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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춘추>2007년여름호수필공모 원고-----------------------------
일자산(一字山)의 4계(四季)
-‘마을뒷산’ 걷기, 읽기, 담기 수상(隨想)-
임 채 수(林采壽)
필자가 29 년 째 살고 있는 강동구(江東區) 둔촌동(遁村洞)은 서울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하며, 경기도 하남시(河南市)와 시계로 구분된다. ‘둔촌동’이라는 마을 이름은 고려 말 유학자 이집(李集)이 일자산 일대에서 은둔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유래한다.
일자산은 이 경계면에 남북으로 약 3㎞ 길게 뻗은 야트막한 산들로, 가장 높은 봉우리래야 해발 129m에 불과한 우리나라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마을뒷산이다. 경관이 빼어나다거나 유서 깊은 역사적 유적들을 많이 품고 있는 명산으로 꼽힐만한 산도 아니다.
그러나 일자산은 도심에서 벗어나 쉽게 깊은 산 속 정취를 느끼기에 손색이 없는 울창한 숲과 계곡, 곳곳에 마실 수 있는 맑은 물이 솟는 옹달샘이 있고, 완만한 능선을 따라 나 있는 등산로(산책로) 등으로 산림욕(山林浴)을 겸해 가벼운 운동과 산책을 즐기기에 알맞은 산으로, 인근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 마을뒷산을 거의 매일 이른 아침 또는 석양 무렵의 저녁시간에 오르내리며 걷기를 시작한지가 어언간 30년에 가까워지고 있다.
나무의 키가 10m를 넘는 아름드리 아카시아나무․신갈나무․상수리나무들이 들어차 편안한 그늘 집을 짓고, 큰키나무 밑에는 관목 대열의 찔레나무․싸리나무․졸참나무․갈참나무․진달래… 등이 덩굴 숲이나 작은 군집을 이루며, 숲 바닥에는 제비꽃․엉겅퀴․고사리․씀바귀․개별꽃․맥문동… 등 앉은뱅이 풀들이 서로 영역 다툼을 하듯 촘촘히자라고, 서양등골나물․돼지풀․토끼풀․서양민들레․망초․환삼덩굴․가중나무… 등 외래귀화식물(外來歸化植物)들도 숲속 깊은 곳까지 들어와 함께 자라고 있다.
또 딱새․박새․딱다구리․지빠귀․꿩․멧비둘기․까치․까마귀 등 텃새들이 천적(사람)들의 눈을 피해 둥지를 감춘 채 살아가며, 다람쥐․청설모들도 산책객들과 낯이 익다는 듯 움직임이 거침없다. 올해 7월 중순경(장마 중)에는 둔촌샘물 계곡 중턱에서 어린아이 주먹 크기의 두꺼비치고는 작은 새끼두꺼비가 혼자서 정상 높은 방향으로 기어가는 것이 눈에 띄어, 반가움에 이놈의 거동을 살피느라 꽤 오랜 시간 발길을 멈추었던 일도 있었다.
살고 있는 동네에서 가까운 마을뒷산에 철마다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지고, 소박한 들꽃을 비롯해 온갖 생명들이 반겨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10여 년 전만해도 봄에는 산딸기, 가을에는 산밤과 상수리․도토리를 줍는 재미까지 선사하더니,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진 요즈음은 산딸기․산밤이 자취를 감추었고, 참나무과(科) 나무들은 ‘도토리거위벌레’의 심술로 튼실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아카시아꽃철에 꿀을 따기 위해 놓이던 벌통도 사라졌고, 활엽수림 사이사이 구색을 갖추듯 서있던 소나무는 어느 사이엔가 활엽수들과의 살아남기 경쟁에서 치인 듯, 한 그루 두 그루 죽어갔으며, 살아남은 소나무도 솔방울을 다닥다닥 단 채 기진한 모습으로 울울창창한 소나무의 기품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 곁에 있는 생명체들의 움직임이나 변화들을 현상 존재의 의미로 바라보는 일은 일상의 즐거움이자, 삶의 교훈에 보다 가깝게 다가서는 일이기도 하다.
평범한 마을뒷산에서도 눈을 조금만 더 크게 뜨고 귀를 기울여보면 우리네의 삶의 애환이 보이고 들리며, 이상기후(異常氣候) 현상과 생태계(生態系)의 변화도 적지 않게 느껴진다.
주5일 근무제에 따른 가족여가문화의 확대에 더한 웰빙 붐은 사람들의 ‘그린 욕구’를 증대시켜 가고 있는 가운데, 특히 휴․평일을 가리지 않고 산을 찾는 등산객, 또는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의 수는 급증하고 있는 추세다.
숲(산)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있던 자리에서 유구한데, 인간의 변덕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숲에 신(神)이 깃들어 있다고 신성시 하던 시대에서부터, 숲에서 생활필수품을 구하던 숲이 가깝고도 소중하던 시대를 거쳐, 과학기술시대 인간은 편리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 가차 없이 숲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즉, 숲은 인간의 소중한 ‘님’에서, 물질인 ‘그것’으로 변하더니, 요즈음은 몸과 정신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다시 소중한 ‘이웃’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숲에는 온갖 생명이 있고, 이들이 내는 갖가지 생명의 소리가 있다. 잎눈과 꽃눈을 간질이는 순하고 부드러운 바람에 봄 숲의 웃음소리는 요란하지만, 우리들 귀에는 잘 들리지 않으나, “쿠-쿠루-쿠쿠 쿠-쿠루-쿠쿠, 데데뽀-뽀 데데뽀-뽀”를 연발하는 멧비둘기의 소리, “쯔쯔베이 쯔쯔베이”하며 봄을 찬미하는 박새의 노래 소리는 봄 숲의 도드라진 소리이며, 한여름 빗줄기가 숲속의 넓은잎나무 위로 “후드둑 후드둑” 떨어지면서 만드는 화음은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이고, 가을 숲이 내는 소리는 단풍의 현란함 때문에 쉽게 우리 귓가에 닿지 않는 소리이나, 산들바람과 함께 들리는 풀벌레들의 합창소리를 듣는 것은 숲을 찾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겨울 숲에서는 회색빛 숲의 다양한 표정을 연출하는 빠르고 느림과 높낮이가 다른 독특한 소리가 들린다.
