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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덕과 김형효 Choi Jin-Duk and Kim Hyunghyo 이승종*01 ӵߚ ৢ이 글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최진덕, 김형효 교수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거론한다. ①최 진덕 교수의 철학이 지니는 호고주의(好古主義)적 경향성은 현재에 대한 고려를 빠뜨리 고 있다. 미래의 문제뿐 아니라 현재의 문제도 과거 지향적 물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불교와 주자학의 공부론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최진덕 교수의 닦음론이 ‘우리 현실’과 ‘우리 시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역시 분명하지 않다. 나의 몸과 마음을 닦음으로써 ‘우리 현실’과 ‘우리 시대’를 닦을 수 있다는 듯한 최진덕 교수의 발상은 사 회와 시대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해 이해하려는 방법론적 개체주의의 한계에 묶 여 있다. ②김형효 교수는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철학적 사유의 유형을 물학(物學), 심학(心學), 실 학(實學)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거기서 우리는 모종의 위계 설정을 감지한다. 해체주의 는 바로 저러한 칸막이와 위계를 해체하고자 하는 철학적 운동을 일컫는데, 해체주의를 옹호하는 김형효 교수는 여기서 자가당착을 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울러 저러한 분류법에 의거해 장자의 철학을 물학에 위치시킨 김형효 교수의 장자 해석은 장자의 철 학에서 초월의 측면만을 인정하거나 강조함으로써 장자를 그가 비판했던 관념적 관조 에 머문 피안의 철학자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ഩ७ৰ 최진덕, 김형효, 유학(儒學), 장자(莊子), 해체주의 * 연세대학교. VHXQJFKR@\RQVHL.DF.NU 75 최진덕과 김형효 | 이승종 한국연구 02(최종).indd 75 국연구 02(최종).indd 75 2019-12-06 오후 12:45:51 019-12-06 오후 12:45:51 차례 1. 타인에게 말 걸기 2. 최진덕 교수 3. 김형효 교수 ┡ᯙᨱíัÙʑ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붙는 문자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에 불을 켜놓고, 76 한국연구 02 / 2019.10 한국연구 02(최종).indd 76 국연구 02(최종).indd 76 2019-12-06 오후 12:45:52 019-12-06 오후 12:45:52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스물여덟의 짧은 생애를 살다간 영원한 청년 시인 윤동주가 일제하에서 체 험한 삶의 모습을 그린 「간판 없는 거리」라는 시를 읽는다. 손님 같은 익명의 사 람들도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이라는 그의 말이 가슴 저리게 와 닿는 다. 당시보다 윤택해진 시대에 그보다 갑절이 넘는 삶을 살고도, 주위 사람들에 대해 저런 따스하고 정갈한 마음을 가져보지 못한 내가 부끄러워진다. 지금까지 나는 읽은 글들에 내 생각을 섞어본 책들을 지어냈다. 그것은 3인 칭으로 주어진 글들과 1인칭인 나 사이의 2인칭적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3인칭 적 텍스트와 1인칭적 생각의 접점에서 양자를 넘어서는 어떤 돌파구를 찾으려 한 것이다. 동과 서를 가리지 않고 내 관심이 이끄는 글들을 찾아 읽었지만, 지 금까지 지어낸 나의 책들이 준거하고 있는 글들의 저자들은 모두 먼 과거에 속 한 사람들이다. 나의 학문은 죽은 사람들과의 대화인 유령학인 셈이다. 물론 나는 동시대 사람들, 즉 살아있는 사람들의 글도 읽었고 그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내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동시대 사람들이다보니 그 글들 의 저자는 나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죽은 사람들의 경 우와는 달리 그들과 직접 대화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나이의 고 하를 떠나 내게 많은 것을 일깨워주었고, 그들의 논지에 대해 내가 긍정을 하 77 최진덕과 김형효 | 이승종 한국연구 02(최종).indd 77 국연구 02(최종).indd 77 2019-12-06 오후 12:45:52 019-12-06 오후 12:45:52 건 부정을 하건 빚진 바가 컸다. 시간의 흐름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법이어서 나를 가르친 귀인들도 벌 써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만큼 내 삶이 깎여나가는 느낌이다. 성장하 는 학생들과의 새로운 만남도 있지만, 그들도 떠난 사람들을 대체하지는 못한 다. 사람은 저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는 더 시간이 흐르기 전에 그들과의 대화 기록을 책으로 갈무리하고자 마음 먹었다. 그것이 내겐 부족하나마 윤동주가 말한바 그들의 손목을 잡는 방식인 것이다. 앞으로 출간될 『우리와의 철학적 대화』(김영사)라는 책에서 나는 내가 걸 어온 철학의 길에서 만난, 내게 영향을 미친 동시대 사람들로 대화 상대자의 범위를 설정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20세기와 21세기 한국이라는 지역성 과, 철학이라는 주제가 기준이 되었다. 그렇다고 동시대 한국의 철학자들을 망라한 것은 아니다. 내성적인데다 단조롭고 고독한 삶을 추구하는 내게 영향 을 주지 못한 동시대 한국의 철학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선정한 사람들 이 꼭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것도 아니다. 나의 선택은 자의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 『한국현대철학』을 출간한 정대현 교수는 20여 년 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한국철학 공동체는 진정한 의미에서 아직 구성되지 않았고 (…중략…) 활발한 논문발표는 있지만 그들이 분야별로도 하나의 흐름을 이루지는 않았고 상호작 용도 없고 공유하는 문제의 틀마저 없다고 보인다. 한마디로 아직 충분한 대화가 없는 것이다. 