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검정과 석파정 부암동 일대 문화 유적지 소개
세검정(洗劍亭)의 유래 서울 세검정이라는 명칭은 물 맑은 냇가에 지어진 정자를 뜻하지만 오래전부터는 세검정(洗劍亭) 정자를 중심으로 한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 ,평창동 일대를 통틀어 가리키는 지역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손과 얼굴을 닦으면 세수,세안이라고 하며 車를 닦으면 세차라고 한다. 이 계곡에서 칼날을 세우고 칼을 씻어 칼집에 넣으며 태평성대를 기원하던 곳에 정자를 세웠기에 그 정자 이름을 세검정(洗劒亭)이라 하였다. 1623년 이귀 김류 이괄 김자점 등의 서인세력들이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를 옹립한 쿠데타가 인조반정이다. 세검정(洗劒亭)은 반정의 주역들이 광해군 폐위 문제를 논의하고 칼날을 세우며 칼을 씻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 세검정 편액 ⓒ 2011 한국의산천
세검정 일대 문화 유적지 돌아보기 칼을 씻어(洗:씻을 세) 칼(劍·칼 검)집에 넣으며 태평성대를 기원하고, '실록' 편찬 후 사초를 씻어 흔적을 지우던 곳. 세검정과 차일암. 현재 서울 세검정이라는 지역은 세검정(洗劍亭) 정자를 중심으로 한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 ,평창동 일대를 통틀어 가리키는 지역 대명사로 쓰인다. 이곳의 지형은 북한산 줄기가 뻗어 내린 관계로 평지보다는 계곡이 많다. 그렇기에 인조반정 때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으나 그 후 간장 담그는 기술자와 창호지 만드는 기술자를 상주케 하여 '메주가마골' 이라는 별칭도 생겨 났으며, '실록'을 편찬 한 후 실록의 기초가 되었던 사초(史草)를 물에 지우는 세초지가 있었으며,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造紙署)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한말에는 이곳에 신식 군영(軍營)을 설치하였고, 또한 광목을 바래던 표백서(漂白署)도 있었다.
▲ 세검정(洗劍亭) ⓒ 2011 한국의산천 세검정은 차일암 위에 세워졌는데,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열조(烈祖)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반드시 이곳에서 세초를 했다고 한다. 세초지는 서대문 밖 아현동에도 있었다고 전한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된 세검정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때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고도 하며, 연산군(재위 1494∼1506)의 유흥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도 전한다. 세검정이란 이름은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 때 이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날을 세웠다고 한데서 세검(洗劍)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정자는 평면상 T자형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영조 24년(1748)에 고쳐 지었으나 1941년에 불타 없어져서 1977년 옛 모습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검정은 평화를 상징하는 정자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되었다는 점 등에서 한국적인 건축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세검정 이곳은 여름철에 詩會를 연 곳으로 유명했다. 시회는 원래 글을 통해 인격을 닦으려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주요 모임이었다. 지금은 길이 터널이 뚫리며 차량 소통도 많아지고 많은 집들이 들어서며 복잡한 도시로 변했지만, 예전 세검정 아래 맑은 물이 흐르는 모래내는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놀고 동네 아낙들의 빨래터로 이용되며 항시 맑은 물이 넘치는 풍경 좋은 곳이었다.
평창동 지명유래 서울 도성안에는 아침의 파루(罷漏), 저녁의 인정(人定)을 알리는 종루가 있었기에 그곳을 종로(鐘路)라고 부르게 되었다. 남한산성내의 가운데를 종로라고 부르고 수원의 화성의 가운데 화성행군 일대를 종로라고 부른다. 또한 평창동은 이곳에 선혜청(宣惠廳)의 창고 평창(平倉)이 있었으므로 해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세검정 길을 사이에 두고 평창동사무소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간 평창동 330번지에 소재하며, 원래 평창은 상·하로 2창(倉)이 있는데, 부평, 인천, 과천, 시흥, 안산, 양천, 양주, 용인, 고양, 파주, 교하의 11개 읍으로부터 운반해 온 대동미(大同米)를 보관하였다.
평창동 330번지의 평창은 5군영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의 창고로 상창(上倉)이 되고, 156번지의 평창은 선혜청(宣惠廳)의 창고로 하창(下倉)에 해당되는데 나중에 지었기 때문에 신창(新倉) 혹은 센창이라고 불렀다. 한편 선혜청은 여러 곳에 창고를 두었는데 북창(北倉)은 삼청동에, 별창(別倉)은 용산강(龍山江), 동강(東江)은 옛 장용영(壯勇營)에 두었으며, 그 외에도 평창(平倉), 만리창(萬里倉), 광흥창(廣興倉)을 두었다.
