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암 서원(龜岩書院)
항목 ID GC02206486
한자 龜岩書院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북4길 7-10[구암동 284-19]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정용
[상세정보]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동에 있는 서원.
[개설]
구암 서원에서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었던 정이오(鄭以吾) 부자를 배향하고 있다. 정이오는 자가 수가(粹可), 호가 교은(郊隱)이다. 본관은 진주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조선 태종 때 성균관 대제학, 찬성사 등을 지냈다. 특히 글씨에 뛰어나 고려 명인으로 꼽히며 『교은집(郊隱集)』, 『화약고기(火藥庫記)』 등의 저서를 남겼다. 아들 정분(鄭苯)의 호는 애일당(愛日堂)이고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1416년 문과에 급제하여 단종 때 우의정이 되었다. 1453년 전라도 체찰사로서 계유정난 과정에서 유배되어 광양에서 세상을 떠났다.
[위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북4길 7-10[구암동 284-19]에 위치한다.
[변천]
구암 서원은 1858년 구연사(龜淵祠)로 창건되어 1864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쇄되었다. 현존하는 구연사는 1920년 정이오의 추모재(追慕齋)로 후손들이 다시 건립하였으며, 1968년에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2004년에 서원의 재정비가 이루어져 추모재와 신여당(信如堂)이 새로 지어지는 등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매년 음력 1월 15일에 향사하고 있다.
[형태]
구암 서원은 강당 4칸, 사우 3칸, 추모재 2칸, 유사실(有司室), 관리사, 정문 3칸 등으로 이루어졌다. 강당 전면에는 ‘구암 서원’, 안쪽에는 ‘구암재(龜巖齋)’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동재는 신여당, 서재는 추모재이다. 사우는 구연사이다. 강당을 중심으로 사우는 서쪽에 배치되어 서묘동학의 구조를 이루었으며, 동, 서재는 강당 앞 좌우에 배치되었다.
[현황]
구암 서원은 폐쇄 후 몇 차례 변화를 거쳐 1968년 음력 3월 24일 복원 봉안 이후 매년 음력 3월 말에 향사하다가 1988년 이후에는 3월 22일에 전국 유림들이 모여 정이오와 정분 부자를 향사하고 있다. 현재 구암 서원은 진주 정씨 구암 문중의 재산이다.
[참고문헌]
『경남 교육사』(경상남도 교육 위원회, 1980)
『마산의 문화유산』(마산시, 1997)
『경남의 서원』(창원 대학교 경남학 연구 센터, 선인, 2008)
『마산 시사』(마산 시사 편찬 위원회, 2011)
.........................
진양 정씨
항목 ID GC02200749
한자 晉陽鄭氏
영어의미역 Jinyang Jeong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태성
[정의]
정예를 시조로 하고 정두환과 정도환을 입향조로 하는 창원시 세거 성씨.
[연원]
진양 정씨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 각기 시조를 달리하는 8파[진양 8정]가 있다. 원조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6촌장(村長) 중 자산(觜山) 진지촌(珍支村)의 촌장인 낙랑후(樂浪侯) 지백호(智伯虎)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후대에 진양정씨의 본관·분파가 이루어졌다고 하나 믿을 만한 문헌은 없다. 이른바 8정(鄭)을 편의상 크게 나눠 충장공파(忠莊公派) 정예(鄭藝), 은열공파(殷烈公派) 정자우(鄭子友), 공대공파(恭戴公派) 정장(鄭莊), 우곡공파(隅谷公派) 정헌(鄭櫶) 등 4계통(系統)으로 대별하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진양 정씨는 대체로 고려 때 평장사를 지낸 정예(鄭藝)를 시조로 삼는다. 이후 진양 정씨로 조선 전기에 이름을 날린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와 아들 충장공 정분(鄭苯)을 모신 곳이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동에 있는 구암 서원(龜巖書院)이다.
