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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8월4일(목)맑음
어제는 지나가서 이제 여기에 없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 여기에 없다. 그 사이 널널한 공간을 꽉 채우고 있는 지금 여기! 그 새로움, 날 것의 싱싱함, 그리고 그에 따른 낯섦. 왜 그토록 빨리 낯섦을 익숙한 것으로 바꾸기 위해 싸게 팔아버리려 하는가? 싸게 팔아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길들여진 대로 따르는 편안함, 그 대가는 진부함, 중고가 된 현재, 싸구려가 된 삶. 반복되는 일상.
아침에 장경각에서 내려오는 길 쓸다. 백양사 운문암 선원장 정견스님이 입적했다는 소식 왔다. 아직 한창 푸르를 나이인데 세연이 다했구나. 여기까지! 그러면 끝! 참으로 간단명료한 삶이다. 오후엔 종단의 원로이신 월탄스님이 입적했다는 뉴스가 날아오다.
2022년8월6일(토)맑음
아침 공양 후 길을 빗질 하는 울력하다. 에어콘에서 나온 냉기 때문에 콧물이 나서 감기약을 먹고 쉬다. 59.3 kg. 오후에 폭염 35~36℃.
<선종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왜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협력하여 비폭력 불살생을 어기는가?>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1870~1945)는 일본이 자랑하는 철학자로서, 견성오도한 체험을 ‘순수경험’이라고 명명하여 주체성의 철학을 축조하였다. 사실 순수경험이란 용어는 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1842~1910)의 저술에서 따가지고 온 것으로, 니시다 철학의 초석이다. 청년 시절 때 인생 문제를 고뇌하면서 한 선종사찰에 머물면서 스승의 지도(일본 임제종 세츠몽(雪門, 1850∼1915)) 아래 無字화두를 타파하는 체험을 하였다. 그 체험을 기본재료로 삼아 서양철학 특히 독일 관념론을 끌어와서 철학적 용어로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보자면 선종의 전통적인 수행 방법인 공안을 참구하여 견성을 체험하기도 어려운 일인데, 거기에 덧붙여 서양철학적 용어를 구사하여 자기의 견성 체험을 해명하는 체계를 세웠으니 가히 禪-哲學(선-철학, 이런 조어가 가능한지 모르겠지만)의 신기원을 열었다 하겠다. 그리하여 하이데거를 비롯한 구미철학자들에게 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일본 젠이 세계화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크리스찬-젠 Christian-Zen을 비롯한 종교 간의 대화와 교류의 물꼬를 텄다. 그러나 니시다의 주체성 철학은 일본이 군국주의화 되는 광풍 속에서 불살생, 비폭력이라는 불교의 기본을 포기함으로써 일본의 大和魂(야마토 다마시)에 야합하고 말았다. 그는 일본제국주의를 편드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견성오도한 사람도 민족중심주의, 국가이기주의를 넘어설 수 없음을 보여주는 나쁜 사례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에 동조 내지 묵인하였다. 사람의 마음을 정화함으로써 세계의 평화를 이룬다는 게 불교가 바라보는 세계관이라는 게 보통 사람들의 상식이다. 그런데 니시다 키타로와 같이 명실공히 깨달은 사람으로 자처하는 철학자가 일본제국주의에 협조함으로써 생명존중과 인류평등, 비폭력 불살생이라는 불교적 기본 덕목을 배신하고 말았으니, 선종에서 말하는 그 ‘깨달음’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선종에서 말하는 ‘깨달음’ 소위 견성오도 체험은 과연 사람을 전인격적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힘이 있는가, 없는가? 소위 깨달은 사람도 민족주의, 국가주의, 정치적 계급적 파당성을 넘어설 수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런 깨달음이란 사회정의와 세계평화의 실현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아니나 다를까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동안 일본의 쟁쟁한 선사들(釋宗演 Shaku Soen, 原田 大雲祖岳 Harada Daiun Sogaku 등)과 한국의 스님들(김대은, 권상로, 이회광, 변설호, 김구하, 최범술 등등)은 일본 편에 붙어서 전쟁을 옹호하고 부추겼다. 그러고도 그들은 죽을 때까지 참회하지 않았다. 순수와 절대의 한순간을 참으로 경험하여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할 수 있는 사람만이 붓다의 길을 올곧게 갈 수 있지 않겠는가?