▲ 세검정 차일암 안내문 ⓒ 2011 한국의산천 이렇듯 지명에는 예부터 전해오는 내력이 있기마련이기에 세검정 일대의 문화유적지를 소개합니다 세검정 삼거리에서 상명대로 올라가는 입구의 왼편으로 흐르는 개천가를 따라가다 보면 홍지문과 탕춘대성을 만날 수 있는데, 홍지문은 조선 숙종 41년(1715)에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오간대수문 및 서성과 함께 건립한 문루로서 한북문 이라고도 한다. 1921년 7월에 문루가 붕괴되고 같은 해 8월에 오간대수문이 홍수로 허물어져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했고, 원래는 지금의 차도에 위치하고 있다가 복원 당시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으며, 지금의 현판은 복원당시 고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세검정 삼거리에서 상명대학교를 정면으로 보며 왼쪽은 홍지문, 오른쪽으로 가면 세검정을 만날 수있다)
▲ 홍지문(弘智門) ⓒ 2011 한국의산천 홍지문(弘智門) 및 탕춘대성(蕩春臺城) (위치 : 서울시 종로구 홍지동, 부암동내) 홍지문은 조선 숙종 41년(1715)에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하여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 및 서성(西城)과 함께 건립한 문루로서 일명 한북문(漢北門) 이라고도 한다. 문안의 신영동, 구기동 일대는 삼국시대 이후 국방의 요새지로 중시되어 왔으며 선혜청 창고, 상.하 평창, 군량미 창고 등이 있었다. 1921년 7월에 문루가 붕괴되고 같은 해 8월에 오간대수문이 홍수로 허물어져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서성과 함께 1977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탕춘대성 인왕산의 정상 밑에서부터 홍제천을 건너 구기동의 북한산 비봉 밑으로 이어지는 탕춘대성은 조선 태조 5년(1396)에 축성된 서울성곽을 보완하기 위해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이후 수도 방위를 위하여 1719년에 완성한 성곽으로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1715년(숙종 41)에 서울의 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홍지문(弘智門), 오간수문(五間水門),탕춘대성(蕩春臺城)을 건립하였다.
냇가의 작은 바위위에 기둥의 돌받침을 새우고 정자를 지었다. 이 정자는 평면상 T자형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면적이 좁고 넓음에 상관없이 아름답게 지을 수 있다는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 태종 무열왕(654∼660)이 삼국 쟁패 과정에서 죽어간 신라의 화랑과 수많은 장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현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대찰 장의사(壯義寺)를 지으며 세검정이라는 정자도 장의사(藏義寺)의 부속 건물인 정자터라고 전해진다. 연산군(1500~1505년경)때에 들어서며 사찰은 쇠락의 길을 걸으며 연산군은 탕춘대를 마련하고 수각(水閣)으로 사용되었으며, 일설에는 숙종때 북한산성을 수비하기 위하여 병영 총융청을 마련하였는데. 이것에 있는 군인들의 휴게시설로 세웠다는 말도 있다. 이후 영조 24년 (1748 ) 중건하였으며 이때 세검정 현판을 달았다. 광해군 15년(1623)에 인조가 능양군(綾陽君)으로 있을 때 이귀, 김류등과 함께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인조반정에 성공한 후 이 정자 아래로 흐르는 홍제천(모래내) 맑은 물에 칼을 씻었다 하여 세검정이라 이름하였다. '세검이라 함은 칼을 씻어 칼집에 넣고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세검정은 인조반정을 의거로 평가하여 이를 찬미하는 상징으로 만들어 진것이다.
현재의 정자는 1941년 부근에 있던 종이 공장의 화재로 소실되어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를 보고 1977년 복원한 것이다.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를 보면 정자의 받침 돌기둥이 높직한 누각형식의 건물로 도로쪽을 향하는 면에는 나지막한 담장을 돌리고 입구에 일각문을 두었으며 건물의 측면에는 편문을 두어 개울로 내려갈수있게 묘사되어 있으나 현재는 개울로 내려갈수있는 시설물은 없어서 조심스레 경사진 바위를 타고 내려갔다. 여느 정자와는 달리 'ㄱ'字 모양의 육각 정자로 되어있다.
차일암 세초지와 사관 사극을 보노라면 왕 아래 곁에서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붓을 들고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사관이다. 사관의 역사는 중국에서 부터 시작되었고 고려시대에도 있었다. 사관은 국왕이 있는곳에는 항시 같이 있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기록되고 있으니 국왕에게는 친숙하기보다는 지긋 지긋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여자사관을 뽑아 잠자리까지 기록하자고 할 정도였으니... 사관이 기록한 것을 사초라하며 이 사초를 모아서 실록을 만든다.
조선시대 사관은 예문관 소속 8명의 전임사관이 있었고 이를 가르켜 한림이라 하였다. 그외 춘추관의 겸관들은 3정승을 비롯하여 52명쯤 된다. 전임사관들이 입시하는 제도가 정착할때 까지는 군왕과 사관들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사관들이 모든 정사에 입시하게 된것은 사관을 비롯한 젊은 신진인사들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한림 사관 관련 글보기 클릭 >>> http://blog.daum.net/koreasan/15604420
▲ 세검정과 차일암/차일을 치기위해 기둥을 세우려고 바위를 파낸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 2011 한국의산천 차일암의 차일을 칠때 기둥을 세웠던 흔적. 산과 바위가 어우러려 물이 맑은 세검정(洗劒停) 일대는 서울시민들의 둘도 없는 소풍 장소였다. 인왕산을 앞에 두고 북악산을 뒤로한 공기 맑고 풍경 좋은 세검정. 북악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계곡물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육각형의 작은 정자인 세검정은 '차일암'이라 부르는 평평한 바위에 세워졌는데, 왕조의 실록을 편찬한 뒤에 그 원고가 되는 사초를 이 바위 위에서 차일(천막)을 치고 맑은 물에 한지에 쓴 사초를 집어넣어 먹글씨를 씻어버린 일에서 비롯되었다.