한국철학공동체의 구성을 위해서 (…중략…) 필요한 것은 ‘어떤 철 78 한국연구 02 / 2019.10 한국연구 02(최종).indd 78 국연구 02(최종).indd 78 2019-12-06 오후 12:45:52 019-12-06 오후 12:45:52 학적 문제(들)의 공유’이다.01 한국철학 공동체 내에서의 대화와 상호작용의 부재가 철학적 문제들의 공유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20여 년 전의 진단이지만 이러한 상황이 개 선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2000년에 창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한국분 석철학회의 학회지인 『철학적 분석』의 편집규정에도 “한국철학 공동체가 그 동안 세계 문맥과의 연대에 치중하다가 한국 문맥과의 관련에 소홀하지 않았 나 생각”한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정대현 교수의 진단이 한 개인의 주관적 견 해가 아님을 간접적으로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철학자들은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취업, 재임용, 승진을 위한 연구업적을 채우기에 바쁜 실정이다. 설령 한국철학계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 이 나온다 해도 그것에 관심을 가져줄 여유가 없다. 정대현 교수의 『한국현대 철학』에 대한 한국철학계의 침묵이 그 좋은 예이다. 우리 철학계의 이러한 분 과 상태를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무언가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목적에서 나는 『우리와의 철학적 대화』를 구상하게 되었다. 정대현 교수의 『한국현대철학』에는 500여 명의 한국의 현대철학자들이 등장하지만, 대체로 그들 각각의 연구를 소개하고 요약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 다. (같은 주제를 다루는 다른 책들도 일반론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책을 통해서 한국현대철학의 현황을 백과사전적으로는 알 수 있지만, 그것만 으로는 철학을 한다고 할 수 없다. 『우리와의 철학적 대화』에서 나는 한국현 대철학의 소개가 아니라 한국의 학자들과 철학을 하려는 것이다. 대화는 그 철학함의 방법을 아주 일반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사실은 비판, 부연, 비교, 분 01 정대현, 「분석철학과 한국철학」, 『철학』 39, 한국철학회, 1993, 144쪽. 79 최진덕과 김형효 | 이승종 한국연구 02(최종).indd 79 국연구 02(최종).indd 79 2019-12-06 오후 12:45:53 019-12-06 오후 12:45:53 석 등의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현존하는 한국의 학자들을 망라하기보다는 연구의 대상이 되는 학자들을 선택과 집중의 원칙하에 선별해, 그들과 직접 학술적으로 교류하는 형태를 띤다. 네이글(Th omas Nagel)은 『다른 마음들(Other Minds)』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준 학자들에 대해 아주 심도 있게 논의하고 있는데, 거론되는 학자들의 대부 분이 그와 동시대 철학자들이다. 네이글의 책은 그가 다루고 있는 학자군의 범위에 있어서나 깊이에 있어서나 나의 책과 유사하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 는데, 그는 오직 학자들 하나하나를 다룰 뿐 이들 사이의 연계성이나 계보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고 있다. 나는 우리나라의 학자들을 대상으로 삼으면서 그들이 속해 있는 현대철학의 지형도 및 인접분야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거론 하여 이 책을 학제적 대화로 전개하려 한다. 아울러 현대철학이 현재의 지형 도를 갖추기까지의 역사적 계보를 추적하여, 이 책이 학제적 횡단(橫斷)과 계 보학적 종단(縱斷)을 이루어내도록 이끌어나갈 것이다. 나의 철학은 1인칭적 표현 인문학이나 3인칭적 설명 과학을 지양한다. 1 인칭적 표현 인문학은 검증 장치가 없는 독단론으로 흐르기 쉽고, 3인칭적 설 명 과학은 질적 학문인 철학의 방법이 되기에는 피상적인 계량 분석에 머무 르곤 한다. 반면 이 책에서 내가 추구하는 2인칭적 철학은 교감을 중시하는 대화 해석학으로 요약되는데, 이러한 철학을 우리 시대의 학자와 직접 조우하 여 소통함으로써 실천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한 학계가 연구 역량을 축적하려면 선대의 연구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비 판적 계승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학계는 늘 해외 학술동향과 같은 외풍 에 휩쓸리는 종속성을 탈피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수입된 해외의 학문이 설령 한국에서 어떤 성과를 낸다 해도 그것이 제대로 평가/계승되지 못한다 80 한국연구 02 / 2019.10 한국연구 02(최종).indd 80 국연구 02(최종).indd 80 2019-12-06 오후 12:45:53 019-12-06 오후 12:45:53 면, 이 또한 밑 빠진 독에 물을 붙는 오류를 반복하게 된다. 『우리와의 철학적 대화』에서 나는 절실히 요청되는 우리 학문에 대한 정 당한 평가 작업을 수행하려 한다. 아울러 나는 그 과정에서 선배의 학문에 대 한 평가를 넘어 나름의 철학적 비전을 제시하려 한다. 한국에서는 이 두 작업 이 서로 연결되는 일이 드물었다. 선행 연구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별로 없 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신의 학문을 개진한다 해도 그것이 어떤 학문적 배 경에서 잉태된 것인지가 불분명했다. 나의 책은 이러한 오류들을 극복해 우리 철학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창의적으로 이어나가는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 다. 이제 그 중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표적 철학자라 할 수 있는 최진덕 교수 와 김형효 교수의 철학을 주제로 한 논의의 부분을 아래에 선보인다. ↽ḥƱᙹ फ़ެݱ഼ 하늘이 있다. 하늘은 누구에게나 공평무사하고 어디에서나 보편적이다. 낮과 밤에 따라, 계절의 순환에 따라 달라 보이기는 하지만 하늘은 그러한 변 화에도 무심하기만 하다. 하늘에 있어서 보편성과 변화는 얼마든지 양립 가능 하다. 땅이 있다. 땅은 위치와 계절의 순환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땅은 각개 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문화와 생활을 일구며 정주(定住)하는 삶의 구체적 터 전이기도 하다. 하늘의 보편성과 땅의 국소성(局所性) 사이(間)에 사람(人間)이 81 최진덕과 김형효 | 이승종 한국연구 02(최종).indd 81 국연구 02(최종).indd 81 2019-12-06 오후 12:45:53 019-12-06 오후 12:45:53 있다. 