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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어린이 주일 설교
○ 에베소서 6장 4절 바른 자녀 양육법
오늘 에베소서 6장 4절의 말씀을 보면 부모들에게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는 법 두 가지를 명령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는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자녀를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4절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기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나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을 받아야 하는 대상은 바로 아비들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를 교육 시키는데 있어서 일차적인 책임은 엄마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들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가 가정의 총책임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자녀들은 자기의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들의 인격이 온유하고 겸손한 경우에는 자녀의 마음을 알기 위해 애를 쓰고 그리고 나서 자녀들을 교훈합니다. 그러나 그런 부모들이 의외로 적습니다.
많은 아버지들이 잘 못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자녀를 야단치는 특권을 아버지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야단만 치지 그 자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런 아버지가 혈기를 내면서 야단치는 경우 아이들의 마음에 많은 상처를 냅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아버지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자기를 전혀 이해해주지도 않고 이해해주려고 하지도 않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이 생깁니다. 물론 엄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죽하면 책 중에 “소리지르는 엄마, 귀막는 아이들”이라는 책도 나왔을까요?
야단치는 아빠들의 잘못된 생각 중에 하나는 자기가 야단치는 것은 아빠로써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자녀를 징계하는 것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8장 5절을 보면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하는 바탕은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징계하시는 것 역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없는 징계는 폭력이며 아이의 마음에 쓰레기를 어지르는 횡포입니다. 그것은 자식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망치는 지름길입니다.
인류의 악한 독재자들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폭력적인 아버지를 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부재한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아버지가 병이들어 죽거나 아니면 사고로 죽었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아버지와 같이 살았는데 아버지가 말과 행동으로 폭력을 일삼았다면 그 아이들이 바로 자라기는 매우 어려울 뿐 아니라 사회에 악을 끼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또한 아버지가 자기들을 버리고 도망을 갔다면 그 역시 마음의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도 역시 매우 어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아버지는 무책임하고, 폭력적이고, 비판적이며, 공격적이고, 율법적이며, 비논리적이고 또한 비상식적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아버지는 참지 못하고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들이 냉소적이고 자식들을 무시하는 말들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자녀들이 자기가 하는 언어 표현들을 지극히 싫어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자녀들이 그것을 말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뿐입니다. 왜 들리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마음문을 열고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버지들의 문제는 자신의 감정만을 중요시 여길 뿐 자녀들의 감정을 중요시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들은 자기 아버지에게 제대로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사회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사회에서 자기의 의견이 있어도 그것을 상사에게나 동료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윗 사람의 권위를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그랬듯이 자기를 좌지 우지 하려는 윗 사람도 역시 자기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린 때에 너무나 부모의 학대가 심한 아이들은 견디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가 가출을 해버립니다. 대책이 있어서 뛰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가도 집보다는 더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없는 징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야단치는 아빠의 잘못된 생각 중의 또 다른 하나는 자기가 야단치는 것은 자기가 옳고 자녀는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흔히 행동하는 잘못 가운데 하나는 아랫 사람들을 노엽게 하면서 야단을 치면서도 야단치는 자기는 옳고 자녀들은 당연히 야단맞을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어른들이 잘못 생각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아빠와 자녀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빠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요즘 텔레비전 프로를 보면 “금쪽같은 내새끼”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거기보면 대부분 아이들이 잘못된 행동하는 원인은 부모의 훈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에 대한 태도를 고치고 아이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접근하면서 행동하고 말할 때 아이가 조금씩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좋아집니다. 문제는 부모와 아이 모두에게서 발생할 수 있지만 문제의 해결책은 대부분 부모에게 있습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겸손히 배움의 자세로 돌아서면 그때부터 그들의 가정은 살맛나는 가정이 되어 갑니다. 부모들이 온유하고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릇된 생각과 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녀들 앞에서 우기면 아이들은 입만 닫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닫습니다. 그러면 그 가정의 아이들은 착한 것 같지만 사실은 분노를 머금은 아이로 자라게 됩니다. 부모는 하나님과 아이들 앞에서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알고도 회개치 않는 부모가 회개하는 부모보다 훨씬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십시오. 그리고 자녀들 앞에서 온유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자녀가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되고 자신들이 잘못했을 때는 솔직하게 하나님과 부모 앞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정직한 사람으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야단치는 아빠의 잘못된 생각 중의 세 번째 문제는 야단을 쳐야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훈육의 방법이 야단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덕과 인격과 칭찬과 권면으로서도 자녀들을 얼마든지 행동을 고칠 수가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이 깃든 야단을 쳐야 하며 그들을 정죄함으로써 여러분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야단은 자녀를 노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야단맞는 아이는 내성이 생겨서 아무리 야단을 쳐도 듣지 않을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야단치는 부모의 문제는 자기의 마음에 평정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에 평정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안과 두려움이 자기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쉽게 화를 내며, 그 만만한 대상이 아내 아니면 아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빠의 분노의 희생양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화가난다고 그것을 가족들에게 퍼붓지 마십시오, 결국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여러분들의 머리와 가슴에 찍힐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야단치는 아빠의 잘못된 생각 중의 네 번째 문제는 자기가 잘못 알고 야단을 쳤다가 아이의 생각을 알게 되었을 때 자기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절대로 아이들에게 사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들을 야단쳐 보셨습니까? 손주 손녀도 역시 야단쳐보셨지요? 그런데 많은 어른들이 야단칠 줄을 알지만 잘못 야단친 것에 대하여 마음 아파하지도 않고 자녀에게 사과를 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럴 수도 있지 뭐”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자기 자녀도 그럴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까요? 특히나 자기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고 생각될 때 말입니다.