차일(遮日) 차일이란 햇볕이나 비를 막기위해 하늘을 가리는 포장으로 학교 운동회때 귀빈석에 쳐진 천막을 생각하면 쉽다. 예전에는 광목 ·삼베로 만들어서 혼인이나 회갑잔치 등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볕을 막기 위하여 사용하며 장례식 때도 사용한다. 차일을 우산처럼 대나무에 기름종이를 발라 쓰는 것을 차일산(傘)이라 하는데 옛날 야외의 시연(詩筵)이나 향연(饗宴) ·과거시험 ·한시백일장 같은 데에서 사용하였다.
차일암의 세초연 실록은 '당대사'였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현대사인 셈이다. 그래서 당연히 그 때 살았던 사람들이 보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었다. 심지어 군왕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원칙이 제대로 지켜진 실록은 오직 '조선왕조실록' 뿐이었고,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이 빛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실록'을 만들기 전에 사관들이 매일 왕의 곁에서 모든것을 일일이 기록한 글이 사초이다. 사초(史草)란 실록 편찬의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자료였다.
사초편찬 과정은 크게 초초, 중초, 정초의 3단계로 나뉜다. 실록은 이 가운데 정초본을 대본으로 삼아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시대에 따라 4부 또는 5부를 만들었다. 실록청은 총재관(總裁官), 도청(都廳), 방(房)의 3단계로 구성되었으며 실록의 편찬이 3단계의 공정을 거쳐 이루어지며 실록을 편찬할 때 주로 이용되었던 자료를 보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은 바로 사초와 시정기(時政記)였다. 그 밖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의정부등록(議政府謄錄)'과 후대에는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 등을 비롯하여 '각사등록(各司謄錄)', 개인의 일기나 문집, 소(疏), 야사 등 많은 자료를 참고하였다.
'실록' 편찬이 끝나면 글쓴이의 비밀을 보장하고 그 기록을 없애버리기 위해 초초본과 중초본을 세검정에서 흐르는 물에 세초(洗草)하여 먹으로 쓰여진 글씨를 없애고, 종이를 재생하는 차원에서 세검정 근처에 있는 조지서(造紙署: 아래 상세안내 참고)로 보내져서 다시 종이로 재생되었다.
세초연(洗草宴)은 실록의 편찬이 완료된 이후 사초(史草)나 초고(草稿) 등을 물에 씻어 지우며 여는 잔치를 말한다.
세초연(洗草宴)을 노래한 한시(漢詩) 寸管那能盡畵天 작은 붓으로 어찌 하늘을 다 그려내리요? -조문명, 학암집 권2 <세초연(洗草筵)>-
조선왕조실록은 세계 최대의 역사서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의 가치는 우선 양적, 질적으로 어느나라에서 찾아 볼수없는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로부터 철종 이원범까지의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편년체 형식으로 쓴 방대한 역사 기록이다. (※ 편년체란 국왕의 재임기간을 날짜별로 있었던 사건을 기록한 역사 편찬 체제) 이렇게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의 이면에는 서릿발 같은 조선의 선비정신이 형형이 빛나고 있다. 바른 역사와 직필을 위해 일개 9품 벼슬아치가 하늘 같은 왕에 맞서간 감투가 있으며, 끝내 붓을 휘지 않고 초개처럼 목숨을 내던진 수많은 사관들의 붉은 자국이 선연히 남아 있다. 후세에 바른 역사를 전하기 위해 붓자루 하나에 목숨을 걸었던 조선의 사관들
국왕이 가장 겁냈던 사람은 사관이었다. 간관은 살아있을 때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만, 사관은 보고 듣는 대로 기록하였다. 사관은 국왕의 자신이 사후에 듣기 싫은 이야기를 기록하기 때문. 그래서 국왕과 사관 사이에 실랑이와 긴장관계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관들은 늘 군왕의 곁에,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사관들은 당대의 사초는 물론, 바로 선대왕의 실록도 국왕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게 기록한 사초가 실록으로 편찬되면 이곳 세초지에서 지워지고 종이는 다시 재생되었다.
세검정 인근에 인근에 조지서터가 있다. 조지서(造紙署) 조선시대 궁중과 중앙정부기관에서 사용하는 종이와 중국에 공물로 보내는 종이 등을 생산하던 관설 제지소.1415년(태종 15) 조지소(造紙所)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1465년(세조 11) 조지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서울 근교의 물이 좋고 넓은 바위가 있어 한지(韓紙) 제조에 적당한 자하문(紫霞門) 밖 탕춘대(蕩春臺)에 설치되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제지 기술자인 지장(紙匠)이 81명, 보조역이라 할 수 있는 차비노(差備奴)가 90명이 있던 수공업장이었다. 지장은 조선의 '부역동원제'에 의해 3교대로 동원되었다. 이들은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제지기술자들이었고, 따라서 조지서에서 생산되는 종이는 국내에서 최고 품질의 종이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까지 천하무비(天下無比)로 알려졌었다. 조지서에 소속된 지장들은 이미 조선의 전기부터 조지서 근처에 하나의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생산에 종사할 만큼 전업수공업자화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한때 조지서가 큰 타격을 받기도 했는데, 1626년(인조 4)의 기록에 의하면 전쟁 후에 조지서에는 겨우 5명의 지장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승려지장을 동원했다고 전한다.
