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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담에서 4월의 맞이하여 준비한 전시는 최인호작가의 < 꿈꾸는 식물 >이다. <꿈꾸는 식물>이라 함은 동물에 대척점에 있는 식물로써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잡아먹어야 하는 습성을 가진 동물과는 달리 주어진 환경에 어쩔 수 없이 적응해 나가고 있은 사회적으로 감정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식물로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대부분이 사람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떤 순간에서는 자신의 토양 위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유년기 경험 속에서 만났던 사람들 마을에서 미친X 소리를 들으면서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니던 누이의 모습에서 때로는 갑자기 아이를 잉태하고 나타난 그녀에게, 양성애를 가진 동성애자들의 모습들과 같이 존재하지만 존재감을 부여하려고는 안 하는 그런 인물들을 담담하게 화면에 담고 있다. <빨간 벽>이란 작품에선 방안에 한 켠의 붉은색 벽에 기대어 서있는 남자, 실내 바닥에서 간신히 민들레가 싹을 띄우고 있고, 그 나머지 벽에는 허공처럼 구름이 흘러가고 있다. 이는 실존에 대한 상황들을 작가가 현 상황을 그려냄과 동시에 미래를 향한 희망의 씨앗을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최인호는 세종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였고 프랑스에서 파리국립장식미술학교에서 유학한 후 10여 년간 프랑스에서 작업 활동 후 지금은 한국에서 작업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신작 15여 점이 출품될 예정이다.
실존을 추적하는 언어체계, 또는
‘덜 그리기’로 포착하는 삶의 우수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미술평론)
실존적 가중치의 미학
최인호의 세계는 대체로 휑한 구도가 만들어내는 빈 공간들과 그것들에 동반되는 건조한 대기로 대변될 수 있다. 작은 돌기들을 포함하는 조심스럽게 거친 마티에르와 지극히 낮게 조율된 채도에 의해 메마름은 더 구체적인 것이 된다.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하늘이나 청명한 대기는 최인호의 세계가 수용하기 어려운 가치의 대변자들임을 분명히 하자. 그러한 것들은 결코 실존적 삶의 제대로 된 묘사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는 잿빛이거나 황사 낀 듯 뿌연 대기와 그 층들을 뚫고 멀리까지 나가지 못하는 제한된 시계가 오히려 미덕이다. 가까운 것들의 윤곽마저 희미한 것으로 만드는 제한된 시계가 이 세계의 상황들을 훨씬 더 실존적인 뉘앙스를 띤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물과 인물들에 ‘실존적 가중치’를 부여하는 최인호의 회화적 기제이다. 예컨대 핑크색 안료가 만들어내는 붉은 노을조차 여기선 서정성 보다는 실존적 텍스트로서 작용한다. 구름은 그것을 묘사하는 색채나 톤보다 더 무거운 것이 된다. 황토색의 대지는 한층 더 푸석한 것이 되고, 가뜩이나 듬성듬성하고 앙상한 나무들은 더더욱 탐스러운 열매나 풍성한 이파리들과 관련이 없는 것이 된다. 최인호의 어린왕자는 생텍쥐페리의 주인공보다 훨씬 노쇠하고 지쳐 보인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노을이건, 구름이건, 나무건-은 실존적으로 재해석되고 재구성된다.
시각적 효과, 회화론적 고려, 전위주의 미학의 노선들은 여기서 하등 의미가 없다. 그것들이 삶을 통찰하거나 관조하는데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자유거나 해방이라면, 끝없이 부조리만을 양산해낼 뿐인 실존을 포기한 대가로 얻은 위선적이고 게으른 자유나 해방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최인호는 예술의 트랜디한 흐름에서 관심을 거둬들인다. 덧칠한 형식주의의 유산들, 그럴싸한 탁상의 사변에 더는 미련을 가질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소박하게 자신의 자리, 자신의 실존을 마주하는 자리로 돌아온다. 형상들의 윤곽을 희미하게 하고, 덜 그리고, 덜 칠함으로써, 오히려 더 넓은 문학적 뉘앙스를 포용해내는 자신의 노선을 재확인한다.
실존의 가중치가 최인호의 깡마른 인물들과 그들의 정적인 동작이 조율해내는 함축적 내러티브에 주요하게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노란 커튼 뒤의 중년 남성. 황사가 짙게 깔린 황토빛 벌판 저 멀리 걸어가는 사내나 목도리를 두른 채 <조기 한 손>을 들고 돌아오는 남자, 나비넥타이, 상고나 단발진 머리에서 그들이 지나왔던 시간들의 체취가 묻어나는, 그들은 하나같이 야위고 마른데다 자신들의 삶에서조차 어설프게 겉돌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이정표도 없는데다 자주 지나치게 구불거리기까지 하는 도상에 서 있곤 한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가난하며 최소한의 실존을 영위하는, 아마도 장욱진, 박수근의 세계에서 보아온 듯, 친숙한 인물들이다.
