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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의 출생 100주기인 1998년을 전후로 미국에서는 루이스를 비롯한 그의 동료인 20세기 기독교 낭만주의 작가들의 부흥기가 도래했다. 다원주의로 인해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모든 생각과 삶의 방식을 용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후기 기독교 시대에 선과 악의 구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판타지 장르의 영화들이 곳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대표적인 것이 《반지의 제왕》 시리즈로 악의 거대한 힘 앞에서 용감하게 버티는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악을 응징하고 순수한 우정을 노래한다.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에 대한 응답,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 찾아온 초월적 구원자의 도래는 이 시대를 역행하는 영화였다.
C. S. 루이스의 판타지 역시 그와 같은 주제들로 가득 차 있어 흐릿한 분위기로 가득한 시대에 밝고 진한 색깔을 뿜어낸다. 루이스의 신앙적 글들은 거대한 판매 실적을 올렸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현재의 불확실성과 판단 부재의 시대에 영구한 가치관을 앞세웠던 기독교 지성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지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요즘 교회에서는 청년을 보기 어렵다. 이들은 진리와 비진리의 선 긋기를 좋아하는 근본주의도 싫고, 이런 저런 운동을 부르짖는 집단도 싫다. 희생과 헌신은 오늘날 청년들의 코드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멋과 의미와 감동을 느끼고 싶다. 아름다움의 가치를 공유할 만한 사람들과 자연스러운 연대감을 느껴 보고 싶다.1
루이스는 어떤가? 참 신기하게도 그는 20세기를 살았지만 오늘의 안목으로 본 루이스는21세기의 정서까지 지닌 사람이다. 그는 진리와 선함 그리고 아름다움이라는 세 가지의 통합적 가치 부여를 강조했던 사람이다. 한편 생각해 보면 진·선·미의 3대 인간다움의 가치는 근현대의 산물이 아니다. 이미 고대 헬라 철학이 강조하던 인간의 기본 가치다. 클래식한 철학은 그래서 진리와 진실을 고민하는 인식론, 옳고 그름을 고민하는 윤리학, 그리고 아름다움의 가치를 측정하는 미학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루이스는 이 세 가지 중 하나도 간과하지 않는다. 그는 치열하게 논리적인 사고를 전개했던 이성주의자였지만, 동시에 네 가지의 인간 기본 덕목(신중, 정의, 불굴, 절제)과 세 가지의 기독교적 덕망(믿음, 소망, 사랑)을 강조했던 윤리주의자였고, 영혼까지 스며들어오는 희열과 갈망으로 상상에 불을 지폈던 낭만주의자였다. C. S. 루이스의 기쁨에 대한 이해특히 오늘 이 시대에 중요한 질문인 ‘기쁨’ 또는 ‘즐거움’에 대해서 루이스는 어떻게 바라봤을까? 루이스는 ‘Joy(기쁨)’라는 단어를 많이 언급했다. 심지어 《예기치 못한 기쁨》이라는 제목의 저서도 있다. ‘Joy’의 가장 일반적인 번역은 ‘기쁨’이 맞다. 하지만 루이스가 사용하는 ‘Joy’는 고유명사다.
이것은 루이스가 사랑했던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1770-1950)의 소네트 단편 시에 등장한다. “Surprised by Joy impatient as the Wind …” 바람처럼 성급하게 그에게 닥쳐와 그를 놀라게 했던 Joy는 무엇이었을까? 다름 아닌 4살의 어린 나이로 워즈워스의 곁을 떠났던 딸 캐서린에 관한 기억이었다. 그 기억은 사랑스럽고 행복한 추억이지만, 그 따뜻한 기억에는 깊은 슬픔의 상처와 좌절감이 쌓여 있다. 말 그대로 낭만주의자들이 잘 알고 있는 달콤하면서도 쓰디 쓴 경험이다.
