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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신병교육대대 2중대 2소대 훈련병 이00의 어머니입니다.
나무마다 서로 다른 색깔로 꽃 같은 단풍을 흩뿌려놓은 듯 곱던 10월의 마지막 날,
광주 31사단에 사랑하는 아들을 두고 나오면서 아득했던 마음이 기억납니다.
그날따라 유난히 맑은 하늘에 근사하게 흩어져 떠 있는 다양한 문양의 구름 하나가 아이의 얼굴 같아서 더욱 가슴이 저렸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훈련병 부모님 소감문을 쓴 나는 부모 대표로 수료식장에서 낭독을 했다. 그것을 끝으로 아들은 5주간 훈련소 생활을 무사히 마쳤다.
나는 태어나서 청년기까지 충청도에서 살았으며 그보다 더 오랜 기간을 경기도에서 살고 있다. 형제들이나 사촌 등 가까운 가족들도 나와 비슷한 생활반경을 가지고 있으므로 영, 호남지역에는 거주하는 친척조차 없었다. 남녘으로는 짧은 여행을 몇 번 했을 정도였으니 호남지역에 대하여는 개인적으로 큰 관심없이 살고 있던 터였다.
늦둥이 아들이 광주에 있는 사단의 신병훈련소로 입대를 한다는 말을 듣고는 당황스러웠다. 육군이라면 당연히 논산훈련소로 입소하는 거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낯선 도시, 게다가 물리적으로도 너무나 멀리 떨어진 그곳으로 간다는 사실은 생경하기만 했다. 심약하고 겁 많은 나는 남들보다 몇 배나 더 커다란 마음의 짐을 가슴에 얹고 아들을 군대에 보낸다고 여겼다.
입대를 위해 처음 가보는 광주는 몹시 멀었지만 두려움과 걱정이 혼합된 채 서걱거려 어떻게 도착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아들의 배웅객이 남편과 둘 뿐이라는 사실이 공연히 더 마음을 애잔하게 했다. 훈련소의 삭막한 분위기에서 풍기는 긴장감이 너무나 생생히 전달되어 참으려 해도 눈시울이 자꾸만 뜨거워졌다. 조부모님들까지 함께하여 푸짐한 웃음 속에서 보내는 가족들도 있었지만 나는 헤어지기도 전에 짧게 깎은 아들의 머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자꾸 눈물 바람을 했다.
“엄마! 우리도 저런 사람들처럼 웃으면서 헤어져요, 잘 다녀올게요.”
씩씩하게 말하며 들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숨길 수 없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들을 광주훈련소에 남겨두고 돌아가는 길의 거리 곳곳마다 늦가을이 물씬 흐드러져 장관이었지만 감동보다는 탄식의 한숨이 자꾸만 나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혹시 집합 시간에 늦을까 봐 새벽부터 서두르며 기차를 타고 왔으므로 다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광주역으로 갔다. 게으르게 지나가는 오후 시간의 낯선 광주역 주변은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음에도 마음 탓인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광주역 앞에서 늦은 식사를 했다. 아침도 못 먹고 식사 시간이 훨씬 지났으므로 배가 고팠지만 입맛이 있을 리 없었다. 억지로 몇 숟가락을 먹어보려 했지만 내가 이제껏 먹어본 곰탕 중에서 가장 맛이 없었던 음식으로 기억에 남았다.
그 후로 계획에 없던 ‘호남 여행’이 시작되었다. 아이의 휴가 기간이 되면 데리러 가면서 또는 귀대시키며 돌아오는 길에 발길 닿는 대로 호남의 여러 지역을 둘러보았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아들이 내게 호남지방의 여행을 골라서 하도록 선물을 준 셈이었다.
수료식 날, ‘얼음’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모든 움직임을 멈춰야 했던 어느 시절의 놀이처럼 단단히 긴장으로 뭉쳐진 똑같은 뒷모습의 장병들이 강당에 모여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아들을 찾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지휘관의 가벼운 농담이 내겐 ‘땡’ 하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는데 군인들은 숨소리마저 내지 않은 채 부동자세로 앉아있었다. 체면이고 뭐고 그들이 배열해있는 옆줄로 들어가 앞으로 나아가며 찬찬히 얼굴을 찾아보았다. 아들의 야윈 듯한 얼굴을 발견한 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반가워할 틈 없이 곧바로 공개적인 컴퓨터 추첨을 통해 자대를 배치하는 과정으로 들어갔다.