또 숲이 연출하는 4계절의 모습에는 숲속 생명체들의 아름다우면서도 처절한 삶의 원리들이 숨어 있다. 우리들 인간은 과학기술문명이 발하는 강렬한 빛에 눈이 어두워져 많은 사람들이 이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1. 예사롭지 않은 징조들
봄이 되어 단단하게 얼고 다져졌던 대지를 뚫고 얼굴을 내미는 들풀들의 연둣빛 여린 새싹이나, 모진 추위와 사나운 눈보라를 나목으로 버텨낸 나뭇가지에 보이는 새 움은 엄숙한 자연경외(自然敬畏)의 시작이다. 혹독한 겨울의 역경을 이겨내고 나온 새싹에게 겨우내 맹아(萌芽)가 웃자라거나, 얼어 죽지 않도록 여분의 수분(水分)을 조절해 준 것은 누구이며, 겹겹이 쌓인 맹아의 껍질들이 한 겹 두 겹 벗겨질 때마다 때맞춰 내리는 봄비와 꽃샘바람은 도대체 어떤 섭리들에 의해서, 어디서 오는 것들일까.
일자산에서 자라고 있는 잎눈보다 꽃눈이 먼저 나오는 산수유․개나리․진달래․목련들은 해마다 순서가 정해진 듯 차례로 피어왔으나, 근래에는 순서가 뒤바뀐 듯 멋대로 피어나고 있다. 특히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날, 봄을 시샘하듯 기상관측 이래 가장 많은 봄눈을 뿌려 전국의 주요 고속도로망을 마비시켰던 교통대란을 일으키며, 시설 농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던 2004년 봄에는 이들 꽃들이 거의 동시에 피어났으며, 이런 현상은 연연 계속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자산 찔레나무는 겨우내 맹아 조절이 어려워졌는지 4~5 차례 파란 잎을 피웠다 지기를 반복하며, 위도상 남쪽 지방부터 피기 시작한다는 진달래는 서울지방이 훨씬 남쪽인 충청북도 제천보다 먼저 핀다는 소식이 해마다 이어지고, 목련은 잦아진 춥지 않은 겨울 탓인지 꽃망울을 틔울까 말까를 망설이듯 부풀리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매년 6월 중순께 시작해서 초․중등학교가 여름방학에 들어가는 7월 하순경까지 많은 비를 뿌리던 지루한 장마의 패턴도 많이 바뀌었다. 특히 새천년 이후 우기(雨期)에는 ‘마른장마’가 계속되다가 갑작스럽게 게릴라성 집중폭우와 광풍이 몰아쳐 국토의 곳곳을 할퀴고 무너뜨리며 곳곳이 노도(怒濤)에 잠기기가 반복되고 있다. 일자산 곳곳에도 최근의 태풍으로 인해 쓰러진 아카시아 잔해가 산책로 곳곳에 나둥그러져 있는 모습이 여러 군데서 눈에 띈다.
달포가 넘게 한낮의 찜통더위 열기가 한밤중에도 식지 않는 열대야(熱帶夜)로 짧은 여름밤 잠을 방해하는 새 기후패턴이 연례화 한 듯 하며, 여기에 더해 한밤중까지 악을 쓰듯 집요하게 울어대는 매미소리는 여름을 마감한다는 처서(處暑)가 지나도 잦아들지를 않는다.
기상이변(氣象異變)에 관한 기억들로 1994년 대지가 타들어가는 듯한 가뭄과 함께, ‘이승의 지옥 체험’처럼 느껴지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상인의 체온(36.5°C)을 넘나드는 열기에 견디기 힘들었던 폭서(暴暑)와. 2005년의 ‘잊혀진 봄’(이 해 2월 18일 낮 기온이 20°C까지 오르더니, 4월 하순부터 여름 날씨의 징후를 보였다)과, 우리나라 겨울철 기후 특징의 하나인 삼한사온(三寒四溫)현상이 사라진 채, 12월 한 달 내내 한파로 한강이 예년 보다 빠른 12월 중에 얼었던 일, 그리고 올해(2006)의 ‘사라진 가을’ 등이 집힌다. 올해 사라진 가을 징조는 매우 특이했다. 늦여름 기온(16~20°C)이 입동(立冬; 11월 7일) 무렵까지 계속되면서, 일자산 아카시아나무는 지난여름 황엽(黃葉) 현상 후 새잎을 틔운 까닭인지 입동에도 한여름 못지않게 ‘푸르렀고’, 다른 활엽수들도 단풍 옷으로 갈아입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양, 본래의 단풍 색을 띄지 못하고 ‘프르딩딩하게’ 말라갔다. 아파트 창 너머 정원의 당단풍나무도 예년 가을에는 선명한 진홍색 단풍 옷을 입었으나, 올해는 칙칙하고 붉으죽죽한 색으로 말라 마른 잎을 떨구지 못한 채여서 볼상 사납기까지 하다.
지금이 어느 때(계절)이며,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는 철부지가 된 기분이 자주 든다. 지구 온난화니 이상기후니 하는 ‘계절의 반란’이 우리의 일상에 보다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입동 날 서울지방의 낮 기온이 0°C로 떨어진 것을 두고, “한파(寒波)가 몰려온다”고 알리는 기상예보 아나운서의 해설이 호들갑으로 들렸다.
2. 벌들이 사라진 아카시아꽃철과 아카시아 잎의 여름 단풍
일자산 숲은 인공적인 조림에 의해 가꾸어진 숲이 아닌 천연잡목림(天然雜木林)으로, 아카시아나무는 일자산의 대표적 우점종(優占種)의 하나이다.
