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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힘의 존재론과 욕망 기계
우리가 3장에서 살펴볼 것은 들뢰즈의 철학사 연구 중에서 ‘힘’과 관련 된 논의이다.
이는 들뢰즈의 “욕망 기계” 개념의 철학사적 기원을 밝히는 작업과 관련되어 있다.
욕망 기계 개념은 물론 들뢰즈 자신의 구조 개념 및 그것을 발전시킨 과타리의 해석(「구조와 기계」)과 사무엘 버틀러의
에레혼에 나오는 ‘기계들의 책’에 대한 고찰에서 중요한 원천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철학사 속에서 고대 원자론,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손을 관통하는 힘과 의지에 대한 사색은 ‘욕망 기계’ 개념의
세부 내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우리는 들뢰즈의 철학사 연구가 문헌학 적 정확성보다 해당 철학자의 사고를 더 심화시켜 그 자신이 말했을 법한 사상에
도달하는 데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들뢰즈에게, 철학사에 등장하는 모든 작품은 미완성의 것이고, 자신의 임무는 그것을 완성시키 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철학사는 자신의 철학적 사고를 위한 광산(鑛山)과도 같았던 것이다.
우리는 들뢰즈 자신의 연구 순서대로도 아니고, 철학사적 연대기를 따라서도 아닌, 힘의 존재론이라는 관점 에서 들뢰즈의 작업을 재구성하려 한다.
그리고 끝부분에 가서 들뢰즈에 서 기계, 욕망, 욕망 기계 같은 개념이 무엇을 뜻하는지 해명할 것이다.
세계의 존재를 설명하는 내재적 방식은 힘을 통해, 존재 자체가 자신 의 지금을 다음 상태로 밀고 가는 힘을 통해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존재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존재가 아니라 존재함인 것이다. 존재를 지칭하는 서양어(on, Sein, ê̂tre, being 등)는 명사로서가 아 니라 동사로서 사고
되어야 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힘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아무런 힘도 행사하지 않는 채로 존재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존재하면서도 아무런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과 마찬가지다.
힘을 행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해 도 좋다.
힘을 행사하지 않는 것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감각될 수도 없 고, 지각될 가능성도 없으며, 생각될 여지도 없다.
힘의 행사란 곧 관계의 형성이자 힘 관계의 형성이다.
시각을 예로 들 면, 어떤 것이 보인다는 것은 그것이 시각 기관과 일정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시각 기관에 일정한 힘을
미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을 때, 즉 빛에 의한 매개가 형성되지 않는 암흑 속에 있을 때, 또는 빛이 통과해 버려 빛에 의한 매개가 일어
나지 않는 공기와 같은 것이 시각 대상이 될 때, 그것은 지각되지 않을 것이며, 시각의 관점에서는 없는 것이라고 여겨
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감각 일반 또는 지각 일반, 나아가 생각 일반을 놓고 볼 때, 시각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힘을 행사
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존재란 힘의 존재이다.
모든 것과 고립된 힘이란 이미 힘이 아니기에, 즉 관계를 맺지 않는 힘이란 상정 불가능하기에, 이런 힘은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없는 것이기에, 존재는 이미 다양하게 관계 맺고 있는 힘들을 뜻한다.
따라서 힘의 존재는 항상 복수(multiple)이며, 존재는 항상 상호-타동사(inter-transitive)이다.
힘들은 서로 변용시키고 변용하는 (affecter-affecté) 관계로만 존재한다.
존재가 힘의 존재인 이상 (가령 파르 메니데스의 전통에서처럼) 불변하는 단일 실체(to hēn)로서 존재를 상정 하는 것은
부당하다.
존재는 상호작용하는(interactive) 힘들로서만 존재한다.
나아가 복수의 힘은 미리 결정된 어떤 법칙이나 어떤 초월적 원리에 따라 관계를 맺지 않는다.
오히려 힘들은 시간 속에서 바로 직전 상태의 다음 순간으로 가면서 새로운 관계에 돌입하며, 이 과정에서 궁극적으로는
우연에 의해 관계를 맺는다.
여기서 우연적이라 함은 관계의 형성이 힘들 외부에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작용자(agent)나 힘들의 작용을 지배한다고
상정되는 필연적 법칙에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며, 이는 곧 목적론적 결정론(그 두 형태가 자유의지론과 기계론이다)에
지배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연의 개입, 이것이야말로 힘들의 관계 형성에 있어 필연적 요소이다.
필연이란 형성된 관계의 긍정이며 우연이란 새로운 관계 형성의 긍정이다.
니체가 말하듯, 주사위 던지기에서 우연의 하늘과 필연의 땅.
“주사위 던지기는 생성을 긍정하고, 생성의 존재를 긍정한다. […]
한 번 던져진 주 사위는 우연̇ ̇의 긍정이고, 주사위가 떨어지면서 형성하는 조합은 필연̇ ̇의 긍정이다. 존
재가 생성에서 자신을 긍정하고 하나가 여럿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에서, 필연은 우연에서 자신을 긍정
한다. […]
니체는 우연을 긍정으로 만든다̇ ̇ ̇ ̇ ̇ ̇ ̇ ̇ ̇ ̇ ̇ ̇ ̇. […]
니체가 필연̇ ̇(운명)이라 부르는 것은 결코 우연 자체의 소멸이 아니라 우연 자체 의 긍정이다.
우연이 그 자체로 긍정되는 한에서 필연은 우연에서 자신을 긍정한다.
왜냐하면 우연의 유일한 조합과 같은 것만이, 우연의 모든 구성원을 조합하는 유일한 방식만이, 즉 여럿의 하나와 같은
방식, 즉 수 또는 필연만이 있기 때문이다. […]
바로 이런 이유에서 놀이꾼이 주사위 던지기를 다시 데려오는 수를 생산하기 위해 서는 우연을 한번 긍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여러 번을 거쳐 재할당되는 확률 이 아니라 한 번의 모든 우연, 욕망되고 의욕되고 소망된 최종 조합이 아니라 운명 적
이고 사랑받은 운명적 조합, 운명애̇ ̇ ̇(amor fati), 여러 번 던지기에 의한 조합의 회귀가 아니라 운명적으로 획득된 수
의 본성에 의한 주사위 던지기의 반복.”(NP 29-31)
이 이 작은 어긋남 또는 삐딱함의 개입이 존재의 사슬에서 시간의 역할이다.
시간 속에 새로운 우연이 개입하는 것이 의지의 작용이다.
여기서 의지는 초월적 원리나 법칙이 아니며, 신학적-인간적 뉘앙스를 담고 있지 않다.
다만 힘의 작용과 관련하여 새로운 관계로 돌입하게 하는 힘 내부의 작용자를 가리킬 뿐이다.
이처럼 우연과 함께 긍정된 존재가 생성이다.
현실은 생성의 존재요 힘들의 관계 변화일 뿐이다.
들뢰즈가 철학사 내에서 주목한 것은 자연주의 또는 유물론의 흐름이었다.
이 흐름은 철학사 내에서 관념론 또는 초월주의와 대립하면서 전개되 었는데, 후자는 인간주의(humanism) 내지 의인법
(anthropomorphism)을 핵심으로 한다.
이 두 경향의 대립은 서양철학의 여명기부터 지적되어 왔다.
가령 고대 희랍 철학자 콜로폰의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c.570 ~ c.475 BC)는 이렇게 경고한 바 있다.
“소들, 말들, 그리고 사자들이 손을 갖는다면, 또한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사람이 만드는 것과 같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말들은 말들과 소들은 소들과 유사한 신의 모습을 그릴 것이고, 각기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형체를
만들 것이다.”(DK21B15; 김인곤 외 2005: 206)
이 동물 화가들처럼, 인간은 모든 것을 자신처럼, 즉 자신의 형상에 따라 상상하고 재현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구성된 존재론은 불가피하게 인간 자신이 투영된 존재론일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사고가 존재의 운행을 가능성의 실현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며, 이는 베르그손에 의해 가차 없이 비판을
받게 된다.
가능성의 관점에서 세계를 사고하는 것이야 말로, 베이컨이 말하는 “시장의 우상”으로서, 인간이 극복해야 할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오류이기 때문이다.
A. 베르그손의 변증법 비판: ‘가능성’ 비판과 ‘잠재’로서의 지속
1953년 흄에 대한 책 경험론과 주체성.
흄에 따른 인간 본성 시론 이후 들뢰즈는 1962년 니체와 철학에 이르기까지 책을 출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기간 동안 들뢰즈가 암중모색만 하고 있었다고 단정해서는 안된다.
사실 이 기간 동안 들뢰즈는 훗날 자신의 철학 이 향하게 될 중요한 작업의 기초를 마련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베르그손을 통한 변증법과의 대결 및 베르그손 존재론의 재구성이다.
1969년의 한 대담에서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상대역(traître)으로서의 헤겔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헤겔 속에 철학적으로 육화되어 있는 것은, 삶에 “짐을 지우려는”, 모든 짐들로 삶을 짓누르려는, 삶을 국가 및 종교와
타협시키려는, 삶에 죽음을 새기려는 기도(企 圖), 삶을 부정에 굴복시키려는 괴물 같은 기도, 원한감정과 양심의 가책의
기도다.
부정 및 모순의 변증법과 더불어, 헤겔은 우파는 물론 좌파에게도 배반(trahison)의 언어들을 자연스럽게 고무시켰다
(신학, 유심론, 기술관료, 관료주의 등).”(ID 200)
변증법과의 대결은 사실 니체와 철학에서 가장 강하게 수행되고 있지만, 이미 그 과업은 초기의 베르그손 연구에서 우회
적이지만 아주 단호 하게 전개되었다.27)
변증법이 언어에 묶인 채 사고하는 데 반해, 베르그손은 바로 힘의 현실 을 적극적으로 사고한다.
사실 ‘변증법’(dialectique)이라는 말 자체가 ‘언어’를 전제하며, ‘대화(dia + lect)’를 통한 사고의 발전을 도모한다.
변증법의 저 유명한 ‘모순’(contradiction)이라는 개념 또한 언어적 사태를 가리킬 뿐(‘말의 어긋남’[contra + dict])이다.
엄밀히 말하면 현실에 모순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의 기대와 어긋나는 현상이 있을 뿐이며, 동시 에 그에 대한 심리적 부정이 있는 것일 뿐이다.
베르그손이 변증법을 비 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한 번에 두 대립되는 관점을 취할 수 없는, 결과적으로 적대적인 두 개념에 포섭되지 않는, 구체적 현 실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Bergson PM 1409, 198)
물론 그렇다고 해 서 우리가 언어 밖으로 쉽게 나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언어가 인류 진화의 과정에서 많은 오류와 더불어 형성되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언어에 쉽게 기댈 일도 아닌
것이다.
관건은 언어와 현실을 끊임없이 대면시켜 지속적으로 개념을 다듬어가는 일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언어에서 시작할 도리밖에 없다.
“철학이 다른 것을 이용할 수는 없었으리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이들도 언어 속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현실의 재단물(découpage)을 채용하고 있다.”
(Bergson PM 1321, 87) 그렇지만 변증법은 개념을 너무 헐겁게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들뢰즈는 이렇게
27) 실제로 들뢰즈의 베르그손 연구에 대해서는 꽤 많은 주목이 있어 왔으며, 들뢰 즈가 베르그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오독했다는 주장까 지도 있다.
들뢰즈의 오독에 대한 비판으로 박치완(2006) 참조.
단언한다.
“어떠한 변증법적 방법을 가지고서도 베르그손주의와 헤겔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베르그손은 변증법에 대해 거짓 운동 즉 추상적 개념의 운동이라고 비판하는데, 그것은 많은 부정확함에 의해서만 한
대립물(contraire)에서 다른 대립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B 38)
말하자면, 변증법은 현실의 운동과는 무관한 추상적 언어의 운동만을 표 현할 뿐이다.
‘가능성’(le possible, possibilité)에 대한 베르그손의 비판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베르그손은 「가능과 현실」(1930)이라는 짧은 논문 에서 중요한 지적을 한다.
“가능은 일단 어떤 현실이 생산되었을 때 그 이미지를 과거로 되던지는 정신 행위를 더 지니고 있는 현실이다.”(Bergson
PM 1339, 110)
이는 마치, 어떤 천재가 작품을 일단 창조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 작품은 현실적인 것이 되는데, 바로 이런 현실적 창조가 이미 있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작품이 회고적으로 또는 소급해서 가능 한 것이 되는 상황과도 같다.
그러나 창조된 작품이 미리 가능했다고 말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가능은 과거 속에 있는 현재의 신기루이 다.”(PM 1341, 111)
달리 말하면, 가능이 이미 존재했다고 여기는 것은, 거울 앞에 서서 자기가 거울 뒤에 있다면 거울 속 이미지를 만져볼 수
있다고 공상하는 것과도 같다.
현실적으로는 내가 그 이미지의 원인인 것이다.
“가능은 무엇인가가 덧붙어 첨가된 상응하는 현실을 내포한다. 왜냐하면 가능은 일단 나타난 현실과 그 현실을 시간을
거슬러 되던지는 조치가 결합된 효과[결과]이기 때문이다.”(PM 1341, 112)
이처럼 가능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거슬러 가면서, 현재에 의한 과거의 부단한 리모델링과, 결과에 의한 원인의
리모델링이 속행되고 있다.”(PM 1343, 114)
가능성이라는 관념에는 이미 존재하는 현실과, 이 현실의 “부정”이 라는 논리적 “조작”, 그리고 이 조작에 특유한 심리적
동기가 더해져 있 는 것이다.
따라서 “(저것도 똑같이 가능한 것이었을 때) 왜 저것이라기보다는 이것이 존재하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은 파기되어야
할 거짓 물 음에 불과하다(B 6-7).
베르그손과 들뢰즈가 가능성을 비판하는 것은, 세계의 생성에 대한 힘 의 관점에서의 설명을 포기한 채 언어와 논리의
관점에서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능성은 상상적 가능성, 논리적 가능성일 뿐 현실이 아니다.
현재 실상에서 뭐 하나만 빼거나 바꾸면 가능 세계가 만들어지 는 것이다.
이는 문법의 가정법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가정법은 사실적 인 것의 반대를 표현하는 문법적 방식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의 바 람의 투사일 뿐이며, 실제로는 반(反)사실적(counter-factual) 사태, 즉 ‘없 되 소망하는 것’을
표현하는 문법적 방식이다.
따라서 이는 사실은 부정의 산물이다.
왜 이런 부정이 생겨나는가에 대한 분석은 사실 니체에 의해 가장 정 밀하게 이루어졌다.
니체는 “일어난 일(Es war)”을 돌이킬 수 없다는 의지의 낙담이 현실의 부정을 낳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다(what is done cannot be undone)”(맥베스)는 것을 긍정하지 못하 는 복수심 또는 원한
감정이 부정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인 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태도일 뿐이다.
인간이 대체로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는 점과는 별도로, 이런 태도는 극복되어야만 한다는 점은 여전히 숙제로 남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르그손은 변증법과 가능성의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 떤 길을 선택하는가.
베르그손은 부정과 독립해서 “본성의 차이”를 생각 한다.
“존재 안에는 차이들이 있지만, 그 어떤 부정적인 것도 없다.
부정은 언제나 추상적인 개념들을, 너무 일반적인 개념들을 내포하고 있 다.”(B 41)
들뢰즈는 변증법의 부정과 대립해서 베르그손의 차이를 강조한다.
“베르그손에서는 참된 시작, 거기서 출발해야 하는 참된 점(點)을 찾으려는 이 배려가 언제나 발견되리라. […]
차이는 참된 시작이다.”(ID 71-2)
그런데 바로 차이의 다른 표현이 ‘지속(durée)’이다.
베르그손에서 지속은 무엇보다 차이로, 차이의 운동으로, 자기 자신과 차이나는 운동으로, 변질(altération)로, 지속하는
생성으로, 실체 그 자체 인 변화로 규정된다.
“존재는 변질이며, 변질은 실체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베르그손이 지속̇ ̇이라 부 르는 것이다.
지속은 차이나는 것(ce qui diffère) 내지 본성상 변하는 것(ce qui change de nature)이요, 질과 다질성(多質性)이며,
자신과 차이나는 것(ce qui diffère avec soi) 이다.”(ID 33-4; ID 51-2, B 23, 29, 42-3, 94 등 참조))
우리는 흔히 운동을 공간에서의 장소 이동으로 생각하는 경향성이 있다.
드문 예외가 아리스토텔레스인데 그는 운동을 생물의 성장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베르그손에게 운동은 일차적으로는 장소 이동도 생물의 성장도 아니며, 오히려 변질이다.
변질은 하나의 실체의 변질이며 그 자체가 현실적 시간이다.
그것의 이름이 ‘지속’이다.
“어떤 사물의 본질 또 는 실체와 하나일 따름인 이 변질이 바로 우리가 그것을 지속의 견지에서 생각할 때 우리가 파악
하는 그것이다.”(B 23)
지속은 자기 자신과 차이나며 매 순간 그 본성이 변하는 하나의 실체이다.
자기 자신과 차이나는 실체로서의 지속은 과거를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는 현재이며, 이런 특성은 플라톤 이래로 ‘기억’
이라 지칭되어 왔다.
“우리 는 존재로, 즉자적 존재로, 과거라는 즉자적 존재로 현실적으로 도약한다.
문제는 심리학에서 떠나는 일이다.
태곳적 기억 또는 존재론적 기억 이 문제이다.”(B 52)
여기서 존재론적 기억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지칭하는 바는 “우주의 앙상블(l’ensemble de l’univers)”이다.
“마치 우주(l’univers) 가 하나의 엄청난 기억 이기라도 한 양 모든 일이 일어난다.”(B 76)
이는 “우주적 기억 (Mémoire cosmique)”(B 117)이라고 묘사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우주 전체 또는 우주적 기억은 ‘전체(tout)’라고 불린다.
“전체는 에너 지의 변화, 긴장의 변화이며, 그 밖의 다른 무엇도 아니다.”(ID 40)
또, “베르그손의 철학은, 전체는 긴장 및 에너지의 변화이지 결코 다른 무엇이 아니라는 우주론에서 완성된다.”(ID 67)
사실이지, 앞에서 베르그손이 ‘하나의 실체’를 언급했을 때, 그것은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이해할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해서 차이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과 차이나는 것, 스스로 변질되면 서도 하나의 실체
로서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존속하는 우주 전체 말고는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착상에서 중요한 것은 심리학 내지 인간주의를 벗어나는 일이 었다.
“우리[인간]의 조건이 우리를 잘못 분석된 혼합물 가운데서 살게 하고 우리 자신을 잘못 분석된 혼합물이게 하는 한에
서는, 우리를 비인간 적인 것과 초인간적인 것에로 열어 주는 것, 인간적 조건을 넘어서는 것, 이것이 철학의 의미이다. […] 존재론이 가능해야 한다.”(B 18-9, 44)
여기 서 “심리학을 넘어선 범위”(B 50)가 강조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이 작업은 “우월한 경험론(un empirisme supérieur)”(B 22) 을 구성한다.
사실 베르그손이 변증법에서, 또는 칸트와 헤겔에서, 비판 하고자 했던 것 중의 하나는 경험의 현실적 조건에 대한 탐구가 부족했 다는 점이었다.
“모든 가능한 경험의 조건들로서의 조건들이 아니라 현실 적 경험의 조건들로서의 조건들로 올라가야만 한다.”(ID 49; B 17 참조) 조건의 탐구에 있어 칸트와 헤겔은 여전히 ‘가능성’의 수준에 머물렀다.
이처럼 심리적 지속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속은 “무의식(inconscient)”이라 는 이름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 무의식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과 구별 된다.
그것은 “의식 바깥에 있는 심리학적 현실”이 아닌 “비-심리학적 현 실, 즉 즉자적인 그러한 존재(l'être tel qu'il est en soi)”
를 가리킨다(B 50).
훗날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무의식 개념은 바로 이 베르그손의 무의 식 개념을 발전시킨 결과물이다.
“베르그손은, 프로이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하지만 또한 심오하게, 기억은 장래 (avenir)의 기능이라는 것을, 기억과 의지는 같은 기능이라는 것을, 기억을 감당할 수 있는(capable) 존재만이 자신의 과거에서 탈피하여 그것을 반복하지 않고 새로움 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차이”라는 말은 존재하는 개별̇ ̇ ̇ ̇ ̇ ̇과 동시 에 스스로 만들어지는 새로움̇ ̇ ̇ ̇ ̇ ̇ ̇ ̇ ̇ ̇ ̇을 지칭한다.”(ID 63)
이렇게 심리학을 넘어선 존재론은 “존재론적 “자연주의”(“naturalisme” ontologique)”(B 95)를 구성한다.
“지속은 능산적 자연(nature naturante)과 같으며, 물질은 소산적 자연(nature naturée) 과 같다.
정도의 차이들은 차이 의 가장 낮은 정도이다. 본성의 차이들은 차이 의 가 장 높은 본성이다. […]
모든 정도들은 동일한 자연[ 본성 ] 속에 공존하는데, 그 자연 [ 본성 ] 은 한편으로는 본성의 차이들 속에서 표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도의 차이 들 속에서 표현된다.
이러한 것이 일원론의 계기이다. 모든 정도들은 자연 그 자체 라는 유일한 시간 속에서 공존한다.”(B 94-5)
우리는 불어로는 같은 말로 지칭되는 ‘본성’과 ‘자연’ 사이의 동일성에 유의하는 것이 좋겠다.
어원으로 볼 때도 자연(physis, natura)은 스스로 생장 하는 식물, 자기 생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따라서 ‘본성의 차이’라는 표 현을 풀어 쓴 표현이 ‘자기 자신과 차이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베르그손의 지속 내지 우주적 존재론적 기억은 자연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리하여 스피노자의 용어인 ‘능산적 자연’이 지속을 가리키는 다른 말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귀결로서 등장하는 것이 자연의 일원론이다.
“유일한 시간, 유일한 지속만이 있으며, 우리의 의식, 생명체, 물질 세계 전체를 포 함해서 모든 것이 거기에 참여하리라. […] 하나이고 보편적이고 비인간적인 유일한 ̇ ̇ ̇ ̇ ̇ ̇ ̇ ̇ ̇ ̇ ̇ ̇ ̇ ̇ ̇ ̇ ̇ 시간 ̇ ̇ (un seul Temps, un, universel, impersonnel). 요컨대, 시간 의 일원론… 이 이상 더 놀라운 것은 없어 보인다.”(B 78)
우리는 우주 전체로서의 지속이 자기 자신과 차이난다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이 자기 자신과의 차이는 어떤 성격을 지니는가?
아니 그보다도 먼저, 그런 차이 발생은 어떻게 생길 수 있는가?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물 음이 제기된다.
“지속은 어떻게 이 능력(pouvoir)을 지니는가? […]
존재가 사물의 차이라면, 사물 자신에는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ID 34; ID 54, B 103 참조)
이 물음은 존재가 다음 순간 소멸하지 않고 다시 자신을 이어갈 수 있는가 하는 오래된 물음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지속’ 자체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라 하겠다.
“매 계기마다, 모든 것은 순간적이고 무한정 나눌 수 있는 하나의 연속체̇ ̇ ̇(continuum) 속으로 펼쳐지는 경향성이 있는데, 그 연속체는 다른 순간으로 자신을 연장하지는(se prolonger) 않겠지만, 다음 순간 부활하기 위해, 언제나 재개되는 눈
깜박임 또는 떨림 속으로 사라지리라.”(B 89)
존재의 지속은 어떻게 가능한가?
생성의 계속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물음은 철학사의 오랜 물음이기도 하다.
세계는 존재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존재하기를 멈춘다면 세계는 단적인 없음의 상태로, 상태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것으로 사라진다.
세계의 존속을 설명하기 위한 초월적인 방식의 예는 데카르트의 ‘영원 진리 창조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데카르트는 둘째 성찰에서의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오직 생각만은 나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으며, ‘나는 있다, 나는 실존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확실한 것인가?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동안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동시에 있거나 실존하기도 멈추고 말 것 이기 때문이다.”(Descartes AT IX, 21)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기를 멈추는 동안에도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방법서설 속의 다음 진술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세계 안에 어떤 물체나 지성적인 것들 또는 다른 본성들이 있다면, 이들의 존재는 신의 힘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고 신
없이는 한 순간도 존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신이 지금 이 세계를 보존하는 작용은 이 세계를 창조한 작용과 완전히 동일한 것임이 확실하다.
신이 애초에 그저 혼돈의 형태만을 이 세계에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세계에 자연의 법칙을 세우고 통상적인 방식으로
작용하도록 협력하고 있다면 우리는 창조의 기적을 손상함이 없이도 오직 이로써 모든 물질적인 것은 시간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그대로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Descartes AT VI, 36)
요컨대 세계가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신의 지속적인 창조 활동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를 초월적인 방식이라 부른 까닭은, 데카르트가 신의 존재를 요청함으로써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증명의 부담을 여전히 떠안은 채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존재는 확보되었지만 신의 존재는 세계의 지평에 유예된 상태로 여전히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베르그손이 이 물음에 대해 답하기 위해 창조한 개념이 바로 잠재성(le virtuel, virtualité)이다.
“베르그손은 자신을 병합할 수 있는 능력 (le pouvoir de s’englober elle-même)을 지속에 부여한다.”(B 80)
바로 이 능력이 ‘주체적인 것’ 내지 ‘잠재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지속, 즉 나눌 수 없는 것은 정확히는 자신을 나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나눌 때 본성상 변하는 것이며, 이렇게 본성상 변하는 것이 잠재 내지 주체적인 것(le virtuel ou le subjectif)을 정의한다.”(ID 54)
베르그손주의에서는 ‘잠재성’의 ‘주체’의 측면은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28) 초기의 두 논문에서는 그 측면이 명시적으로
언급된다.
“과거는 즉자, 무의식, 또는 베르그손 말처럼 바로 잠재(le virtuel)이다.”(ID 39)
그런데 바로 “지속은 잠재 내지 주체적인 것(le virtuel ou le subjectif)으로 제시되고 있었다.”(ID 37-8)
또, “서로 대립하며, 본성상 차이나는 것은 바로 경향성들이다.
주체인 것은 바로 경향성이다.”(ID 48)
여기서 주체라는 표현은 아무 오해
28) 다음 표현이 등장할 뿐이다. “주체적인 것 또는 지속은 잠재적이다.”(B 36)
“비수적인 다양체(multiplicité)에 의해 지속 또는 주체성이 정의된다.”(B 36)
1950년 대 중반에 들뢰즈는 베르그손에 대한 두 편의 글을 발표한다.
메를로퐁티가 편집 한 유명한 철학자들( Les Philosophes célèbres , 1956)에 「베르그손 1859-1941」 (pp. 292-9; ID 28-42)
이라는 짧은 글을 발표했으며, 같은 해 베르그손 연구( Les Études Bergsoniennes ) IV호에 「베르그손에 있어 차이의 착상」(pp. 77-122; ID 43-78)이라는 비교적 긴 글을 발표했다.
