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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ed Papers on Christian Language Culture. For the guidance of juveniles and refinement of the national (Korea) language, this paper argues that heart is to language as the interior is the exterior; language, spirit, and life are to the cause and the result as flood, flesh, and bone are to the ones, with the two combined together. And the greatest of these three -language, spirit and life- is language. This paper also proposes that, in our daily life of language, the parents in family, the instructers in schools and social leaders in our society must give a good example to the juveniles. Accordingly this paper proposes concerning about thinking, the way to thinking, the kernel structure of language, something traditional and human nature. And this paper argues that juveniles language is like the adult mirror. Finally, this paper also argues that, in our national language, utterance or sound must be clear and beautiful, words fresh and abundant, and the structure systematic. (Educational Board of Choong-gu, Seoul)
자연은 우리 삶의 터전이면서 생명과 아름다움의 근원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사람들의 어리석음으로 이런 자연이 파괴되어 모든 생명이 위협받고, 아름다움의 기준도 괴상하게 바뀌어 가고 있다. 도시의 공기가 매연으로 더럽혀지고 맑던 물이 썩어서 우리 몸을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그리고 도시의 그 어떤 화려한 꽃보다도 시골의 들녘에 핀 이름 모르는 작은 들꽃 한 송이가 더 깨끗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문명의 현란함에 정신이 쏠려 아름다운 자연이 우리 정서의 토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연이 우리 삶의 물질적 바탕이라면, 사랑은 사람들이 밝게 생각하면서 서로 어울려 따뜻하게 살 수 있는 우리 삶의 정신적 바탕이다. 사람은 사랑하는 만큼 알고 느낄 수 있으며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5살의 천재 소녀 첼리스트 장한나가 “첼로도 사람을 닮아 사랑 받는 만큼 소리낸다.”고 말했듯이, 무엇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알고 성취해 내는 근본의 힘이 아닌가? 그리고 사람은 사랑할 때와 사랑 받을 때 가장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면서 행복해 하고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행복해 한다. 이렇게 사람은 남을 사랑하고 도우면서도 행복해하고 사랑과 도움을 받으면서도 행복해 한다. 아름다운 자연을 사랑하면서도 행복해 하고 자연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행복해 한다. 이렇게 볼 때 출세하고 돈 많이 벌어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전통적인 우리의 가치관은 얼마나 세속되고 부질없는 생각인가?
그러므로 자연과 사랑이 파괴된 인간사회보다 더 불행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요즈음 우리 청소년들의 심성이 거칠어지고 생각의 줏대가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이 자연과 사랑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문명이 우리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는 반면에 자연을 파괴하고, 물질이 경제생활을 기름지게 해 주는 반면에 사랑을 메마르게 하는 것이 바로 현대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자연과 문명, 사랑과 물질의 조화를 이루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현대인의 지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지혜를 비롯하여 사람은 사물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생각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생각하게 되어 ‘사랑’과 ‘생각’은 그 말뿌리가 같아서, 요즈음 청소년들이 ‘생각하기 싫다’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곧, ‘사랑하기 싫다’는 말과도 같다. 부모나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할 줄 모르며, 생각을 진지하게 하지 않으면서 괴상한 치장과 행동을 개성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과 관계가 깊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거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도 그 뜻이 더 깊어질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는 말에서도 보듯이 운명의 시초를 생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대한 관심, 이것이 내 삶의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시작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의 문은 손잡이가 안쪽에만 있어서 내가 문을 열지 않으면 밖에서 남이 문을 열어 줄 수가 없다. 내 생각의 문을 활짝 열고 내 생각을 스스로 넓혀나가는 것이 바로 ‘깨달음’일 것이다.
그러면 삶의 핵인 생각은 무엇으로 하나? 말로 한다. 생각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것은 소리없는 말의 흐름이다. 그래서 ‘말은 생각의 길이다.’ 빛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의 겉모양을 드러낸다면, 말은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의 주관적 가치를 드러낸다. 그래서 말은 죽어 있는 기호의 세계가 아니라, 살아 꿈틀거리는 영혼의 세계이다. 그래서 성경 요한복음 1장에서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과 비슷하게 쓰이는 말로서는 “정신ㆍ사고ㆍ사유ㆍ견해ㆍ인식ㆍ관념ㆍ마음ㆍ얼” 등이 있는데, “생각ㆍ마음ㆍ얼”의 세 낱말만은 그 뜻의 관계를 다음 쪽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생명의 대부분은 알에서 태어난다. 새나 물고기, 곤충 들은 물론이지만 젖먹이 동물로 알이 암컷의 뱃속에서 새끼로 자라 태어나며, 식물의 알은 씨알이라고 한다. 그래서 알처럼 둥근 모양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지도 모른다. 내 생명의 근원이니까.
구분/낱말 |
생각 |
마음 |
얼 |
사전의 뜻 |
궁리함ㆍ사고ㆍ가늠하여 헤아리거나, 판단함ㆍ마음이 쏠림ㆍ무엇을 이루거나 하려고 마음먹음, 어떤 사물에 대하여 느끼는 견해, 느껴 일어나는 마음, 머리에 떠오름, 깨달음ㆍ추억ㆍ기억ㆍ상상ㆍ예측ㆍ마음을 써줌(고려ㆍ배려), 그렇게 여김(간주) |
사람의 몸에 깃들여서 지식ㆍ감정ㆍ의지등의 정신활동을 하는 것, 거짓없는 생각, 기분ㆍ느낌ㆍ속으로 꾀한 뜻, 심정ㆍ사랑하는 정ㆍ성의ㆍ정성 |
정신ㆍ혼ㆍ넋 |
세 낱말 뜻의 관계 |
삶의 핵 |
생각의 핵 |
마음의 핵 |
그런데 얼은 사람의 생각을 낳는 알이다. 우리 생활환경인 문화 속에 담긴 얼에서 내 생각이 싹텄듯이, 지금 우리가 얼을 담아 이룩하는 문화가 강물처럼 흐르면서 이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싹틔운다. 이 얼이 옹골차고 건강하면 생각도 옹골차고 건강하게 태어난다. 그러나 얼이 빠져 버리면 ‘얼빠진 사람’이 되고, 얼이 가 버리면 ‘얼간이’가 된다.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더라도 생명이 있는 꽃은 열매를 맺고 씨알을 품어 새로운 생명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겉으론 크고 화려하더라도 생명이 없는 조화는 그렇지 못하듯이, 생명이 없는 문화에서는 좋은 생각이 싹틀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이 창조하는 문화 가운데에서도 얼이 가장 힘차게 살아 꿈틀거리는 곳이 바로 우리가 쓰는 말이다. 말 자체가 생각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말은 얼이 통째로 담겨 있는 생각의 알이다.
그런데 생각은 지식ㆍ정서ㆍ의지로 나누어 볼 수 있고, 이 셋이 합해서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은 사물에 대한 앎으로서, 경험이나 스스로의 깨달음에서 얻어지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밝혀 놓은 것을 배워서도 알게 된다. 모든 학문이 바로 이 지식을 배우거나 연구하는 일이다. 사람의 내면 세계에 대하여 생각하는 학문이 인문과학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하는 학문이 사화과학이며, 자연현상에 대하여 생각하는 학문이 자연과학이다.
그리고 모든 영역에 걸쳐 근본원리를 생각하는 학문, 모든 생각에 대한 생각이 철학이다. 이러한 학문을 하여 사물에 대하여 많이 알게 되면 생각이 밝아지는 것이다.
정서는 사물에 대한 느낌으로서, 기쁨이나 슬픔, 아름다움이나 추함,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근심이나 노여움 등 감정의 바탕을 말한다. 그래서 예술은 바로 이 정서가 중심이 되어 이룩되는 아름다움이다. 사람끼리 어울려 착하고 아름답게 사는 것도 이 정서의 힘이기에 정서의 근본은 사랑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정서가 풍부하게 되면, 사랑이 풍부해져서 생각이 따뜻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의지는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뜻으로서, 부지런함이나 게으름, 추진력이나 박력 등 행동의 힘을 말한다. 그래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다. 신념이나 끈기도 의지의 결과이며, 의지가 강하면 생각이 굳세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이 머리라면, 정서는 가슴이고, 의지는 팔 다리여서, 이 셋이 조화를 이룬 생각을 하게 되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셋은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켜 주는 한 몸이다.