매년 5월 초, 일자산 아카시아 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필 무렵이면 700m 이상 거리의 필자의 아파트 창에 까지 아카시아 꽃향기가 바람에 실려와 꽃그늘을 찾게 한다. 두어 주간 피어 있던 꽃이 질 무렵의 바람에 날리는 아카시아 꽃비도 마음을 설레게 한다.
10여 년 전만 해도 양봉(養蜂)하는 이들이 아카시아나무 꽃피는 시기에 맞추어 수십 개의 벌통을 산 이곳저곳에 놓아두고 꿀을 모았으나, 요즈음에는 찾는 이들이 없다. 따라서 꿀벌들이 “잉잉” 날갯짓 소리를 내며 바삐 꿀을 따는 정취는 보고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가끔 꽃등에, 배추흰나비 몇 마리가 허허롭게 꽃 사이를 나는 쓸쓸한 꽃 잔치가 되고만 것이다.
어릴 적 아카시아 꽃을 따먹던 달착지근한 추억을 되살려보기 위해 꽃잎을 씹어보나 무덤덤할 뿐이다.
올해(2006) 아카시아 꽃이 지고난 뒤 한 달쯤 후인 6월 중순 경, 일자산 아카시아나무에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일자산 뿐만 아니라 서울 전역을 포함해 전국의 산야 아카시아나무 숲에 나타난 현상이라 한다. 짙은 녹색으로 무성하게 자라야 할 아카시아 잎이 노랗게 단풍지는 황화(黃化 또는 황엽:黃葉) 현상이 번진 것이다. 산림당국은 “병충해가 아닌 생육 저하 현상”, “이상기후 현상으로 인한 노쇠현상” 등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검증되지 않은 전문가들의 추측으로 들려, 소나무재선충에 이은 치명적인 아카시아나무 역병(疫病)이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들기도 한다.
아카시아(acacia)나무는 북미(北美)가 원산인 낙엽교목(落葉喬木)으로 맹아력이 뛰어나고 생장이 빠른 속성수로, 추위와 공해에 잘 견디며, 목질의 내구성과 보존성이 뛰어나 고급 가구재 용도와, 꿀의 밀원(蜜源) 구실을 하기도 한다. 나무의 수명은 40~50년으로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1960~70년대 산림녹화사업의 일환으로 민둥산 지역에 집중적으로 심어 경사지 사태(沙汰)를 막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으나, 이 나무는 일제(日帝)때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산을 망치기 위해 심기 시작했다’는 잘못된 인식으로 한 때 홀대받기도 했다.
일자산 아카시아나무는 근래 잦아진 태풍 때 강풍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길이 10m가 넘는 아름드리 큰 나무가 여럿이고, 연두색 이끼에 둥치부분이 휘감긴 나무와, 나무 상층부 노쇠현상이 뚜렷한 나무가 늘어나는 등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확실한 우점종의 자리를 신갈나무 등 참나무에 넘겨 줄 것으로 예측되기도 한다.
3. 참나무들의 수난
일자산의 둥치가 제법인 참나무의 밑동으로부터 1.5~2m 높이에는 예외가 없이 수피(樹皮)가 짓이겨지고 부푼 채 굳어진 상처의 흔적이 보인다. 40~50년 전만해도 사람들은 가을이 되면 온 가족이 참나무 숲을 찾아 도토리․상수리 줍기와 따기에 나섰다. 낮은 키의 참나무에서 도토리를 직접 따기도 했지만, 힘이 센 어른들이 떡메나 큰 돌멩이로 키가 큰 참나무의 둥치를 힘껏 내리쳐 상수리를 떨어 주워 담는 것이 수확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도토리․상수리는 어느 집에서나 소중한 식량(도토리묵 등 보조식품이나 구황식품) 몫을 크게 했기 때문에 더 많은 참나무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 나무를 때리고 또 때렸던 것이다.
수 년 전만 해도 일자산 참나무 밑 낙엽 속에 숨은 상수리를 줍는 일은 숲에서의 보물찾기처럼 꽤 많은 사람들이 숲속을 서성였으나, 요즈음은 찾는 이들이 없다. 상수리가 거의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참나무 열매들이 결실 전에 수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7월 말경부터 일자산 참나무 숲 바닥에는 ‘도토리거위벌레’가 채 익지 않은 열매를 달고 있는 참나무 가지 새순의 5cm 근처를 모조리 예리한 칼로 자른 듯 끊어 땅에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도토리거위벌레’가 열매 속에 알을 낳은 후 땅에 떨어뜨려 묻혀 자손을 번식시키고자 하는 과정이다. 돌덩이 등으로 몸의 일부가 짓이겨지도록 얻어맞으면서도 해마다 열매를 맺고 결실에 이르던 참나무들도 이 벌레의 심술에는 속수무책인 듯, 참나무의 결실률(結實率)은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 몇 그루 산밤나무도 가시 밤송이 모습만 보여줄 뿐, 알맹이는 쭉정이로 결실이 부실해져 가고 있다.
최근에는 여러 넓은잎나무 잎에 잎맥 그물만 남고 무수한 구멍이 뚫리는 좀벌레 충해(蟲害)와 함께, 참나무들이 성장 철에 말라죽는 ‘광릉긴나무좀벌레’에 의한 ‘참나무시들음병’이 일자산에도 번져, 이래저래 참나무 숲 수난이 염려된다.
인간의 간섭이 없는 참나무와 다람쥐는 아름다운 공생적(共生的) 관계로 살아왔다. 추운 겨울을 앞두고 다람쥐는 여기저기에 굴을 파고 도토리를 물어다 겨울 양식으로 묻어둔다. 그러나 다람쥐는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못한지 땅 속에 묻어둔 도토리를 다 찾아내지는 못한다고 한다. 새봄이 되어 다람쥐가 찾아내지 못한 땅 속의 도토리는 싹을 틔우고 큰 나무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결국 참나무는 다람쥐에게 겨울 양식을 제공하고, 다람쥐는 참나무의 후손을 퍼뜨리는데 도움을 준 셈이다. 참나무들은 다람쥐가 겨울 대비로 도토리를 땅 속에 저장한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장 지오노(Jean Giono)가 쓴 실록「나무를 심은 사람」에서, 거친 황무지를 맑은 계곡물이 흐르며,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고, 온갖 동물들이 모여 사는 울창한 숲으로 바꾼 것은 다름 아닌 도토리였다. 양치기 노인이 긴 세월에 걸쳐 한 톨 한 톨 도토리를 심은 것이 낙원을 이룬 것이다.