사람은 하늘과 땅의 변화, 하늘의 보편성과 땅의 국소성, 그리고 그 사이 에서 펼쳐지는 자신들의 운명을 사유하고 실천한다. 이 사유는 서양에서 철학 이라는 이름의 이야기를 낳았다. 다른 모든 사유가 그러한 것처럼 철학도 언어로 짜여진다. 언어의 근간은 청년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과 공자가 역설했듯이 이름(名)이다. 모 든 것이 명명백백한 밝은 대낮에는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어두운 저녁(夕)이 되면 입(口)으로 상대를 불러야 하므로 이름(夕 + 口 = 名)이 생겨나 게 되었다. 그러한 이름의 언어로 짜여진 철학은 따라서 밝은 대낮이 아닌 어 두운 저녁에 이루어진다. 실제로 철학이라는 이름도 해가 지는 서쪽에 정주하 는 사람(西洋人)들이 고안하였다. 그중의 탁월한 한 사람이었던 헤겔은 철학 을 상징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저녁이 되어서야 날갯짓을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어두운 저녁에야 사용되기 때문이어서 일까. 이름은 언제나 어질러져 있다.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공자와 비트겐슈타인, 그들의 시도를 조롱하는 장 자와 데리다가 벌이는 저녁의 게임이 수천 년간 계속된다. 철학의 시제는 저녁이다. 철학은 암중모색(暗中摸索)일 수밖에 없다. 후기 비트겐슈타인과 횔덜린에 의하면 이 시대의 시제 역시 어두움이 드리워진 저 녁이다. 과학 기술이 전 세계를 석권하고 있는 이 시대는 하이데거(Heidegger. M)02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파송된 역운(歷運)의 종착지이다. 과학 기술의 조장으로 말미암아 사유는 계산으로 대체되고 시대의 어두움은 깊어 만 간다. 그 와중에서 우리는 노자의 명제에 귀를 기울인다. “반자도지동(反者 道之動).”03 하이데거 식으로 풀어내자면 그 메시지는 이렇다. “전향(Kehre, 反)이 02 +HLGHJJHU, 0., “'LH )UDJH QDFK GHU 7HFKQLN”, Vorträge und Aufsätze. 3IXOOLQJHQ: 1HVNH, 1978 03 老子, 『道德經』, 40장. 82 한국연구 02 / 2019.10 한국연구 02(최종).indd 82 국연구 02(최종).indd 82 2019-12-06 오후 12:45:53 019-12-06 오후 12:45:53 [서구 문명이 걸어온] 길(道)이 가는(動) 방향이다.” 전향은 사람의 의지나 결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사가 그러하듯이 도의 움직임으로서의 전향도 하늘과 땅이 (그리고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신성(神性)이 이에 보태어져) 사람과 한데 어 우러져 일어난다. “물극필반(物極必反).” 그런 의미에서 전향(反)은 필연적(必) 섭 리요 이치이다. 어두움이 극에 달함(物極)으로 말미암아 전향의 동(東)이 트게 마련이다(必反). 전향은 글자 그대로 동쪽(東)에서 틀 것인가? 해 뜨는 동쪽에 정주하는 사람(東洋人)들은 철학이라는 이름을 모른 채 살 아왔다. 철학은 그리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동쪽 사람들의 사 유를 철학의 결핍이 아니라 철학 이전, 혹은 이후의 사유라고 부르도록 하자. 그리스에서 시작된 철학의 역운이 종착역에 도달하는 이즈음에 우리의 동양 적 사유 전통은 철학에 대한 보충/대리로서 서양의 사유 전통과 만나야 한다. (역으로 서양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철학 전통이 동양적 사유 전통에 대한 보충/대 리로서 동양과 만나야 한다.) 그 만남의 시발점이 된 계기를 서양의 일방적 강압 과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만 보지 말고, 우리의 운명이자 “불가피한 선 택”04으로도 보도록 하자. 비록 그 만남의 방식이 달랐더라면 더 좋았으련만, 어차피 양자의 만남은 양자 어느 쪽으로서나 어느 정도 운명이자 불가피한 선택이지 않겠는가? 동과 서의 운명적 만남은 특히 동양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서 양에서 밀려들어온 과학과 기술은 서양뿐 아니라 동양의 땅과 사람을, 한 걸 음 더 나아가 세상 만물을 도발적 주문 요청에 부응하는 부품으로 몰아세우 고 있다. 이러한 대세에 걸림돌이 되는 전통은 송두리째 잘려나가고, 교육을 통한 인적 자원의 주문 생산을 담당하는 교육인적자원부가 생겨나고, 큰 학 04 최진덕, 「도상의 사유로서의 한국철학」(2003, 16쪽), 『인문학, 철학, 그리고 유학』, 청계, 2004. 83 최진덕과 김형효 | 이승종 한국연구 02(최종).indd 83 국연구 02(최종).indd 83 2019-12-06 오후 12:45:54 019-12-06 오후 12:45:54 문의 전당이던 대학이 직업학교로 변모하고, 학문은 연구와 경영으로 바뀌게 된다.05 문제의 다각적 해결을 위해 결성된 연구단(혹은 사업단)이 연구비를 지 원 받아 일정한 기간 내에 성과물을 내는 학제적 공동 연구가 대두됨에 따라 연구비의 흐름이 학문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학자는 씽크 탱크(think tank)로서 남다른 생각을 담은 연구실적을 생산해야 한다는 요청에 간단없이 시달린다. 남과 생각이 같은 학자는 실패자로서 학자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 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학자의 운명이다. 이러한 난세(亂世)의 소용돌이 속에서 끊어질 위기의 전통을 오늘에 잇는 계사자(繫辭者)들이 있다. 경전의 메시지를 오늘에 전하는 헤르메스(Hermes)들 이 있다.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종, 그러면서도 전혀 별나지 않은 겸손한 한국 학중앙연구원의 철학자들이다. 이 글에서는 그들 중 최진덕 교수와 김형효 교 수가 걸어온 학문의 길에 잠시 말동무가 되고 싶다. 『ઌߚഠஎഠԓݼӋ੭ഠ』 최진덕 교수는 동양적 사유가 옛 것의 배움과 익힘에 깊이 뿌리 박혀 있 다는 점을 역설한다. 그에 의하면 동양의 전통에서 배움과 사유는 서로 맞물 려 순환적 반복을 거듭한다. 반복이 가능한 것은 배움과 사유 사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 차이에서 물음이 싹튼다.06 그러나 물음은 “더 잘 배우고 더 잘 사유하려는 데서”,07 혹은 “더 잘 배우고 더 잘 실천하기 위해서 제기될 05 +HLGHJJHU, 0., “'LH )UDJH QDFK GHU 7HFKQLN”, Vorträge und Aufsätze, 3IXOOLQJHQ: 1HVNH, 1978. 06 최진덕, 앞의 글, 172쪽. 07 위의 글, 171쪽. 84 한국연구 02 / 2019.10 한국연구 02(최종).indd 84 국연구 02(최종).indd 84 2019-12-06 오후 12:45:54 019-12-06 오후 12:45:54 뿐”08이다. 그 이외의 물음은 물어질 수 없다. 