[참고]
①최용운 서강대 연구교수는 “니시다는 1943년 5월 일본 군부로부터 대동아공영권의 지침에 대한 글을 요구받고 <세계 신질서의 원리>를 집필했다”며 “당시 도조 내각이 이를 수용해 중국, 만주, 필리핀, 타이, 미얀마 등의 대표가 참가한 ‘대동아의회’에서 채택한 ‘대동아공동선언’에 상당 부분 반영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대동아공영권의 이론 자체가 니시다에 의해 최초로 정립된 것은 아니지만, 근대 세계 역사를 서양 제국주의의 역사라고 비판했던 그가 피지배국의 입장을 조금도 고려치 않은 채 자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에 편승했던 행적은 그의 학문적 위업의 빛을 감하게 했다”고 덧붙였다.
②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Brian Daizen Victoria가 ‘불교 파시즘: 선(禪)은 어떻게 살육의 무기가 되었나?’와 ‘전쟁과 선 Zen at war’이라는 저서를 통해 참선 수행이 과거 군국주의 일본 군대의 침략 전쟁에서 어떻게 악용되었는지,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그 전통이 일본 기업에 그대로 이어져 직원들의 정신 무장 도구로 삼고 있는 문제점을 낱낱이 밝혔다. 브라이언은 일본 조동종 본산 영평사에서 수행을 마친 미국인 선사이다.
③러일전쟁(1904~5) 당시 러시아의 톨스토이는 러일 양국 사이의 반전 평화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일본 선불교의 지도자 샤쿠 소엔(釋宗演)에게 연대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소엔은 자신의 선사상에 입각하여 냉소적으로 거절하였다. “비록 부처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금하였으나, 그는 또한 모든 중생이 무한한 자비의 수행을 통해 함께 연합할 때까지, 평화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소이다. 따라서 양립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 조화를 일으키는 수단으로서, 살생과 전쟁은 필요한 것이오.”
④일본의 선불교를 미국에 본격 전파하여 유명한 스즈키 다이세쯔(鈴木大拙)는 1943년에 “대동아전쟁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의 정수는 동아시아의 문화를 위한 일종의 이데올로기 투쟁이다. 불자들은 반드시 이러한 투쟁에 참여해 자신들의 필수적인 임무를 완수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그의 스승인 샤쿠 쇼엔(釋宗演)의 “양립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 조화를 일으키는 수단으로써 살생과 전쟁은 필요한 것”이라는 주장을 충실히 이어받은 데 불과하다.
도조 히데키를 비롯하여 당시 일제 군부의 고위급 장군과 영관급 장교들은 대부분 참선을 생활화하며 특정 선사를 스승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동맹국이었던 나치 독일에서도 일본 군인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군인 정신을 확립하는 데에 참선 수행이 유용하다고 판단하여 대표단을 일본에 보내 훈련을 시켰던 사실도 밝혀졌다.
2022년8월7일(일)맑음
아침 공양하고 구참스님들과 함께 단양에 있는 미륵대흥사로 달려가서 입적하신 월탄대종사께 조문을 표했다. 돌아오는 길에 장회나루터에 서서 일대 장관을 둘러보고 귀사하니 오후3시. 통도사 계곡엔 무더위를 식히느라 물놀이 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
2022년8월8일(월)맑음
아침에 빨래하여 햇볕에 널다. 구름 많은 날씨다. 여름 내내 깔고 앉았던 삼베 좌복 깔개를 일제히 빨아 건조실에 널다. 상판 스님들 모여 차를 마시다. 오후에 진주선원 KT 와이파이 재연결 신청하다.