이 두 글은 나중에 베르그손주의(1966)로 확대 발전되어 출간되기에 이르는데, 앞의 논문들과 뒤의 책 사이에는 미묘
하지만 중요한 차이들이 발견된다.
의 여지도 없다.
그것은 ‘능산적 자연’으로서의 측면, 곧 자기를 생산하는 자로서의 주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주체의 상관항인 대상은 별개로 있는 것이 아니다.
주체의 생산물이 곧 대상이요 ‘소산적 자연’이다.
말하자면 주체란 지속이 자신을 병합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지속, 즉 경향성은 자신과 자신의 차이이다.
그리고 자신과 차이나는 것은 직̇ 접적으로̇ ̇ ̇ ̇ 실체와 주체의 통일(l’unité de la substance et du sujet)이다.”(ID 52)
우리는 2장에서 맑스의 존재론을 살피면서 주체와 대상의 통일, 인간과 자연의 통일에 대한 통찰을 확인한 바 있었다.
‘잠재성(virtualité)’ 또는 ‘잠재적인 것(le virtuel)’은 힘을 가리키는 라틴 어 vis에서 유래했으며, 통상 아리스토텔레스의
dynamis를 번역한 말 중 의 하나로 사용되곤 했다.
들뢰즈는 베르그손이 ‘가능성’이라는 개념과 범주를 거부하면서도 ‘잠재성’ 개념을 최고의 지점까지 이르게 한다는 점에
놀라움을 표한다(B 37, 99).
따라서 ‘가능성’과의 차이에 유의하면서 ‘잠재성’ 개념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논리적 가능성이며 언어 수준에서만 성립한다.
이에 반 해 잠재성은 물리적 수준에서의 ‘힘’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들뢰즈가 ‘잠재성’ 개념을 세밀하게 규정하고 있는 대목을 참조할 수 있겠다.
“하나이고 단순한 이 잠재 (Virtuel)의 본성은 무엇인가? […]
“잠재”는 적어도 두 가 지 관점에서 “가능”과 구별된다. 실제로 어떤 관점으로 보면 가능은 현실의 반대이 며, 현실에
대립된다.
그러나 아주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잠재는 현행(現行, l’actuel)에 대립된다. […]
가능성은 (비록 현행을 가질 수는 있지만) 현실성을 갖고 있지 않다.
역으로 잠재는 현행적이지는 않지만, 그자체로서 하나의 현실성을 소유하고 있다̇ ̇ ̇ ̇ ̇ ̇ ̇ ̇ ̇ ̇ ̇ ̇ ̇ ̇ ̇ ̇ ̇ ̇ (possède en tant que tel
une réalité). […]
다른 한편,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가능은 자신을 “실현”하는 것(者)(le possible est ce qui se “réalise”)(또는 실현하지
않는 것)이다. […]
잠재는 자신을 실현하지 않고 자신을 현행화해야(s’actualiser) 한다.29) […]
29) ‘실현’과 ‘현행화’의 용어법과 관련한 엄밀한 구분은 베르그손주의에 와서야 이루어졌으며, 초기의 두 논문에서는 ‘실현’이라는 말이 ‘현행화’를 대신해 사용되 곤 했다.
현행화되기 위해서 잠재는 제거나 제한을 통해 진행할 수는 없으며, 정립적(定立的) 행위들(actes positifs) 속에서 자기
고유의 현행화의 선들을 창조̇ ̇해야만 한다. […]
현 행화의 과정에서 일차적인 것은 차이이다.
우리가 떠나오는 잠재와 우리가 도달하는 현행들 간의 차이, 그리고 또 그것에 따라 현행화가 일어나는 보완적인 선들
간 의 차이.”(B 99-100)
이상의 규정에서 우리는 몇 가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선 ‘가능’은 적절한 조건에 따라 실현되거나 실현되지 않는다고 이야기된다.
하지만 가능은 현실의 투사에 불과하기에 이 ‘실현’은 상상속 에서만 일어난다.
따라서 현실의 운동과는 무관하며, 차라리 현실의 반대이다.
“우리는 일단 만들어진 현실에서 가능을 추상해 냈기 때문에, 이 가능은 쓸데없는 부 본(副本, double)처럼 현실에서
자의적으로 추출해 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차이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창조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셈이 다.”(B 101)
반면 ‘잠재(virtuel)’는 ‘현행(actuel)’과 대립된다.
이 대립에서 도드라지는 점은, actuel은 ‘현재 드러나 있음’(現行)을 가리키는 반면, virtuel은 ‘힘을 지니고 있으나 그 힘이
현재 드러나 있지는 않음’(潛勢)을 가리킨다는 점이다.30)
하지만 이 둘은 모두 ‘현실(réel, réalité)’이다.
말하자면, 베르그손 에서, 그리고 들뢰즈에서, 현실은 잠재와 현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데 잠재는 자신을 현행화(actualisation)함으로써 현행이 된다.
그리고 이 현행화는 생물학적 의미의 ‘분화(differenciation)’라 불리기도 하며, 때로는 ‘실효화(實效化, effectuation)’라
불리기도 한다.
잠재성의 현행화는 “정립 적 행위들” 속에서 자기 고유의 “현행화의 선들”을 “창조”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잠재성은 그 자신의 힘을 밀어붙임으로써 새로운 현행들
30) 들뢰즈 자신의 용어로는 ‘현행’은 ‘부분대상’과, ‘잠재’는 ‘기관 없는 몸’과 대응 된다는 것을 우리는 4장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의 정립을, 새로운 현행들의 창조를 수행하는 방식으로만 실존하는 것이다.
“이 제 잠재는 절대적으로 정립적인 실존 양태를 정의한다.
지속, 그것은 잠재이다.”(ID 62)
우리는 앞에서 잠재성의 현행화가 생물학적 분화에서 모델을 빌려온 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런 차이는 생명적(vitale)이다.
설사 그 개념 자체가 생물학적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생명, 그것은 차이의 과정이다.”(ID 54)
“분화는 하나의 작용(action), 하나의 실현[=현행화]이다.
스스로 분화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 ̇ ̇ ̇ 자신과 차이나는 것, 말하자면 잠재이다.”(ID 60)
이제 현행화 내지 분화는 ‘생명의 약동(élan vitale)’이라는 명칭을 부여받는다.
아래의 인용은 ‘생명의 약동’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그것과 지속, 잠재성, 현실화, 분화 등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눈 여겨보는 것이 좋으리라.
“베르그손은 어떤 기계론에 맞서, 생명적 차이는 내적̇ ̇ 차이(une différence interne )임 을 보인다.
하지만 또한, 그는 내적 차이는 단순한 규정̇ ̇(détermination)으로 착상될 수 없음을 보인다. […]
생명적 차이는 어떤 규정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그 반대일 것이며, 더 잘 표현하자면 미규정(indétermination)
그 자체이리라. […]
베르그 손에서 예견 불가능한 것, 미규정인 것은 돌발적인 것(accidentelle)이 아니라 반대로 본질적인 것이며, 돌발적인
것의 부정이다. […]
생명과 관련해서, 변하려는 경향성 은 돌발적인 것이 아니다.
더욱이 변화들 자체도 돌발적인 것이 아니며, 생명의 약 동은 “변주들(variations)의 심오한 원인이다”.
이 말인즉슨, 차이란 하나의 규정이 아 니라 그것이 삶과 맺는 본질적 관계 속에서 하나의 분화임을 뜻한다. […]
분화는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 생명이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적 폭발력(la force explosive interne) 에서 온다. […]
잠재성은 자신을 분열하면서 자신을 실현[=현행화]하는 그런 방식 으로, 자신을 실현[=현행화]하기 위해 자신이 분열
되도록 강제하는 그런 방식으로 실존한다.
자신을 분화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현행화하는 잠재성의 운동이 다.”(ID 55-6)31)
31) 또한 다음 구절들을 참조. “분화는 […] 더 심오하게는 지속이 자신 안에 담고 있는 어떤 힘(une force)에서 온다.”(ID 37)
“지속이 자신을 분화하는 것은 그 자 체 안에서, 내적 폭발력에 의해서이다.”(B 97)
이 구절들에서 특히 우리는 지속 내지 잠재성이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어 떤 힘, 내적 폭발력에 주목해야 한다.
베르그손은 지속을 잠재성과 같은 것 으로 규정하는데, 잠재성은 자신 안에 내적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잠재성을 주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폭발력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했다.
이 내적인 힘은 지속 바깥에, 존재 바깥에 있지 않다.
그것은 외부적 규정과는 상관이 없으며, 초월적 원인도 아니다.
유일 한 내재적 원인은 지속 자신의 폭발력, 현행화하고 분화하려는 힘뿐이다.
들뢰즈가 자신의 존재론을 구성하는 데 있어 베르그손을 깊이 참조 하고 있다면, 지속이 지니고 있는 온전히 내재적인
원리 때문이었다.
우리는 뒤에서 들뢰즈가 베르그손에서 수용한 이 특성이 어떻게 자신의 존재론에 녹아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잠재성의 또 다른 중요한 특성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잠재성이 지닌 ‘전체’로서의 성격이다.
“지속의 전체 (Tout)가 존재하리라는 점 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 전체는 잠재적이다.
그것은 분기선들을 따라 자신을 현행화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이 선들은 그 자체로 보면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지 않으며 그 선들이 현행화하는 것을 닮아 있지
않다.”(B 109)
잠재성이 전체라는 점은, 앞에서 지속이 “자연 그 자체라는 유일한 시간 ”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도 암시되어 있다
(또 B 83 참조).
그런데 이 전체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부분들의 총합이라는 형태로 주어지지 않 는다.
부분들이란 현행을 가리킬 따름이며 따라서 현행의 총합으로서의 전체는 잠재성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 전체 ”라는 말은 유의미하지만, 현행적인 무언가를 가리키지 않는다̇ ̇ ̇는 조건에서만 그렇다.
그는 전체 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끊임없이 환기 시킨다.
이는, 전체라는 관념이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전체라는 관념은 잠재 성을 가리킨다는 뜻이다.
현행적 부분들은 총체화될 수 없으니 말이다.”(B 95)32)
32) 또한 다음을 참조. “ 전체 는 단지 잠재적일 뿐이며, 현실태(acte)로 이행하면서 그렇다면 전체로서의 잠재성이이
주어져 있지 않으며, 또한 주어질 수 없다는 사실은 왜 중요한가.
그것은 잠재성이 내적 힘으로서 현실을 끊 임없이 생산하는 운동을 한다는 것을 뜻하기에 중요하다.
사실 가능성이라는 개념과 범주가 비판된 것도, 그것이 외적인 어떤 힘, 외부 원인, 또 는 초월적 원리를 끌어들인다는
점 때문이었다.
여러 가능한 것들 중에 서 왜 하필 이것이 실현되었는가를 물을 때, 바로 초월성이 개입할 틈이 생기는 것이다.
“전체가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 그것은 시간의 현실(réalité)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 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주어진 것은 그것을 발명하거나 창조하는 운동을 상정한다는 것, 동시에
이 운동은 주어진 것의 이미지에 따라 착상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한다.
베르그손이 가능̇ ̇( possible )이라는 관념에서 비판하는 것은, 이 관념 이 생산된 것의 단순한 전사(轉寫, décalque)를
우리에게 제시한다는 점, 나아가 생 산의 운동 위에, 발명 위에 투사된, 아니 차라리 역투사된, 전사를 제시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잠재는 가능과 같은게 아니다.
시간의 현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를 실현[=현행화]하는 잠재성의 긍정이며, 잠재성에 있어 자기를 실현[=현행화]
한 다는 것은 발명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전체가 주어진 것이 아니더라도, 잠재가 전체라는 점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ID 41)
잠재가 전체이기는 해도 전체는 주어져 있지 않다는 점은 이제 그 마지막 의미를 얻게 된다.
현행화 내지 분화는 진정한 발명과 창조의 운동 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현실화와 분화는 진정한 창조이다.
전체 는 그것이 자신을 현행화할 때 따르는 분기선들을 창조̇ ̇해야만 하며, 그것이 각 선 위에서 이용하는 서로 다른
수단을 창조 해야만 한다. 생명은 방향 없이 작동하지는 않기 때문에, 목적성(finalité)은 있다.
나누어지기 때문에 일이 다른 식으로 될 수는 없다.
또 서로의 외부에 머물러 있 는 전체 의 현행적 부분들은 모을 수 없다. 전체 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B 108)
하지만 “과녁(but)”이 있지는 않은데, 왜냐하면 이 방향들은 이미 만들어진 채로 미리 실존하지는 않기 때문이며,
또한 이 방향들 자체가 그것들을 주파하는 현실태 (l'acte)를 “따라가며” 창조되기 때문이다.”(B 110-11)
여기서 ‘목적성’과 ‘과녁(목표)’의 차이에 유념해야 한다.
생명이 지니는 목적성은 끊임없는 분화와 분기의 방향을 따른다는 사실 자체이다.
그렇 지만 그것이 정해진 ‘과녁’을 향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목적성은 있지만 과녁은 없다’는 말은 유의해서
이해해야 한다.
“차이가 사물 자신이 되었을 때, 사물이 어떤 목적으로부터 자신의 차이를 받는다 고 말할 여지는 더 이상 없다.
이처럼 베르그손이 본성의 차이에 대해 행한 착상은 그로 하여금, 플라톤과는 반대로, 목적성에 대한 참된 의뢰를 피하게
해준다.”(ID 58)
이처럼 진정한 발명과 창조의 운동은 엄밀한 의미의 목적성, 인과성, 가 능성 등의 개념과 범주를 넘어선다.
이 점과 관련해서 베르그손주의는 특별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으나 초기의 논문들은, 그것도 결론 부분에서, 이 점을 강조
하고 있다.
그러나 훗날 자신의 존재론을 구성하는 과정 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될 사고를 초기의 논문들에서 확인하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새로운 것, 예견 불가능한 것, 발명, 자유 등에 대한 참된 축가(祝歌).
거기에는 철 학의 부인은 없으며, 철학의 고유한 영역을 찾기 위한, 가능, 원인들, 목적들 등의 질서를 넘어 사물 자신에
도달하기 위한 심오하며 독창적인 시도가 있다.
목적성, 인과성, 가능성은 언제나 일단 행해진 것과 관련되며, 언제나 “전체”는 주어져 있는 것이라고 상정한다.”(ID 41-2)33)
33) 또 다음을 참조. “우리는 나중에 이런 테제가 예측 불가능한 것과 우발적인 것 (le contingent)을 폐지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정초한다는 것을 볼 것이다.”(ID 31)
“미규정, 예견 불가능성, 우발성(contingence), 자유 등은 언제나 원인들과 관련한 독 립성을 뜻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베르그손은 수많은 우발들로 이루어진 생명의 약동을 경외하는 것이다.
베르그손의 말인즉슨, 사물은 어찌 보면(en quelque sorte) 자신의 원인들에 앞서̇ ̇( avant ) 오며, 원인들은 나중에(après) 오기 때문에 사물에서 시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규정은 사물이나 작용이 다른 무엇일 수도 있었 는 것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실태(l’acte)가 다른 것일 수 있었을까?”라는 물음은 의미 없는 공허한 물음이다.
베르그손의 과제는 왜 이 사물이 다른 것이기 보다는 이것인가를 이해시키는 일이다.
사물 자신을 설명해주는 것은 차이이지, 그 원인들이 아니다. […]
베르그손주의는 차이의 철학이며, 차이의 실현의 철학이다.
즉, 몸소 나타난(en personne) 차이가 존재하며, 이는 새로움으로서 자신을 실현한다.”(ID 72)34)
들뢰즈는 베르그손에서, 그의 창조적 진화에서, 의외의 사고를 발견한다.
새로운 것, 미규정, 예견 불가능한 것, 우연, 우발성, 돌발성, 발명, 창조, 자유 등은 세계가 원인들에 앞서 온다는 점을
의미한다.
원인들은 나중에 온다.
이는 통상적인 인과성에 대한 부정이다. 보통 인과성은 어떤 결과를 어떤 원인(들)이 필연적으로 초래한다는 것을 가리
킨다.
그런데 새로움의 생성 은, 만일 원인이 결과를 필연적으로 초래한다면, 불가능하다.
베르그손 존재론의 가장 깊은 곳에는 필연적 인과성에 대한 부정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니체가 “계보학”이라 부른 것에 해당하는 사고 방식임을 우리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들뢰즈가 그린 베르그손의 초상은 사진과 같은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훗날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전개될 존재론의 대부분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흥 미롭게도 들뢰즈의 베르그손 연구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면에서 스피노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하나는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동
34) 또 다음을 참조. “본성상 차이가 나는 것, 그것은 […]
경향성들이다. 경향성은 그 생산물과 관련해서뿐 아니라 시간 속에서의 경향성의 원인들과 관련해서도 일차적이며,
이는 그 원인들이 항상 생산물 그 자체에서 출발해서(à partir du) 소급해서(rétroactivement) 얻어지기 때문이다.”(ID 47)
일성으로 요약될 수 있는 ‘자연의 일원론’이고, 다른 하나는 아리스토텔 레스의 dynamis의 번역어 중 하나로서의 ‘잠재성’,
즉 그 자신의 내적 힘 을 밀어붙여 새로운 현행을 정립하는 힘이 다른 하나이다.
그 중에서 우리는 dynamis의 또 다른 번역어 중 하나인 potentia 개념이 스피노자에서 어떻게 이해되며 활용되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이 과정에서 스피노자의 자연주의는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이는 들뢰즈의 베르그손 연구와 스피노자 연구가 ‘힘의 존재론’을 구성하는 데 있어 여러 점에서 유사한 노선을 따른다는
점을 확인시켜 줄 것이다.
나아가 스피노자와 니체가 ‘힘’의 관점에서 어떤 차이를 보인다고 들뢰즈가 생각하는지도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B. 스피노자와 힘(potentia, vis, potestas)
들뢰즈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전략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potentia (불어 번역은 puissance)를 존재의 원리로 만든다는 점이다.35)
이 작업은
35) potentia를 번역하는 데 있어 우리는 진태원의 제안을 선별적으로 수용한다(진 태원 2005: 317-8). 주지하다시피 스피노자의 시대는 과학혁명의 시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적 실재들이 제각각의 고유한 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 자연 전체를 일양적(一樣的) 법칙에 따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자연의 인식 가능성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각각의 개체나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질이나 특성을 양적인 차이들로 환원하는 것이 필요”했다.
따라서 자연을 수학적으로 양화하려는 과제에 발맞추어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potentia 는 각각의 자연적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나 비교 불가능한 힘을 가 리킨다”고 보아 “역량(力量)”이라고 옮길 수 있겠다.
하지만 뒤에서 보겠지만 스 피노자에게 역량이라는 말은 다분히 힘(vis, force)을 포함하는 개념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상 과학혁명 시기에 많은 학자들이 양화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potentia보다는 vis 또는 force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들뢰즈의 puissance가 potentia만의 번역이기보다는 동시에 vis(또는 virtus)의 번역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 체계 전체와 관련해서, 또는 니체의 Macht를 puissance로 옮길 때도 ‘역량’으로 옮겨야 하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배경에서만 들뢰즈의 해석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으며,
윤리학1부 정리11의 세 번째 신 존재 증명에서 행해진다.
이곳은 윤 리학에서 역량(potentia)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역량 개념의 이해를 위해서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이 논증은 들뢰 즈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SPE 78).
i)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은 역량이다.
ii) 그런데 유한한 존재는 (말하자면 그것을 실존하도록 결정하는 외부 원인 덕에) 이미 필연적으로 실존한다.
iii) 절대적으로 무 한한 존재 그 자신도 실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유한한 존재들보다 역 량이 작다는 것일 텐데, 이는
부조리하다.
iv) 하지만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의 필연적 실존은 외부 원인에 의해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절대적으 로 무한한 존재가
필연적으로 실존하는 것은 자신에 의해서이다.
이 증명에 이은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방금 행한 후험적(a posteriori) 신 존재 증명이 잘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동일한 원리에 기반해서 선 험적(a priori) 신 존재 증명이 도출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부언한다.
“왜냐하면, 실존할 수 있음은 역량이기에(posse existere potentia sit), 어떤 실재의 본 성에 더 큰 실재성이 부합할수록
그것은 그 자체로 실존할 수 있는 더 큰 vis를 갖는 다는 것이 귀결되니까.
따라서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신은 그 자체로 실존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potentia를(infinitam absolute potentiam existendi) 가지며, 따라서 신은 절대적으로 실존한다.”(Spinoza E I P11s)
방금 인용한 두 문장 중 앞 문장에 대해 들뢰즈는 다음의 설명을 덧붙인다.
“어떤 실재의 본성에 실재성 또는 완전성이 더 크게 귀속되면 될수록, 그 실재는 역량, 말하자면 실존할 수 있는 힘들
( virium … ut existat )을 더 많이 갖는다(plus elle a de puissance, c'est-à-dire de forces pour exister).”(SPE 78) 들뢰즈의
부연 설명은 실재성과 완전성을 동일시한다는 점에서도 주목 할 만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더 중요한 대목은 역량(potentia)과 힘(vis, virtu s)36)의 동일성을 전제한다는 점이다.
이런 해석 전략이 갖는 의미는 뒤에 니체와 스피노자의 차이도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후로 우리는 vis(또는 virtus)와 그 번역어인 force는 ‘힘’으로 옮길 것이다.서 자세히 고찰될 것이다.
아무튼 들뢰즈는 스피노자 해석에 있어 역량 과 힘을 구별하지 않는 일반적 경향을 보인다.37)
그렇다면 이 둘을 구별하지 않고 오히려 동일시하는 것은 들뢰즈의 자 의적인 해석에 따른 것인가?
사실 양자의 동일시는 스피노자에서 자주 발견된다. 라틴어에서 ‘aut … aut …’는 배타적 의미의 ‘또는’을 가리키는 반면,
‘Deus sive natura’(신 즉 자연)라는 표현에 나오는 ‘sive’나 sive와 동 일한 의미의 ‘seu’나 ‘vel’은 모두 포함적 의미의
‘또는’을 가리킨다.
말하 자면 sive, seu, vel은 앞의 말을 부연하기 위해 ‘즉’이나 ‘말하자면’의 뜻으 로 흔히 사용하는 접속사인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가 potentia와 vis(또 는 virtus)의 관계를 언급할 때마다 사용하는 접속사가 바로 sive와 seu이다.
스피노자는 때로는 vis를 부연하기 위해 potentia를 쓰기도 하고38), 때 로는 거꾸로 potentia를 부연하기 위해 vis를 쓰기도
하며39), 또 때로는 양 자의 동일성을 직접 언급하기도 한다40).
따라서 들뢰즈가 스피노자에서
36) virtus는 ‘덕’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일차적으로는 vis와 같은 뜻이다.
따라서 논의상 특별한 의미 구분이 필요하지 않을 때는 vis라는 말과 동일하게 사용할 것 이다.
37) 가령 “puissance ( potentiam ou vim )”(SPE 77)라는 표현에서처럼, 들뢰즈가 스 피노자를 해석하는 맥락에서 사용
되는 puissance는 “potentia 또는 vis”를 옮긴 말이다. 또한 “une force ou puissance de pa ̂ tir ”(SPE 201)나 “ force ou
puissance d‘agir ”(SPE 202), 그리고 “forces ou puissance”(SPE 207)나 “une force ou puissance propre”(SPE 212) 등의
구절에서는 force와 puissance를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뒤에서(SPE 203ff.) 라이프니츠의 해석을 원용할 때, 들뢰즈가 vis 에 관한 논의를 끌어들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38) “homo suas virtutes sive suam agendi potentiam contemplatur”(E III P55s); “virtute seu potentia”(E IV P37s1); “Deberet enim vim seu potentiam habere vires suas amittendi”(E IV 60d); “virtute seu potentia”(E IV cap. xxv)
39) “agendi potentia sive existendi vis”(E III aff. gen. def.); “agendi potentiam seu (quod idem est) virtutem”(E III P55co2d);
“potentiam seu virtutem humanam”(E IV P37s2); “potentia seu virtute”(E IV P57s)
40) “est namque natura semper eadem et ubique una eademque eius virtus et agendi potentia”(E III praef.)[자연은 항상 같으며, 그 virtus와 agendi potentia에 있어 하나이고 같기 때문에]; “Per virtutem et potentiam idem intelligo”(E IV D8)[나는 virtus와 potentia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potentia와 vis(또는 virtus)를 동일하게 보는 것은 스피노자 자신의 이해에서 비롯 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potentia와 vis(또는 virtus)를 각각 puissance와 force로 구분해서 옮기는 경향을
보이긴 하지만, 이는 개념어 번역에서의 일대일 대응 원칙에 충실 했기 때문으로 보이며, 정작 의미상에서는 potentia와
vis를 같은 뜻으로 파악했으며, 따라서 puissance와 force도 같은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나아 가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 개념이 potentia(또는 puissance)라고 할 때, 그 개념은 vis(또는 force)를 포함하거나 그와
같은 뜻으로 이해해야 마땅하 다.41)
이상의 논증에서, 들뢰즈는 스피노자가 “실존역량(potentia existendi)”을 논리적 기반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스피노자는 역량 을 실존의 원리로 만든다(Hardt 1993: 71). 실존은 역량이고 본질이다.42)
“가능적 실존(existence)이건 필연적 실존이건 간에, 실존은 그 자체로 역 량이다.
역량은 본질 그 자체와 동일하다.”(SPE 78)
그리고 그 역량은 단순한 잠재력이 아니라 현행 역량이다.
“역량과 본질의 동일성은, 역량이 언제 나 현실태(acte)임을, 또는 적어도 현재 실행 중(en acte)임을 뜻한다.”(SPE 82)
이러한 규정에서 우리는 본질, 실존 및 현실태로서의 역량에 관한 규 정을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이 규정들에 중대한 변화를 가하기 때문이다. 본질이란 전통적으로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 로 오는 것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그것인 바의 것(ce qu'elle est)”이 본질 인 것이다. 스피노자는 본질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41) 진태원(2005)은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또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우리는 ‘실 재성의 정도’나 ‘완전성의 정도’ 또는
‘potentia의 차이’(곧 ‘힘의 양의 차이’) 같은 표현들을 접하게” 된다고 지적하는데, 사실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에서
주로 사 용된 표현은 vis 즉 force였다.
42) 실존=역량=본질이라는 들뢰즈의 해석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가령 박기순 (2006: 116-22).
i) “실재가 필연적으로 정립되기 위해서는 주어져야 하고, 실재가 필연적으로 폐기 되기 위해서는 제거되어야만 하는
어떤 것, 즉 그것이 없으면 실재가 존재할 수도 없고, 또 역으로 그 실재가 없으면 존재할 수도 착상될 수도 없는 그런
어떤 것은 그 실재의 본질에 속한다고 나는 말한다.”(E II D2)
ii) “필연적으로 어떤 실재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 그것이 없으면 그 실재가 존재할 수도 착상될 수도 없는 어떤
것이며, 또 역으로 그 실재가 없으면 존재할 수 도 착상될 수도 없는 그런 어떤 것이다.”(E II P10s)
서로 비슷한 이 규정에서, “역으로”의 앞부분은 전통적인 본질 개념을 그대로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들뢰즈가 주목하는 것은 이 규정의 뒷부 분 즉, “그 실재가 없으면 존재할 수도 착상될 수도 없는 그런 어떤 것”
이라는 대목이다.
