼬랑지를 슬쩍 들더니 낚싯바늘을 빼고 있던 손을 공격을 했다. 앰뷸런스가 와서 실려갔다. 의사 말이 까딱하면 죽을 뻔했다고 한다. 간신히 살았다. 그 목사는 지금도 손을 보면 오목하게 파여져 있다. 친구들이 보면 항상 놀린다. 가오리한테 죽을 뻔했다고 ‘가오리다. 가오리다. 한방에 가오리다.’ 양은 이러한 물고기만도 못하다.
❸ 자존심과 고집은 모든 동물 중에 가장 강하다. 이사야 53장에 있다. ‘우리는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자기 고집대로 각자 간다. 얼마나 고집과 자존심이 강한지 양은 목줄을 메지 못하는 짐승이다. 목줄을 메어놓으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오래 가면 죽는다. 항상 방목해야 한다. 내가 경험한 것 말씀드리면 내가 목적하는 바가 있으니까 목줄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니까 이 양목줄은 그런 줄 알도록 아예 태어날 때부터 해주어야 한다. 중간에는 절대 못한다. 그래서 목줄에다 고리를 걸어서 내가 목적하는 데다 데려다 놔야 한다. 그런데 이 목줄을 잡아당기면 죽어도 안간다. 하도 안가서 ‘오늘은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한번 시합을 해보자.’ 나도 그때 10대 후반이니까 힘이 세던 시절이었다. 세게 잡아당기니까 안 온다. 어떻게 하느냐? 마당에다 양쪽 발톱을 박는다. 끌면 불도저가 땅을 미는 것처럼 밀고 온다. 목이 떨어져 나가도 절대로 안간다.
❹ 양은 높은 곳으로 가길 좋아한다. 양은 잃어버리기 쉬운 동물인데 아래로 내려오면 동네이기 때문에 찾기가 쉽다. 그런데 점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항상 찾아가야 한다. 성경에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까지 나올 정도이다. 길을 갈 때 절대 빨리 못 가는 동물이 양이다. 천천히 제 고집대로 간다. 빨리 몰면 더 천천히 간다.
▶ 2절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 목자는 푸른 풀밭에 누울 수 있게 해주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준다. 그런데 양들을 푸른 풀밭에 눕게 해주고 물가에서 쉴 수 있게 해주는 일은 목자에게 있어서 간단한 일이 아니다. 목자가 많은 수고와 자기희생을 치러야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선 양이란 동물이 풀밭에 편안히 눕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① 양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가 주변에 보이지 않아야 한다. 양은 아주 겁이 많고 의심이 많아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체가 시야에 들어온다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가 들리면 불안해서 누워있지 못한다. 그리고 한 마리 양이 놀라서 뛰기 시작하면 다른 모든 양들도 덩달아 뛰는 바람에 삽시간에 혼란이 일어나곤 한다. 그래서 양들을 편히 누워 쉬게 하기 위해서는 목자는 쉬지 않고 부지런히 주위를 살피며 양들을 불안하게 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다.
② 양들이 풀밭에 편안히 눕기 위해서는 양들을 귀찮게 하는 요소들이 없어야 한다. 양은 아주 신경질적인 짐승이어서 하루살이 같은 것이 눈앞에서 어른거리기만 해도 그걸 참지 못하고 그래서 눕지를 못한다. 따라서 양들을 편히 누워 쉬게 하기 위해서는 목자는 양들을 귀찮게 하고 짜증나게 하는 벌레나 곤충들을 열심히 쫓아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위해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다.
③ 양들이 풀밭에 편안히 눕기 위해서는 배가 고프지 않아야 한다. 양들은 만족스러울 만큼 배불리 꼴을 먹기 전에는 절대로 눕지 않는다. 목자들은 양들이 편히 누워 쉴 수 있도록 좋은 꼴을 풍성히 먹이기 위해서 늘 많은 수고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해 그런 수고를 하신다.
④ 양들이 풀밭에 편안히 눕기 위해서는 양들 자체 안에서 평화가 유지되어야 한다. 흔히 양을 양순하고 평화의 상징인 짐승인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양들끼리만 내버려두면 힘없고 어린양들은 힘세고 못된 양들 때문에 늘 시달리며 좋은 자리는 언제나 빼앗기기 때문에 잠시도 편안히 누워 쉴 틈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양들이 골고루 편히 누워 쉬게 해주기 위해서 목자는 특별히 신경 써서 양들 사이를 잘 살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자 같은 분이시다.