4. ‘봄, 여름, …, 겨울’, 그리고 수묵(水墨)의 캔버스
숲에는 참으로 많은 신비한 생명의 이야기들이 있다. 꼭 필요한 것만 몸속에 지니고 살다가 훌훌 다 버리고, 끝내는 비료가 되기 위해 자신을 낳아준 땅으로 돌아가는 생명들, 최소한의 소유로 최대의 삶을 살다가 미련 없이 사라지는 숲속 생명들에서 절제된 생의 아름다움을 가을이 되면 보게 된다.
산들바람과 함께 가을이 깊어지면 나뭇잎은 스스로 떨어진다. 자신이 떠나지 않으면 봄, 여름, 가으내 자신을 키워주고 붙잡아주던 나무의 몸통이 엄동설한에 얼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뭇잎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떠나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하다.
나무나 풀들이 잎과 꽃을 피우고 좋은 향기를 내는 것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후손을 번식시키기 위한 수정(受精)을 해 줄 벌․나비와 새와 벌레들을 부르기 위해서다. 이들은 눈속임이나 공짜로 손님들을 유혹하지 않는다. 꽃가루받이의 대가로 초대한 손님들에게 일용한 양식인 꿀과 꽃가루를 주는 것이다. 또 자신의 생명이 깃든 열매를 안전하게 먼 곳에서 퍼뜨리기 위해 나무들은 씨앗에 영양가 있는 맛있는 살을 붙여준다. 운반역을 맡기는 동물들에게 응분의 대가를 제공하는 것이다.
숲속을 걷는 일은 고요를 연습하는 일이고, 관찰과 몽상의 무한함을 느껴보며, 예기치 못한 놀라움과 뜻하지 않은 만남이 이루어지는 기회라고 누군가 말했다.
숲에는 편리함이나 안락함이란 없는 곳이며, 거친 야성(野性)과 자연의 순결함과 원기가 충만한 곳이다. 또 숲(산)은 두 발로 걸어야 다가갈 수 있는 곳, 그래서 때때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땀방울을 흘려야 하는 곳, 가쁜 숨과 땀방울을 통해 자연과의 감응을 확인하고, 생태적 상상력(生態的 想像力)을 즐기며, 숲의 공간 구조를 헤아려보면서 숲의 과거․현재․미래에 대해 시간적인 해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눈뜨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필자의 경우, 연중 일자산 숲 걷기에서 가장 상쾌한 기분이 드는 때는 가을과 겨울의 갈림길인 입동 무렵 전후다. 좀 싸늘하게 느껴지는 낮은 기온에, 매년 계속되는 가을 가뭄 끝에 비라도 좀 뿌려준 날의 흙냄새가 더해진 숲속 냄새는 상큼하기 그지없다. 이 무렵 새벽어둠이 걷히기 전 미명의 숲길에서 찬 이슬을 맞은 서양등골나물이 흰 꽃을 피우고 도열하듯 서, 희뿌연 안개와 어둠이 섞인 길을 안내하는 착각이 들게 하는 이슬 길도 좋다.
이제 겨울의 한복판 12월의 일자산 숲은 연중 가장 밀도가 느슨한 계절이다. 숲의 바닥에는 푸근한 낙엽 양탄자가 깔리고, 참나무들이 잎을 떨군 가지에 자리를 잡아 한 달여 짧은 가을 햇볕을 탐욕스럽게 받으며 잠시 꽃을 피웠던 ‘겨우살이’도 짧은 기간의 생을 마감하였다. 새들의 겨울철 먹잇감으로 산수유․찔레나무․팥배나무·오리나무 가지에는 빨강, 깜장 열매가 달렸고, 산책로를 따라 ‘겨울철 야생동물 먹이주기’ 운동으로 플라스틱 접시우산이 씌워진 먹이통에 좁쌀․옥수수·보리 등 먹이가 놓여졌으나, 새들은 다른 더 좋은 서식처를 찾아갔는지 날갯짓과 소리도 뜸해져 적막감이 더해지고 있다.
눈이 쌓인 일자산의 풍경은 보다 단순해진다. 흰 눈으로 덮인 사면(斜面)에 불규칙적으로 서 있는 나무들은 흰 캔버스위에 회갈색 점과 선으로 형상화된 수묵화와 다르지 않다.
겨울 숲의 진수는 군더더기가 없는 간결함이다. 잎을 떨군 채 곧추선 줄기의 단정함, 엄동설한을 이겨내는 강건함과, 숲을 지나는 찬바람, 그 비정하기만한 바람과 맞설 수 있는 의연함, 자연계의 순환에 순응할 수 있는 냉정함은 우리들 인간에게 일상을 성찰하게 하기도 하며, 자주 흐트러지는 정신을 가다듬게 하는 반면교사로, 자연을 통해 인간의 마음은 겸손하며 착하게 정화되는 것이다..
길고도 매정한 인고(忍苦)의 세월 너머 새봄의 ‘새싹’을 노래한 한승오 시인의 시를 읊조리며 오늘도 일자산 산행 길에 나선다.
차갑고 시커먼 땅 속, 작고 여린 씨앗이 홀로 몸을 웅크리고 있다./ 위에서 머리를 누르 는 흙은 무겁기 그지없고,/ 땅 밑으로 깊숙이 잡아당기는 중력(重力)은 동아줄처럼 몸을 휘감고 있다./ 죽은 듯한 침묵, 흔들림 하나 없는 고요 속에서/ 씨앗은 아무도 모르게 불 을 지핀다./ 차가운 주검 같은 몸에서 따뜻한 기운이 일어난다./ 몸이 점점 뜨거워진다./ 순간, 몸이 열리고 싹이 나온다./ 중력의 동아줄이 뚝 뚝 뚝 떨어져나가고/ 돌처럼 딱딱한 땅이 스르르 열린다./ 그 틈으로 뾰족한 머리가 쑥 올라온다./ 아, 새싹은 스스로를 불사 르는 한없는 뜨거움이구나.
