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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_ 벽 / 추성은
벽 / 추성은
죽은 새
그 옆에 떨어진 것이 깃털인 줄 알고 잡아본다
알고 보면 컵이지
깨진 컵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
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새를 산다고, 연인은 말한다
나는 그냥 대답하는 대신 옥수수를 알알로 떼어내서 길에 던져두었다
뼈를 던지는 것처럼
새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에 던져둔다고 한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돌아가라고
애완 새는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
차라리 그런 것들에 가깝다
카페에서는 모르는 나라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언뜻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아마 표기는 튀르크어와 가까운 음악이고
아마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이라는 제목일 것이고
새장으로 돌아가라고……
아마 그런 의미겠지
연인은 나 죽으면 새 모이로 던져주라고 한다
나는 알이 다 벗겨진 옥수수를 손으로 쥔다
쥐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컵은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
노래도 아니고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도 아니고
진화한 새라는 것
위구르족의 시체라는 사실도
새의 진화는 컵의 형태와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끝에는 사람이 잡기 쉬운 모습이 되겠지
손잡이도 달리고 언제든 팔 수 있고 쥘 수도 있게
새는 토마토도 아니고 돌도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 죽어갈 것이다*
카페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건 어디서 들어본 노래 같고 나는 창가에 기대서 바깥을 본다
곧 창문에 새가 부딪칠 것이다
깨질 것이다
<詩 부문 심사평> 정끝별 시인, 문태준 시인
[2024 신춘문예] 감각·사유·언어를 오가며 빚어낸 ‘미래의 시인’
시는 긴장이고 충돌이다. 도전이고 모험이다. 새로운 시는 안전이나 완전과는 멀리 있다. 뛰어난 시는 지금-여기에서 저기-너머를 꿈꾸게 한다. 신인에게 기대하는 시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추성은 씨를 새로운 시인으로 추천한다. 감각, 사유, 언어라는 시의 세 꼭짓점을 오가며 빚어낸 그의 시편들은 읽는 사람을 충분히 매료시키며 시의 안쪽에 오래 머물게 한다. 당선작 ‘벽’은 녹록하지 않은 신예의 탄생을 예고하는 수일(秀逸)한 작품이다. 버드 스트라이크 혹은 조류 충돌의 새에게 사람 사는 곳이란 온통 부딪힐 수밖에 없는, 차단된, 차가운 벽이다. 그러니 ‘새’의 선택지는 진화하거나 깨져 죽거나, ‘창’ 안에서 ‘옥수수’를 받아먹으며 길들거나 창의 ‘바깥’으로 넘어서거나, 숱한 ‘새 아닌 새’가 되거나 ‘진짜 새’가 되거나일 것이다. 비단 새뿐이겠는가. 이 시가 반문명과 비인간을 지향하는 시로 읽히는 대목이다. 미래의 시인으로서 우리 시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가길
개인적 시 감상
벽 / 추성은
죽은 새
(투명 유리에 부딪혀 죽은 새)
(투명유리는 보이지 않는 벽으로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는 관념, 제도, 이념 등을 상징한다)
그 옆에 떨어진 것이 깃털인 줄 알고 잡아본다
(죽은 새 옆에 떨어진 깃털을 잡아본다)
알고 보면 컵이지
(깃털은 새가 살았을 때나 깃털의 기능을 한다.죽은 새의 깃털은 무생물인 컵이나 다름없다.)