“따라서 모든 본질은 그것이 상호 교환되는(se réciproque) 어떤 실재의 본질이다.”(SPP 98)
이로써 본질과 실재의 상호성 이 성립하게 된다.
말하자면, ‘어떤 실재의 본질’은 ‘어떤 본질을 갖는 실재’와 동시에 주어지거나(dato) 파괴된다(sublato).
달리 말해, 스피노자는 “본질은 오직 실재가 실존하는 경우에만 착상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박기순 2006:
117-8).
스피노자가 역량을 현실태로, 나아가 본질로 본 것은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여기에는 두 전통이 합류하는데, 하나는 신학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학 전통이다(SPE 82 n.24, n.25).
신학 전통에서, 적어도 이성 (nous) 안에서의 역량과 현실태의 동일성은 신플라톤주의의 빈번한 주제였다.
이는 유대교 사상뿐 아니라 기독교 사상에서도 발견된다.
니콜라 스쿠자누스(Nicolas de Cuses)는 거기서 Possest라는 개념을 끌어내어 신 에게 적용한다.
또한 브루노(Giordano Burno)에서는 현실태와 역량의 동일성이 “환영(simulacre)”, 말하자면 우주 또는 자연으로까지
확장된다.
여기서 니콜라스 쿠자누스의 Possest라는 개념은 특히 흥미를 끈다 (Cours 1980년 12월 19일).
그는 “실재들의 존재(l'Être des chose), 그것은 ‘possest’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possest라는 말은 새로 만들어낸 말로, 당시 사용되던 두 라틴어인, ‘할 수 있다(pouvoir)’ 동사의 부정사 posse와
‘있다(ê̂tre)’ 동사의 3인칭 직설법 현재인 est의 합성어이다.
결국 possest는 어떤 실재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역량과 현실태의 동일성”을 가리킨다.
어떤 실재를 정의할 때는 그것의 본질 즉 “그것인 바의 것(ce qu'elle est)” 으로 정의해서는 안되며, 그것의 possest 즉
“그것이 할 수 있는 바(ce qu'elle peut)”, 문자 그대로 “그것이 현실태로서 할 수 있는 것(ce qu'elle peut en acte)”에 의해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량이 곧 possest 라는 말은, 말하자면 역량이란 ‘현재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있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역량(potentia)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dynamis)나 양상논리의 가능성(possibility)과는 완전히 다른 뜻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베르그손에서 possest에 해당하는 것으로 등장한 것은 잠재의 현행화로서의 생명의 약동이었음을 확인한 바 있다. 또한 뒤에서 우리는 니체의 힘 (Kraft) 개념 또는 더 정확히는 권력(Macht) 개념이 이에 상응한다는 점도 확인하게 될 것
이다.
그렇다면 실존을 감싸고 있지 않으며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 양태들의 본질들은 어디에 있는가?
각 본질은, 신의 역량이 양태의 본질을 통해서 풀이되는 한, 신의 역량의 부분이다(E IV P4D).
역량은 하나의 양 이다.
그렇지만, 역량은 길이와 같은 양이 아니라 힘과 같은 양이라고 정의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일반적이고 단순한 양, 곧 이른바 외연량(des quantités extensives)이 아니라 강도 단계(une échelle
intensive) 를 갖는 강도량(des quantité intensives)이다.
그건 곧 이런 뜻이다.
“실재들은 다소간 강도를 갖는다.
그 자신인 실재의 강도, 그 본질을 채우는 실재의 강도, 그 실재를 그 자체로 정의하는 강도, 그것이 바로 그 실재의 강도
이다.”(Cours 1980년 12월 19일)
이제 모든 실재가 역량이라는 말은, 실재가 역량을 갖는다는 뜻만이 아니라 실재는 능동 속에서건 수동 속에서건 그것이
지닌 역량으로 귀착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임의의 두 개의 실재를 비교할 때, 그 둘 은 같은 것일 수 없다.
이로부터 존재론적 연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실재가 그만큼 더 강도가 크면, 그것의 존재와의 관계도 바로 그만 큼 더 그러하다.
실재의 강도는 실재와 존재의 관계이다.”(Cours 1980년 12월 19일)
“스피노자는 소론에서부터 항상 양태들의 본질들을 독자적인(singulier) 것들로 착상했다. […]
양태들의 본질들은 단순하고 영원하다.
그렇지만 이 본질들은, 속성과 또 서로 간에, 순전히 내생적인 또 다른 유형의 구별을 갖는다.
본질들은 논리적 능성도 기하학적 구조도 아니다.
본질들은 역량의 부분들, 즉 물리적 강도의 정도들 (degrés d'intensité physiques)이다.
본질들은 부분들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본질들 자 체가 부분들, 즉 더 작은 양들로 합성되지 않는 강도량들(quantités intensives)과도 같은 역량의 부분
들이다.
모든 본질들은 각 본질의 생산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본질들은 모두 서로 무한히 부합하지만, 각 본질은 다른
모든 본질들과 구별되는 역량의 특정 정도에 상응한다.”(SPP 99-100)
다음으로 실존에 대한 규정을 보자.
실체의 경우에는, 실체가 본질속에 실존을 감싸기 때문에, “본질과 실존 사이에, 이성의 구분만이 있을 뿐이다.
즉 긍정된 실재와 그것의 긍정 자체를 구분한다는 점에서 말이다.”(SPP 102)
반면, 양태들의 경우, 그 본질은 실존을 감싸지 않는다.
따라서 유한 실존 양태는 그것을 규정하는 다른 유한 실존 양태와 외적으 로, 연장적 부분에 의해 관련된다.
이런 실존 방식은 연장된 부분으로 이 루어진 몸[물체]뿐 아니라 관념들로 이루어진 마음에도 해당한다.43)
43)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거나 크기가 서로 다른 일정한 수의 몸들이 다른 몸들 에 의해 제약되어(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 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 우리는 이 몸들이 서로 연합되어 있으며, 이것들 모 두가 단 하나의 몸 또는 개체를
합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개체는 몸들 사이의 이러한 연합에 의해 다른 모든 개체들과 구분된다.”(Spinoza E II P13 이 하 「자연학 소론」.)
물론 개체는 몸에 상응하는 마음 차원에서도 동시에 형성된 다.
들뢰즈에 따르면(SPP 92), 스피노자가 말하는 마음(mens, esprit)은 관념으로 구성되어 있다(E II a3, P11).
물론 여기서 말하는 마음의 규정과 관련해서, 스피노자는 자신의 이런 견해에 대해 독자들이 망설이거나 몹시 주저할
것이며, 따라지만 양태의 본질은 이런 식의 실존과 무관하게 자기 고유의 실존도 갖는다.
여기서 본질과 실존이 구분된다고 할 때, 이 말은 본질이 필연적으 로 실존하기는 하나, 그 자체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원인인 신 덕분에 필연적으로 실존한다는 뜻이다(SPP 102-3).
따라서 유한한 존재의 경우, 그것의 실존은 실존역량과 관련되는 수직적 차원과 변용능력과 관 련되는 수평적 차원
이라는 두 방식에 동시에 관여한다.44)
“스피노자주의에서 모든 역량은 그와 상응하며 분리할 수 없는 변용능력(pouvoir d'ê tre affecté)을 동반한다.
그런데 이 변용능력은 언제나 그리고 필연적으로 채워진다.
역량에는 소질(aptitudo) 또는 능력(potestas)이 상응한다.
하지만 구현되지 않는 소질서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책을 끝까지 읽을 것을 권고한다(E II P11s).
스피노 자의 주장은, 인간이 몸과 마음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조차도 흔히 우리는 인간이라는 주체를 먼저
전제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통념에 대한 강한 비판을 담고 있다.
스피노자가 ‘영혼(animus, âme)’이라는 말을 논쟁적인 드문 경우에만 사용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영혼에는 신학적 편견이 너무 많이 담겨 있다.
전통적으로는 인간을 영혼과 몸의 합성으로 보았고, 그 중에서 몸에 대한 영혼의 우위를 주장해왔다.
스피노자가 비판하려 했던 것은 이런 신학적 인간학의 편견 이다.
오히려 스피노자는 “하지만 모든 개체는 정도는 다를지언정 영혼을 지닌 다”(E II P13c)고 말함으로써 ‘영혼’의 특권을,
나아가 마음의 특권을 해체한다.
이 제 마음은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그 본연의 자리를 찾게 된다.
또한 몸 또는 개체의 문제와 관련해서 박기순(2006a: 122-7)의 상세한 논의 참조. 44) ‘실존역량’과 ‘변용능력’을 천 개의
고원에서는 각각 ‘위도’와 ‘경도’라는 말로 표현하면서, 초점을 ‘경도’에 맞추는 경향을 보인다.
가령, “몸의 경도라고 불리는 것은 역량의 특정한 정도에 따라, 또는 차라리 이 정도의 한계들에 따라 몸이 취 할 수 있는
정감들[affects, 변용태들]이다.
경도가 특정한 관계 아래에서 외연적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듯이, 위도는 특정한 능력 아래에서 강도적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MP 314)
스피노자는 “정감(情感)”을 이렇게 정의한다.
“영혼의 정념(animi pathema)이라 불리는 정감(affectus)은 혼동된 관념으로, 마음은 이것을 통해 자신의 몸이나 그 몸의
일부의 실존하는 힘이 전보다 더 크거나 작다고 긍정한다. […]
내가 ‘이전보 다 더 크거나 작은 실존하는 힘’이라고 말할 때 내가 이해하는 바는, 마음이 몸 의 현재 상태와 과거 상태를
비교한다는 뜻이 아니라, 정감의 형상을 구성하는 관념이 몸에 대해 실제로 이전보다 더 크거나 작은 실재성을 감싸고
있는 어떤 것을 긍정한다는 뜻이다.”(Spinoza E III 「정감들에 대한 일반적 정의」 및 설명)
이나 능력은 없으며, 따라서 현행적이지 않은 역량은 없다.”(SPE 82; 또 SPP 134 참조)
이처럼 역량은 실존역량이자 동시에 이점에는 변용능력으로 규정된다.
물론 스피노자는 폭군과 같은 권능(potestas, pouvoir), 즉 자신의 의지대로 행할 수도 있고 행하지 않을 수도 있는 권능
(자유의지)을 비판하기 위해 역량 개념을 도입했다.
그렇지만 권능 개념이 언제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가령 “신의 권능 안에(in potestate) 있는 것은 그 무엇이건, 그것 이 신의 본질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도록 신의 본질 속
에 포함되어 있어야만 한다”(Spinoza E I P35D)고 스피노자가 말할 때, 여기서 ‘권능’은 적법한 용법으로 쓰였다.
이 경우 “본질로서의 potentia에 변용능력으로서 의 potestas가 상응하며, 이 변용능력은 신이 필연적으로 생산하는 변용
들 또는 양태들에 의해서 채워지는데, 왜냐하면 신은 수동을 겪을 수 없으며, 이 변용들의 능동적 원인이기 때문이다.”
(SPP 134)45)
그러나 어떤 조건에서 유한한 존재에 실존역량과 작용역량 또는 인식역 량과 이해역량을 귀속시킬 수 있는가?
그것은 유한 존재가 전체의 부분으 로, 속성의 양태로, 실체의 변양으로 고려되는 한에서이다(SPE 78-9).
인간의 역량은 “신 즉 자연의 무한한 역량의 부분”이다(Spinoza E IV P4d).
여기서 부분이라는 것, 즉 “분유(分有, participation)한다는 것은 스피노자 에게는 항상 역량들의 분유로 생각된다.”(SPE 81) 그래서 들뢰즈는 실체 의 역량과 권력에 대응하는 실존 양태의 코나투스와 소질을 말한다.
“변용능력( potestas )이 역량( potentia )으로서의 신의 본질에 상응하는 것과 마찬가지 로, 변용 소질( aptus )은 역량의
정도( conatus )로서의 실존 양태의 본질에 상응한다.
코나투스가, 그 이차적 규정 속에서, 변용 소질을 유지하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펼치려는 경향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
이다(Spinoza E IV P38).
[이 소질 개념에 관해서 는 윤리학 2부 명제13 주석 및 3부 공준1과 2, 5부 명제39를 참조하라.]
차이는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즉 실체의 경우, 변용능력은 능동적인 변용들에 의해 필연 적으로 채워지는데, 왜냐하면 실체는 그것들을 생산하기 때문
이다(양태들 자체). 실
45) 이런 이해가 일반적으로 지지되는 것은 아니다. 진태원(2005: 311-8) 참조.
존 양태의 경우, 그것의 변용 소질 또한 매 순간 필연적으로 채워지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양태를 적합한 원인으로 갖지
않는, 즉 다른 실존 양태들에 의해 자신 속 에 생산되는 변용들( affectio )과 정감들( affectus )에 의해 채워진다.
따라서 이 변용들 과 정감들은 상상들과 수동들이다.”(SPP 136)
스피노자의 용어 체계에서 변용은 내적 원인에서 결과된 것이냐 아니 면 외적 원인에서 결과된 것이냐에 따라서 능동적
일 수도 수동적일 수도 있다.46)
그러므로 한 양태의 실존역량은 언제나 변용능력에 상응하며, 이 이 변용능력은 “언제나, 때로는 외부 실재들에 의해 생산
된 변용들(이 른바 수동적 변용들)에 의해서 또 때로는 자기 자신의 본질에 의해 풀이 되는 변용들(이른바 능동적 변용들)에 의해서 채워진다.”(SPE 82)
이것을 마이클 하트는 이렇게 설명한다. “니체에서처럼 스피노자에서도, 존재의 충만함은, 존재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초월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유보 없이, 완전하게 표현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실존역량에 상응하는 변용능력이
능동적 변용들과 수동적 변용들로 완전히 채워져 있다는 것 역시 의미한다.”(Hardt 1993: 72)
이것을 도식화하면 ‘역량 = 실존역량 = 변용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능동과 수동의 구분은 더 세분 된다. 즉 수동은 기쁜 수동적 변용과 슬픈 수동적 변용으로 나뉜다.
그리고 기쁜 수동의 도움을 받아 기쁜 능동으로 가는 것이 윤리적 과제로 제
46) 스피노자의 다음 두 정의를 참조. “그 결과가 그 원인 자신에 의해 명석 판명 하게 지각될 수 있는 원인을 나는 적합한
원인(causa adaequata)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결과가 그 원인 자신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원인을 나는 부적합한 (inadaequata) 원인, 곧 부분적(partiala) 원인이라 부른다.”(Spinoza E III D1)
“우 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인 어떤 것이 우리 안이나 우리 밖에서 생겨날 때, 곧 (앞의 정의1에 따라) 우리의 본성에서,
우리 안이나 우리 밖에서 우리 본성만으 로 명석 판명하게 이해될 수 있는 어떤 것이 따라 나올 때, 나는 우리가 작용한다
(agere)고 말한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즉 우리 본성에서 우리가 그것의 부분적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따라
나올 때, 나는 우 리가 겪는다(pati)고 말한다.”(Spinoza E III D2)
우리는 스피노자가 “수동 또는 겪 음”(passion)을 단순한 무력함이 아니라 “부분적 원인”에 의해 어떤 결과가 산출 되는
것 일반을 가리킨다는 점에 유의해야 하겠다.
시된다는 것이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에 있어 핵심 요소이다. 나아가 실존역량(=작용역량) 또는 변용능력은 이번에는
실존할 수 있는 힘 (vis existendi)으로 이해된다.
스피노자는 윤리학3부의 「정감들에 대한 일반적 정의」에서 “작용역량 즉 실존할 수 있는 힘(agendi potentia sive existendi
vis)”47)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들뢰즈는 이 표현에 주목하면서 라이프니츠의 해석을 빌려 힘에 관한 논의를 개진한다.48)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한 몸의 힘은 이중적이다.
즉 그것은 “작용하는 힘과 겪는 힘, 능동적 힘과 수동적 힘”이다.
이런 분류에 이어 라이프니츠는 아주 깊은 차 원에서 물음을 던진다.
“수동적 힘은 능동적 힘과 구별되는 것으로 착상 되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원리상 자율적인가?
그것은 여하간 실정성 (positivité)을 갖는가? 그것은 무언가를 긍정하는가?”
들뢰즈는 이 물음에 대한 답에 주목한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능동적 힘만이 권리상 현실적(réelle)이며, 실정적이고 긍정적이다. 수동적 힘은 아 무 것도 긍정하지 않으며, 유한의
불완전함 빼고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
모든 일은, 마치 능동적 힘이 유한 그 자체 안에서 현실적, 실정적, 또는 완벽한 모든 것 을 상속받은 것처럼 진행된다.
수동적 힘은 자율적인 힘이 아니라 능동적 힘의 단순한 제한(limitation)이다.
수동적 힘은 그것이 제한하는 능동적 힘이 없다면 힘일 수 없 으리라.
수동적 힘은 능동적 힘에 본래 들어 있는 제한을 뜻한다. 그래서 궁극적으 로는 더 깊은 힘의 제한, 즉 능동적 힘 자체
안에서만 긍정되고 표현되는 본질의 제한을 뜻한다.”(SPE 203)
47) 박기순(2006a)은, 스피노자가 역량(potentia, puissance)과 힘(vis, force)을 구별 하고 있으며, 특히 “‘힘’을 물리적
의미로 제한적으로 사용”(129)한다는 점을 주목 하면서 자신의 핵심 논의를 펼친다.
이는 들뢰즈와는 다른 접근이다.
48) 실제로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1962)에서 힘(force, Kraft)과 권력의지(volonté de puissance, Wille zur Macht)를
다루는 방식과 거의 동일하게 논의를 이어간 다.
또한 ‘본질’과 ‘몸’에 관한 논의 및 스피노자의 “가장 단순한 몸들(corpora simplicissima)”과 원자론의 극복으로서의
니체의 ‘힘’ 개념에 대한 논의도 주목할 만하다.
능동적 힘과 수동적 힘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이런 해석에 힘입어 들뢰즈 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수동적 변용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상상적인 것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불완전함에 근거해서만, 우리의 불완전함 자체에 의해서만 수동 적이고 정념적이다. […]
우리는 우리 자신과 구별되는 외부 실재로부터 수동을 겪는다.
따라서 우리 자신은 수동의 힘(force de pâtir, 겪는 힘)과 능동의 힘(force d'agir, 작용하는 힘)이라는 별개의 힘을 지닌다.
그러나 우리의 수동의 힘은 우리의 능동적 힘 자체의 불완전함, 유한성, 또는 제한에 불과하다.
우리의 수동의 힘은 아무 것도 긍 정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표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무력함(impuissance)만을, 즉 우리의 작용역량의 제한만을 “감싸고 있다”. 실로 우리 의 수동역량은
우리의 무력함, 우리의 예속, 즉 우리의 작용역량의 가장 낮은 정도̇ ̇ ̇ ̇ ̇ ̇ ̇ ̇ ̇ ̇ ̇ ̇ ̇ ̇ (degré)이다.”(SPE 204)49)
이로써 우리는 스피노자의 주요 개념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을 살펴보 았다.
스피노자의 potentia와 potestas를 들뢰즈는 통상적인 번역을 좇아 puissance와 pouvoir로 각각 구분한다.
그렇지만 들뢰즈는 여기에 미묘한 변화를 덧붙이는데, 우선 역량(puissance)과 힘(force)을 동일시하며, 더 정확히 말하면 작용역량(puissance d'agir)와 실존할 수 있는 힘(force d'exister)을 동일시하며, 다음으로 능력(pouvoir)을 역량(puissance)에 상관
49) 진태원은 이 대목을 놓고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들뢰즈가 사용하는 “force de pâtir”와 “force d'agir”라는 용어가 매우 애매하다는 사실은 차치해둔다 하더라도, [다섯째와
여섯째 문장은 “변용과 수동을 혼동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SPE 198)라는]
앞에 인용한 들뢰즈 자신의 주장과 거의 모순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수동적 힘은 능동적 힘 자체의 유한성이나 제한에 불과하며 아무 것도 긍 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수동을 순수한 수용으로, 아무런 원인으로서의 작용도 ̇ ̇ ̇ ̇ ̇ ̇ ̇ ̇ ̇ ̇ ̇ ̇ 없이 외부 원인의 작용을 순전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할 경우에만̇ ̇ ̇ ̇ ̇ ̇ ̇ ̇ ̇ ̇ ̇ ̇ ̇ ̇ ̇ ̇ ̇ ̇ ̇ ̇ ̇ ̇ ̇ ̇ ̇ ̇ ̇ ̇ 가능한 주 장이기 때문이다.“(진태원 2006: 353) 그러나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들뢰즈 는 힘에
있어 능동만을 인정할 뿐 수동은 능동의 가장 낮은 정도나 등급, 말하자 면 부족한 능동으로 이해한다.
수동이 부적합하거나 부분적인 원인에 의해 일어 나는 작용이라는 스피노자의 정의(E III D2)를 감안해도, 들뢰즈의 해석은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말하자면, 역량은 개체의 본질 또는 독자성 (singularité)의 문제이며, 능력은 그 본질과 무관하지 않은 관계(rapport)의
문제로 이해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작용역량 또는 실존할 수 있는 힘으 로 이해되는 개체 또는 물체(몸)의 본질은 그 본질을 유지하는 한에서
연속적 변주(variation continue) 상태에 있는데, 이는 그 개체가 다른 개체와 의 만남을 통해 맺게 되는 관계와 다른 것이
아니다.
곧 작용역량 또는 실존할 수 있는 힘은 곧 변용능력(pouvoir d'affecter ou d'être affecté)이기도 한 것이다.
이 경우 능력이란 역량의 관계적 측면이며, 역량은 능력이 매 순간 형성하는 독자성의 측면이다.
C. 스피노자에서 니체로: 힘과 의지
안티 오이디푸스를 쓰기 전 1960년대까지의 들뢰즈의 작업은 “철학 에서의 수습과정(an apprenticeship)”(Hardt 1993)이
라고 평가되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하트의 해석과 중대한 차이가 있다면, 들뢰즈가 힘 개념의 탐구를 통해 이 수습과정을 수료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앞에서 베르그손 연구를 일람하면서 이 점을 확인한 바 있었다.
들뢰즈의 철학을 관통하는 개념 중에서도, 힘 개념은 본질적인 역 할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겠는데, 특히 훗날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욕망 (désir) 개념은 힘 개념에 대한 사색의 결과물 중 대표적인 것이다.
그런 데 들뢰즈가 힘 개념을 사색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무 엇보다 니체 해석이다.
우리는 먼저 들뢰즈 자신의 증언에 비추어 니체의 핵심적 역할을 뒷받 침할 수 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차이와 반복(1968)에서 존재의 일의성을 다루는 맥락에서 스피노자를 넘어서면서 니체가
행한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말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실체와 양태들 사이에는 어떤 무관심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스피노자에 서 실체는 양태들과 독립해 있는 것처럼 보이며, 양태들은 실체에 의존하고 있지만, 어떤 다른 것으로서50)
있다.
실체 그 자체는 양태들에 대해̇ ̇, 오로지 양태들에 대해̇ ̇ 서̇만 말해져야 한다.
그런 조건은 보다 일반적인 범주 전복을 대가로 해야만 채워 질 수 있는데, 이런 전복이 있게 되면 존재가 생성에 대해
말해지고, 동일성이 차이 에 대해 말해지고, 하나가 여럿에 대해 말해지게 된다. […]
이런 것이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본성이다. […] 영원회귀로 니체는 다른 말을 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DR 5 9)51)
말하자면, 고대 희랍 자연철학에서 시작해서 둔스 스코투스나 스피노자를 거쳐 발전해 온 존재의 일의성의 철학 또는
내재적 존재론은 니체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실제로 차이와 반복이야말로 니체라는 환경(milieu)에서 쓴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자체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번역이요 해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의 두 가지 증거만으로 니체와 들뢰즈의 본질적 관계를 증명 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특히 우리의 논제와 관련해서 두 가지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우선 들뢰즈 철학 체계에서 힘이 차지하는 위상을 증명해야 할 것이며, 다음으로 들뢰즈 철학의 최종심급으로서의
니체의 위상을 특히 스 피노자와의 비교를 통해서 밝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들뢰즈의 다음 발언을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으려 한다.
“만일 우리의 해석이 정확하다면, 니체보다 앞서 스피노자는 힘은 변용능력과 분리 될 수 없으며 이 변용능력은 자신의
역량을 표현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니체는, 다른 요점과 관련해서, 스피노자를 비판한다. 스피노자는 권력의지̇ ̇(une volonté de puissance)라는
착상에까지 올라가지는 못했는데, 스피노자는 권력(puissance, 역량)을
50) 즉 양태는 “다른 것 안에(in alio)”(E I A1) 있는 것으로, “자신 안에(in se)”(E I A1) 있는 실체와 본질적 차이가 존속
한다는 점에 대한 지적이다.
51) 둔스 스코투스―스피노자―니체로 이어지는 발전에 대해서는 차이와 반복(DR 52-61) 참조.
또한 니체와 존재의 일의성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 논의는 서동 욱(2000: 287-94) 참조.
단순한 힘(force)과 혼동했으며, 힘을 반동적인 방식으로 착상했다는 것이다(코나투̇ ̇ ̇ 스̇와 보존 참조).”(NP 70 n.1)52)
이 지적은, 우리가 나중에 뒤에서 상세히 살피게 되겠지만, 우리의 쟁점 과 논점 전체가 수렴되는 토포스(topos)를 형성한다. 힘에 관한 사고는 힘 과 권력으로 첨예하게 구분되어 진행되며 그 와중에 의지(volonté)에 관한 사고가 필연적으로 개입한다는 점이 그 하나이고, 들뢰즈 자신도 동의하는 “스피노자-니체의 위대한 동일성”(PP 185)이 사실은 니체 쪽으로 쏠리는
기우뚱한 균형이라는 점이 다른 하나이다.53) 흔히 들뢰즈의 선배를
52) 우리는 들뢰즈의 니체 해석과 관련해서 Macht의 번역어인 puissance를,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대체로 “권력”이라는 말로 번역할 것이다.
이 경우 우리말에서 권 력이 갖는 협소한 뜻이 문제가 될 수 있겠다.
그러나 니체의 의지가 통념적 의미의 의지가 아니듯, 권력도 통념적 의미의 권력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다.
니체 는 권력을 “증여하는 덕(das schenkendes Tugend)”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일상적으로 쓰는 ‘의지’라는 말이 의지의 본성과 관련되듯, 일상적인 뜻의 ‘권력’이라는 말도 권력의 본성과 관련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차라리 니체와 들뢰즈는 일상적 의미의 권력을 해부하고 천착함으로써 그 본성을 찾아 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니체와 들뢰즈가 여전히 오해의 여지가 큰 새 개념을 만든 이유는 통념과의 대결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
이 가장 적절하다.