▲ 총융청터 ⓒ 2011 한국의산천 사찰 장의사터(藏義寺址)와 총융청터 현재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는곳이 신라 때 창건된 장의사(藏義寺)의 옛터이며 그 후 총융청이 들어서있던 곳이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전하는 절의 창건과정을 보면 7세기중엽 한반도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간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무렵 신라의 화랑인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 둘은 황산벌(지금의 논산지방)에서 한강유역의 쟁탈권을 확보하기 위해 백제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밀고 밀리는 와중에서 두 화랑은 선봉에 나서 신라군사를 독려하며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고, 마침내 둘은 장렬하게 최후를 마치게 된다. 절은 이 두 청년과 전사자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659년(무열왕 6)무열왕이 세운 추복사찰(追福寺刹)이다. 나라를 위해 젊은 목숨을 바친 두 화랑의 의로움이 서려있다는 뜻에서 장의사라 하였다. 이후 두 화랑의 회생정신을 기리고자 신라인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 규모는 매우 컸으며 고려시대의 몇몇 금석문을 보면 원종대사 찬유(869∼958), 법인국사 탄문(900∼975), 자정국존 미수(1240∼1327)등의 고승들이 이곳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신라때 국왕에 의해 창건되어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오랜 세월 영화를 누려 왔던 장의사는 이제 연산군시대에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터만 남아 있던 장의사에 1712년(숙종 38) 군사훈련소인 연무대가 설치되었고, 1747년(영조 23)에는 총융청(總戎廳)이 설치되어 3백여칸의 건물이 들어섰다. 1886년 이후에는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훈련장이 되기도 하였다. 1930년 후반에 국민학교가 세워졌다가 1948년 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게 되었다.
심산유곡의 느낌을 주는 석파정
▲ 인왕산의 동쪽 줄기가 벋은 바위와 계곡이 있는 중턱에 자리한 석파정 전경 ⓒ 2011 한국의산천 자하문고개에서 상명대학교 방향으로 내려가면 자하문 밖 한길에서 서쪽으로 조금 들어간 부암동 산 16-1번지 넓은 터전에는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6호인 석파정(石坡亭)이 자리하고 있다. 주위의 수려한 경관과 함께 정교 화려한 정자와 건물이 어울려 조선말기의 대표적인 별장으로 수려한 산수와 계곡을 배경으로 거암(巨巖)과 오래된 장송(長松)이 많아 세검정 자하문 밖으로 통칭될 정도로 한양 도성의 경승지로 꼽혔던 곳이다. 석파정은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金興根)의 별장이었다. 바위에 삼계동(三溪洞)이란 글자를 새겨 놓아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 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별장을 차지하면서 바위산이었으므로 대원군이 아호를 석파(石坡)라 하고 정자이름을 석파정(石坡亭)이라 하였다. 경내에는 안태각(安泰閣), 낙안당(樂安堂), 망원정(望遠亭),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 등 7동의 주요 건물이 남아 있으며, 뜰에는 오래 된 소나무들이 차일처럼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사랑채는 1958년 종로구 홍지동으로 옮겨져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 현재는 아무도 돌보는이 없이 송사에 휘말려 잡풀만 가득한 석파정 ⓒ 2011 한국의산천
▲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안정적이며 아늑한 느낌을 주는 석파정 전경 ⓒ 2011 한국의산천 석파정의 원래 소유자는 안동김씨의 세도가 김흥근이었다. 아버지 김명순(金明淳)이 순조의 장인인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과 사촌간이며, 일찍이 벼슬에 올라 예조판서와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성격이 격하고 방자한 면이 있어 한 때 탄핵을 받아 광양으로 유배당하기까지 하였다. 그 후 대원군이 집권의 야욕을 보이자 조의석상(朝議席上)에서 공개적으로 그를 비난함으로서 대원군의 미움을 사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대원군이 집권한 후 많은 토지를 빼앗겼다. 특히 그가 소유했던 석파정은 장안에서 경치가 좋은 곳으로 이름이 나 있어서 대원군이 팔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팔지 않았다. 이에 대원군이 한가지 꾀를 내어 그에게 하룻동안 석파정을 빌려 줄 것을 간청하여 허락받았는데, 대원군은 그의 아들 고종을 대동하고 다녀 갔다. 국법에 임금이 와서 묵고 간 곳에는 신하가 감히 다시 찾을 수 없게 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석파정은 대원군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 석파정 ⓒ 2011 한국의산천 조선말의 우국지사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 권1에는 석파정의 내력이 적혀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김흥근은 흥선 대원군이 정치를 간섭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곧 대권을 손에 넣은 흥선대원군은 김흥근을 미워하며 그의 재산을 빼앗기 시작했다. 삼계동에 있는 김흥근의 별장은 한성에서 가장 유명한 정원이었는데, 하루는 흥선대원군이 그 별장을 팔 것을 간청하였으나 김흥근이 듣지 않자 하루만 빌려 놀게 해달라고 하였다. 서울의 옛 풍습에 따라 정원을 가진 사람으로서 빌려주지 않을 수 없어 김흥근이 억지 승락을 하자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행차하도록 권하고 자신도 따라갔다. 그 후 국왕이 거처한 곳을 신하가 감히 거처할 수 없는 곳으로 생각하고 김흥근이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게 되자 결국 이 별장은 운현궁의 소유물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의 후손인 이희(李熹), 이준(李埈), 이우의 별장으로 세습되며 사용되어오다가 6·25 전쟁 후에는 천주교가 경영하는 코롬바고아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 三溪洞 각자가 새겨진 바위 ⓒ 2011 한국의산천 사랑채와 '三溪洞'이 새겨진 바위 사이에 위치했던 건물은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1958년 종로구 홍지동 125번지로 옮겨갔는데, 그 후 1974년 '대원군별장'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아래 대원군 별장 사진 참고)
