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회] 공산독재ㆍ자본독재 함께 거부한 조봉암
독재자 이승만 평전/[13장] 정치보복의 극치 조봉암 처형의 내력 2012/05/14 08:00 김삼웅조봉암은 국민을 도탄에서 구하고 다시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없도록,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자신이 집권을 하는 길이라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민주당 참여가 좌절되면서는 더욱 결의가 굳어졌다. 1955년 12월 진보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추진위원회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어서 1956년 3월 31일 진보당 전국추진위원회 대표자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진보당 추진위원회는 관료적 특권정치와 자본가적 특권경제를 배격하고 민주 책임정치와 대중본위의 균형있는 경제체제의 확립을 내걸었다. 조봉암의 정치철학이었다. 다음은 4개항의 강령이다.
1.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책임 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생산ㆍ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 육성.
3.민주우방과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통일 실현.
4.교육체제를 혁신하여 국가보장제 수립. (주석 8)
제3대 정ㆍ부통령선거가 1956년 5월로 예정되었다.
이승만은 이른바 우의(牛意)ㆍ마의(馬意)까지 동원하는 곡예 끝에 3선에 출마하고 부통령후보에 측근 이기붕을 지명하였다. 민주당에서는 신익희와 조병옥이, 진보당 추진위원회는 우여곡절 끝에 조봉암과 박기출이 정ㆍ부통령 후보에 각각 선출되었다.
조봉암은 두번째로 이승만과 대결하게 되었다.
야권 후보 단일화 협상이 전개되고, 조봉암은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하여 후보를 사퇴하는 대신 부통령후보를 진보당추진위원회 후보에게 넘길 것을 요구했으나 민주당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런 와중에 신익희 후보가 호남 유세길에서 사망함으로써 조봉암은 자연스럽게 야권의 단일 후보가 되었다. 하지만 민주당은 정권교체라는 대의보다 구파에서는 후보를 잃은 실망감에서, 신파는 부통령후보 장면의 당선을 위해 진력하면서 조봉암의 ‘야권 단일후보’를 외면하였다.
선거전은 살벌하게 전개되었다. 선거가 아니라 공포영화를 방불케 하였다. 조봉암진영에서는 선거운동원들의 활동이 철저하게 봉쇄되었다. 선거 벽보 부착이나 연설회도 거의 불가능했다. 운동원 몇 명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신익희가 5월 5일 서거하였으므로 진보당은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야 했으나, 5월 6일경부터 거의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다. 중앙 간부진이 각도 유세반을 편성하여 마지막 유세를 하고 선전유인물을 배포하게 하였지만, 선거방해가 너무 심했다. 충남반의 박준길, 강원반의 이명하 등은 현지에 내려간 직후 테러를 당하고 유인물을 빼앗겼으며, 경남반의 전세룡은 의령에서 경찰서장실로 연행되어 경고를 받고 쫓겨 왔다. 진보당 경북도당 선전부장 이병희는 5월 6일 3명의 괴한에게 납치되어 “선거자금 출처가 어디냐”며 고문ㆍ폭행을 당하여 실신했다. (주석 9)
조봉암은 투표일을 일주일쯤 앞두고 공포분위기와 암살위기로 잠적하기에 이르렀다. 야권의 유력후보가 막판 선거운동을 접고 잠적하게 되는,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 벌어졌다. 탄압은 투ㆍ개표 과정에서도 극심하게 자행되었다.
진보당의 선거유세반이 전국 각지에서 조직적인 선거운동 방해공작에 부딪혀 이렇다 할 활동도 하지 못한 채 5월 15일 선거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아울러 투개표 과정에서 관권의 개입을 통한 철저한 부정선거가 저질러졌다. 부산 중구의 경우 진보당측 참관인이 경찰에 연행된 후 이승만의 1만표가 조봉암의 3만표와 뒤바뀌기도 했다. 당시 내무장관이던 최인규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강원도에서 나온 이승만에 대한 90퍼센트의 지지는 엄청난 조작이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조작과 부정이 이루어졌다고 인정하였다. (주석 10)
테러ㆍ협박ㆍ공갈ㆍ매수ㆍ선거방해ㆍ투개표 부정 등 온갖 부정행위가 저질러진 가운데 치러진 선거의 개표결과는 이승만 504만 6437표, 조봉암 216만 3808표, 신익희 추모표 185만 표로 최종 집계되었다. 엄청난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총 투표수의 80 퍼센트를 획득할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겨우 52퍼센트 선에 그쳤다. 이는 4년 전의 득표율보다 무려 22퍼센트나 떨어진 수치로서 기권표와 무효표까지 합치면 다수의 국민이 이승만을 거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승만은 온갖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승리’를 얻고, 조봉암은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나돌게될 만큼 선전하게 되었다.
제3대 대선에서 예상 밖의 성과를 얻은 조봉암은 여세를 몰아 진보당 창당을 서둘렀다.
