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5.16 군사혁명 이 일어난 날이다..감회가 새로워 몇자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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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5월.16일 이날 나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공덕동 서울 신학대학 기숙사에서 포근한 봄날 새벽 단잠을 자고 있었는데 난대없이 6.25 한국전쟁 때 많이들은 전쟁 특유의 연발 소총소리 에
잠을 깨고 나서 기숙사 앞 파출소 에 무슨 총 소리인가 문의를 했어나 파출소 직원들도 도무지
모를 총소리라는 대답이다..총소리는 한강교 쪽에서 한참이나 나더니 조용 해 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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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5.16 군사혁명은 불시에 일어났고 그 동안의 여러 비밀 준비가 있었을 것이나 일부 인 을
제외한 다수는 불시에 맞은 사건이다..이 사건의 의도나 정치철학 등은 내 머리로는 상상도 못햇고
자다가 불시에 맞은 사건인 지라 당황할 틈도 없었다..그런 상태로 아침식사를 했고 동료들과 총소리 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이렇게 혁명당일 한 낮까지 의 나의 행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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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군용트럭에 단독군장 을 한 군인들이 타고 스피커로 혁명공약을 외치며 거리를 누비는 모습을 보고 아~~! 이건 군사혁명 이로 구나 하며 생각의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그렇나 혁명의 주체는 군부이나 그 군부내부 의 사정이나 정부의 입장 여러 지도자의 행로 사상 등
은 전연 모르는 체 언론을 통한 정보를 얻는 것이 전부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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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반란은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 소장 박정희. 중령 김종필. 소령 이낙선. 등 유군사관학교
8~9기 졸업의 일부장교 들을 중심으로 4.19이후 정권을 장악한 민주당 의 내각의 무능과 사회혼란
그리고 영일이 없는 국회의파행 등 이 원인으로 작용 하여 일어난 은밀히 준비된 5.16 혁명이
였고 하나 후일 알려진 바에는 4.19 이전 이승만 정권 때 부터 은밀한 준비가 된 혁명이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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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참가한 부대는 제6군단 포병대. 해병대. 제1공수 특전단 등이 주 부대였고 1961년5월16일
새벽3시를 기해 혁명의 불씨가 당겨지고 이 부대의 군인들이 청와대를 장악하고 4.19이후 제2공
화국 을 뒤엎어 버리고 군인들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임 을 알게 되었다.이혁명 의 주도세력은 군인 들 이지만 그 핵심인물 들 이 누구인가는 전연 모르다가 언론을 통해 알게된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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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사령부 부사령관 소장 박정희와 육사3~5기생 장교250명 부사관 과 병3,500명 이 집결하여 한강
다리를 넘어와서 서울을 장악하고 주요기관들을 점령 하였고 문재준 대령 제6군단 포병단 지휘관과 박치옥 대령 등은 곧이어 박정희가 부의장으로 취임하고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이 의장으로 추대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해 전권을 장악하고, 정변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혁명공약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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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정부형태는 내각책임 제 라서 국무총리가 국군 통수권자이고 그 국무총리는 장면 이 였다
정작 혁명이 일어나자 국무총리인 장면은 카르멜 수도원 으로 피신을 해 버리고 정부는 무주공산
이 였고..당시의 대통령 윤보선 혼자서 사태수습 에 나서야 했다. 이 혁명소식 에 미군들의 첫 반응을 무력진압 을 하려고 대통령의 허락을 얻어려 했어나 대통령은 무력진압은 거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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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윤보선 의 무력진압 반대의 이유는 진압을 하려면 아군(國軍) 끼리 총질을 해야 하고 일렇
게 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된다. 그리되면 북한의 김일성 은 남침의 기회를 얻어 남침 한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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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군사혁명은 성공 한것 같으나 정권장악 등 후속조치 의 미비로 초조한 박정희...
그는 주한 미국대사 맥그루더 로부터 군사철수를 요구 받았어나 단호히 거절 하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어서 박정희 소장과 대통령 윤보선 이 만나 회담을 하고 그 결과 윤보선 대통령은
이 혁명을 추인하고 권력전부를 혁명주체들에게 이전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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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군사혁명위원회 가 구성되고 이어서 국가재건초고회의 로 개편되고 내각수반 에 장도영 이란
발표를 한다. 이어서 미국측 의 지지를 얻어냈고 그해(1961) 친공분자930명 을 구속했어며 이에
미국측은 공산당 소탕소식 을 환영 했다. 이어서 그해5월 19일 대통령 윤보선의 하야성명 이 나오고 했지만 다음날인 5.20에 하야성명 발표를 번복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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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대통령 윤보선 의 하야 선언문 은 다름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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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번 군사쿠테타가 발생하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인명의 희생이 없기를 바랐으며 순조롭게 수습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다행히 하늘은 우리를 도와서 무사하게 이 나라의 일을 군사혁명위원회의 사람들이 맡아서 보게 하였으며 국민 여러분이 또한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지금 안심하고 이 자리를 물러나겠습니다. 아무쪼록 군사혁명위원회의 사람들은 그 소신과 충성을 다하여 이 나라를 발전시키고 이 국민을 하루속히 궁핍에서 건져내 주기를 바라며 나의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이에 협조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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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의 사퇴를 만류한 것은 군정측 이 였다 그 이유는 "유일한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이 시점에서의 하야는 국제법상 새 정부의 승인문제를 복잡하게 할 우려가 있으며 사임한 뒤 이북이 남침하면 외국과 유엔에 호소하려 해도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호소할 기관이 없다. 였고