깨진 컵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새가 유리창에 부딪혀 죽는 일은 종종 있다)
(사람이 자유를 가로막는 제도 등에 희생되는 일은 종종 있다)
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
(권력은 자신들이 구축하는 제도, 법률, 사상 등이 인간을 이롭게 하고 자유롭게 한다고 하지만 사실 자유의 발목을 묶어둔다)
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새를 산다고, 연인은 말한다
(겉모양은 새같지만 날지 못하면 새가 아니다.새의 본질은 하늘을 나는데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사람들은 날지 못하게 발목을 묶은 새가 표피적으로 인간을 즐겁게 하므로 모른 척한다)
(인간성의 자유를 제한하는 제도를 만들어도 돈을 버는데 혹은 내 집단에 도움이 된다면 모른 척한다)
나는 그냥 대답하는 대신 옥수수를 알알로 떼어내서 길에 던져두었다
(나도 모른 척한다. 이 자유제한의 시스템의 일원으로 옥수수을 알알이 떼어내어 길에 던져두었다.옥수수 씨앗은 땅에 뿌려서 생명을 싹틔워야 옥수수이므로 길에 던지면 더이상 옥수수가 아니다)
뼈를 던지는 것처럼
(뼈는 인체의 핵심부분이다.그러므로 인간의 핵심부분인 자유를 내던진것과 같다)
새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자유를 제한 당한 새가 자유를 잃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에 던져둔다고 한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돌아가라고
(풍장은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라는 긍정적인 기능을 하는 풍습이다)
애완 새는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
차라리 그런 것들에 가깝다
(애완 새는 자유를 제한당하고 있으므로 자유가 없는 컵, 더 나아가 벽을 상징하는 격자 창문, 백지, 청진기, 천장에 가깝다)
카페에서는 모르는 나라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언뜻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아마 표기는 튀르크어와 가까운 음악이고
(자본주의 시스템인 카페 안에서 모르는 음악이 나오는데 한국어와 비슷한 가사이다)
아마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유사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천장이라는 제목일 것이고
새장으로 돌아가라고……
아마 그런 의미겠지
(표면적으로는 자유라고 말하지만 사실 벽인 경우일 수도 있다)
(음악은 반복적 기능이 있고 카페 시스템에 맞는 음악이므로 이념을 전달하고 홍보하는 기능을 한다)
연인은 나 죽으면 새 모이로 던져주라고 한다
(연인은 자신이 죽어도 이 시스템의 일원으로 죽겠다고 한다. 이 시스템의 위험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알이 다 벗겨진 옥수수를 손으로 쥔다
(나는 알 즉 핵심이 없어진 빈 옥수수 대공을 쥔다)
쥐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컵은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
(쥐다 보면 컵은 빈 껍데기, 자유를 제한당한 사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노래도 아니고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도 아니고
(시스템을 찬양하는 노래도 아니고 벽으로 기능하는 것도 아니고)
진화한 새라는 것
(이 시스템 안에서 자발적으로 진화한 혹은 맹신하는 새로운 사물이라는 것)
위구르족의 시체라는 사실도
(위그르족의 시체는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것인데 우리 인간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부자유 속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
새의 진화는 컵의 형태와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끝에는 사람이 잡기 쉬운 모습이 되겠지
손잡이도 달리고 언제든 팔 수 있고 쥘 수도 있게
(새의 진화 즉 자유를 잃어가는 사물은 권력이 다루기 쉬운 모습이 되겠지)
새는 토마토도 아니고 돌도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 죽어갈 것이다*
(유리창에 부딪힌 토마토는 유리창에 붉음이 낭자하고 유리창에 부딪힌 돌이라면 유리가 깨질텐데 새는 유리창에 부딪혀도 시스템에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자유는 조용히 죽어갈 것이다)
카페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건 어디서 들어본 노래 같고 나는 창가에 기대서 바깥을 본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상징하는 카페에서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노래가 반복된다)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자유가 제한당하는 사실을 인식하고 안이 아닌 바깥을 관조한다)
곧 창문에 새가 부딪칠 것이다
깨질 것이다
(잘못된 시스템에 순응하면 비극은 되풀이 될 것이다)
1. 메시지
ㅇ주제: 자유를 억압당할 때 저항하지 않고 모른 채하면 다루기 쉬운 존재로 퇴화할 것이다. 자유가 제한당한다는 인식이 깨어나지 않으면 인간의 희생은 조용히 계속될 것이다)
ㅇ시로 들어가는 철학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형식을 시적으로 형상화
<닫힌 사회는 자유가 억압된 사회이며 그 속의 개인은 원자화되어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기능한다.전체적인 세계상을 보지 못하고 알아도 모른 채 무시하며 자유에 족쇄가 채워지는 모순 속에 산다.권력자가 조작하기 쉬운 대상으로 전락한다>https://m.cafe.daum.net/somdaripoem/rA34/962?svc=cafeapp
-하이데거의 계산적 사유와 감상적 사유
*감상적 사유:경이의 기분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계산적 사유:과학적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과학의 종교화가 세상을 계산적 인간으로 만들며 인간성을 상실하게 함
2. 이미지
ㅇ 컵의 이미지-컵은 내용물을 담는 그릇.깃털은 새를 담는 그릇, 나는 애인을 담는 그릇, 제도는 자유를 담는 그릇, 음악은 메시지를 담는 그릇, 한국어는 한국인의 사상을 담는 그릇
https://naver.me/GTexcHVd
벽/추성은〔2024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감상 홍정식)
죽은 새
그 옆에 떨어진 것이 깃털인 줄 알고 잡아본다
알고 보면 컵이지
깨진 컵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죽은 새 옆에 깨진 컵이 있어요. 깨진 컵이 깃털처럼 보였다는군요. 죽은 새는 말 그대로 죽은 새 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한 새일 수도 있겠어요. 컵은 당연히 인간이 깨뜨린 것이겠지요. 새는 살아있었던 것이고, 컵은 무생물인데요. 이 둘을 동일한 사유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
새를 파는 이는 당연히 인간입니다. 인간은 새를 기르죠. 새는 본성을 잃어버리고 그만 때가 되면 주는 모이에 안주합니다. 둘 다에게 이로울까요?, 둘 다에게 해가 될까요? 아니면 인간에게만 이로운 것일까요?
