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사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월정사
평창 월정사 가는 길은 한창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곳곳에 설치된 올림픽 마스코트와 안내판이 반겨주는 듯했다. 주차하고 조금 걸으니 고즈넉하고 조용한 월정사가 나온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본사라는 월정사는 규모가 꽤 크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으로 얻은 석존사리와 대장경 일부를 가지고 돌아와 양산 통도사와 함께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 그 후 전란과 화재로 여러 번 소실되었다가 1964년 적광전을 중창하며 계속 중건해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월정사를 한번 둘러보기로 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정면에 서 있는 팔각 구층석탑이다. 국보 제48-1호로 높이 15.2m의 이 석탑은 한국전쟁 당시 심각하게 훼손되었으나 일부를 보수했다. 그래도 상륜부가 완전한 형태로 남아 고려 전기 석탑의 모습을 보여준다. 팔각구층석탑이 유명한 것은 바로 앞에 서 있는 석조보살좌상 때문이다. 국보 제48-2호로 지정된 이 불상은 석탑을 향해 공양을 올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쪽 다리를 세운 채 석탑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보기만 해도 절로 불심이 솟아나게 한다. 이 불상의 원본은 지금 월정사성보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어렵사리 월정사를 방문했다면 오대산사고전시관에서 1월 25일부터 3월 20일까지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 기념 특별전 「오대산사고의 기록문화 조선왕조실록과 의궤」를 보는 것도 잊지 말자. 비록 복제본이긴 하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2006년(실록)과 2011년 (의궤) 국내로 환수된 조선시대 기록유산의 정수를 만나볼 수 있다.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오, 정선 아라리촌을 거쳐
동강이 시작되는 곳에는 아리랑의 고장, 정선이 있다. 정선아리랑은 현지에서 아라리 또는 아라리타령이라고도 불린다. 깊은 산속에 있어 찾는 이 없던 정선, 그러다 보니 정선아리랑의 가사에선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사시장철 임 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처럼 외로움이 묻어난다. 다행히 현재의 정선은 토속성을 즐길 수 있는 정선 5일장과 아라리촌으로 사람들이 넘쳐난다. 근처에는 아리랑박물관도 있다지만 이번에는 2004년 10월 정선의 옛 주거문화를 재현한 민속촌, 아라리촌에 들러보기로 한다.
아라리촌은 정선의 옛 주거문화를 재현한 곳이다. 전통 기와집은 물론 굴피집, 너와집, 저릅집, 돌집, 귀틀집 등의 전통가옥이 길을 따라 조르라니 서 있다. 그뿐 아니다. 집 안에도 민속적인 소품들이 가득 채워져 있어 주방의 아궁이에서 절구, 옛 서랍장까지 모두 볼 수 있다. 한참 걷다 보니 재미있는 조형물들이 나온다.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을 형상화한 것이란다. 표정이 익살스럽다. 한켠에서는 양반증서도 써주고 있다. 덥썩 한 장 받아본다. 조금 더 걷다 보니 널찍한 공연 장소가 나온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정선아리랑을 들을 수 있는 아리랑 마당이란다. 수많은 아리랑을 들어봤지만 정선아리랑은 왠지 더 느리고 구슬픈 느낌이 든다. 이 노래는 함께 부르기보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불렀다고 하니 과거 정선 사람들이라면 아리랑 한 곡조 못 뽑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현지 사람에게서 스윽 들어보는 아리랑은 또 어떤 느낌일까, 슬쩍 궁금해진다.
동강을 따라가며 만나는 비경
강변을 따라 정선읍으로 들어오니 이제 길은 동강 곁을 흐른다. 한국에서도 숨은 비경으로 유명한 동강길을 잠시 걸어보기로 한다.
겨울이라 나무들이 헐벗긴 했지만, 경치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역시 풍경에는 절벽과 강을 빼놓을 수 없나 보다. 동강을 아우르는 광경을 보고 싶다면 높은 곳에 올라야 한다. 나리소로 발길을 옮겨본다. 이곳에도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물이 깊고 조용해 절벽 아래 이무기가 산다는 전설. 해마다 3~4월이면 용이 되기 위해 운치리 점재 위에 있는 용바우를 오르내렸다고 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과연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왼쪽엔 아찔하게 솟은 절벽, 뒤로는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세, 그 협곡을 끼고 유유히 흐르는 동강까지. 자연이 그려낸 그림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고려 말 목은 이색은 시에서 정선을 ‘일천 산엔 겹겹 푸르름이 가로놓였으니 한 가닥 길은 푸른 공중으로 들어간다’고 노래했다. 또한 조선시대 문인 곽충룡은 ‘일백 번 굽이져 흐르는 냇물은 멀리 바다로 향하고 천 층으로 층계 진 절벽은 하늘에 의지해 가로 질렀네’라고 동강을 표현했다. 협곡 사이로 흐르며 비경을 만들어내는 동강, 과연 이름난 문인들이 노래하고 싶을 만큼 경치가 빼어나다.
단종의 애사가 스민 영월 청령포
강은 굽이굽이 흐르며 영월로 흘러든다. 이곳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계유정난 이후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고 끝내 죽음을 맞게 된 사건 때문이었다. 명승 제50호로 지정된 청령포는 예나 지금이나 나룻배를 타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육지 속 섬이다. 단종의 슬픈 역사가 얽혀 있어서일까? 수려한 풍경임에도 왠지 모를 외로움이 느껴진다.
배를 타고 자갈이 깔린 선착장에 내려 단종이 머물던 어소로 향한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가다 보니 제법 괜찮은 어가와 시종들이 살던 초가집이 나온다. 이 어소는 2000년 단종문화제를 기점으로 복원한 것으로 진짜 어소는 단종 사후에 무너졌다. 어소 앞에는 영조 때 이곳에 단종이 살던 곳이라는 뜻으로 세운 ‘단묘재본부시유지비각‘이 있다. 단종의 어가를 보고 솔밭으로 향하면 유명한 청령포 관음송을 만날 수 있다.
소나무의 수령이 600년이 넘었으니 단종의 슬픈 유배 생활을 지켜보았을 것이라 해서 관(觀),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라 해서 음(音), 그래서 관음송이라 불린다. 알고 보니 슬픈 이름이다.
1457년(세조 3)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은 영월 호장이던 엄흥도에 의해 매장되었다고 한다. 그 후엔 한동안 방치되다 1516년(중종 11),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라는 어명이 내려졌다. 사후 59년 만의 일이다. 단종이 노산대군으로 추봉(숙종 7)되고 단종으로 복위되었을 때는 1698년(숙종 24)이었다. 이때 단종의 묘는 장릉이라는 능호를 받게 되었고 조선의 제6대 왕으로 종묘에 위패가 모셔졌다. 시간이 흐르면 역사는 이렇게 당시와는 또 다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우리가 모두 역사 앞에 겸손해야 하는 이유다.
역사의 굽이굽이를 흐르는 동강
모든 역사에 한 곳으로만 흐르는 물길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평탄하던 물길도 암석을 만나면 굽이굽이 휘몰아쳐 돌다 평지에 이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또 평화로워진다. 평창을 거쳐 아라리촌으로, 나리소를 거쳐 영월로 굽이쳐온 강물은 내일의 역사를 만들어가며 또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이 곧 시작된다. 이 또한 우리의 역사가 될 것이다. 600년 전 단종이 바라보던 동강을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것처럼, 동계올림픽의 함성이 울리는 동강을 600년 후에도 누군가 바라볼 것이다. 오늘 동강에서 그 누군가를 생각하며 돌덩이 하나 올려본다.
글. 신지선 사진. 김병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