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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일 생명 말씀(2024. 9.15)
말씀/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함께 흔들고 넘치게 하여 사람들이 너희 품에 안겨 주리라. 너희가 잴 때 쓰는 바로 그 척도로 너희가 다시 평가를 받으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축복되 고 행복한 신앙생활, 성숙한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무엇인지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신앙 초기에
저는 믿음으로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쟁취하고 침노하는 자가 영적 축복과 은혜를 누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작정 기도를 하고, 강청하는 기도를 하고, 찾고 구하고 두드리며 도전하는 믿음을 배우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에는 많은 문제가 따랐고, 설령 많은 것을 얻었을지라도 탐욕과 교만이 함께 싹트고, 이기심이 자리 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열심히 희생적 삶을 살아왔으니 당연 대접을 잘 받아야 한다고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저는 양들이나 동역자들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꾸 요구하는 심정이 들고, 그럴수록 관계성은 멀어지고, 불신이 싹트고, 결국 1:1로 양육하고 제자양성을 하고 믿음의 결혼을 시킨 분들이 흩어자는 것을 내 앞에서 지켜보아야 만했습니다. 자식들도 흩어지고, 그렇게 의지하던 아내마저도 곁을 떠나야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어서야 저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고, 나의 신앙의 문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무엇인가 채우고, 세우려고만 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 때서야 저는 성숙한 신앙의 본질을 생각하게 되었고, 흐르는 샘이 맑은 것처럼 주는 신앙’의 비밀을 조금씩 생각하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심 없이 주는연습을 하였습니다. 무안에 질 좋은 양파나 고구마를 주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신앙의 체질을 받는데서 주는 것으로 바꾸기 시작하였습니다. 대접받고자 하는데서 대접하는 신앙으로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이 바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는 것이 정말 기쁘과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 7장 12)
그러고 보니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의 실체요 세상에 오셨지만 우리를 섬겨주셨을 뿐 아니라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살과 피 생명까지 다 내어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려하지 않고 섬기셨습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섬김이 무엇입니까? 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주는 것!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주는 사랑입니다. “그렇구나 성숙한 신앙의 본질 이구나. 받는 것도 축복 이지만 주는 것은 더 큰 축복이요 은혜이구나.”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함께 흔들고 넘치게 하여 사람들이 너희 품에 안겨 주리라. 너희가 잴 때 쓰는 바로 그 척도로 너희가 다시 평가를 받으리라, 하시니라(눅 6:38) .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줄 것인가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 찾아보면 있습니다. 무안의 싼 양파, 고구마. 이번에도 호박 고구마가 맛있다고 하길레 무안 마트와 택배사를 들락날락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성의 글을 묵상해서 나누는 일, 지금은 새벽 4시 30분부터 쿠티 나눔을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없어서 손 벌리는데서 작아도 손을 펴서 주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저는 개혁기 전국cmi를 다니며 영성 특강을 했고, 책을 출판하여 묵상의 글을 나누고, 미국 독일, 베를린, 호주까지 가서 특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계에 많은 분들이 저를 만나려고 무안을 다녀갔습니다. 오시면 재중집사님과 목포으 별비로 정성것 섬겨드렸습니다. 호주의 한 선교사님은 이야기를 듣고 “저도 목사님처럼 사람들이 찾아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줄 것이 있어야 합니다. 줄 것이 있으면 옵니다” 그게 진리입니다. 돈만이 아니라 편안한 마음, 생명 에너지, 은혜의 말씀, 미소 등. 하나라도 왜 없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것 없어도 기분 좋게 하는 나 자신을 주어 함게 하면 됩니다. 이런 것도 없다면 배우면 됩니다. 미소짓는 것도 배워야 하고, 저절로는 없습니다. <잠들기 전에 읽는 쇼펜하우워>는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을 배우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주기 위해서 공부하고, 주기 위해서 일하고, 주기 위해서 독서를 하고, 주기 위해서 은혜를 받는 목표를 세워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하신 훈련제목 중요한 키포인트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한번은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31-44).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아주 한적한 장소로 갔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많은 사람들이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와서 기다렸습니다. 