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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근대건축양식 빌린 경주제일교회 석조예배당 |
당시 석조예배당 건축물은 경주에서 가장 높은 건물, 건립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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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교회 약사略史
올해로 창립109주년을 맞이하는 경주제일교회는 고종36년 (1902년 5월10일 (대한제국광무
6년)), 안의와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어 신자 10여 명이 성건동 197번지 초가에서 첫 예배를 보며 경주읍교회’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1903년 맹의와 선교사가 치리장(당회장)으로 교회를
돌보게 되었고 1909년 구 한말 조선정부 학부대신의 허가를 받아 경주최초의 사립초등학교인 계남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는 경주 유일의 개화기 신문화를 가르치고 창출하는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게 된다. 또 교회가 세운 공식적인 선교학교로서 경주사회에 끼친 공 또한 컸다.
작가김동리 선생도 1920년 경주 제일교회 소속계남학교에 입학, 6년 후 졸업하기도
했다.1919년 박영조 목사 주도로 경주지역에 3.1독립운동을 봉기시키기도 했으며 1920년 예배당을 현 노동동 176번지로 이전하고 한옥
기와집 50평의 예배당을 건축하여 완공,1923년 에는 한옥 기와집 30평의 예배당을 증축했다.
1943년 일제의 강권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가 해체되고 ‘일본기독교조선장로회’로 재조직되어
노회(장로회)를 해체하고 경북교구회로 통합되어 1947년 ‘경주읍 노동교회’를 ‘경주제일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해방과 함께 1950년 2월에
석조예배당(100평) 기공식을 갖는다.
1980년에는 본당(현교회당)을 지어 오늘의 경주제일교회에 이르게 된다.
●석조예배당 건축 이야기
석조예배당은 1949년 8월말에 박내승
목사가 제일교회에 위임목사로 시무하면서 부산 김칠용 집사에게 예배당 건축 설계도를 의뢰하고 설계비용으로 10만원을 지불키로 한다.
전후 복구 예배당 건축비 보조비로 미화2500불이 배정되었는데 당시
환율이 1달러당 1500원이어서 환산한 금액 375만원이란거금이 들어와 석조전 본 교회 예배당 건축비로 충당되었다. 건축비용의 나머지는교인들의
건축헌금으로 충당되었다.
1949년 석조예배당 건축위원회가 조직되고
부산진교회 김칠용 집사에게 석조예배당 건축설계를 맡기게 된다. 당시 건축설계전문가는 설계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근대건축기술에 입각해서 지어졌던 것이다.
건축 책임자로는 임오순 장로를
비롯, 최경덕, 박성식을 선정하여 공사를 시작토록 가결했다.
신 예배당 건축 관계로 제일교회가 운영하고 있었던 구 계남학교의 교사 철거문제와 철거물 양도를 청원해 기숙사건물은 보존하고 교사와 사무실까지는 철거하되 목재는 사용하도록 가결되었다.
석조예배당은 당초엔 교회본당으로 지어졌고 200명 정도 수용하는 규모였으며 바닥면적이 316㎡(약 100여 평)이었다.
●간결한 아름다움이 엿보이는 근대양식의건축양식
석조예배당 건축 중 한국전쟁으로 인해 공사가 일시 중단되고 교회에 사용할 목재는 군에서 징발해 갔다고
한다. 종전 후에 다시공사가 재개되었으며 당시 건물 외장재로 사용되었던 석재는 화강암으로써 붉은기가도는 석재는 외동읍 말방리 ‘독산’에서 채취한
것이며 청색조의 석재는 현곡면의 산에서 구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순수한 경주의 돌로 건물 외장을 마감한 것이다.
아치형의 창문, 버팀벽 등으로 구성되어 일체의 장식을 배제한 단순한 형태와 밝고 기능적인 내부공간은
근대적인 건축개념으로 간결한 아름다움이 엿보이는 교회건물의 양식이다.
현재 이 건물의 전체적인 양상은 평면이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이고 앞면 중앙에 현관을 두고 건물의 왼편에 종탑건물이 위치한 간결하고 소박한 고딕식 양식의 복층건물이다. 창문은 원래 나무창틀이었는데 방한목적으로 2004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하면서 지금의 알루미늄새시 창문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천정과 바닥을 고치는데 오래된 육송마루바닥을 걷어내고 합판재질로 바꾸게 된다.