지난 번 선거는 진보당을 창당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치뤄야 했다. 선거 과정에서 보듯이 민심은 이미 이승만과 자유당에서 등을 돌렸고, 새로운 지도자와 새로운 대중정당을 바라고 있었다. 조봉암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주석
8> 정태영, <조봉암과 진보당>, 한길사, 1991.
9>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상)>, 역사비평사, 1999.
10> 박태균, 앞의 책.
1.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책임 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생산ㆍ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 육성.
3.민주우방과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통일 실현.
4.교육체제를 혁신하여 국가보장제 수립. (주석 8)
제3대 정ㆍ부통령선거가 1956년 5월로 예정되었다.
이승만은 이른바 우의(牛意)ㆍ마의(馬意)까지 동원하는 곡예 끝에 3선에 출마하고 부통령후보에 측근 이기붕을 지명하였다. 민주당에서는 신익희와 조병옥이, 진보당 추진위원회는 우여곡절 끝에 조봉암과 박기출이 정ㆍ부통령 후보에 각각 선출되었다.
조봉암은 두번째로 이승만과 대결하게 되었다.
야권 후보 단일화 협상이 전개되고, 조봉암은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하여 후보를 사퇴하는 대신 부통령후보를 진보당추진위원회 후보에게 넘길 것을 요구했으나 민주당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런 와중에 신익희 후보가 호남 유세길에서 사망함으로써 조봉암은 자연스럽게 야권의 단일 후보가 되었다. 하지만 민주당은 정권교체라는 대의보다 구파에서는 후보를 잃은 실망감에서, 신파는 부통령후보 장면의 당선을 위해 진력하면서 조봉암의 ‘야권 단일후보’를 외면하였다.
선거전은 살벌하게 전개되었다. 선거가 아니라 공포영화를 방불케 하였다. 조봉암진영에서는 선거운동원들의 활동이 철저하게 봉쇄되었다. 선거 벽보 부착이나 연설회도 거의 불가능했다. 운동원 몇 명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신익희가 5월 5일 서거하였으므로 진보당은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야 했으나, 5월 6일경부터 거의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다. 중앙 간부진이 각도 유세반을 편성하여 마지막 유세를 하고 선전유인물을 배포하게 하였지만, 선거방해가 너무 심했다. 충남반의 박준길, 강원반의 이명하 등은 현지에 내려간 직후 테러를 당하고 유인물을 빼앗겼으며, 경남반의 전세룡은 의령에서 경찰서장실로 연행되어 경고를 받고 쫓겨 왔다. 진보당 경북도당 선전부장 이병희는 5월 6일 3명의 괴한에게 납치되어 “선거자금 출처가 어디냐”며 고문ㆍ폭행을 당하여 실신했다. (주석 9)
조봉암은 투표일을 일주일쯤 앞두고 공포분위기와 암살위기로 잠적하기에 이르렀다. 야권의 유력후보가 막판 선거운동을 접고 잠적하게 되는,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 벌어졌다. 탄압은 투ㆍ개표 과정에서도 극심하게 자행되었다.
진보당의 선거유세반이 전국 각지에서 조직적인 선거운동 방해공작에 부딪혀 이렇다 할 활동도 하지 못한 채 5월 15일 선거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아울러 투개표 과정에서 관권의 개입을 통한 철저한 부정선거가 저질러졌다. 부산 중구의 경우 진보당측 참관인이 경찰에 연행된 후 이승만의 1만표가 조봉암의 3만표와 뒤바뀌기도 했다. 당시 내무장관이던 최인규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강원도에서 나온 이승만에 대한 90퍼센트의 지지는 엄청난 조작이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조작과 부정이 이루어졌다고 인정하였다. (주석 10)
테러ㆍ협박ㆍ공갈ㆍ매수ㆍ선거방해ㆍ투개표 부정 등 온갖 부정행위가 저질러진 가운데 치러진 선거의 개표결과는 이승만 504만 6437표, 조봉암 216만 3808표, 신익희 추모표 185만 표로 최종 집계되었다. 엄청난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총 투표수의 80 퍼센트를 획득할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겨우 52퍼센트 선에 그쳤다. 이는 4년 전의 득표율보다 무려 22퍼센트나 떨어진 수치로서 기권표와 무효표까지 합치면 다수의 국민이 이승만을 거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승만은 온갖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승리’를 얻고, 조봉암은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나돌게될 만큼 선전하게 되었다.
제3대 대선에서 예상 밖의 성과를 얻은 조봉암은 여세를 몰아 진보당 창당을 서둘렀다.
지난 번 선거는 진보당을 창당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치뤄야 했다. 선거 과정에서 보듯이 민심은 이미 이승만과 자유당에서 등을 돌렸고, 새로운 지도자와 새로운 대중정당을 바라고 있었다. 조봉암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주석
8> 정태영, <조봉암과 진보당>, 한길사, 1991.
9>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상)>, 역사비평사, 1999.
10> 박태균, 앞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