최소의 실존에 비로소 부응하는 회화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궁지로 몰았던 건 어른들이다. 인간은, 특히 어른 인간들은 자주 자신들의 미천한 경험에 전 존재를 의탁한 채, 자연의 미물들조차 쉽사리 알아차리는 만고의 진실을 부정할 만큼 어리석다. 어린 왕자는 그런 어른의 세계에 소속될 수 없는 인간형이다. 어린왕자는 자신이 아직 배울 것이 많은 단계에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며, 어른들의 담론이 아니라 붉은여우에게 배울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인은 본성적으로 어린아이의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다. 화가는 왜 아니겠는가? 경험의 지식을 넘어서는 길, 그 너머의 차원을 그리워하는 방식을 갈고 닦으며, 이제껏 알아 온 세계가 아니라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세계를 더 따르는 이들이다. 이런 운명적인 지위로 인해 그들은 현재의 권력을 탐하고, 기성화된 지식만을 신뢰하는 지배자들의 범주에 소속될 수 없으며, 다만 소외자요 약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지배자, 주류지식, 유행하는 것들이 그것들 고유의 무지와 무감각에 의해 스스로를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도록 만들뿐이라는 사실을 알 턱이 없다. 시인과 화가는 이러한 세계에서 가능한 자유와 해방이 ‘최소한의 삶’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영위될 수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린다. 그렇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사실 말이다. <조기한 손>을 들고 귀가하는 최인호의 남자가 아마도 그들에 혈통적으로 가까운 친족(親族)일 개연성이 크다. 빈자의 밥상을 환기시키는 손에 들린 조기한 손이야말로 최소의 실존을 지시하는 표상이다.
서사뿐 아니라 형식에서도 최인호의 세계는 ‘최소’의 규범을 위반하지 않는다. 그의 서사가 가진 것이 없는 빈자의 리얼리티를 담아내는 동안, 절제의 미학이 그에 상응하는 마땅한 언어의 출처를 자처한다. 재미나 역설을 목적하는 패러디가 아니라면, 조기 한 손, 가벼운 주머니, 앙상한 인물을 시각화하기 위해 강렬한 원색과 풍요한 색감, 극적인 구도와 집요한 묘사의 동원을 생각해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최인호의 회화적 언어가 충분의 수준에 모자라는 듯한 선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 이유다.
최인호는 분명히 덜 그림으로써만 가능한 어떤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그의 색은 화려한 묘사를 위해 화학적으로 제조된 안료의 극적인 효과와 무관하다. 최인호는 안료로서 오히려 울타리 밖의 것들, 일테면 흙이나 연탄재를 더 선호한다. 안료를 개는 순간부터 모더니즘 회화의 신화는 기꺼이 버려진다. 붓질에는 아쉬움이나 망설임의 흔적이 완연하다. 마티에르는 오히려 소극적이다. (앵포르멜의 오트파트를 생각해보라) 이 노선은 인물들에서 묘사적인 성격의 동작을 덜어낼 때 비로소 명료해진다. 인물들의 정적인 자세, 동작의 결여는 신체적인 활기와 근육적 활력의 결핍과 결부된다. 부조리한 실존으로 얼룩진 빈자의 리얼리티를 성토하기에 그들의 표정은 지나치게 유약하고, 감정은 느슨하게 이완되어 있다.
처음부터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부조리한 환경에 맞서 싸울 의사가 없다. 그들은 오히려 전적으로 세상의 희생자가 되기를 선택한 존재에 가까워 보인다. 역설인 것은 바로 이 동작의 결핍, 낮은 채도, 이완된 뉘앙스가 저항의 고유한 무기체계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실존의 낙오자가 됨으로써, 오히려 가장 탁월한 실존의 보고자가 되는 역설이다. 덜 그림으로써 오히려 회화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역설, 덜 그림으로써 더 많은 의미의 통로가 되는 역설, 최소의 서사로 오히려 그 폭을 더욱 너르게 하는 역설… 일테면 최인호의 인물들은 희생자가 됨으로써 장 보드리야르가 그렇게 언급했던 '진정한 말일성도의 교도들‘, 또는 ‘묵시록의 주역’들 같아 보이는 매우 현대화된 종족들에 저항하는 것이다. 최인호의 인물들은 묵시록적이 아니라, 실존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야위고 무력하지만, 자신들의 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고, 천천히 걷고, 덜 먹고 덜 소비하면서 잘 버티고 있다. 보드리야르가 묵시록의 주인공들, ‘자신을 멈추는 모든 장치가 망가져버린 것과도 같은, 점점 더 살찌는 비만한 사람’ 과 대척점에 위치한 사람들이다.