우리가 번역어를 선택하는 데 있어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들뢰즈 자신의 용법이다.
들뢰즈가 “철학은 권력(une Puissance)이 아니다.
종교들, 국가들, 자본주의, 과학, 법, 의견, 텔레비전은 권력들(puissances)이지만, 철학은 그렇지 않다.”(PP 7) 라고 했을
때 puissance는 명백히 ‘권력’을 가리킨다.
나아가 Macht를 pouvoir라 고 단적으로 이해하는 푸코를 수용할 때의 들뢰즈에서는 이 점이 더 분명해진다.
푸코는 니체의 Macht를 pouvoir로 번역하고, 들뢰즈는 이를 별 가감 없이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F 77-99).
이 경우 pouvoir는 puissance와 완벽한 동의어이다.
실제로 들뢰즈 자신은 pouvoir를 ‘권력’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이 경우는 대개 논쟁적 맥락이다)는 많지 않으며, 주로
‘능력’이란 의미로 사용한다.
이 점에 서 들뢰즈의 니체 해석은 푸코가 니체의 Macht에서 권력관계(rapports de pouvoir, pouvoir relationnel)의 측면에
주목한 것과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물론 니체 해석에서 들뢰즈와 푸코의 강조점의 차이가 보인다고 해서 서로가 상대방의 해석을 몰랐다거나 무시했다는
말은 아니다. 53)
이런 점에서 들뢰즈의 학위논문 중 주논문이 차이와 반복이고 부논문이 스 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라는 점은 들뢰즈 철학
에서 니체와 스피노자의 위상을 시말할 때 여러 사람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꼽히는 사람의 하나가
스피노자이다.
물론 스피노자도 무의식과 욕망의 탐구에 일정한 공헌을 했다. ‘몸의 미지’에 못지않게 심오한 ‘사고의 무의식’을 발견했
다는 것이다(SPP 29; SPP 97-8).
하지만 들뢰즈가 보기에, 물론 조심스럽긴 하지만, 니체가 스피노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듯하다.
왜냐 하면 스피노자는 바로 이 ‘권력의지’ 개념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분투’, ‘추구’, ‘노력’ 따위를 뜻하는 코나투스(conatus; endeavour) 개념에 머물렀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니체는 정교하게 파고 들어 비판했던 것이다(NP 70).
실제로 스피노자에게는 의지에 대한 사색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자유의지를 비판하고, 그것을 신의 특성으로 삼는 것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했다.
스피노자는 유한양태의 본질을 코나투스로 보고, 코나투스가 신의 역량의 일부라고 본다.
하지 만 앞 절에서 살핀 것처럼 스피노자는 더 나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 서 들뢰즈 자신이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 대해 훗날 회고적으로 평가한 내용에 주목할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서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그의 실체가 아니라 유한 양태들의 구 성이었다.
이것이 내 책의 가장 독창적인 측면들 중 하나라고 본다. 요컨대 실체를 유한 양태들로 전환시키고, 아니면 적어도 실체
안에서 유한 양태들이 작동하는 내̇ 재면̇ ̇을 보려는 희망이 이 책에 나타나 있다. […]
지금 쓰고 있는 책 『철학이란 무엇 인가?』에서 나는 이 절대적 내재성이라는 문제로 돌아가려 하며 왜 스피노자가 나
에게 철학자들 중의 ‘군주’인지를 말하려고 한다.”54)
들뢰즈는 1970년 이전까지는 유한 양태들에 주목했지만, 사실상 그 “희망”을 충분히 개진하지는 못한 듯하다.
아마도 충족되지 못한 그 희망이 시사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54) “Translator's Preface”, in Gilles Deleuze, Expressionism in Philosophy: Spinoza , tr. by Martin Joughin, New York: Zone Books, 1990, p. 11(SPE의 영역본)에 소개된 들뢰즈의 편지.
천 개의 고원이나 스피노자. 실천 철학의 개정 증보판(1981), 나아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후까지도 스피노자에 대한
굵직한 작업을 지속 케 했던 이유일 것이다.
필경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존재의 일의성(univocité) 문제와 관련해서 스피노자에 대한 니체의 관계를 일종의 “코페
르니쿠스 혁명”으로 언급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이런 주장은 들뢰즈를 스피노자주의자로 보는 견해와 미묘하게 분열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비록 들뢰즈의 스피노자 연구가 지니는 불충분함에 대한 지적이 많이 제기되긴 했어도, 적어도 들뢰즈와 스피
노 자의 관계 역시도 공개적이고 전면적이며 지속적이었다는 점은 인정되 는 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뢰즈 철학에서 무엇 때문에 스피노자로는 불충분한가 하는 점과 동시에 니체가 그 대안으로서 적합할 수 있는
가 하는 점도 함께 해명되어야 하겠다.
우리는 앞에서 암시했듯이 힘에 대 한 사색의 불충분함이 스피노자에서 니체로의 이행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든다고
본다.
왜냐하면 들뢰즈에서 힘에 대한 사색은 존재론의 핵심이자 척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들뢰즈의 존재론은 무엇보다 힘의 존재론이다.
사실 니체와 들뢰즈의 힘에 대한 사색은 오랜 철학적 전통, 또는 철학 의 발명과 발전 위에 놓여 있다.
들뢰즈는 힘을 ‘할 수 있음’, ‘할 수 있는이’으로 이해하는데55), 힘에 대한 이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을 행사될
수도 있고 행사되지 않을 수도 있는 그 어떤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모든 힘은 항상 다른 여지를 남기지 않은 채 충분히 행사되고 작용한다.
“각각의 힘(Macht)은 매 순간 자신의 최후의 귀결을 끌어낸 다.”(Nietzsche JGB 22)
말하자면, 힘이란 어떤 주체(substratum)에 속해서 그 주체의 의지에 따라 행사되거나 행사되지 않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세계와 주체까지도 구성하는 요소(éléments)이다.
사실 힘 개념은 고대 그리스를 통해 진행되어 온 오랜 문제에 대한 니체와 들뢰
55) “la force est ce qui peut”(NP 57); “Die Kraft kann”(독역본 57)
즈 나름의 답변인 것이다.
희랍에서 요소( stoichion , élément)는 원래 낱말(동양의 文)을 구성하는 철자(동양의 字)를 가리켰는데, 이로부터 어떤
것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라는 뜻이 자연스레 파생되었다.
이렇게 물리 세계의 기본 물체들을 알파벳 철자들과 비교하는 일은 원자론자들의 공헌으로 보인다.
이 비교는 나름 그럴 법한데, “철자들은 그 자체로는 의미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 질서( taxis )와 위치( thesis )를 조작함
으로써 상이한 뜻을 갖는 집합체로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Peters 1967: 180).
화학에서 ‘원소’라고 옮기는 것도 일리가 있다.
그런데 원자론자들의 공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실 원자론자들 이 사색했던 문제 자체가, 비록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니체와 들뢰즈에게 본질적 문제로서
받아들여져 해결의 모색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니체의 원자론 비판이 지닌 의미를 “원자론은 사실상 힘에 만 속하는 것일 뿐인 본질적 다원성(pluralité)과 본질적 거리
(distance)를 물질에 부여하려는 시도”라고 해석하면서 “원자 대신 힘을 생각할 때에 만 개념이 정합적이 된다”고 지적할
때(NP 7), 들뢰즈는 이미 서양 철학 사의 시원에 깊이 발을 담고 있었던 셈이다.
세계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 은 두 방식으로 답을 주었다.
질료의 견지(가령 탈레스의 물)와 형상의 견지(가령 피타고라스의 수(數)).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답이었다.
이런 다양한 답변의 시도 중에서 우리가 살필 것은 파르메니데스의 일원론적 명제, 즉 ‘영구불변하고 하나이며 부동하는
존재만이 존재이며, 사고의 대상은 오직 그것뿐이다’라는 논리적 명제를 둘러싼 고대 원자론자들의 고민이다.
니체는 자주 원자론자들을 비판했다.
하지만 비판의 핵심은 단지 원자론자들이 ‘원자(atoma)’ 개념을 서투르게 사고했다는 점에 있다.
니체는 원자론의 해석을 끝까지 밀고 나가 다원론의 바탕이 되는 자신의 이론(힘과 권력의지)에 이르게 되었으며, 원자론자들이 엘레아 학파를 벗어난 지점에서 이들 스스로도 명료하게 사고하지 못한 것에까지 도달했다.
원자론자들은 ‘원자’를 ‘실체적인 물질’의 관점에서 벗어나 ‘힘’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까지 가지 못했으며, ‘빈 공간’을
충분히 사고해 내지 못했다.
원자론은 힘과 의지 이론의 ‘가면’이었던 것이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를 비롯한 고대 원자론자들은 엘레아 학파 의 무우주론(無宇宙論)을 극복하고 이른바 현상을
구제(ta phainomena sozein)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56)
이들은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 학 파가 부정했던 “존재자의 다수성”과 “운동의 가능성”을 다시 살려내고자 했는데,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파르메니데스적 전제를 고수하면서도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과제는 “빈 공간” 의 도입에 의해 그 실마리를 찾는다. 사실 빈 공간의 도입 자체가 그들에 게는 몹시 어려운
것으로 생각되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원자론자들 에게 빈 공간은 일종의 비존재자(mē on)57)로 여겨졌기에, 그렇게 되면 비 존재자가 존재자 못지
않게 존재한다는 꽤나 역설적인 주장을 하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빈 공간을 상정하게 되면 존재자의 다수성은 쉽게 확보될 수 있다.
실재 세계는 빈 공간에 의해 쪼개진 무수한 입자들 로 이루어졌다고 얘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빈 공간 개념을 도입함에 의해서 나타난 이런 점들 때문에, 파르메니데스가 설명할 필요 가 없어서 설명하지 않았던 부분인 운동에 대한 설명이 요구되게 된다.
우선 우리는 원자들이 모양, 크기, 위치에 있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것들 이 “서로 싸우며 움직이고” 또 “움직이다가 서로 충돌하고 뒤엉키기도
56) 다음을 참조. “원자론은 탄생하고 있는 역학론(dynamisme, 힘 이론)을 위한 가면(masque)이었을 게다.”(NP 7)
이 문단의 논의는 이태수(1982)를 따라 진행되는 데, 니체의 원자론 비판과 그 함의를 엿볼 수 있도록 도와주며, 들뢰즈의
니체 논의에서 생략된 대목을 보충해 준다.
57) 그리스어에서 ou(또는 ouk)와 mē는 모두 부정(not)을 나타내지만, 전자가 ‘명제 (statement)’의 부정이라면 후자는
‘사고(thought)’의 부정이다.
즉 전자는 “어떤 것이 없다”는 뜻이요 후자는 “어떤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즉, 후자는 없었으면 싶은 것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cf. An intermediate Greek-English Lexicon founded upon the 7th
edition of Liddell & Scott’s Greek-English Lexicon , Oxford: The Clarendon Press, 1889, pp. 507-8.
한다”는 얘기를 원자들의 “불평형 상태”(disequilibrium)로 이해할 수 있다 (이태수 1982: 18).
그러면 본래적인 움직임을 가능케 하는 ‘원초적인 불 평형 상태’는 어떤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인력이든 척력이든 “일자(一者)가 타자(他者)에 대해 주고받을 수 있는 일종의 힘”(20)의 불평형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이 점이 엘레아 학파의 이론에서 원자론이 결정적으로 벗어나는 지점이다.
의식적인 차원에서 원자론자들이 “힘”에 해당하는 개념을 다루지 못했던 것은 파르메니데 스의 권위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힘’과 관계된 이러한 생각은 무의식적인 차원에서는 신화 시대부터 아낙시만드로스에 이르는 시기에도 있었다고
짐작되며,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의식화되어 표출되면서 원자론이 대두되는 시대의 사상가들에게는 “사상적 공동재산의
한 목록”(21)이 되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특히 “충돌과 관련하여 원자라는 단위가 어찌 규정돼야 하는가 하는 문제, 접촉(haphē)과 연결은 어찌 다른가 하는 문제 등”을 설명하는 실마리는 “의식적으로 엘레아 학파의 이론의 울타리를 깨뜨리고, 힘의 개념을 선명히 하는 데서 주어질
수 있다.”(23)
원자를 근본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최종 단위로 보는 것이 원자 론자들이 암묵적으로 지녔던 통찰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
이다.
그리고 우리는 헬레니즘 시기에 이르러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에 의해 이 통찰이 완성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상에서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적 일원론적 존재론을 극복하기 위한 다원론적 시도의 주요 성취를 일별했다.
우리는 원자론자들에게서 ‘원자’라는 개념이 비록 의식적인 표현을 얻지는 못했을지라도 ‘힘의 행사’ 나 ‘힘의 작용’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됨으로써 파르메니데스로부터 결정 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지점을 보았다.
원자는 힘의 관점에서 더 잘 이해 될 수 있다.
니체가 보기에 원자론의 오류는 힘에만 속할 수 있는 ‘본질 적 다원성’을 물질적인 것인 ‘원자’에 부여하면서 ‘빈 공간
(거리)’에 대한 더 나아간 사고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니체는 ‘힘’으로서 ‘원 자’ 개념을 대체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원자와 힘의 유비 관계는 여기까지이다. 왜냐하면 원자를 힘의 견지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를 일 종의 “힘의
장(場)(Kraft-Feld)”(정동호 1991: 43-4)으로 이해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힘 개념은 원자론이 갖고 있던 ‘실체’나 ‘질료’적인 탈을 벗어버려야 한다.
니체는 프로이트와는 다른 수준에서 욕망과 무의식을 탐구했다.58)
들 뢰즈의 평가에 따르면,
“니체는 욕망 을 권력의지 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걸 다르게 부를 수도 있다. 가령 은총이라고. 욕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바로 그 까닭은 욕망한다는 것은 결핍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 준다는 것, “증여하는 덕”이기 때문이다.”(D 109)
들뢰즈는 니체의 철학이 두 축을 따라 조직되어 있다고 말한다.59)
그 첫째 축은 힘, 힘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둘째 축은 권력(권력의지, 의지) 과 관련되어 있다.
우선 힘(Kraft, force)이란 “할 수 있는 이”로서, 강약, 세고 약함, 승패, 지배 피지배, 제압과 적응 등을 나타낸다.
그런데 “현상 들, 사물들, 유기체들, 사회들, 의식들 및 정신들은 기호들, 아니 차라리 징후들이며, 그것들은 스스로 힘들의 상태를 가리킨다.”(DRF 188)
즉, 모 든 물체 또는 몸(corpus)은 “힘들의 관계”이며 또는 ‘힘들의 집합체 (ensemble)’이다.
“모든 현실(réalité)은 이미 힘의 양이다. 그것은 단지 서로 “긴장 관계에 있는” 힘의 양들일 뿐이다. 모든 힘은 때로 복종하기 위해 때로 명령하기 위해 다른 힘들과 관 계를 맺고 있다. 하나의 몸을 정의하는 것은 지배하는 힘들과 지배되는 힘들 간의 이 관계이다. 힘들의 관계 전체가 하나의 몸을 구성한다.”(NP 45)
58) 니체와 철학 4장 2절, 3절을 참고.
59) 이하 니체에 관한 설명은 니체와 철학(1962) 및 니체(1965) 그리고 니체 와 철학의 영역판 서문(1983) 등에서 자유롭게
재구성했으며, 꼭 필요한 대목에 서만 전거를 밝힌다.
니체와 들뢰즈에 따르면, 하나의 몸을 정의하는 것은 힘들의 관계이며, 힘들의 관계가 하나의 몸을 구성한다.
요컨대, 우주는 힘들로 구성되어 있다. 힘들은 우주의 원소들이다.
그런데 이처럼 힘들이 우주의 바탕에 있게 되면, 우주는 끊임없이 생성 중에 있는 것이 된다.
정지로서의 힘이 란 정의상 모순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고대 원자론을 비판할 때, 힘을 사 고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드는 것도 그래서 타당하다.
나아가 힘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홀로 있는 힘을 생각한다는 것은, 마치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하는 것처럼,
아무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가장 넓은 의미의 지각 일반 바깥에 있는 힘은, 즉 겪는 자 너머에 초월적 힘은,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버클리(Berkeley)의 “존재는 지각이다(esse est percipi)”라는 단언은 비록 그 지각의 주체가 신이라는 전제를
요청하고 는 있지만 우리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즉, 지각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모든 힘은 관계 속에 있으며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았다.
즉 힘은 항상 복수(plurel)로 존재한다.
물론 이 관계 맺음은 우연히 일어난다.
힘들의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관계가 발생하는데, 또는 옛 관계에서 출발해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데, 바로 이 순간 그
관계 속 에서 센 힘과 약한 힘이 규정된다.
말하자면 어떤 힘은 자신이 센지 약한 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관계에 돌입했을 때만 비로소 그 양의 크기가 결정
되는 것이다.
당연히 여기서 힘이 세거나(크다) 약하다(작다) 고 말하는 것은 힘에 대한 양적 규정이다.
동시에 여기서 질적 규정도 생겨 나는데, 왜냐하면 센 힘 또는 정복하고 지배하는 힘은 능동적(actif)이라 할 수 있는 반면
약한 힘 또는 적응하고 조절하는 힘은 반응적(réactif)이 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힘들이 만나 관계를 이루면 힘에 대한 양적 질적 규정 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스피노자는 바로 이 힘들에 대한 사고에 머물렀다.
즉, 스피노자는 potentia와 vis를, 니체 용어로는 Macht와 Kraft를, 들뢰즈 용어로는 puissance와 force를 동일한 것으로
파악 하는 데서 그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에서 니체로 가면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니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힘을 ‘의지 내지 권력의지’를 통해 보완한다. 앞 에서 우리는 힘과 힘은 항상 관계를 맺고 있다고 했다.
바로 힘들이 관계 를 맺는 순간에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관계를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이다.
말하자면 힘들이 관계를 맺을 때는 바로 이 관계의 긍정 또는 부정이 관여해야만 하는 것이다.
i) “니체에서, 힘 개념은 다른 힘과 관계를 맺고 있는 힘 개념이다.
이런 측면에서, 힘은 의지라 불린다. 의지(즉 권력의지)란 힘의 미분적 요소(élément différentiel)이 다.”(NP 7)
ii) “만약 모든 것들이 힘들의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권력 은 현존하는 힘들의 미분적 요소, 또는 차라리 미분적 관계(l'élément ou plutô̂t le rapport différentiel) 를 지시한다.
이 관계는 “긍정”과 “부정” 같은 유형의 역학적 질들 속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따라서 권력은 의지가 원하는 바(ce que la volonté veut)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의지 속에서 원하는 이(ce qui veut dans
la volonté)이다.”(DRF 189)
여기서 ‘의지’라는 개념이 개입하는 까닭은, 긍정이나 부정은 바로 의지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에서와 마찬가지로, 니체에서도 의지(Wille, volonté)란 존재 의 수준에서 “하려고 하는 이”60)이다.
의지는 힘 안에 있는 근원적인 추동력 또는 에너지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없다면 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려 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려고 함’(긍정)이며 다른 하나는 ‘안 하려고 함’(부정)이다.
후자 역시도 일종의 ‘하려고 함’이라는 것이 니체와 들뢰즈의 탁월한 통찰이다.
이로 써 긍정과 부정이라는 의지의 두 가지 질의 의미가 밝혀진다.
의지의 역 할을 보자면, 관계를 긍정하면 그 관계는 형성되지만, 관계를 부정하면
60) “La force est ce qui peut, la volonté de puissance est ce qui veut.”(NP 57); “Die Kraft kann, während der Wille zur
Macht will.”(독역본 57).
그 관계는 깨진다(또는 엄밀히 말하면 관계 형성 자체가 애초부터 안 된 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관계가 긍정될 때에만 하나의 몸 또는 힘들의 집합체가 성립한다.
물론 관계의 해체 역시도 부정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며, 다른 관계의 긍정을 통해 더 강하고 복잡한 관계가 형성되는
과 정에서 부수적으로 기존 관계의 해체가 유발되기도 한다.
의지는 바로 이런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의지’로 충분치 않고, ‘권력의지’여야 하는가?
니체가 굳이 권력의지(Wille zur Macht)라는 신조어를 개념으로 만든 데는 더 깊은 이유가 있다.
사실 Macht는 힘이지만, Kraft와는 다른 차원의 힘이다.
전자는 표상의 차원에 드러나지 않는 그런 힘인 반면, 후자는 현실을 구성 하는 구체적 힘이다.
그래서 양자의 구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하려고 하는 이’를 인간 주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니체 와 들뢰즈의 엄밀한 용어법 속에서, 일차적으로 의지는 권력의지(Wille zur Macht, volonté de puissance)와
같은 것이라고 이해된다.61)
즉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하건 간에 저 악명 높은 Wille zur Macht는 의지의 동의어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Wille zur Macht에서 zur Macht가 Wille의 성격을 더 명료하게 하기 위해 첨가된 설명어임을 확인한다.
그렇다면 의지는 본성상 Macht를 원하거나 추구한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다.
왜냐하면 독일어 zu에는 그런 지향적인 뜻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권력 욕이나 지배욕도 일종의 권력의지이기는 하다.
다만 그것의 가장 낮은 등급 또는 정도(degré)일 뿐이지만. 하지만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바로 여기에 들뢰즈의 니체 해석의 독창성과 고유성이 있다.
대부 분의 연구자들은 Macht를 ‘권력’으로 보았건 ‘힘’으로 보았건 그것을 지향
61) 위의 들뢰즈의 인용문 i), ii)를 비롯해서, 다음 구절 참조. “권력의지로서의 권력 은 의지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의지
안에서 하려 하는 이이다(La Puissance, comme volonté de puissance, n'est pas ce que la volonté veut, mais ce qui veut
dans la volonté).”(N 24)
또, 가령 니체의 다음 표현 참조. “의지, […] 그것 은 권력의지이다(der Wille […] welcher der Wille zur Macht ist).”
(Nietzsche Z II “Von der Erlösung”).
한다는 성격을 Wille zur Macht에서 보았다.
하지만 들뢰즈는 의지와 권력 의 관계를 다르게 설정한다.
바로 앞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권력은 의지 안에 있는 그 무엇이며 의지 안에서 하려고 하는 이(“ce qui veut dans la
volonté; das, was im Willen will”)이다.
말하자면 의지는 비표상적 차원에서 일종의 주체 또는 주어를 필요로 하는데, 그 주어에 해당하는 이가 바로 권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지란 모두 권력이 행사하는 의지인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려고 함’이라고 했을 때 ‘하려고 하는 이’가 없이는 ‘하려고 함’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은 의 지의 최종 심급이며, 이 발견이 쇼펜하우어를 넘어선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로써 의지와 권력의 관계가 다 해명된 것은 아니다.
니체가 굳이 권력의지라는 신조어를 개념으로 만든 데는 더 깊은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의지작용(Wollen)이 주체 또는 주어와 분리될 수 없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모든 “작용(Wirkung)” 배후에서 별도의 “행위자(Thäter)”를 찾으려는 시도는 언어에서 비롯된 오류이며, 문법상에만 존재
하는 허구 인 주체는 “조그만 상상적 악몽”의 투사일 뿐이다(Nietzsche GM I 13).62)
따라서 단지 의지의 주어로서 권력을 생각하는 것은 의지에 관한 니체의 일반적 견해에서 벗어난다.
오히려 의지작용의 행위자로서 권력을 생각 하기보다, 양자의 필연적이고 불가분한 상보성을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즉 단일한 대상에 대해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어느 측면이 부각되 느냐 하는 문제와도 같다고 하겠다.
의지란 권력의 발현 또는 표현의 측 면이며, 권력은 의지의 형태로 표현된다.
이 점은 니체의 다음 발언에서 도 확인된다. 이 문장에는 힘과 권력의지의 관계도 잘 나타나 있다.
““힘(Kraft)”이라는 승리에 찬̇ ̇ ̇ ̇ 개념은, 우리의 물리학자들이 신과 세계를 창조해내는 데 사용한 수단인데, 여전히 보완
될 필요가 있다.
하나의 내적 세계가 거기에 부여 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을 나는 “권력의지(Wille zur Macht)”라고, 즉 권력의 표명에
62) 여기서 ‘작용’으로 옮긴 Wirkung은 인과에서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 점은 대단 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요구(Verlangen)라고 부르는데, 즉 그것은 또 창조적 충동(Trieb) 으로서의 권력의 사용, 권력의
행사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요구 등이기도 하다.
물리학자들은 ‘원격작용(Wirkung in die Ferne)’을 자신들의 원리에서 제거하지 않을 것이며, 척력 (또는 인력) 또한 마찬
가지이다.
달리 도리가 없다. 즉, 모든 운동, 모든 ‘현상’, 모든 ‘법칙’은 단지 하나의 내적 사건(Geschehen)의 징후라고 파악해야만
하 며, 인간의 유비(Analogie)를 끝까지 이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동물에서도 모든 그 충동을 권력의지에서 이끌어내는 일이 가능하며, 마찬가지로 유기적 생명의 모든 기능을 이 유일한
원천에서 이끌어내는 일도 가능하다.”(Nietzshce VII 36[31])
요컨대, 권력의지는 하나의 단일체(Einheit, unité)로서 권력(Macht)은 그 내적 동력을, 의지(Wille)는 그 외적 표현을 가리
킨다.
바로 이런 구조가 의지의 본성을 가장 잘 나타내준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었다.
“권력의 지만이 의지하는 이이다.”(NP 56) 그래서 니체는 “누가 권력을 의지하는 가? 라는 물음은 […] 존재자 그 자체가
권력의지(Machtwille)라면, 불합리 한 질문이다!”(Nietzsche WII 14[80])라고 말하는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앞서 살펴본 들뢰즈의 인용에서 “힘의 미분적 원소”가
i)에서는 의지 (volonté)로 지칭되는 반면
ii)에서는 권력(puissance)으로 지칭된다는 점을 통해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권력(Macht)도 넓은 의미의 ‘힘’이다.
하지만 그것은 Kraft와는 다른 힘이다.
우리는 스피노자의 용어를 써서 전자를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으로서의 힘이라고 후자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으로서의 힘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베르그손의 용어를 쓰면, 전자를 잠재성 (virtualité)이라고 후자를 현생성(actualité)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전자 는 규정하거나 조건 짓는 자로서의 힘이요 후자는 규정되고 조건 지어진 것으로서의 힘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Macht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Wille zur Macht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권력의지는 권력의 추구가 아니라, 오히려 ‘권력의 의지작용’ 또는 들뢰즈의 용어로 ‘욕망 (désir)’이다.
힘들은 항상 우연한 만남 속에서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는 잠정적이어서, 몸들은 끊임없는 해체와 재구성을 겪는다.
이는 힘들의 이합집산, 관계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런 귀결이다.
그리고 이 우연한 만남을 주재 하는 것이 권력의지이다.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에 따라, 관계 형성이 좌우된다.
