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18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금요일. - 두려워하면서 사랑하는. 등 )
----------------------------------------------------
220318. 사순 제2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두려워하면서 사랑하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또다시 비유를 드시는데
오늘은 주인과 소작인 관계에 대한 얘기입니다.
말하자면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느님이고 우리는 소작인이라는 건데
저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러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고작 소작인이라니 말입니다.
아들과 상속자가 아니라는 말이잖아요?
그래서일까 오늘 소작인들 마음이 이해가 되고,
소작인들이 일으킨 반란도 이해가 됩니다.
소작인들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기에 반란을 일으켰을 겁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여러 차례 우리가 하느님의 상속자라고 하잖아요?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 17)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 4, 7)
주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소작인이라고 하고,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상속자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고 어떤 말이 맛습니까?
주님 말씀이 맞겠지요.
소작인이라는 것은 우리의 근본 정체성이고,
상속자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승격된 정체성이지요.
이것을 달리 얘기하면 그리스도를 벗어나면 소작인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상속자라는 말이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그리스도 신비체론을 얘기하잖아요?
그러나 관건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사는 것입니다.
지체에서 떨어져나가거나 지체로서 살지 않으면
상속권은 얻을 수 없고 소작인도 되지 못합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처럼 살면 아들로서 공동 상속자가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것은 아들로서의 사랑을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고,
아버지께 드리는 사랑은 지극한 순종으로 드러납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자비와 용서라면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사랑은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거역하면서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이고,
불순종하며 어떻게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소작권을 빼앗길까 두려워 순종할 수도 있지만
진정 하느님을 아버지로 사랑하여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두 가지 곧 두려움과 사랑을 합친 것이 경외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소작인의 비유로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침받는 오늘
경외하올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220318. 사순 제2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3월 18일 금요일
✝️ 1교부들의 말씀 묵상✝️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마태 21,37)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그런데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무식한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이것은 그들의 죄가 참으로 크며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려는 이의 말입니다. 주인은 소작인들이 이들을 죽일 줄 알면서도 이들을 보냈습니다 “내 아들이야 존중
해 주겠지”는 소작인들이 그렇게 했어야 함을, 곧 주인의 아들을 존중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음을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듣든, 또는, … 듣지 않든:'(에제 2.5)이라며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완고한 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당신의 예고 때문에 그들이 불순종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 해 주겠지‘ 나 ‘ ... 할지도 모른다’는 식의 불확실함을 담은 단어를 사용해 표현합니 다. 그들이 딩신의 종들에게는 완고하게 굴었을지라도 아들의 존귀함에는 경의를 표했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1성인 / 영적 글 묵상✝️
말씀의 불꽃(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 관한 이야기 / 프랑스와 까생제나-트레베디
꽃으로 피어난 자음들의 동산에서
만일 성서 주석학이 성사들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는 대신덕적 삶으로부터, 성전과 교회의 교도권에 대한 기껍고도 온전한 애착으로부터 분출한다면, 이런 주석학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말했다는 다음의 규칙 이외에는 다른 규칙을 지니지 않는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하라.“ 만일 참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선사된 성령 안에서’(로마 5.5) 그리고 “교회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그분"(묵시 2.7 참조) 안에서 성경을 읽는다면, 이 성경은 우리에게 매일매일 여러 가지로 새로운 발견, 발명. 비교하기, 작곡, 광시곡의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97)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3월 영적 수련 성월 2주간 용서/화해 ✝️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18-22장
✝️ 1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리옹의이레네오
서방 교회 신학의 초기에 폴리카르포 주교의 제자이자 그리스인인 이레네오가 서 있다 그는 동방에서 리용으로 와서 170년 경 그곳 공동체의 주교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204년에 순교했다.
그는 교회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일을 자신의 주된 과제로 생각했다. 우리에게 불완전한 상태로 전수된 그의 주저 “이단자들을 거슬러”에서 그는 각 개별 교회들이 참된 신앙 안에서 하나로 일치하고 있는 것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치의 표지라고 강조했다.
그가 노력한 것 중 또 하냐 크게 두드러진 것은 영지주의의 오류를 거슬러 투쟁한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속성에 맞지 않는 것이므로 그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고 견딜 수도 없는 표상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레네오는 예리한 지성으로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능하게 한 것이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그리스도과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이라는 점을 파악했다. 그래서 그는 영지주의적인 어떤 이론도 거부하고 그리스도가 참으로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이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육체, 세상 그리고 역사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로 일관하면서 이레네오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룹 인상적으로 전개했다. 그는 영지주의자들의 부정적인 세계관을 거슬러 사람들에게 영원한 완성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열어 주었다.(97)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
220318. 사순 제2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떤 형제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 중에, 앞의 차가 불안했습니다. 차선을 잘 바꾸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또 급브레이크를 자주 밟았습니다. 이 차의 뒤에 ‘초보운전’이라는 글자가 크게 보였습니다. 아직 운전이 미숙한 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운전하고 있던 형제님께서 “저렇게 운전하는 것을 보니 여자가 분명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차를 추월하면서 보니 젊은 형제님께서 운전대를 잡고 있었습니다.
대체로 여성이 남성보다 운전에 미숙하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고정관념을 가지면, 여성 운전자가 실수하면 여성이라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남성 운전자가 실수하면 단순한 집중력 부족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고정관념이 과연 맞는 것일까요? 솔직히 운전을 잘하지 못하는 남성도 많습니다. 또 반대로 엄청나게 운전을 잘하는 여성도 많습니다.
고정관념은 우리의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늘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 역시 고정관념으로 인해 죄로 기울어지는 유다인들을 꾸짖는 말씀이었습니다. 이해를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그 뜻은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은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자연의 모든 것을 인간이 경작하도록 맡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제부터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맡은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할 일은 하지 않고 죄에 빠져들어 하느님과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하느님은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되돌리기 위해 예언자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자를 학대합니다. 하느님의 인내심은 사랑으로 표현되어 끝내는 외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십니다. 그러나 못된 백성은 그 아들마저 죽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작인의 비유’ 말씀의 뜻입니다. 그러면서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라고 하시지요. 사람들이 업신여긴 것, 쓸모없다고 버린 것을 하느님은 쓸모 있게 보시고 귀하게 여기시어 긴요한 자리에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죄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못된 소작인과 같이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았음에도 잘못된 판단으로 주인에게 충실하지 못한 모습이 아니라, 올바른 판단으로 언제나 주인이신 하느님께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올바른 판단으로 주님께 충실한 우리가 되고 있습니까?
------------------
자신의 사랑을 보여줄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을 찾을 수 없다(테모크리토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