사람은 이렇게 ‘말’로 ‘생각’하고, 생각에 따라 행동하면서, 많은 ‘사물’(사람 포함)과 만나면서 자기 ‘삶’을 이룩해 간다. 그런데 ‘말’은 곧 ‘생각’이고 행동도 그 바탕은 생각이다. 또 사람은 사물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의미 속에서 산다는 말과 같이, 사물의 의미나 만남도 결국 ‘생각’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지므로 다음과 같은 공식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삶=생각×말×사물
=(생각)³
=(말)³
내 생각과 관계없이 ‘만나’는 ‘사물’을 운명이라고 느끼면서, 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삶=생각×말×사물
=(사물)³
=(만남)³
그러나 이것은 내 삶의 주체인 내 ‘생각’을 무시한 소극적 운명론이다. 내 삶과 운명을 내 생각으로 창조한다는 적극적인 태도로, 삶의 핵인 생각과 말의 힘을 다음과 같이 믿으면 어떨까?
“운명을 고치려면 생각을 고쳐라.
생각을 고치려면 말을 고쳐라.”
모든 말은 껍데기 구조와 알맹이 구조로 이루어지는데, 껍데기 구조는 말의 소리인 ‘음운’과 그 뜻인 ‘의미’와 이들의 운용인 ‘기능’으로 되어 있다. 말을 하나의 기호로 보아 기계적으로 밝히려는 보통의 언어학에서는 이 세 부분을 ‘음운론ㆍ어휘론ㆍ문법론’이라고 해서 다루는 게 일반적인 경향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언어관이고 언어학이다.
그러나 말이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음성기호”에 그치는가? 사물은 언제나 구체적인데, 말이 이를 추상화시키는 과정에서 사물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지는가? 사전에 담겨 있는 낱말의 뜻은 그것이 모두인가? ‘어머니ㆍ모친ㆍ머더(Mother)’는 그 소리만 다를 뿐 담긴 뜻은 똑 같은가? 과연 우리는 생각의 결과로 말하는가? 말의 결과로 생각하는가? 새가 지저귀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운다’고 말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왜 ‘Sing’(노래 부른다)이라고 말하는가?
그래서, 말의 알맹이 구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은 생각의 결과로 나타나는 단순한 음성기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창조하는 큰 힘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개짖는 소리를 나타내는 우리 말ㆍ일본 말ㆍ영어를 비교해 보자
사물 |
말 |
생각 |
|
‘멍멍’ |
우리나라 사람들이 듣는(생각하는) 개 짖는 소리 |
‘왕왕’ |
일본 사람들이 듣는(생각하는) 개 짖는 소리 | |
‘바우와우’ |
서양 사람들이 듣는(생각하는) 개 짖는 소리 |
이렇게 말은 사물과 생각의 중간에서 사물의 모습을 규정해 버린다. 진짜 개짖는 소리는 개 밖에 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 소리는 개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말이나 글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우리 말은 ‘멍멍’이기 때문에 우리 말만 아는 사람은 모든 개가 진짜 ‘멍멍’ 짖는 것으로 착각한다. 일본인이나 서양 사람들도 자기 말대로 짖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이 생각의 길이요, 원인이 되는 힘이며, 사물의 성격을 규정하고 생각을 창조하는 힘인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말대로 생각이 사물의 가치를 결정한다면, 말은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다.
모든 언어 속에는 일정한 문화적 전통과 더불어 이룩된 특수한 ‘세계상’ 또는 ‘세계관’이 담겨 있는데, 이것이 바로 객관적인 세계를 주관적인 생각의 세계로 다시 창조하는 힘을 내는 것이다. 이 힘이 말의 알맹이 구조인 ‘얼’이다. 이 얼이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문화전통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을 낳는 일이다. 그러니까 말은 이 말을 쓰는 개인에게는 세상을 보는 문을 열어주고, 언어공동체에는 공통인식을 지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조상들이 남긴 형태 있는 문화재 속에는 좋은 얼이 담겨 있으나 조상들이 남긴 말 속에는 좋은 얼, 나쁜 얼이 뒤엉켜 담겨 있다. 문화재는 고차적인 정신활동의 산물이지만, 말은 고차적인 생활이나 잡스러운 생활 등 사람의 모든 삶 속에 뿌리를 박고 자라기 때문이다. 이 말 속에 담겨 있는 얼이 바로 이 말을 쓰는 사람의 생각을 낳는다. 우리 몸은 알(난자와 정자)에서 나오고, 마음은 얼에서 나오니, ‘알-얼’ 두 낱말의 관계가 의미 있지 않은가? 그러면 말의 껍데기 속에 담겨 있는 알맹이인 생각(얼)을 구체적인 우리 말과 남의 말을 비교하면서 살펴보자.
첫째, 말은 사물을 표시하는 단순한 이름(기호)이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한 인간의 해석이 담겨있다. 새는 춥고 배고프면 ‘울 때’도 있고, 배부르고 즐거우면 ‘노래 부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우는 쪽으로, 서양인은 노래 부르는 쪽으로 해석하여 자기 해석에 맞게 말을 만들어 쓴 결과 이 말들은 다시 이 말을 쓰는 사람의 생각을 말 속에 담긴 해석 쪽으로 이끌고 있다.
‘비상구’를 중국에서는 ‘太平門’이라고 한다. 비상시의 행동규범을 생각하여 중국인들이 ‘太平門’이라는 말을 만들었지만, 이 말은 다시 중국인의 생각을 만들고 있다. “변화에 놓여서 놀라지 않는다(處變不驚)”는 중국인 특유의 생각도 이런 식의 중국 말 속에 담겨 전파ㆍ계승되었다. 금방 난 애기의 나이를 ‘1살’로 보느냐, ‘0살’로 보느냐는 참으로 중요한 해석의 차이다. 태아를 하나의 인간으로 보느냐, 출산으로 보느냐의 큰 차이다. 과연 어느 쪽이 인간적이며 과학적일까? 그런데 우리들은 왜 우리식 나이를 비과학적으로 생각할까?
그래서 자로가 공자에게 “위의 임금이 장차 선생님을 기다려 정치하시도록 한다면, 선생님은 먼저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으니, 공자는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고 대답했다. 자로도 이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하고 “왜 그렇습니까?”고 다시 물으니,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하지 못하고, 순하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공자의 정명사상이다.
다음 그림에서 보듯이 말은 사물과 생각의 중간 세계이다. 이것은 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다. 말은 사물자체가 아니고, 이 말을 처음 만들거나, 지금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말을 듣는 사람은 사물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이의 생각을 듣는 것이다. 마치 색안경과 같이 말의 색깔에 따라 사물의 색깔이 달리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말의 창조적인 힘이다.
사물과 말의 관계만 보면 말의 존재 의미는 부정적이다. 말은 언제나 구체적 사물을 추상화시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는 “진짜의 모습은 말을 떠나야 한다(實相離言)”거나 “말을 한다는 것은 곧 착오를 일으키는 것이다”(開口卽錯)고 갈파했을 것이다. 그러나 말과 생각의 관계를 보면, 말의 힘은 절대적이다. 말이 이끄는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개인이 잘 쓰는 말을 보면, 그 사람 생각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빨간 색안경을 잘 쓰는 사람은 세상의 색깔을 빨간 쪽으로 볼 수 밖에 없는 이치와 같다. 예를 들면, ‘지겹다, 신경질 난다, 열 받는다’라는 말을 잘 쓰는 사람은 세상일을 되도록 이런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여름에 비만 와도 ‘지겹고’, 겨울에 눈만 와도 ‘신경질 나고’, 날씨가 좀 더워도 ‘열 받는다.’ ‘솔직히 말하면’이라고 잘하는 사람을 눈여겨 보라. 그는 평소 거짓말을 잘하기 때문에 이 말을 앞세울 수 밖에 없고, 또 이 말을 앞세우면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가?