목자는 양들에게 물을 먹이러 갈 때에도 먼저 그 물이 양들에게 안심하고 먹일 수 있는 깨끗한 물인지, 물가에 양들을 귀찮게 하거나 양들에게 해로운 벌레들이라도 없는지 세심히 살펴본 후에야 양들을 데려간다. 또 양들에게 가장 좋은 물은 새벽 동트기 전에 풀잎에 맺히는 이슬이라고 하는데 좋은 목자들은 양들에게 그 물을 먹이기 위하여 새벽잠을 설치면서 양들을 일일이 깨워 풀밭으로 이끌고 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양들이 만족하며 ‘우리가 쉴만한 물가로 인도되었구나’라고 여기게 되는 것은 목자의 지극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그렇게 사랑하신다.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3절) / 이 말 속에는 은혜 넘치는 뜻이 들어있다. 양은 몸이 둥글고 다리가 짧아서 그런지 나뒹굴기 잘한다. 평평한 곳인 줄 알고 누우려다가 조금만 웅덩이진 곳이면 쉽게 나뒹굴게 되는데 한번 배를 하늘로 향하고 나뒹굴게 되면 제 발로 다시 서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스스로 일어서려고 발버둥 치다보면 체내에서 기포가 형성되어서 혈액순환을 막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라도 좀 불 때에는 3일 정도 버틸 수 있지만 뙤약볕이 내려쬐는 때에는 단 세 시간 만에도 질식사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목자들이 양을 치면서 가장 신경을 써야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어느 구석인가에 한 마리라도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나뒹굴어 있는 양이 없는지 살피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 중에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 나서는 목자의 비유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양 한 마리가 보이지 않을 때 목자가 제일 먼저 생각에 떠올리는 것은 그 양이 어딘가에서 배를 하늘로 향하고 나뒹굴어 있지나 않나 하는 것이며, 그것은 1분 1초가 급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양을 발견했을 때 목자는 그 양을 얼른 바로 세워 가슴에 안고 전신을 잘 마사지 해 주어야 하며, 그렇게 하면 질식해 가던 양이 정신을 차리며 되살아난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는 말은 내가 어디서 무슨 변을 당해 죽어가는 일이 있을지라도 곧바로 내게 달려와 나를 살려 줄 목자 같은 분이 바로 내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의 고백인 것이다.
▶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이 말 속에도 참으로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양은 습관성 동물이어서 자기들끼리만 다니게 내버려두면 한 번 가본 길로만 계속해서 다닌다. 그러면서 풀이란 풀은 다 뜯어먹고, 더 이상 풀이 없으면 뿌리까지 다 캐먹으며 또 다니면서 싸놓는 배설물로 땅을 산성화시켜 다시는 회복이 불가능한 땅으로까지 만들어놓는다. 아무리 좋은 풀밭이라 할지라도 목양이 불가능한 땅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그것이 곧 불의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목자가 목양에 성공하려면 무엇보다도 유의해야 하는 일의 하나가 양들을 여러 목초지로 차례로 번갈아가며 이끌어가야 한다. 그렇게 좋은 목자에 의해 인도되기만 하면 양들은 목초지를 버려놓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적당히 남겨놓는 배설물은 오히려 목초지가 잘 유지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것이 말하자면 의의 길을 가는 것이다. 스스로는 불의를 행할 수밖에 없는 양들을 의를 행할 수 있게 해주는 목자처럼 하나님은 불의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의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다.
▶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절) / 막대기는 다른 동물의 접근을 방어하는 무기이고 지팡이는 양을 인도하는데 쓰는 도구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했는데 유대 나라 산들은 우리나라 산 모양과 절대 다르다. 떨어지는 날이면 수십 길 떨어져 죽는다. 이스라엘 유목민을 보면서 그들의 생활을 보고 느낀 것은 ‘이 세상의 어떤 직업도 이것보다는 낫겠다.’는 것이었다. 남루한 천막 하나를 모래밭 위에다 쳐놓고 돌멩이 세 개를 갖다 놓고 그 위에다 시커먼 솥단지 하나 걸어놓고 밀가루 반죽해서 그것만 매일 먹고 산다. 물이 없어서 세수를 못해서 온 집안 식구들이 집단 거지 떼 같이 보인다. 낮이면 아열대 기후를 견디면서 양떼를 보호해야 하고, 밤이면 양을 잡아먹으러 달려드는 짐승들이 수없이 모이니까 그것을 쫓아야 한다. 예수님 탄생하실 때 성경 기록이 있다. ‘베들레헴 목자들이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목자는 밤에도 제대로 잠을 못잔다.
