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먼저 시를 읽어주는 독자는 그 시를 쓴 시인이다. 하여 시인은 첫 번째 독자이다. 처음인 독자는 더없이 까탈스럽다. 맘에 들지 않으면 델(Del)키를 눌러 애쓴 흔적을 단번에 날려버린다. 시인에게 “시를 쓰는 일은 의무”이지만 독자는 “읽지 않을 권리”가 있기에 시인은 시 앞에서 겸손해진다. 한 장의 여백에 의미를 설계하고 이미지를 상상하는 일, 알 수 없는 것들의 모호함, 규정되지 않은 관계를 탐색하며 무관한 것과의 상호관계를 입증해야 하는 시 쓰기는 백지 앞에서 이전의 전적(戰績)은 무의미하고 다시 백지 한 장과 겨루는 승산은 미지수이다.
시의 첫 독자는 “생각이 새로운가, 본질에서 멀어지지는 않았는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힘이 있는가. 과장되거나 축소되지는 않았는가. 설명인가 묘사인가" 등 여러 가지 질문을 제시한다. 창작의 중심에는 현실과 가상의 세계에서 찾아야 하는 질문들이 있다. 추구하는 결론에 닿기 위해 조사(助詞) 하나를 빼거나 끼워 넣는 긴장감은 시를 쓰는 팽팽한 동력으로 사용된다.
첫 행은 문장의 첫 출발점이어서 시를 끌고 가는 힘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시의 씨를 뿌려야 할 백지를 대하면 난 언제나 막막한 초보 농사꾼이다. 첫 문장에서 힘이 빠져 단어의 나열에 그치지 않도록 먼저 기도를 하고 컴퓨터 속의 백지와 진지하게 마주 앉는다. 매너리즘을 거부하고 새로운 말을 찾아내는 순간 간절한 기도처럼 시는 발아된다. 그때 알 수 없는 힘이 시를 끌고 간다는 느낌이 든다.
놀랍게도 중간쯤 쓰다 보면 시가 스스로 마무리를 한다는 점이다. 핸들을 잡고 가는 것은 분명 나인데 가속페달을 밟고 질주하는 것은 내가 아닌 또 다른 힘이다. 어떤 계획도 의도도 없었지만 시는 대부분 그렇게 제힘으로 문장을 끌고 가 뜻밖의 결론에 도달한다. 나의 시는 그렇게 나의 예감을 빗나갈 때가 많다. 언젠가 문학모임에 초빙되어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아무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신의 비밀한 기호를 해독해서 세상에 알리고 싶은 나의 시 쓰기는 늘 기도로 시작된다.
그동안 사물을 소재로 시를 쓰고 사물 시집을 출간했다. 나무 중에서 가장 고운 목소리를 지닌 살구나무가 목탁이 되고 가지를 꺾어 물에 담그면 파란 물을 토해내는 물푸레나무처럼 사물도 저마다 소리와 색깔이 있다. 사물의 특성을 이해하고 사물의 본질을 나만의 관점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은 사물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호기심 덕분이었다.
시인 코올리지는 “독자의 심부(深部)까지 파고들어 갈 내적 존재의 흥미”를 독자에게 주어야 한다고 했다. 나 역시 다시 읽어보고 싶은 시, 씹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시, 피가 도는 살아있는 글을 쓰기 위해 그 시에 맞는 적절한 언어를 찾아낸다. 음악은 청각으로 시간을 채우고 그림은 사각의 프레임 안에서 시각으로 공간을 채운다고 한다. 그렇다면 문학은 시간과 공간은 물론 미각까지 곁들여야 한다고 믿는다.
생략도 하나의 언어이기에 여백에 집중한다. 고인(故人)의 생애를 짐작하는 백비(白碑)처럼 여백도 함축된 의미를 지닌다. 마네킹의 사라진 얼굴, 팔다리가 생략된 조각품, 흑백이 대비되는 수묵화에도 아름다운 여백이 있다. 본질에 집중하도록 실제의 형상을 배제한 빈자리가 여백이다. 여백이 없는 시는 숨이 막힌다.