당연히도 우주의 운행은 긍정에 의해서만 진행될 수밖에 없다.
안 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려고 하는 것에 의해 지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일차적으로 인간주의적 해석을 보류 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이야기되는 것은 존재론적 수준에서의 우주의 운행, 생산의 경과, 생산의 종합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힘들의 관계 맺음에 있어 권력의지는 항상 긍정으로 행사된다.
우주가 아직도 운 행되고 있다면 이는 긍정하는 권력의지가 존재한다는 징표인 것이다.
권력의지 역시도 욕망과 마찬가지로 하부구조에 속한다.
니체에서 우주가 때로는 힘으로, 때로는 권력의지로 묘사되는 것은 이 양자의 본원적 관계 때문이다.
힘은 언제나 권력의지와 함께 하며, 권력의지에 의해 가동 된다.
기계가 욕망에 의해 가동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D. 기계와 욕망
들뢰즈는 기계를 엄격하게 정의한다. “절단들의 체계̇ ̇ ̇ ̇ ̇ ̇(un système de coupures )”(AO 43) 또는 “흐름의 절단의 전
체계(tout système de coupures de flux)”(ID 305)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 자체만으로는 기 계 개념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들뢰즈가 기계 개념을 도입한 이유 는 변화 내지 이행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이 점을 1장에서 살펴본 사회 기계를 예로 하여 먼저 검토해 보도록 하자.
들뢰즈는 멈퍼드의 거대 기계라는 개념을 전유하면서 사회 기계라는 말을 고안했다.
우선 사회 기계는 기술 기계와 두 가지 차이를 갖는 것으 로 확인되었다.
첫째, 기술 기계는 인간의 도구로 이해되지만, 사회 기계 는 인간과 도구(기술 기계) 모두를 부품으로 가지면서 이 부품들을 관리한다.
둘째, 기술 기계는 고장 나면 작동하지 않지만, 사회 기계는 고장 마저도 작동의 일부로 삼는다.
한편 우리는 들뢰즈가 제시하는 사회 기 계의 세 유형 또는 계보학을 살펴보았다.
사회는 어떤 형태로건 작동하 고, 또 작동해 왔다.
그 작동은 언제나 세계를 재활용하는 식으로 일어나 는 것이었다.
이 점에 관해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의 저 유명한 대목 에서 잘 지적한 바 있다.
“인간들은 자신의 삶의 수단을 생산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신의 물질적 삶 자체를 생 산한다.
/ 인간들이 자신의 삶의 수단을 생산하는 양식은 무엇보다 기존에 발견되었 으며 앞으로 재생산될 삶의 수단 자체의 특성
에 달려 있다.
이 생산양식은 개인들의 신체적 실존의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만 고찰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이 미 이 개인들의 활동의 특정한 방식이며, 그들의 삶을 나타내는 특정한 방식, 그들 자신의 특정한 삶의
양식이다.
개인들은 자신의 삶을 나타내는 식으로 그렇게 존재 한다. 따라서 그들이 무엇인가는 그들의 생산과, 즉 그들이 무엇을 ̇ ̇ ̇
생산하는가뿐 아 니라 그들이 어떻게̇ ̇ ̇
생산하는가와도 일치한다. 따라서 개인들이 무엇인가는 그들의 생산의 물질적 조건들에 달려 있다.”(Marx DI 107-8; 21)
여기서 말하는 “생산양식” 또는 “어떻게 생산하는가”는 인간들이 결정짓 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과 삶의 수단의 앙상블로서 결과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그 시기의 생산양식 안에서 기술 기계와 더불어 부품으로서 작동한다.
이 생산양식이 들뢰즈가 말하는 사회 기계이며,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 전체이다(여기서 인간 없는 세계를 생각하는 것은,
2장에 서도 확인했듯이, 추상의 산물일 뿐이다).
들뢰즈는 무의식을 “극장” 말고 “공장”으로 여겨야 한다고 자주 말하 는데, 여기서 공장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생산이
일어나는 현장을 가리키며, 이 공장은 세계 안에 있는 공장이 아니라 세계 전체라는 공장이다.
이 공장에서 모든 것은 기계 작동하며, 그 어떤 형태로건 기능한다. 우주 의 운행에 고장이란 없다.
생산은 ‘무에서의 창조’로 여겨져서는 안 되며, ‘기존 재료로부터 다른 것으로의 변형’으로 여겨져야 한다.
우리가 생산을 생각할 때 ‘재료의 조립’과 같은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없던 것을 만들기’ 라고 생각하게 되면, 오해로
접어들게 된다.
우리가 영토 기계, 전제군주 기계, 자본주의 기계라는 사회 기계들을 보면서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이건, 코드의 잉여가치이건, 이 잉여가치의 적분이건, 흐름의 잉여가치이건, 모든 것이 기존의 재료를 변형하는
방식의 생산을 통해 일어난다는 점이었다.
이런 점에서 사회 기계의 본원적 작업 은 구성, 조립, 배치라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변형 또는 이행을 가져오는 원동력이다.
들뢰즈가 “흐름들의 절단”으로 기계의 기능을 정의할 때 흐름들은 기존의 재료들을, 절단은 이 재료들의 조립, 배 치,
가공, 구성 따위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 점은 4장에서 생산의 종합을 살피면 더 분명해질 것이다.
더 나아가, 들뢰즈는 “사회 기계”의 극한에서 “욕망 기계(machine désirante)”를 발견한다. 들뢰즈에서 욕망 기계는 기계의 다른 표현에 불 과하다.
“욕망 기계”, 아니 더 정확하게 직역하자면 “욕망적 기계”라는 표현에서, “욕망적”이라는 형용사는 기계의 특성을 더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보완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욕망하기”의 가장 중요 한 특성으로 들뢰즈가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생산하기” 즉 구성과 조립과 배치인 것이다.
“생산하기”라는 특성은 그런데 앞에서 보았듯 기계의 특 성이기도 했다.
따라서 “욕망적 기계”라는 표현과 “기계적 욕망”이라는 표현, 나아가 “기계적 무의식”이라는 표현이 서로 호환되며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들뢰즈의 “무의식” 또한 기본적으로 “생산”으로 이해된 다는 점을 우리는 2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어지는 본문에서 이런 점들을 더 자세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기계 개념의 유래 1: 구조의 변이와 이행 문제
들뢰즈는 1968년경부터 구조의 변이라는 과제를 표면에 드러낸다.
들뢰즈는 첫 저서 경험론과 주체성(1952)을 맺으면서, “철학은 존재하는 것의 이론으로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것의
이론으로 구성되어야 한다”(ES 152)고 선언한다.
하지만 들뢰즈가 “행함”의 문제를 중심에 놓고 논의하는 것은 「구조주의는 어떤 점에서 식별되는가?」63)의 마지막 절인
“주체에서 실천(praxsis)으로”에서이다.
소제목에 암시되어 있듯이 들뢰즈가 우선적으로 다루는 것은 ‘주체’이다.
실천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들뢰즈는 먼저 구조주의가 “주체를 억압 하는 사고”가 결코 아니며, 단지 “주체를 체계적으로
부스러뜨리고 분배 하는 사고”, “주체의 동일성을 부인하는 사고”, “주체를 흩뜨리고 이리 저리 옮겨 다니게 하는 사고”일
뿐이며, 이 주체는 “항상 유목적인 주체” 이며, 이 주체는 “개체화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개체화는 비인물적이며, 특이성
(singularités)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특이성은 전-개체적”이라고 말한다(ID 267).
주체는 구조의 ‘빈자리(place vide)'를 뒤따르는 심급이며 구조의 ‘빈칸(case vide)’에 예속되어 있다(assujetti)(ID 266).
여기서 “이 공백(vide)은 비-존재(non-être)가 아니다.
또는 적어도 이 비-존재는 부정적 인 것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문제틀(problématique)”의 정립적 존재이 며, 문제와 물음의 대상적 존재이다.”(ID 266)
말하자면 이 공백 덕분에 구조가 작동하는데, 이 공백을 뒤따르는 것이 주체라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주체의 지위가 이런데도 불구하고 구조의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들뢰즈가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알 튀세르와 그 동료들의 자본주의 분석 작업이다.
이들의 작업에서 주목할 것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경향성”의 관계이다.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모순이 상상적이지 않고 현실적이며, 구조 내부로부터 생겨난 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들뢰즈는 “내재적 ‘경향성’(‘tendance' immanente)” 을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구조 자체의 일부를 이루면서 상징적으로 구 조의 빈칸 또는 주체를 변용시키는 이념적 사건들(événements
idéels)이
63) 들뢰즈는 1968년에 이 글을 집필했는데, 마지막 일곱 번째 표지로 ‘주체에서 실천으로(du sujet à la pratique)’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다.
이 글에서 들뢰즈는 정확히 세 번 praxis라는 독일어 표현을 쓰는데, 불어 pratique와는 달리 이 표현 은 맑스주의의 맥락
에서 ‘실천’을 지칭할 때 사용한다.
다.”(ID 268)
구조의 변화는 외부에서, 또는 초월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으로 온다는 것이다.
이어서 들뢰즈는 ‘주체에서 실천으로’의 문제를 언급한다.
이 과정에서 내재적 변화의 성격이 해명된다.
“이리하여, 구조적 “변이”(푸코)나 한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의 “이행 형식”(알튀세르)과 관련해서, 구조주의에 일군의
복잡한 문제들이 제기된다. […]
다른 구조를 구성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 빈칸과 관련해서이다. […]
빈자리는 자신을 가리거나 채우는 상징적 사건들을 치워야 하며, 또 빈자리는 자신을 점유하지도 버리지도 않으면서
새 길들 위에서 자신을 동반하게 마련인 주체에게 넘겨져야 한다.
또한 구조주의적 영웅̇ ̇(un héros )이 있다.
그는 신도 인간도 아니며, 인물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으며, 동일성이 없고, 비인물적 개체화와 전-개체적 특이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과잉이나 결여로 인해 변용한 구조의 파열을 확보하며, 자기 고유의̇ ̇ ̇ ̇ ̇ 관념 적(idéal) 사건을 우리가 앞에서 정의
했던 이념적(idéels) 사건들과 대립시킨다.
전과 유사한 모험들을 재개하지 않고 치명적인 모순들을 재탄생시키지 않는 일을 새로운 구조에 귀속시키는 것, 이는
저항적이고 창조적인 영웅의 힘에, 이전(移轉)을 뒤 따르며 보전하는 영웅의 민첩성에, 항상 다시 주사위를 던지면서
관계들을 변동시 키며 특이성들을 재분배하는 영웅의 능력(pouvoir)에 달려 있다.
이 변이(mutation)의 점(點)이 정확히 실천(praxis)을, 또는 차라리 실천(praxis)이 자리 잡게 마련인 터(lieu) 자체를 정의
한다. […]
치료적 실천이 되었건 정치적 실천이 되었건, 이 실천은 영구 혁명의, 즉 영구 전이(transfer)의 점을 가리킨다.”(ID 268-9)
이 대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1) 우선 구조의 변이나 이행이라는 문제가 언급된다. 빈칸과 관련해서 구조는 변화의 여지를 내포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빈자리를 가리거나 채우고 있던 상 징적 사건들을 치워버리고 이른바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 자리를 내줘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체는 결코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따라서 구조의 변이나 이행을 위한 다른 담당자가 요청되며, 그것이 영웅이다.
2) 본래 영웅은 신화시대에 신과 인간의 중간에 있던 존재를 지칭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신과 인간의 동시 죽음 이후에
남게 된 사건의주역(主役)을 가리킨다.
영웅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표현은 ‘비인물적 개체화와 전-개체적 특이성’이다.
따라서 그것은 ‘목표와 기획의 존재론 적이거나 선험적인 기원’으로서의 주체가 아닌 주체이며, 들뢰즈가 “비 인칭” 또는
“4인칭”이라 부른 것에 해당한다.
이 영웅은 저항적이고 창조 적인 힘을 갖고서, 민첩성을 지닌채, 주사위 던지기(니체)의 놀이를 함 으로써 관계들을 변동
시키고 특이성들을 재분배함으로써 기존의 구조를 파열시키고 변화시킨다.
이 문맥에서 영웅이 주사위 놀이를 한다는 것은, 우발적이고 우연한 시도와 실험을 행하며 결과를 무릅쓰고 일단 해보면서도 그 결과를 긍정하는 모습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3) ‘이 변이의 점’이 ‘실천(Praxis)’을 정의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 변이란 영웅의 행위를 통해 야기된 구조의 변화를 가리킨다.
영웅은 이른바 인간 주체와는 상관이 없는 일종의 담지자 또는 주역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웅의 기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웅 역시도 변화의 부분적 원인으로 작용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영웅은 우주를 상대로 주사위 놀이를 한다.
영웅의 바람과 뜻은, 그것이 의도와 목적을 기준으로 삼는 한, 결코 달성되지 못하리라.
우주의 생성은 무수히 많은, 이루헤아릴 수 없는 원인들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 원인들의 총체는 우연
이라는 이름으로밖에는 지칭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 만 영웅의 바람과 뜻이 의도와 목적이 아닌 실험과 시도로 이해되는 한, 그것은 실행과 더불어 단번에 완수된다.
여기서 실천은 영웅을 통한 변이 에 의해,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변이의 점을 통해 정의된다.
나아가 ‘이 변이의 점’은 ‘실천’보다 차라리 ‘실천이 자리 잡게 마련인 터 자체’를 정의한다.
실천은 어떤 터에, 또는 어떤 장소에 거주하게 마련인데, 변이의 점은 바로 그 ‘터’, 그 ‘장소’를 정의한다.
실천은 진공에서 일어나지 않으며, 구체적인 시공간 조건 아래서 일어난다.
실천은 항상 마당[場]에서, 마당과 더불어 일어난다.
어떤 의미에서 실천 자체보다, 실천이 일어나는 터가 더 결정적이다.
실천의 터가 실천 자체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는 들뢰즈가 구조주의의 후예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실천은 “영구 혁명” 또는 “영구전이”의 점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구조의 변이를 위해 들뢰즈가 도입한 영웅이 과타 리의 도움을 입어 기계라는 개념으로 정립된다.
2. 기계 개념의 유래 2: 과타리의 기계
사실 들뢰즈의 차이 개념도 구조주의보다는 베르그손에서 왔다.
구조 주의의 차이는 정태적 공간적 성격이 강하며 발생적 역학적 차이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구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이 바로 기계인데, 기계 개념 또한 과타리의 주도 아래, 그러나 과타리의
들뢰즈 해석이라는 과정 아래, 만들어졌다.
들뢰즈의 기계 개념이 라캉의 부분 충동 개념과 유사하다는 점은 많이 지적되어 왔는데(대표적으로, 서동욱 2000: 279-90),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과타리에 의한 들뢰즈의 보충이다.
과타리는 「기계와 구조」라는 논문을 1969년, 들뢰즈와 만나기 전에 작성한다.
과타리 자신의 기계에 대한 착상은 1950년대 중반의 작업에서부터 등장하고 있으며, 이 점은 이 논문이 수록된 정신분석과 횡단성. 제도 분석 시론(1972)의 다른 논문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 과타리는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1968) 및 의미의 논리(1969)에서 “구조”라는 말로 규정한 것을 “기계”로 이해
하자고 제안한다(Guattari 2003: 240).
과타리는 들뢰즈가 말한 “상호 교환 불가능하고 상호 대체될 수 없는 독자성과 관련한 행동 및 관점”(DR 7)으로서의 “반복
의 질서”를 기계 개념이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어서 과타리는 “차이소(différenciant) 로서 존재하는 역설적 요소를 향해 수렴하는 두 이질적 계열”(LS 63)이 기계의 차원에만 관련된다고 지적한다.
과타리의 이러한 제안은 들뢰즈 자신이 구조의 변이 내지 이행의 문제를 고민했다는 정황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들뢰즈는 1966년에 발표한 「플라톤주의를 전복하자(허상)」(의 미의 논리의 부록으로 수정 증보해서 수록)에서도
“디오니소스적 기계”를 언급하면서 그것이 변화의 계기가 됨을 언급한 바 있다.
“모의(simulation)는 환상 그 자체, 말하자면, 기계류로서의, 디오니소스적 기계로서의 허상(simulacre)의 기능의 결과이다. 중요한 것은 권력으로서의 거짓, 프세우도스 (Pseudos), 니체가 말하는 의미에서 거짓의 최고 권력이다. […]
허상은 분유(分有)들 의 질서와 분배들의 고정성과 위계의 규정을 불가능하게 한다.
허상은 유목적 분배 들 및 왕관을 쓴 무정부상태들의 세계를 설립한다.
허상은, 새로운 토대가 되기는커녕, 모든 토대를 와해시키며, 보편적 붕괴를 확실히 실행하되, 긍정적이고 기쁜 사건 으로서, 토대 상실(effondement)로서 그렇게 한다. […]
모의는 결과(effet)를 생산하는 권력을 가리킨다.”(LS 303-4)
물론 아직까지 들뢰즈에게 기계 개념이 명료하게 형성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 대한 사색이 다양한 형태로 도모되고 있었다고 여길 수는 있겠다.
과타리는 이 지점을 파고들어 기계 개념을 제안했던 것이다.
사실상, 안티 오이디푸스의 기계 개념의 전면화는 전적으로 과타리의 공헌으로 여기는 것이 맞다.
과타리는 구조의 형성이 기계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기계는 통 상적인 주체와는 무관하다.
기계는 다른 기계로 계승될 뿐이다.
과타리 에 따르면,
“각각의 우발적인 구조에는 하나의 기계 체계 또는 최소한 하나의 논리 기계가 출 몰한다. […]
기계는 본질적으로 주체적 사실에서 벗어나 있다.
거기에서 주체는 항상 다른 어느 곳에 있다.
시간화(temporalisation)는 모든 측면에서 기계를 관통하며, 사건이라는 방식으로만 기계와 관련해서 배치될 수 있을 따름
이다.
기계의 출현은 구조적 재현과는 다른 하나의 날짜, 하나의 절단을 표시한다. […]
각 기계는 자신이 대체하는 기계의 부정이며, 그 다른 기계를 (거의 찌꺼기까지) 통합하는 살해자다.
잠재적으로 각 기계는 자신을 계승할 또 다른 기계와 동일한 유형의 관계에 돌입한다.”(Guattari 2003: 240-1)
그러므로 기계의 본질은 ”구조적으로 수립된 사물들의 질서에 이질적인 인과적 절단”이며, “인간 존재는 기계와 구조의
교차 속에서 파악된 다”(243).
요컨대 “과타리에게서 기계는 하나의 구조를 파괴하고(절단하고) 다른 구조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것, 이른바 혁명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서동욱 2000: 293).
들뢰즈 자신도 정신분석과 횡단성 의 서문(「집단에 관한 세 가지 문제」)을 쓰면서 「기계와 구조」가 “기계 의 원리 자체가
구조의 가설에서 놓여나고 구조적 속박에서 이탈되게 되는 이론적 텍스트”(ID 284)라는 평가를 한다는 점 또한 흥미로운
대목이 다.
사실상 과타리의 저 진술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생산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적극 활용된다는 점을 우리는 4장에서 보게
될 것이다.
3. 기계 개념의 유래 3: 버틀러의 ‘기계들의 책’
들뢰즈는 자신의 기계 개념을 다듬는 과정에서 “생기론(vitalisme)”과 “기계론(mécanisme)”의 대립이라는 문제를 검토한다. 왜냐하면 “욕망 기 계”라는 개념은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개념의 결합으로, 언뜻 이해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생기론은 생물이 지닌 “개체적이고 특유한 통일성”, 말하자면 유기체의 형성이라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입장이다. 반면 기계론은 기계들에서 하나의 “구조적 통일성”을 추상해서 “유기체 의 기능을 설명”하는 데 소질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들뢰즈가 보기에 생기론에서 이해되는 욕망과 기계론에서 이해되는 기계 사이에는 여전히 “기계와 욕망이 외래적
관계에 머문다”는 한계가 보인다.
“욕망이 기계 론적 원인들의 체계에 의해 규정되는 결과로 나타나건, 기계 자체가 욕 망의 목적들과 관련한 수단의 체계이건 간에 말이다.”(AO 337)
이 양자를 넘어서는 데 버틀러(Samuel Butler)는 큰 도움을 준다.
여기서 들뢰즈가 참조하는 것이 버틀러의 에레혼(Erewhon)(1872) 중 「기계들의 책」이라 명명된 23-5장이다.
처음에 텍스트는 보통의 두 논제를 대립시키는 데 그치는 것 같다.
1) “유기체들은 한동안 가장 완전한 기계들일 따름이다.”(AO 338)
“우리가 가장 순수하게 정신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지레들의 무한한 계열들 속 의 평형의 교란에 불과한데, 저 지레
들은 너무 작아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것들 에서 시작하며, 인간의 팔과 팔이 이용하는 기기들(appliances)에까지
이른다.”(Butler 1985: 201)
유기체의 정점에 있다고 상정되는 가장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들까지도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지레(즉 기계 부품들)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다른 한편, 2) “기계들은 유기체의 연장일 따름이다.”(AO 338)
“인간은 기계적인(machinate) 포유류이다.
하등 동물들은 모든 지체(肢體)를 자기네 몸 안에 편히 간직하고 있지만, 인간의 지체들은 대부분 헐렁해서, 이탈한 채,
때로 는 여기에 때로는 저기에, 세계의 다양한 곳들에 있다.
그 몇몇은 우연히 사용할 수 있도록 늘 가까이 두고 있으며, 다른 몇몇은 때로는 수백 마일 떨어진 채로 놓여 있다.”
(Butler 1985: 223)
하등 동물들과 인간의 차이는 자신의 지체(즉 기계 부품들)를 몸 안에 모 두 간직하고 있느냐 아니면 몸 안에, 가까이에,
나아가 멀리 떨어진 곳에 간직하고 있느냐에서 비롯한다.
여기서 기계들은 유기체의 확장인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가 버틀러의 성취로 보는 것은 그가 수행하는 극한을 향 한 이중의 이행이다.
“그것은 유기체의 특유한 또는 인물적인 통일성을 의문시함으로써 생기론의 논제̇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를 폭발시키고̇ ̇ ̇ ̇ ̇ ̇, 또 기계의 구조적 통일성을 의문시함으로써 기계론의 논제를 폭발̇ ̇ ̇ ̇ ̇ ̇ ̇ ̇ ̇ ̇ ̇ ̇ ̇ ̇ ̇ ̇ ̇ ̇ ̇ ̇ ̇ ̇ ̇ ̇ ̇ ̇ ̇ 시킨다̇ ̇ ̇. […] 일단
기계의 구조적 통일성이 해체되면, 일단 생물의 인물적이고 특유 한 통일성이 탈각되면, 기계와 욕망 사이에 직접적 연줄이 나타나고, 기계는 욕망의 심장부로 이행하며, 기계는 욕망적이 되고, 욕망은 기계화된다.
욕망은 주체 안에 있지 않고, 욕망 안에 기계가 있다. […] 요컨대, 참된 차이는 기계와 생물, 생명론과 기계론 사이에 있지 않고, 생물의 두 상태이기도 한 기계의 두 상태 사이에 있 다.”(AO 338-9)
버틀러는 기계들이 스스로 재생산하지 않으며 인간을 매개로 해서만 재 생산된다는 전통적인 관점을 파괴한다.
버틀러는 “재생산 체계”라는 개념 자체를 혁신한다.
“동물들의 재생산 체계는 식물들의 그것과는 광범위하게 다르다. 하지만 둘 모두 재생산 체계이다. […]
확실히, 기계가 다른 기계를 체계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재생산 체계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재생산 체계란, 재생산을 위 한 체계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
뒝벌이 (그리고 오직 뒝벌만이) 붉은 클로버가 재생산[生殖]할 수 있기 전에 그것을 돕고 지원하기 때문에, 붉은 클로버는 재생산 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아무도 그럴 수 없다.
뒝벌은 클로버의 재생산 체계의 일부이다.
우리들 각자는, 우리 자신의 것과는 완전히 별개인 존재성 을 지닌 미세한 극미동물들(aninalcules)에서 유래했다. […]
이 작은 피조물들은 우리 의 재생산 체계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기계들의 재생산 체계의 일부가 아니란 말인가? […]
복합된 기계 전체를 단일한 대상으로 여김으로써 우리는 오도 되었다. 사실, 복합된 기계는 하나의 도시 내지 하나의 사회로, 그 각 성원은 진실로 자신의 유(kind)에 따라 길러졌다.
우리는 하나의 기계를 하나의 전체로 보며, 그것 에 하나의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개체화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체들을 바라보 며, 그 조합이 재생산 작용의 단일한 중심에서 생겨난 하나의 개체를 형성한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우리는 단일한 중심에서 생겨나지 않는 재생산 작용은 있을 수 없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 가정은 비과학적이다.
또한, 증기 기관이 같은 유의 다 른 하나 내지 두 개의 증기 기관에 의해 전적으로 만들어진 적이 없다 해도, 이 단 순한 사실이, 증기 기관들은 재생산 체계가 없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게 보장하기 에는 충분치 않다.
사실상, 그 어떤 증기 기관이건 그 각 부분은 그 자체의 특수한 양육자(breeder)들에 의해 길러지는데, 이들의 기능은 저
부분, 그리고 저 부분만을 길러내는 것이다.
반면 부분들을 하나의 전체로 조합하는 일은 기계적 재생산 체계 라는 또 다른 부분을 형성한다. […]
모든 부류의 기계들은 아마 자신의 특유한 기계적 양육자들을 갖게 될 것이며, 모든 상위의 기계들은 자신들의 실존을
둘만이 아 닌 다수의 부모에게 기대게 될 것이다.”(Butler 1985: 210-2)
버틀러는 심지어 인간이 기계에 의해 재생산된다는 놀라운 주장까지 하기에 이른다.
“기계들에게 작용하고 기계들을 만드는 것이 인간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들에게 작용하고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기계들이다.”(Butler 1985: 221)
이런 버틀러의 진술은 인간이 기계를 재생산하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기계가 인간을 재생산하는 주체이기도 하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버틀러의 통찰을 바탕으로, 분자생물학 수준에서 생명과 기계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최근의 발견을 근거로 삼아,
들뢰즈는 통해 생기론과 기계론의 전통적인 구별과 대립을 극복하게 된다.
참된 차이는 단지 그램분자 기계들(사회 기계, 기술 기계, 유기체 기계)과 분자 차원에 속하 는 욕망 기계들 사이에 있을
뿐인 것이다(AO 339-45).
그램분자와 분자 의 구별에 대해서는 4장 B의 3절에서 상세히 해명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들뢰즈의 욕망 개념을 살필 시점에 이르렀다.
3장 서두에서 잠깐 언급하기는 했지만, 욕망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와 들뢰즈의 그 것은 여러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조금 더 살피는 것이 좋다고 본다.
4. 욕망과 욕망 기계
들뢰즈은 기계를 “욕망 기계(une machine désirante)”라고 이해한다.
“욕 망 기계”는 “욕망적 기계”64)라는 뜻이다.
