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强盜) 일본의 통치의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약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 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 2000만 민중은 일치하여 폭력 파괴의 길을 매진해야 하리라.”
(58)
최남선은 1928년 10월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으로 임명되었고, 12월에는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었다. 한국 최고의 단군 연구가이자 조선학의 제창자인 최남선이 식민사학의 총본산으로 들어갔으니 논란이 없을 리 만무했다. 정인보(1893~?)는 “최남선이는 죽었다”며 조문(弔文)을 썼으며, 일부 사람들은 종로의 명월관에 모여 굴건(屈巾), 제복(祭服) 차림으로 제상(祭床)을 차려놓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최남선 장례식을 지냈다. 최남선은 이후 일본에 가서 조선인 대학생의 학병을 권유하는가 하면 중추원 참의, 만주 건국대 교수, 만주 <만선일보> 고문 직책을 맡는 등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벌였다.
(77)
“공식적인 서울대학교사는 개교를 1946년으로 잡고 있지만 한편으로, <서울대학교 의과대락사>, <서울법대백년사>에서 볼 수 있듯이 경성제국대학을 그 뿌리로 간주하는 이중적 인식의 대학사를 가지고 있다. 즉, 국립 서울대학교의 설립 주체는 명백히 대한민국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법학부와 의학부는 개별적인 단과대학사를 통해 경성제국대학을 그 모체로 간주하고 동문의 범위를 경성제국대학 출신자에게까지 확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립 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스스로의 대학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고찰을 가지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서울대학교가 그동안 이루어낸 많은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대학 정체성의 반성 부재에서 비롯된 식민지적 엘리트 의식은 여전히 왜곡된 형태로 남아 서울대학교를 중심축으로 하는 현재의 대학교육 체제와 문화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40-141)
<개벽> 1926년 6월호 발표된 이상화(1901~1943)의 시(詩)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정끝별은 “이 시의 매력은 굳세고 비장한 의지와 어우러진 섬세한 감각에 있다. 가르마 같은 논길, 입술을 다문 하늘과 들, 삼단 같은 머리를 감은 보리밭, 살진 젖가슴 같은 흙 등 빼앗긴 들을 온통 사랑스런 여성의 몸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니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 들(판)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관능적인 연애시의 옷을 입은 지극한 애국애족의 저항시다”고 평가했다.
(158-159)
김려실은 나운규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걸 지적하면서, 이런 의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가 <아리랑>을 통해 정말 관객에게 호소하고 싶었던 것은 ‘동포여, 저항을 계속하라’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검열 때문에 그 뜻을 직접적으로 영화에 표현할 수는 없었고, 그래서 <아리랑>의 영웅 영진은 정신 이상자로 설정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역설적이게도 <아리랑>은 저항은 뜻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221)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거의 외우다시피 했던 민태원(1894~1935)의 <청춘예찬>이다. 삶이 고달픈데도 ‘청춘’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하는 의아심을 갖고 그 내용을 음미했던 학생들도 많았으리라.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따뜻한 봄바람이다. 풀밭에 속잎 나고, 가지에 싹이 트고, 꽃 피고 새우는 봄날의 천지는 얼마나 기쁘며, 얼마나 아름다우냐? 이것을 얼음 속에서 불러내는 것이 따뜻한 봄바람이다. 인생에 따뜻한 봄바람을 불어 보내는 것은 청춘의 끓는 피다. 청춘의 피는 뜨거운지라, 인간의 동산에는 사랑의 풀이 돋고, 이상의 꽃이 피고, 희망의 놀이 뜨고, 열락(悅樂, 기뻐하고 즐거워함)의 새가 운다/”
(229-231)
강점기 노동파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건 1919년 1월에서 4월까지 벌어진 원산총파업이다. 이는 그 규모와 지속성, 그리고 강인성과 투쟁성이란 점에서 식민지 시기 한국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분수령을 이루는 중요한 사건이다. 원산총파업은 원산항에서 하물의 하역, 운반에 종사하는 부두노동자를 주축으로 조직된 원산노동연합회에 의해 지도되었는데, 1921년 설립된 원산노동회를 원산노동연합회의 전신으로 볼 수 있다. 경철과 군대를 동원한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90여 일이나 지속된 원산총파업은 3.1운동, 광주학생운동과 함께 일제하 대표적 민족해방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286-287)
1927년부터는 사학의 명문 연희전문과 보성전문의 맞대결이 연보전(훗날의 연고전)이 세인의 관심을 끌었으며 이후 정기전을 갖게 되었다. 1927년 9월 상하이에서 열린 제8회 극동올림픽대회에서 필리핀을 누르고 우승한 일본 와세다대학 축구 팀이 경성에 들러 17일부터 19일까지 3차전을 갖기로 했다. 첫 경기 상대는 연희전문이었는데, 와세다대학 팀이 0대 4로 대패하고 말았다. 크게 놀란 와세다대학 팀은 남은 경기 일정을 취소하고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나고 말았다. 박경호, 김덕기는 “이 같은 소식을 접한 국민은 잠시나마 피지배민족으로서의 설움을 잊을 수 있었다”며 “와세다 팀을 완전히 제압한 사실에 대해 국민들은 극동올림픽 쟁패전은 ‘우리의 승리’라고 외치고 승리감을 만끽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