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6
사랑하는 이/대상에게 쓰는 편지(서간문)
세상 모든 짐승들에게
다홍
어릴 때부터 느린 편이었어. 말이나 행동이나 걸음이나 생각 같은 것들이 말이야. 그 말은 많은 것에 많은 시간을 들인다는 뜻이기도 해. 그런데 더 어렸을 무렵, 나는 빨리 기었어. 나를 키워준 사람의 말에 따르면, 믿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고 해. 개처럼.
태어난 지 열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나는 함께 사는 개 두 마리를 보며 그리고 기억에는 없는 어릴 적 내 자세와 호기로움을 떠올리며 바닥을 기었어. 쫙 핀 손바닥과 무릎 아래를 바닥에 붙인 채였어. 속도는 형편없었어. 차라리 하루 굶어 온몸에 힘이 다 빠진 개새끼가 더 빠를 지경이었다니까. 난 그게 무릎 아래쪽으로 굽은 걸리적거리는 뼈대 때문인가 싶어 다리를 활짝 펴 발바닥을 땅에 대보았지만 아무래도 자세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어. 단지 기기에는 이미 너무 커버렸거나 아직 너무 인간이었던 거지. 문득 슬퍼졌어. 아기나 개나 모두 지금은 될 수 없는 것이니 말이야. 개가 되어 혹은 늑대 혹은 사슴 혹은 호랑이가 되어 넓은 땅바닥의 감촉을 느끼는 상상을 했어. 두껍고 날렵한 몸으로 공기를 힘차게 가르며 마침내 세찬 바람을 만들어내고야 마는 상상. 숲의 냄새와 습한 진흙 내 혹은 실수로 밟아버린 지렁이의 끈적한 진액이나 귀 끝을 건드리는 따가운 솔잎 같은 것들이 느껴졌어.
너의 삶을 동경했어. 짐승성을 동경했어. 옷 하나, 안경모자팔찌목걸이신발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축축하거나 건조하거나 흙바닥이거나 풀바닥인 땅을 달리는 혹은 느끼는 혹은 샤워하는 혹은 사냥하는 자유로움을 사랑했어. 너의 슬프고도 깊은 눈동자를 사랑했어. 그 눈을 보고 있으면 말이 필요 없었어.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감탄스러웠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 말이 필요 없었다는 뜻이야. 인간들은 너무나 많은 말들을 필요로 하고, 나는 그 말들을 도무지 다해낼 재간이 없었거든. 그들은 말없는 입이 지루했는지 엉덩이를 들썩이다 결국 떠나가기 일쑤였지만 너는 말을 하지 않으니 떠나갈 일도 없을 것 같았어. 또 그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따뜻함이나 안정됨 같지만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차원의 무언가를 느꼈어. 가끔은 눈물도 흘렸어. 너의 모든 몸이 아름다웠어. 눈동자는 물론이고 길게 늘어진 주둥이와 촉촉한 코, 가는 수염, 그걸 지나는 길고 유연한 혀, 매끄럽고 뾰족한 이빨, 두껍고 뭉툭한 팔다리, 퐁신한 발바닥, 길게 휘두르는 꼬리, 넓은 배, 단단한 등가죽, 부드러운 털 같은 것들 말이야.
한 번은 아주 깊은 숲 속에 들어갔어. 그곳에서 보름을 살았어. 많은 인간들과 함께였고 바깥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어. 어느 날엔 갑자기 비가 세차게 쏟아졌어. 너무 세차서 그대로 비와 함께 땅으로 꺼져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이. 곧바로 나를 뺀 모든 인간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어. 나는 비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조금 더 깊은 숲속으로 걸어갔어. 숨을 기이이잎이 들이쉬었다가, 내쉬었어. 그곳엔 완전히 다른 세상이 살았어. 나무, 풀, 흙, 벌레, 거미줄, 그리고 평소에 까치발 들어 손끝으로 토옥 따먹던 오디와 블루베리들이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지구를 이루어내고 있었어. 화들짝 놀랐어. 인생 처음으로 지구에 살고 있었던 거야. 항상 지구에 산다고 생각해왔지만, 사실 내가 살던 곳은 겨우 대한민국 서울 용산구 그쯤이었던 거야. 아스팔트 도로를 디디며 콘크리트 건물로 들어가 쇠 난간을 잡고 대리석 계단을 오르다 다시 버스를 타고 아스팔트 도로를 달리다 카페에서 플라스틱 컵에 담긴 밀크티를 들고 다시 콘크리트 건물로 들어와 옥상에 있는 양파와 가지에 물을 주고 식당으로 내려와 조리된 돼지를 접시에 담아내는 일은 정말이지 지구에 산다고 할 수 없는 것들이었어. 지구에 산다는 건,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것들부터 차례대로 들여다보고는 잠에 들 수도 있을 것 같이 그곳에 몸을 바짝 갖다 대 보는 일 같은 거였어. 그래서 나는 많은 것들에 몸을 바짝 갖다 대 보았어. 나무를 두 팔로 한껏 안았다가 오디를 입 속에 잔뜩 칠했다가 풀들을 손으로 스르륵 쓸었다가 진흙을 두 뺨에 질척 비볐다가 바닥에 바짝 누워 개미들을 구경했어. 몸이 낮아져서인지 안경을 벗어서인지 개미들이 평소보다 조금 더 커다래보였어. 몸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어. 비가 모든 몸을 내려쳤어. 행복했어. 사실 행복하다는 말로는 부족했어. 지구에 살았어. 그때 나는 지구에 살았어. 마치 너처럼. 나는 너를 꿈꿨나봐.