“그 사람 왜 자꾸 나를 씹지”라고 ‘씹는다’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인간관계를 씹고 씹히는 관계로 해석하여 자기도 다른 사람을 잘 ‘씹는’ 버릇이 생길 수 있다. “음식물을 씹다”와 함께 두 번째 뜻이 국어사전에 실렸을 정도로 이 말이 널리 쓰이고 있음은 인간관계가 먹고 먹히는 관계로 생각되어 살벌한 느낌이다.
나는 딸 아이에게 ‘아름답다’는 안경을 씌워 주었다. 말 배우던 두-세 살 때, 북한산 단풍을 바라보며, “단풍이 참 아름답다!” 저녁놀을 바라보며, “노을이 참 아름답구나! 봄빛아, 아름답지?” 식으로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아름답다’는 말을 자꾸 가르쳤다. 그랬더니, 그 해 겨울날이던가, 온 천지에 하얗게 내린 눈을 바라보며, 딸 아이는 “아빠, 참 아름답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딸 아이는 ‘아름답다’는 말을 잘 하는 편이다.
부모나 교사가 무심코 아이들에게 던지는 말 한 마디가 평생 동안 붙어 다니는 안경구실을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돌대가리’라는 말을 아이에게 했다고 하자. “그래, 나는 돌대가리인가 봐, 선생님도 나보고 ‘돌대가리’라 하시더니, 어머니도 나보고 또 ‘돌대가리’래”라고 생각하며, 계속 이 말은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안경구실을 하게 된다. 이 말은 자신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든 나쁜 영향을 미치든 계속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둘째, 말 속에는 사물에 대한 일정한 정신적 태도가 담겨있다. 지금은 ‘땅굴’로 굳어졌지만, 이것이 처음 발견됐을 때에는 ‘지하 터널ㆍ지하 굴’로 함께 썼다. 공산당이 음흉하게 우리를 침략하려고 파 놓은 굴을 어떻게 ‘지하 터널’이라고 할 것인가? 자연스럽게 이심전심으로 ‘땅굴’로 굳어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렇게 말의 쓰임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다. 예를 들면, ‘올드 미스’에게 ‘늙은 처녀’라는 말을 쓰고, 그의 반응을 지켜보라.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 중개방송 때, ‘바스트ㆍ웨스트ㆍ히프’를 ‘가슴통ㆍ허리통ㆍ엉덩이통’이라고 말한다면 중개방송의 분위기가 어떻게 달라질까? ‘히프’라고 하면 화장품 냄새가 나는데, ‘엉덩이’ 하면 구린내가 난다고 한다.
“찬물에 발 닦는다”고 말은 하지만 “냉수에 발 닦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살펴보라. ‘냉수=찬물’이라고 사전에 씌어 있지만, 누가 이를 똑같이 쓰고 있는가? “냉수 좀 떠 와라”라는 말을 하니까, 먹을 물을 떠 오고, “찬물 좀 떠 와라”하니까 세숫대야에 물을 떠 오는 것을 경험한 일도 있다. ‘달력’과 ‘캘린더’를 어떻게 구별해서 쓰는가를 유심히 살펴보라. “캘린더는 멋있는 달력”이라고 어느 학생은 대답했다.
‘구두닦이ㆍ때밀이ㆍ미장이’들처럼, ‘별 것 아닌 것들’의 이름은 우리 말로 잘 불린다. 다음과 같이 ‘치기’ 돌림으로 우리 말을 잘도 만들어 쓴다.
소매치기-날치기-들치기-새치기-차치기-몸치기-뻑치기
요즈음은 ‘야타족ㆍ나타족’도 생겼다. 남자가 자가용을 세우고 여자에게 “야, 타”해서 야타족, 여자가 남자 자가용 옆에서, “나, 타도 돼?”해서 나타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런데에는 우리 말이 잘도 쓰인다.
이렇게 우리 말은 촌스럽고 미개스럽고 저속한 뜻으로 쓰면서도, 외국 말은 고상하고 문명스럽고 품위있는 뜻으로 쓰려는 생각이 이러한 말 속에 그대로 담겨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따지는 것을 째째하다거나 옹졸한 짓으로 생각한다. 말이라는 것은 자연현상인데, 흘러가는 대로 두루뭉실 생각하고 점잖게 생각해야 통이 큰 사람이며, 가끔은 얼렁뚱땅 둘러대기도 하고, 임기웅변으로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처세를 해야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진실이 거추장스럽다는 식이다. 이렇게 말 속에 담겨 있는 생각을 꼬치꼬치 캐고 후비고 따져서는 큰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일을 철저히 생각하지 않고, 또 옳은 사람에게는 옳다고, 그른 사람에게는 그르다고 구별하여 말하지 않으면서, 문제된 사회현상을 양비론으로 얼버무리기 일쑤이며, ‘대강대강, 빨리빨리’ 넘어가는 사회분위기 때문에 우리 문화가 높아지지 않는다. 또 이런 철저하지 못한 생각 때문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병은 썩을대로 썩어도 겉으로는 별 사고 없이 넘어가지만, 물리적ㆍ화학적으로는 위험한 것들이 많으니까, 여기저기에서 대형사고가 펑펑 터지고 있는 것이 안일까?
셋째, 말의 짜임 속에는 생각의 짜임이 담겨 있다.
‘경구용 피임약’을 먹지 않고 엉뚱한 곳에 넣는 여자들이 많다는 어느 산부인과 의사의 보고는 충격적이다. 국어 전공인 나도 처음에는 ‘경구’란 말을 ‘경구암ㆍ초경ㆍ월경’ 등을 연상하여 여자의 그 곳인 줄 알았다. 그러나 ‘經口用’ 즉, ‘먹는 약’이었다. ‘먹는 피임약’하면 글자도 한 자 줄고, 엉뚱하게 사용하고선 효과가 없다고 항의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 이렇게 이름지었느냐고 제약회사에 항의하니 “일본이 그렇게 해서, 그리고 의학용어에 어떻게 우리 말을……” 이렇게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문득 어려서 쓰던 ‘내복약’을 생각했다. 그때는 내복(속옷)에 이가 많던 시절이어서 내복에 뿌리는 이 죽이는 약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내복약’은 ‘먹는 약’이었다. 이 ‘내복약’을 알만 하니까 또 ‘경구용’으로 바꾸어 버렸으니, 세상이 혼란스러워서 혼란한가, 말이 혼란스러워서 혼란한 것인가?
낱말의 뜻은 사물과의 관련뿐 아니라 다른 낱말과의 관련에서 뜻이 생기게 되고, 또 그 뜻이 분명해진다. ‘쌀’을 중심으로 ‘쌀값ㆍ쌀통ㆍ쌀밥’ 해야지 ‘미가ㆍ라이스 박스ㆍ백반’하면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다음 쪽 낱말의 체계를 살펴보며 생각해 보자.
한 낱말을 중심으로 부채살처럼 뻗어 나가는 낱말의 관계 속에서 그 뜻이 분명해지고 말의 생명력이 강해진다. 이 생명이 강한 낱말이 우리 가슴에 살아 꿈틀거리면서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 써야 말의 폭이 넓혀진다. 그러므로, ‘쌀’이라는 힘센 말을 젖혀 두고 ‘미ㆍ라이스’라는 말을 우리 말에 섞어 쓰다 보면, ‘쌀’이란 말의 생명력까지 쇠퇴되고, 의식의 3중구조를 일으킴으로써 낱말 체계를 혼란시켜 결국 생각을 혼란시킨다.
넷째, 말 속에는 사회적인 생각과 개별적인 생각이 동시에 담겨 있다.
말은 여러 사람들이 일정한 소리에 일정한 뜻을 담아 써 버릇하여 생기기 때문에 사회적이거나, 그 뜻은 또 개개인에 따라 많이 다르기 때문에 개별적이다. 서로 다른 언어공동체는 삶의 모습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언어가 다르다면 같은 언어공동체 속에서도 개개인의 삶의 모습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같은 말에 담겨 있는 생각도 서로 다르다.
