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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비천과 풍부의 거리가 없는 자리
소 주 제: 비천. 풍부. 십자가
날자 및 분류: 230430낮 설교 창 조 의 말 씀
성 구:빌4:10-13
저 자: 정 헌정 목사 http://cafe.daum.net/changcho
[본문]빌 4:10-13. 10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딱정벌레 자동차
1938년 처음 생산된 폭스바겐 '비틀'은 딱정벌레 같은 귀여운 외형에 낮은 가격으로독일의 국민차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폭스바겐은 비틀의 미국 시장 진출을 계획했습니다.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연비가 좋은 큰 차를 선호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하지만 폭스바겐은 약점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틀의 작은 외형을 부각하여'작은 것을 생각하세요(Think small)'라는 슬로건을 걸었습니다.작은 것을 더 작게 보이게끔 지면에 많은 여백을 두고 광고했습니다.광고는 가히 혁신적이었고 비틀의 인기도 날로 늘어갔습니다.딱정벌레를 뜻하는 비틀(Beetle)이라는 이름도 미국 시장 진출로 인해 붙여졌습니다.이후에도 17년 동안 260편의 광고로 이어졌으며 미국에서만 한 해 56만 대의 판매량을기록했습니다. 약점을 강점으로 승화시킨 전략으로 지금까지도 비틀은 세계적 베스트셀러로기록되고 있습니다.약점을 강점으로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서약점을 강점으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자신감을 갖고 강점으로 승화해 보세요. 오히려 누구에게도 없는 자신만의 개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너의 약점을 단련하라, 너의 강점이 될 때까지– 크누트 로크니 –
오늘의 본문은 우리성도들이 좋아하는 말씀이 담겨져 있는 구절이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암송하고 있는 구절 중의 하나이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과 같은 말씀 중에서 기억하고 있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 귀신들린 아들을 귀신이 불 속에도 들어가게 하고 말도 못하게 하고 땅에 엎드리게 하며 구르게도 하며 거품도 흘러나오게 한다, 그래서 그것을 보다 못해 제자들에게 아들을 맡겨는 데도 제자들은 그 귀신을 제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예수께서 오신다, 아들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달라고 한다.
막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그러나 그 뜻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과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사도바울은 의기양양해서 이러한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승자의 자리에 앉아있지 않다, 그는 감옥에 있고 빌립보교회의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속수무책인 자리에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이 고백을 한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세상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지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하고 그것이 세상과 다른 내용 다른 목적이라는 것은 놓친 체 우리가 가진 가치와 욕심을 방법만을 신앙으로 묶어버리는 잎뒤가 맞지 않는 기대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그 문제에 대하여 본문은 철저하게 내용면에서 다른 일을 요구한다, 빌립보교회가 감옥에 갇힌 바울을 찾아오고 위로한 일을 고마워하지만
그것은 그가 어떤 물질적 정신적 위로를 필요로 하고 그 일을 빌립보교회가 해 줘서 이제는 힘이 난다는 뜻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잘라서 말한다,
빌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와 같이 상반되는 극단의 거리를 사도바울에게 있어서는 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우리의 신앙은 이 거리에 의한 고통으로 가득차 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 왜 하나님은 낵가 이해할 수 없는 식으로 응답하시는가. 여전히 왜 알 수 없는 길로 인도하시는가, 우리에게 늘 이해할 수 없는 현실적인 갈등이다,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를 믿고 작정하고 진실한 길을 가기고 하는 의지가 아니다,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내 인생을 세상과 내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 삶을 말한다, 내가 믿지 않을 때는 내가 몰랐고 죄인인줄인도 몰랐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몰라서 그렇게 살았지만 이제 믿는자 되었으니 하나님의 뜻에 맞게 내가 내 인생을 철저히 열심히 살리라 이것이 영적인 것이 아니고 자기가 깨우친 예수 알게된 구원 소망하게 된 신앙이라는 것을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관심과 소원을 갖기 전에 하나님이 나에게 이루셨다는데 대한 자극으로 신앙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노력과 헌신에 물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크신 일에 동참시키시고 보상하시고 결과를 보이시는 것 사실이지만 그 동력과 동참이라는 것은 우리의 뜻이나 의지에 대한 하나님에 답이 아니고 우리라는 존재가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를 보내어 사랑하고 구원으로 부르고 자신의 자녀라는 신분을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어떤 뜻과 어떤 작정과 이것을 어떻게 이루시는가에 대한 항복과 순종으로의 동참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영성이라는 것이 다만 커다란 명분과 도덕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진심을 가졌으면 신앙을 가졌으면 이제야말로 저에게 권력을 주셔야 하고 이제야 말로 하나님 제에게 보상해 주셔야 합니다라고 거룩한 떼를 쓰기 시작한다는 사실 이해해야 한다, 내가 이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하여 내 인생을 바치는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내편이 되시고 나에게 힘을 주셔야 된다,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배고픔과 배부름 궁핍과 풍부 그 상반된 차이가 바울에게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이 그런 것들로 만들어지거나 그런 것들로만 성취되거나 그런 것들로만 내용이 되지 않는 것은 예수 안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라는 것은 우리가 가져야 하는 능력과 내용이 예수에게만 있고 우리가 가지는 어떤 목적과 어떤 성취도 예수라는 이름으로만 연결된 것으로 세상의 이치와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선을 긋는다,
고후 6:1-10.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 말씀은 만만치 않으니까. 우선 여기에 집중하라 우리들의 본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모든 것이라는 말씀은 고린도후서 6장식으로 말하면 모든 것이라고 것은
고후 6:4-7.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에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지키는 것이다,
그가 가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성령의 감화와 사랑에 세상의 힘을 더해 주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몰아놓는 위협과 공갈 속에서 이걸해야 되는 것이 사도바울에게서는 모든 것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사도바울이
