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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85) 소패왕(小覇王) 손책(孫策)의 등장
기령은 어쩔 수 없이 대군을 그냥 거느리고 면목없이 남양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원술에게 전후 곡절을 낱낱이 고하고 여포의 편지를 내보이며 말했다.
"여포가 머리를 써서 소장과 휴전을 하도록 했습니다. 누구든 천명을 거역하는 자는 자기가 나서서 징벌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원술이 쓴 입 맛을 다시며 화를 낸다.
"이런, 후레자식 같으니, 괘씸하구나! 전에는 군량 이십 만석을 갈취하더니, 이젠 그따위 장난질로 사람을 희롱해? 그놈이 그렇게 나온다면 이제는 내가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나가 서주와 소패를 한꺼번에 치리라."
기령은 자신의 면목없음을 부끄러워하면서도 그것만은 말린다.
"주공! 여포를 섣불리 거드리면 안 되옵니다. 그는 용맹하기만 한 장수인 줄로만 알았는데, 정작 만나 보니 계략도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서주는 공격하기에 어렵고 지키기에는 쉬운 곳이므로 대군이 출병하더라도 쉽게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책사 도저(策士 陶貯)가 앞으로 나서며 말한다.
"주공!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제 생각에는 주공께서 출병하시어 여포를 죽여 버리게 되면 우리에게는 하나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우선 우리가 보낸 군량이 실제로 적군에 의해 쓰일 것이고, 여포와 대적하게 되면 유비는 여포편에 서게 될 것이니, 둘이 손잡고 우리와 대치하게 되면, 역시 조조의 바람대로 되는 것이옵니다."
그러자 원술이,
"나도 아오. 대업을 이루려면 작은 것을 탐 할순 없지. 그러나 여포 그놈이 괘씸해서 참을 수가 없소."
"주공! 그러나 적을 미워해서만은 안 됩니다. 그건 판단력만 흐려질 뿐입나다, 기억하시겠지만 조조는 적이라고 생각되면 그 어느 누구보다 더 친밀감을 표시하고 웃는 낯으로 대한다고 합니다."
"그렇소, 사실 조조란 자는 여포보다 더 무서운 간웅임에는 틀림없지."
"제 생각에는 여포가 괘씸하기는 하나, 군문에서 보면 천하의 활솜씨로 천하의 용맹함을 떨쳤으니, 주공께서 대업을 이루시려면, 이정도 일 쯤은 그냥 참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주공께서는 왜 여포를 적으로만 대하고, 우리의 친밀한 우방으로 둘 생각을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주공, 기회는 아직 많이 있습니다."
책사 도저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시종 하나가 달려오며,
"주공! 여강 태수 육강(陸康)을 치러 갔던 손책(孫策) 장군이 방금 개선하여 뵙기를 청합니다."
하고 아뢴다.
그러자 원술은 반색을 하며,
"오오, 소패왕(小覇王 : 손책의 별명) 손책이 개선을 하였다고? 어서 들라 하여라!"
잠시 후에 몸에는 갑옷을 입고, 허리에 장도(長刀)를 찬 홍안 미소년 손책이 정보(程普), 황개(黃蓋), 한당(韓當), 조무(祖茂) 등 백발이 성성한 노장들을 거느리고 들어와 아뢴다.
"소장 손책이 주공의 명을 받들고 나가 육강을 치고 돌아왔습니다."
원술은 당상에서 벌떡 일어나며 반색을 하며 물었다.
"그래? 여강은 이곳에서 팔 백리나 떨어진 곳인데 어찌 이리 빨리도 여강을 정벌하고 왔는가?"
그러자 손책은,
"정예군 오 천을 거느리고 주야로 말을 달려, 사흘안에 여강에 도착하였고, 육강이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선제공격을 하여 단숨에 그의 수급을 취했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 좌중에 문무 대신들은 원술과 더불어 화들짝 놀라며 반색을 한다.
손책이 할 말을 잊고, 입을 벌리고 좋아하는 원술에게 계속해 아뢴다.
"이제, 여강의 이 군(二 郡), 사 현(四 縣), 다섯 개의 성(五 城)은 모두 주공의 휘하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여강 태수 육강의 수급은 여기 가져왔습니다."
하면서 나무상자를 열어 보이는데 그 속에는 소금에 절인 육강의 수급이 들어있었다.
손책의 말을 들은 원술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단하로 달려 내려와, 몸소 손책의 손을 잡아 당기며 당상으로 이끌었다.
"그대의 용맹은 부친인 손견 장군에 비하여 나으면 낫지,못 하지 않네. 나에게 이렇듯 용맹무쌍한 손랑(孫郞)이 있으니 천하의 여포라도 두렵지 않군, 하하하하!... 여봐라! 연회를 열어라! 개선 장군 손랑을 취하게 하리라!"
이리하여 이십일 세인 소년장군 손책은 당상으로 올라가 술잔을 받는다.