하루는 아주 화가 나는 이야기를 들었어. 인간들을 철창 안에 가두고 다른 인간들에게 구경을 시켰다는 거야. 마치 동물원처럼.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할 수가 있어? 라고 인간들이 말했어. 그들의 눈썹이 짓눌리고 입술이 경직되었어.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어. 그들은 그걸 인간동물원이라고 부르데. 나는 가슴 속 깊이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어. 그런데 내 분노는, 그들을 가두고 구경한 인간들이 아닌, 내 바로 옆에 있는 인간들에게 향했어. 그들이 정말이지 진심으로 화가 나 보였거든. 그들과 동물원 얘기를 할 땐 어땠더라. 그렇게 화나 보이지 않았어. 나는 그들이 동물원을 이야기할 때도 그런 식으로 몸서리치길 바랐어.
하루는 토가 나올 것 같이 절망적인 이야기를 들었어.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짐승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는 숨 막혀 죽게 했다는 거야. 살고 싶어 기어오르는 그들을 인간들은 삽으로 내려쳤대. 그렇게 너무 많은 짐승들이 죽었어. 이유는 전염병 때문이었어. 그것도 치료할 수 있거나 심지어는 멀쩡한 짐승들까지도 말이야. 그리고 그 이유는 돈 때문이었어. 그러니까 그때 인간들은 너를 돈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었다는 거야. 물론 인간들도 서로를 돈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 정도로 많은 수를 구덩이에 넣고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아. 마치 인간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철창 안에 갇혀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이야.
하루는 내 입으로 미친 소리를 하기도 했어. 개새끼나 짐승 같다는 말이 나에게는 칭찬이라고 한 거야. 그게 왜 미친 소리냐고? 인간들 사이에서는 너 같다는 말이 심한 욕으로 쓰이거든. 그건 아주 더럽고 천박하고 못되먹고 폭력적이고 멍청하고 미쳐버렸다는 뜻이야. 그런데 정말 그래? 너는 아주 더럽고 천박하고 못되먹고 폭력적이고 멍청하고 미쳐버렸어? 내가 아는 너는 그보다 훨씬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고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워. 그래서 난 좀 다르게 말할래. 그 몹쓸 단어들은 오히려 인간들에게나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아, 가끔은 아주 야성적인 남자들에게 짐승 같다는 말을 칭찬으로 쓰기도 해. 그런데, 어딜 비벼. 그건 짐승성이 아닌 한낱 남성성일 뿐이야. 그렇지?
그런데 하루는 조금 혼란스러운 꿈을 꿨어. 태양이 모든 물을 삼켜버릴 것만 같이 뜨거웠어. 거친 모래바람이 부는 오아시스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막이었고 난 그 한가운데에 누워있었어. 어쩌다 그곳에 다다랐는지 그래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때 어디선가 낮은 으르렁 소리가 났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어. 늑대 한 마리가 서있었어. 그는 이빨을 드러냈어. 한껏 올라간 윗입술이 미세하게 흔들렸어. 몸을 낮추고 눈을 번뜩였어.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어. 달렸어. 무작정 달렸어. 그런데 자꾸 모래에 발이 빠졌어. 빨리 뛰어서 저 짐승에게서 도망쳐야 하는데, 고운 모래는 자꾸만 내 두 발을 삼키려했어. 필사적으로 달렸어. 닿는 순간 끝이었으니까. 그 순간 나는 늑대에게 잡아먹힐 거야, 아주 잔인하게. 팔부터? 아님 다리부터? 이빨이 살을 뚫는 고통을 참아낼 수 있어? 아니, 상상조차 하기 싫어. 그래서 달렸어. 있는 힘껏 다리를 움직였어. 하지만 다리는 쇳덩이를 짊어진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어. 무서웠어. 이렇게 죽는 건가 싶었어. 죽기 싫어. 이렇게 죽긴 싫어. 하지만 너와의 거리는 계속 가까워졌고 희망은 사라져갔어. 뒤를 돌자, 너의 얼굴이 바로 앞에 보였어. 너는 나를 덮쳤고, 나는 꿈에서 깼어.
