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7년이 지났건만....
1 3살 초등학교 5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지. ‘내가 집을 지키겠다’ 며 ‘빨리 피난길에 오르라!.는 아버지의 독촉을 받고 걸어서 피난길에 올랐다. 구미지방에 이르러 구미역 앞 민가에서 잠을 해결하고 다음 날 아침 김밥을 찍어먹을 간장을 얻으러 다녔지. 간장 한 종지를 얻어 역 앞 광장 한 구석에 자릴 잡고 앉았다.
눈 앞 역 광장에는 많은 청장년들이 ‘필승 멸공’아란 이마 띠를 두르고 뜨거운 햇살 아래 앉아 있었다. 얼마를 지나자 많은 청년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오며‘너 천규가 아니냐? 고 몇 번씩 큰 소릴 치며 손도 휘둘렀다. 이름을 부르는 청년에게 서둘러 뛰어갔다. 순간 청년은 나를 얼싸안으며 몇 번씩 ‘천규야! 천규야!’하며 힘차게 안았다. 5학년 담임을 맡으셨던 분이었다. 선생님은 ’이모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자모회의에 참석하는 어머니를 ‘이모님’이라고 불렀다. ‘이모님과 너무도 똑 닮으셨다’’면서. 어머니는 역 광장 노점에서 시원한 참외를 사와서 깎아 드리면서 ‘어서 드시라’고 몇 번씩. 이 때 역 광장 저쪽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선생님은 서둘러 일어서시며 ‘전쟁이 끝나면 가르치던 풍금 치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며 얼마 후 ‘구미역을 출발하는 저 열차를 타고 전쟁터로 가야한다’며 떠나 가셨다.
역 풀래트 홈에서는 재촉하듯 기적소리가 그치지 않고 났다. 잠시 후 북쪽으로 달리는 열차에서는 긴 기적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렸으며 열차는 꼬리를 감추었고 기적소리도 약해져만 갔다.
피난 생활을 마치고 다니던 초등학교에 달려갔으나 구미에서 뵈었던 선생님은 보이질 않더니 얼마간 시간이 흐르며 선생님이 전사하셨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등하교 하며 지나다니던 선생님의 철문 집을 찾았다. 철문에는 보지 못하던 ‘호국영웅의 집’이라는 팻말이 붙었고 그 안에 선생님의 존함이 보였다. 호국영령4명, 모두는 선생님의 형제들.
6.25전쟁이 일어나 67년이 흘렸는데 이때만 되면 피난길 구미역 광장에서 뵈었던 이마 띠를 둘렀던 은사님과 은사님을 태우고 북으로 달려간 열차가 남긴 긴 기적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들려온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2017. 6. 22.)
첫댓글 67년 전의 일을 그렇게 생생히 기억하고 있네요. 스승님의 모습과 목 메인 기적소리까지....Freedom is not free.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자유는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니지요. 이런 분들의 호국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피난길 구미역에서 담임선생님을 우연히 만나 얼싸안았지만, 시원한 참외만 나누어 먹고 서둘러
전장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타고 기적소리와 함께 떠나버린 선생님을 향한 그리움이 너무나 생생
하게 그려져 독자의 가슴에도 기적을 울려 줍니다. 피난길에서 돌아왔으나 그 선생님은 보이지
않더니 호국영웅의 집이라는 팻말이 붙었고 선생님의 존함과 함께 세형제의 존함을 보았을 때
어린 필자는 얼마나 가슴아팠을까? 동족상잔의 비극속에서도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영령께 남아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필자는 은밀하게 속삭여줍니다.
필자처럼 아련한 우리의 피란생활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