또 한국전쟁 당시 원래 건축물의 지붕은 송판이 깔려있고 그 위에 다시 기름을 담던
기름통을 펴서 골함석(양철)으로 만들어 굉장히 두꺼운 상태여서 최근까지도 누수가없을 만큼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50년대 당시 기와 이외는 쓸 만한 재료가 없었으므로 골함석이
사용되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2004년 지붕을 수리할때 뜯어내어보려 했으나 결코 쉽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의
지붕은 기존의 함석지붕위에 붉은색 샌드위치판의 아스팔트슁글을 덧대어 교체가 이뤄졌다.
한편, 1949년 10월30일 석조건물 예배당교회종탑에 올려 사용할 대형 특호 종을 구입하기도 했는데
당시 시계가 흔치 않았으므로 제일교회종탑에서 울려 퍼진 종소리는 그 동네의 시계역할을 했다.
교회 초상시나 새벽기도, 예배 30분전에 타종을 하곤 했는데 지금은 소음으로 여겨져
민원이 끊이지 않아 타종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매년 12월31일 자정에 새해를 맞이하면서 한 번 타종한다고 한다.
건축 당시의 모습
●당시 석조예배당 건축물은 경주에서 가장 높은 건물, 건립당시의 원형을 잘 가지고
있어
기와집과 초가집밖에 없던 시절의 교회의웅장한 석조건물은
시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궁핍했던 시절의 신앙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교육장소로 교회는 존재했던 것이다.
파란많은 격동과 변화의 시대에 간결한 아름다움이 엿보이는 건축물로서
건립당시의 원형을 잘 가지고 있어 지방의 개화에 앞장서는 역할을 했으며 종교적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석조예배당건축물은 경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소방서 망대만큼 종탑이 높았다고 한다.
기와건물의 구 예배당은 철거되고 그 자리에 이 예배당이 신축되고 난 뒤 150여 명이던 신자가 약500~600여 명으로 늘어날 정도로 부흥이 되었다.
당시의 에피소드 중 하나는 주일에 신자 들이 너무 많이 참석해 예배당 밖에 의자를
놔두고 예배를 볼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1982년 지금의 대예배당(본당)을 지을 당시 석조예배당을 철거하려했으나
제일교회 당회에서 숙의한 결과 보존하자는데 의견이 좁혀지면서 철거하자는 여론이
사그라졌다.
석조예배당은 현재 교회부지의 한복판에 위치해 부지활용도에서
문제가 되어 철거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경주제일교회와 비슷한 건축양식의 대구제일교회는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로
등재되어있기도 하다. 경주시 구정동에 위치한 구정교회도 제일교회 석조예배당과 거의 동시대에 지어졌으며 유사한 건축양식의 교회다.
석조예배당의 명칭은 교회본당으로 사용하다가 ‘선교관’으로 개칭되었고
다시 지금의 ‘사회봉사관’으로 변경되었다. 현재는 시민들이 필요로 해서 대관(장소청원)을 요청할 때 당회에서 수락되면 대관해주기도 한다고 한다.
이 예배당에서 대예배(본예배)4부를 보고 부대행사를 가지는 장소로도 쓰이고 있다. 보훈가족초청위로회,시 낭송의 밤, 어린이 날 축하행사 등의
시민을 위한 장으로도 그 활용도가 높다.
신축 당시의 종. 현재도 보관되어 있다
●‘신앙유물 전시관’등의 복합문화 공간으로 거듭나길
한때 철거위기에 처했지만 아직도 건재한제일교회 석조예배당을
보면서 신앙의 장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신앙유물 전시관’등의 복합문화 공간으로의 기능도 잘 수행해낼 것 같다는 바람을 가져 보았다.
끝으로 자료수집에 있어 구증에 적극적인도움을 준 제일교회 원로장로님들께
(인터뷰
참석자:변성학(1919년생),권오기(1919년생),박창익(1931년생),김경수(1937년생),권혁인(1937년생),김정석(1939년생),김의진(1941년생),임윤식(1947년생),전영두(1953년생),김은조
행정실장님)도 감사드린다.
또, 1994년 발간된 ‘경주제일교회 창립
90년사’를 참고자료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