▲ 석파정 내에 있는 소수운련암 ⓒ 2011 한국의산천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 물 속에 깃들여 있으면서 구름으로 발을 친 암자)'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글씨
석파랑 ▲ 제일 높은 건물이 대원군 별장 석파랑(石坡廊)ⓒ 2011 한국의산천
▲ 대원군 별장에서 내려본 석파랑 정원 ⓒ 2011 한국의산천 1989년 김**씨가 일부를 매입하여 '석파랑'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전통 궁중요리 음식점으로 경영하고 있는 석파랑은 서예의 대가인 소전 손재형(1903∼1981)의 문서루로, 문 안으로 들어서면 입구의 오른쪽에 손재형 선생의 작품활동과 역사성을 기념하여 1995년 세운 표석이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은 1958년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이 곳에 집을 지으면서 뒤뜰 바위 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손재형은 일본으로 유출된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천신만고 끝에 한국으로 가져온 인물로 유명하며, 그는 말년에 이곳에서 작품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 석파랑에 있는 대원군 별장ⓒ 2011 한국의산천 사랑채였던 이 별장은 청나라에서 들여온 호벽으로 만들어졌고, 'ㄱ'자(字) 형의 대청마루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난간과 이어져 있었다. 원형으로 된 창문이 멋스럽고 이색적이다. 대원군 별장(大院君 別莊)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인 석파정의 사랑채에 부속되어 있던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ㄱ'자형 평면으로, 대청을 중심으로 하는 정면 부분과 내부 구조, 그리고 창살은 전통 한옥형식을 갖추었으나, 외형을 이루는 전반적인 모습은 조선말기에 전래된 중국 청나라 건축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전하면서 원 모습대로 복원하지 않고 평면과 구조를 부분적으로 바꾸었으며, 대청방은 흥선대원군이 즐겨 그리던 사군자의 난초를 그릴 때만 사용하던 방이라고 한다. 석파랑은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만들 당시에는 건축 자재를 모으는 데만 30년, 건축기간만도 6년이나 걸렸고, 담은 덕수궁의 돌담이 헐릴 때 30트럭분을 사다가 쌓았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고 전한다. 그만큼 뛰어난 건축술로 인해 조선 상류사회의 대표적인 사랑채로도 유명하다. 석파랑의 마당 왼편에는 지금 음식점으로 쓰이는 건물이 있고, 마당 가운데부터 시작되는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높은 곳에 1958년에 이곳으로 이축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이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 세검정에 있는 소설가 이광수가 머물렀던 홍지동 별장 (기와지붕) ⓒ 2011 한국의산천
상명대학교로 들어가는 상명교를 건너 중국 음식점 바로 왼쪽 좁은 골목길로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가면 춘원 빌라 못미쳐서 춘원 이광수가 머물렀던 홍지동 별장이 있다. 바로 이곳이 춘원이 '이차돈의 사'와 '그 여자의 일생' 등을 썼던 홍지동 40번지, 이광수의 옛집이다.
현재 이곳에 살고있는 김재철씨가 이집을 매입한 것은 1972년 이었는데, 그당시에는 이 한옥이 워낙 낡고 퇴락하여, 헐어버리고 2층 벽돌집으로 개조하려 했었다. 춘원헌 근처에는 '춘원' 이라는 이름의 빌라도 있어 이곳을 찾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이광수(李光洙, 1892~1950.10.25 , 춘원 春園 평북 정주 생.)
1910년 동교를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재차 도일,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입학, 1917년 1월 1일부터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無情)'을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하여 소설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였다. 1919년 도쿄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1921년 4월 귀국하여 허영숙(許英肅)과 결혼,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썼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었으며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고 창씨개명을 하였다.
광복 후 친일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1949년 반민특위(1948년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집행하기 위해 제헌 국회가 설치한 특별 기관)에 회부 반민법으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滿浦)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작품 : '재생'(1924), '마의태자(麻衣太子 1926), 단종애사 (1929), 흙(1932-1933), 이순신(1931), 유정(有情 1933), 사랑(1938)>
▲ 무계정사 앞의 빈 공터는 빙허 현진건이 살던 집터라는 표석이 있다 ⓒ 2011 한국의산천 우리에겐 'B사감과 러브레터'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빙허 현진건. 부암동 동사무소 옆을 지나 약 200m 올라가면 무계정사와 함께 소설가 현진건 집터가 나온다.
호는 빙허(憑虛). 1900년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도쿄[東京] 독일어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상하이외국어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20년 '개벽'지에 단편소설 '희생화'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 1921년 발표한 '빈처(貧妻)'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으며 '백조(白潮)' 동인으로서 '타락자(墮落者)'· '운수 좋은 날'· '불' 등을 발표함으로써 염상섭(廉想涉)과 함께 사실주의(寫實主義)를 개척한 작가가 되었고 김동인(金東仁)과 더불어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가 되었다. '시대일보'· '매일신보'의 기자로 근무하였고 1935년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일장기 말살사건(日章旗抹殺事件)으로 1년간 복역하고 신문사를 떠났다.