빌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여기에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에서 자기를 본 받는 자가 무엇이었느냐 하면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그 여러 가지였다,
고후 11:24-27.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러나 사도바울은 외면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그것을 바꾸어줘야 되는 길이 아닌 맞고 오해받고 억울한 길을 걸어낸 것을 본받으라고 했다,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6장에서 모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세상이 도전하는 것 속에서 우리의 옳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 영성은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작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작정하신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에 관한 것이다, 신앙이란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주께서 나에게 이 자리오기까지 비협조적인 내 과거와 무지와 불순종에 있었을 때 무엇을 하여 이 자리에 왔는가와 함께 지금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고통과 쓸모있기를 바랬다, 쓸모 있다는 것은 아마 자존심일 것이다, 왜 고난을 받아야 되는지에 대한 억울함과 쓸모 있어서 자랑하려하는 오직 두 가지 판단으로 지신의 인생의 신앙을 점검하기 때문에 내 진심을 확인시켜주시라 나와 내 이웃에게 내 진심을 확인시켜 달라 진정한 신앙은 지금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인데 사도바울 식으로 말하자면 그가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사이에서 그것으로 만들거나 그것으로 영향 받지 않는 예수 안으로 들어오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옳아서 상을 바다거나 인정을 받는 길과 다른 길이다, 그가 잘못을 해서 고난을 받고 억울해 하는 것과 다르다,
고난 속에서 만들어내는 일 승리 속에서 만들어내는 일을 보는 것이다,
승리가 다만 자랑이 될 수 없고 고난이 다만 절망이 될 수 없는 예수 안에 있는 길을 우리가 판단할 때는 도저히 나올 수 있는 것 같지 않는 것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순종하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 우리는 이 일에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당하는 고통 속에서 우리가 원치 않는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무엇을 이루시는지 우리는 거의 매번 놓친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보편적인 진리와 연결되고 있느냐하면 젊어서는 돈을 주고 사서 고생을 하라. 라는 교훈을 다 알고 있다,
고생을 하면 가장 중요한 진리를 깨우친다, 인간의 연약함과 모든 것은 단번에 작심했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심이라는 이름으로 순수한 소원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이 단번에 내가 가진 진심이 힘만 넣어주시면 모두에게 유익한 결과를 만들 것이라고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를 속인다, 바울은 그것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내가 당한 모든 고난 거기에서 하나님이 일하셨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그런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실패와 고난에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만큼 못난 짓은 없다,
책임을 떠넘긴다고 해서 자신의 실력의 모자람을 메꿀 수는 없다, 이 충당되지 않는다,
억울하다는 것은 이 일이 누구 때문에 이루어 졌는가. 라고 하기 전에 내가 인간다운 마땅한 것을 채우지 못한 것이 억울해야 된다,
그것이 누구책임이냐가 아니라 내가 마땅히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름으로 가야하는 길에 서서 잘하고 채워지고 있는 가로 억울하다 말다를 말해야지 누구 때문이라고 말하는 순간 예수 믿는 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경우가 된다,
하나님께서 그일을 행하셨기 때문에 지금도 적용하고 계신다, 내가 당한 현실의 억울함 우리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교회에 면류관을 걸어놓지 않는다, 어느 교회나 교회의 상징은 십자가이다,
그것은 죽음 한 복판에서 만들어내는 승리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을 가지려고 한다면 사도바울처럼 유명해져야 되고 실력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햐여 죽으신 십자가에 능력을 자신에게 적용할 줄 모르는 자신의 무지이다,
누구에게도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나 인생을 살아보면 우리는 끝없이 내가 책임지지 않고 타인의 책임 속에서 안주하려는 그런 게으름에 비겁함을 고백한다,
나라. 사회가 안정되고 교육이 잘 시행되고 시정책이 잘 적용되는 날. 그러면 바보가 된다, 외면할 수 없는 책임이 모두에게 가야 된다, 인생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여러분 생애 속에서 배우셔야 된다,
내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 된다는 것을 모르면 늘 도망 다닐 수밖에 없다, 그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 그는 자기 믿음에 자랑에 근거를 확보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의 이 말씀은 그 후에
고후 6:11-13. 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우리는 모두를 하나님의 대상으로 알고 십자가 은혜에 대상으로 알고 찾아갔다, 우리에게는 잘나고 못났다는 속 좁은 마음에서 벗어나라 예수를 믿는 것은 너희처럼 편 가르기에 있지 않고 마음을 넓히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지식과 은사로 인하여 각각 다른 파벌이 벌어지고 있었다, 계바파 바울파 바나바파 예수파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거기에 대한 사도바울의 질책이다,
예수 믿고 나서 제일 감사해야 될 일은 여러분이 옳고 열심히 한 것에 대한 것에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미련한 것 고집된 것. 실패와 잘못과 반항과 방황까지도 결과적으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사실 우리 중의 그 누구가 예수 없이 기독교인 될 수 있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시작할 수 있는 신앙이다,
그래서 누구도 정죄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
기독교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고후 6: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고후 6: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배고픔과 배부름에 그 거리가 없는 자리. 풍부와 궁핍의 거리가 없는 상반된 선택과 조건이 없어진 자리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안에서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줄 아는 자리 그래서 누구의 못남이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셔야 된다는 것을 아는 기다림으로 오는 자리 누구에 승리ㅐ가 예수 없이 얻은 승리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마음으로 동일한 기도를 해야 된다는 자리로 자신의 자리와 인생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승리는 십자가의 승리로 이해해야 된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