박정희 와 장도영 그리고 미국의 만류도 있어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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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윤보선은 당일 오후 6시 예정돼 있던 고별회견 대신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하야하겠다는 나의결정이 국제적․국내적으로 영향이 크다 하므로 나라 일을 해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만부득이 이 나라 형편을 생각하여 번의해야 할 것 같다."며 하야를 번복, 번의 회견을 하였다. 1961년 6월 6일 국가재건최고회의와 현충일 행사에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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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무능한 장면총리 와 무능한 민주당의 계파싸움 등은 종식되는 듯 했고 이어서 국방부 장관 현석호를 비롯한 각 부서의 장관, 차관, 처장급 인사들이 줄줄이 가택에서 체포되거나 연행되는 형식으로 청와대에 끌려왔다. 이때 민주당 신파의 각료인 정일형, 현석호 등은 윤보선의 발언을 듣고 경악한다. 이어 윤보선 은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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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장면 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박정희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했다. 이어 5.16 혁명위
원회 포고 가 나오고 이 포고에 의해 민의원. 참의원. 지방위원. 등의 헌법기관은 해산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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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 6호..로 정당과 사회단체 는 전부해산 이 되고 정치 활동은 금지 를 당한다, 이후 3년 간 군정통치 가 이루어 진 것 이다. 이 기간중 특수범죄처벌법.정치활동정화법. 등이 제정되고 정치적 노선이 다른 세력과 혁명의 반대파 군부 까지 제거 된다.그리고 핵심적인 권력기구. 중앙정보부. 와 민주공화당 이 창당되고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책임제로 헌법 이 개정 된다...드디어 민주 공화당 시대가 열리는 셈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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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박정희는 원대복귀하겠다고 한 혁명공약 을 번복하고 1963년 제5대 대통령에 출마를 했고
윤보선 과 경쟁을 한다. 이 대통령선거에서 는 나는 군대생활을 하던 중이였고 당시 인기가 절정
이던 박정희를 찍 었다. 이 선거에서 박정희는 윤보선을 따 돌리고 당선 되어 대한민국 제 5대
대통령 이 되고 제6대 대통령선거 에서도 윤보선을 이겨 대통령 이 된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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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5.16 군사혁명 으로 구악일소 가 시작되고 이정재 등 여러폭력조직 원 들이 끌려와 조리
돌림을 당하고 .. 이 정변초기 에는 유명인들이 대거등장 하여 지지성명 이 나오고 특히 우리가
기억하는 장준하 는 사상계6월호 에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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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공식 지지를 했고 미국인 인 프랭크 소코필드 박사 는'5·16군사반란은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폭로하며 '한국에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혁명초기 에는 어디에서 나 지지를 받았고
그 지지를 밑바탕으로 하여 새마을 운동등 활발한 국가재건 운동이 펼쳐 진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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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하나 군사정권은 제1공화국 시에 독립운동 가 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소홀히 한점을 들어서
1962년 3월 1일과 8월 15일 독립운동가 2천여 명에 대한 포상을 단행했다.
비록 혁명당초 의 혁명공약 과 같이 박정희가 원대복귀는 않고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 당시로 보아서는 어쩌면 더 잘된 일 인지 모른다..이부분은 이론이 많아 나는 비평을 그만 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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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개정된 헌법전문 에 보면 3.1운동 임정정부 법통.4.19 민주이념의 계승 하고 로 하여
주권재민 임을 상기케 하고 민주 공화국 이라는 정통성을 확립 하는 계기로 하기 위해 헌법전문
에 그 내용을 기록 한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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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을 민주문화 의 배양기로 본다면 5.16은 이 문화와 상반되는 권력유지를 위해 군이 연속
적으로 동원된 일종의 병영국가 체제가 된 것 며 1인 독제의 길을 연 사건이란 비평도 만만치 않으나 ..설사 그렇 하다 손 치드라도 당시를 철들어 살아온 나의 생각은 다르다..5.16은 잘한 혁명 이다..일부 과오가 있는 것도 사실이나 혁명자체는 잘 한 일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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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을 4.19 의거라 칭하고 5.16을 혁명이라 하였다. 이 의거와 혁명은 민족의 대사다...
한편 북한은"정변을 지지하는 성명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보고서는 또 정변이 박정희와 진보적인 군인들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기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90%"라고 추정했다. 말 하자면 자기 편들이 한 혁명이란 착각을 한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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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혁명주도 세력이 남로당 계로 보고 지지성명 까지 준비 했다고 한다. 그런대 이 혁명이
그들의 예상을 벗어난 애국 군인들 이 혁명의 주체 임에 놀라서..소위〈인민경제 향상을 위한 1차 7개년 계획〉을 미루고 국방 강화에 온힘을 기우린다.올해부터 1963년까지 인민경제계획의 발전을 늦추고 국방과 방어요새 강화에 집중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북한의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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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국자가 못된다. 그리고 역사가도 못된다. 거저 살아가는 野人 이며 삶의 野黨 이다.
정치도 잘 모른다..그러나 보이는 일들 이 마음에 걸려서 이처럼 주저리 엮어덴다.눈 앞의 세월호 참사..그리고 선거..참 어렵고 말 조심이 필요한 때 이지만 이 말은 꼭 하고 싶다.5.16을 상기하고 기념일로 하자는 주장이며 기념일이 안되면 개인적으로 라도 기념 일로 할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