작품으로는 '술 권하는 사회'· '할머니의 죽음' · '지새는 안개'· '까막잡기'· 'B사감과 러브레터'· '사립 정신병원장' 등 단편이 있으며 '적도(赤道)'· '무영탑(無影塔)'· '흑치상지(黑齒常之)' 미완(未完) 등 장편이 있다. 생계를 도모하기 위해 양계를 하다가 실패, 불우한 만년을 보내다가 병사하였다.
조선후기 신지식인 안평대군의 집과 별장 ▲ 무계정사 안내판 ⓒ 2011 한국의산천
자하문터널 위 부암동사무소 뒷길을 따라 올라가다 현진건 집터 표석이 나오고 돌계단을 오르면 무계동(武溪洞)이라 새긴 바위가 나타나고, 그 뒤에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오래된 건물이 서있다. 주소로는 종로구 부암동 329-1, 서울시 유형문화재 22호인데, 이곳이 바로 무계정사 터이다.
세종이 당호를 지어준 비해당 “네 당호(堂號)가 무엇이냐?” 안평대군이 대답을 못하자, 세종이 시경에서 증민(蒸民)편을 외워 주었다.
지엄하신 임금의 명령을 중산보가 받들어 행하고, 나라 정치의 잘되고 안됨을 중산보가 가려 밝히네. 밝고도 어질게 자기 몸을 보전하며,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기네.
이 시의 마지막 구절 원문은 “숙야비해(夙夜匪解) 이사일인(以事一人)”인데, 세종이 여기서 두 글자를 따 “편액을 ‘비해(匪懈)’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재주가 뛰어난 안평대군이 장자가 아니었기에, 자신이 왕위에 있는 동안은 물론, 동궁이 즉위한 뒤에도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기라.”는 당부를 ‘비해(匪懈)’ 두 글자에 담아 집 이름으로 내려준 것이다. 인왕산 기슭 수성동에 비해당을 지은 뒤에 안평대군은 집 안팎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 연못과 바위 등에서 48경을 찾아냈다.
중국에서 소상팔경(瀟湘八景)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를 짓는 문인들의 관습이 유행하자 조선에서도 그런 풍조가 생겼는데, 안평대군은 무려 48가지의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냈다.48경은 다양한 장소와 시간에 따라 “매화 핀 창가에 흰 달빛(梅窓素月)” “대나무 길에 맑은 바람(竹逕淸風)” 등의 네 글자로 명명되었다. 누군가가 그림을 먼저 그리고 안평대군이 칠언 화제시를 지었다. 그 다음에는 당대의 문인학자들을 인왕산 기슭 비해당으로 초청하여 48경을 함께 즐기며 차운시를 짓게 했다. 우리 조상들은 요산요수(樂山樂水)라는 말 그대로 산과 물을 즐겼는데, 안평대군은 한강가에도 담담정(淡淡亭)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동국여지비고’에는 담담정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안평대군이 지은 것인데, 서적 1만권을 저장하고 선비들을 불러모아 12경 시문을 지었으며,48영을 지었다. 신숙주의 별장이다.” 안평대군은 서적만 1만권을 소장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서화·골동품을 수집하였다. 신숙주가 1445년에 쓴 ‘화기(畵記)’를 보면 안견(安堅)의 그림 30점, 일본 화승 철관(鐵關)의 그림 4점, 그리고 송나라와 원나라 명품 188점을 소장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곽희(郭熙)의 작품이 17점이나 되는데, 이 그림은 안견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문인 학자들에게 인심을 얻자, 수양대군은 김종서와 황보인을 죽이고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뒤에 안평대군까지 처형하고는 이 정자를 빼앗아 신숙주에게 하사하였다. 안평대군이 주택이나 별장을 아름답게 꾸미고 완상하던 취미는 그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성종 때에는 호화주택과 별장을 금지하라는 명령까지 내릴 정도가 되었다.