예를 들면, 500원짜리 동전을 가난한 집 아이는 크게 그리지만, 부잣집 아이는 작게 그린다. 동전 크기에 대한 개념이 다른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 60명에게 ‘10cm’를 잣대 대지 않고 짐작으로 그려 내도록 하여 조사한 결과, 짧게는 ‘5.6cm’에서 길게는 ‘14.8cm’까지 있었고, 평균치는 ‘9.1cm’이었다. 가장 구체적인 말 ‘10cm’에 대한 생각도 이렇게 크게 다르니, “행복ㆍ사랑ㆍ양심ㆍ성공ㆍ조국ㆍ애국ㆍ만남ㆍ얼ㆍ마음ㆍ생각” 등 추상적인 말에 대한 생각은 개개인에 따라 얼마나 크게 다를 것인가?
이렇게 볼 때, 하나의 사물이 말하는 이의 말을 통해 듣는 이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그 참모습이 크게 달라진다. 언어사화학자 워프는 “말이란 사람이 이 세상에서 펼치는 최대의 쇼이다. 말은 대체로 30퍼센트 정도 밖에 그 효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것이 말의 약점이면서도 말의 창조적인 힘이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사람은 사물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의미 속에서 사는 것인데, 사물의 의미를 이렇게 말이 제멋대로 창조하니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아내’와 ‘와이프’는 어떻게 다른가?
‘아내’라는 말 속에는 우리나라의 숱한 아내들이 수천 년 동한 이룩해 놓은 ‘아내상’이 깃들어 있고, 아내로서의 윤리도덕을 담고 있다. 마찬가지로 ‘와이프’ 속에는 ‘와이프상’과 와이프로서의 윤리도덕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담겨 있는 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예를 들면, 이혼율이 다르다. ‘남편과 아내’는 여간해서 이혼하지 않지만, ‘허스번드와 와이프’는 쉽게 이혼한다. 그들은 지금 이혼율이 50퍼센트를 넘는다고 하며, 평균 결혼 기간이 6~7년인 나라도 있다. 그런데 요즈음은 우리나라의 젊은 부부도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다. 이젠 열녀 춘향이나 망부석이 된 정읍사 이야기는 정말 옛날 이야기일 것이다.
왜 이렇게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을까? 서양식 사고방식과 함께 ‘와이프’라는 서양말이 우리 사회에서도 널리 쓰이기 때문이 아닐까? 집안의 해와 같아서 ‘안해→아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이 좋은 말 ‘아내’를 왜 잘 쓰지 않고, ‘처ㆍ집 사람ㆍ와이프’라는 말을 쓰는지 모르겠다. 말이란 사물에 대한 인간의 해석이기 때문에 아내를 ‘와이프’로 말하는 것은 아내를 와이프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연히 이혼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혼율을 높이는 말이 또 있다. ‘세컨드’라는 말, ‘첩’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멋있게 들린다. ‘첩’하면 부도덕스럽게 느껴지지만, ‘세컨드’하면 출세하고 돈 많은 남자가 얻는 예쁘고 요염한 여자가 연상되고 또 ‘써드ㆍ훠드’의 연속성까지 풍기에 된다. 또 ‘잉꼬 부부’라는 말은 ‘원앙 부부’라는 말보다 더 이혼의 가능성이 높을 듯 느껴진다. 잉꼬새의 암수가 쉴새없이 입맞추며 사랑하는 기교와 “아이 러브 유”를 연발하며 사랑 표시를 밥먹듯 하는 서양 부부의 행동은 어딘가 경망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는 평생을 두고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를 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가슴에 담아 두고 가슴으로 삭이면서 말이 없다. 그렇지만 원앙금침을 덮고 자는 남편과 아내가 지니는 사랑은 그윽하고 깊은 것같이 느껴지지 않는가?
“아내-원앙 부부-첩”
“와이프-잉꼬 부부-세컨드”
어느 쪽의 분위기가 이혼하기 쉽겠는가?
말이란 삶의 현상 속에서 움트고 삶의 현상과 함께 자라나기 때문에 그 사물의 일반적 속성과 전통적 가치를 담게 된다. 이것이 말 속에 담겨 있는 사회적ㆍ역사적 전통이다. 따라서 ‘아내ㆍ와이프’를 “혼인하여 남자의 짝이 된 여자를 그 남자에 대하여 일컫는 말”이란 사전식 해석은 삶의 현상과 전통을 고려하지 않은 껍데기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국의 사회적ㆍ역사적 뜻이 담겨있는 외국말은 이를 소화시켜 알맞은 우리 말로 표현했을 때 우리 것이 될 수 있다. 외국말로 씌어진 책이면 무조건 ‘원서’이고, 한자 사전은 ‘옥편’이며, 의사가 환자의 진찰기록을 영어로 쓸 수 밖에 없다고 하는 생각의 울타리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물론, 세계문화는 같아지면서 달라지고 달라지면서 같아진다. 그러나 우리 말 속에 담겨 있는 정감적 힘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외국 말 속에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언어심리학자 카인즈는 말에 있어서 소리와 의미의 결합이 본질적인 것이라 하면서 처음에는 소리와 의미가 연합되나, 자꾸 써 버릇하면 소리와 의미가 결합된다고 한다.
연합된 말←소리+의미 : 쓰인 지 오래되지 않은 말
결합된 말←소리×의미 : 쓰인 지 오래 된 말
어떤 말을 오래 쓰면서 소리와 의미가 얽혀 결합되면 소리와 사물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한 몸이 되어 버린다. 이런 말이 살아 있는 말이다. 이런 말이 가슴에 꿈틀거리면서 감동을 주고 새로운 생각을 하도록 이끈다. 고향의 사투리를 들으면 반갑고 정답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지청구 먹다, 워치기 하나, 싸가지 없다, 개갈 안 난다, 골났다, 워디 가슈?”하는 충청도 사투리를 들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어려서의 고향을 회상하게 된다. 언젠가, 어릴 적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너 골나서 동창회에 안 나온다며……”고 말했더니, 전화를 끊은 지 몇 십 분 뒤에 그 친구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나에게서 ‘골났다’는 말을 듣고는 혼자 얼마나 흐뭇하게 웃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그리움에 가슴을 적시고 국민학교 동창들 얼굴 하나하나를 그려 보았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쓰던 말을 참으로 오랜만에 듣고 보니 감개무량하여 다시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의 정감은 지역에 따른 사투리뿐만 아니라, 직업ㆍ사회계층ㆍ지식의 분야와 정도ㆍ나이ㆍ성별에 따라서도 생기에 되는데, 이런 정감있는 낱말을 잘 골라 말하면 감화력과 친화력을 높일 수 있다. 예를 들면, 교사가 학생들의 은어를 유심히 들었다가 이를 적절히 활용하면 아주 좋은 반응이 나타난다. 내가 경복고 교사 시절, 학생들에게는 ‘이빨까다(거짓말하다)’라는 은어가 유행이었다. 하루는 지각한 어느 녀석이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 놓길래, “너 지금 이빨까고 있는 거지?”라고 말했더니 온 반 학생들이 “와-”하고 환성을 지르면서 뜻이 통하는 동지를 만난 듯한 기쁨의 눈초리였다. 녀석도 빙그레 웃으면서 “뭐 통하는 사이인 것 같은데 한 번만 봐 주세요”라는 표정이었다. 깡패의 세계에서 은어가 많이 쓰이면서 그들끼리 의리가 중요시되는 것도 이 은어를 중심으로 한 정다움의 힘이 아닐까 한다. 안창호님의 연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 것도 가슴에 꿈틀거리는, 쉽고 정다운 말을 잘 골라 썼기 때문일 것이다.
“참배나무에는 참배가 열리고,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립니다. 여러분, 후손들을 위하여 참배나무가 되시겠습니까? 돌배나무가 되시겠습니까?”