예컨대 “진리란 인간이 앞으로 만들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옛 텍스트 속에 이미 다 씌어져 있”09기에 진리가 이처럼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데도 새삼스럽게 ‘진리가 무엇인가,’ 혹은 ‘진리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같은 길을 가지 않겠다고 선 언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10 그러나 최진덕 교수도 인정하고 있듯이 텍스트의 언어문자가 전하고자 하는 저 해묵은 진리가 무엇인지 어느 누구도 쉽게 확정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텍스트를 철저히 암송하더라도 그 속의 진 리와 독자가 일체화될 수는 없고, (…중략…) 과거의 해묵은 진리를 아무리 동어 반복하고자 해도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11 따라서 우리는 ‘진리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최진덕 교수는 그 물음 도 결국은 ‘경전에 씌어진 진리란 무엇인가’에 불과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 나 우리는 때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경전에 미처 다 씌어지지 못한 아니 다 씌어질 수 없는 진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전통이라는 울타리의 해체 를 위해,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해, 낯선 타자와의 조우를 위해, 존재와 무(無) 를 마중하기 위해 우리는 때로 배움과 사유, 온고(溫故)와 지신(知新)의 해석학 08 강영안·최진덕, 「수양으로서의 학문과 체계로서의 학문」, 『철학연구』 47, 철학연구회, 1999, 46쪽. 09 최진덕, 「근대 인문과학과 전통 인문학」, 『인문학, 철학, 그리고 유학』, 청계, 2004, 59쪽. 10 강영안·최진덕, 앞의 글, 45쪽. 11 최진덕, 앞의 글, 60쪽. 85 최진덕과 김형효 | 이승종 한국연구 02(최종).indd 85 국연구 02(최종).indd 85 2019-12-06 오후 12:45:54 019-12-06 오후 12:45:54 적 순환을 깰 필요가 있다. 헤세의 작품 『데미안』은 모범생 싱클레어의 세계 와 그 세계를 뒤흔드는 부랑아 크로마의 세계를 대비시키는 「두 개의 세계」라 는 이름의 장(章)으로 시작한다.12 그리고 그 두 세계를 넘나드는 자유정신의 소유자 데미안이 출현한다. 해석학적 순환을 구상한 하이데거 역시 「형이상 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그 순환의 깨어짐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13 우리는 그 가 해석학자이면서 동시에 해체주의자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최진덕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기존의 철학적 사유가 갖는 한계를 자각하면서 미래 지향적인 물음을 묻는 자 는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과거의 문화적 전통으로 돌아가 다시금 과거 지향적인 물음을 물어야 한다.14 인간에게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만이 미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다.15 공자의 호고주의(好古主義)를 연상케 하는 이러한 언명은 우리가 기대하 는 응답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현재에 대한 고려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최진 덕 교수는 근대 인문과학의 현재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우리 현실,’ ‘우리 시대’ 운운하면서 현재를 실체시 하지만 그 현재는 과거와 미래로부터 단절되어 있기에 아무 두께도 없는 천박한 순간의 12 +HVVH, +., Demian(1919), Gesammelte Werke. 9RO. 5. )UDQNIXUW: 6XKUNDPS, 1970. 13 +HLGHJJHU, 0., “:DV LVW 0HWDSK\VLN?”(1929), Wegmarken. )UDQNIXUW: .ORVWHUPDQQ, 1976. 14 최진덕, 「도상의 사유로서의 한국철학」, 앞의 책, 174쪽. 15 위의 글, 186쪽. 86 한국연구 02 / 2019.10 한국연구 02(최종).indd 86 국연구 02(최종).indd 86 2019-12-06 오후 12:45:55 019-12-06 오후 12:45:55 연속으로 전락할 뿐이다.16 그러나 현재는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다. 미래의 문제 뿐 아니라 현재의 문제도 과거 지향적 물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예컨대 과 거로 돌아가는 것만으로 현대 과학 기술 문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불교와 주자학의 공부론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최진덕 교수의 닦음론이 ‘우리 현실’과 ‘우리 시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역시 분명하지 않다. 나의 몸과 마음을 닦음으로써 ‘우리 현실’과 ‘우리 시대’를 닦을 수 있다 는 말인가? 최진덕 교수의 발상은 사회와 시대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 해 이해하려는 방법론적 개체주의(methodological individualism)의 한계에 묶여 있 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진덕 교수는 동양의 전통에서조차 잊혀질 뻔했던 고유한 철학자의 초상을 아주 훌륭히 복원해냈다. 그것은 배움과 사유의 순환 적 반복 속에 심화되는 유언(有言)의 공부와, 몸과 마음의 닦음 속에 심화되는 무언(無言)의 공부를 수행하는 수행자(修行者)의 모습이다. ‘수행자.’ 그는 소 크라테스의 ‘등에’나 ‘산파,’ 니체의 ‘초인,’ 하이데거의 ‘사유가(Denker),’ 비트 겐슈타인의 ‘치료사(therapist)’와 뚜렷이 구별되는, 우리가 지키고 보듬어야 할 전통적 철학자의 초상이 아니겠는가? 16 최진덕, 「근대 인문과학과 전통 인문학」, 앞의 책, 68쪽. 87 최진덕과 김형효 | 이승종 한국연구 02(최종).indd 87 국연구 02(최종).indd 87 2019-12-06 오후 12:45:55 019-12-06 오후 12:45:55 ʡ⩶⬉Ʊᙹ െفઅഠߚ 학문의 분과화를 톡톡히 체험한 현대의 학문들은 학문 간의 통합은 고사 하고 대화의 가능성에 대해서마저 감을 잃은 상태이다. 통합과 대화의 아이콘 이었던 철학마저 분과화를 가속시키는 분석에 치중하거나(영미) 각자 자기만 의 고유한 방언을 추구하고 있다(대륙). 현대철학의 이러한 경향은 오히려 통 합과 대화의 걸림돌이 된다. 