30여 년 가까이 한결같이 오르내리던 마을뒷산 일자산이 머지않아 대규모 ‘도시자연공원’으로 변모하리라 한다. 이미 길동생태공원 남쪽 산자락에는 3천여 평 규모의 각종 향기를 내는 식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허브․천문공원’이 조성되었으며, 곧 보훈병원 뒤쪽 3만8천여 평 부지에는 실내 체육관․X-게임장․잔디광장 등이 들어서는 등 ‘특화 공원’으로 탈바꿈한다고 한다. 소박한 마을뒷산의 모습에서 이것저것 인공 건조물들이 산자락 여기저기에 들어 설 모양이다.
그런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일자산을 잡다한 인공적 여가·위락시설들이 중심이 되는 공원으로 새롭게 ‘꾸미기’보다는, 우리의 ‘옛 마을뒷산’ 모습으로 복원․정비하여 가꾸는 자연공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즉, 지금대로의 자연 식생(植生)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기본원칙아래, 현재 무질서하게 들어서 있는 여기저기 검은 막이 둘러쳐진 배드민턴장을 비롯한 각종 운동시설들을 대폭 철거․정비하고, 맨땅이 넓게 드러난 채 황폐화 하고 있는 등산로(산책로)를 왕래에 불편함이 없는 최소 폭의 목책(木柵) 데크로 고정․정비하고, 드러난 맨땅에는 초본류(草本類)를 심어 복원하며, 계곡 곳곳의 옹달샘과 샘물들을 보다 위생적으로 정비하고, 인공 건축물은 체육관 대신 방문자 센터를 겸하는 ‘일자산생태문화관’ 하나쯤으로 제한하여 방문객에게 최소한의 편의를 제공하는 한편, 마을뒷산의 역사․문화와 생태문화자료를 발굴․모니터링 수집․정리․축적해 가는 교육문화 기능을 살려가는 데 역점을 두었으면 한다.
2008년 쯤 이면 달라진 모습의 전모가 드러날 일자산도시자연공원이 서울을 비롯한 도시 곳곳에 산재한 차별화된 모습과 내용을 별로 찾을 수 없고 엇비슷한 그게 그것인 공원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인 것이다.
수도 서울에 인공이 가해진 ‘꾸민 공원’만이 아닌 옛 마을뒷산의 모습으로 남는 도시공원 하나쯤 가꾸는 일도 뜻있는 일이며, 따뜻한 이야기가 되지 않겠는가?.
사회생물학자 윌슨(E. O. Wilson)은 ‘생명 사랑의 탄원서’로 불리는 그의 저서 「생명의 미래」(The Future Of Life)를, 두 세기 전「윌든」(Walden)을 남긴 소로우(Henry. D. Thoreau)에게 보내는 편지글로 시작하고 있다.
“헨리!… 이제 편지를 마치면서 나는 불길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21세기의 자연계는 어디서나 우리 눈앞에서 조각이 나고, 잘려나가고, 파 헤쳐지고, 낭비되고, 인공물에 대체되어 사라지고 있습니다.
… 당신은, 낡은 행동은 낡은 세대를 위한 것이고, 새로운 세대를 위해서는 새로운 행동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당신은 여기 월든 호반, 미명(未明)의 물가 너머에서 들려오는 멧비둘기의 구구거림과 개구리의 개굴개굴 소리가 이곳을 지켜야 할 진정한 이유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진리가 무엇이고,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이용 가능한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그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진리는 두 가지입니다. 자연의 관리인임을 받아들이는 당신과 나, 그리고 지금과 앞으로의 모든 사람들은 이 두 가지의 진리를 모두 알아야 합니다.…“
‘개발’이라는 명분의 인간에 의한 자연 파괴와 간섭의 결과는 오늘날 각종 공해 발생과 오염의 심화, 이에 따른 생태계 교란, 지구 온난화, 이상기후… 등 참혹한 재앙의 모습으로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위협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현실에 처해 있으며, 불안한 지구의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시대를 맞고 있다. 자연에 대한 인간 자연 손길의 최소화만이 인간이 자연과 공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교훈을 되새겨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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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 임채수(林采壽)
충남 공주(公州)서 출생
공주사범학교 본과 3년,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교육학과) 졸업
전직 초등학교교사(재직년수 36.7년), 현 청소년자연과하나되기연구원장
한국일보사 제정 한국교육자대상(1994), 서울시 제정 제1회 서울특별시환경 상(1997),중앙일보·외교통상부주최‘한·미동맹50주년기념’에세이 공모 일반부 장려상(2004) 수상, 서일대학 레크리에이션과(‘자연학습’ 강좌) 강사(1989∼1996)
주소; 서울 강동구 둔촌2동 544. 라이프아파트101-404
연락전화; (02)476-7048, 011-9707-7048
E-mail: ineey@unitel.co.kr
둔탁한 소음 속 전철 안에서 받은 전화 연락과, 집에 들어와 이메일을 열어보고 확인한 ‘당선 소식’을 대하며, “산다는 것은 수많은 허용(許容)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라는 신영복님의 수필「처음처럼」의 한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갖추지 못한 짜임새를 비롯해 여러 가지로 변변치 못한 글에 대해 보내주신 심사위원진의 ‘허용의 느낌으로 다가오는’격려에깊이감사합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의 연속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사다난한 일상에서 시도 때도 없이 무엇 하나 반듯하게 잘했다고 되새겨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반복해서 꾸는 개꿈 때문인가 봅니다. 심호흡을 더 크게 해보렵니다.
오늘 다시 그들이 그립고 그립습니다.
마당이 있음은 너를 걷게 하기 위함이오.
나무가 있음은 너를 시원하게 하기 위함이오.