‘참배나무ㆍ돌배나무’라는 살아 있는 말이 주는 감동은 ─ 지금의 청소년들에게는 별 감동이 없는 말일 것이다. 그 맛없는 돌배를 먹어보지 못했으니까 ─ 우리가 후손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토록 한다.
이렇게 말 속에 담겨 있는 얼이 바로 말의 알맹이 구조이다. 이 얼이 공시적으로는 한 언어공동체의 ‘생각의 결과’이면서 ‘삶의 결과’이고 통시적으로는 그 언어공동체의 ‘생각의 원인’으로 작용하여 ‘삶의 현상’을 이끌어가는 힘이다. 그래서 독일의 피히테 교수는 “국어가 국민에 의해서 형성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국민이 국어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말했을 것이다.
요즈음 아이들은 ‘거짓말ㆍ도둑놈’이라는 말을 잘 쓴다. 누구에게서 배웠겠나? 부모나 어른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어느 초등학교 교사의 하소연이다. 한 시간 동안 학습내용을 열심히 설명하고 났더니, 어느 어린이가 “선생님, 그거 모두 거짓말이지요?” 하더라는 것이다. 얼마나 맥이 풀렸을까? 이뿐이 아니라 교사에 대한 어린이들의 불손한 태도, 친구끼리의 이기적 자세, 정직하지 못하고 협동심이 없는 행동, 거칠고 험상궂은 얼굴의 어린이가 너무 많아서 10년 전 아이들보다 요즈음 아이들이 10배는 더 속을 썩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인간에 대한 기본 믿음이 없으면 인간성이 파괴되어 올바른 인격을 이룰 수 없다. 언젠가 중국 음식점 배달 소년의 등을 두드려 주려고 하니, 그는 내가 때리려는 것으로 알고 갑자기 방어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하기야 어느 어른은 주문대로 가져오지 않았다고 배달 소년의 따귀를 때려, 그 소년은 즉시 그 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다. 어른들이 이래도 되는 것일까?
언젠가 시냇가에 놀러 온 어느 어린 자매의 이런 대화를 들은 적이 있다.
언니: “아무개야, 여기 가재 있다.”
동생: “그-짓말-!”
언니: “그-짓말이면 나 직-여!”
나는 이 어린이들을 불러 이런 얘기를 나누었다.
-“너희들 어느 학교 몇 학년이냐?”
-“서울 ○○초등학교 저는 4학년, 제 동생은 2학년이에요.”
-“너희들 서울에서 낳아서 서울에서 컸니?”
-“예”
-“그러면 내가 너희들 어머니 고향이 어딘지 알아 맞출까?” -“아저씨, 우리 어머니 아세요?”
-“몰라.”
-“그러면 우리 어머니 고향을 어떻게 아세요?”
-“알 수 있어.”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알아 맞춰 보세요.”
-(국어 선생인 내가 너희들이 금방 말한 ‘그-짓말-, 직-여-’하는 느리고 긴 독특한 억양의 말이 어디 사투리인지 뻔히 알고, 이 말은 바로 너희 어머니에게서 배웠음이 틀림없을텐데, 내가 너희 어머니 고향을 모를까 보냐? 자신있게) “충청도지? 아마 충청남도 서산이나 당진일걸.”
-(놀란 표정으로) “어, 어떻게 아세요? 아저씨, 점쟁이세요?”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일이다. 어린이의 말 한 마디 듣고 그 어머니의 고향을 정확히 알아낼 수 있으니 신기한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부모의 말씨는 정확히 자식들에게 이어진다. 사실 나는 그 어린이들 부모의 교양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짓말이면 나 직여”라는 말은 아무나 쓰는 말이 아니고 이런 말씨 수준의 교양 없는 어른들이 잘 쓰지 않는가?
어느 언어학자가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한다. 비슷한 조건의 초등학교 두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어린이에게는 ‘조정ㆍ화해ㆍ평화’라는 세 낱말을 가르쳐 주고, 한 어린이에게는 이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 뒤 며칠 후 그 어린이들의 부모가 부부 싸움을 심히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는 부모의 싸움에 대하여 이 두 어린이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위 세 낱말을 배운 어린이는 “내가 어떻게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조정해서 두 분이 화해를 하시도록 하여 우리 집에 다시 평화가 올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데 반해, 다른 어린이는 이런 구체적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얼마전 성묘길에 시골의 다섯 살짜리 어린 녀석에게서 아주 좋을 말을 배웠다. 녀석은 풀섶에 죽어 있는 여치를 보더니, “불쌍하다”고 말하고, 사과 밭에서 썩은 사과 무더기를 보더니, “아깝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녀석이 오줌을 갈기길래 장난삼아 넌지시 ‘고추’를 들여다 보았더니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청소년들에게서 ‘쪽팔린다’는 말을 많이 듣던 중 참으로 신선한 ‘부끄럽다’였다. 아무리 은어이지만 우리 청소년들이 부끄러운 행동을 하면서 ‘쪽팔린다’는 말을 쓰게 되면 진짜 부끄러워 할 수 있겠는가? 어린 아이에게서 들은 “불쌍하다ㆍ아깝다ㆍ부끄럽다 ”는 세 마디 말은 오랫동안 내 가슴 속에 뜻 깊은 말로 남으면서 오늘의 청소년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 좋은 세 마디 말만 어른들이 잘 쓰면서 자기 모습을 되돌아 볼 수 있다면 우리 청소년들이 얼마나 착하게, 아끼며, 도덕적으로 생활하겠는가? 이 세 마디 말이야 말로 우리 사회를 바르게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중요한 말이 아닌가?
외국 말의 남용도 큰 문제이다. “굿모닝 코리아, 뉴스 투데이, Weekly, Opinion” 같은 방송이나 신문의 제목도 문제이고 “불씨ㆍ쟁점ㆍ시비거리”라면 될 것을 “Hat Potato”를 직역한 “뜨거운 감자”라고 쓰는 것도 문제이다. 어린이들이 먹는 과자 이름, 잡지 이름, 옷 무늬에 영어 투성이다. “나도 대한민국 국민인데 대한민국 신문을 볼 수 없고 방송을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하다.”는 어느 시민의 호소를 무식의 탓으로만 돌릴 것인가? 후진국에 흘러든 선진국의 말은 상류층의 사람들에게는 우월감을, 하류층의 사람들에게는 소외감과 열등의식을 불러일으켜 국민의식을 분열시킨다. 성경의 바벨탑 얘기는 유명하다. 세계적 제국 바빌론이 하늘에 닿을만한 바벨탑을 쌓고 있었는데, 이는 바빌론 민족의 이름을 높이고 민족의 단결을 위해서 였다. 그대로 두면 더 수습할 수 없는 파국에 이를 것을 염려한 하나님은 이 공사를 중단시키는 방법으로 바빌론 나라에 외국어를 끌어들였더니 민족의식이 분열되어 결국 바빌론은 멸망했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세계는 말의 싸움시대가 될 것이다. 영토 싸움에서 경제 싸움으로, 다시 문화 싸움으로 옮겨가고 있듯이, 이제는 문화의 핵심인 말의 싸움 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1996년 말 미국의 세계 미래학회는 1997년부터 2026년까지 30년간 인류의 미래를 전망하는 보고서를 냈는데, 그 첫째가 세계 언어의 90%가 사라지고 10%만 남는다는 것이다. 지금같이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업신여긴다면 과연 우리 말이 이 10% 속에 들어 살아 남을 것인가? 세계를 내다 본 탁 트인 안목으로 볼 때, 언어의 세계적 교류와 적자생존이 언어의 세계에서도 적용되는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 말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적극적인 생각은 하지 않는가? 그리고 적절한 우리 말이 있는 말조차 왜 외국 말을 끌어들여 쓰는가? 이것은 세계를 내다 보는 안목이 아니라 패배주의ㆍ사대주의 안목이 아닐까?