‘욕망’(désire) 또는 ‘욕망하 다’(désirer)에 형용사 표현이 없기에 불가피하게 사용된 désirante는 동사 가 아닌 형용사로,
따라서 ‘욕망하는 기계’보다는 ‘욕망적 기계’ 내지 ‘욕
64) 독일어는 Wunschmaschine로 일본어는 慾望機械로 각각 옮기고 있다.
망 기계’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하다(영어의 desiring-machine도 마찬가지).
이는 들뢰즈가 종종 사용한 “욕망적 생산(production désirante)이라는 표현에서의 용법을 이해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만일 ‘욕망하는 기계’라고 옮기면, 욕망과 기계의 관계에서 욕망은 그 기계의 활동으로 이해되는데, 이렇게 되면 ‘욕망’의
성격에 대한 전통적 오해에 다시 빠질 우려가 있다.
반면 ‘욕망적 기계’ 내지 ‘욕망 기계’로 옮기게 되면, 이번엔 욕망이 기계의 특성으로 이해될 수 있어, 정확한 이해를 돕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이런 표현에서 ‘욕망’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리는 통상 욕망을 거의 욕심에 가까운 불교식 의미로 이해한다.
서양에서도 전통적 으로 욕망은 결핍으로 이해되어 왔다(AO 33).
플라톤은 소피스트에서 생산과 획득을 나누는데(배타적 양자택일), 이것이 욕망을 결핍으로 이해하는 출발점이었다.
이후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욕망을 생산으로 이해하긴 했지만 결국 심리적 현실의 생산, 환상의 생산으로 국한시켰다.
이 두 경우에, 플라톤의 착상에 따르면 생산과 획득을 나눈데서 시작했기에 욕망은 결핍된 것을 획득하는 활동일 뿐
생산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었고, 칸트의 착상에 따르면 욕망이 생산으로 이해되기는 했어도
그것은 여전히 심리적 현실의 생산인 환상의 생산에 머물러, 물질적 현실의 생산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지 못하는 장애가
되었다.
그러나 들뢰즈의 욕망 개념은 인간주의적 의미와는 완전히 다르다.
우선 “욕망은 하부구조의 일부를 이루며”(AO 124), “욕망은 하부구조에 속 한다.”(AO 416) 욕망은 맑스적 의미에서 하부
구조에 속한다.
하지만 하부 구조에 속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우선 상부구조 즉 이른바 통상적 의미의 인간 “주체”에 속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욕망은 하부구조 자체라기보다는 하부구조의 일부, 하부구조에 속하 는 그 무엇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것은 안티 오이디푸스초반부의 한 문장이다.
“도처에 생산적 즉 욕망적 기계들(des machines productrices ou désirantes), 분열증적 기계들, 유적(類的) 삶(la vie
générique / Gattungsleben) 전체로다.”(AO 8)
이 문장에서 ‘욕망적’은 ‘생산적’을 부연 설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욕망 하기”란 “생산하기”를 뜻한다.
나아가 그것은 “분열(하기)”의 의미로까지 확대된다. 그렇지만 “생산하기”란 다시 무엇을 뜻하는가?
들뢰즈는 파르 네(Claire Parnet)와의 인터뷰 영상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생산하기의 의미를 일상적인 사례를 통해 제시
한다.
들뢰즈가 보기에
“배치체(agencement)로 흘러 들어가지 않는 욕망이란 없다.
욕망은 항상 구성주의였으며, 하나의 배치체, 하나의 집합체를 구성한다.”(ABC “Désir”)
가령 우리가 술을 마시고 싶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하나의 대상인 ‘술’ 을 바란다는 뜻이 아니라, 함께 술 마실 사람,
분위기 좋은 술집 등 전체 맥락을 함께 어울러 구성하고자 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욕망의 모델은 공장이며, 욕망은 생산 활동, 끊임없는 실험, 실험적 조립, 유랑하는 수련(修練)이다.
욕망은 공장 기계의 작업인 조립, 구성, 배치, 가공 따위의 활동으로서의 생산이다.
바로 이 차원에서 욕망은 미리 주 어져 있어서 안에서 밖으로 향하게 될 운동(결핍된 것을 찾아 나서 충족 하려는 활동)이
아니며, 오히려 밖으로부터, 만남과 결합(재료들의 조립 과정에서의 무수한 우연들)으로부터 탄생한다(D 66, 116).
이런 점에서 욕망은 기계로 이해되어 마땅하다.
여기서 우리는 욕망이 하부구조에 속하는 방식이 기계에 속하는 것을 통해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욕망과 기계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욕망은 기계에 어떤 방식으로 속하는가?
“과정으로서의 생산은 모든 관념적 범주들을 넘어서 있으며, 내재적 원리로서의 욕 망과 관계된 하나의 순환을 형성한다.”
(AO 10-11)
욕망은 바로 내재적 원리로서 기계에, 생산에 속한다. 과정으로서의 생산, 생산의 경과, 순환으로서의 무의식의 자기-생산, 우주의 운행의 원리가 욕망이라는 것이며, 이 원리는 초월적 원리가 아닌 내재적 원리이다.
우주의 운행에 내재하는 원리, 우주의 운행을 추동하는 내재적 힘이 바로 욕망이라는 말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욕망은 ‘흐름과 절단의 내재적 원리’ 이다.
“연속된 흐름들과 본질적으로 파편적인 동시에 파편화된 부분대상들의 연동을 욕 망은 끊임없이 실행한다.
욕망은 흐르게 하고 흐르고 절단한다.”(AO 11)
욕망은 절단을 행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만 “욕망은 기계이다”(AO 34).
우리는 욕망 개념을 동사로서, “생산”이라는 동사로서, 더 구체적으로는 이미 있는 세계를 재료로 삼아 다시 구성, 배치,
조립, 가공하는 활동으 로 이해해야 한다.
들뢰즈가 맑스의 “하부구조”라는 말을 쓴 까닭은, 하 부구조 자신이 물질적 생산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들뢰즈에게 하부구 조는 우주로서의 무의식, 물질계 전체, 생산의 경과이기 때문에, 욕망은 하부구조의 일부를 이루고
하부구조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 다.
* * *
우리는 이어지는 4장에서 욕망의 활동, 욕망 기계의 기능, 기계의 종합 으로 이해될 수 있는 “생산의 종합”을 개념적 수준에서 정교하게 다듬을 것이다.
“생산의 종합”의 이론은 들뢰즈의 존재론 체계의 다른 표현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욕망적 생산”의 이론을 전개한다.
우리는 처음에 “사 회 기계”와 “사회적 생산”에서 출발했다.
다음 단계에서 우리는 “기계의 일반 이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기술 기계, 사회 기계, 나아가 유기체 기계까지도 모두 “기계” 개념으로 포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생산하기”로서의 “욕망하기”가 그 기계의 본질적 특성으로 파악되 었다.
이제 “욕망 기계”는 모든 기계의 본질에 속하며, “욕망적 생산”은 모든 생산의 핵심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은 역사의 끝인 자본주의 체제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진실로, 사회적 생산은 특정한 조건들에서 단지 욕망적 생산 자체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우리는 말 한다, 사회 마당은
즉각 욕망에 의해 주파되고 있다고, 사회 마당은 욕망의 역사적 으로 규정된 생산물이라고, 리비도는 생산력들과 생산
관계들을 투자하기 위해 그 어떤 매개나 승화도, 심리적 조작도, 변형도 필요하지 않다고. 욕망과 사회가 있을 ̇ ̇ ̇ ̇ ̇ ̇ ̇ ̇ 뿐̇,
그밖엔 아무것도 없다̇ ̇ ̇ ̇ ̇ ̇ ̇ ̇ ̇.
심지어는 사회적 재생산의 가장 탄압적이고 가장 치명적 인 형식들조차도, 우리가 분석해야 하는 이런 저런 조건에서
욕망으로부터 생겨나 는 조직화 속에서, 욕망에 의해 생산된다. […]
모든 사회적 생산은 특정한 조건들에 서 욕망적 생산에서 유래한다. […]
더 정확하게, 욕망적 생산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이며, 끝에서야 자신을 해방하는 데로 향한다.”(AO 36-40)
우리는 다음 4장에서 욕망적 생산의 종합에 대해 정리함으로써, 자본주 의 체제를 구성하는 초월론적 조건을 파악하는
데까지 갈 수 있게 될 것 이다.
4장. 개념적 질서 속에서 본 생산의 종합
이제 우리는 종합 이론을 살필 자원을 모두 마련했다.
이번 장에서 살 필 것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전개된 “생산의 종합”의 이론이다.
생산의 종합 이론은 결국 들뢰즈의 존재론인데, 그것은 추상적 구성물에 불 과한 것이 아니라 사회-역사적 고찰의 결과로
구성된 것임을 우리는 앞에서 밝히려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직 체계적인 모습을 띠지 못했으며, 들뢰즈 자신도 그 어느 곳에서도 체계적인 형태로 제시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러한 사정은 안티 오이디푸스또는 이를 출발점으로 한 들 뢰즈의 후속 작업들이 부분적 내지 자의적으로 이용될 여지를 준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보기에 들뢰즈의 존재론은 상당히 실증적이며 구체적인 근거 위에 설립된 체계적 구성물이다.
따라서 존재론의 얼개와 그 구성 요소로서의 개념들을 정확하게 다듬는 일은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된다.
종합 이론은 몇 가지 세부적인 조합으로 구분되는데, 일단 그것들의 관계를 기억하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
i) “생산은 즉각 소비이며 등록이고, 등록과 소비는 직접 생산을 규정하며, 그것도 생산 자체의 한가운데서 생산을 규정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생산이다.
생산의 생̇ ̇ ̇ ̇ 산̇, 즉 능동[=작용]들과 수동[=겪음]들의 생산들. 등록의 생산̇ ̇ ̇ ̇ ̇, 즉 분배들과 좌표들 의 생산들.
소비의 생산̇ ̇ ̇ ̇ ̇, 즉 쾌감들, 불안들, 고통들의 생산들. 모든 것은 생산이기에, 등록들은 즉각 완수되고 소비되며, 소비들은 직접 재생산된다.”(AO 9-10)
ii) “여기 욕망 기계들이 있다. ― 그 세 부품은 일하는 부품들, 부동의 모터, 인접 부품이며, ― 그 세 에너지는 리비도, 누멘,
볼룹타스이고, ― 그 세 종합은 부분대 상들과 흐름들의 연결 종합들, 독자성들과 사슬들의 분리 종합들, 강도들과 생성들의 결합 종합들이다.
분열-분석가는 해석자가 아니며, 더욱이 연출자도 아니다.
그는 기계공, 미시-기계공이다.”(AO 404)
이 구절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생산의 생산”은 “연결 종합”과, “등록 의 생산”은 “분리 종합”과, “소비의 생산”은 “결합
종합”과 관련된다.
훨씬 더 복잡한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최소한 “하나의 논리적 질서 속에서”(AO 391) 또는 ‘개념적 질서’ 속에서
이들의 내용과 관계를 정리하고, 이 과정에서 들뢰즈의 중요한 개념 몇 가지를 해명하고자 한다.
이런 사항들은 안티 오이디푸스의 1장 1절~3절에 걸쳐 요약적으로 제 시되고 있는데, 우리는 이 대목의 논의 순서를 따라
가면서, 책 전반에 걸 쳐 상술된 개념적 규정들을 참고하는 방식으로 서술을 진행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사실이지 안티 오이디푸스에 대한 지난 40년간의 논의들은 정확한 개념 규정들을 생략한 채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이용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고 우리는 판단하기 때문이다.
A. 생산의 생산 또는 연결 종합
생산의 생산은 다른 두 생산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일차적이다.
이런 점에서 다른 두 생산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된다.
1. 연결 종합의 형식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을 때 욕망 기계를 우주의 요소(élément, 元素) 로 이해하며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앞에서 보았다.
일렁이며 변전하는 우주 전체. 책의 첫 대목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것(ça)은 도처에서 기능한다. 때론 멈춤 없이, 때론 간헐적으로. 그것은 숨쉬고, 열 내고, 먹는다. 그것은 똥 싸고 씹한다. 이드̇ ̇( le ça)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오류더냐? 도처에서 그것은 기계들인데, 이 말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나름의 연동 들, 나름의 연결들을 지닌, 기계들의 기계들.
원천-기계에 기관-기계가 접목된다.
한 기계는 흐름을 방출하고, 이를 다른 기계가 절단한다.
젖가슴은 젖을 생산하는 기계고, 입은 이 기계에 연동된 기계다.”(AO 7)
다 알다시피, “이드”라는 라틴어 표현은 ‘무의식’을 가리키기 위해 3인칭 중성 대명사 “es”에 정관사 “das”를 붙여 만든
프로이트의 “das Es”의 영 어권 번역어로, 프랑스어로는 “le ça”라고 옮겨 왔다.
들뢰즈가 “ le ça”라 고 정관사를 강조하면서 그것을 “얼마나 큰 오류”냐고 지적함으로써 일차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바로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트와의 대결이다.
들뢰즈는 이미 차이와 반복의 2장 4절에서 이드 개념을 “하나의 “여기 저기”(un “çà et là”)”(DR 128)라는 말로 해체하며
논의를 전개한바 있다.
이제 안티 오이디푸스의첫 대목에서도 이드 개념은 해체되고, “기계” 내지 “욕망 기계” 개념으로 대체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정신 차원에 가두고 의식 또는 전의식에 의한 재현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들뢰즈가 보기에 무의식은 정신 차원 을 넘어서며 현실을 생산한다.
우주는 기계들로 이루어져 있다.65)
이 구절에서 “연결(connection)”과 같은 뜻으로 표현된 “연동(couplage, 짝짓기)”이라는 말에 대해, 샤틀레는 외설적이라
평했지만(ID 307), 사실 이 작용은 시간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는 남녀의 짝짓기, 교접(交 接)과 같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이미 존재하는 항들의 만남은 아무 상관이 없다.
더 본질적인 것은 여기서 기계는 다음 순간과 연결되는 시간적 운동 속에서 다른 (즉, 다음) 기계와 만난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연동” 내지 “연결”의 순서가 중요하다.
흐름을 방출하는 기계는 “원천-기계” 또 는 “에너지-기계”이며, 절단하는 기계는 “기관-기계”이다.
그렇기 때문
65) 또한 우리는 이 구절의 “기계들의 기계들”이라는 표현에서 ‘범기계주의 (machinisme)’를 확인할 수 있다.
천 개의 고원세 번째 고원에서는 존재 세계 전체를 뜻하는 지구에 관해 “지구는, 탈영토화되고 빙원이고 거대 분자인 지구는 하나의 기관 없는 몸이다.
이 기관 없는 몸을 가로질러 가는 것들은 형식화되지 않은 불안정한 질료들, 모든 방향으로 가는 흐름들, 자유로운 강도들 또는 유목 하는 독자성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미친 입자들이다.”(MP 53-54)라고 언명한 후, 이 세계를 “‘기계권’ 또는 리좀권”(MP 94)이라고 묘사하며 마친다.
에 젖가슴은 원천-기계이고 입은 기관-기계이다.
그렇지만 입이나 심지 어 젖가슴마저도 미리 존재하는 어떤 항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뒤에 서 설명될 “부분대상(objet partiel)”이다.
그런데 원천-기계의 성격은 어떤 절단이냐에 따라 바뀐다.
들뢰즈가 드는 예는 거식증인 입이다.
“거식증 인 입은 먹는 기계, 항문 기계, 말하는 기계, 호흡 기계 사이에서 주저한다(천식의 발작).”(AO 7)
거식증인 입은 미규정 상태의 그 무엇, 즉 먹는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이 아닌 그 무엇이며, 그래서 “입”이라고 편의상 잠정적으로 불리고는 있지만 엄밀하게는 입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 무 엇인 셈이다.
“하나의 기관은 상이한 연결들에 따라 여러 흐름들에 연합될 수 있다.
그것은 여러 체제 사이에서 주저할 수 있고, 심지어 어떤 다른 기관의 체제를 떠맡기까지 한다(거 식증인 입).
이제 기능에 관한 온갖 종류의 물음이 제기된다. 어떤 흐름을 절단할 까? 어디서 절단할까? 어떻게, 어떤 식으로? […]
먹은 걸로 질식하고, 공기를 마시 고, 입으로 똥 싸는 따위의 일을 해야 할까, 그럴 필요 없을까?”(AO 46)
그것은 연결의 성격에 따라, 또는 “채취-절단(coupure-prélèvement)”의 성 격에 따라, 먹는 입, 토하는 입, 말하는 입, 숨 쉬는 입 등으로 생성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연결의 상관항인 젖가슴, 똥, 말, 공기 등도 이 연결과 동시에 생성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미리 존재하는 “원천-기 계”와 “기관-기계” 따위는 없으며, 양자는 연결 또는 채취-절단에 의해 비로소 생성하고 정립된다.
“에너지-기계에 대해서는 기관-기계, 언제나 흐름들과 절단들.”(AO 8)
우선 에너지-기계 내지 원천-기계가 있는데, 이 는 흐름을 방출하는 기능을 한다.
그 다음에 절단하는 기계가 있는데, 이 것이 기관-기계이다.
가령 젖가슴과 입.
하지만 이는 젖가슴(원천-기계, 에너지-기계)이 미리 존재하고 입(기관-기계)이 미리 존재해서 이 둘이 만난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사건이 발생한다고 이해 해야 한다.
한편에는 흐름을 방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기계 즉 원천-기계가 다른 한편에는 흐름을 절단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기계
즉 기관-기계가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 맞물림이 바로 연결 또는 연동의 의미 이다.
여기서 연동 또는 연결은 공간적 차원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 차원에서, 즉 시간의 흐름이라는 차원에서, 행해진다는 점이 중요 하다. 기계들은 욕망 기계들이다.
욕망 기계들은 어떤 형식에 따라 연결 기 능하는가? 연결 종합, 생산적 종합, 생산의 생산은 어떤 형식에 따라 진 행되는가?
“욕망 기계들은 이항 규칙(règle binaire) 또는 연합 체제(régime associatif)에 따르는 이 항 기계이다. 하나의 기계는 언제나 다른 기계와 연동되어 있다. 생산적 종합, 생산 의 생산은 “그리고(et)”, “그 다음에(et puis)”…라는 연결 형식을 갖고 있다. 흐름을 생 산하는 어떤 기계와 이 기계에 연결되는, 절단을, 흐름의 채취를 수행하는 또 다른 기계가 늘 있으니 말이다(젖가슴 ― 입). 그리고 저 처음 기계는 그 나름으로는 절 단 내지 채취 같은 작동을 통해 관계를 맺는 또 다른 기계에 연결되기
때문에, 이항 계열은 모든 방향에서 선형(線形)이다.”(AO 11)
욕망 기계들은 ‘두 항으로 형성된다는 규칙’ 또는 ‘두 항이 연합되는 체 제’를 따른다. 물론 여기서의 두 항은 “원천-기계”와 “기관-기계”이다.
하 지만 여기서 두 항이 형성되며 연합된다(“연동” 내지 “연결”)는 말은 시간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를 공간적 의미로, 즉 동일 시간의 전지적 시점에서 앞에 놓인 대상을 조망한다는 뜻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이를 엄밀히 규정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한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생산적 종합, 생산의 생산은 “그리고”, “그 다음에”…라는 연결 형식을 갖고 있 다.”
여기서 언급되는 것은 종합의 첫 번째 형식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그리고”에서 멈추지 않고 곧바로 “그 다음에”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리 고’,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식으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이 표현은 ‘그리고’가 함축할 수도 있는 등질적 공간에서의 병렬이란 맥락을 배제하고 시간 순서에 따른 진행을 부각하려는 의도에서 등장한 것이다.
즉, ‘그리 고’가 시간과 공간 두 층위(先後와 前後左右)에서 해석될 여지가 있다면,‘그 다음에’는 일차적으로 시간적 맥락에서의 해석만을 허용하는 개념 한정의 기능을 수행한다.
여기서 우리는 ‘연동’ 내지 ‘연결’의 의미가 더 분명해지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바로 시간을 따라 이항관계로 뻗어 가며
생성하는 작용을 가리킨다.66) 들뢰즈는 이 과정을 뒤에서 더 자세 히 서술한다.
“기계는 흐름을 생산한다고 상정된 다른 기계에 연결되는 한에서만 흐름의 절단을 생산한다. 그리고 물론 이 다른 기계도
현실적으로는 그 나름 절단이다.
하지만 무 한한 연속된 흐름을 관념적으로 ― 말하자면 상대적으로 ― 생산하는 제3의 기계와 관련해서만, 이 다른 기계는
절단이다.
가령 항문-기계와 장-기계, 장-기계와 위-기 계, 위-기계와 입-기계, 입-기계와 가축 떼의 흐름(“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
다음 에…”). 요컨대, 모든 기계는 자신이 연결되는 기계와 관련해서는 흐름의 절단이지 만, 자신에 연결되는 기계와 관련
해서는 흐름 자체 또는 흐름의 생산이다.
이런 것이 생산의 생산의 법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횡단적 내지 초한적(超限的) 연결들의 극한에서, 부분대상과 연속된 흐름, 절단과 연결은 하나로 합쳐진다
― 도처에 욕망 이 샘솟는 흐름-절단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바로 욕망의 생산성이요, 생산물에 생 산하기를 접붙이는 일을
한다.”(AO 44)
들뢰즈는 여기서 “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 다음에…”라고 표현함으로써 연결 종합 내지 생산의 생산이 갖는 시간성을
거듭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항관계의 두 항은 그 두 항의 생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두 항의 생성은 또 다른 제3항의 생성으로 필연적으로 뻗어 나간다.
따라서 “원천-기계”와 “기관-기계”의 상대성은, 이 “원천-기계”가 하나 의 “기관-기계”로서 기능하면서 다른 “원천-기계”를 생산하는 과정의 한 단면을 가리킬 뿐이다. 위의 인용에서 들뢰즈가 언급한 사례가 이 점을
66) 한편 이런 용법은 ordo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불어 ordre(질서, 순서)의 어원인 라틴어 ordo는 '베틀에
늘어서 있는 실들'을 뜻하며, '실로 (천을) 짜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일차적으로 ordo는 공간적 질서보다 시간 적 순서와 관련된다.
우리는 스피노자(가령 Spinoza E II P7, E III P2S)의 해석에 서도 이런 이해 방식이 유용하리라 본다.
잘 보여준다. “가령 항문-기계와 장-기계, 장-기계와 위-기계, 위-기계와 입-기계, 입-기계와 가축 떼의 흐름(“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 다음 에……”).” 장-기계는 항문-기계의 절단 작용을 통해 원천-기계(흐름)로 생성하고 이와 동시에 항문
-기계는 기관-기계(부분대상)로 생성한다.
그러나 이번에 장-기계는 위-기계라는 제3항과의 관계에서는 기관-기계로 생성하면서 위-기계는 원천-기계로 생성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계속 된다.
‘원천-기계’와 ‘기관-기계’의 짝의 생성 끝이 없다. 그것은 뒤에서 다시 지적하겠지만, 사방으로 그물처럼 펼쳐질 수 있다.
2. 채취-절단과 흐름
이제 생산의 첫 번째 종합인 연결 종합 또는 생산의 생산의 종합이 수 행하는 기계 작용인 “채취-절단”에 대해 살피기로
하자.
욕망 기계는 앞 서도 보았듯이 “절단들의 체계”이다. 앞의 인용에도 언급되어 있기는 하 지만, 자세한 설명이 등장하는
안티 오이디푸스1장 5절의 첫 대목을 참고하기로 하자.
“모든 기계는 이 기계가 자르는 연속된 물질적 흐름(휠레̇ ̇)과 관련을 맺고 있다.
모든 기계는 햄을 절단하는 기계처럼 기능한다.
즉, 절단은 연합적 흐름에서 채취를 수행한다.
가령 항문과 이것이 절단하는 똥의 흐름. […] 실제로 휠레란 관념 안에 물질이 소유하고 있는 순수한 연속성을 가리킨다.
졸랭(Robert Jaulin)은 통과의례에서 사용되는 경단과 가루를 묘사하면서, 그것들은 […] 우주 끝까지 펼쳐 있는 유일무이한 가루에서 채취된 것의 집합으로서 매년 생산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절단은 연속성에 대 립하기는커녕 연속성의 조건을 이루며, 그것이 절단하는 것을 관념적 연속성으로서 내포 하거나 정의한다. 이는, 우리가 앞서 보았듯, 모든 기계는 기계의 기계이기 때문이다.”(AO 43-4)
“채취”는 광산에서 금을 캐내듯 선별하고 뽑아내고 골라내는 기능을 가 리킨다.
그런데 그것은 “연속된 물질적 흐름” 내지 “연합적 흐름”인 “휠레(hyle)”와 관련을 맺고 있다.
본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질료”를 의미하 는 휠레는, 들뢰즈에게서 “관념 안에 물질이 소유하고 있는 순수한 연속 성”으로 재규정되고 있다.
들뢰즈가 휠레라는 개념을 차용한 까닭은 플 라톤-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한 국면을 재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거칠게 말하면, 우주는 무규정의 측면( apeiron )과 규정( peras )의 측면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특정한 규정을 받는 영역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은, 그 규정의 관점에서는 무규정적인 채로 머문다.
플라톤에서 규 정의 측면은 ‘형상( eidos , idea )’이라고 이야기되는데, 그것은 논리적 차원 에서는 ‘어떤 것의 어떤 것임
그 자체’를 의미하며 현실적 차원에서는 그 어원이 가리키듯이 ‘본 것’, 즉 ‘눈이 도려내어 경계를 그어 지칭하는 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침대 그 자체는 침대가 아닌 다른 모든 무규정성과의 구별과 더불어서만 지칭될 수 있다.
여기서의 무규정성이 바로 “휠레(질 료)”이다.
말하자면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전통에서 형상과 질료는 쌍 을 이루는 형태로만 성립하는 개념인 것이다.
들뢰즈가 절단이 연속성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속성을 내포하거나 정의한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형상”과 “질료”를 “채취-절단”과 “연속된 물질적 흐름”이라는 용어로 바꾸고 있다.
“채취-절단”의 플라톤 적 유래는 그가 이 개념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잘 드러난다.
“물론 각각의 기관-기계는 자기 고유의 흐름에 따라, 이 기관-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에 따라 전 세계를 해석한다.
가령 눈은 모든 것을, 즉 말하기, 듣기, 똥 싸기, 씹하기 등을 보기의 견지에서 해석한다.
하지만 하나의 횡단선 속에서, 어떤 다른 기 계와 늘 하나의 연결이 설립된다.
이 횡단선 속에서, 저 처음 기계는 다른 기계의 흐름을 절단하거나, 다른 기계에 의해 자신의 흐름이 절단되는 것을
“본다”.”(AO 12)
앞에서 “휠레”를 통해 “연속된 물질적 흐름”을 설명한 것은 아리스토텔 레스에 대한 오마주이며, 여기서 눈과 봄의 사례를
통해 “채취-절단”을 설명하는 것은 명백히 플라톤에 대한 오마주이다.67)
이 문장에서는 눈이 중요한 사례인데, 눈은 우주의 모든 것을, 즉 무규정적 흐름을 ‘보기’의 견지에서 해석한다.