워즈워스에게는 구체적인 상실의 경험이지만, 루이스가 알았던 ‘Joy’는 인간 보편적인 경험이었다. 루이스는 이것을 욕망 또는 갈망이라고 불렀다. 이는 만족되지 않은 갈망이다. ‘Joy’는 순식간에 우리의 의식 세계를 스쳐 지나가곤 한다. 한순간 마치 강렬한 조명이 비취는 것 같은 밝음이 임하지만 그 조명이 꺼지면 깊은 상실감이 찾아오곤 한다. 루이스는 유아기부터 이런 경험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 갈망이 무엇 때문에 오는 것인지, 과연 영원히 충족될 수 있는 것인지를 고민했다. 즉 루이스가 말하는 ‘Joy’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내면에 지닌 영원성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다. 이는 시간과 공간의 지배 아래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초월적인 근원으로부터 임하는 채워질 수 없는 깊고 거대한 갈망이다. C. S. 루이스의 기쁨의 신학과 특징‘기쁨’, ’즐거움’ 또는 ‘행복감’이라고 부르는 경험에 대한 루이스의 생각을 알기 위해서는 ‘Joy’ 이외 다른 단어들을 찾아봐야 한다. ‘기쁨’을 주제로 한 루이스의 글 가운데 “히도닉스”(Hedonics)라는 짧은 에세이가 있다. ‘히도닉스’는 ‘즐거움’ 또는 ‘쾌락’이란 의미의 헬라어 단어 ‘헤이도네이’가 어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hedonism’(쾌락주의)가 여기서 파생된 단어다. 영어사전에서는 ‘히도닉스’를 “윤리학 이론 중 하나”라고 설명하지만, 이는 “즐거움에 대한 연구”라 할 수 있다.
루이스는 이 짧은 글에서 기쁨이란 그저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감정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초자연적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중요한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의식 속에 침투한 기쁨의 의미를 잘 살펴볼 때 우리 존재의 근원과 목적까지 추적해 갈 수 있다는 것이 루이스의 기쁨에 대한 연구가 추구하는 방향이다.2 가히 ‘기쁨의 신학’이란 주제로 그의 생각을 담아 볼 수 있다. 루이스는 《헤아려 본 기쁨》에서 우리가 ‘즐거움’, ‘향유’, ‘풍미’, ‘희열’ 등 여러 가지로 부르는 기쁨의 상태가 사실은 천국에서 오는 것임을, 곧 천국의 주인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근원을 두고 있음을 알려 준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좀 더 통합적인 관점에서 루이스의 ‘기쁨의 신학’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기쁨에 대한 그의 모든 생각을 관통하는 다섯 가지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영어 단어 중 ‘더욱 사실적’이란 의미를 지닌 ‘T-R-U-E-R’라는 단어에서 한 자씩 따서 5개의 주제를 설명해 보려고 한다.
T는 기쁨의 초월성(transcendence)을, R은 기쁨의 실재성(reality)을, U는 기쁨의 통합성(unity)을, E는 기쁨의 종말적(eschatology)의미를,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R은 기쁨의 관계성(relationality)을 의미하는 글자로 소개하고 싶다.
1. 기쁨의 초월성
초월성은 기쁨이라는 경험이 어디서부터 오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기쁨은 우리 안에서 만들어져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다. 마치 햇빛을 반사해 어둠을 밝히는 달과 같이, 인간은 발광체가 아니고 반사체다. 우리 안에 기쁨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천국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고, 천국의 물방울이 떨어진 것이며, 천국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임한 것이다. 더 궁극적으로 천국을 천국 되게 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기쁨이 임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비치는 모습을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 그 영광이 우리의 의지를 자극하면 그 결과를 ‘선함’(goodness)이라 부른다. 이것은 하나님 영광의 윤리적 측면이다. 둘째, 그 영광이 우리의 지각에 내려올 때 그 결과를 ‘진리’(truth)라 부른다. 이것은 하나님 영광의 인식적 측면이다. 그리고 그 영광이 우리의 감각과 감성에 비칠 때 그 결과를 ‘즐거움’(pleasure)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하나님 영광의 미적 측면이다.3 루이스가 가장 사랑했던 말씀은 시편 16:11이다. 기쁨은 초월자이신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로부터 오는 것이다.