관찰과 경험으로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내 시의 서정성은 시의 중심축으로 작용한다. 달콤한 망고의 과육 속에 단단한 뼈가 숨어있듯이 서정시의 내면에는 통증과 질긴 근육들이 있고 어둠과 빛이 공존한다. 유려한 문장도 사람의 냄새가 나지 않으면 뜬구름처럼 허무함만 남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익숙한 규정에서 벗어나 능청스레 슬픔을 감추고 뼈아픔을 이야기하고 싶다. 또는 눈물 뒤에 숨어있는 은밀한 기쁨을 전하고 싶다. 고요함 속에 일렁이는 격렬함, 바닥을 모르는 슬픔의 깊이, 부드러움 속에 깃든 단단한 언어의 근육을 보여주고 싶다. 불편한 진실과 마주치며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렇구나,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울거나 웃고 싶다. 공감은 증언의 가치를 인정하는 의견이기에 삶을 버티기 위한 환상을 어딘가에 남겨두고 끝까지 울음을 참는다. 기쁜 눈물이 있고 아픈 웃음도 있다는 것을 일찍 철든 아이처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단순한 언어로 깊은 뜻을 전할 수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있으랴. 주관적인 감동과 정서가 주를 이루는 서정시를 그저 평이함으로 치부해선 안 될 것이다. 독자와 소통을 중요시하는 나의 시는 누가 읽어도 알 수 있는 시가 많다. 언어가 실재세계를 묘사하는 논리적 그림이라면 뿌리가 건강한 상상력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치(理致)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워딩(wording) 방식은 행과 연을 훌쩍 건너뛰는 요즘 시에 비해 시류에서 벗어난 시라고 볼 수도 있다. 난해하고 현학적인 자기중심적인 시에 비해 나의 시는 단순한 점이 있지만 그들과 다를 뿐 틀림은 아니다. 나는 나의 느린 걸음을 믿는다. 언어의 색(色)과 결이 다르기에 내 시의 무게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
그동안 지향한 나의 시 세계는 잃어버린 인간성의 회복이다. ‘등로주의’를 지향하는 나의 시는 결과와 성공을 우선하는 ‘등정주의’와는 달리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산을 오르는 과정을 더 중시한다. “100% 완벽하게 실패하면 그 실패는 내 것이 된다”던 어느 산악인, 그가 이룬 신화는 거듭된 실패를 거쳐 얻어낸 결과물이었듯이 나에게도 실패는 시를 성숙하게 하는 힘이었다.
한때는 그럴싸한 포즈(pose)를 연출해본 적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내 옷은 아니었다. 산과 들로 바다로 아무 때나 입고 나갈 편한 옷이 내 몸에 맞았다. 화려한 레이스나 프릴이 달린 어여쁜 앞치마보다 엄마의 젖은 손을 닦아주고 남몰래 눈물을 받아주던 투박한 무명앞치마가 좋았다. 일상의 작은 파문과 그 내면의 결을 기록하는 나의 서사는 서서히 번지는 따스함이 깃들어 있다. 머릿수건을 쓰고 묵묵히 땀 흘리며 일하는 소박한 촌부가 나에겐 더 아름다워 보인다. 정원의 화려한 꽃보다도 길가에 피어난 작은 풀꽃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오늘 벚꽃이 날리는 사월의 꽃길을 걸어 집에 도착했다. 가지에서 떨어져 한 잎 한 잎 해체된 낙화의 고통과 소멸은 꽃잎의 흩날림 속에 묻혀버렸다. 벚나무보다는 꽃비가 날리는 아름다운 허공이 시선을 차지한 주인공이다. 꽃잎의 소멸은 참혹함이 아닌 아름다움으로 위장되었다. 이처럼, 시는 늘 피를 흘리며 태어나고 존재도 없이 사라지지만 참혹함이 아닌 아름다운 소멸로 기억되기에 ‘미립이 트일’ 그날을 기다리며 기억의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결국, 나는 나를 쓴다.
마경덕 시인은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신발론』, 『글러브 중독자』, 『사물의 입』, )『그녀의 외로움은 B형-新글러브 중독자』, 『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밤』 등이 있다. 제2회 북한강문학상 대상, 두레문학상, 제2회 선경상상인문학상. 제18회 모던포엠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