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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차 사부대중 100인 대중공사 진행 계획
1. 개요
▪명칭 : ‘종단 혁신과 백년대계를 위한 제8차 사부대중 100인 대중공사’
▪일시 : 불기2559(2015)년 10월 28일(수) 오전 10시~ 오후 6시
▪장소 : 한국문화연수원(충남 공주)
2. 의제명 : 종단의 사회적 실천과 역할
3. 일정 계획(*당일 진행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
* 서울 버스 출발 (07:40, 조계사 앞)
▪입재식 (10:00~10:40, 다목적홀)
- 삼귀의, 반야심경, 발원문 및 동참자의 약속 합송
- 여는 말
- 추가위원 및 초청위원 소개
- 전 대중공사 논의결과 정리 및 진행경과 보고
▪전문가 특강 (10:40~11:20, 다목적홀)
- 미래사회 전망과 종교의 역할(유엔미래포럼 대표 박영숙)
▪브리핑 (11:20~12:00, 다목적홀)
- 한국불교의 사회적 역할(불교사회연구소장 법안스님)
▪점심공양 및 휴식 (12:00~13:00, 식당)
▪모둠별토론 (13:00~15:30, 각 모둠토론장)
▪모둠별토론 결과발표 및 전체토론 (15:30~17:00, 다목적홀)
▪정리 및 회향 (17:00~17:30, 다목적홀)
▪저녁공양 (17:30~18:00, 식당)
4. 문의 : 대중공사 사무국(담당 성만제 02-2011-1923, 010-4104-4618)
5. 첨부 : 브리핑 개요(* 내용은 초안으로 수정, 보완될 수 있습니다)
『종단의 사회적 실천과 역할』 브리핑 목차
(*본 내용은 초안으로 수정, 보완될 수 있습니다)
1. 불교의 사회적 역할의 당위성
대승불교의 실천 이념은 모두 보살의 정신과 직결되어 있으며, 보살이라는 관념에 함축되어 있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실천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실천이념이란 보살의 정신에 내재된 사회적 관심과 의식을 가리킨다고 단언하더라도,
이것이 결코 과언은 아니다.
기존의 이상적 인간인 아라한이나 성문이 보살보다도 열등하다고 말하는 여러 가지 대승경전과
논서들에서 볼 수 있는 주장들의 유형을 고찰해 보면, 보살이 아라한보다 우월한 것으로 지적되는
것들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자비와 이타적 관심이다.
예를 들어 성문은 심리적으로 열등한 유형으로서 그 특징은 윤회를 두려워하고, 열반을 바라며,
자비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또 아라한의 관심은 오직 자기의 적정(寂靜)에 있는데 반해,
보살은 모든 중생의 번영에 관심이 있다.
아라한 또는 성문과 보살의 차이로서 지적되는 그러한 정신은 기본적으로 불교의 목표인 열반 또는
깨달음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불교는 깨달음을 개인적 차원에서만
추구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타인과 더불어 얻는 깨달음까지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깨달음의 사회화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며, 이 점에서 깨달음의 대승적
의미로 중생구제로 귀결된다.
대승이란 출가와 재가를 불문하고 부처와 동일한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가르치는 데서 그 명칭이 유래한다. 부처와 동일한 깨달음인 무상정등각을 향하여 뜻을 세우는 것이 발보리심, 즉 발심이며, 발심한 중생이 곧 보살이다. 이 명칭을 발심한 모든 사람에게 부여한 것은 대승의 구도자에게 부처를 닮으라고 권하는 것이다. 즉 부처가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도 육바라밀을 반복하여 수행하고 중생제도에 애썼던 것처럼, 보살도 이와 마찬가지로 중생제도의 서원을 세워 이타행을 실천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대승불교의 실천이념의 원리가 드러난다.
그것은 양면의 조화, 즉 불이(不二)의 실현이다.
이 원리는 구체적으로는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으로 집약되며, 포괄적으로는 지혜와 자비의 겸비,
자리와 이타 또는 난행(難行)과 이행(易行)의 병행으로서 일관되게 적용된다.