아들은 무안에 있는 군부대로 결정되었다. 전남은 섬이 많은 지역이므로 그런 외지로 배치될까 봐 노심초사하였으므로 그나마 육지라는 사실이 안도하게 했다. 어쨌든 또 다른 낯선 시작을 맞이하는 상황이 즐거울 리 없는 아들의 표정 사이로 어두운 분위기가 슬쩍 보이곤 했다. 그래도 먹성 좋은 군인답게 피자 한 판과 치킨 한 마리를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어찌해도 멋스러울 것 같지 않은 머리를 미용실에서 자르고 귀대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아들의 군생활은 이렇게 무안에서 시작되었다. 무안이라는 도시를 검색해 보고 주변의 지인들에게 묻고 알아보았지만 가보기 전까지는 알아차리기가 어려운 미지의 땅일 뿐이었다.
군 복무 기간 동안 몇 번의 휴가를 오가며 여러 번 동행했으나 아들이 있는 무안에서는 하룻밤도 머물지 못했다. 데려다줄 때는 아이를 내려놓고 나면 너무 마음이 텅 비어서 빨리 그곳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데리러 갔을 때는 아들이 차에 타자마자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최초의 여행은 훈련을 마치는 수료식에 가기 위해 하루 전날 아침 출발에서부터였다. 어차피 하루를 묵어야 했으므로 숙소를 정해놓고 해남의 땅끝마을까지 가보기로 했다. 말로만 들었던 땅끝마을은 정말 너무나 멀었다. 땅끝으로 갈수록 도로의 차는 적었으며 끝없을 것 같은 길을 쉬엄쉬엄 달리다 보니 어느새 ‘땅끝마을’이라는 표지판이 여기저기 보였다.
내친김에 배를 타고 보길도로 향했다. 초겨울의 바람 부는 보길도는 황량했고 인적도 드물었다. 바닷가는 말할 수 없이 썰렁했고 식당 주인들이 밖으로 나와 몇 안 되는 관광객들을 불러들였다. 처음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갈치 조림을 먹었는데 의외로 반찬의 가짓수가 많았고 맛도 좋았다.
윤선도가 제주도로 향하던 중 보길도의 풍경에 반해 머물렀을 정도로 아름다움을 극찬하던 다큐 프로를 기억해냈다. 거기서 보았던 절경을 두루 둘러보고 싶었지만 찾아볼 시간이 많지 않아서 아쉬웠다. 가능한 만큼이라도 제대로 보기 위해 친절하기까지 한 식당 주인으로부터 세연정을 추천받아 그곳으로 갔다.
<세연정>
세연정은 두 개의 연못 사이에 만들어진 정자이다. 책도 읽고 뱃놀이도 하며 손님을 맞이하고 풍류를 즐겼던 장소라고 했다. 윤선도가 지었다는 집들이 있었고 그 사이로 이미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나무들은 질서 없는 것처럼 우거져 있었지만 그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으며 걷는 동안 운치가 흠뻑 풍겨 나왔다.
차로 잠깐 이동하니 윤선도 문학관이 나왔다. 문이 닫혀있어서 문학관 내부는 볼 수 없었다. 겨울 초입의 바람이 정신을 차리기 어렵게 불어댔다. 그래도 석판에 적혀있는 어부사시사 일부를 읽었고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윤선도 문학관>
<보길도 여객선>
육지로 나오는 배 시간을 맞춰야 해서 미진한 마음을 보길도에 남겨두고 차와 함께 배에 올랐다. 정말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보길도였으므로 이 정도만으로도 만족하기로 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해남으로 돌아오는 배의 선실 위쪽에는 남편과 나 둘밖에 없었다. 창가 옆자리에 앉아, 아무것도 드러내놓지 않겠다는 듯이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광막한 바다를 우리도 침묵하며 아득하게 건넜다.
아들이 차츰 군 생활에 적응이 되어가던, 입대하고 해를 넘긴 여름이었다. 전주 한옥마을에 들렀다. 마을 초입에서 호남지역 근대식 서양 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 중 하나라는 유럽풍의 전동성당을 만났다. 천주교 신자인 우리는 성당에 들어가 성전에 촛불을 밝히고 아들의 안녕을 간절히 기원했다.
그날은 날씨가 너무 더웠고 장거리를 다니느라고 피로가 겹쳐 힘들었다.마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유명한 전주비빔밥도 먹었다. 식사 후 남편이 카페에 앉아있겠다고 해서 나 혼자 최명희 문학관을 찾았다. 장편소설인 ‘혼불’을 읽고 우리나라의 옛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구성과 탄탄한 문체에 감탄했던 터라 꼭 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소감은 기대 이상으로 매우 인상적이었다. 문학관 주변에 다양한 공예작품들이 전시, 판매되고 있기에 규방 공예작품인 팔찌를 두 개 샀다. 젊은 예술가들의 땀과 노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반짝이는 작품이었다.
