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
참외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어떤 과일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참외‘라고 답해본 적도 없다. 그렇지만 매해 여름마다, 축축하고 달큰한 음식이 필요할 때마다 내게 가까이 있던 과일은 많은 경우 참외였다. 여름방학 전에 아이들이 텃밭에 심은 참외 모종은, 길게 자라는 풀 사이사이로 덩굴을 뻗으며 텃밭의 한 구획을 두른다. 그리고는 잊혀진다. 이제는 더이상 미룰 수가 없어, 싶을 때쯤 풀을 베러 밭에 들어가면 내가 무심하게 잊은 사이 부지런히 열매를 맺어놓은 참외를 발견하게 된다. 색은 또 왜 노란색인걸까? 어두운 풀숲 사이에 반짝. 맞아, 참외가 있었지! 신나는 마음으로 번쩍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여름 열기에 푹 익어 터져 버린 틈으로 달콤한 속이 흐른다. 거기에 이끌려 찾아온 다른 벌레들이 한발 앞서 맛본 흔적이 보인다. 항상 허탕인 건 아니다. 풀을 베며 발견한 참외, 가지, 토마토 따위를 한 켠에 모아두면 일을 마칠 때쯤에는 한 아름 챙겨 나올 수 있다. 참외를 좋아한다고 말해본 적은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풍요로운 풍경 속 노란빛은 많은 경우 참외의 몫이었다.
지난 주말, 서울에 다녀왔다. 이름도 어여쁜 연희동. 오르막을 따라 골목 골목을 걸어 가면 안산 둘레에 다다른다. 벌써 8월의 마지막 날이지만 아직은 한낮 열기에 금세 땀에 푹 젖고 만다. 언제 도착할까 싶을 때쯤 나타난 빌라, 두나미스하우스. 친구의 새 둥지는 그곳이었다. 방마다 있는 큰 창이 인상 깊은 집이었다. 거실 창문으로는 나무와 풀이 절반, 바로 마주한 빌라 거주자의 생활사가 절반 보인다. 마라샹궈와 고사리파스타, 된장국이 동시에 차려진 국적불명의 저녁 상을 시작으로 대화는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화장품에 덮여 있던 친구의 민낯이 드러나고 허리를 조이던 옷은 느슨한 잠옷으로 갈아 입혀졌다. 새벽 두 시에 가까워져서야 자리에 누웠지만 웃느라 곧바로 잠들지 못했다. ”우리 이제 진짜 자는 거야. 웃지마, 말하지마. 진짜야. 시-작.” 이렇게 말하고도 웃음이 비식비식 삐져나와 한참을 깔깔거리다 잠들었다. 흔히들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 소녀’라는 표현을 하는데, 그 날 하루만은 그 표현에 적합한 소녀가 된듯했다. 하지만 우리는 소녀와는 거리가 먼, 각자 맥주를 6캔씩 마신 30대 초입의 취한 여성이었고, 취한 우리는 그토록 웃었던 이유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마저 그저 웃겼다..)
은은한 숙취를 느끼며 아침을 맞이했다. 친구는 참외 두 알을 꺼내와 식탁에 올렸다. 제철은 두나미스하우스에도 찾아왔다. 참외를 반으로 갈라 씨앗이 자글자글 맺힌 속을 따로 긁어 모으는 손길이 능숙해 보였다. 손바닥만한 작은 채에 속을 모아 씨앗과 과즙을 분리한다. 참외의 진한 단맛이 모여 있는 과육만 남기고 씨앗은 버리기 위한 과정이다. 그러고 보면 수박, 포도는 먹을 때 불편하다는 이유로 씨앗 없이 재배하는 게 유행이고, 아니 유행을 지나 버젓하게 자리잡은 상품이 된 마당이다. 그런 와중에 참외는 이렇게 드글드글한 씨앗을 잔뜩 품고도 개량될 일이 없어 보인다. 내 추측으로는 참외가 누구에게든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기까지 쓰고 궁금해져 검색해보니 유전자 조작으로 만든 씨없는 참외가 유통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씨 없는 수박, 포도가 시중에 도는 속도에 비해 조금 늦었을 뿐이고, 씨 없는 과일 중에서도 마이너한 축에 속해서 내가 소식을 늦게 접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지금까지 내가 수집한 정보로는 ’참외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는 게 정설인데, 혹시 참외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여러분 주변에 있는지 궁금하다.
잠시 다른 이야기로 샜다. 어쨌든 그 많고 많은 씨앗을 분리해내는 친구의 작업은 ‘널 위해 정성들이고 있어‘의 퍼포먼스 같아 보였다. 달큰하고 부드러운 참외 즙을 모아 올리브유, 레몬즙, 허브솔트, 후추 조금, 단맛을 살릴 수 있는 설탕이나 올리고당(친구는 꿀을 선호한다 했으나 비건인 나를 배려해 올리고당을 넣었다)을 섞어 드레싱을 만든다. 그리고 속을 비워낸 남은 참외는 반절 잘린 평평한 면을 바닥으로 향하게 하고 얇게 썰어낸다. 최대한 모양을 유지한 채로 그릇에 옮겨 한 쪽 방향으로 결을 살려 살짝 힘을 줘 눌러 담는다. 섬세한 줄무늬를 가진 노란 콩벌레 같다. 그 위로 만들어둔 드레싱을 듬뿍 뿌리고 블루베리나 허브 딜, 철에 맞는 토핑을 올려 플레이팅 하면 “우와아” 소리가 절로 나오는 훌륭한 참외 샐러드가 완성된다. 우리가 10년 전 ‘진짜 소녀’였던 시절로부터 변한 게 양에 넘치게 술을 마시는 주정뱅이 30대 여성이 됐다는 점 말고도, 참외 하나 근사하고 세련되게 먹을 줄 아는 사람이 됐다는 점도 있다는 게 다행이다 싶었다.
씨가 많아 먹기 불편하고 손이 많이 가는 특징은 ‘정성 들이기’ 퍼포먼스를 가능하게 하는 장점이 되고, 과일 자체의 맛으로는 밋밋한 감이 있다는 특징은 이런 저런 소스와 섞어 먹으며 더 다양한 맛을 포용할 수 있는 장점이 된다. 친구가 내게 내준 아침의 샐러드는 내 안에 뭔가가 메마르고 있는 것 같던 혼탁한 여름에, 과일만이 줄 수 있는 ‘축축하고 달큰한’ 감각을 되찾아 주었다.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과일을 꼽으라면 참외는 아니지만, 올 여름의 보양식이 참외 샐러드였다는 점은 확신한다. 좋은 기억은 나누고 싶어진다. 여름이 다 가버리기 전에 아이들과 수업 시간에 한번 만들어 먹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내년의 나는 이 기억을 떠올리며 여름에 찾아온 손님에게 같은 레시피의 참외 샐러드를 만들어 내겠지. 친구에게 받은 사랑을 다른 이에게 돌려주고 있는 상상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여름을 버틸만한 계절로 만들어주는 비기로 삼아야겠다.
첫댓글 참 예쁘고 다정하고 향긋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