2. 종교계의 사회활동 흐름과 맥락
1) 이웃종교의 사회활동 흐름
정승석, 「대승불교의 실천이념」, 실천불교의 이념과 역사, 76~79쪽, 2002
① 개신교
19세기 말 기독교 수용 초기 사회운동은 계몽적인 생활운동이 그 중심을 이룬다.
그것은 조선에 온 서구의 선교사들이 선교를 단순히 기독교의 전파를 넘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 일상의 삶까지 변혁하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에 기인한다.
그들은 다른 선교지에서처럼 조선에서도 남녀차별, 계급제도, 축첩제도 같은 전통적인 전문
행정제도 등에 문제를 제기했거니와 예로 백정 출신 의사가 최초의 세브란스의학교의 교수가
된 것을 조선에 들어와 활동한 선교사들의 민중 사회개혁운동의 성취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이들 선교사들이 서구와 비교해서 후진적인 정치사회적 문제를 건드린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저항운동이기보다 대부분 계몽적 차원의 활동에 포함될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이 시기 사회운동은 집단적이거나 저항적이기보다 선교사와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들이 교회나 그들이 세운 기관을 중심으로 전개한 생활개혁운동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독립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자 국내에서 기독교 사회운동은 농촌운동으로 전한된다.
그것은 “농촌을 근본적으로 구제할 방침이 바로 기독교의 정신을 흡입하는 것일 뿐”이라는 판단과
한국의 농촌인구가 전체의 79%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농민사회가 전 사회이고, 농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는 전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에 기인한다.
농촌운동과 함께 기독교계의 물산장려운동 역시 주목되거니와 이 운동은 서울과 평양을
양대 거점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서북지방의 물산장려운동은 금주금연, 관혼상제의 간소화 등의
근검절약과 저축조합 등을 통한 소자본의 규합, 자본축적 운동에 중점을 두었고, 서울의 경우
물산 애용의 의식개혁운동, 나아가 소비 주권 캠페인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1960년대 쿠데타에 의한 군사정권이 수립된 후 특히 1969년 3선 개헌이 이루어지고 1970년대
들어가 유신헌법이 제정되자 이를 격렬히 저지하며 일어난 민주화운동은 에큐메니칼 정신이
구현된 운동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사회운동사적 시각에서 볼 때 이러한 저항운동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에큐메니칼의 정의는 본래 다양성을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서 일치를 추구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1970년 정권 연장을 목적으로 한 3선 개헌에 반대하여 장로회신학대학 학생들이 삭발 시위를 했고,
1973년 4월 박형규 목사가 주도한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에서는 수도권 도시선교위원회 실무자들과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학생들이 민주 회복과 언론 자유를 촉구하는 전단을 뿌리며 시위를 벌였다.
특히 후자는 위수령과 10월 유신 이후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최초의 행동으로 민주화운동의
또 하나의 기폭제가 된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시기 기독교회관과 교회는 이 운동의 주도자와 지지자들의 교류 장소가 되었거니와 이러한
저항운동에는 1948년 창립된 WCC가 주장한 정의구현 정신과 1968년 웁살라 총회가 제기한
교회의 사회참여, 사회적 책임의 강조가 보인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특성은 그것이 민중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미 그 이전에 1970년대에 경제적 측면에서 군사정권이 강력하게 추진한 경제성장 일변도의
산업화 정책이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를 야기한 바 있고, 도시 빈곤층의 증가와 빈부의 격차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노동자, 도신빈민, 영세 소상인 등의 기층 대중의 생존권 투쟁을 일으켰고,
이것은 학생들의 민주화운동과 한국교회의 인권운동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교회의 민중운동은 도시 산업선교 활동을 통해 추진되었다.
이 운동은 종래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들이 벌이던 사회복지사업이나 봉사 또는 교육활동 위주의
선교활동과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를 선언한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오늘의 서민 대중과 소외된 노동자,
농민 속에서 함께 고난당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으로, 이들의 문제는
개인의 구원이 아닌 사회의 구원으로서 정치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1987년 민주대항쟁 이후 시민운동이 출현했다.