그래서 유목민 사회에서 좋은 목자는 누구인가? 네 가지 조건이 있다. ① 위험하지 않은 곳을 찾을 줄 아는 목자다. 푸른 초장, 잔잔한 시냇가 이것을 찾아내야 한다. ② 맹수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목자다. ③ 양을 잃어버리지 않는 목자다. ④ 양을 살찌게 하는 목자다. 결국 목자는 양을 위하여 희생을 한다는 것이다.
▶ 내 잔이 넘치나이다(5절) / 이 말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분에 넘칠 정도로 감사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 말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의미가 숨어있다. 목자들은 밤에 들판에서 양들을 지킬 때가 많으므로 추위나 오한이 날 때에 대비해서 물병에 술을 약간 탄 물을 늘 가지고 다닌다. 그런데 양들도 오한이 날 때에는 목자가 그 술 탄 물을 따라 마시우곤 하는데 양들에게는 목자의 품에 안겨 그가 따라주는 물 한 잔 받아 마실 때보다 더 행복해할 때가 없다는 것이다. 그 때의 그 행복감의 표현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의 백성에게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 반대로 양이 된 우리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목자의 사랑을 받는 것인가?
양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장점이 하나가 있다. 청각이 발달했다. 탁월한 청력이 양의 장점이다. 특별히 자기 주인의 음성 분별에 대해서 아주 민감하다. 만약 다른 사람이 주인과 같은 음성을 흉내 내서 양을 부릴지라도 쉽지 않다. 목자들은 누구나 허리에 피리를 차고 다닌다. 대나무로 된 것이 있고 소뿔을 깎아서 만든 피리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 목자가 피리를 불면 양들은 목자의 위치가 주변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듣고 신변에 안전을 느끼고 아주 편안해 한다. 또, 이 피리 소리는 다른 공격 짐승들의 접근을 막는 효과가 있다. ‘목자가 있으니까 너희들 접근하지 말라.’
다윗도 목동 생활을 하다가 출세의 기초가 되었다. 실로 짠 돌팔매질하는 실력도 있었다. 가죽으로 된 것과 실로 짠 것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의 양된 자들은 한 가지만 생각하면 된다. 예수님의 음성을 잘 듣고 따라가면 된다.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보자.
요 10:1-5 /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다. 2) 목자는 문을 통해서 들어간다. 3) 문지기는 그에게 문을 열어 주며, 양은 그의 음성을 반긴다.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양들은 앞장 서서 걸어가는 그를 뒤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양들은 낯선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낯선 음성이 들리면 오히려 피하여 달아난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틀림없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 시편 23편이다. 요즈음 교인들은 선한 목자인지? 삯꾼 목자인지 잘 구분한다. 만일 교인들이 전혀 분별력이 없다면 이것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라면 양인 교인이 좋은 꼴을 먹고 신앙으로 성숙도 하고 성장도 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여기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라는 문장이 있는데, 올리브기름을 양의 머리에 발라주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사막성 기후의 독성 있는 파리나 모기가 끊임없이 달려드는데 올리브기름 향취가 파리와 모기를 쫓아내는 효과가 있다. 양의 콧구멍 입구는 늘 물기가 촉촉해서 종종 거기에 벌레가 기생하는 수가 있다. 그 벌레는 양의 콧구멍에다 알을 까기도 하고 또 거기서 애벌레가 나와 콧구멍 속으로 파고 들어가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양에게 통증도 일으키고 때로는 실명하게도 된다. 그렇지 않아도 성마른 짐승인 양은 그것을 참지 못해서 땅바닥이나 나무 등걸이나 바위에다가도 머리를 찧고 코를 비비대다 보면 상처가 나거나 깨져서 피를 흘리기도 한다. 그럴 때면 목자는 상비약처럼 지니고 다니는 올리브기름을 곧바로 그 상처에 발라주어 낫게 해 준다. 따라서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라는 말 또한 양을 기르는 목자의 지극한 정성과 배려를 엿보게 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그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치고 상처받고 깨지고 피 흘리는 일이 있어도 어김없이 찾아와 고쳐주고 살려주는 목자 같은 분이시다.