하지만 그 문제가 자녀의 마음 속에 해결되지 않는 한은 그것을 평생 가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다가 부모가 약해졌을 때, 또 꼼짝도 못할 때 간호해주면서 그 모든 서운했던 일들을 다 쏟아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앉아서 듣거나 누워서 들으면서 상당히 미안해 하지만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지만 더 이상 숨을 수도 없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마십시오.
야단치는 아빠의 잘못된 생각 중의 다섯 번째는 후에 자식들이 강해지고 자신은 약해질 때가 온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장하는 데도 매우 조금씩 표 안나게 자라지만 늙어가는 것은 조금씩 표 안나게 늙습니다. 그래서 흔히 하는 착각중 하나가 자기는 영원히 늙지 않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쉰이 되고 예순이 되면 자기가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피부로 느낄 때가 옵니다. 그 사이에 자녀들은 독립을 하게 되고 이제는 부모님들의 부양비까지 대주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전세가 역전되어 부모는 기가 죽고 자녀들은 목소리가 커지고 신경질을 내게 됩니다. 부모의 어거지 같은 고집을 이제는 듣고만 있지 않습니다. 지겨워합니다. 그런데도 계속 말하면 큰 소리로 말합니다. “그만 하세요. 좀!” 사실 이 소리는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럴 수 없는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컸습니다. 부모없이도 스스로 잘 살만큼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모는 부모이기 때문에 존중해서 부모의 말이 틀려도 그냥 들어줄 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약해지는 날이 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마십시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거나 부당하게 대할 때 노합니다. 또한 부당한 요구를 할 때 노합니다.
하지만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그렇게 부당하게 대우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노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내색하지 않습니다. 내색하면 오히려 더 크게 야단맞거나 여러 가지 불이익을 겪게 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에게 예의를 전혀 갖추지 않고 함부로 이야기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자녀가 부모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그래도 되는 줄로 생각하고 그런 비슷한 말을 했을 때 부모는 엄청나게 야단을 치며 두드려 팰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는 부모를 그렇게 팰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망나니 중에 망나니요, 해서는 안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노합니다. 어쩌면 부모가 보지 않는 곳에서 화를 내면서 벽이라도 칠지 모릅니다. 부모는 자녀에 대한 분노를 밖으로 표현하지만, 자녀는 부모에 대한 분노를 마음에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삭힙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부모가 나이들어 힘이 없을 때 다른 형태로 그 분노를 쏟게 됩니다. 그러니 자녀가 분노하게 된 원인을 어떻게 찾아내서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정신 상담을 하는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 그것을 찾아내고 그 원인을 제거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강렬한 은혜의 빛 아래서 자기의 문제를 발견하고 거기서 부모를 용서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날의 아이들은 부모에게 당하는 부당함을 부모 곁을 떠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때가 되면 무조건 떠나려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싫어서 떠난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대부분 이런 문제많은 가정의 자녀들이 탈선하게 되지만 개중에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이 친히 그를 만나주셔서 그의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들을 치료해주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가 친히 그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심을 확인시키셔서 자기에게 잘못한 부모들을 용서하게 하십니다. 이런 일은 드물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야단치는 아빠들의 특징 중 하나는 가정 위에 왕처럼 군림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섬기는 위치에 있습니다. 아들들이 군대에 가면 아버지들을 별로 생각이 안나고 엄마들만 생각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엄마들의 섬김 때문입니다. 아버지들이 간과하기 쉬운 것들이 바로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군림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온전치 못한 가정을 만들며, 자녀들을 바른 생각, 또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을 막아버립니다. 자녀의 창의성을 가장 많이 죽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자녀의 부모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아시고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으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여러분의 자녀를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오직”은 다른 길이나 방법이 없는 유일한 방법과 길을 제시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직 뒤에 나오는 내용은 무척이나 귀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직” 뭐라고 합니까?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의 교양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말하고 가르치는 도덕과 예의가 아니라 주의 교양과 훈계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세상 공부를 성경공부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르칩니다. 학교는 절대로 빠지면 안되지만 교회는 빠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 실례입니다. 학교 공부로도 모자라서 수십만원내지는 수백만원의 수업료를 내면서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교회에서 몇 천원 몇 만원 헌금하는 것은 아까워합니다. 