그리고 깨달았어. 너를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인간이기 때문이었어. 인간은 어떻지? 인간은 잔인해. 끔찍하고 자기밖에 몰라. 너를 통제하고 위험으로부터 멀어져. 단단한 울타리를 짓고 그 안으로 들어가. 꼭꼭 숨어. 동시에 너를 취하기도 해. 아주 가까이서. 난 그런 인간이었어. 울타리 안에서 너를 구경하며. 너를 맛있어하기도 불쌍해하기도 사랑해하기도 하는.
그러니까 만약 그 울타리가 무너진다면 말이야. 난 널 맛있어하거나 불쌍해하거나 사랑해할 수 있을까? 너의 이빨이 나의 살을 뚫는 고통을 두려워해야하는데도 말이야. 진짜 너를 마주했을 때, 울타리를 부수고 맨몸으로 정정당당하게 맞이했을 때, 과연 그때도 넌 내게 더럽고 천박하고 못되먹고 폭력적이고 멍청하고 미쳐버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울타리는 무너지지 않아. 구멍도 나지 않고. 소름끼치도록 질기게도 튼튼할 거야. 너의 이빨이 인간들의 살을 뚫는 고통은 상상도 하기 싫게 끔찍하거든. 바로 그게 문제였던 거야. 울타리 말이야. 인간들은 너무나 안전했어. 많은 고통과 초조함과 망설임으로부터. 그리고 죄책감으로부터도. 그래서 너의 고통을 무시하기 시작했어. 온갖 도구들로 널 취하고 죽였어. 그냥 죽이지도 않았어. 하루하루 고통 속에 살게 했어. 그러다 죽였어. 그럴수록 죄책감은 저 멀리로 도망갔고 그럴수록 죽였어. 너를 더 많이.
진짜 너를 마주하고 싶었어. 울타리를 부수고 맨몸으로 정정당당하게 맞이하고 싶었어. 하지만 인간의 맨몸은 나약해. 그래서 네가 되고 싶었어. 아주 강하거나 도망칠 수 있게 빠르거나. 그렇게 서로 잡아먹으며 서로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짐승이 되고 싶었어.
아니, 사실 너는 짐승성을 사랑하려나, 너이기도 하며 너를 잡아먹기도 하는 짐승성을. 마치 이 세상을 가장 해롭게 하는 인간들이 인간성을 사랑하는 것처럼 말이야. 물어보고 싶어. 너는 짐승성을 사랑해? 아주 더럽고 천박하고 못되먹고 폭력적이고 멍청하고 미쳐버린 점까지도?
하지만 죽을 때까지 답을 들을 수 없겠지. 난 네 말을 알아들을 수도, 네가 될 수도 없으니. 아니아니 어쩌면, 죽을 때야 비로소 네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 맞아. 죽을 때야 비로소.
먹히고 싶어. 너에게. 마치 너처럼. 그건 짐승답고 아주 숭고할 거야. 하지만 아픈 건 싫어. 너는 먹이를 즉사시키는 법을 알고 있어? 고통이 오기도 전에 죽을 수 있게. 그리고 그 먹이를 맛있게 먹을 수 있어?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짐승이 되어서도 널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인간들은 오로지 맛을 위해 짐승에게 온갖 잔인하고 끔찍한 짓을 저지르거든.
고통 없이 날 죽여줘. 그리고 먹어줘. 이빨로 살을 뚫어줘. 살점을 찢고 뼈를 씹어줘. 천천히 음미해줘. 꿀떡 삼켜줘. 대접받는 기분으로 즐겨줘. 이왕이면 맛있게. 그럼 난 비로소 짐승이 되고, 행복할 거야.
나 정말 너를 꿈꿨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