이 소년이야말로 한때에는 천하를 주름잡다가 양양 현산 싸움에서 무참하게 불귀의 객이 되어 버린 강동(江東)의 명장 손견(孫堅)의 맏아들이었다.
아버지 손견이 세상을 떠났을 때 손책은 아직 열여섯 살이었다.
어려서부터 머리가 총명하고 무예에 능통했던 손책은 아버지의 위업을 이어 받아 보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소년의 힘으로 일국을 유지하기에는 세상이 호락하지 않으므로, 그는 마침내 장사(長沙)를 빼앗기고 가족을 곡아(曲阿) 땅으로 옮긴 다음, 객지로 떠돌아 다니다가, 이 년 전에 아버지의 친구인 원술의 휘하에서 식객 노릇을 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던 것이다.
이날 밤, 손책은 술이 취해 숙소로 돌아왔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이셨는데, 나는 아직도 남의 식객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내 운명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손책은 앞날을 생각하면 가슴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날 밤은 마침 달이 무척 밝았다.
손책은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뜰로 나와 달을 우러러보고 있노라니까, 불현듯 설움이 걷잡을 수 없이 복받쳐 올랐다.
그리하여 소리내어 흐느껴 울고 있노라니까, 문득 어디선가 인기척이 나며.
"도련님! 부질없이 울기는 왜 우시오? 전도가 양양한 청년 장군이 우시다니, 말이 되는 소리요?"
하고 가볍게 꾸짖는 사람이 있었다.
손책이 눈물을 훔치며 깜짝 놀라 돌아보니, 아버지 때부터 가신으로 내려오는 주치(朱治)였다.
"오오, 주치였소? 나는 오늘 하루를 헛되이 보낸 것이, 돌아가신 아버지께 부끄럽고 원통해서 울었소. 우리들은 언제나 옛 고향, 장사(長沙)로 찾아가게 되겠소?.. 그래도 그대만은 나의 이 안타까운 심정을 헤아려 주는구려!"
"오오, 제가 도련님의 원대한 뜻을 어찌 모르오리까? 나도 강동의 가신(家臣)이 아니옵니까?"
"나는 이미 이십일 세가 되었으나 아직도 선친의 땅을 찾지 못하고 원술의 그늘에서 식객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사내 대장부로서 이처럼 면목없는 일이 어디 있겠소?"
주치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감격하며,
"도련님께서 그렇듯 큰 뜻이 있다면, 지금 불운에 처해 있는 외숙 오경(外叔 吳璟)을 구한다는 구실로 원술에게서 군사를 빌려 가지고 강동으로 가서 큰일을 도모해 보면 어떻겠소?"
손책은 그 말을 듣자, 불현듯 얼굴에 환희의 빛이 떠올랐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오."
마침 그때 그들의 말을 엿듣고 있던 사나이가 불쑥 나타나며 말한다.
"두 분의 계획은 나도 찬성이오. 만약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면 나도 수하의 정병 백여 명을 거느리고 동참하겠소."
이렇게 두 사람을 놀라게 하면서 나타난 사람은 원술의 모사인 여범(呂範)이었다.
손책은 크게 기뻐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여범은 손책을 경건히 우러러 보면서 말한다.
"강동으로 돌아가 대업을 도모하신다는 데는 진심으로 찬성이오. 그러나 원술이 군사를 순순히 빌려 줄지는 그게 걱정이오."
"내게 생각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어떤 좋은 생각을 가지고 계신데..."
"원술이 평소부터 몹시 탐내는 물건이 내게 있는데, 그것을 담보로 군사를 빌릴 수가 있을 것이오."
손책은 그렇게 말하고 자신있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이 무엇이온데...."
"여범과 주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아스러워하자 손책은,
"내가 선친에게 전국 옥새(傳國 玉璽)를 물려받았는데, 원술은 예전부터 그것을 탐내왔소."
"예엣? 옥새를? 아아, 그러면 전국 옥새를 도련님이 가지고 계셨던가요?"
"그렇소. 선친께서 돌아가신 뒤로 내가 소중히 간직해 두었는데. 원술은 심증은 있었지만 증거가 없어 그동안 나의 눈치를 보면서 전국 옥새의 행방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오."
"아, 인제 알겠습니다. 원술이 도련님을 친자식처럼 가까이 하려는 이유가 거기 있었군요. 그러나 그렇게 소중한 옥새를 원술에게 내주는 것은 생각할 일이 아닐까요?"
"옥새가 아무리 소중하기로, 그 물건에 얽매어 큰 뜻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 한대서야 되겠소? 이제 나의 뜻은 천하를 내 손에 넣는 데 있을 뿐이오."
나이 어린 손책의 기개에 여범과 주치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손책은 조정 대신들과 원술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아뢴다.
"제가 주공의 은총을 받아온 지도 어언 삼 년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은혜를 못 갚으면서 이런 말씀을 여쭙기는 송구하오나, 고향에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저의 외숙 오경께서 양주 자사 유요(揚州 刺使 劉繇)에게 핍박을 받아 몹시 곤경에 빠져 있다 하옵니다.