2. 기쁨의 실재성
실재성은 초월성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기쁨이란 단순히 인간의 주관적 감정이 아니다. 기쁨은 초월적 근원에서 흘러나오며, 객관적인 실재성을 지닌다. 루이스에게 실재성은 중요한 현실 이해의 기준이다. 루이스에 따르면 기쁨과 진선미 모두 인간이 스스로 제정하고 집행하고 멋대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루이스는 《인간 폐지》에서 주관주의의 심각한 폐단을 지적했고 더 이상 바른 가치에 의해 훈련되고 지배되지 않는 인간의 의지는 사실상 욕망의 종이 되고 아무런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루이스는 현대인이 머리(지성)와 배(욕망)만 있을 뿐 그 둘을 이어 인간의 욕망이 진리와 선에 복종하도록 하는 가슴(의지)이 없는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인간의 의지를 객관적 진선미의 가치에 기준해 훈련하지 않는다면, 결국 인간은 더 이상 인간다울 수 없다는 것이다. 프랜시스 쉐퍼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의 인간다움”(mannishness of man)이 상실된 인간은 타인의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나 본능적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짐승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기쁨이 무엇이며 무엇에 의해 기뻐하는지, 루이스는 그 실재성 즉 객관성에 대해서 깊이 고민했다(고전 13:6).
3. 기쁨의 통합성
통합성 역시 연결된 개념이다. 기쁨의 초월적 근원이시고 객관적 실재로 기쁨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주관자시다. 그가 주관하시는 세상은 통합적인 현실이다. 루이스가 긴 여정을 통해 만난 기독교 유신론 사상은 인간이 만나는 현실뿐 아니라 인간 그 자체(존재론, 인간론)가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안에 주권자 하나님의 사역, 즉 그분의 창조와 섭리가 통전적으로 드러남을 볼 수 있다. 루이스는 자신의 회심 과정이 유물론주의에서 관념주의로, 관념주의에서 범신론사상으로, 범신론에서 유(일)신론으로, 그리고 결국 기독교 유신론으로 변화하는 지극히 철학적 과정이었다고 스스로 고백했다.4 그의 회심 과정은 세계관적 고민과 깊은 연관이 있다. 세계관은 통합적 사고의 틀을 의미하며, 어떤 사고적 틀이라도 자신의 논리와 삶의 경험들을 온전히 담아 낼 수 없다면 폐기해야 했다.
세계관이란 단어는 독일어 Weltansc-hauung을 번역한 것이다. 여기에서 세계(welt)란 말의 의미는 눈에 보이는 자연 세계를 의미하기보다는 총체적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관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기보다는, 우리의 모든 경험을 총체적으로 담아 낼 수 있는 관점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세계관은 곧 삶의 경험을 총체적으로 담아내는 관점이다.5
기독교 유신론 사상은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전체를 담아내는 이해의 틀이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기독교를 믿은 것은 마치 해가 떴다는 사실을 믿는 것과 같다. 이는 내가 눈으로 해를 볼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해가 비춰 줌으로 인해 다른 모든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6 기독교는 모든 경험을 담아 낼 수 있는 위대한 사고의 틀이고, 모든 경험을 비춰 그 의미를 부여하는 세계관이다. 루이스에게는 ‘기쁨’마저도 기독교 세계관 안에서 지극히 위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아무런 근거 없이, 지향성 없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허무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근원과 목적지 그리고 우리의 존재 그 자체를 보여 주는 위대한 경험이다. 단순히 하나의 파편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전체(totality)와 연결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 현실이다.