[입향 경위]
진양 정씨의 창원 입향조는 묵와(黙窩) 정두환(鄭斗煥)과 고창(古傖) 정도환(鄭道煥)이다. 이들은 옛 창원 지역인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동으로 이거하였고, 이후 창원시 의창구 북면 명촌과 동읍 봉곡 등에도 진양정씨가 이거하였다. 오진영(吳震泳)이 쓴 『구암재기(龜巖齋記)』에는 구암재의 연원에 대하여 “구암재는 교은 문정공 정이오와 애일당(愛日堂) 충장공 정분 부자의 서원이 있던 곳이다. 후손이 재실을 지어 서원의 이름을 짓고 추모하고 강학하는 곳으로 삼았다. ……[중략]…… 대개 정공 부자는 태조 개국에 찬성이었고 문종 때 고명대신(顧命大臣)이었다. ……[중략]…… 문정공은 일찍이 창원의 월영대에 유람하며 감상하였고, 충장공도 삼남(三南) 지역을 두루 유람하였다. 구암은 월영대의 상류이다. 창원은 삼남 중의 한 고을이다. 후손이 대대로 구암에 두루 살아 이곳에 서원을 짓고 정자를 지어 두 공의 영령을 모시고 돌보며 제사를 받드는 예를 행하였다.”라고 하여 창원으로 입향한 경위와 그 내력을 기록하였다.
[현황]
진양 정씨는 창원시 의창구 동읍 봉곡리에 20여 호 정도 살고 있으며 의창구 북면 명촌리에도 20여 호가 기거하고 있다.
[참고문헌]
김종하, 『창원 군지』(국제 신보 출판사, 1962)
.......................
정이오
| GC02207165 |
| 鄭以吾 |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 인물/문무 관인 |
| 경상남도 창원시 |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 남재우 |
[상세정보]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에 있는 구암 서원에서 향사하는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 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우곡(愚谷)이다. 아버지는 정신중(鄭臣重)이고, 아들은 정분(鄭苯)이다.
[활동 사항]
정이오(鄭以吾)[1347~1434]는 문과에 급제하여 1376년에 예문관 검열이 되고, 공조와 예조의 정랑, 전교부령 등을 역임하였다. 1394년(태조 3) 지선주사(知善州事)가 되었고, 이첨(李詹)·조용(趙庸) 등과 함께 군왕의 정치에 도움이 될 만한 경사(經史)를 간추려 올리고, 곧 봉상시 소경(奉常寺少卿)이 되었다. 1398년 조준(趙浚)·하륜(河崙) 등과 함께 『사서 절요(四書節要)』를 찬진(撰進)하였다.
1400년(정종 2) 성균관 악정(成均館樂正)이 되었으며, 병조 의랑(兵曹議郎), 예문관 직제학, 예문관 사성을 역임하였다. 1403년(태종 3) 대사성으로 승진하였고, 1405년 3월에 김과(金科)와 함께 생원시를 관장하였다. 1409년 병서 습독 제조(兵書習讀提調)를 거쳐 동지춘추관사를 겸임, 『태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13년 『태조실록』 편찬에 대한 노고로 예문관 대제학이 되면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였다. 1418년 72세로 치사(致仕)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태실 증고사(胎室證考使)가 되어 진주 각처를 다녔고, 속현인 곤명(昆明)을 태실소로 정하게 하였다. 노성(老成)한 덕이 있다 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젊어서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의 문인과 교유하였고 늙어서는 성석린(成石璘)·이행(李行)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정이오는 시(詩)에 재능이 뛰어났다 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조선 태종의 명으로 『태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413년에 예문관 대제학과 지공거를 겸했으며, 세종 때에 성균관 대제학과 의정부 찬성사에 이르렀다.
[학문과 저술]
저술로는 『교은집』, 『화약고기(火藥庫記)』 등이 있다.
[묘소]
묘는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동에 있으며, 1997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동에 있는 구암 서원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
정** 저는 진주정씨 충장공파 33세 로서 이분의 직계 19代孫 입니다. 충장공 할하버지 字는 자병이 아니라 자유 이신데 한문으로 쓸때 유 자가 검색이 어려운 점이 있으나 직계 후손이 1790년 발행한 충장공사적 이나 진주정씨 충효록에도 子는 자유 입니다.
답변
디지털창원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적하신 사항은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