말은 이론 이전에 버릇이다. 일정한 소리에 일정한 뜻을 담아 써 버릇하면 삶의 현상과 함께 말이 힘을 얻는다. 그런데도 한자 말이나 외국 말에 좋고 품위있는 뜻을 가득 담아 써 버릇하고서는 “알맞은 우리 말이 없다”거나 “말의 뜻이나 품위가 다르다”는 이유로 외국말만 즐겨 쓰니 이 착각을 어떻게 깨닫게 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만남’이란 우리 말에 철학적 뜻을 담아 써 버릇하면, 이 말 속에 품위있는 뜻이 생기고 또 우리 일상의 ‘만남’도 그런 쪽으로 격이 높아진다. 그래서 말의 품위를 높이면 생각과 삶의 품위가 함께 높아진다.
그러므로 한 개인이 우리 말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말에 좋은 뜻을 담아 쓰려고 힘 쓰는 마음가짐보다 더 애국스럽고 더 문화스럽고 더 교양스러운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 한 낱말 한 낱말을 섬세하게 생각하며 정확하고 아름답게 골라 쓰고, 표준 말ㆍ예절 말, 그리고 토씨 하나까지도 문법에 맞는 말인지를 요모조모 검토하며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좋은 시를 즐겨 읽으며 우리 말에 대한 깊이를 깨달으면 좋다. 전화는 나지막한 소리로 받고 다정하고 진실한 말투로 대화하며, 유행어를 함부로 쓰지 않는 게 좋다. 유행이라는 것은 통속적인 것이어서 내 생각에 깊이를 더 해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고’를 ‘창꼬’로 발음하는 등 귀에 거슬리는 발음이 없는지, ‘가르치다’와 ‘가리키다’는 잘 구별하여 쓰고 있는지, ‘나’와 ‘저’, ‘묻겠다’와 ‘여쭙겠다’를 예의바르게 쓰는지 등을 생각하며 말해야 할 것이다. 또 거친 말을 써서는 안 된다. 말은 항생제와 같아서 거친 단위가 높아질수록 면역이 생기게 되어 더욱 거친 말을 써야 말한 것 같은 느낌이 생기게 된다.
한 번 입 밖에 낸 말은 취소될 수 없으므로 말을 함부로 해서도 안 된다. 예를 들면, 어떤 물건을 잃어버린 경우, 생각으로야 상대방을 의심할 수도 있지만, 이를 일단 말로 표현해 버리면 끝이 아닌가? 물건을 찾은 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고 말한대도 자신을 의심한 말은 영원히 지워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말을 할 때에는 듣는 사람은 기준으로 말해야 한다. 말의 내용이나 수준은 물론, 방향도 듣는 사람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 예의이다. 이런 점에서 종로 3가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자는 약속은 광화문 쪽으로 오는 정류장인지 동대문 쪽으로 가는 정류장인지를 상대방이 편리하게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남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세 사람이 모이면 ⅓ 을 말하고 ⅔는 들어야 한다. 혼자서 이야기를 독차지하려는 사람은 대개 열등의식이 많거나 과시적 성격인 사람으로서 속이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남이 얘기할 때도 자기 생각에 골몰하여 다음 얘기할 준비에 바쁘고 또 얘기할 기회를 노리다 보면 결국 남의 얘기를 전혀 듣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의 얘기를 가만히 들어 보면, 지난 번에 했던 얘기를 반복하거나 같은 자리에서도 같은 얘기를 두-세 번씩 거듭하고 과장하거나 거짓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말을 알맞은 속도로 하고, 가끔은 침묵도 있어야 한다. 계속 쉴새 없이 얘기를 주고 받다 보면 생각이 얕고 가벼울 수 있다. 그러나 다 같이 조용히 생각해 보는 침묵 시간이 있으면 생각이 무겁고 깊어진다. 이렇게 말을 교양있게 하고, 남의 얘기를 트인 생각으로 잘 듣는 수양에 까지 이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이룩한 자기 생각과 자기 삶의 포괄적 표현이 지금 내가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 늘 가다듬어 말하는 버릇을 가져야 할 것이다.
청소년들이나 어른들이 ‘끼리끼리’ 모여 있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들이 크게 세 가지 점에서 비슷비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얼굴 분위기, 쓰는 말씨, 그리고 옷차림이다. 이 세가지는 거짓으로 꾸미기 어렵다. 생각의 모습 그대로, 삶의 모습이 정직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하는 한 마디 말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음 글을 읽어보자. 이 시는 지은 이를 모르는 채 여러 사람들에게 읽히던 글을 내가 가다듬어 다시 쓴 것이다.
좋은 말 한 마디
따뜻한 말 한 마디에 사랑의 씨가 트고
칭찬하는 말 한 마디에 용기의 샘이 솟고
뜻 깊은 말 한 마디에 생각이 깊어지고
믿는 말 한 마디에 서로서로 돕게 되고
부드러운 말 한 마디에 마음이 밝아지고
재미있는 말 한 마디에 긴장이 풀어지고
예의바른 말 한 마디에 하루가 즐겁습니다.
나쁜 말 한 마디
비웃는 말 한 마디에 사는 맛이 없어지고
헐뜯는 말 한 마디에 싸움이 시작되고
거짓말 한 마디에 신용이 떨어지고
의심하는 말 한 마디에 서로 틈이 벌어지고
거칠은 말 한 마디에 미움이 깊어지고
신경질적 말 한 마디에 생각이 날카로워지고
무례한 말 한 마디에 마음이 쓸쓸합니다.
그리고 똑같은 것을 보고서도 생각의 깊이나 말하는 목적에 따라 표현하는 말이 다음과 같이 달라진다. 보름달을 보고 말하는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 사물을 그대로 기술하는 경우(신문기사, 관찰문 등)
: “둥근 보름달이 동쪽 하늘에 높이 떠 있다.”
▷ 사물을 설명하는 경우(설명문, 논설문 등)
: “달은 지구 둘레를 도는 위성이다.”
▷ 사물을 묘사적으로 창조하는 경우(소설)
: “누나의 얼굴 같은 보름달.”
▷ 사물을 정서적으로 창조하는 경우(시)
: “이제금 저 달이 서러움인 줄……”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기 혼을 담은 시적 표현이 가장 깊은 생각을 예술적으로 말하는 경지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가 우리 생각을 깊게 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준다. 그러므로 말은 자기 혼을 담아야 한다. 빈말을 잘 하는 사람은 실없는 사람이다. 그림도 혼을 담아 그리는 사람과 손놀림으로 그리는 사람의 예술적 자세는 크게 다르다. 그림 전시회에서 축하의 꽃다발을 받은 화가가, 시냇물이 그려진 자기 그림 아래에 받은 꽃다발을 놓아 두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일이 있다. 시냇물이 지금 흐르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혼을 담았으니 시들 꽃다발을 물에 적시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을 본 뒤 나는 그림을 보는 눈을 뜨게 되었다. 또 여기저기 흔하게 피어 있는 망초꽃을 아름답게 그린 그림을 본 뒤로는 망초꽃이 눈에 자주 뛸 뿐 아니라, 그렇게 정겹고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혼이 담긴 예술은 사람의 생각을 아름답게 높이고 깊이는 힘이다.
이렇게 말에 대한 감각이 섬세해지면 생각과 삶에 대한 감각이 섬세해져서 교양있게 생활하게 된다. 말 속에 담겨 있는 서로의 생각을 들여다 보면서 새롭고 좋은 생각을 내것으로 삼을 수 있는 알찬 대화나 책 읽기가 가장 쉽게 교양인이 될 수 있는 길임을 어른들이 청소년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 말의 소리는 발음하기 쉬우며 부드럽고 알아듣기가 쉽고 아름다워야 하며, 그 발음이 통일되어야 한다. 소리내기가 까다로운 말은 생명이 짧다. “한아버지→할아버지, 폐염→폐렴, 곤난→곤란”들이 그 예이다. 또 “나는 새”하면 알아듣기가 어려우므로 “날으는 새”라고 말하는 이가 많은 것도 당연한 흐름이다. 그리고 요즈음 청소년들이 된소리를 잘 내어 “창고→창꼬, 등기→등끼, 사진기→사진끼, 닦다→ 다, 굽다→꿉다, 참된→참뗀” 식으로 딱딱하게 발음하는 현상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야 좋다는 쪽에서 생각해 볼 일이다.