기독교 정체성을 주장했던 기독 청년운동 출신들과 진보적인 복음주의 학생들이 연합하여
1989년 경제정의실천연합을 시작했고, 이어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도 시작되었다.
기독교 시민운동이 일반 시민운동과 비정부기구운동의 출현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민중운동이 추구했던 급진적 변화가 1987년 6월 항쟁 이후 그 힘이 약화되면서, 사회적 갈등보다는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모두의 일치된 시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사회운동이 사회적 변화의 동인이 될 뿐 아니라 사회변화가 사회운동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것은 종교 사회운동의 경우도 동일한 것이다.
② 천주교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얻게 된 새로운 비전 속에서 한국 천주교의 주교단은 1967년 6월 30일
한국의 현실을 해석하고, 급증하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우려와 개선책을 ‘우리의 사회 신조’라는
사목교서를 통해 표명하였다.
이는 한국 천주교회 주교단이 한국사회 현실의 상황을 깊이 인식하고,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고자
실천적 의지를 최초로 밝힌 선언으로, 주교들은 이 교서에서 노동자의 존엄성과 권리
그리고 고용주들의 의무, 노동자들을 위한 국가의 역할에 대하여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불의한 한국사회 현실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관심이 증폭된 것은 1971년 권력형 부정부패에 대한
교회의 고발과 투쟁이라 할 수 있는 원주교구의 ‘부정부패 추방운동’이라 할 수 있다.
원주교구가 원주문화방송 설립에 관한 공동투자를 하는 과정에서 5.16장학회 측 인사들의
부정부패를 인식하게 되었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장학회 측 관계자들은 권력의
비호 속에서 더욱더 불의를 자행함으로써 원주교구 전체가 대대적인 저항을 하기 시작하였다.
원주교구의 ‘부정부패 추방운동’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정치, 경제, 사회적 부조리와 그에 대응하는
교회의 입장을 표명하기 시작했고, 김수환 추기경은 시국 메시지를 통해 여러 차례에 걸쳐 강하게
사회현실을 비판했으며, 민
전명수, 「개신교 사회운동의 전개와 유형」, 한국의 종교와 사회운동, 71~87쪽, 2010
주회복운동, 민권, 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973년 11월에는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등을 포함한 재야인사 15인이 YMCA에 모여 ‘민주 시국선언’을
발표하였고, 12월13일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민주수호 국민협의회’의 이병권, 김재준, 함석헌, 윤보선,
백낙준, 유진오와 함께 시국수습 건의문을 채택했다.
1975년 12월 10일에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직속기관으로 사회적인 성격을 갖는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적인 기구인 ‘정의평화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이 기구는 원래 바티칸 교황청에 정의평화위원회를 설치하면서, 각국 내에 이와 같은 기구를 설치하여
정의평화운동을 전개하기를 촉구한 교황청의 권고에 따라 1970년 8월 24일 발족하였는데,
그동안 교회에서의 지위가 불분명했던 것을 주교회의가 재발족한 것이다.
한국 정평위는 ‘복음을 토대로 하여 현 세계에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여야 하는 하느님 백성의 시대적
사명을 자각시키며,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발전계획을 추진함에 있어서 인간의 존엄과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약에서 밝히고 있다.
주교회의의 위촉을 받아 성직자와 평신도 30여 명으로 구성된 이 기구는 주교회의의 입장을 대변하는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적인 사회참여 기구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교회의 현실 인식과 사회참여 활동의 정당성에 대한 교회 내부의 불식시킬 수 있었고,
또 한국 천주교회의 통일된 입장을 표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군부 체제의 탄압 정국하에서 한국 천주교회는 인권을 위한 법률구조 활동과 더불어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기층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과 조직들이 전체 교회 속에서 통합되지 못하고, 개별적이고 분산적으로
각 부문 운동이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1984년부터 한국 천주교 사회운동 부문들은 연대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1984년 5월에 ‘천주교 사회운동협의회’의 발족으로 이어져 각 부문 운동의 연대
강화를 통한 활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천사협은 1985년에 창립된 ‘민통련’에 ‘사제단’과 ‘대한가톨릭학생총연맹’, ‘한국가톨릭농민회’와
함께 가맹단체로 가입하여 교회 밖의 시민사회조직과도 연대하는 사회운동 조직으로 발전해 나갔다.