▲ 무계동(武溪洞) 각자가 세겨진 바위 ⓒ 2011 한국의산천 몽유도원도를 인왕산에 실현한 별장 무계정사 1447년 4월20일 밤에 안평대군이 박팽년과 함께 봉우리가 우뚝한 산 아래를 거닐다가, 수십 그루 복사꽃이 흐드러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숲 밖에서 여러 갈래로 갈리며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휘어져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桃源)입니다.” 하고 알려 주었다. 말을 채찍질하며 몇 굽이 시냇물을 따라 벼랑길을 돌아가자 신선마을이 나타났다. 안평대군이 박팽년에게 "여기가 바로 도원동이구나."하고 감탄하면서 산을 오르내리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복사꽃이 우거진 낙원에 다녀온 이야기를 도연명(陶淵明)이 ‘도화원기(桃花源記)’라는 글로 소개한 뒤에, 무릉도원은 중국과 조선 문인들에게 이상향으로 널리 알려졌다. 안평대군은 꿈에서 처음 가본 곳이지만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임을 깨닫고, 화가 안견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안견이 사흘 만에 그려 바친 그림이 바로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도연명 이후에 많은 문인들이 무릉도원을 꿈꾸었고, 고려시대 문인 이인로는 청학동(靑鶴洞)을 찾아 글을 지었다. 안평대군은 그림이 완성 된지 3년 뒤인 1450년 설날에 치지정(致知亭)에 올라 ‘몽유도원도’라는 제첨(題簽)을 쓰고 시를 지었다.(유영봉 교수 번역)
세간의 어느 곳을 무릉도원으로 꿈꾸었던가? 산관의 차림새가 오히려 눈에 선하더니 그림으로 보게 되니 정녕 호사로다 천년을 전해질 수 있다면 ‘내가 참 현명했구나’ 하리니. 안평대군은 꿈속에 거닐던 복사꽃 동산을 인왕산 기슭에서 실제로 찾아 별장을 지었다. 안평대군과 사육신의 문장은 상당수 없어졌는데, 다행히도 박팽년이 그 별장에서 지은 시 아래에 안평대군의 글이 덧붙어 있어, 별장 지은 사연을 알 수 있다. “나는 정묘년(1447) 4월에 무릉도원을 꿈꾼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9월 우연히 유람을 하던 중에 국화꽃이 물에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는, 칡넝쿨과 바위를 더위잡아 올라 비로소 이곳을 얻게 되었다. 이에 꿈에서 본 것들과 비교해 보니 초목이 들쭉날쭉한 모양과 샘물과 시내의 그윽한 형태가 거의 비슷했다. 그리하여 올해 들어 두어칸으로 짓고, 무릉계(武陵溪)란 뜻을 취해 무계정사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니, 실로 마음을 즐겁게 하고 은자들을 깃들게 하는 땅이다. 이에 잡언시 5편을 지어 뒷날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비하고자 한다.” (유영봉 교수 번역)
안평대군 죽은뒤 무계정사 철거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집 이름은 글자 그대로 '무릉계에 자리한 정사'라는 뜻인데, 한시 5수 뒤에 "경태(景泰) 2년 신미"라고 쓰여 있어 1451년에 창건했음을 알 수 있다. 창건연대는 유영봉 교수가 최근의 논문 ‘비해당 사십팔영의 성립 배경과 체제’라는 논문에서 밝혀냈다. 수성동에 있던 비해당에서 인왕산 기슭을 넘어 무계정사까지 가는 길은 그다지 멀지 않다. 안평대군은 꿈속에 노닐던 곳이라고 하며 별장을 지어 문인학자들을 초청하고 시를 읊거나 활을 쏘며 놀았다. 하지만 단종실록 원년 5월19일 기사에는 이곳을 방룡소흥지지(旁龍所興之地)라고 하며 안평대군을 비난했다. 왕기가 서린 곳인데, 장자가 아닌 왕자가 왕위에 오를 곳이란 뜻이다. 계유정난 직전에도 수양대군 파에선 안평대군이 무계정사 지은 뜻을 왕권탈취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계유정난이 성공한 뒤인 10월12일에는 “처음부터 지을 장소가 아니었으니 무계정사를 철거하라.”고 사간원에서 아뢰었으며,10월25일 의정부에서 안평대군을 처형하자고 아뢴 죄목 가운데 첫번째가 바로 이 자리에 무계정사를 지었다는 점이었다. ‘몽유도원도’에는 김종서, 이개,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서거정 등 당대 최고의 문신 23명이 참여하여 친필로 글을 썼다. 그러나 6년 뒤에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세종과 안평대군이 아꼈던 이들의 운명은 크게 둘로 갈라졌다. 신숙주·정인지 등은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에 오르고, 안평대군과 김종서는 목숨을 잃었으며, 성삼문·이개·박팽년 등의 사육신은 3년 뒤에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다가 실패하여 모두 역적으로 처형당하고 집현전까지 폐지되었다. 무계정사는 곧 무너지고, 지금은 안평대군의 예언 그대로 그림만 1000년을 남아 전한다.
창의문 (자하문) ▲ 자하문 고갯마루 근처 작은 공원안에 서있는 故 최규식 경무관(당시 종로경찰서장)의 동상 ⓒ 2011 한국의산천 1.21사태 이 사건은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民族保衛省) 정찰국 소속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하여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하였을때 던 사건으로.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휴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세검정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는 한편,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살상당하였다. 군 ·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많은 시민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그날 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총경 최규식(崔圭植)이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순직하였다. 그리고 당시 최경무관과 함께 순직한 고 정종수경사의 순직비도 현재의 동상 옆에 세워져 있다. 그날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金新朝)는 그동안 김일성의 허위선전에 속아 살아왔음을 깨닫고 한국으로 귀순하여 현재까지 생존하고 있다. 최 경무관 피격지점 근처 골목에는 또 1979년 10.26사태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궁정동 안가도 숨어있다. 이러니 어찌 이 길이 쿠데타와 암습의 길이 아니랴. 그러나 자하문 길은 사시사철 언제나 아름답고 호젓한 길이다. 말 없는 역사의 교훈을 가슴에 안고서…
창의문 조선시대 세검동 일대는 산이 높고 물이 맑아 경치는 좋으나 논밭이 없고 다른 생산이 없어서 주민들이 생활고를 못이겨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한성시전(漢城市廛)에서 매매되는 포목의 마전(麻廛)과 각 관청에서 쓰는 메주와 종이 제조의 권리를 이 곳 사람들에게 주어서 생활을 유지하게 하였다. 그제야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면서 이 곳에 알맞는 여러 과목(果木)을 심어 능금·자두밭으로 개발하여 생활의 자립을 확립하였다 한다. 세검동 일대는 봄에는 온갖 꽃의 아름다운 빛, 여름에는 싱싱한 과실, 가을에는 불타는 듯한 단풍, 다듬은 듯한 반석(盤石), 옥같이 맑은 시냇물이 온 골짜기를 장식하였다. 특히 세검동 일대는 능금과 자두의 명산지를 이루었다.