그러면 이 양은 어떻게 변하는가?
단점 투성이의 문제아였지만 장점만 있는, 가장 쓸모 있는 주님의 제자로 변해야 한다.
① 양은 모든 제사의 희생물이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흘리시는 주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양의 피가 된다. 그래서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이라도 양 한 마리 희생하면 번제를 드려서 모든 죄를 속죄받는다. 그런데 그 재료로서 양은 쓰임을 받게 되니까 거룩한 양이 되어야 한다.
② 인간들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모든 역할을 다 하는 게 양이다. 양은 인간에게 가장 맛있는 요리를 제공해 준다. 우리는 맛이 없는 쓸모없는 양이었다가 주의 음성을 듣고 따르면 하나님이 가장 즐겨하시는 일꾼이 될 수 있다. 양은 우유를 생산하는데 인간에게 가장 고단백질, 건강 보탬을 해준다. 현지에서 생산되는 양젖은 젖소 우유보다 언제나 배나 비싸게 판매된다. 신앙 좋은 주님의 양들은 온 세상 구원 사역에 가장 영양가 높은 생산력 있는 일꾼으로 변하는 것을 상징한다.
양털은 인간의 몸을 보호해주는 가장 따뜻한 옷감을 제공해 준다. 겨울에는 영하 40도이다. 그러나 아무 문제가 없다. 양고기를 많이 먹기 때문에 지방질이 많아서 추위를 안 느끼고, 양털로 짠 스웨터를 하나 입으면 영하 40도도 넉넉히 견디어서 다들 스웨터 하나씩 산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입을 필요가 없다. 기념품으로는 살망정 한국에서 입으려고 해서 사면 다음에 몽골 가서 몽골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 양 가죽은 각종 생활필수품에 재료로 쓰임을 받는데, 성경도 제일 처음에는 양피지 성경이었다. 양을 잡아서 가죽을 햇볕에 말려서 딱딱해진 겉장에다 성경을 쓴 것이 보존되어 지금 이렇게 활자 성경을 가지고 있는데 양들이 희생된 것이다. 그러니까 양이 주의 음성을 듣고 이 목자를 잘 따르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귀중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적 일꾼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앞에는 언제나 두 가지 길이 놓여 있다. 하나는 목자의 음성을 잘 듣고 따르던가? 아니면 목자의 음성을 거역하고 다른 길로 가든가?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셨고 그 선언이 진실임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확증해주셨다. 우리는 그런 목자 되신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 그 하나님하고만 일생을 함께 해야 한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걸으라 하시는 길이 따르기 힘들고 이해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자기 목자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라가는 양이 되어야 한다. 예수 믿는 것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종종 얻는 것 없고 손해만 볼 것 같으며, 배부름도 시원함도 편히 쉼도 재미도 없고, 피곤과 오해와 조롱과 실패와 위험밖에 없어 보일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그야말로 물 한 방울, 풀 한 포기, 구름 한 점 없는 광야를 걷는 것과 같이 여겨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당장에 안 보여도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만 따라가면 거기에 진정한 기쁨과 만족과 성공과 평안과 행복이 있다. 악하고 험한 세상에서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이 어쩌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것 같이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양손에 지팡이와 막대기를 드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스스로는 불의의 길밖에 갈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이 의의 길을 가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을 따르는 것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양 무리인 우리들이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믿음의 길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것이 오늘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과 삶의 다짐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따르는 백성에게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시며 참된 만족과 평안, 치유와 회복 그리고 구원과 부족함이 전혀 없는 영원히 복된 삶을 주실 것이다.
다윗의 뒤를 이은 믿음의 후손 그리고 우리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시편 23편과 더불어 시편 121편도 함께 묵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시 121:1-8 / 나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 2) 하늘과 땅을 지어내신 여호와 주님만이 홀로 나를 도우시는구나. 3) 너를 쓰러지지 않게 하시려 주께서는 너를 지키시며 졸지도 아니하신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신다.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 5) 여호와 너를 지켜 주신다. 여호와 너를 구해 주신다. 네 곁에서 너를 보호하신다. 6) 낮 동안 해가 이글거리며 내리친다 해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밤이 되어도 달이 너를 다치지 못하리라. 7) 어떤 위험 닥쳐와도 여호와 너를 지키시리라. 너를 보호하시리라. 8) 네가 들어가도 나와도 주께서 너를 보호하시리라. 이제부터 영원히 영원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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