‘보기’라는 절단을 수행하는 기계가 바로 눈인 것이다.
눈에 따르면, 모든 것은 시각의 견지에서만 존재한다.
그렇다고 모든 존재자가 시각적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눈은 시각과 관련해 서만 자신의 기능(채취-절단)을 수행한다.
각각의 기계가 절단하는 방식은 바로 눈이 행하는 이런식이다.
여기서 하나 더 살펴야 할 것이 “연속성”이라는 규정이다.
왜 흐름은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는가?
그 까닭은 규정 바깥에 남아 있는 것은 원리상 구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에서 “보기”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 즉 말하기, 듣기, 똥 싸기, 씹하기 등”은 구별되지 않으며 그런 점에서 연속적이다.
또는 들뢰즈 자신의 용어로 말하면, 이 다른 모든 것은 “횡단”된다.
여기서 횡단은 바로 절단이 기존의 존재자들 을 질료로 환원하면서 규정을 박탈한다는 뜻이다.
횡단이란 규정의 해체, 규정에서의 이탈이다. 말하자면 기존의 대상들이 규정성을 잃게 되 어 새로운 규정을 부여받을 수
있는 상태로 바뀌는 과정이 바로 횡단이다.
횡단이란 기존의 규정들이 규정들로서 존재할 때의 구별들을 가로지른다는 뜻이다.
기존의 규정들은 적어도 횡단의 운동 속에서는 해체된다.
이는 마치 일정한 코드에 따라 결합되어 있던 어떤 사물의 화학 원소들이 분해되어 새로운 결합을 이룰 준비가 된 단계라고 보아도 좋다.
규정성 이 해체되고(이를 들뢰즈는 “이탈-절단”(coupure-détachement)이라 부른 다), 무규정성으로 바뀌었다가(이것이
‘흐름’이다), 다시 규정성을 부여받 는다(이것이 ‘부분대상’이다).
이 과정의 되풀이가 생산의 경과라는 것이다.
우주는 이런 내재적 원리에 따라 생성한다.
나중에 보겠지만, 횡단 또는 이탈-절단은 뒤에서 보게 될 기관 없는 몸의 기능과 더불어 실행된 다.
우리가 앞에서도 보았던 “횡단적 내지 초한적(超限的) 연결들”(AO
67) 들뢰즈가 형상-질료 관계를 채택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것은 시몽동의 입장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시몽동(Gilbert
Simondon)은 질료가 단순한 수동성으로 이해 될 수 없으며, 그 자체 수용적 능동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들뢰즈가 형상-질료 관계를 넘어선 이유가 그것이다.
44)이라는 표현에서 언급되는 “횡단적(transversale)”과 “초한적(transfinie)” (즉 ‘한계 내지 규정성( finis ; peras )을 가로
지르다’)이라는 특성이 언급된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횡단”이라는 개념은 바로 절단과 상관적인 흐름의 연속성 덕분에 작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꾸로 이해하면, 들뢰즈가 말하는 “흐름(flux)”이 헤라클레이토스 식의 흐름과 구별된다는 점도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흐름”은 단지 “절단”과의 상관성 속에서만, 어떤 점에서는 절단에 사후적으로, 내지 절단과 동시적으로, 정립되는 그런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주는 흐름이다”라고 말한다 해도 이는 세계에 구별되는 현상이 있다는 경험적 사실과 아무런 모순도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흐름”과 “절단”의 변전 속에서 들뢰즈의 생산 개념이 더 분명해지는데, 생산이란 “무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o)”와 같은 뜻이 전혀 아니라 ‘이미 있는 것들의 재활용 내지 리모델링’이라는 뜻인 것이다.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살펴볼 점은 “채취-절단”이 하나의 단일한 계 열을 따라서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주 사방에 “채취-절단”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앞서 보았던 구절을 다시 보자.
“흐름을 생산하는 어떤 기계와 이 기계에 연결되는, 절단을, 흐름의 채취를 수행하 는 또 다른 기계가 늘 있으니 말이다
(젖가슴 ― 입).
그리고 저 처음 기계는 그 나름 으로는 절단 내지 채취 같은 작동을 통해 관계를 맺는 또 다른 기계에 연결되기 때 문에,
이항 계열은 모든 방향에서 선형(線形)이다.”(AO 11)
이 대목에서는, 절단하거나 흐름을 채취하는 또 다른 기계는 “늘” 있고, 또 “그 나름으로” 절단 내지 채취 같은 작동을 하며, “모든 방향에서” 선형 계열을 이룬다고 언급되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의 기계가 있을 때 그 것은 행해지는 채취-절단에 따라 다른 기계들에 모든 방향으로 동시에 연 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항 계열이 동시에 여럿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이항 계열을 밧줄과 비슷한 어떤 것이 아니라 그물 과 비슷한 어떤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기관-기계가 있다 할 때, 그것은 모든 방향으로 다른 기계들에 연결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니 고 있다.
가령 하나의 “대상”이 있다 할 때, 그것은 시각의 견지에서 절단 되는 동시에 청각의 견지에서, 그리고 여타 다른 견지에서도 절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단은 배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점이 “분리(disjonction)”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는 점은 B에서 보게 될 것이다.
나아가 이 점은 곧 이어 “부분대상” 개념을 살필 때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한편 방금 본 구절에서 “계열(série)”68)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안 티 오이디푸스에서 ‘계열’은 공간에서의 연쇄(좌우
또는 앞뒤)라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연쇄(먼저 -나중)로 이해해야 한다.
계열은 공간에서 좌우나 앞뒤로 뻗은 것이 아니어서 한눈에 조망할 수 없다.
계열은 철저히 시간상의 선후 관계 속에서 생성한다. 말하자면 ‘먼저’가 ‘나중’으로 전면적으로 도약한다.
‘먼저’는 그 존재의 힘 전체를 ‘나중’으로 건네며, 이 ‘나중’은 ‘그 다음’으로 자신을 건네고,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흐른다.
경과라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 시간성에 있다.
우리가 연결을 이해할 때 철두철미 시간의 관점에서 이해 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베르그손의 존재론이 갖고 있는 이러한 측면을 3장 A에서 살핀 바 있다.
뒤에 언급될 ‘생산하기와 생산물 의 동일성’ 또는 ‘생산물과 생산하기의 동일성’ 역시도 바로 이 맥락에서 만 이해될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할 때만 “생산된 대상은 자신의 여기를 새로운 생산하기로 가져간다”(AO 13)는 말이 성립된다.
요컨대, 안티 오 이디푸스에서 연동=연결=계열=경과는 모두 시간의 열림 및 전개와 관련된 개념이다.
그리고 흐름과 절단의 내재적 원리가 바로 욕망임은 앞에서도 본 바 있다.
3. 부분대상
68) ‘계열(série)’은 라틴어 serere(잇다, 묶다, 합치다)에서 온 명사 series(열, 연쇄)에 서 유래했다.
이제 들뢰즈에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개념의 하나인 “부분대상”에 대해 보기로 하자.
우선 그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대목부터 보겠다.
“연속된 흐름들과 본질적으로 파편적인 동시에 파편화된 부분대상들의 연동을 욕 망은 끊임없이 실행한다.
욕망은 흐르게 하고 흐르고 절단한다. […]
이 흐름들은 부분대상들에 의해 생산되며, 다른 흐름들을 생산하는 또 다른 부분대상들에 의해 부단히 절단되고, 또 다른
부분대상들에 의해 재절단된다.
모든 “대상”은 흐름의 연 속성을 전제하며, 모든 흐름은 대상의 파편화를 전제한다.”(AO 11-12)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 “부분대상” 개념은 그 직전까지 “기관-기계”라는 말로 표현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각각의 기관-기계는 그 나름으로 원천-기계들에 연결되기 때문에(그물의 한 그물코는 한편으로는 기관기계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원천-기계이다), 기관-기계는 “기계들의 기계 들”이라는 뜻에서 기계 그 자신이다.
나아가 기계는 들뢰즈에 따르면 “욕망 기계”와 동의어이므로, “부분대상”은 “욕망 기계”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들뢰즈는 “부분대상들로서의 욕망 기계들(les machines désirantes en tant qu’objets partiels)”(AO 368)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에서 모든 “대상”은 “부분대상”이다. 위 구절에도 언급되 듯이, 부분대상은 흐름의 연속성을 전제하며, 또
역으로 모든 흐름은 대상의 파편화 내지 규정 해체를 전제한다.
이런 점에서 부분대상과 흐름은 존재에 있어서는 다른 것이 아닌, 하지만 그 잠정적 규정에 있어서는 상관적으로 구별되는, 하나의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직 기계의 기능인 절단만이 부분대상과 흐름의 구별을 생산할 뿐이다.
부분대상은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이 발견한 것인데, 클라인은 이를 전체(엄마)에서 떨어져 나온 것(젖가슴)으로
이해해서 전체의 회복 을 요구한다.
클라인에 대해 들뢰즈는 부분대상의 발견에 대한 칭찬과 그것을 전체에 종속된 이차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에 대한
비판을 안티 오이디푸스곳곳에서 되풀이한다(AO 52-4 등).
들뢰즈는 클라인이발견한 “부분대상”의 의미를 완전히 개정하여 일차적인 것으로, 존재론 적인 것으로 만든다.
“부분대상들은 무의식의 분자적 기능들이다̇ ̇ ̇ ̇ ̇ ̇ ̇ ̇ ̇ ̇ ̇ ̇ ̇ ̇ ̇ ̇ ̇ ̇.”(AO 387) 그런데 여기서 들뢰즈는 “부분”이라는 말의 의미도 약간 수정한다.
그것은 외연적 부분이라는 뜻에서 “부분적(partiel)”이기보다는 강도적 차 원을 채우고 있다는 뜻에서 “편파적(partial)”이라는 말에 가깝다는 것이 다.
“부분대상들은 외연적 부분들이라는 의미에서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 이 다양한 정도로 공간을 항상 채우고 있는 강도들(물질의 정도들로서의 눈, 입, 항 문)로서 “편파적”이다.”(AO 368)
바로 이런 특성이야말로 들뢰즈가 누누이 강조하게 될 무의식의 분자적 요 소로서의 부분대상의 종합들을 설명해 준다
(AO 368).
이제 들뢰즈가 착상하는 부분대상에 대해 조금 더 보자.
들뢰즈는 안 티 오이디푸스의 4장 4절에서 부분대상들의 개념과 작동에 대해 자세 히 설명한다.
“모든 부분대상이 하나의 흐름을 방출한다는 것이 참이라면, 이 흐름도 마찬가지로 다른 부분대상에 연합되어 있으며,
이 부분대상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 다양한 잠세적(potentiel) 현전의 마당을 정의한다(똥의 흐름에 대한 항문의 다양체).
부분대상들 의 연결의 종합들은 간접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부분대상은, 마당 안에서의 그 현 전의 각 점에서, 다른 부분대상이 상대적으로 방출하거나 생산하는
하나의 흐름을 언제나 절단하며, 또한 이 다른 부분대상 자체도 또 다른 부분대상들이 절단하는 하나의 흐름을 방출할
태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머리가 둘인 흐름들과도 같아 서, 이 흐름들을 통해 우리가 분열-흐름 내지 흐름-절단이라는 개념으로 고찰하려
했던 그런 생산적 연결 전체가 행해진다.
그래서 흐르게 하고 절단한다는 무의식의 참된 활동들은, 수동적 종합이 상이한 두 기능의 상대적 공존과 이전(移轉)을
보증 하는 한에서, 이 수동적 종합 자체에 있다.
이제 두 부분대상에 연합된 각 흐름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서로 겹쳐 있다고 해보자.
이 흐름들의 생산은 이 흐름들을 방출 하는 대상들 x 및 y와 관련해서는 구별되는 채로 있지만, 이 흐름들의 현전의
마당은이 흐름들을 서식시키고 절단하는 대상들 a 및 b와 관련해서는 구별되지 않으며, 그래서 부분 a와 부분 b는 이
점에서 분별될 수 없게 된다(가령 입과 항문, 거식증의 항문-입). 그리고 부분 a와 부분 b는 혼합 영역에서만 분별될 수
없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이 영역에서는 기능이 바뀌어 버렸기에 부분 a와 부분 b는 두 흐름이 더 이상 겹치지 않는
데서 한층 더 서로 배타적으로 구별될 수 없다고 언제든지 상정해 볼 수 있기 때 문이다.
이렇게 되면 a와 b가 포괄적 분리의 역설적 관계 속에 있는 하나의 새로운 수동적 종합 앞에 있게 되는 것이다.
끝으로, 흐름들의 겹침의 가능성이 아니라, 흐 름들을 방출하는 대상들의 교체의 가능성이 남는다.
현전의 각 마당의 가장자리에서 는 간섭무늬들이 발견되는데, 이 무늬들은 다른 흐름 속에 있는 한 흐름의 여분을 증언
하며, 한 흐름에서 다른 흐름으로의 이행 내지 느껴지는 생성을 이끌어주는 잔여 적 결합 종합들을 형성한다.
2, 3, n개의 기관들로의 교체.”(AO 388)
이미 앞에서 하나의 기계는 모든 방향들로 동시에 연결될 수 있다고 했 을 때, 우리는 이 구절들에 언급된 부분대상의 특성을 거의다 설명했다.
요컨대 부분대상들은 절단이 행해지는 방향에 따라, 또는 절단이 생산하 는 기능에 따라, 동시에 2, 3, n개의 기관들로 교체될 수 있는 상태에 있 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새롭게 추가되는 특성은 “부분대상들의 연결적 종합들”의 “간접적” 또는 “수동적” 성격이다.
이 “간접적” 또는 “수동적” 성격은 부분대상이 그 스스로 능동적으로 절단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절단이 부분대상들과 흐름들을 생산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흐르게 하고 절단하는 무의식의 참된 활동들”(AO 388) 또는 “흐르게 하고 흐르고 절단하는 욕망”의 활동(AO 11)의 결과로서 부분대상들이 생산되 기 때문에, 지니게 된 성격이다.
이런 ‘간접적’ ‘수동적’ 측면에 대해서는 1장 4절에서 살펴 본 바 있다.
들뢰즈는 부분대상과 흐름의 관계 및 그 존재론적 동일성에 이어 “생산물(produit)”과 “생산하기(produire)’의 관계 및 그
동일성에 대한 논의로 서술을 이어간다.
“따라서 연결 종합의 연동, 즉 ‘부분대상-흐름’은 ‘생산물-생산하기’라는 또 다른 형식도 갖고 있다. 언제나 생산물에서 생산하기가 가지를 뻗으며, 바로 이런 까닭에, 모든 기계가 기계의 기계이듯, 욕망적 생산은 생산의 생산이다.”(AO 12)
이 구절의 예시로서 들뢰즈는 “분열증적 탁자”에 대한 앙리 미쇼의 탁월 한 묘사를 제시한다(AO 12-3).
들뢰즈는 일단 생산물이 있으면, 이는 곧 생산하기로 뻗어가기 때문에, ‘생산하기→또 생산하기→또 생산하기 →…’로 이어지게 된다는 점에서 “욕망적 생산”은 “생산의 생산”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서술은 ‘왜’에 대한 해명이라기보다 ‘어떻게’에 대한 해명이다.
들뢰즈가 여기서 수행하는 작업은 그의 존재론적 탐구의 결과 보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부분대상-흐름’은 ‘생산물-생산하기’라는 형식도 갖는다.
하지만 이를 단순 대응시켜 ‘부분대상=생산물’, ‘흐름=생산하기’ 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부분대상-흐름’이라는
관계 자신이 ‘생산하기 또는 절단’을 통해 생산된 ‘생산물’이라고 봐야 한다.
언제나 생산물에서 생산하기가 가지를 뻗는다는 말은 생산물이 일단 있으면 그것은 반드시(‘언제나’) 생산하기로 나아간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생산물이 일차적이라는 뜻 은 아닌데, 이 관계는 순환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생산물은 반드시 생산 하기로 가지를 뻗는다.
이것이 ‘욕망적 생산’의 의미이며 ‘생산의 생산’의 의미이다.
거꾸로 보자면, 생산하기의 재료는 기존의 생산물이며, 생산 하기는 생산물로부터 반드시 생겨난다.
이 필연적 운동이 우주의 운행을 지배한다.
‘생산하기’와 ‘생산물’의 관계는, 들뢰즈가 베르그손의 지속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활용한 예시를 빌리자면(B 78), 스피노자의 ‘능산 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동일성으로서의 ‘자연’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도 있겠다.
여기서 들뢰즈의 경험론적 측면이 드러난다.
어떻게 무에서 존재가 생겨났는지, 왜 하필 지금의 세계가 만들어졌는지 그 섭리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세계는
일단 존재하며 따라서 마땅히 그 전단계의 세계도 존재한다는 식인 것이다.
“분열자는 보편적 생산자다. 여기에서 생산하기와 그 생산물을 구별할 여지는 없다. 적어도 생산된 대상은 자신의
여기̇ ̇를 새로운 생산하기로 가져가기 때문이다.”(AO 13)
생산된 대상은 자신의 ‘여기’ 즉 지금 상태를 새로운 생산하기로 가져간 다.
그 추동력이 욕망이다.
이 필연적 운동이 보편적=우주적(universel) 생산의 운동이다.
이 필연적 운동, 니체가 “영원회귀”라 부른 운동은 영 원한 생성의 운동으로서, 이렇게 묘사된다.
“생산하기를 항상 생산하기, 생산물에 생산하기를 접붙이기라는 규칙은, 욕망 기계들의, 또는 생산의 생 산이라는 본원적
생산의 특성이다.”(AO 13)
4. 기관 없는 몸
그런데 생산의 생산은 하나의 다른 계기를 내포하는데, 그것이 바로 “기관 없는 몸(corps sans organes)”의 생산이라는
계기이다.
“‘생산하기’, ‘생산물’, ‘생산물과 생산하기의 동일성’…. 바로 이 동일성이 선형 계열 속에서 제3항을, 즉 분화되지 않은
거대한 대상을 형성한다. 모든 것이 한순간 정지 하고, 모든 것이 응고된다(그 다음에 모든 것이 재개된다)(Tout s’arrête
un moment, tout se fige (puis tout va recommencer)). […]
경과가 한창일 때, 제3의 시간으로서, “불 가사의하고 완전히 뻣뻣한 멈춤”.”(AO 13-4)69)
여기서 생성되는 제3항이 바로 기관 없는 몸이다. 선형 계열 속에서 제3 항을 형성한다는 것은, 이 제3항 즉 기관 없는 몸이 생산의 생산의 선형 계열 와중이 아닌 그 곁 또는 바깥에서 생산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들뢰즈가 무수히 강조하듯이 기관 없는 몸은 생산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미리 있는 것이 아니다.
기관 없는 몸은 선행하지 않으며 오히려 욕망
69) 이 대목은 뒤에 나올 “무수한 준(準)안정적 멈춤 상태들”(AO 26)과도 연관된다.
기계의 생산물이다.
일차적인 것은 욕망 기계이다. 곳곳에서 ‘비생산적 인 것, 불임인 것, 자연 발생한 것, 소비 불가능한 것’ 따위의 표현으로
지칭하는 바가 바로 이런 특징이다.
“기관 없는 몸은 비생산적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연결 종합 내의 자기 장소와 자기 시간에 생산하기와 생산물의 동일성으로서 생산된다. […] 그것은 비생산적이어서, 그것이 생산되는 그곳에, 이항-선형 계열의 제3의 시간에 실존한다.
그것은 생산 속 에 끝없이 재투입된다.”(AO 14)
또한
“욕망적 생산은 이항-선형 체계를 형성한다. 충만한 몸은 그 계열에서 제3항으로 도입되지만, 그 계열의 2, 1, 2, 1…이라는 성격을 부수지 않는다. […]
기관 없는 충 만한 몸은 반 - 생산 으로서 생산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부모가 있는 생산을 함축하 는 모든 삼각형화의 시도를 거부하기 위해서만 반-생산으로서 개입한다.
기관 없는 충만한 몸은 그것의 자기-생산, 자신에 의한 그것의 발생을 증언하는데, 어떻게 그것 이 부모에 의해 생산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AO 21)
기관 없는 몸은 생산의 경과 속에서 정지와 응고로 등장하는 한 순간 상태이다.
물론 그 다음에 모든 것이 재개되지만 말이다. 나중에 이 재개를 낳 는 것은 “기적 기계(machine miraculante)”70)라고 불리는데, 왜냐하면 이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작동이기 때문이다. ‘생산의 생산’이 멈추는 한 순간, 이는 마치 스냅사진과도
같다.
우리는 지속과 동시성에서의 베 르그손의 다음 비유를 참고할 수도 있으리라.
“우주의 잇따르는 상태들은 각각 하나의 순간적 이미지일 것인데, 이 이미지는 면 전 체를 점유하면서 우주를 만들어 내는 하나같이 평평한 대상들 전체를 포함한다. 따
70) 이 명칭은 슈레버에서 유래했다.
다니엘 파울 슈레버,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김남시 옮김, 자음과모음, 2010.
라서 그 면은 우주의 영화가 펼쳐질 스크린과 같을 것이다.
여기에는 스크린 외부에 영사기가 없고, 외부에서 투사되는 영상도 없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즉 이미지는 스크린 위에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다. […]
영화는 어디서 자신이 머물 곳을 발견할 것인가?
추측컨대 홀로 스크린을 덮고 있는 각각의 이미지는 아마도 무한한 공간 전체, 즉 우주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울 것이다.
따라서 이 이미지들은 잇따 라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이미지들은 한꺼번에 주어질 수 없을 것이다.”(Bergson DS 195-6)
각 순간의 이미지, 각각의 스냅사진은 우주의 멈춤 상태를 표현한다.
그러나 이 멈춤은 영원한 멈춤이 아니라, 곧이어(et puis) 다시 시작하기 전까지의 틈으로서의 순간이 드러나는 멈춤이다.
모든 것이 정지하고 새로 시작하는 ‘사이 시간’. 여기서 “한순간(un moment, einen Augenblick)”은 니체의 영원회귀의 시간과 관련된다.71)
들뢰즈는 이를 아이온(aion)의 시간, 제3의 시간, 도래의 시간과 연관시킨다.
존재의 운행에서, 새로운 것이 어떻게 탄생하며 창조될 수 있는가?
그러려면 존재의 내부에 틈이 본래부터 있어야 한다.
바로 이 틈이 순간이 며, 순간은 과거와 단절하고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시간 계기이다.
들뢰즈는 이를 기관 없는 몸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적극 활용하 고 있는 것이다.
기관 없는 몸은 기존의 규정이 박탈되고 해체되어 규정을 상실하게 된 바로 그 순간 상태이다.
물론 이내 새 규정을 부여받는 다음 순간 상태로 이행하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기관 없는 몸은 욕망 기계들의 생산 작용의 결과일 뿐 선행하는 그 무엇이 결코 아니며, 변신(Verwandlung) 내지
변모(metamorphosis)의 계기이다.
기존 것들이 무 화되고 새로운 것들이 탄생하는 시간. 죽음의 시간. 한순간. 시간의 흐름 에 틈이 있다.
우연이 개입하는 계기. “시간은 경첩에서 풀려나 있다(Time is out of joint).”(DR 119; CC 40)72) 시간은 마디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질주
71)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3권의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해」의 유 명한 구절 참조.
72) 햄릿 1막 5장에 나오는 이 표현을 들뢰즈는 불어 번역자 Bonnefoy에 따라 “le 한다.
“운동하고 변화하는 모든 것은 시간 안에 있지만, 시간 그 자체는 영원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며 변하지도 않고 운동하지도 않는다.
시간은 변화하고 운동하는 모든 것의 형식이다. 하지만 시간은 움직이지 않는, 불변하는 형식이다.”(CC 42)
그 풀려난 시간이 바로 기관 없는 몸이다. 틈이 있어야 한다. 변화의 여지가, 몸부림의 여지가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아닌 다른 것이. 꽉 짜이고 온통 틀어 막힌 현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욕망 기계들은 우리를 하나의 유기체로 만든다. 하지만 이 생산 한가운데서, 이 생산의 생산 자체 안에서, 몸은 그렇게 조직화된 것을, 달리 조직화되지 않는 것을, 또는 아무 조직화도 없이 있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한다.
기관 없는 충만한 몸은 비 생산적인 것, 불임인 것, 자연 발생한 것, 소비 불가능한 것이다.
앙토냉 아르토는, 그것이 형태도 모습도 없는 채로 있던 그곳에서, 그것을 발견했다.”(AO 14)
여기서 “괴로워한다”는 의인적 표현에도 인간주의적인 것은 전혀 없다.
‘괴로워한다’는 표현은 불어로 souffrir인데 그 1차적인 뜻은 ‘겪다’이다.73)
심리적 의미의 ‘괴로움, 고통’은 물리적 의미의 ‘겪음, 지나감, 수동’에 기 인하며, 감정적 차원의 ‘열정’ 역시도 저 물리적
의미의 자장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 말이 일상적으로 담고 있는 부정적 의미는, 인간이 자연 속에서 처해 있는 조건인
‘겪음’에서, 즉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본원적 ‘수동temps est hors de ses gonds”라고 즉 영어로 직역하면 “time is off its hinges” (시간은 돌쩌귀에서 빠져 있다)로 이해하며 서술한다.
이 구절은 칸트의 비판철학영어판(1984) 서문으로 쓴 「칸트 철학을 요약하는 네 개의 시적 공식」의 개 정 증보판에서 왔다. 들뢰즈는 이 표현을 칸트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시간에 대 한 혁명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다. 73) 라틴어 sufferre(이는 sub[아래]와 ferre[나르다, 짊어지다]의 결합이다)에서 유래 했으며, 영어의 suffer, 독어의 leiden에 해당한다. 인데, 모두 그리스어 동사 pathein의 의미 계열과 관련된다. 또 이는 영어 passion과 불어 passer, pâtir의 어원인 라틴어 patī와 관련되며, 불어나 영어의 passion도 그리스어 pathos(← pathein)의 라틴어 번역인 passio에서 유래했다.
여기에 해당되는 독일어 명사는 Leidenschaft이다.
성’에서 유래한다.
스피노자는 이 점을 잘 알면서, 어떻게 수동성을 능동성으로 바꿀 수 있는가의 문제에 천착하여 그의 윤리학의 라이트모티브 로 삼은 바 있다. 나
아가 니체 역시 이 겪음을 어떻게 긍정할 것인가에 대해 탐구했고 그 결과로서 제시된 것이 ‘운명애(amor fati)’, 즉 일어난
일 에 대한 긍정이다. 이에 대한 맑스의 견해는 4장 C의 ‘주체’의 탄생을 언 급하는 대목에서 자세히 보도록 하겠다.
우주 운행의 극한, 욕망 기계들 의 생산의 극한을 이루는 바로 그것이 기관 없는 몸이다.