동시대의 다른 학문에 몸담고 있는 학자들에게나 노선을 달리하는 철학자들에게 영미분석철학은 별 영양가 없는 사소한 논증 들에 탐닉하는 학문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대륙철학은 시대착오적인 잠꼬대 나 허세에 불과한 넌센스로 비쳐질 수 있다. 양자 모두 그들만의 리그일 뿐 자 신들의 리그 밖에서는 위력이나 울림이 미미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사의 각 시대마다 그 시대를 지배한 하나의 패러다임이 있다는 쿤 (Th omas Kuhn)의 주장도 현대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현대물리학에서 상대성이 론과 양자역학이라는 두 패러다임의 분할통치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100년 이 넘게 지속되고 있으며, 한 편을 논박하거나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성 공하지 못했다. 결정론(상대성이론)과 미결정론(양자역학)이라는 상이한 세계관 을 지닌 까닭에 이론적으로는 양립 불가능한 두 패러다임이, 초창기에 지녔던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뒤로 한 채 저토록 오랫동안 서로에 대한 관계를 분명 히 설정하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공생을 유지하고 있음은 실용적으로는 지 혜로운 처사이겠지만 학적 통일성의 관점에서는 안이해 보인다. 88 한국연구 02 / 2019.10 한국연구 02(최종).indd 88 국연구 02(최종).indd 88 2019-12-06 오후 12:45:55 019-12-06 오후 12:45:55 엄밀학의 대명사로 학자들의 추앙을 받아온 수학의 보편성에도 제한이 가해졌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보편성은 리만(Bernhard Riemann)과 로바체프스 키(Nikolai Lobachevsky)가 각각 주창한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대두로 깨어졌고, 유클리드 기하학에 근거한 뉴턴의 고전역학이 리만 기하학에 근거한 아인슈 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대체되면서 그 입지는 더욱 축소되었다. 저 세 기하학 들은 공리가 서로 다르기에 거기서 이끌어져 나오는 정리도 다르다. 예컨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만 180도일뿐 비유클리드 기하학 에서는 그보다 크거나(리만) 작다(로바체프스키). 세 형태의 기하학은 서로 호환 이 불가능한 것이다. 논리학의 지배력도 예전만 못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논리학은 프레 게(Gottlob Frege)의 수리논리학에 의해 대체되었지만, 이러한 표준논리학은 양 자역학의 서술 대상인 아원자 수준의 미시세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를 적 시하고 양자역학에 맞춤형으로 제작된 양자논리학은 바로 그 세계에 적용이 가능한 유일한 논리학이다. 그러나 양자논리학은 오직 그 세계에서만 쓸모가 있을 뿐이다. 수리논리학의 수호자인 콰인(Willard Van Orman Quine)에 의해 일 탈논리학이라는 오명을 썼던 양상논리학을 위시한 다양한 논리학들은 논리 학의 백가쟁명 시대를 활짝 열어젖혔다. 하나의 논리학이 군림하던 시대는 끝 났다. 풀림은 엮임을, 분화는 종합을, 각자의 목소리는 상호간의 대화를 수반하 지 않으면 제 의미를 갖기 어렵다. 각 쌍을 이루는 요소들은 서로간의 밀고 당 김, 혹은 보충/대리의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그 성장의 주체는 이론이나 학문 이 아닌 사람이다. 상호 양립 불가능한 이론들도 사람은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다. 물리학자는 거시세계에는 상대성이론을, 미시세계에는 양자역학을 사 89 최진덕과 김형효 | 이승종 한국연구 02(최종).indd 89 국연구 02(최종).indd 89 2019-12-06 오후 12:45:56 019-12-06 오후 12:45:56 용하며, 논리학자는 미시세계에는 양자논리학을, 가능세계에는 양상논리학 을 사용한다. 수학자는 평면 공간에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볼록 공간에는 리 만 기하학을, 오목 공간에는 로바체프스키 기하학을 사용한다. 왕래는 이론이나 학문들 사이의 소통을 실천하고 있다. 왕래의 과정에서 우리는 이론이나 학문 간의 대화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각 이론이나 학문들 은 자기 완결성을 지향한다. 저마다 자기만의 아성을 쌓으려는 것이다. 수학 은 자신의 기초를 수학기초론이라는 이론으로 이해하려 하며, 물리학과 논리 학에도 그와 비슷한 시도들이 있다. 그러한 시도들은 이론이나 학문 간의 소 통이나 이를 실천하는 왕래자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그 왕래자는 샤먼과 헤르메스의 계승자인 철학자이다. 철학은 과거에는 만학의 왕이었는지 몰라 도 만학의 군웅할거 시대인 현대에 왕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철학자는 국외 자, 경계인, 이방인, 딜레탕트일 뿐이다. 현대의 만학은 왕정체제보다는 무정 부주의, 민주주의, 평등주의, 지역이기주의, 각자도생을 지향한다. 그러나 철학자는 학문 간의 왕래를 통해 때로는 유익한 결실을 얻곤 한 다. 퍼트남(Hilary Putnam)은 현대언어철학의 대표적 성과로 꼽히는 콰인의 번 역 불확정성 논제를, 수리논리학의 한 분과인 모형이론(model theory)에 속하 는 뢰벤하임(Leopold Löwenheim)-스콜렘(Th oralf Skolem) 정리의 응용으로 간주한 다. 같은 문장에 대한 논리적으로 동일한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저 정리의 요지인데, 콰인은 이를 번역의 경우에 대입해 번역 불확정성 논제 를 도출했다는 것이다. 어떤 현상에 대해 동등한 설명력을 제공하면서 논리적 구조가 동일한 이론 T1과 T2가 제시될 수 있다는 콰인의 이론 미결정성 논 제도 뢰벤하임-스콜렘 정리에서 도출되는 현대과학철학의 중요한 성과이다. 이 외에 어떤 귀납의 사례를 포섭하는 상이한 보편 명제들이 제시될 수 있다 90 한국연구 02 / 2019.10 한국연구 02(최종).indd 90 국연구 02(최종).indd 90 2019-12-06 오후 12:45:56 019-12-06 오후 12:45:56 는 굿만(Nelson Goodman)의 역설, 어떤 언어 사용의 사례에 대해 동등한 설명력 을 제공하는 상이한 규칙들이 제시될 수 있다는 크립키(Saul Kripke)의 역설도 뢰벤하임-스콜렘 정리에서 파생된 중요한 성과로 볼 수 있다. 