Ideally the ultimate retreat is to retreat from the past and the future, to always remain in the present. However our mind is so empowered and controlled by habit all the time. One characteristic of habit is not being able to sit still, not being able to remain in the present. This is because being in the present is so scary, so boring and unbearable for our deluded and spoiled mind. Little do we know that actually being in the present is so exciting and the most liberating from all kinds of pain, suffering and anxiety.
– Dzongsar Khyentse Rinpoche
진실제의 차원에서 안거(安居)란 과거와 미래에서 물러나 항상 현재에 머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늘 습관의 힘에 휘둘리어 조종당한다. 습관의 특징 중 하나가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것인데, 그것이 마음을 현재에 머물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생각에 빠져 제멋대로인 마음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현재에 있으라’는 것만큼 겁나는 일이 없으니, 그건 지루하고 참을 수 없는 일이 된다. ‘현재에 있다’는 게 진짜로 신나는 일이며, 모든 종류의 고통과 걱정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라는 걸 우리는 너무 모른다. -종사르 켄체 린포체
<윌리엄 제임스의 순수경험과 ‘업보는 있되 작자는 없다’는 말>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가 관념에 사로잡히기 전에 본래의 생생한 체험이 선행한다.” 생생한 체험만이 있을 뿐이다. 다른 말로 현상만이 있을 뿐, 그것을 분류하고 개념 짓는 작용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태다. 이것이 바로 초기불전에 나오는 ‘업보는 있되 작자는 없다’는 말이 아닌가? 이러한 생짜의 경험은 생생하고 충만하고 신비롭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아니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순수경험을 관념으로 나누고 구분 짓고 판단해 일부의 경험만을 떼어낸다. 그들은 관념에 사로잡혀 나와 너를 구분하고 사물을 실체화한다. 이렇게 되면 주객의 분리, 주체와 대상에 대한 실체화, 그리고 그에 따른 인지장애(소지장)와 정서적 장애(번뇌장)이 생겨 만반 고통이 뒤따른다. 본래의 생생한 체험 ‘지금 여기!’에 깨어나라. 생짜의 경험, 통체의 순수경험은 생생하고 충만하고 신비롭다. 그건 청정본연하여 천지미분전이요, 희론이 적멸하여 대안락법문이로다.
우리 세대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인간이 마음가짐에서 태도를 바꿔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The greatest discovery of my generation is that a human being can alter his life by altering his attitudes of mind. -윌리엄 제임스(1842~1910)
2022년8월9일(화)흐림
새벽 정진 끝나자 입승스님이 말씀하신다. 이것으로 하안거 한철 정진을 회향하겠습니다. 죽비를 놓습니다. 대중스님들, 모두 근념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서운암 무위선원 하안거 한철 정진이 완성되었다. 좌복 피를 벗겨 빨래하는 일이 시작된다. 선방을 나서니 하늘엔 瑞雲서운이 중중하고 마당에는 푸른 풀잎 위에서 다키니들이 춤을 춘다. 옴 벤자 베로짜니에 하리니사 훔훔 펫 소하! 한달 동안 읽어오던 신상환 박사의 <용수의 사유>를 오전에 완독하다. 점심 공양하고 지월스님과 포행하다. 58.6kg.
Training the attention is definitely one way to begin empowering the mind. There is an enormous power in being able to control the attention. Then, as we gain power over our attention, we come to know from our experience, not just as a belief, that we have power over the reality we attend to. And our reality starts to shift. As Shantideva declares, by subduing one's own mind, all dangers and fears are subdued. That is something definitely within our reach, not just for advanced contemplatives in Tibet. In fact, empowering the mind is almost a misnomer. It's not as if you are doing something special to the mind to make it big and powerful. You are simply removing impediments, so the inherent power of the mind can spring forth. That is all that shamatha does.