냇물이 있음은 너의 흐름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오.
밭이 있음은 너를 살찌우게 하기 위함이다.
친구를 만난 것은 너의 우정(友情)을 싹틔우기 위함이오.
선생님을 만난 것은 그의 품성(品性)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오.
함께 노래 부름은 너를 행렬(行列)에 끼게 하기 위함이오.
모닥불 앞에 모인 것은 너를 자연(自然)에 태우기 위함이다.
너의 손이 이렇게도 따스한 데
사랑하는 마음을 다 전하지도 못한 채,
네가 맡을 세상이 크고 넓다는 말만 하고
자라는 너를 구경만 하는 우둔(愚鈍)함을 보여주니,
자랑스러운 너,
친구여, 딸이여, 아들이여………
<1999년 늦여름, 교단을 내려오던 날 쓴 졸고,「너에게」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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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작 선후평>
추천인: 서정범/ 수필가, 경희대 명예교수
정동화/ 수필전문 계간지 <수필춘추> 발행인
이현복/ 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임채수 님의 응모작인 연작수필 <일자산의 사계, 그리고 수묵(水墨)의 캔버스> 1, 2, 3, 4편은 자연과 가깝게,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자연스럽게 살아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가는 한결같이 자연 속에서, 인간의 삶 속에서 소재와 제재를 구하면서도 이 두 요소를 따로 떼어놓고 보지 않습니다. 자연 속에서 인생을, 인생 속에서 자연을 배우고 터득할 수 있는 작가와의 만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4편 중에서 숲 속 생명의 이야기를 담은 < 일자산의 사계, 그리고 수묵의 캔버스>를 등단작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 숲 속 생명들의 공존공영
- 자연현상에 생활의 멋을 용해시킨 산책길
- 점과 선으로 형상화된 수묵화의 일자산 풍경
- 인공적 ‘도시자연공원’이 아닌 ‘옛 마을뒷산’으로의 복원을 바람
- 윌슨의 <생명 사랑 탄원서>를 인용하면서 자연은 정복과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과 합일하여 교감이 전제되는 공존을 형상화한 것이 이 작품의 짜임입니다.
살아오신 경륜을 바탕으로 의식 있는 사회적 객관수필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環境專門誌: <환경과 생명> 가을호 揭載를 위한 要約本-------------------------------
일자산(一字山)의 4계(四季)
-‘마을뒷산’ 걷기, 읽기, 담기 수상(隨想)-
임 채 수(林采壽)/ 청소년자연과하나되기연구원장
일자산은 서울의 동쪽 끝 둔촌동(遁村洞)과 경기도 하남시(河南市)의 경계면에 위치한 남북으로 약 3㎞ 길게 뻗은 야트막한 구릉(丘陵)들로, 가장 높은 봉우리래야 해발 129m에 불과한 우리나라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마을뒷산으로, 특별히 경관이 빼어나다거나 유서 깊은 역사적 유적들을 많이 품고 있는 명산으로 꼽힐만한 산은 아니나, 도심에서 벗어나 쉽게 깊은 산 속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울창한 숲과 계곡, 곳곳에 맑은 물이 솟는 옹달샘이 있는 등, 삼림욕(森林浴)을 겸해 가벼운 운동과 산책에 알맞은 산으로, 인근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삭막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편안한 쉼터 구실을 하는 산이다.
아카시아를 비롯한 아름드리 큰키나무들이 그늘 집을 짓고, 관목 대열의 찔레나무 등이 군데군데 작은 군집을 이루며, 숲 바닥에는 앉은뱅이 풀들이숲 깊이 까지 들어온 여러 종(種)의 외래식물과 함께 촘촘히 자라고,딱따구리 등 10여 종 이상의 텃새·철새들도 천적(사람)들의 눈을 피해 둥지를 감춘 채 살아가고 있다. 거주지의 가까운 마을뒷산에 철마다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지고, 소박한 들꽃을 비롯해 온갖 생명들이 반겨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숲 속 생명체들의 모습과 이들이 내는 소리는 계절에 따라 다르다. 잎눈과 꽃눈을 깨우는 순한 봄바람 소리, “쿠-쿠루-쿠쿠 쿠-쿠루-쿠쿠, 데데뽀-뽀 데데뽀-뽀”를 연발하는 멧비둘기와, “쯔쯔베이 쯔쯔베이”하며 봄을 찬미하는 박새의 도드라진 소리, 한여름 빗줄기가 넓은 잎을 때리며 내는 “후드둑 후드둑”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화음(和音), 산들바람과 함께 들리는 풀벌레들의 합창소리, 겨울이면 회색빛 숲의 표정이 보이는소리 등고저장단(高低長短)이 다른 독특한 소리들로 일자산은 사철 건강한 숲으로 충만한 모습이다.
또 일자산은 우리네 삶의 애환과 생태계 변화의 징후들이 느껴지기도 하는 산이다.
봄-여름: 봄이 되어 단단하게 언 대지를 뚫고 얼굴을 내미는 들풀들의 연둣빛 여린 새싹이나, 모진 추위를 나목으로 버텨낸 가지에 돋는 새 움은 엄숙한 자연경외(自然敬畏)의 시작이다. 새싹에게 겨우내 맹아(萌芽)가 웃자라거나, 얼어 죽지 않도록 수분을 조절해준 것은 누구이며, 겹겹 맹아의 껍질들이 벗겨질 때마다 내리는 봄비는 어떤 섭리에 의한 것일까?
일자산의 잎눈보다 꽃눈이 먼저 나오는 산수유․개나리․진달래․목련은 해마다 순서가 정해진 듯 차례로 피어왔으나, 근래에는 이 순서가 무너진 듯 하고, 찔레나무는 계속되는 춥지 않은 겨울로 인해 겨우내 맹아 조절이 어려운지 파란 잎을 피웠다 지기를 반복한다.