사실 뢰벤하임-스콜렘 정리는 같은 말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뻔한 논지인데 뢰벤하임과 스콜렘은 이를 수학적으로 엄밀히 증명했으며, 콰인은 그 함축을 언어철학과 과학철학에 창의적인 방식으로 적용했다는데 그 의의 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저 정리와 함께 수학기초론과 현대논리학의 대표적 성 과로 꼽히는 괴델(Kurt Gödel)의 불완전성 정리나 튜링(Alan Turing)의 결정 불가 능성 정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괴델의 정리는 참이지만 증명 불가능한 문 장이 있다는 논지이고, 튜링의 정리는 한 문장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알고리즘 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논지인데, 우리는 일상의 맥락에서 이에 해당하는 경 우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수 없는 억울한 죄수의 발언과, 진위의 결정이 불가능한 상고사의 가설들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물론 뢰벤하임-스콜렘 정리, 괴델 정리, 튜링 정리는 각각 그 적용의 대상 과 심급에 엄격한 제한이 있고 그 범위 내에서만 작동하며, 그 논지나 근거도 수학적인 것이지 경험적이거나 일상적인 것이 아니다. 정리의 적용은 정리 자 체와는 구별되어야 하며, 적용은 이미 수학기초론과 수리논리학의 범위를 벗 어나는 일종의 비약이다. 리만 기하학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적용되 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성이론이 곧 기하학인 것은 아님과 같은 이 유이다. 하지만 그러한 비약을 허용했을 때 저 정리들의 논지는 앞서 보았듯 이 그다지 놀랄게 못 된다. 증명의 방법이 참신하고 엄밀할 뿐이다. 괴델은 자신의 정리에 대해 놀랄게 못 된다는 태도를 표명한 비트겐슈타 인에 대해 못 마땅해했다고 한다. 무모순성과 불완전성을 동시에 성취하려 했 91 최진덕과 김형효 | 이승종 한국연구 02(최종).indd 91 국연구 02(최종).indd 91 2019-12-06 오후 12:45:56 019-12-06 오후 12:45:56 던 힐베르트(David Hilbert)의 메타수학 프로젝트를 일거에 무너뜨린 자신의 혁 명적 업적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괴델의 정리는 당시의 수학계 를 석권했던 힐베르트의 그릇된 비전을 전제로 했을 때에만 놀라운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을 힐베르트의 형식주의나 괴델이 몸담았던 빈 서클의 규약주의, 혹은 프레게와 러셀(Bertrand Russell)의 논리주의와 같은 이론에 의해 그 기초가 설정되는 체계가 아니라, 수를 세거나 길이를 재는 등의 일상적 실 행에 기초한 인류학적 현상이라고 보았다. 수학의 학적 독립성을 침해하는 비 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수학철학은 괴델을 더욱 자극시켰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만일 누군가 철학에서 논제들을 제기하려고 한다면 그 논제들에 대한 논쟁은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 논제들에 동의할 테니까”17라고 말했다. 비록 뢰벤하임-스콜렘 정리, 괴델 정리, 튜링 정리가 철학의 논제들은 아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저 정리들에 대해서도 철 학의 논제들에 대한 자신의 이러한 견해가 적용될 수 있다고 여겼으리라 예 상해본다. 저 정리들은 엄밀한 증명과 함께 제출된 것이기에 논쟁은 불가능할 것이며, 각 정리들의 논지는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렇다 해도 우리는 저 논제들에 대한 철학적 해석과 적용이 의미 있는 작업이 라고 본다.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논제들에 대해서도 그러한 작업은 여전히 필요하다. 17 :LWWJHQVWHLQ, /.,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5HYLVHG 4WK HGLWLRQ, (G. *. (. 0. $QVFRPEH, 5. 5KHHV, 3. 0. 6. +DFNHU·-. 6FKXOWH. 7UDQV. *. (. 0. $QVFRPEH, 3. 0. 6. +DFNHU·-. 6FKXOWH., 2[IRUG: :LOH\-%ODFNZHOO, 2009, S.128. 92 한국연구 02 / 2019.10 한국연구 02(최종).indd 92 국연구 02(최종).indd 92 2019-12-06 오후 12:45:56 019-12-06 오후 12:45:56 『יᰆᔍᔢ᮹⧕ℕᱢࠦჶ』 2002년 원주에서 있었던 한국분석철학회의 동계세미나와 『오늘의 동양 사상』의 「논과 쟁」이라는 지면을 통해,18 우리는 김형효 교수의 노장 해석19 을 주제로 연구의 주제인 김형효 교수와 토론을 주고받았다. 우리는 ①김형효 교수가 노장과 데리다(Jacques Derrida) 사이의 ‘같음’을 읽어내는 데에만 너무 집중함으로써 이 양자간의 ‘다름’에 대해 적절히 조명하지 않았으며, ②김형 효 교수의 철학에 노장과 데리다를 연결 짓는 전체적인 그림을 지지해줄 수 있는 중범위 지대의 논리적 짜임새가 미비 되어 있으며, ③노장의 사유를 선 험주의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 우리의 이러한 비판에 대해 김형효 교수는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철학적 사유의 유형을 물학(物學), 심학(心學), 실학(實學)으로 나눈 뒤, 우리가 생각하 는 철학과 논리는 실학인 반면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철학과 논리는 물 학이라는 점에서 서로 영역이 다름을 분명히 함으로써 ①과 ②의 비판에 답 하고, 노장이 말하는 도는 이 세상의 원초적 문법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 사 유는 여전히 선험주의적임을 확인하면서 ③의 비판에 답하였다. 결국 김형효 교수의 답변은 자신의 물학과 우리의 실학은 영역이 다르므로, 실학의 관점에 서 물학을 비판하는 것은 범주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는 점이 요지이다. 김형효 교수의 철학적 분류를 받아들이고 각자의 사유를 물학과 실학에 위치시키는 것에 동의했을 때, 우리가 건네받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18 김형효, 「도구적 세상보기와 초탈적 세상보기」, 『오늘의 동양사상』 6, 예문동양사상연구원, 2002; 이승종, 「노장의 해체와 분석」, 『오늘의 동양사상』 6, 예문동양사상연구원, 2002. 19 김형효, 『노장 사상의 해체적 독법』, 청계, 1999; 김형효, 「데리다를 통해 본 노장의 사유문법」, 한국도가철 학회 편, 『노자에서 데리다까지』, 예문서원, 2001. 93 최진덕과 김형효 | 이승종 한국연구 02(최종).indd 93 국연구 02(최종).indd 93 2019-12-06 오후 12:45:57 019-12-06 오후 12:45:57 분과학문의 운명인 각자도생의 처방인 것 같다. 회통이나 크로스오버의 꿈을 접고 저마다 자신의 고지를 사수하라는 것처럼 들린다. 김형효 교수는 명시적 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가 물학, 심학, 실학 사이에 모종의 위 계를 설정하고 있다는 느낌도 갖는다. 