도저히 쉴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쉬라고 하셨지만 목자 없는 양무리가 같은 큰 무리를 보시자 불쌍한 마음이 들어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날도 저물고 식사시간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의견을 이야기 했습니다.“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옛날에 힘들게 살던 시절에 식사 때가 되어 사람이 찾아오면 참 곤란했습니다. 밥 얻어 먹으려는 사람은 뭉그적 거리며 시간을 끌고, 밥 해야 할 사람은 사람이 갈 때를 기다리며 밥할 생각을 안 하고,,, 답답한 노릇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답답했던 모양입니다. 식사시간이 되었어도 사람들은 갈 생각을 안 하고, 예수님은 밥 때를 넘기실 것 같고...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생각지 못한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희가 먹을 것을 주라” 아니 저희 가 무슨 돈이 있습니까? 있어야 줄 것 아닙니까? 어떻게 이들에게 먹을 주란 말 입니까? 사실 예수님도 다 아셨지만 믿음을 테스트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어린 아이같은 적은 신앙을 성숙한 신앙으로 끌어올려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빌립은 200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하니 불가능하다는 답을 내렸고, 안드레는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는 오병이어를 찾아 주님께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본인도 그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싶었지만 그 작은 것을 드렸을 때 주님이 어떻게 축복하셨는가를 체험하게 되었고, 당연 믿음이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 주님이 하시면 되는 것이구나. “내가 먹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먹이시는 것이구나”. 수동적 받는 신앙이 적극적으로 주는 신앙으로 전환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안드레가 가지고 나온 오병이어를 축사 하사 그 빈들에서 5000명을 먹이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 것도 풍족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거두니 12바구니 가득 찼습니다.
우리는 대게 많이 있어야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이 있어야 기적이 일어날 것같이 생각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있으면 작은 것이라도 주게 되고, 작은 것이라고 줄 때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복역사의 시작이고, 복의 지삭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함께 흔들고 넘치게 하여 사람들이 너희 품에 안겨 주리라는 말씀이 오병이어를 주께 드렸을 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성숙한 신앙에 이르고 싶고, 풍성히 누리는 은혜, 기적적인 역사를 체험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주는 신앙의 비밀을 터득해야 합니다. 받는 신앙에서 주는 신앙은 곧 성숙한 신앙으로 넘어가는 과정입니다. 깨닫고 체험하고 아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줄 때 당장에는 줄어들기에 손해 같지만 사실은 손해가 아니라 미래에 투자 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11:1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양식을 물위에 던지라. 대개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아라비아 박바드의 어느 왕에게 왕자가 있었습니다.여덟살쯤 됐을 때 왕자는 강에 나갔다가 그만 물에 떠내려가서 행방불명이 됐습니다.왕은 군대까지 동원해서 찾았으나 헛수고였습니다.왕은 왕자의 시체라도 찾아주는 사람에게는 후한 상을 주겠노라는 광고까지 했습니다.며칠 후 멀리 떨어진 강의 바위에서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왕자를 찾아냈습니다.왕은 너무 기뻐서 어쩔줄을 몰라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았는지 물었습니다.그러자 왕자는 바위에 걸려 목숨을 구했으며 매일 정해진 시간에 어김없이 물에 떠내려오는 봉지가 있었고 그 속에는 빵이 들어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왕은 수소문해서 그 빵을 내려보낸 사람을 찾아냈습니다.그 사람은 평민인 모하메트 벤하산 이었다. 왕은 벤하산에게 물었습니다.“자네는 어떤 연유로 그런 선한 일을 했는가” 그러자 벤하산은 “속담에 ‘양식을 물 위에 던지라,그리하면 몇 날 후엔 찾으리라’는 말이 있기에 한번 시험해본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속담은 전도서 말씀인데 단지 시험해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으로 왕자가 살아난 것입니다. 왕이 너무 기뻐서『너 때문에 우리 귀한 아들이 살았다』고 하여 많은 상금을 주고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벼슬을 주었습니다. 빵 몇 봉지로 생명을 살리고, 왕의 상급을 받고 벼슬도 받았다면 엄청난 이득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이렇게 줌으로서 살아난 왕자도 행복하고, 임금도 행복하고, 그것을 보는 아라비아 박바드도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주는 사람들의 특징은 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해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행복하기 원하십니까? 무엇인가 주는 자가 되면 됩니다. 빚내서까지 투자할 필요는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주는 습관을 드리면 됨니다.