계절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봄·가을이 짧아지거나 실종되는 것인가? 최근의 기상(氣象)에 관한 기억들로 1994년 극심했던 가뭄과 함께 체온을 넘나들던 높은 기온에, 마치 ‘이승의 지옥 체험인가’ 하는 느낌이 들던 열대야(熱帶夜). 2005년 2월 18일 낮 기온이 20°C에, 4월 하순 경부터 여름 날씨의 징후를 보였던 ‘잊힌 봄’, 그리고 지난해의 ‘사라진 가을’이 꼽힌다. 지난해는 늦여름 기온(16~20°C)이 입동(立冬) 무렵까지 이어진 탓인지, 일자산 아카시아는 12월 초에도 한여름 못지않게 ‘푸르렀고’, 활엽수(闊葉樹)들은 단풍 옷으로 갈아입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양, 그 곱던 본래의 단풍 색을 띄지 못하고 말라가는 나무가 많았다. ‘계절의 반란’이 일상에 가까워진 느낌이 드는 예사롭지 않은 징조들이 두렵기 까지 하다.
아카시아와 참나무는 천연잡목림(天然雜木林) 일자산 숲의 우점종(優占種)이다. 매년 5월 초, 아카시아 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필 무렵이면 필자의 아파트 창에 까지 꽃향기가 바람에 실려와, 꽃그늘을 찾게 한다. 꽃이 질 무렵의 바람에 날리는 아카시아 꽃비도 마음을 설레게 한다. 10여 년 전만 해도 꽃철에 맞춰 양봉(養蜂)하는 이들이 수십 개의 벌통을 놓았으나, 요즈음은 놓는 이들이 없다. 따라서 벌들이 “잉잉” 날갯짓 소리를 내며 꿀을 모으는 정취는 보고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가끔 꽃등에, 흰나비 몇 마리가 꽃 사이를 나는 쓸쓸한 꽃 잔치가 된 것이다.
지난해 6월 중순 경, 아카시아나무에 이상(異常) 현상이 보였다. 일자산 뿐만 아니라 전국의 산야 아카시아 숲에 나타난 현상으로, 짙은 녹색으로 무성하게 자라야 할 아카시아 잎이 노랗게 단풍지는 황화(黃化) 현상이 번진 것이다. 산림 전문가들은 “병충해가 아닌 생육(生育) 저하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검증이 안 된 전문가의 추측으로 들려, 혹시 ‘소나무재선충’에 이은 아카시아나무 역병(疫病)이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들기도 한다. 일자산 아카시아나무는 근래 잦아진 태풍 때 쓰러진 나무가 여럿이고, 노쇠(老衰)현상이 뚜렷한 나무가 늘어나는 등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우점종의 선두 자리를 신갈나무 등 참나무에 넘겨 줄 것으로 예측되기도 한다.
일자산의 큰 참나무의 밑동으로부터 1.5~2m 높이에는 예외가 없이 수피(樹皮)가 짓이겨지고 부푼 채 굳어진 상처의 흔적이 남아있다. 예전에 도토리 줍기에 나선 사람들이 떡메나 큰 돌로 참나무의 둥치를 내리친 흔적이다.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더 많은 도토리를 수확하기 위해 참나무를 때리고 또 때렸던 것이다. 얼마 전만 해도 참나무 밑 도토리를 줍는 일은 숲에서의 보물찾기였으나, 요즈음은 찾는 이들이 없다. 여물어 떨어지는 도토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7월 말 경부터 ‘도토리거우벌레’가 풋 도토리 열매가 달린 가지 새순의 5cm 근처를 모조리 예리한 칼로 자른 듯 끊어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다. 돌덩이 등으로 몸의 일부가 짓이겨지도록 맞으면서도 거르지 않고 열매를 맺어 결실에 이르던 참나무들도 이 벌레의 심술에는 속수무책인 듯, 결실률(結實率)은 해마다 떨어지고 있으며, 산밤나무도 가시 밤송이 모습만 보여줄 뿐, 밤알을 안지 못하는 쭉정이다. 사라진 도토리와 함께 최근에는 참나무들이 성장 철에 말라죽는 ‘시들음병’이 이 산에도 번져, 이래저래 참나무의수난(受難)이 우려된다.
가을-겨울: 겨울을 앞둔 다람쥐는 여기저기에 굴을 파고 도토리를 물어다 양식(糧食)으로 묻어두는데,이 중 새봄이 되어 다람쥐가 찾아내지 못한 땅 속의 도토리가 싹을 틔우고 큰 나무로 자라 숲을 이룬 것이다. 결국 참나무는 다람쥐에게 겨울 양식을 제공하고, 다람쥐는 참나무의 후손을 퍼뜨리는데 도움을 준 공생적(共生的) 관계인데, 참나무들은 다람쥐가 겨울 대비로 도토리를 땅 속에 저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숲에는 신비한 생명의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가을이 깊어지면 나뭇잎은 스스로 떨어진다. 꼭 필요한 것만 지니고 살다가 훌훌 털고, 거름이 되기 위해 자신을 낳아준 땅으로 돌아가는 생명들, 최소한의 소유로 살다가 미련 없이 사라지는 숲 속 생명들에서 가을이면 절제된 생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떠나지 않으면 봄∼가을 동안 자신을 키워주고 붙잡아주던 나무의 몸통이 엄동설한에 얼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뭇잎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가야할 때를 알고 떠나는 나뭇잎의 뒷모습이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하다.
식물이 잎과 꽃을 피우고 향(香)을 내는 것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손을 번식시키기 위해 수분(受粉)을 해 줄 벌, 나비 등 곤충이나 새를 부르기 위함이고, 눈속임이나 공짜로 손님을 유혹하지 않으며, 수분의 대가로 일용한 양식인 꿀과 꽃가루를 준다. 또 씨앗을 먼 곳에 퍼뜨리는 역할을 하는 운반역 동물에게는 씨앗에 영양가 있는 맛있는 살도 붙여 준다.