즉 실학은 물학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형이하학이라는 평가를 김 교수가 내심 감추고 있다는 듯한 느낌말이다. 해체 주의는 바로 저러한 칸막이와 위계를 해체하고자 하는 철학적 운동을 일컫는 데, 해체주의를 옹호하는 김형효 교수는 여기서 자가당착을 범하고 있는 것처 럼 보인다. 김형효 교수에 의하면 무위, 당위, 유위 등의 철학소들은 각각 물학, 심학, 실학이라는 세상보기의 세 방식을 낳는다. 그렇다면 하나의 철학소에 하나의 세계관이 대응한다는 말인가? 철학소가 글자 그대로 철학을 구성하는 하나의 원소라면, 무위, 당위, 유위의 철학소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철학적 세계관을 형성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물학에는 당위나 유위의 철학소 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고, 심학에는 무위나 유위의 철학소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는가? 또 실학에는 무위나 당위의 철학소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는가? 물학, 심학, 실학은 정말 서로 다르기만 한가? 그들 사이의 소통은 불가능한가? 논리학은 보편성을 갖는 학문인가, 아니면 국소성에 머무는 학문인가? 논 리학의 창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을 보편학으로 보았지만, 김형효 교수에 의하면 논리학은 실학에 머물고 실학에만 적용되는 국소성의 학문이 다. 그렇다면 물학의 교직성의 논리에 관한 논리학은 불가능한가? 물학의 논 리와 실학의 논리는 “근원적으로 서로 유사성이 없는”가? 그 둘은 양립이나 호환이 불가능한가? 물학과 실학을 아우르는 보편 논리는 없는가? 기존의 논 리학이 그러한 보편학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94 한국연구 02 / 2019.10 한국연구 02(최종).indd 94 국연구 02(최종).indd 94 2019-12-06 오후 12:45:57 019-12-06 오후 12:45:57 우리는 표준논리학의 관점에서 김형효 교수의 텍스트를 분석해보았다. 그 과정에서 몇 가지 모순되는 점들을 찾아내기도 했다. 이것이 합당한 분석 인지에 대한 김 교수의 답변은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우리의 논리적 비판이 자 신이 말한 논리나 문법과 “다른 차원인 것으로 보인다”(김형효 2002, 40쪽)고 말 했을 뿐이다. 이는 실학의 차원에서는 모순되어 보이는 것도 물학의 차원에서 는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아니면 실학의 차원에서는 모순이 문제라 해도 물 학의 차원에서는 모순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말인가? 물학의 차원에서는 모 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가, 아니면 물학은 실학의 모순을 지양해 해소시키 는 나름의 메타논리적 해법이나 혜안을 지니고 있는가? 김영건 교수는 이 대목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린다.20 우리가 김형 효 교수의 텍스트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동원한 논리학은 투박한 철학적 장치 이다. 거기에 동원된 단순화, 첨가법, 선언적 삼단논법 등의 추리 규칙들은 사 유의 다양성이 지니고 있는 논리적 형식을 담기에는 완전하지 않다. 이에 대 한 우리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저 추리 규칙들은 수학에서 덧셈이나 뺄셈의 규칙들이 그러한 것처럼 논리학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자연연 역의 기본 규칙들이다. 물론 덧셈이나 뺄셈의 규칙들만으로는 수학의 다양성 이 지니고 있는 수학적 형식을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저 추리 규칙들만으 로는 사유의 다양성이 지니고 있는 논리적 형식을 다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러 나 수학이 덧셈이나 뺄셈의 규칙들을 위반하지 않듯이, 사유도 함부로 저 추 리 규칙들을 위반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덧셈이나 뺄셈의 차원에서 문제가 있는 수리체계의 건전성을 의심해볼 수 있는 것처럼, 자연연역의 기본 규칙들 차원에서 문제가 있는 사유체계의 건전성은 의심해봄직 하다. 20 김영건, 「노장의 사유 문법과 철학적 분석」, 『철학과현실』 55, 2002, 201쪽. 95 최진덕과 김형효 | 이승종 한국연구 02(최종).indd 95 국연구 02(최종).indd 95 2019-12-06 오후 12:45:57 019-12-06 오후 12:45:57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김형효 교수의 주장을 심화시키면서도 논리적으 로도 무리가 없는 해석이다. 러셀이 지적한 역설의 문제를 안고 있던 칸토르 (Georg Cantor)의 집합론과 프레게의 수리논리학의 경우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는 김형효 교수의 경우에도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전망하지만, 그 작업 에 착수하기에 앞서 일단 김 교수에게 그의 탁월한 사유에 대한 논리적 갈무 리 작업의 필요성을 확인받고 싶었을 뿐이다. 김형효 교수와의 유익한 토론을 통해 배운 것이 적지 않지만, 김 교수와 우리는 장자의 해석에 대한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여전한 이견들을 추 려보면 다음과 같다. ①장자의 포정해우(䍒丁解牛)나 바퀴공 윤편에 관한 우화에서 기술은 재 주나 테크놀로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장자는 삶의 기술을 익힘을 통해 자 신을 주어진 문맥의 자연스러운 결에 능동적으로 내어맡기는 실천을 강조하 려 했던 것이다. ②장자의 철학에는 초월과 합류의 두 양상이 공존한다. 내편의 순서와 흐 름도 이 두 양상을 교대로 엮어 짜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초월의 측면만을 인 정하거나 강조할 때 장자는 그가 비판했던 관념적 관조에 머문 피안의 철학 자로 오해될 수 있다. 초탈적으로 삶과 세상을 보았다는 장자에게도 그가 살 아야 할 삶의 몫이 엄연히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겸허하고 진지하게, 그 리고 긍정적으로 살아내지 않았는가? 우리는 텍스트 『장자』를 인간 장자의 이러한 삶의 기록으로 읽었다.21 ③“무명(無名)은 천지의 시작이요 유명(有名)은 만물의 어머니”라는 노자 의 구절에서 무명과 유명은 김형효 교수의 주장과는 달리 함부로 바꿀 수 없 21 이승종, 『동아시아 사유로부터』, 동녘, 2018, 437~438쪽. 96 한국연구 02 / 2019.10 한국연구 02(최종).indd 96 국연구 02(최종).indd 96 2019-12-06 오후 12:45:57 019-12-06 오후 12:45:57 다. 