4. 기쁨의 종말성
종말적 측면에서 기쁨은 우리의 궁극적인 삶의 결과와 결부됐음을 강조한다. 루이스는 ‘Heaven’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했다. ‘천국’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를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학적 의미는 훨씬 더 깊고 풍성하다. 루이스가 이해하는 천국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우리를 위해 계획하시고 준비하시고 이루신 우주의 궁극적 완성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 천국은 미래의 시간대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 속으로 들어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현세와 역사 속으로 들어온 천국, 즉 종말의 침투고, 그분의 부활은 종말적 완성의 첫 열매다.
루이스는 이것을 지금 우리가 보편적으로 겪고 있는 ‘옛 자연’(old nature)과 비교되는 ‘새로운 자연’(New Nature)이라고 불렀다. 루이스에게 천국은 현세와 구분되지만 영향을 주는 또 다른 세계며,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 다른 세계를 위해 창조된 자들이다. 루이스에게 천국은 단순히 미래의 영역이 아니다. 구원받은 자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삶 자체는 이미 천국에 속한 것이며 천국지향적이다.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 루이스는 천국과 지옥이 소급 적용됨을 언급한다. 사실 이 요점은 그의 작품을 잘 이해하는 열쇠다. 루이스가 주장하는 것은 “미래의 천국을 누리게 되는 자들에게는 이 땅의 삶 전체도 천국이 된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의 이혼과 분리는 죽음 이후에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현세의 삶 속에서 이미 점차적으로 진행되는 현실이다. 루이스에게 현세는 내세의 그림자가 드리운 ‘그림자의 땅’(shadowlands)이고, 종말적 현실이 실재이고 본질이다.
그렇다면 모든 실재(reality)는 천국을 근거로 한다. 천국에서부터 흘러 들어오는 것만이 실재이고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현세 속에서 우리가 귀하고 아름답고 기쁜 경험을 만난다면, 그것은 현세 자체에 대한 증거가 아니다. 만일 그것으로 인해 현세에 안주하고자 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이다. 현세 속에서 느끼는 그 기쁨의 경험은 천국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에 불과하다. 지금은 물방울처럼 떨어지지만 언젠가 우리는 폭포수처럼 기쁨이 쏟아져 내리는 천국의 현실을 만날 것이다. 이 세상에 우리가 진정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천국을 닮았기 때문이다.
5. 기쁨의 관계성
마지막으로, 관계성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루이스가 말하는 기쁨이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를 근거로 한다는 점이다. 기쁨의 모든 성격을 규명해 주는 가장 궁극적인 근거는 기쁨 그 자체이신 삼위 하나님의 정체성 안에 있다.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의 제4권 ‘인격을 넘어서’(Beyond Personality)에서 기독교의 특징인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려고 한다. 루이스는 독특하게도 기독교가 증거하는 하나님은 정적인 존재가 아니시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가 보는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하나님을 단순히 한 ‘인물’로 규정하는 것도 불완전하다. 루이스가 본 하나님의 실재는 역동적이시며 요동치는 활동, 생명, 일종의 드라마와 같다.7 사실 루이스가 가장 좋아했던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성부와 성자를 개별적 인격으로 본다면, 성부와 성자의 연합 자체도 너무 구체적인 현실이기 때문에 별도의 인격으로 봐야 하며, 그분을 성령이라고 말한다. 어떠한 가족, 모임, 조합 같은 것들도 그들이 서로 공유하는 ‘정신’이 있다. 이 정신은 개인이 개별적으로 존재할 때는 볼 수 없지만, 함께했을 때 나타나는 행동과 말의 패턴 같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정신을 하나의 인격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든 것뿐 인간 공동체와 하나님의 삼위일체 공동체적 공동체는 차이가 있다.
성부와 성령의 생명의 연합으로 일어나는 인격은 단순히 정신이 아니라 실재다. 그분을 제삼위, 즉 성령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루이스는 덧붙여 설명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런데 그 사랑이 사람 속에서, 사람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서 역사하신다. 이 사랑의 정체는 바로 영원 속에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일어나는 사랑이다. 이 인격적인 사랑의 정체가 바로 성령이시다. 루이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런 역동적인 존재시라면 그분을 하나의 드라마나 춤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가장 합당한 방법이라고 본 것이다.