숲 속을 걷는 일은 고요를 연습하는 일이며, 관찰과 몽상, 예기치 못한 만남, 놀라움 등을 경험하는 기회라고 누군가 말했다. 숲은 거친 야성(野性)과 자연의 순결함과 원기가 충만한 곳이며, 두 발로 걸어야 다가갈 수 있는 곳, 그래서 때때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땀 속에서 자연과 교감(交感)을 이루면서, 생태적 상상력을 즐기는 곳이다.연중 숲 걷기에서 가장 상쾌한 기분이 드는 때는 입동 무렵, 좀 싸늘하게 느껴지는 기온에, 가을 가뭄 끝에 비를 뿌려준 날로, 진한 흙냄새가 느껴지는 날이다. 새벽어둠이 걷히기 전, 숲길을 따라 찬 이슬을 맞은 서양등골나물이 흰 꽃을 피우고 도열하듯 서, 안내하는 착각이 들게 하는 이슬 길도 좋다.
12월의 일자산은 연중 가장 밀도(密度)가 느슨한 계절이다. 숲의 바닥에는 푸근한 낙엽 양탄자가 깔리고, 짧은 가을 햇볕을 받으며 잠시 꽃을 피웠던 ‘겨우살이’도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새들도 산수유․찔레나무․팥배나무 가지에 달린 빨강, 깜장 열매를 외면한 채, 더 좋은 서식처(棲息處)를 찾아갔는지 날갯짓과 노래 소리도 뜸해져 적막감은 더해 간다.
일자산에 눈이 쌓이면 풍경은 더욱 단순해진다. 흰 눈이 덮인 사면(斜面)에 서 있는 나무들은 흰 종이위에 회갈색 점과 선으로 그린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와 같다.
겨울 숲의 진수는 군더더기가 없는 간결함이다. 잎을 떨어뜨리고 곧추선 줄기의 단정함, 엄동설한 찬바람에 의연하게 맞서는 강인함, 자연의 질서에 순응함은 우리를 성찰하게 하며, 자주 흐트러지는 정신을 가다듬게 한다.
매정한 인고(忍苦)의 세월 너머 봄의 ‘새싹’을 노래한 한승오 시인의 시를 읊조리며 오늘도 일자산 산행을 위해 신발 끈을 조여 맨다.
“차갑고 시커먼 땅 속, 작고 여린 씨앗이 홀로 몸을 웅크리고 있다./ 위에서 머리를 누 르는 흙은 무겁기 그지없고,/ 땅 밑으로 깊숙이 잡아당기는 중력(重力)은 동아줄처럼 몸 을 휘감고 있다./ 죽은 듯한 침묵, 흔들림 하나 없는 고요 속에서/ 씨앗은 아무도 모르게 불을 지핀다./ 차가운 주검 같은 몸에서 따뜻한 기운이 일어난다./ 몸이 점점 뜨거워진다./ 순간, 몸이 열리고 싹이 나온다./ 중력의 동아줄이 뚝 뚝 뚝 떨어져나가고/ 돌처럼 딱딱한 땅이 스르르 열린다./ 그 틈으로 뾰족한 머리가 쑥 올라온다./ 아, 새싹은 스스로를 불사 르는 한없는 뜨거움이구나.” <‘새싹’ 전문>
30여 년 오르내리던 마을뒷산 일자산이 머지않아 ‘도시자연공원’으로 변모하리라 한다. 소박한 마을뒷산 여기저기에 이것저것 인공 건조물들이 들어 설 모양이다. 일자산을 잡다한 인공적 공원으로 ‘꾸미기’보다는, 옛 마을뒷산으로 복원․정비하여 가꾸는 자연공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며, 서울을 비롯한 도시 곳곳에 산재한 차별화된 모습과 내용을 별로 찾을 수 없는 공원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울에 꾸민 공원이 아닌 옛 마을뒷산 모습으로 남는 도시공원 하나쯤 가꾸는 것도 뜻있는 일이며, 따뜻한 이야기가 되지 않겠는가?.
사회생물학자 윌슨(E. O. Wilson)은 ‘생명 사랑의 탄원서’로 불리는 그의 저서 「생명의 미래」(The Future Of Life)를, 두 세기 전「윌든」(Walden)을 남긴 소로우(Henry. D. Thoreau)에게 보내는 편지글로 시작하고 있다.
“…헨리! 이제 편지를 마치면서 나는 불길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21세기의 자연계는 어디서나 우리 눈앞에서 조각이 나고, 잘려나가고, 파 헤쳐지고, 낭비되고, 인공물에 대체되어 사라지고 있습니다.
… 당신은, 낡은 행동은 낡은 세대를 위한 것이고, 새로운 세대를 위해서는 새로운 행동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당신은 여기 월든 호반(湖畔), 미명(未明)의 물가 너머에서 들려오는 멧비둘기의 구구거림과 개구리의 개굴개굴 소리가 이곳을 지켜야 할 진정한 이유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진리가 무엇이고,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이용 가능한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그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진리는 두 가지입니다. 자연의 관리인임을 받아들이는 당신과 나, 그리고 지금과 앞으로의 모든 사람들은 이 두 가지의 진리를 모두 알아야 합니다.…“
‘개발’이라는 명분의 인간에 의한 자연 파괴와 간섭의 결과는 오늘날 각종 공해 발생과 오염의 심화, 이에 따른 생태계 교란, 이상기후 등 참혹한 재앙의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다, 자연에 대한 인간 손길의 최소화만이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길일 것이다.
첫댓글 임채수 님의 응모작인 연작수필 <일자산의 사계, 그리고 수묵(水墨)의 캔버스> 1, 2, 3, 4편은 자연과 가깝게,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자연스럽게 살아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가는 한결같이 자연 속에서, 인간의 삶 속에서 소재와 제재를 구하면서도 이 두 요소를 따로 떼어놓고 보지 않습니다. 자연 속에서 인생을, 인생 속에서 자연을 배우고 터득할 수 있는 작가와의 만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4편 중에서 숲 속 생명의 이야기를 담은 < 일자산의 사계, 그리고 수묵의 캔버스>를 등단작으로 선정하였습니다.(추천작 선후평. 서정범, 정동화, 이현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