또 외래어의 발음은 우리 말 발음식에 길들여야 한다. 굳이 원래 소리에 가깝게 한다고 ‘뉴욕’을 ‘뉴우요오크’로 쓰고 이렇게 발음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낱말은 생명체처럼 생겨났다가 번창하다가 쇠퇴하여 죽어간다. 싱싱하게 살아있는 낱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이 말을 쓰는 사람들의 생각의 폭이 넓고 생각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낱말의 생명력을 높이려면 우리 가슴에 살아 꿈틀거리는 쉬운 말을 더 넓깊에 써야 한다. “경색된 정국, 타개책 없나?”보다는 “굳어진 정국, 풀릴 수 없나?”라는 말이 훨씬 살아있는 말이다. “타개책, 타개책”하면 타개책이 생각나지 않으나, 풀릴 수 없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스르르 풀릴 수 있는 구체적인 생각이 떠 오르게 되지 않을까?
이러한 말의 감성적인 힘은 고사하고 그 뜻의 전달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요즈음 신문-방송에 잘 나오는 유식한(?) 기자나 방송인들이 쓰는 그 많은 외국 말들을 국민들이 얼마나 알 수 있을까? 또 어린이가 “오른쪽ㆍ왼쪽”이라고 말하면 어른도 늙은이도 이렇게 말해야지 “우향ㆍ좌향” 또는 “레프트ㆍ라이트”라고 말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같은 뜻의 말이 이렇게 쓰는 사람이나 장소에 따라서 다르면 그만큼 이 말은 생명을 잃게 되고 생명을 잃은 말을 지껄이면 자연히 헛소리에 가까운 말을 하게 된다. 그러면 낱말을 싱싱하고 풍부하게 쓰는 길은 무엇일까?
첫째, 쉬운 밑말을 재료로 새 말을 만들어 쓰는 길이다.
“큰손ㆍ칼잡이ㆍ낮털이ㆍ때밀이ㆍ땅굴ㆍ들치기”와 같이 좋지 않은 말들은 우리 밑말을 재료로 잘도 만들어 쓰는데, 좋은 뜻의 말은 우리 말로 새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 ‘맨홀’을 ‘사람구멍’이라 하면 웃을 것이나, 서양 사람들은 이미 “수리ㆍ검사ㆍ청소를 하기 위하여 전선의 매설관ㆍ수도관ㆍ하수관ㆍ포도ㆍ지하 케이블 등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게 만든 구멍”이란 뜻으로 ‘사람+구멍’에서 온 ‘맨홀’을 버릇들여 쓰고 있다. 이렇게 서양 사람들이 있는 말은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들어가고 나오는 구멍’이니 ‘드날구멍’이라고 만들어 쓰는 창조적 노력을 포기해 버렸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돌보다, 어버이, 빌붙다, 설익다”들의 말이 모두 이렇게 쉬운 밑말을 재료로, 새로 만들어진 말들이며 “섞돌다, 깁누비다, 굳바르다, 긁빗다”들의 옛말도 모두 이렇게 만들어져 쓰였던 말들이 아닌가?
어느 학자가 내 나름대로 살아가지 않고 남의 눈치를 보며 생각하는 것을 ‘남나름생각’, 그리고 줏대있게 내 나름대로 생각하는 것을 ‘내 나름 생각’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우리 생각의 새로운 광맥을 캐내는 위대한 직업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특히 우리 말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길은 낱말과 낱말을 과감하게 새롭게 어울려 쓰는 일이다. “삶의 무게, 얼굴에 흐르는 빛, 감정의 개선, 열린 마음, 트인 생각, 생각의 물꼬, 생각의 색깔, 생각의 안경, 생각의 울타리, 자기 점검, 자기 관리”들과 같이 씀으로써, 새로운 현상을 생각하고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쪽으로 이끌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미 쓰이는 말에 새 뜻을 담아 쓰거나 우리식 숙어를 만들어 쓰는 길이다.
‘만남’이라는 하찮은 말이 매우 널리 깊이 있게 쓰이고 있다. ‘너와 나의 만남’ ‘만남의 광장’ ‘만남과 스침’들과 같이 품위있게 쓰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엉망진창, 갈팡질팡, 아슬아슬”들의 하찮은 말에도 세상 돌아가는 모습의 포괄적인 뜻을 담아 새롭게 쓸 두 있다고 본다. ‘漁夫之利, 四面楚歌’ 식의 숙어는 한자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돼지들의 소풍에서 그 수를 헤아리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자기를 객관화시키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돼지셈법”이라고 말 할 수 있고, “줏대없는 사대적 생각의 옹졸한 고집”을 “최만리고집”이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외국 말을 함부로 쓰지 말고 이미 우리 말 속에 들어와 쓰이고 있는 외국말도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길이다.
① 서양 말
ο 알맞은 우리 말 없이 굳어진 말(외래어)은 그대로 쓴다 : “버스ㆍ잉크ㆍ볼펜ㆍ라디오”
ο 알맞은 우리 말 있는데도 쓰이는 말(외국어)은 쓰지 않는다 : “카렌더→달력, 키→열쇠, 와이프→아내, 헤어스타일→머리맵시, 디스키운트하다→깎다”
ο 우리 말이 없는 서양 말이더라도 아직 널리 굳어지지 않은 것은 우리 말로 새로 정하여 쓴다.
② 한자 말
ο 쉬운 토박이 말이 있는 어려운 말은 쓰지 않는다 : “신장→키, 체중→몸무게, 상승세→오름세, 저렴한 가격→싼값, 개엽기→잎필 때, 대맥→보리”
ο 한자 말의 표준개념을 글자의 뜻에 묶어 매지 말고 쓰이는 버릇에 기본을 둔다 : “국회 방학, 박수친다, 근사하다”
③ 일본 말
ο 일본 토박이 말을 우리 말로 쓴다 : “쓰메끼리→손톱깎이, 쓰봉→바지, 와리바시→나무젓가락, 자부동→방석”
ο 일본식 서양 말이나 한자 말을 우리식으로 고쳐 쓴다 : “타이루→타일, 구리무→크림, 신입서→신청서, 백묵→분필, 급사→사환, 원금→본전, 결혼식→혼례, 행선지→가는 곳ㆍ갈 곳, 탄생일→생일ㆍ생신, 도구→연장ㆍ연모, 품절→절품, 외출→나들이, 모포→담요”
ο 일본식으로 옮긴 말을 우리식으로 고쳐 쓴다 : “의회→국회, 외무성→외무부”
ο 전문 직업 분야에서 쓰는 말도 모두 우리 말로 고쳐 쓴다 : “토스반, 오반→양각ㆍ음각, 시아게→끝손질ㆍ마무리”
넷째, 속어ㆍ비어를 함부로 쓰지 않고 쇠퇴해 가는 예절 말을 살려 쓰는 길이다.
말이란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 말에든 속어ㆍ비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요즈음 청소년들이 쓰고 있는 말은 그 정도가 심하지 않은가 한다. “거짓말하다”는 말로 “공갈치다, 후라이까다, 대포쏘다, 구라치다, 노가리까다, 셀풀다, 이빨까다, 뻥치다, 뻥까다” 등으로 쓰이고 “때려라”해도 될 말을 “찍어라”, “손해봤다”를 “피봤다”, “코”를 “코빼기”, “배”를 “배때지”, “눈”을 “눈구멍”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만큼 청소년들의 마음이 거칠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는 예절 말도 쇠퇴하여 “나”와 “저”를 구별하여 말하는 청소년이 드물고 “잡수시다, 주무시다, 여쭙다, 진지, 뵙다”를 “먹으시다, 자시다, 묻다, 식사, 보다”로 말하는 것이 예사이다. 심지어 청소년들을 “수직적 인간관계에 따른 복잡한 예절 말이 거추장스러우니, 영어처럼 누구에게나 똑 같은 말로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이것은 “Please” 등의 낱말과 의견을 묻는 식의 말은 물론 억양과 강약으로 공손하고 예의바른 뜻을 표현할 수 있는 영어의 참모습을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더구나 요즈음은 핵가족이 늘어나 어린이들이 예절말은 듣고 배울 기회가 없어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훈훈한 인정과 예의는 우리 말의 독특한 예절 말에 의하여 그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요즈음 영어식 짜임의 말을 쓰는 일이 많아졌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화재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불날 위험이 있다.
