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자: 2025.03.09 주일 낮 예배
말씀: 데전 5:16-18절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제목: 감사하는 신앙생활
선포: 대한예수교장로회 만나교회담임 이덕휴목사
- 오늘의 본문의 가르침은 감사하는 신앙생활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입니다.
사도 바울도 섭리를 믿는 믿음 때문에 어떤 역경 속에서도 기뻐했습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에서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가 차디찬 감옥 속에서 자유가 억압된 삶을 살면서 어떻게 이렇게 기뻐하라고 강하게 권면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궁극적인 승리를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바리새파 율법주의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예수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율법을 벗어버리고 복음의 신발을 신었습니다. 환골탈퇴의 길을 걷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율법을 몽학선생에 비유하고 이제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합니다. 예수쟁이를 잡아 죽이던 바울은 주님의 종이 됩니다. 당시 유대인의 신앙정신을 정먼으로 대치하고 난데없는 예수쟁이 혁명가가 되었으니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는 사도바울 선생의 고생담이 길게 나옵니다. 그는 옥에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여러 번 여행에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근본적으로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송하는 삶을 살았습니다(행 16:25). 그 이유는 고난의 의미를 알았고 하나님의 상급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장차 하나님께서 그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딤후 4:8)
사도바울은 그의, 로마서 8:28절에서 매우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빌4:5절의 관용은 프랑스의 '똘레랑스'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관용이란 어떤 척도의 완전한 수치에서 조금 여유를 주는 것입니다. 100% 완벽함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숫자로만 존재합니다. 일기예보, 압력을 재는 계기, 온도계기, 습도계기 등 모든 저울이나 계량기는 100% 완전 숫치는 없습니다. 오차를+_ 5% 또는 10%를 허용합니다. 이것을 오차범위라고 하지요. 사람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100%완벽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너희의 관용"을 모두에게 알리라는 말을 어떻게 들었습니까? 프랑스에서는 관용은 지성인이 지니는 인격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속한 사람입니다.
관용이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관용(寬容, 영어: toleration) 또는 톨레랑스(프랑스어: tolérance)는 정치, 종교, 도덕, 학문, 사상, 양심 등의 영역에서 의견이 다를 때 논쟁은 하되 물리적 폭력에 호소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이념을 말한다.
또한 유네스코에서는 매년 11월6일을 국제 관용의 날로 정하였습니다.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 Organisation des Nations unies pour l'éducation, la science et la culture(프랑스어) (UNESCO)/가입국은 194개 국입니다.
11월16일 국제 관용의 날 (International Day for Tolerance)(UN)
유엔창설 50주년이자 마하트마 간디 탄생 125주년이었던 1995년을 맞아, 유네스코가 '관용을 위한 국제연합의 해'와 함께 '국제관용의 날'을 제정하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성인 또는 성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많은 지식을 쌓고 하늘의 뜻을 깨우친 사람일까? 예수일까? 저명한 철학자가 성인일까? 많이 알고 많을 것을 가르치는 사람일까?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지식인이라고 해야지 성인이나 최고의 선(善)이아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최고의 선이라는 말은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까???
최고선 또는 최고의 선함은 무엇일까?그 말의 뜻을 의미론적으로 말하자면, 희랍어(그리스어)로 '나누다'는 말에서 최고의 선 또는 좋은 정신 참된 정신이라는 말이 파생됩니다. 인간의 가치를 어디에 두는가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보자. 이하의 글을 우리 모두 읽어보면서 나는 어떤 부류의 삶을 살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최고의 선은
나보다 너를 위하는 것입니다. 너를 위하는 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 행복은 궁극적으로 나의 행복입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너의 행복을 먼저 지켜주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의 정신입니다.
에우다이모니아 (/juːdɪˈmoʊniə/; 고대 그리스어 : εὐδαιμονία [eu̯dai̯moníaː])는 때때로 Eudaemonia, Eudemonia 또는 Eudimonia로 영어화되며 문자 그대로 선한 정신의 상태 또는 상태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단어이며 일반적으로 행복 또는 복지로 번역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에서 eudaimonia는 더 오래된 그리스 전통에서 인간의 최고 선을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포함한 실천철학-신중함의 목표는 이 상태가 실제로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지를 고려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과 그 이후의 헬레니즘 철학의 중심 개념이며, aretē (가장 자주 미덕 또는 탁월성으로 번역 됨) 및 phronesis ( '실용적 또는 윤리적 지혜')라는 용어와 함께 사용됩니다. [1]
ēthikē aretē (인격의 미덕)와 eudaimonia (행복)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논의는 고대 윤리의 핵심 관심사 중 하나이며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주제입니다. 그 결과, 많은 종류의 행복주의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운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운명은 한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인간의 생사고락의 각각의 단계에 피할 수 없는 타고난 삶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의 형제들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인생이 자꾸 꼬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잘 풀리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리 안 풀리는가?' 라고 생각하면서 밥맛을 잃고 힘들어합니다.
2.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생활
우리가 기쁘게 신앙 생활할 수 있는 비결은, 은혜의 세계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은혜의 세계에서 산다는 것은 자신이 심히 부족하지만 예수님의 죄사함의 은혜를 덧입고 하루하루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났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율법적인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법을 지키지 못한 것은 죄인이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부족한 모습이 드러나면 그런 자신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크게 고통합니다. '왜 내가 그렇게 못했을까? 조금만 더 열심히 했더라면 그런 결과는 초래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자학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끊임없이 자학하고 절망하면서 정작 중요한 영적 투쟁은 별로 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은혜로 사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 사람은 자신의 부족한 모습이 드러나면 자학하기 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래 내가 원래 이렇게 실력이 부족하지. 그래 내가 원래 죄에 약한 사람이야.'라고 하면서 솔직히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기초부터 다시 배우고자 애를 씁니다. 이런 사람은 끊임없이 성장하게 되고 심령에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도 일방적인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원래부터 잘나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율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은혜로 사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3. 자기의 책임을 인정하라
인상을 쓰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은 자신의 힘든 형편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핑계를 많이 댄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나를 제대로 안 도와줘서 그렇다. 학교와 학과가 안 좋아서 그렇다. 주위 환경이 나를 받쳐주지 안 해서 그렇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너무 영적 소원이 없다.' 등 별의별 이유를 많이 댑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이나 환경에 대해서 끊임없이 불평과 원망을 쏟아냅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비판적으로 봅니다. 이런 사람 옆에서 하루만 같이 지내다보면 만사가 부정적으로 보이고 세상살이가 피곤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기쁘고 즐겁게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어떠합니까?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 자신에게 많은 책임을 돌립니다. '나의 영적 노력이 부족했구나. 하나님의 나의 믿음을 연단 시키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더욱 겸손하게 만들고 깨어 투쟁하게 하는구나.'하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서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영적인 노력을 해서 문제를 극복해 나가고자 합니다. 이런 사람 옆에 있으면 '나도 영적인 투쟁을 더 해야 되겠구나.'하는 자극이 생기고 즐겁고 힘차게 문제를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결론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 원망하는 마음을 심고 자학하고 만들어서 신앙 생활의 재미를 빼앗아 가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단의 흉계를 간파하고 적극적으로 물리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진정한 프로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기뻐하며 즐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신앙 생활을 기쁘고 즐겁게 함으로, 진정한 영적 프로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님! 이제 우리가 더 이상 힘들게 신앙 생활 하지 않기를 바라오며,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은혜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만나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오늘은 언제나 마치는 말씀(살전5:16-18)이 본문 말씀이되었습니다. 그래도 다시 한번 더 봉독하면서 말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