천지의 시작은 무엇이라 이름 부를 수 없는 시작점이라는 점에서 무명이 맞다. 그러나 만물의 어머니는 시작점이 아니다. 아이를 잉태하는 어머니도 그 씨앗(정자)은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이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 하는 것이 아니라 잉태한 유(有)를 더욱 풍성한 유(有)로 성장시키는 것이 어 머니의 역할이라는 점에서, 무명이 아니라 유명이 만물의 어머니인 것이다. 이를 정확히 분간하고 있는 노자의 문법은 그렇지 못한 김형효 교수의 문법 과 다르다. ④김형효 교수의 『노장 사상의 해체적 독법』은 그 제목이 시사하듯이 노 자와 장자를 하나로 묶어 취급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노장’이라는 표 현은 아마도 그에 맞서는 유가철학자들이 임의로 설정한 범주인 것 같은데, 그들의 필요에는 부합할지 몰라도 노자와 장자는 다른 사상가들이다. 노자에 게서 발견되는 제왕학적 요소가 장자에게는 결여되어 있고, 반대로 장자에게 서 발견되는 스토아적 요소가 노자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이를 감안하지 않고 둘을 한데 묶어 해체적 독법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 ⑤노자와 장자의 철학에서 자연은 물리적 자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중심적 사고 프레임(frame) 너머의 사태 그 자체를 의미한다. 무위자연(無 爲自然)은 인간 멋대로 생각하지 말고 사태 자체를 따르라는 뜻이다. 문명 세 계 너머 원시 자연 속에서 살라는 것이 아니라, 매 경우 그 사태 자체의 순리 대로 살라는 말이다. 이는 “생각하지 말고 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상 통하며, “너 개인적으로 마음대로 하지 말고 성인이 지정한 절차대로 행위하 라”는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와 충돌한다. 성인이 확정한 공식적 절차를 뜻하는 공자의 예(禮)는 무위자연과 양립하기 어렵다.22 22 ③, ④, ⑤의 구성에는 홍진기 교수(가톨릭관동대)의 지적에 힘입은 바 크다. 97 최진덕과 김형효 | 이승종 한국연구 02(최종).indd 97 국연구 02(최종).indd 97 2019-12-06 오후 12:45:58 019-12-06 오후 12:45:58 �몮줆 老子, 『道德經』. 莊子, 『莊子』. 강영안·최진덕, 「수양으로서의 학문과 체계로서의 학문」, 『철학연구』 47, 철학연구회, 1999. 김영건, 「노장의 사유 문법과 철학적 분석」, 『철학과 현실』 55, 2002. 김형효, 『노장 사상의 해체적 독법』, 청계, 1999. _______, 「데리다를 통해 본 노장의 사유문법」, 한국도가철학회 편, 『노자에서 데리다까지』, 예문서원, 2001. _______, 「도구적 세상보기와 초탈적 세상보기」, 『오늘의 동양사상』 6, 예문동양사상연구원, 2002.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승종 역, 『철학적 탐구』, 아카넷, 2016. 이승종, 「노장의 해체와 분석」, 『오늘의 동양사상』 6, 예문동양사상연구원, 2002. _______, 『동아시아 사유로부터』, 동녘, 2018 _______, 『우리와의 철학적 대화』, 김영사.(근간) 정대현, 「분석철학과 한국철학」, 『철학』 39, 한국철학회, 1993. _______, 『한국현대철학』, 이화여대 출판문화원, 2016. 최진덕, 「도상의 사유로서의 한국철학」(2003), 『인문학, 철학, 그리고 유학』, 청계, 2004. _______, 「근대 인문과학과 전통 인문학」, 『인문학, 철학, 그리고 유학』, 청계, 2004. _______, 『인문학, 철학, 그리고 유학』, 청계, 2004. 한국도가철학회 편, 『노자에서 데리다까지』, 예문서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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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ford: WileyBlackwell, 2009 98 한국연구 02 / 2019.10 한국연구 02(최종).indd 98 국연구 02(최종).indd 98 2019-12-06 오후 12:45:58 019-12-06 오후 12:45:58 Abstract Choi Jin-Duk and Kim Hyunghyo Lee, Seung-chong*01 I examine the philosophies of Choi Jin-Duk and Kim Hyunghyo of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critically. ①Choi Jin-Duk omits the consideration of the present in favor of the old. Not only the present problems but also the future ones are not solved with this attitude. It is also not clear whether and how we can solve the problems of our situation and our time by Choi’s theory of cultivating, which is the reconstruction of the Buddhist and Chu Hsi’s theories of learning. Choi’s idea that we can do them by cultivating our body and mind is bound by the limit of methodological individualism, which reduces the problems of society and epoch to those of individuals. ②Kim Hyunghyo divides the philosophical thoughts into Mulhak, Simhak, and Silhak from structuralist point of view. We notice the establishment of some hierarchy there. As a deconstructionist, he is contradicting himself since deconstructionism means the philosophical movement of deconstructing such departmentalization and hierarchy. Situating the philosophy of Chuang-tzu in Mulhak and emphasizing its transcendental aspect alone as Kim does is also misleading since Chuang-tzu can be misunderstood as a philosopher of transcendence in favor of idealistic contemplation contrary to his own disclaimer of it. Keywords Choi Jin-Duk, Kim Hyunghyo, Confucianism, Chuang-tzu, deconstruction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