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새를 산다고, 연인은 말한다
나는 그냥 대답하는 대신 옥수수를 알알로 떼어내서 길에 던져두었다
뼈를 던지는 것처럼
새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새장 속에 갇힌 본성을 잃어버린 새가 아니지만, 사람들은 새를 삽니다. 그리고 먹이를 줍니다. 밖에서는 먹고 남은 옥수수를 툭 던지면 새들이 모여 그걸 쪼아 먹습니다.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에 던져둔다고 한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돌아가라고
자, 이제 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군요. 원래 자연에서 온 것들입니다. 우리나 새나. 그래서 매장 풍습을 가져옵니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종착역입니다.
애완 새는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
차라리 그런 것들에 가깝다
그렇다면 애완 새는 생물이 아니라 무생물과 같습니다. 깃털이 흰색이어서 불투명한 격자 창문, 백지, 의사의 청진기, 하얀 벽지의 천장들을 가지고 왔지 싶어요.
카페에서는 모르는 나라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언뜻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아마 표기는 튀르크어와 가까운 음악이고
아마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이라는 제목일 것이고
새장으로 돌아가라고……
아마 그런 의미겠지
카페에서 나오는 음악이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이라는 부분은 '데자뷔' 현상을 가져온 것 같습니다. 처음 듣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누구나 다 자연에서 왔으므로 익숙한 것 같다는 말이지요.
연인은 나 죽으면 새 모이로 던져주라고 한다
나는 알이 다 벗겨진 옥수수를 손으로 쥔다
쥐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컵은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
노래도 아니고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도 아니고
진화한 새라는 것
위구르족의 시체라는 사실도
잘 읽어 보면요, 컵(새)≠ 빈 옥수수=노래=창문=백지=청진기를 대조합니다. 그리고 컵=진화한 새=위구르족의 시체라고 합니다.
새의 진화는 컵의 형태와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끝에는 사람이 잡기 쉬운 모습이 되겠지
손잡이도 달리고 언제든 팔 수 있고 쥘 수도 있게
이제 시인은 위의 모든 행에 나온 것들을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애완 새는 컵과 같다. 인간의 편리에 의해 만들어진 기성품과 같다. 그래서 손잡이도 달리고 언제든지 사고팔 수 있는 기성품으로 전락했다. 인간의 이기주의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새는 토마토도 아니고 돌도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 죽어갈 것이다
새는 생명체이므로 '조용히 죽어갈 것이다'라고 하는 부분은 '인간은 조용히 새를 죽이고 있다'라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비단 새 뿐일까요? 인간에 의해 파괴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카페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건 어디서 들어본 노래 같고 나는 창가에 기대서 바깥을 본다
다시 데자뷔 현상을 가져왔네요.
곧 창문에 새가 부딪칠 것이다
깨질 것이다
새들은 투명 유리창을 보고는 돌진합니다. 결국 1연에서 말했던 죽은 새는 깨진 컵이라고 했지요. 수미상관법이 기막히게 적용됩니다.
인간이 깨뜨리는 게 비단 컵이나 새의 생태뿐이겠습니까?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의 상승, 핵오염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 하루가 멀다 하고 벌목되는 아마존의 수목들. 그런 것들은 결국에는 '인간의 깨짐'으로 돌아오지 않을까요? 이 시는 생태 시이기도, 환경 시이기도 합니다. 혹은 인간의 이기주의를 경고하는 시이기도 합니다. 유리창에 부딪쳐 죽는 새는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에 의해 주어진 생을 다 살지 못하는 것이지요. '깨진 컵'과 죽은 새를 나란히 병치하는 시인의 발상은 인간에게 준엄한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벽'이 떠오릅니다. 벽을 허물어야 할 텐데요. 걱정입니다.