‘천사협’의 창립은 천주교 사회운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동안의 한국 천주교회의 사회참여 활동이 성직자 중심으로 전개되어 평신도들은
수동적인 입장에 머무록 있었는데 반해, ‘천사협’의 창립으로 천주교 사회운동에 평신도들의
참여가 활발해지고, 각 부문별로 전문화와 연대 활동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부터 한국 천주교 사회운동 내에는 통일운동, 환경운동, 평화운동 등 새로운
사회운동 영역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1998년 11월에 ‘아시아 경제위기에 관한
한국 천주교 연대’로 출발하여, ‘천주교 대안경제 연대’, ‘사회책임투자운동’, ‘기업 책임을 위한
시민연대’ 등과 같이 한국 천주교회 사회운동의 외연이 전통적인 제3섹터를 넘어, 영리적
기업활동과 비영리적 사회활동이 융합된 이른바 제4섹터로까지 확장되었다
.
참고로 현재 천주교 산하 총16개 교구에는 사회활동을 담당하는 사회사목국이 설치되어 있다.
그 현황은 아래와 같다.
16개 교구 | 상근신부 | 상근직원 |
사회사목국 총 인원 | 73명 | 171명 |
노동, 인권, 이주, 빈곤 관련 위원회 총 인원 | 27명 | 66명 |
그리고 천주교는 주교회의 아래 전국위원회를 두고 그 산하에 사회활동을 위한 24개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각 위원회마다 위원장(신부) 1명, 상근직원 0.5명이 투입되고 있다. 해당 조직도는 아래와 같다.
2) 불교계의 사회활동 흐름
① 해방 이전
조선의 개국 이후 오랜 기간 동안 공적 영역에서 소외된 채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불교는 1895년
승려들의 도성 출입금지가 해제되면서 비로소 공적 영역에 복귀할 수 있었다.
한국사회가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는 개항기에 불
추교윤, 「천주교 사회운동의 전개와 특성」, 한국의 종교와 사회운동, 44~56쪽, 2010
교 시민사회가 직면하고 있던 시대적 과제는 개화를 통한 부국강병과 법맥 및 승가공동체의 복원이었다.
유대치, 김옥균, 이동인, 탁정식 등 개화파 불교 지식인들의 활동과 경허 스님의 정혜결사 등은
이러한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불교 시민사회의 대응이었다.
식민지 시대의 불교 사회운동은 독립운동의 형태로 드러났으며, 산업장려, 민족교육, 무장 항일투쟁
등의 방법으로 민족 해방을 도모하였다.
용성 스님, 운허 스님, 종욱 스님, 만해 스님 등은 불교계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대표적 인물이다.
한편 이 시기에 불교 내부적으로는 산중불교에서 벗어나 일반사회에 다가서고, 불교의 전근대성을
탈피하기 위해 다양한 개혁론이 등장하였다.
권상로의 조선불교개혁론,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 이영재의 조선불교혁신론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불교의 왜색화에 대응하여 비구승 중심의 선불교 전통을 계승함으로써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수좌들이 주도한 선학원 설립도 이 시기에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② 해방 직후
해방 정국에 들어서면서 불교 사회운동은 독립국가 건설과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자정
차원의 불교혁신운동에 집중되었다.
‘자주불교, 민중불교, 민족불교’를 기치로 내건 불교혁신운동은 극도의 이데올로기적 혼란으로 인한
내부 분열과 기독교 공인 정책을 종교 정책의 근간으로 삼은 미군정의 통제,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극심한 혼란 속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기는 쉽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 통치기간에 불교를 실질적으로 통제하던 사찰령의 폐지 건의를 미군정이 수용하지
않으면서 일제의 잔재를 청선하고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모색할 수 없었던 불교계는 정화불사
속에서 모든 동력을 소진하고 있었다.
