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4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었을 때 십 사람들이 사울에게 그 사실을 알려 다윗이 곤경에 빠지게 된 상황을 묘사합니다(사무엘상 26:1~3). 5~7절을 보면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즉,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원수들에게 악을 갚으실 일을 노래하고, 6절에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겠다고 선언하며, 7절에서는 주께서 다윗의 원수에게 보응 받게 하시는 것을 다윗이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7절의 의미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다윗은 십 사람이 사울에게 다윗에 대해 일러주어 다윗이 고난받게 된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그의 원수들이 보응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배신한 십 사람에게도,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울에게도 하나님이 아직 보응을 안 했는데, 보응을 했다고 강조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이 시의 배경이 되는 사무엘서의 내러티브 흐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4~26장의 흐름을 생각해 볼 때, 시편 54편에서의 다윗의 담대한 선언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사무엘상 24장과 26장에서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 죽이지 않습니다. 24장과 26장은 25장의 나발 사건을 에워싼 교차 대구 혹은 샌드위치 형태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24장에서 다윗은 사울을 죽일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하려다가 옷만 대고 죽이지 않았고, 26장에서는 사울을 죽일 생각 자체가 아예 없었습니다.
다윗은 두 사건에서 모두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해하지 않겠다”라는 의지를 표명합니다(24:6, 26:9). 다윗은 여기에서 사울을 존중히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울을 죽이려 하였지만, 하나님이 막으신 것이고, 두 번째는 죽이려는 마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울을 용서하거나 존중히 여기려는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보응하실 것임을 믿었다는 것은 그를 향한 용서와 존중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다만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려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사울을 버리셨고 그래서 다윗을 택해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다윗도 사울과 마찬가지로 기름 부음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을 죽이려 하고 있고, 반대로 다윗은 사울이 기름 부음 받은 자이기에 그의 생명을 손대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지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자이기에 내가 해칠 수 없다는 것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안 됩니다. 다윗은 지금 사울과 씨름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온전히 주님께 의지하려는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눈앞의 문제를 넘어서서, 참 왕이신 하나님과 신앙의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24장에서는 죽이려 했다가 죽이지 않았으나, 25장의 사건을 경험한 후, 26장에서는 더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십 사람이 다윗에 대해서 사울에게 알렸는데, 이때 다윗은 아비새와 함께 사울이 자고 있던 진영에 가게 되고 아비새가 사울을 죽이겠다고 하자 다윗은 “죽이지 말라”라고 한 후,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라고 말합니다(사무엘상 26:10). 나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권적인 심판하심을 경험한 다윗은, 사울이 그를 죽이려 한 상황 속에서 동일한 믿음의 적용을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아비가일의 말입니다. 나발에게 개인적인 보복을 실행하러 찾아온 다윗에게 그의 아내 아비가일이 그 길을 막고 말한 내용입니다. 다윗은 비록 여인의 말이었지만, 그 말을 받아들입니다. 왜입니까? 보응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이 나발을 치셔서 그가 죽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상황에서 실행에 옮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씨름(시험)에서 첫 번째는 실패하였지만, 두 번째 씨름(시험)에서는 성공합니다.
이러한 사무엘서의 흐름으로부터 우리는 시편 54:7절에서 다윗이 뜻한 바를 유추해 볼 수 있게 됩니다.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에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라는 그의 고백은, 나발을 주권적으로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사울도 주권적으로 심판하신 것이라는 다윗의 체험적인 신앙을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눈앞에서 자신을 핍박하는 악인들을 보게 되지만, 결국 자신이 신뢰하는 하나님께서 공의와 정의를 행하사 다윗을 신원하시고 악인들에게 합당한 형벌을 내리실 것을 다윗은 분명하게 신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우리에게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많은 어려움을 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원수를 용서 못 하여서 힘들어하고 아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나와의 씨름도, 그 누구와의 씨름도 아닌 나와 하나님과의 씨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신원하고 원수들에게 합당한 형벌, 보응을 하실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보응은 우리가 아닙니다. 보응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 씨름에서 이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