~ B. Alan Wallace - The Four Immeasurables: Cultivating a Boundless Heart
주의를 기울이는 훈련은 마음의 힘을 키우는 일을 시작하는 확실한 하나의 방법이다. 주의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되는 건 엄청난 능력이다. 우리가 주의력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현실을 지배하는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을 믿음이 아니라 경험으로 알게 된다. 주의를 기울이면 현실이 변하기 시작한다. 샨티데바 존자가 말씀하셨듯이 자신의 마음을 정복하면 모든 위험과 공포가 극복된다. 이건 티베트의 명상 고수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분명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사실 마음의 힘을 강화한다는 건 잘못된 말이다. (마음의 힘을 강화한다니까 마치) 마음을 확대하거나 강력하게 만드는 어떤 특별한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이 다만 (마음의) 장애를 치우기만 하면 마음의 내적 힘은 솟아나게 되어있다. 이것이 사마타(마음을 집중하여 고요히 하는 수행, 삼매수행)의 전부이다.
-앨런 월래스 –사무량심: 무량한 마음의 계발
2022년8월10일(수)흐림
아침 공양하고 의화 선덕스님 방에서 차를 마시는데 방장이신 성파스님이 들러셨다. 구참스님들과 함께 환담나누다. 등산화와 등산 모자를 빨아서 건조실에 말리다.
<일련스님과 ‘무아인데 어째서 윤회하느냐’에 대해 대화한 다음 사유한 것>
중생이 무자성(무아)이기에 윤회하며, 중생은 윤회하기에 무자성(무아)이다.
만일 중생이 자성이 있다면 자성이라는 동일성의 무한 연속만 있을 뿐으로 윤회는 불가능하다.
중생이 무자성이기에 윤회할 수도 있고, 따라서 윤회를 벗어날 수도 있다.
만일 중생이 자성이 있다면 윤회로부터 해탈은 불가능하다.
귀하다, 일체 존재에 자성이 없다(무자성=연기=공성)는 가르침이여! 이 고귀한 앎에서 윤회로부터 해탈이 가능해진다.
2022년8월11일(목)흐림
삭발목욕일. 59kg. 저녁 예불 끝나고 하안거 한철을 되돌아보는 자자회를 갖다. 큰방에 빙 둘러앉아 각자 한마디씩 발언한다. 더러는 덕담을 하고, 더러는 자기의 허물을 고하며 양해를 구하기도 한다. 여름 한 철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앞발과 뒷발 사이는 한 걸음. 앞 순간과 뒤 순간 사이는 空. 너와 나 사이엔 봄見. 자자회를 마치고 푸른 마당 위에 서서 산안개가 피어오르는 앞산을 바라본다.
2022년8월12일(금)흐림
아침 7시 큰절에서 해제법요식하다. 방장스님 해제법문과 사홍서원으로 마무리하다. 화엄경의 대의가 通萬法 明一心, 만 가지 가르침을 통괄하여 일심을 밝힌다. 그러면 그 一心이란 무엇인가? 언어와 사유를 끊고 일심을 참구하면 참선이 되고, 일심을 일상에 운용하여 산다면 평상심이 되고 자비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틀어 보리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화엄은 보리심 수행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참선이란 절대적 보리심 즉 공성의 체득 곧 반야바라밀과 다르지 아니하고, 대승보살행이란 상대적 보리심의 실천 즉 보현보살불가사의해탈경계를 유희자재하는 일이다. 법요식이 끝나니 대중이 사방으로 흩어져 세상으로 들어간다. 여름 한철 동안 밝고 맑아진 마음이 세상으로 들어가 깊이 들어간 만큼 맑고 밝아지리라. 한 방울의 감로수가 사막에 떨어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감로수는 끊임없이 떨어져야 한다. 그게 감로수의 할 일이고 감로수의 존재이유이다. 보리심행자는 세상 가운데로 떨어져 부서지고 스며들어야 한다. 세상이 전부 보리심으로 피어날 때까지.
9시쯤 진주선원 팀이 도착하여 짐을 싣고 부산 금곡동 불암사로 향하다. 11시에 백중 천도 회향에 맞춰 법문하다. 이어서 <붓다프로젝트>에 싸인을 해주다. 불자들에게 100권 정도를 싸인해드리는 데 몰두하여 시간 가는 걸 잊었다. 주지스님과 차담 나누다 오후 3시경 돌아오다. 진주에 돌아오니 5시. 하산거사 도움을 받아 1층 강의실에서 마이크 테스트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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