권영옥 평론가 해설
추성은 시인은 이 시에서 죽은 새와 깨진 컵을 절묘하게 연결해 놓았다. 3연에서 새를 파는 장사꾼이 '새의 발목'을 묶음으로써 야생이 애완으로 변하는 정황을 드러내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
늘을 나는 조류를 '새'라고 지칭한다. 그런데 새를 사는 사람들은 상품화된 애완새를 조류라고 생각하고 사 간다. 이런 새에게 시적 자아는 "뼈를 던지는 것처럼 옥수수 알갱이를 길에 던짐으로써 새가 먹기를 바란다. ‘던진다’는 행위는 자아의 바람이나 기원에 연유한다. 왜냐하면 몽골과 오스만 위구르족들의 장례 풍습인 풍장에서 장례문화를 인유해 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체를 절벽에 던져서,.그 영혼이 자유롭게 우주의 한 점으로 날
아가고, 영원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시적 자아는 이런 발목 묶인 새를 컵, 격자 창문, 백지, 청진기, 천장 등 유사성을 통해 치환 은유로 표현하고 있다. 컵은 애완 새처럼 깨지면 아무렇게나 버려도 되는 것과 유사하고, 격자 창문은 새장과 유사하고, 야생 본연의 습성을 잃은 새는 백지와 유사하며, 청진기의 쿵쾅거리는 소
리는 새의 불안한 심리와 비슷하다. 천장 역시 궁륭을 나는 새의 습성과 유사하다.
카페에서 흐르는 음악 또한 튀르키예 자민족의 혼이 담긴 게 아니라, 각국의 음악이 혼재되어 진화된 음반 상품과 유사하다. 결국 새의 진화, 컵의 진화, 음악의 진화는 인간의 편리를 위해 계속 만들어지
는 애완 상품이다.
컵은 인간의 상품화에 맞게 돌-> 흙->도자기-> 손잡이 등으로 진화되고, 새 역시도 야생-> 애완-> 손잡이 등 인간의 구미에 맞게 형질이 변이될 것이기에 유사하다. 야생성을 잃은 새는 마침내 벽에 부딪혀 조용히 죽게 된다. 컵도 인간에게 쓸모
가 없어지면 버려지게 된다. 음악 역시도 원곡에서 진화를 거듭하며 개사될 것이다. 이에 반해 토마토나 돌은 야생 그대로 내부에 불을 담고 구른다. 그래서 고스란히 제 목소리를 내게 된다.
핵가족화 사회에서 개별 존재는 외롭고 고독하다.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느끼고 싶다. 그때 개별 존재가 애완 새, 애장 컵에 눈 돌리게 된다.
애완은 인간이 야생을 상품화해서 진화시키는 사물과 동식물이다. 애완견, 애완목, 애완 새, 애장 컵, 애창 음악 등이다.
이들은 쓸모로 사용되고 편리하게 애완되다 늙거나 깨지면 결국 버려지게 된다. 이런 죽음은 영혼의 안식과 영원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비는 마음과는 다르다.
애완은 쓸모가 다하면 그 자체로 버려진다. 이때 애완은 반려와 다르다. 애완의 '애'는 뉘앙스가 장난감 같은 희롱의 의미가 들어있다. 그에 반해 반려의 단어는 생명에 대한 외경심과 존중의 의미가 들어있다.