또한 사찰령이 폐지된 1962년까지 인사권과 재산권 등의 자율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정치권력의
통제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불교계 외부의 사안에 눈을 돌릴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불교계에 의해 조직되고 전개된 대사회적 불교운동은 1960년대까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정부수립 이후 실질적인 대사회적 불교운동이 시작된 것은 민중불교운동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③ 1970~1980년대
1976년 전재성은 송광사에서 열린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하계수련회에서 지배자의 편에 섰던
불교가 피지배자의 해방에 기여하는 종교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면서 민중불교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공식화했다.
민중불교운동은 이 사회에서 불국정토를 실현하기 위해 인권이나 노동, 민주화, 통일 등 보다
보편적인 주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민중불교가 사회개혁을 위한 구체적 운동으로 처음 표출된 것은 1981년 초에 시작된 ‘사원화운동’이다.
불국정토의 구체적 모습을 초기불교의 승가에서 발견하고, 정토의 실현을 승가 사회에만 국한시켜버리면
중생제도와는 무관한 이상향에 머물게 되므로, 사회의 승가화, 정법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
사원화운동의 요지이다.
엄밀하게 말해 승가는 세속과 유리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지역사회의 사원화’
논리가 등장했고, 기존의 사찰이나 포교당이 사원화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이들은 사찰에서의 야학 운동을 통개 기존 사찰이 갖는 반민중성을 타파하고
사원을 민중 지향적 사회활동의 근거지로 삼으려 했다.
1985년 출가승려 및 재가신도를 망라하여 발족시킨 ‘민중불교운동연합’은 사원화운동 이후 민중
불교운동이 질적 전환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민불련은 당시 한국사회를 민중의 생존권이 위협받는 상태로 규정하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불교 건설,
주체적인 민족문화 창달, 부의 공평 분배와 조국의 자주 평화적인 통일 성취를 운동의 목표로 천명하였다.
민불련은 5.3인천사태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활동에 큰 타격을 받았고,
창립 후 1년이 채 지나기기도 전에 급속히 퇴조하였다.
그러나 불교계 내부의 사회변혁 운동세력을 결집하여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고,
민중불교를 진보적 불교운동이 대명사로 자리매김하는 결과를 낳았다.
1986년 221명의 출가승려로 조직된 ‘정토구현 전국승가회’의 창립은 민중불교운동 진영에게
새로운 활로를 제공하였다.
이 단체는 1988년 6월까지 40여 차례의 성명서 발표를 통해 사회현실에 대한 불교계의 관심을
표명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함으로서 불교계의 민중민주운동을 주도하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 이후 반독재 민주화투쟁이라는 연결고리를 상실하고, 운동 이념과 방법론,
정치적 입장 등에 따라 대승불교승가회, 불교사회교육원, 불교사회연구소 등이 새롭게 창립되었다.
이러한 민중불교운동 진영의 재편은 1988년 ‘민족화합 공동올림픽 추진본부’의 결성을 통해
마무리 되었고, 이를 통해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서 통일운동으로 운동의 방향이 전환되었다.
④ 1990년대 이후
1970년대와 1980년대는 기본적으로 계급투쟁적인 구사회운동이 사회운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에 비해 1990년대 이후는 다양한 삶의 문제 해결을 추구하는 신사회운동으로
사회운동의 흐름이 전환되었다.
그런 점에서 대사회적 불교운동은 일반 사회운동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문민정부 등장 이후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시민사회가 급속히 팽창하고,
그에 따라 다양한 분야에서 시민사회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이후 불교계의 사회운동은 시민운동적 성격을 표방하는 단체들을 통해 전개되었다.