이 역동적 관계 속에서 ‘기쁨’이 이해되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춤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생명의 에너지를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거대한 역동을 상상해 볼 수 있다면 이러한 모습일 것이다. 온 우주는 성부와 성자와 그 사랑의 연합이 끊임없이 뿌리시는 영광의 빛으로 차 있다. 온 우주는 하나님의 거대한 기쁨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의 웃음소리가 온 우주에 울려 퍼진다. 우리는 이 춤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이 영원한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의 향연을 위해 존재한다. 그 향연에 참여해 영원토록 하나님을 향유하고 기뻐함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지어진 존재들이다. 기쁨을 통해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기루이스의 기쁨 담론을 5개의 주제 안에 담아 봤다. 이 기쁨의 조각들이 우리의 삶을 덮고 있다. 기쁨을 기쁨으로 보지 못하고, 그것마저도 허무와 실망으로 보는 것은 너무나 큰 불행이다. 우리는 모든 기쁨의 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루이스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디서나 발견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어디서도 발견하지 못한다. … 많은 것이 보는 눈에 달려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감각에 와닿는 쾌락과 그것을 누리는 즐거움, 우리의 영혼에 엄습하는 ‘Joy’라는 갈망, 그리고 그것이 남기고 가는 아쉬움과 더 크게 일어나는 열망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빛의 조각들”이 쏟아져 내리는 신비함을 계속 경험해야 한다.
오늘도 하늘 지성소에서부터 온 우주에 메아리 치는 하나님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춤추시는 하나님이 옷자락이 온 우주에 가득한 광경을 볼 수 있어야 한다.8
주
1) 필자가 미국에서 활동하는 2세 목회자 Walter Kim의 설교를 통해 들었다: MZ세대는 베이비부머세대의 진리나 X세대의 선보다는 아름다움(beauty)에 헌신한다. MZ세대는 삶의 방식도 즐기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이 세대는 배가 고파서 식당을 찾는 것이 아니다. 탄성을 자아낼 만큼 멋이 있어야 한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러워야”한다. 메인뿐 아니라 디저트도 사진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예쁘고 화려해야 한다. 이들은 삶의 질이 중요하다. 밋밋한 생존보다는 느낌이 있는 누림에 관심이 있다. 안정된 직장이라고 하지만 지루한 대기업보다는 나의 개성과 개인적 성취감이 중요시되는 벤처가 더 좋다. 역설적으로 지극히 개인주의같이 느껴지는 시대지만, 대부분의 청년은 홀로서기 보다는 같이 즐길 수 있는 팀워크를 훨씬 중요하게 여긴다. “인생은 아름다워!”를 함께 외치며 살기를 소망한다.
2) “Hedonics”는 월터 후퍼(Walter Hooper)가 편집한 Present Concerns: Essays by C. S. Lewis(Harvest Books, 1986)에 포함돼 있다. 이 글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헤아려 본 기쁨》(두란노, 2021)의 제1장에 담겨 있다.
3) C. S. 루이스의 《개인기도》, 제17번째 편지.
4) 루이스가 Paul Elmer 에게 쓴 편지 중(1934): “I went from materialism to idealism, idealism to pantheism, from pantheism to theism, from theism to Christianity.”
5) 추구하는 바는 달랐지만, 세계관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듯한 임마누엘 칸트나 그 이후 사용한 기독교 사상가인 아브라함 카이퍼와 그의 제자이며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자인 헤르만 바빙크 모두 세계관을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이라는 입장에서 이해했다.
6) “I believe in Christianity as I believe that Sun has risen, not only because I see it but because by it I see everything else.” 루이스의 설교를 모아 놓은 《영광의 무게》에 실린 “신학은 시인가?” 중.
7) “A dramatic, pulsating activity, a life, almost a kind of drama.”
8) 본고의 몇 부분은 필자의 책 《헤아려 본 기쁨》에서 발췌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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