<전동성당> |
호남고속도로 금산사 IC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김제의 금산사는 두세 번 간 것 같다. 가는 도중의 도로가 한가해서 잠깐 쉬기도 했으며 특히 절의 단청이 무채색으로 담담하여 마음을 끌었다. 자신의 사견을 떠들썩하게 표현하지는 않아도 실력을 겸비하여 금방 알아챌 수 있는 심지가 꿋꿋한 사람처럼 말이다.
선운사를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중략)
노래 가사처럼 바람 부는 날의 선운사에서 눈물처럼 후두둑 떨어진 붉은 동백꽃들이 무더기를 이루며 땅에 살포시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선운사 주변의 농가를 지나가다가 처마에 메주를 정갈하게 매달아 놓은 집을 발견했다. 마침 그 해부터 된장과 고추장을 담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어서 그 집에 들렀다. 엄마처럼 정스럽고 소박해 보이는 할머니가 만들었다는 메주 다섯 덩이를 샀다. 집에 돌아온 후 힘들여 담그고 보니 맛이 참 좋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그곳에서 메주를 주문해서 장을 담그고 있으니 좋은 인연이 닿은 셈이다.
전에 가본 적이 있는 부안 채석강의 검게 쌓인 여러 겹의 거대한 바위들 틈을 올려다보았으며 눈부시게 펼쳐진 바다 때문에 눈을 꼭 감기도 했다.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내소사에서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걷던 처연한 마음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선운사>
<채석강>
‘호남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고창이었다. 조용하고 포근한 거리들과 규모가 내가 사는 도시와 느낌이 비슷하게 다가왔다. 거기에다 고창읍성의 성벽이 빚어내는 고색창연한 자태가 호감에 큰 몫을 했다. 수원도 도시 중심에 사대문과 성벽이 있어, 볼 때마다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듯한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런 유사한 풍경들이 나를 매료시킨 것 같았다.
아들에게 오갈 때마다 숙소는 항상 고창에 있는 H 카운티였는데 크지 않은 규모였지만 깨끗하고 조용했다. 처음에 갔을 때부터 아들이 제대할 때까지 아주 조금씩 쇠락해 가는 모습을 나는 알아챌 수 있었지만 헤어질 때까지 조금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21개월 동안 의무적인 아들의 군 생활과, 염려로 점철된 나의 간헐적인 여행은 함께 끝났다. 같은 시간이었지만 아들은 힘겨운, 나는 소슬한 공간을 헤매었다. 아이는 힘겨웠지만 강해지는 생활을 경험했을 터이고 나는 소슬했지만 보물이 숨겨진 미지의 호남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었다.
지난 토요일에 부안에 갔었다. 아들의 제대 이후로 호남지방을 방문하기는 6년 만이었다. 봄비가 사그락거리며 날리는 부안의 채석강은 여전히 도도하게 펼쳐져 있었다. 초록이 흐드러진 내소사는 색색으로 달린 지등으로 대웅전 앞뜰이 화려하게 빛났다. 많은 이들의 평안을 위한 소리 없는 기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비가 갠 내소사 뒤편 산에는 신선의 늘어뜨린 도포 자락처럼 구름이 바람 따라 옮겨 다니며 신비로움을 더했다.
<내소사>
내내 조바심하던 몇 년 전 그날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맑고 가벼운 마음이 그 산을 향해 달려 오르고 싶은 충동을 가져왔다. 그저 그대로 보이는 배경의 신록 한가운데 서서 나는 평화로웠다. 유쾌한 심호흡을 크게 하며 맑은 기운을 연거푸 들이마셨다.
사는 동안 희로애락은 순서 없이 다가오겠지만 그 또한 지나갈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순간이 숨어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앞으로 다가올 일상이 조금은 덜 두려우리라.
아들이 예기치 못하게 선물해 주었던 그 시간과 공간들을 이제는 그리움 섞어 회상한다. 숨겨진 보물찾기 같던 ‘호남 여행’의 기회를 다시금 슬며시 꿈꾸고 있는 까닭은, 찾아야 할 보물이 너무도 많이 남아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집필자 이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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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 고향 !!나주에도 볼것이 많다...
나주를 놓치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