‘불교인권위원회’,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 ‘공해추방불교모임’ 등이 그것이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 창립된 정토회는 산하 단체들을 통해 북한 주민을 위한 식량지원 및
탈북자, 국제난민 지원사업, 통일운동, 환경운동 등을 활발히 전개해오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불교 사회운동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1994년 종단개혁에 성공한 개혁종단이
추진한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1995년)이었다. 사회정의실천운동, 통일운동, 환경운동,
평화운동 등을 구체적 내용으로 삼고 있는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은 종단 차원에서 실무
기획단을 구성하여 활동했으며, 불교 단체에 대한 지원과 불우이웃 돕기, 복지시설 지원
등도 장기적 사업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북녘동포돕기 불교추진위원회를 통한 대북 구호사업과 남북 종교인 회의를 통한
북방교류 등도 종단 차원의 사회참여운동이 이룩한 성과이다.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은 우리가 사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속에 깔려 있는
공통의 문제를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불교가 본래의 가치를 회복하고,
역사 사회 속에서 대중과 함께 살아 숨 쉬는 살아 있는 종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실천운동이자,
우리 민족과 사회의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모든 갈등과 대립을 없앤 보살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정신혁명 운동이었다.
특히 운동의 목표에 공감한 개인이나 단체가 개별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대표 종단인 조계종이 다양한 분야의 사회운동을 직접 기획하고 전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대사회적 불교운동의 필요성과 의미를 인정하고, 이의 중요성을 종단 구성원들에게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교계 시민운동 단체와 개혁 종단의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 등에 의해서 고무된 불교
시민사회의 왕성한 활동들이 참여불교운동이라는 흐름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달라이라마,
틱낫한 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이들이 주도한 아시아 각국의 참여불교운동이 소개되면서부터이다.
이들의 운동이 민중불교운동의 전통을 가진 한국의 불교 사회운동에서 새로운 조류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아시아 참여불교운동이 정신적 수행과 정치적, 사회적 실천을 결합함으로써 세간적
깨달음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즉 교리나 불교적 가치에 근거한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민중불교운동이 놓치고 있었던
‘나’의 해방을 재발견했기 때문이다.
불교가 전통적으로 추구한 해방이 출세간적 수행을 통한 해방이었다면, 민중불교운동의 해방은
‘나’를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혁파하는 데 주력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참여불교는 ‘나’의 해방과 사회의 해방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불교사회연구소의 ‘2014년 대국민 여론조사’에 의하면, 불교계가 추진하는 사회문제 캠페인에
대하여 불자의 23.2%가 동참의사를 표명하였고, 49%는 지지의사를 표명하였다.
전체 불자의 72.2%가 불교계의 사회문제 참여를 지지했던 것이다. 또한 불교계의 우선적인 사회참여
분야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 국민들은 생명, 인권, 복지, 환경, 평화의 순서를 꼽았다.
박수호, 「불교 사회운동의 교리적 근거와 역사적 전개」, 한국의 종교와 사회운동, 110~120쪽, 2010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한국의 사회, 정치 및 종교에 관한 대국민 여론조사, 2014
⑤ 94년 종단개혁 이후 불교NGO 활동
* 94년 종단개혁이후 불교계도 오랫동안의 사회적 침묵을 깨고,
여러 불교사회단체들의 태동이 본격화 되었다.
* 90년대 초반 한국불교환경교육원과 94년 맑고향기롭게를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북녘동포돕기불교추진위원회와 재가연대 그리고 인드라망생명공동체,
불교환경연대 등 많은 수의 NGO들이 창립되었다.
* 이 단체들의 창립과 더불어 불교계는 안으로는 ‘종단개혁에 대한 요구’가
일회적 계기에서 개혁종단과 사회단체들의 지속적 활동과제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밖으로는 ‘시대상황에 따른 불교적 대안’을 모색하는 ‘환경운동과
대안운동’의 흐름들이 뚜렷한 사회적 흐름으로 나타났다.
3) 각 영역별 제안
- 환경, 통일, 노동, 인권, 대안, 화쟁, 다문화, 생명윤리 등등의 분야별 제안
3. 종단의 사회활동 현황과 과제
1) 종단의 사회활동 현황
2) 성과와 과제
① 종단 차원의 성과와 과제
② 불교NGO 활동의 성과와 과제
□ 불교NGO 활동의 성과
* 불교계의 환경 및 생명운동의 흐름은 단지 불교계 내부에서 머물지 않았다.
법륜스님의 활동은 우리사회에 환경과 생명운동에 대한 초석을 놓았으며, 도
법스님의 생명평화운동과 귀농운동은 사회적으로 ‘귀농에 대한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켰으며,
수경스님의 삼보일배는 이후 ‘평화적 저항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지율스님의 천성산살리기운동은 인간의 권리를 넘어서 생명권에 대한 사회적 시발점이 되었다.