* 회의를 가졌다→회의를 열었다(했다).
* 휴식을 취한다→쉰다.
* 그의 죽음은 나로 하여금 슬프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그가 죽어서 나는 술펐다.
또 자기 자신도 남으로 생각하며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의 말을 많이 하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인 것으로 알고 있다→~이다.
* 기쁜 것 같습니다. 즐거운 것 같습니다→기쁩니다. 즐겁습니다.
* ~라고 생각되어집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말과 글을 뜻 밖에도 많이 쓰고 있다. 그러니까 책과 강의가 재미 없어 학생들이 공부하기를 싫어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거짓스런 말과 행동을 지나치게 많이 하고 있다” 하면 딱 떨어지는 말을, “사고를 행해 보면 우리는 위선적ㆍ가식적 언행을 과도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되어지지 않을 수 없다.” 라고 말함으로써 그 말 뜻이 어려워지고, 이에 따라 삶이 피곤해진다.
인간의 문화는 ‘말의 문화’에서 ‘글자의 문화’로 넘어 올 때부터 도덕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럿셀의 말에서 글자의 역작용도 매우 큼을 알 수 있다. ‘소리’와 이 소리가 가리키는 ‘사물’이 결합되었던 ‘말의 문화’에서는 ‘소리’가 곧 ‘사물’로 인식되었던 것이 ‘글자’라는 분명한 허상의 세계가 나타나고서 부터는 허상의 세계에 길들게 되어, 실상과 허상의 세계를 별도로 펼칠 수 있는 의식의 이중구조에 익숙해져서 거짓말과 거짓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문의 단평란에서 “舊情 되찾은 舊正, 首都가 水都된 서울 거리, 美空軍司 烏山에서 龍山으로 烏山爲龍이라…”들의 글자놀음을 흔히 볼 수 있다. 미국 공군 사령부가 오산에서 용산으로 옮김 사실을 까마귀가 용이 되었다고 글자의 테두리 속에서만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글 전용과 한자 혼용은 단순히 ‘글자’라는 부호의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각의 관점을 허상의 세계인 글자의 테두리 속에 가두어 두느냐, 아니면 여기에서 해방시켜 실상의 세계를 마음대로 훨훨 날 수 있게 하느냐는 의식구조의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 이름 ‘임신중’을 한글로 쓰면 우스우니 ‘任信重’이라고 써야 좋다는 어느 국어 학자의 주장을 읽은 적이 있는데, ‘임신중’이라는 ‘소리’와 그 사람(사물)을 연결시킬 때 애당초 그 ‘소리’가 우습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임신중’이라는 소리로 이름을 붙인 것이 처음부터의 잘못인데도 이를 ‘임신중’이라고 한글로 쓰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생각의 범위가 글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좋은 예가 아닐까 한다.
서남 아시아의 어느 유목민족은 셋까지 밖에 셀 수 없어 넷 이상은 그냥 “많다”고 밖에 표현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20여 마리의 양을 치는 어떤 사람이 없어진 4마리의 자기 양을 이웃집에서 찾아 오는데, “꼬리가 잘린 놈, 엉덩이에 상처가 있는 놈, 귀가 찢어진 놈……” 식으로 기억하며 자기집 양을 정확히 찾아 오더라는 거이다. 만약 이 사람이 넷 이상까지도 헤아릴 수 있는 말을 알았다면 이렇게 모든 양의 특성을 모두 기억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말이나 글이라는 허상을 사람의 관심을 실상에서 멀어지게 하는 역작용이 매우 크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 생각의 초점이 허상 중심이나, 실상 중심이냐는 삶의 모습을 결정하는 결정적 갈림길이다.
그러므로 ‘소리’와 ‘사물’을 직접 결합시켜야 한다는 것은 우리 말의 발전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므로 길거리의 공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차 서행’이라는 구체적인 말을 중심으로 좀 더 자세히 밝혀보고자 한다.
위험한 길거리 공사장이니 모든 차가 천천히 다니도록 .안내판을 세워야 하겠다는 상황에서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안내글을 생각해 낼 수 있다.
* ‘소리’(안내글)와 ‘사물’(상황)을 별개로 보는 사람은 사물과는 별도로 필요한 내용을 모두 안내글에 담아야 한다고 판단하고 ‘제차 서행(모든 차는 천천히 가시오)’이라는 말을 생각해 냄.
* ‘소리’(안내글)와 ‘사물’(상황)을 함께 보는 사람은 상황을 보고 알 수 있는 내용은 생략하고 꼭 필요한 말만 안내글에 담아야 한다고 판단하고 ‘천천히’라는 말을 생각해 냄.
위와 같이 똑같은 상황에서도 4가지 뜻을 담은 안내글과 1가지 뜻을 담은 안내글이 나올 수 있는 것을 말이라는 허상세계를 얼마나 실상세계와 밀착시켜 생각하느냐의 인식차이에서 온 중요한 결과라고 하겠다. 우리의 역사나 현실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에 바탕을 둔 구체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보다는 이론에 바탕을 둔 추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지식인으로서 큰 소리쳐 왔다. 또 현실의 지저분한 실상이야 어찌 되었던 그럴듯한 구호나 형식에 그치는 화려한 겉모양을 잘 펼치는 사람들이 판치는 것도 실상보다는 허상세계에 눈을 두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지금 제2의 실학운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한글 전용 한자말을 한글로 쓴다거나, ‘제차 서행’을 “모든 차는 천천히 가시오”라고 풀어 쓰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함께 ‘천천히’라고 쓰는 것이며, 우리 의식체계를 허상에서 실상세계로 전환시키는 큰 정신 혁명이 아닐 수 없다. 또 이 길이 우리 말을 줄기차게 발전시켜서 모든 이의 가슴에 살아 꿈틀거리게 하고 살아 있는 이 말들이 다시 우리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구체적인 현실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 확실한 길이 될 것이다.
우리 사회학자들이 우리 국민의 정신적 병폐로 “권위주의ㆍ획일주의ㆍ의식의 이중구조”를 지적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관점을 달리해서 “수직적 가치관ㆍ허상중심 생각ㆍ자기비하”로 생각한다. “출세하고 돈 벌어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성공(행복)”이라는 전통적인 생각에서 보듯이 지금 많은 사람들은 출세와 돈의 높이를 모든 가치의 척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존재의미의 핵심인 ‘소중한 나’의 생각을 ‘실상중심’에 두고 ‘수평적 생각’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 지금과 같은 끝없는 긴장과 살벌한 수직적 기어 오르기 경쟁에서 헤어날 수 있다.
자신의 적성과 관심에 따라 선택한 직업에 충실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정신생활은 상류를 지향하되 경제생활은 중류를 지향하면서 남을 도와주고 자연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깊이 느낄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1류대→1류직장→성공(행복)”이라고 수직적으로 생각하는 한, 우리 국민은 입시병폐와 과외망국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우리 청소년들은 지금과 같이 거칠고 메마른 정서와 또 그런 말씨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마음씨와 말씨는 안과 밖이고 말과 얼과 삶은 피와 살과 뼈처럼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면서 결과이다. 그러므로 셋 중 가장 구체적인 말을 옹골지고 건강하게 쓰는 길이 세계화시대를 맞는 우리 겨레가 제정신으로 제소리를 지르면서 마음껏 힘을 펼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이러한 길은 가정에서는 어버이가, 학교에서는 교사가, 사회에서는 사회의 지도자들이 우리 청소년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말은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며, 어른들이 지금 우리 말 속에 담아 놓는 얼이 바 청소년들의 생각을 낳는 알이 되기 때문이다.
이경복
서울중부교육청학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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