그리하여 곡아(曲阿)에 남아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도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옵니다. 주공! 주공께서 군사를 빌려 주신다면 곡아로 달려가 가족들을 구하겠습니다. 윤허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일그러진 원술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곡아는 강동에서 멀어 다녀오려면 시일이 꽤 걸릴텐데..게다가 조조와 공손찬이 우리에게 쳐들어 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고 들리는데, 이곳도 머지않아 전쟁을 치루게 될 것이야, 그러니 손책! 자네 없이는 안 되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여기까지 말한 원술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다시 손책을 향하여,
"참, 이렇게 하면 어떤가? 곡아에 사람을 보내, 자네 모친과 가족들을 이곳 남양으로 불러와서 여기서 가족들을 편히 지내게 하면 어떨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손책이 두 손을 읍하고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원술을 바라보며,
"주공! 곡아는 고향이라 어머님께서 떠나길 원치 않으실 테니, 부디 소장을 보내 주십시오."
하고 간청을 하며, 엎드려 머리까지 조아리면서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처한 얼굴의 원술은 손책의 눈길를 피하며 한숨을 내쉰다.
"알았네, 굳이 가야겠다니 빨리 다녀오게, 허나 , 군사를 내주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꺼야. 알다시피 요즘 정국이 일촉즉발의 상황이 아닌가말야."
그 말을 듣자, 손책은 좌우에 시립하여 있는 문무 백관들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그러나 그들중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요청에 동조해 주청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자 손책은 자신이 보자기에 싸서 들고온 물건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주공! 이것은 아버님이 남긴 전국 옥새입니다."
그 순간, 원술은 입을 벌리며 당상에서 벌떡 일어났고, 이어서 만조 백관들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
"이걸 맡아두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손책의 목소리에는 비장함까지 내비치는 것이었다.
곧바로 시종이 총총히 다가와 손책이 받들어 올린 보자기를 소중히 받아, 당상에서 넋을 잃고 쳐다 보는 원술의 탁자 앞에 내려 놓았다.
"아!...."
휘둥그래진 두 눈을 두리번 거리던 원술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 시종이 가져다 바친 전국 옥새가 담긴 보자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윽고 소매를 털고 두 손을 내밀어 보자기를 끌러보기 시작하였다.
당하의 문무 백관들도 숨을 죽이고 원술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드디어 보자기가 벗겨지고 잘 만들어진 목함(木函)의 뚜껑을 원술이 조심스럽게 열었다.
"하아!..."
함 속에 들어있는 황옥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옥새의 실물을 발견한 원술이 경탄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당하의 손책을 내려다 보며,
"과연 전국 옥새로다!"
하고 말하며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옥새를 조심스럽게 집어들고 이모저모를 살펴보며,
"드디어 실물을 보는구나... 손책! 말해 보게 군사를 얼마나 내주면 되겠나?"
원술은 조금전까지 손책에게 군사를 줄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손책으로부터 전국 옥새를 진상받는 순간, 마음이 <싹> 바뀌었다.
손책은 양 손을 읍하며 비장한 어조로 말한다.
"장수는 네 명이면 됩니다! 정보 황개, 한당, 조무. 이렇게 네 장수만 주십시오."
이때까지 원술의 말은 손책을 향하고 있었으나 그의 시선은 온통 전국 옥새에만 있었다.
그러나 이번 대답만은 손책을 쳐다보며 말한다.
"그? 네 사람은 부친 손견의 옛 장수들이 아닌가?"
"주공! 이들은 모두 선친의 장수들이자, 저 손책에게는 숙부님들이기도 합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정보, 황개, 한당, 조무! "
원술이 이들 네 장수를 호명하자, 모두가 백관들 틈을 빠져나와 손책의 옆과 뒤로 도열하며 두 손을 읍하고 함께 대답한다.
"예!"
"모두, 손책을 따라가길 원하는가?"
하고 원술이 물었다. 그러자 바로,
"따라가겠습니다!"
하고 사구동성(四口同聲)으로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그 소리를 듣고, 원술의 두 눈이 동그래지며 네 장수를 번갈이 쳐다보았다.
과연 그들의 결심은 비장해 보였다.
멍한 눈길로 이들을 살펴보던 원술이 결심을 한 듯 말했다.
"하!.... 좋소! 그럼 모두 함께 가시오! 그리고 손책, 내가 군사 삼천과 말 오백 필을 줄테니 곧 다녀오도록 하게. 그리고 먼 원정을 가면서 자네의 지위가 낮아서는 대권을 장악하기가 어려울 테니, 자네를 절충교위 진구장군(折衝敎尉 殄寇將軍)으로 봉한다!"
하고 거침없이 기분 좋은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자 손책을 비롯한 다섯 명의 장수들이 동시에 무릅을 꿇고,오구동성(五口同聲)으로 외친다.
"고맙습니다!"
이 말을 듣고, 원술의 책사 도저의 얼굴은 있는대로 일그려졌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는 손책으로부터 일생 일대의 선물울 받은 원술에게 어떤 말로도 설득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