최인호의 회화는 회화의 그리기에 순응하지 않는다. 그 언어적 가능성, 치밀한 묘사, 구조적인 구성, 색과 마티에르와 톤의 기름진 조절력 같은, 유서깊은 언어학적 유산을 기꺼이 내려놓는다. 그리기 자체, 곧 언어가 주는 고유한 기름짐을 결핍시킴으로써만, 회화성의 모더니즘적인 전통의 진폭을 최소화함으로써만, 그 언어적 불구성, 회화적 미완료를 통해서만, 그가 매일의 삶을 사는 실존의 궤적을 정확하게 추적해내는 새로운 언어체계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기에 덜 의존하는 그리기, 그리기를 넘어서는 실존적 그리기, 그것이 최인호의 회화가 감수하는 위험인 동시에 가능성인 셈이다.
최인호 (Choi, In Ho) 崔仁浩
1960 서울생
1984 세종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86-1991 파리국립장식미술학교(E.N.S.A.D) 수료
개인전
2011 <바라본다> 써니갤러리, 헤이리
<숨어있기 좋은 방 2> 부뚜막 고양이, 김해
2009 <첫꿈> 아트사이드 갤러리, 서울
<숨어 있기 좋은 방> 수가화랑, 부산
2008 <바람이 잔다> 동백아트센터, 부산
2000 대한스위스화학사옥, 부산
1999 화인화랑, 서울
1997 세브르 화랑, 파리/ 이씨 레 물리노 전시관, 파리/ 대구 문화예술 회관, 대구
단체전
2012 <Portrait> 갤러리 메쉬, 서울
<할아텍 왜出전> 골목갤러리, 이태원
<4人4人전> 포네티브 스페이스, 헤이리
<할아텍 정기전> 소밥갤러리, 양평
<헐5전> 소밥갤러리, 양평
<시차전> 빠레 드 서울, 서울
<SOIF> 코엑스, 서울
2011 <미술섬 오픈 스튜디오>, 파주
<충동전> 보안여관, 서울
<양평 구립미술관 개관전>, 양평
<철암그리기전>, 철암
<소밥 개관 2주년전>, 양평
<AMI미술관 개관전>, 당진
<시차전> 빨레 드 서울, 서울
2010 <소밥 아트 페어> 소머리국밥 갤러리, 양평
<KIAF> 수가화랑, 서울
<4인전> 수가화랑, 부산
2009 <인간의거울> 킴스 아트필르 미술관, 부산
<꿈을 선물하다> 조부경 갤러리, 부산
2008 <시차전> 동덕아트, 서울
2007 <동질의 다양성> 시민갤러리, 부산
<시차전> 영갤러리, 서울
2005 <또다른풍경> 파주출판단지
2000 <미디어시티 서울2000> 지하철 프로젝트, 서울
<다섯제안전> 시공화랑, 대구
1998 <그림보다 액자가 좋다> 금호미술관, 서울
<피시방생지전> 세종대, 경원대, 서울
1997 <르망 예술제> 르망, 프랑스
1997-86 <한국청년 작가전> 파리
1996 <아르스날 에스파스 물레전> 이씨레 물리노, 프랑스
<스크럼전> 서울
<한국청년 작가전> 동아갤러리, 서울
<블루 뽐므전> 파리
<세브르 화랑 개관 초대전> 파리
1995 <아르스날 이씨레 물리노> 파리
<아르스날 그랑 포르마전> 이씨레 물리노, 파리
<제1회 한일 미술제, 나폴레옹기념관> 파리
<3인전> 아르스날화랑, 파리
1991-90 <에스파스54> 볼로뉴 비양꾸르, 프랑스
1991 <파리의 한국작가전> 뉴욕
1987 <살롱드메> 그랑빨레, 파리
<살롱 죤 뼁트르> 그랑빨레, 파리
<살롱 그랑 에 존 도쥬르디> 그랑빨레, 파리
<살롱 비트리> 비트리, 프랑스
<파리의 시각전> 한국화랑, 서울
1986 <살롱비트리> 비트리, 서울
1985-82 <ING전> 서울
1985 <85신진 작가전> 서울
<을축 미술제>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