* 첫째, 불교의 이념과 방법론으로 사회활동의 가능성을 열었다.
이러한 스님들의 활동은 ‘불교계와 불자들’을 넘어서 사회대중들에게 불교가 가지고 있는
‘불살생’의 계율이 ‘시대적 정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 둘째, 불교계가 더 이상 불교계 내부에만 머물지 않고, 대사회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90년대까지 불교계는 내부민주와 혹은 종단의 구조개혁으로 큰 소용돌이를 거쳤다.
그러나 90년대 후반이후 불교계의 사회적 홛동을 통해 불교계도 불교만의 방식으로 사
회적 역할을 통해서, 일반사회와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경험을 축적하게 되었다.
* 셋째, 불교적 과제와 사회적 과제를 동시에 풀어가면서, 일반사회대중들의 대불교적
이미지가 크게 재고되는 계기가 되었다.
2,000년대 대중적으로 불교에 대한 최고의 이미지는 생명평화와 환경에 대한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불자대중들의 ‘삶으로 실천’하는 것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사회대중들이 가지는 불교계에 대한 ‘사회적위상’을 살필 수 있는 좋은 계기는
형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 불교NGO 활동의 과제
* 첫째, 몇몇 뛰어난 스님들만의 활동이 아닌 대중적 불교운동이 되어야 한다.
불교NGO활동은 불자대중들의 의식적 성장에 입각해서 대중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다만 몇몇 뛰어난 스님들과 재가자들의 선도적 활동에 입각해서 진행되었기에,
지속가능성과 구조적 개혁으로 나아가는데는 한계를 보였다.
향후 불교사회단체들의 안정적 성장과 불자대중들의 활발한 사회참여를 통해 몇몇 뛰어난
개인들에 의존하는 사회활동의 한계를 넘어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 둘째, 불교단체와 사찰대중들이 꾸준히 연대하고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불교계에서 사회적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기 위해서는 불자대중들이 모여 있는 ‘
개별사찰’에서 여러 가지 사회적 활동이 펼쳐져야 한다.
그러나 불교계의 사회활동은 몇몇 단체에서 전문적인 내용을 대불교,
대사회적으로 발신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향후 불교계의 사회활동의 과제는 ‘불교단체’와 ‘사찰대중’과 만남의 광장이 지속적으로 확보되어,
불교사회활동의 주체가 종단이외에도 다양한 사회단체가 양성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겠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찰과 불교단체’와의 만남의 기회가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종단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이러한 만남의 장이 마련이 된다면,
종단과 불교사회단체와의 좋은 연대활동의 계기로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 셋째, 더 다양한 불교단체가 필요하고, 나아가 각 단체별로 자신의 전문성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
아직 불교사회활동은 초창기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운동 100년사와 카톨릭운동의 사회민주화운동에 비해 불교사회활동은 그 역사가 짧다.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청년기로 접어들은 불교사회활동은 여전히 미흡하다. 분발이 필요하다.
* 넷째, 불교내부의 개혁과제와 대사회적 활동을 아울러서 병행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가야 한다.
불교계 내부의 개혁과제는 한번의 구조개혁으로 그칠 문제가 아니다.
지속적으로 사람들과 문화가 바뀌어야 할 문제이다.
따라서 불교사회활동의 방향은 불교계와 사회적 흐름 사이에서 소통하고,
교류하는 위치에 있을 필요가 있겠다. 불교사회단체들의 현실은 아직까지
이러한 과제를 유연하게 진행하는 역량을 발휘하고 있지는 못하다.
3) 종단의 미래를 위한 사회적 역할 제언
4. 논제 제시
1) 사회변화에 부응하는 불교의 사회적 역할
- 사회참여가 불교 본연의 佛事이다?
- 불교적인 방식의 사회적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가?
- 사회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종단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가?
2) 지역사회에 희망을 줄 수 있는 교구와 사찰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가?
- 각 영역별 제안에 대한 실천 방안 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