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소설)
어둠의 빛
한승주 지음|푸른사상 소설선 58|146×210×15mm|256쪽
18,500원|ISBN 979-11-308-2152-8 03810 | 2024.6.20
■ 도서 소개
기억을 한 번 더 기억하는 소설
한승주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어둠의 빛』이 <푸른사상 소설선 58>로 출간되었다. 부조리한 상황과 대면했던 기억 속의 인물들은 과거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삶을 말한다.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을 대조하고 성찰하며 기억을 한 번 더 기억하는 것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이 살았던 시대를 어떻게 감당했는지 성실하게 기록한 것은 부조리한 현재의 삶에 대한 치열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 작가 소개
한승주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아침의 동행」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작가회의 및 한국소설가협회 회원이며 소설집으로 『사설우체국』이 있다.
■ 목차
장평치킨
신호등 앞에서
간병사 차오센쭈 K
의왕 가는 길
어둠의 빛
두 개의 문
조용한 혁명
내가 더 많이
낙엽을 쓸다
여자아이 리하
▪작품 해설 : 부조리와 싸우는, 기록하는 자의 정체성_ 심영의
■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행운이자 불행이다. 늦은 밤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을 두드리다가 피로한 눈을 비비는 것도 행복이자 불행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오랜 시간 씨름한 머릿속은 이제 텅텅 비어버린 것만 같다. 공허하기도 하고 개운하기도 하다. 과거의 기억을 담보로 써 내려간 작품들을 묶어 두 번째 소설집을 낸다.
■ 작품 세계
한승주 소설집에 실린 10편의 단편소설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기억과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소설 속 인물은 대부분 60대를 통과하고 있는 노인이다. 따라서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고, 그런 까닭에 살아온 날들과 그 안에서 관계를 맺었으나 이제는 여러 사정으로 헤어진 인물들에 대한 회상기억과 그에 따른 파토스(pathos)가 주된 정조를 이룬다. 그런데 과거를 회상하는 인물은 대부분 글을 쓰는 작가다. 과거에 신문기자를 했거나, 그게 아니라도 문학청년이었으며, 현직에서 물러난 지금은 소설을 쓰고 있다. 그런데 그가 기억하는 과거는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그 부조리와 싸웠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려 하는 자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보인다. (중략)
한승주 소설의 화자에게 추억이란 결코 과거의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이야기하고 삶을 말하는 중요한 단서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현재와 이어져 있는 과거의 끈을 놓치지 않으면서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을 끊임없이 대조하고 성찰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승주 소설은 “기억을 한 번 더 기억하는 것이 소설”이라고 할 때, 정확하게 그에 부합한다. 뿐만 아니라 소설의 형식을 빌린 자전적 글쓰기 과정을 통해 자아 정체성을 새삼스레 확인하면서 그가 살았던 시대를 어떻게 감당했었는지 개인적 기억을 문화적 기억으로 기록해두고자 하는 성실함의 태도(부조리한 삶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기록)로 읽을 수 있겠다.
― 심영의(소설가, 문학평론가)
■ 출판사 리뷰
한승주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은 현실의 부조리와 싸우면서 과거의 기억 속에서 지나간 인연들을 다시금 꺼내 회상한다. 이들은 현재와 이어져 있는 끈을 놓치지 않고 과거의 삶과 오늘의 삶을 끊임없이 대조하고 성찰하여, 기억을 한 번 더 기억하는 것이다.
표제작 「어둠의 빛」에는 아파트 단지 주민들 사이에 소문만 무성한 ‘한기호’라는 미궁의 인물이 등장한다. 사람들과의 교류가 적은 ‘한기호’를 둘러싸고 주민들 사이에서 풍문과 편견이 퍼져 나가는 모습에서, 루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연락 두절된 장모를 찾아 아내와 의왕으로 가는 과정에서의 상념을 그린 「의왕 가는 길」, 14년간 기르다가 숨을 거둔 유기견의 처리를 두고 불거진 ‘나’의 과거 잘못과 이를 둘러싼 가족 간 갈등을 그린 「조용한 혁명」은 모두 가족 서사이면서, 어렵게 삶을 지탱해온 남성 가장이 견뎌야 했던 세월을 반추한다. 탈북민인 치킨집 주인과의 인연을 그린 「장평치킨」, 발목뼈 골절 사고를 당한 주인공과 조선족 간병인이 등장하는 「간병사 차오센쭈 K」에는 타인을 향한 연대와 관심의 서사가 따뜻하게 펼쳐지고 있다.
한승주 소설의 화자에게 추억이란 결코 과거의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이자 미래이기도 하다. 현실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있는 인물들의 내면과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내어, 독자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 작품 속으로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죽는 것이 내 방식의 사랑이다.”
사실 나는 아내의 죽음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형님 부부의 버스 추락 사고사, 그해 일어난 누이의 자살과 연이은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나는 우울증에 걸렸다. 혼자 충격을 버텨냈다. 하지만 내면을 찢은 상처까지는 어쩌지를 못했다. 기자로서 승승장구하던 내가 오보와 낙종을 했고, 그건 신문기자에게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늘 입사 동기들보다 앞서 나가던 나는 그해 승진과 보직인사에서 처음으로 물을 먹었다. 기사를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으면 지방 출장 중 형님 내외의 사고 소식을 알려준 막내 누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의왕 가는 길」, 95~96쪽)
20평대의 서민아파트이긴 해도 관리비와 각종 공과금, 생활비와 차량 유지비까지 합치면 못해도 한 달에 150만 원은 있어야 할 텐데, 평생 경제활동을 전혀 하지 않은 한기호가 그만한 돈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는 의혹이 뿌리의 실체였다. “고정간첩일지도 몰라. 평생 아무 일도 안 하는데 멀쩡하게 살고 있는 게 이상하잖아. 북한의 공작금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해거름이면 동네 주변을 배회하는 것도 수상하고.”
“어리숙해 보여도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한 위장술일 수도 있어. 만약 제2차 남북전쟁이 발발하면 한순간 붉은 완장을 차고 나타나는.”
“친구는 고사하고 가족이 드나드는 걸 본 사람도 없잖아. 그렇다면 고아? 근데 고아에게 무슨 유산이 있어 평생 놀고먹는 거야?”
(「어둠의 빛」, 104~105쪽)
혁재는 자신의 과거를 캐내듯 언 땅을 계속 파내려 갔다. 땅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죽은 나무뿌리 같은 것들이 흙을 단단하게 움켜쥐고 있을 뿐, 비닐봉지에 싼 꼬맹이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언 나무뿌리에 부딪힌 삽날이 용수철처럼 튕겨 나왔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겨울산은 어둠에게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저녁의 차가운 공기들이 혁재 얼굴에 달라붙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보름달이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있었다. 달 속에서 어머니가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처음 보는 당신의 미소가 낯설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다시 삽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매장이나 화장은 이제 혁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어린 시절처럼 하루하루를 외롭게 견뎌야 했던 꼬맹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가족 전체가 따뜻하게 배웅해주고 싶었다.
(「조용한 혁명」, 169~1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