이런 애완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모든 나무, 하늘, 땅이 자신의 길이었고, 집이었다. 그런데 한순간 잡힌 새가 되고,잡힌 컵이 되어 좁은 새장, 좁은 방안에 죽을 때까지 있게 된다. 이들에게 갇힌 세
상은 벽이다. 이 시는 각 연을 통해 시적 자아가 덤덤한 어조로 거리를 말하지만 메시지는 강렬하다. 시적 자아는 조류와 사물을 대하는 현대인의 양가적 감정에 일침을 가한다. 그러면서 대상을 통해 여
러가지 감정에 놓인 자신을 반성적으로 의식한다. 이것이 미적 경험이다. "나는 창가에 기대서 바깥을 본다" 시적 자아는 벽에서 벽을 듣고 벽에 갇혀 있는 과도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해가며 내적으로 평정심을 보여주고 있다. 좀더 깊이 들어가면 떨어져 죽은 새와 깨진 컵의 문제는 자신의 비루한 존재를 드러내는 타자 윤리적 의미를 질문하는 것이고, 동시에 죽은 새의 존재가 인간에게 무엇을 말하며 무엇을 보여주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다른 분석
**"벽 (Wall)" by 추성은: A Labyrinth of Confinement and Ephemeral Freedom**
추성은의 시 "벽"은 죽음, 구속,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모순적 공존을 날카로운 이미지와 은유로 엮어낸다. 새, 컵, 창문, 시체 등 반복되는 소재는 현대 사회의 억압적 구조와 개인의 소외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며, 생명의 취약성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역설한다.
### **1. 죽음과 가짜 자유의 역설**
시는 죽은 새와 부서진 컵으로 시작한다. "죽은 새 / 그 옆에 떨어진 것이 깃털인 줄 알고 잡아본다 / 알고 보면 컵이지"에서 자연(깃털)과 인공물(컵)의 혼동은 인간이 자연을 왜곡해 포장하는 방식을 비판한다. 새 발목을 묶어 파는 행위("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는 자유의 상품화를 은유하며, "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산다"는 연인의 말은 사회적 무관심과 위선을 찌른다.
### **2. 유목민적 죽음과 정착의 갈등**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의 시체 절벽 매장 풍경("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 돌아가라고")은 자연으로의 귀환을 갈망하는 유목민적 정신과 대비된다. 반면 애완새의 현실은 "컵, 격자 창문, 백지 청진기 천장" 같은 냉혹한 인공물에 갇힌 존재다. 이는 정착 사회의 병리적 구조—의료(청진기), 감시(격자), 일상의 무기력(컵)—속에서 소외된 개인의 초상을 암시한다.
### **3. 문화적 정체성의 혼종성**
카페에서 흐르는 "튀르크어와 가까운 음악"은 한국어와 유사하지만 이질적인 언어로, 문화적 정체성의 혼란을 상징한다. 이는 시적 화자의 내적 분열—자연으로의 회귀 욕망과 도시적 삶의 굴레 사이의 긴장—과 맞닿아 있다. "컵 아니면 격자 창문..."이라는 제목의 음악은 예술마저 체제의 은유로 포획당함을 역설한다.
### **4. 진화의 아이러니: 새에서 손잡이 달린 컵으로**
"새의 진화는 컵의 형태와 비슷할 것이다"라는 선은 자연의 인공화를 조롱한다. 날개 대신 손잡이가 달린 새는 상품화된 생명의 비극을 암시하며, "언제든 팔 수 있고 쥘 수도 있게"라는 표현은 자본주의가 생명을 도구로 전락시키는 과정을 비유한다. 새가 토마토나 돌이 아니라 "조용히 죽어갈 것"이라는 결말은 저항 불가능한 폭력 앞의 무기력함을 드러낸다.
### **5. 벽: 파국과 각성의 순간**
종결부의 "창문에 새가 부딪칠 것이다 / 깨질 것이다"는 구속과 충돌의 필연성을 암시한다. 유리창—보이지 않는 벽—은 자유의 환상과 현실의 한계를 동시에 상징한다. 그러나 이 파국은 각성의 계기이기도 하다. "컵은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화자는 허위의식에서 벗어나 진실을 향해 나아가며, 죽음조차 자연의 순환("새 모이")으로 수용하려는 연인의 태도와 대비된다.
### **결론: 부서진 컵의 메아리**
이 시는 생명의 덧없음과 사회적 구조의 폭력을 교차시키며, 모든 파괴는 새로운 인식의 시작임을 시사한다. 부서진 컵과 깃털, 창문 조각들이 남긴 상처는 고통이자 동시에 저항의 흔적이다. 추성은은 벽에 갇힌 자들의 침묵을 깨고, 그 조각들로 자유의 지도를 그리려 한다.
첫댓글 https://m.blog.naver.com/dlagkwnd/223320961458 권영옥 평론가 해설
https://m.cafe.daum.net/somdaripoem/su1r/166?svc=cafeapp
김승하 시인 해설
https://youtu.be/y4231J90pPo?si=trTyGDCud256Lv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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