세상 교재는 몇 만원을 들여서 사고 또 참고서도 수십만원들여 사도 꼭 사야 한다고 하지만 교회의 성경공부교재는 그냥 주기를 바랍니다. 성경책 한권을 사는 것은 주저하고 아까워하면서도 세상의 성공에 대한 가르침이나 전공책은 수백만원을 써도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성공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성공을 위해 공부시키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성공을 위한 투자에 비하면 교회에서 배우는 것은 약간의 인성에 도움을 주는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성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가르침에 집중하며 자녀들에게 세상의 성공을 위해 부지런히 공부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상의 교양과 훈계를 중요시 여기고 주의 교양과 훈계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화가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치중하던 세상의 가르침이 얼마나 헛되며 자신들을 구원하기에는 턱없이 모지란지를 알게 되는 날이 옵니다. 하지만 그날에 돌이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때는 자기를 그렇게 교육시킨 부모를 원망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살면서 주의 교양과 훈계의 중요성을 알고 가르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도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보호와 보장 아래 있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교양은 뭐고 훈계는 뭘까요? 첫 번째로 교양에 대하여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지식, 정서, 도덕 등을 바탕으로 길러진 고상하고 원만한 품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양을 백과서전에서 찾아보면 ”교양(敎養)은 개인의 인격과 학습에 관계 및 관련된 지식과 행위를 지칭하는 범위를 말한다. 보통 독립된 개인이 의당 가져야 한다고 여겨지는 여러 분야를 망라한 일정 수준의 지식이나 상식을 말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교양에 대하여 ”교양이라는 것은 스스로 문제를 생각하고 해결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양은 내 지식을 자식에게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식 스스로 알아서 모든 것을 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 하나님과 사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교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훈계는 무엇을 말합니까? 국어사전에서는 ”잘못하지 않도록 타일러 주의시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백과사전에서는 ”타일러서 잘못이 없도록 주의를 주거나 또는 그런 말. 문자적으로 '타이르다', '매질하다'라는 뜻“이며, 흔히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가르치는 예의범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런 훈계를 주는 사람들을 싫어해서 “꼰대질”이라고 하면서 귀를 막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들의 말에 귀를 막는다면 이는 여러분들이 행동으로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삶에서 감동을 받으면 부모를 존경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은 보모의 말씀을 잔소리로 듣지 않습니다. 그만큼 부모가 무게감이 있고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책임을 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오늘날 자기가 이렇게 균형있게 성장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의 생각이나 사상을 절대화시켜서 자녀들에게 가르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알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말씀을 보면 “네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면서 살아라. 그리고 나서 너의 자녀들에게 주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녀를 가르치기 전에 여러분들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선되지 않으면 자녀들은 속으로 “아빠 엄마나 잘하세요”하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잘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진정으로 믿음의 삶을 살면 자녀들은 부모 위에 계신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그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애쓰고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을 찾는 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가정의 달을 맞이하고 또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자녀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분은 뭐 다 아는 이야긴 데하고 들으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왜 나는 자녀들을 바로 가르친다고 애썼는데 나의 자녀들이 다 하나님을 떠나고 나를 떠났을까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녀에 대하여 체념하고 있는 분도 있겠지만 어떤 분은 자녀들과의 화목된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길을 원하신다면 여러분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힙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혹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자녀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깨닫게 되었다면 전화로든 찾아가서 만나든, 자녀를 오라고 하든지 간에 여러분들이 솔직하게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정직한 마음은 자녀들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메마른 땅같이 갈라진 마음에 내리는 가랑비처럼 서서히 스며들어가 사랑의 불씨를 당기고 믿음의 씨앗을 발아하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 이 축복이 이 어린이주일부터 시작해서 여러분들이 주님께 가시는 그 날까지 계속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여러분들에게 효도할 것이고 주변에 있는 어른 들을 공경하며 다른 이웃들을 온전히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거기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임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