이곳 자하문은 파란만장한 역사의 발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역사적으로 큰 사건은 다. 조선시대 때의 인조반정(仁祖反正),쿠데타군은 김류를 대장으로 삼아 지금의 홍제동에 있던 홍제원(조선시대의 국립여관)에 집결, 경비가 허술했던 창의문을 도끼로 부수고 고갯길을 넘어 창덕궁으로 집입하였고, 1968년 북한의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공격하고자 침투했던 일명 김신조사건이라 불리는 길이며 또한 김신조사건(1.21사태), 그리고 1979년의 12.12사태 때다. 당시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이 신군부 세력에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분노, 탱크부대를 자하문고개에 집결시키고 경복궁 30경비단에 모여 있는 신군부를 압박했다. 그러나 그는 차마 아군을 상대로 무력진압을 하지 못했고, 자신도 곧 체포되고 만다.
▲ 창의문(자하문) ⓒ 2011 한국의산천 그리고 창의문을 장의문(莊義門 혹은 藏義門)이라고도 하였는데, 그로 해서 청운동·적선동 일대를 장의동(莊義洞), 줄여서 장동(莊洞)이라 칭하였다. 또 성밖 신영동에 있던 장의사(藏義寺)의 이름에 연유하여 일명 장의문(藏義門)이라고도 하였다.
창의문은 도성 4소문의 하나로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의 서쪽 날개부분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다. 태조 5년(1396) 서울성곽과 4대문 4소문이 건설될 때 함께 건립되었다. 그런데 창의문은 건립된지 18년 만에 한때 폐쇄되기도 하였다. 즉 태종 13년(1413)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백악산 동령(東嶺)과 서령(西嶺)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아니 된다 하여 동령에 있는 숙청문과 서령에 있는 창의문을 막을 것을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두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원래 이 두 문은 높은 산중턱에 위치하여 길이 매우 험하고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으므로 숙청문에서는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 밖 경원가도로 나가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고, 창의문에서는 서쪽으로 세검정 골짜기로 빠져나와 홍제원의 경의가도로 나가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또한 경원가도와 경의가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데에는 각기 동소문과 서소문을 이용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하므로 두 문을 폐쇄하여도 별반 지장이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후 세종 28년(1446)에 창의문에 대한 출입통제가 완화되어 왕명을 받아 출입하는 외에는 항상 닫고 열지 않도록 하였으나,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 9월 2일에 혜화문과 창의문을 닫으라는 명을 내린 것을 보면 항상 닫아 두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도성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창의문은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같은 양식의 축대를 조그만 규격으로 쌓고 그 위에 단층 문루를 세웠다. 정면 4간, 측면 2간,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구성된 이 목재 문루는 견실하고 정교하며 홍예(虹霓:석조로 된 무지개 모양의 문틀) 또한 아담하다. 지금도 성벽의 일부가 연속되어 있다. 다락에는 나무로 만든 큰 닭을 걸어 놓았는데, 그 까닭은 문 밖의 지세(地勢)가 지네와 흡사하기 때문에 그 기세를 제압하기 위하여 지네와 상극인 닭의 모양을 만들어 걸어놓았다 한다.
▲ 창의문 ⓒ 2011 한국의산천 창의문에 얽힌 역사적 사실 중에서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관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1623) 이귀(李貴) 등 서인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李爾瞻)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 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유(金 ), 김자점(金自點), 이괄(李适) 등은 반정계획을 진행하던 중 계획이 일부 누설되었으나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 장단의 이서군(李曙軍)과 이천의 이중로군(李重老軍)은 홍제원에서 김유군(金 軍)과 합류하였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여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이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하였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창의문 고개로 오르기 전에 길가에는 청계천 발원지라는 작은 표석이 서있다.
▲ 부암동 일대 문화유적지 ⓒ 2011 한국의산천 서울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부암동 깊은 계곡과 좁은 골목길을 걷다보면 많은 문화유적지와 성곽 그리고 아름다운 숲 백사실계곡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부암동 가는 길 :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150m 버스정류장 7212, 1020, 1020, 7022번 버스, 자하문고개, 부암동주민센터 하차
▲ 봄이 오는 길을 걸으며 ⓒ 2011 한국의산천 사물은 아는만큼 보이고 보면 볼수록 알게 된다. 우수가 지나더니 봄이 다가온다. 겨우내 움추렸던 온갖 사물이 다시 움틀거리며 태동을 한다. 바쁜 나날이지만 짬내어서 봄을 맞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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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의산천 원문보기 글쓴이: 한국의산천
첫댓글 봄이오는 길에서 세검정과 석파랑을 눈여겨봅니다 꽃삽 어딨지?
인조반정에서 싯퍼런 칼날을 씻었다는 세검정과
대원군이 아꼈던 별장 석파정을 음미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