지난 주 명남 집사님이 추석 선물로 본인이 받은 큼지막한 전복을 8마리를 가져왔습니다. 저는 요리하기가 그래서 천 권사님께 살아있을 때 남편과 저녁에 맛있게 드시라고 전해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네 마리를 드시고 네 마리는 전복죽을 쑤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월요일 이 되어 우즈알이 내일이면 떠나다고 생각하지 섭섭한 마음이들어 다락에 여기저기서 받은 선물을 챙겨서 주고 마지막 저녁 식사라도 하고 자 하였습니다. 그 때 마침 권사님 전화과 왔습니다. 전복죽을 쑤었는데 따끈할 때 드시라고 남편과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마침 잘 됐다 싶어 우주알과 따끈한 전복죽으로 한국의 마지막 만찬을 맛있게 하였습니다. 전복죽은 처음이라고 하는데 맛있게 두 그릇을 비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우주알이 네팔에 돌아가 교수가 되고 젊은 지성인들을 목음으로 섬길 수 있는 복의 근원 아브라함같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죽이라도 먹여보내니 마음이 행복하였습니다. 거대한 강물도 그 원천을 보면 작은 샘에서 시작됩니다. 우주교회 역사 역시 작은 사랑을 베풀고 나누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33세에 백만장자가 된 록펠러는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고,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55세에 그는 불치병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실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도다" 행20:35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습니다. 선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가운데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조금 후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데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병원측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 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입원 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고 누가 지불 했는지 모르게 했습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룩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나중에는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 때 그는 나눔의 삶을 작정합니다. 그와 동시에 신기하게 그의 병도 사라졌습니다. 이후로 그는 98세까지 살며 선한 일에 힘썼습니다. 나중에 그는 회고합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된 것입니다. 록펠러라는 유명한 미국의 대재벌이 있습니다. 그의 가문에서 부통령이 나왔고, 지금도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가문 중에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어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과거 현재 미래 시제를 연습시키기 위해서 시험문제를 내었습니다. “나는 준다의 미래형이 무엇일까요?” 어느 학생이 이런 답안을 제출 했습니다. “나는 받는다” 문법적으로는 틀리지만 삶의 법칙으로는 기가 막힌 답 이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주는 것만이 내것이다. 주는 것만이 남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못 받으면 하늘에서 받게 된다고 하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주는 한국의 추석 명절입니다. 명절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아 이것도 전반기 후반기 잠시 멈춰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또 그동안 괌심 갖지 못한 가족들 지인들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인든지 돌아보려면 시간과 물질이 필요하고 부담도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한 무엇인가 작은 것이라도 베풀고 섬기고 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모처럼 가족들과의 시간에 무엇인가 작은 것이라도 마음을 다해 섬기고 베풀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시기를 기도 합니다. 이번에 저도 친가 처갓집에 맛있는 호박고구마 8상자를 보냈는데 너무맜있어서 먹다보니 거의 다 먹어가고 있다고 즐거운 평을 보내는 것을 들으니 마음이 흐뭇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주는 것이 복입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들도 그렇고 감사하는 마음이던 작은 물건이던, 음식이던, 글이던 음악이던 내가 줄 수 있는 것들을 주는 것이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그게 성숙한 믿음으로 가는 길이며 행복이며 미래의 보장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어려운 북한도 주적으로만 여기지 말고 부자 형으로서 주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저도 우리 교회도 매달 북한 고구마 돕기 5만원씩 10만원 후원을 하고 있습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줄 때 엄청난 시너지 효과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나는 준다의 미래형’은 ‘나는 받는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