5. 죽음 본능
이제 이 지점에서 저 유명한 “죽음 본능”에 대한 해석이 등장한다. 이 해석은 나중에 사회 속에서의 죽음 본능의 작동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 를 지니기에 잘 이해해야 한다.
i) “죽음 본능, 그것이 그 [기관 없는 충만한 몸의] 이름이며, 죽음은 모델이 없지 않다. 사실이지, 욕망이 이것 즉 죽음 역시도 욕망하는 까닭은 죽음이라는 충만한 몸이 욕망의 부동의 모터여서인데, 이는 욕망이 삶을 욕망하는 까닭이 삶의 기관들이 작̇ 동하는 기계̇ ̇ ̇ ̇ ̇( working machine )여서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이 어째서 함께 어우러 져 작동하는지 묻지 말라. 이 물음조차도 추상의 산물이다.”(AO 14)
유사한 내용은 책의 말미에서 한 번 더 되풀이된다.
ii) “기관 없는 몸은 죽음의 모델이다. 공포물 저자들이 잘 이해했듯이, 긴장병의 모델 노릇을 하는 것이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자신의 모델을 주는 것이 바로 긴장병적 분열증이다. 강도 0. 죽음의 모델이 나타나는 것은, 기관 없는 몸이 기관들을 밀쳐 내고 떼어낼 때, ― 입도 없고 혀도 없고 이도 없고…, 그래서 자기 훼손에까지, 자 살에까지 이를 때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기관 없는 몸과 부분대상들인 한에서의 기관 들 간에는 현실적 대립이 없다. 유일한 현실적 대립은 둘 공통의 적인 그램분자적 유 기체와의 대립이다.”(AO 393)
부동의 모터는 철학에서 전통적으로 최초의 원인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그럼 죽음이 왜 욕망의 부동의 모터인가? 왜 욕망은 죽음 본능74)을 내포 하는가? 이는 생성이 계속되려면 죽음이 필연적 계기로 개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삶의 욕망들에 질적으로 대립하게 될 죽음의 욕망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부조리하 다. 죽음은 욕망되지 않는다.
기관 없는 몸이나 부동의 모터의 자격을 지닌 욕망하는 죽음이 있을 뿐이며, 일하는 기관들의 자격을 지닌 욕망하는 삶
또한 있다.
거기에는 두 욕망이 있지 않으며, 기계 자체의 분산 속에, 욕망 기계의 두 부품들, 두 종류의 부품들이 있다. […]
죽음의 경험은 무의식의 가장 일상적인 일이다. 정확히 그 까닭은, 죽음의 경험이 삶 속에서, 삶을 위해, 모든 이행 내지
모든 생성 속에서, 이행과 생성으 로서의 모든 강도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각 강도는 강도 0에서 출발하여 무한한 등급들 아래서 증대하거나 감소하는 것으로서 한순간 생산되는데, 각 강도의 고유
함은 자기 안에 바로 이 강도 0을 투자하는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에너지 변환을 내포하며 셋째 종류의 종합인 결합 종합들을 형성하는 그런 상태들, 감 각들, 감정들을 어떻게 끌어당김과 밀쳐냄의 관계들(rapports, 比들)이 생산하는지 우리는 밝히려 했다. 현실적 주체로서의 무의식은 자신의 순환 온 둘레에 잔여적이고 유목적인 외견상의 주체를 파견했으며, 이 외견상의 주체가 포괄적 분리들에 대응하 는 모든
생성들을 지나간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 외견상 주체는 욕망 기계의 마 지막 부품, 인접 부품이다. 망상들과 환각들을 부양하는 것은 바로 이 강렬한 생성 들과
느낌들, 이 강도 감정들이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이것들은 물질 가장 가까 이에 있으며 물질의 0도를 자기 안에 투자한다. 이것들이 죽음의 무의식적 경험을 이끌어가는 것은, 죽음이 모든 느낌 속에서 다시 느껴지는(ressenti) 것인 한에서, 즉 다른 성-되기, 신-되기, 인종-되기 등 모든 생성 속에서, 기관 없는 몸 위에서 강도 의 지대들을 형성하면서, 도래하기를 그치지 않고 도래하기를 끝내지 않는 것̇ ̇ ̇ ̇ ̇ ̇ ̇ ̇ ̇ ̇ ̇ ̇ ̇ ̇ ̇ ̇ ̇ ̇ ̇ ̇ ̇인 한 에서이다. 모든 강도는 자기 고유의 삶 속에 죽음의 경험을 데리고 다니며 감싸고 있다.
74) 들뢰즈는 본능과 제도(1953)라는 편저의 서문에서 “본능”과 “제도”를 각각 만 족의 절차와 관련해서 규정하면서,
만족에 이르는 길이 직접적일 때 본능, 간접 적일 때 제도라 한다(ID 24).
아마 들뢰즈가 라캉과 달리 “죽음 충동”보다 “죽음 본능”이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듯하다.
그리고 필경 모든 강도는 결국은 종식되며, 모든 생성 자체는 죽음-되기이다!”(AO 393-5)
생성은 죽음과 삶의 무의식적 경험이다.
삶(작동하는 기계, 즉 채취-절단 기계)과 죽음(기관 없는 몸)은 “욕망하는 기계의
두 부품들, 두 종류의 부 품들”이다. 그렇기에 “죽음의 경험은 무의식의 가장 일상적인 일”이다.
그 까닭은 “죽음의 경험이, 삶 속에서, 삶을 위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 이다.
우주의 운행은 순간의 단절을 전제한다.
바로 이 우주 차원의 죽음 은 우주의 삶의 동력이다. 왜냐하면 죽음이, 단절이, 끊어냄이 없다면 시작이, 탄생이, 새로움이, 창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생성은 죽음을 그 심장에 품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물음조차도 “추상의 산 물”일 뿐이다.
이는 추상이 아니라, 존재(의 생성)의 초월론적 원리이다. 반면 “죽음의 죽음”은 오히려 “죽음의 경험”을 끝장낸다.
말하자면 더 이상 죽지 않게 되는 것, 더 이상 죽지 않는 것이 바로 존재론적 죽음을 더 이상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은 자아로서 정립된 나와 더불어 일어나 는 일이다.
“ 나 ̇ ( Je )로서 고정된 이 동일한 주체는 실제로 죽으며, 말하자면 결국 죽기를 끝내는데, 왜냐하면 그 주체는 그를 이렇게 나로서 고정하는 마지막 순간의 현실 속에서 온통 강도를 해체하고 그 강도가 감싸는 0으로 데려감으로써 죽는 것을 통해
끝나기 때문 이다.”(AO 395)
자아로서 고정된 주체는 더 이상 죽음의 경험을 살지 않는 대신 실제로 죽으며, 그럼으로써 더 이상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그는 우주의 일부로서 운행하기를 멈추게 되어 버린 것이다.
기관 없는 몸이 죽음이라는 진술은 나중에 훨씬 발전된 형태로 등장하 게 된다.
왜냐하면 죽음은 창조의 계기이기도 하지만 방금 보았듯이 파괴와 소멸의 계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인간적인 것으로 되면 서, 인간주의적이 되면서, 타인의 파괴의 욕망, 자기 소멸의 욕망, 자살의 욕망, 자기 예속의
욕망, 곧 파시즘의 욕망이 될 수 있다.
과정의 느닷없 는 정지.
반-생산. 생산의 멈춤. 따라서 니힐리즘과 파시즘마저도 존재론 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 해명되어야 할 것은 그 변질의 과정이리라. 우 주는 언제나 재활용된다.
존재는 언제나 재활용된다.
바로 이 재활용 (recycle)이 우주의 순환(cycle)의 참된 의미이다.
우주는 매순간 죽는다. 그러나 또 매순간 탄생한다. 우주 생성의 원리는 그러하다.
B. 등록의 생산 또는 분리 종합
우리는 기관 없는 몸이 우연이 개입하는 계기라고 했다.
만약 연속 (continuum)이 전제되면, 중간에 새로움이 개입할 틈이 없어지기에, 처음 (arche)에 끝(telos)이 일방적으로 정해진다.
생성에 단절의 계기가 없다면 목적론적 의미의 필연적 진행만 남게 된다.
기관 없는 몸에서는 인과의 선이 중단되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다.
사실 “기관 없는 몸”이라는 개념은 아르토에서 전유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특징을 갖는가? 바로 기관들의 유기체적 조직의 해체이다.
이와 관련 된 아주 중요한 구절이 안티 오이디푸스의 1장 2절에 등장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른바 원초적 억압이 뜻하는 것은, 일종의 “대항-투자”가 아니 라 기관 없는 몸에 의한 욕망 기계들의 이 밀쳐냄̇ ̇ ̇( répulsion )이다. 그리고 편집증 기계 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욕망 기계들의 기관 없는 몸으로의 불법 침입
작용 및 욕망 기계들을 전반적으로 박해 장치로 느끼는 기관 없는 몸의 밀쳐내는 반작용이다.”(AO 15)
이 대목이 중요한 까닭은, 정신분석의 몇몇 개념을 들뢰즈가 존재론적으로 전유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 등장하는 몇몇 용어 들은 상세한 해설이 필요하다.
‘원초적 억압’, ‘대항-투자’ 개념이 그것인데, 이는 다시 ‘억압’, ‘탄압’, ‘투자’라는 개념에 대한 해명을 수반해야 한다.
또한 이 구절에서는 ‘편집증’에 대한 들뢰즈 고유의 규정이 제시되고 있다. 이런 개념들에 대해 우선 해명하도록 하자.
1. 투자와 대항-투자
들뢰즈가 사용하는 “투자(investissement)”라는 말은 일차적으로는 욕망의 에너지인 리비도75)의 발현 및 그 변형(누멘, 볼룹타스)의 무의식적 과정 전체를 가리킨다.
“우리는 욕망 기계들에게 고유한 에너지를 리비도̇ ̇ ̇라 부른다.”(AO 345)
그런데 우리는 들뢰즈의 관점에서는 투자의 주체와 대상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욕망의 에너지의 발현은 존재론적 무의식의 자기-생산의 순환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욕망과 욕망의 대상은 한 덩어리로서, 실재(le réel, 현실계) 그 자체이다.
“욕망과 그 대상은 한 덩어리, 즉 기계의 기계로서의 기계이다.
욕망은 기계이며, 욕망의 대상 역시 연결된 기계이다. […] 욕망의 대상적 존재란 실재[ 현실계] 그 자체 이다.”(AO 34)
사정이 이렇다 할 때, 투자란 존재 자신의 존재 자신으로의 투자라 할 수 있다.
물론, 들뢰즈는 무의식적 차원의 리비도 투자 말고도, 의식 또 는 전의식적 차원의 이해관계의 투자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후자 는 어디까지나 파생적이며 이차적인 것일 뿐이다.
“투자”라는 말을 가리키기 위해 들뢰즈가 사용하는 불어 investir, investissement은 정신분석과 맑스 두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런데 들 뢰즈는 정신분석을 비판하며 맑스를 따르기 때문에, 우리는 영어 번역자
75) “욕망적 생산의 연결적 “노동””인 리비도(AO 19), “생산 에너지로서의 리비 도”(AO 23) “욕망의 본질”인 리비도(AO 168), “고아인 리비도”(AO 426), “욕망 기 계의 에너지인 리비도”(AO 485).
들이 채택했던 방식(영역본 8쪽 각주)과 유사하게, 이 개념을 맑스적 의미의 “투자”라고 옮겼다.
본래 정신분석에서 investissement은 “투여[집중] (한국어), Besetzung(독일어), cathexis(영어), 備給(일어)” 등으로 옮겨
왔는 데, 이는 “어떤 심리적 에너지가 표상이나 표상군(群), 또는 육체의 일부분 이나 대상 등에 달라붙는 것”(라플랑슈&퐁탈리스 2005: 491)을 뜻한다.
그런데 불어 investtissement, investir(부여하다, 포위하다, (자본을) 투자하다) 의 의미망은 독일어 Besetzung, besetzen
(차지하다, 점유하다, 점령하다)과 서로 정확히 겹치지는 않는다.
들뢰즈의 불어 표현은 프로이트의 용법 (이 경우 영어는 cathexis로 옮긴다)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있으며, 대부분의 프랑스 정신분석가가 따르는 노선과 달리, 강조점을 프로이트에서 맑스로 옮겨가면서 “투자”를 정신 영역에 국한하지 않고 존재
전체에 관련 시키고 있다.
우리가 굳이 “투자”라는 번역어를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위의 구절에 언급된 “대항-투자” 개념은 정신분석에서는 “역투여, Gegenbesetzung(독일어), contre-investissement
(불어), countercathexis(영 어)” 등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이는 “프로이트가 자아의 수많은 방어 활 동의 토대로서 가정한 경제학적 과정. 그것은 무의식적 표상이나 욕망이 의식과
운동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는 표상이나 표상 조직, 태도 등에 대한 자아의 투자로 이루어진다.
/ 그 용어는 또한 그러한 과정의 다소 지속적인 결과를 가리키기도 한다.”(라플랑슈&퐁탈리스 2005: 253-54) 프로이트는
이 개념을 주로 억압의 경제학적 이론의 틀 안에서 제기한다.
“억압할 표상이 충동에 의해 끊임없이 투자되고 계속해서 의식으로 침범하려고 할 때, 그것을 무의식 속에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와 똑같은 일정한 힘이 반대 방향에서 작용해야만 한다.”(254) 이를 위해 i)
그 때까지 어떤 불쾌한 표상에 결부되어 있던 투자를 전의식계(Vorbewusste, préconscient)가 투자 철회(Entziehung (/Abziehung) der Besetzung, Unbesetztheit, déinvestissement, withdrawal of cathexis)해서 ii) 이에 의해 사용 가능해진 에너지를
이용해 대항-투자하는 것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역투여”라는 말 대신 “대항-투자”라는 번역을 택한 까닭은, 에너지의 투자 철회와 그렇게 해서 사용 가능해진
에너지를 특정한 목적을 위 해 맞서 투자한다는 뜻을 살리기 위해서이다.
역투여로 옮기게 되면, 거 꾸로 투자한다는 의미가 되어, 본래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게 된다.
들뢰즈는 ‘대항-투자’를 동원한 이런 정신분석적 해석이 ‘원초적 억압’ 의 본질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규정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초적 억압’은 ‘기관 없는 몸이 자신과 충돌하는 욕망 기계들을 밀쳐내는 반작용’으로 재규정된다.
2. 억압과 탄압
들뢰즈는 겉보기에 유사해 보일 수도 있는 ‘탄압’ 즉 répression(독어 Repression)과 ‘억압’ 즉 refoulement(독어 Verdrängun)’을 엄밀히 구별한다. 물론 들뢰즈에서는 전자는 의식적 차원의 억압을 가리키고, 후자는 무의 식적 차원의 억압을 가리킨다고 이해해야 마땅하다.
일본어 번역에서는 전자를 抑制로 후자를 抑壓으로 옮기는데 이는 한국어 어감과 다르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한편 영어 번역자들은 양자의 본성이 다르지 않다는 이유를 대며 모두 repression으로 옮기되, 꼭 구별해야 할 때만 전자를
social repression으로 후자를 psychic repression으로 옮기는데, 이는 각 개념에 상응하는 어휘가 없는 영어에서 가능한
최소한의 시도이기는 하나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이 점은 개념에 대한 검토를 마친 후에 더 자세히 지적하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들뢰즈에서 refoulement은 무의 식적인 수준의 것이지만 심적인 차원에 한정되지 않고 존재론적 차원까 지 포괄
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다양한 외국어를 전용하여 자신만의 개념을 주조하는데, 이 과정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일단 refoulement(Verdrängung)은 프로이트의 개념이다.
“억압의 이론은 정신분석이라는 전 건물이 세워져 있는 초석이다.”(프로이트, 「정신분석 운동의 역사」, 전집15: 61)
그런데 들뢰즈는 이를 자신의 맥락에서 전용해 refoulement과 répression이라는 확연히 구별 되는 두 개념으로 분리 추출해 낸다.
물론 이 과정에서 맑스의 억압 (Repression) 개념이 함께 고려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들뢰즈의 이런 의도적 구별(번역)은 맑스와 대별되는 프로이트의 가두리(peras)를 지 정하는 효과를 톡톡히 발휘한다.
사회적 물질적 차원과 긴밀히 관련된 répression과 구별해서, 정신분석에서 정신 차원과 관련된 refoulement을 쓰는 데는
이유와 맥락이 있으며(정신분석 사전의 번역자 임진수의 번 역 및 설명은 이 점을 더 잘 보여준다),
영어 번역자가 social repression과 psychic repression으로 옮긴 맥락도 그렇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욕망과 무 의식을 정신 영역에 국한시키는 프로이트와 달리, 들뢰즈는 전체로서의 존재와 우주를 욕망과 무의식
으로 보기 때문에, 억압은 원초적으로는 정신의 운동보다는 존재의 운동과 관련된다.
따라서 들뢰즈는 프로이트를 비판하기 위해 refoulement 개념을 확장하고 발전시키면서 그것을 존재론 적 차원에 위치시키고, 맑스의 용법을 도입해 사회적 차원의 억압인 repression과 엄밀히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앞에서 본 바 있는 “탄압을 통해서만 고정된 주체가 있다”(AO 34)는 말은 오이디푸스가 이미 욕망 기계들의 엄청난 사회적 탄압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물론 ‘억압’과 ‘탄압’이 서로 무관하지는 않은데, ‘탄압’은 존재론 차원에서 ‘억 압’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정신분석에서 “억압(refoulement)”의 고유한 의미는 이렇게 규정된 다.
“충동과 결부된 표상(생각, 이미지, 기억)을, 주체가 무의식 속으로 내몰거나 무의식 속에 머물게 하려는 심리 작용.
그 자체로는 쾌락을 제공하는 충동의 충족이 다른 필 요(besoin)에게는 불쾌감을 유발할 위험이 있을 경우에 억압이 일어난다. […]
고유한 의미의 억압(eigentliche Verdrängung) 또는 “사후작용의 억압(Nachdrängen)”은, 따라서 그러한 [최초의 무의식의
핵이 억압되어야 할 요소에 대해 작용하는] 인력에 상위 의 심급[Instanz] 쪽에서의 반발(Abstossung)이 결합되는 이중의
과정이다.”(라플랑슈&퐁탈리스 2005: 244-7)
한편 정신분석의 ‘원(초적)억압’(Urverdrängung, refoulement originaire, primal repression)에 대응하는 들뢰즈의 “원초적
억압” 개념은 정신분석에 서는 이렇게 설명된다.
“프로이트가 1차적 억압 작용으로 기술한 가설적 과정. 그 결과, 다수의 무의식적 표상이나 “원초적인 억압된 것(refoulé)”
이 형성된다.
그렇게 구성된 무의식의 핵은 나중에, 상위의 심급으로부터 오는 반발과 합동으로 억압해야 할 내용을 끌어당김 으로써,
고유한 의미의 억압과 협력한다. […]
원초적 억압이라는 개념이 아무리 모호 해도, 그것은 프로이트의 억압 이론의 주요한 부분이고, ‘슈레버’ 사례 연구부터
프 로이트의 전 저작을 통해 발견된다.
원초적 억압은 그것의 결과로부터 소급적으로 가 정되는 것이다.
즉, 프로이트에 따르면, 하나의 표상은 이미 무의식적인 내용이 그 것을 끌어당기고 동시에 상위의 심급으로부터 오는 어떤 행동[반발]이 그것에 작용 할 때만 억압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를 반복하면, 그 자체가 다른 무의식의 형성물이 끌어당기지 않은 무의식의 형성물의 존재를 가정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원초적 억압”의 역할이다.
그렇게 해서 그것은 고유한 의미의 억압, 또는 사후작용의 억압과 구별된다.”(라플랑슈&퐁탈리스 2005: 289-90)
이처럼 정신분석에서 “억압”의 두 차원이 차이가 난다는 점을 구분했 다.
“정신분석은 이 두 억압 간의 차이를 잘 밝혔으나, 이 차이의 범위나 그 두 억압의 체제의 구별을 밝히지는 못했다”(AO 142) 요컨대 “고유한 의미의 억압” 내지 “2차적 억압”은, “사후 작용의 억압”인데, 그것은 주체가 심리적 차원에서 한 편에 불쾌감을 유발할 위험이 있기에 다른 편에 쾌락을 제공할 수도 있는 충동의 충족을 무의식속에 머무르게 하려는 반발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 “원초적 억압” 내지 “1 차적 억압”은 프로이트가 “고유한 의미의 억압”의 초월론적 조건으로서 도입한 개념이다. 어떤 억압된 것은 고유한 의미의 억압이 작용하기 전 에 억압된 내용을 의식 쪽으로 끌어당기는 작용을 가정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을 소급해 가다 보면 다른 무의식의 형성물이 끌어당기지 않은 최초의 무의식의 형성물이 도입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원초적 억압 을 인정할 근거가 있다. 그것은 1차적 억압으로, 충동의 심리적 대표(대 표-표상)가 의식 속에 실리는 것을 거부당하는 것을 말한다.”(「억압에 관 하여」, 프로이트 2003b : 148)
그렇지만 더 깊은 수준에서 보자면, 프로이 트에 따르면, 원초적 억압은 대항-투자에 의해 생긴다.
“원초적 억압은 항구적인 지출을 나타내고, 또한 그것의 항구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대 항-투자이다.
대항-투자는 원초적 억압의 유일무이한 기제이다.
고유한 의미의 억압(사후 작용의 억압)에서는, 전의식적인 투자의 철수가 거기 [원초적 억압]에 덧붙는다.”(「무의식에 관하여」, 프로이트 2003b, 182) 그 러나 여기에는 모호한 점이 있다.
대항-투자는 원초적 억압보다 나중에 형성되는 초자아에서 유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에게 “원초적 억압”은 오히려 “밀쳐냄” 즉 ‘반발’ 또는 ‘반감’ 나아가 물리학의 ‘척력(斥力)’의 뜻을 지닌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이른바 원 초적 억압이 뜻하는 것은 […]
기관 없는 몸에 의한 욕망 기계들의 이 밀̇ 쳐냄̇ ̇이다.”
여기서 정신분석과 들뢰즈의 중요한 차이는 정신분석이 “원 초적 억압”을 심리적-무의식적 차원에 놓는 반면 들뢰즈는
그것을 존재 론적-무의식적 차원에 놓는다는 점이다. 또한 정신분석은 원초적 억압 이라는 개념에 대해 모호함을 남기는
반면, 들뢰즈는 존재론 수준에서 그 개념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i) “욕망적 생산은 원초적 억압의 장소인 반면 사회적 생산은 탄압의 장소이며, 또한 후자로부터 전자로 “고유한 의미의”
2차적 억압과 유사한 뭔가가 실행된다.”(AO 40)
ii) “사회체 위의 기입은 사실 2차적인 또는 “고유한 의미의” 억압의 담당자인데, 이 억압은 기관 없는 몸의 욕망적 기입과,
또 이 기관 없는 몸이 이미 욕망의 영역에서 행사하는 1차적 억압과 필연적으로 관계되어 있다.”(AO 217-8)
이 문장에는 결정적인 구분들이 다 들어 있다.
들뢰즈는 탄압 또는 억압과 관련해서 세 층위를 구분한다.
1) 원초적 억압(refoulement originaire) 또 는 1차적 억압(refoulement primaire),
2) 고유한 의미의 억압(refoulement proprement dit) 또는 2차적 억압(refoulement secondaire),
3) 탄압(répression) 이 그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는 각각 존재론적-무의식적, 심리적무의식적, 사회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앞에서 영어 번역 자들이 refoulement을 대체로 psychic repression으로 옮긴 것을 문제 삼은 데는 바로 이런 이유가 있으며, 이런 번역은 영어권 연구자들의 안티 오이디푸스해석에 굉장히 해로운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 어권에서도 존재론적-무의식적 억압과 심리적-무의식적 억압에 대한 세 심한 구분이 충분히 주목되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해 마땅하다.
이처럼 두 억압과 탄압은 본성상 다르다.
하지만 양자가 서로 무관한 것은 아니다. 고유한 의미의 억압은 욕망적 생산을 탄압하는 기능을 하 는 것이다.
“억압은 그 작용과 그 작용 결과의 무의식적 성격 때문에 탄압과 구별되는데, 이 구 별은 바로 본성의 차이를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로부터 이 양자가 현실적으로 서 로 독립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전혀 없다. […] 고유한 의미의 억압은 탄압에 봉사하는 수단이다. 억압이 행사되는 대상은 또한 탄압의 대상, 즉 욕망적 생산이기 도 하다.”(AO 142)
우리는 5장 3절에서 이 과정을 조금 더 살필 것이다.
다만 “욕망의 탄압 또는 성적 억압, 즉 리비도 에너지의 정체상태”(AO 141)를 위탁받은 담당 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부르주아 핵가족이라는 지적76)을 기억하고 넘어
76) “가족은 사회적 생산에 의해 억압에 위탁된다. 그리고 이렇게 가족이 욕망의 등록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은,
이 등록이 행해지는 장소인 기관 없는 몸 이, 앞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이미 그 나름대로, 욕망적 생산에 대해 원초적
억압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원초적 억압에서 이익을 취하고 거기에 본래적 의미의 2차적 억압을 중첩하는 일이 가족에 속한다.
이 2차적 억압은 가족에 위 탁되었거나 또는 가족이 이 억압에 위탁되었다(정신분석은 이 두 억압 간의 차이 를 잘 밝혔으나, 이 차이의 범위나 그 두 억압의 체제의 구별을 밝히지는 못했가도록 하겠다.
3. 편집증과 그램분자적인 것, 및 기적 기계
이런 개념적 토대 위에서 ‘편집증(paranoia)’에 대한 들뢰즈의 고유한 정의가 등장한다.
편집증은 ‘욕망 기계들의 작동에 대한 기관 없는 몸의 밀쳐내는 반작용’이다.
욕망 기계들은 생산의 생산을 담당하므로, 이 생 산의 와중에 생산이 계속되지 못하도록 이를 밀쳐내는 반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기술(記述)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한편 “분열증” 이란 앞에서 보았듯이 욕망 기계의 작동 그 자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분열증은 생산과 재생산을 행하는 욕망 기계들의 우주요, “인간과 자연 의 본질적 현실”로서의 본원적인 보편적 생산이다.”(AO 10)
그렇지만 편 집증 기계는 욕망 기계들로 인해 생겨난다. 이는 기관 없는 몸 자신이 욕망 기계들에 의해 생산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편집증 기계의 발생은, 욕망 기계들의 생산의 경과와 기관 없는 몸의 비생산적 멈 춤의 대립 속에서, 그 즉시 생겨난다. […] 하지만 그 자체로는 편집증 기계는 욕망 기계들의 아바타(化身)이다.
즉, 그것은 기관 없는 몸이 욕망 기계들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에서 이 둘의 관계에서 귀결한다.”(AO 15-6)
즉, 분열증(욕망 기계)이 일차적이며, 편집증(밀쳐내는 반작용)은 이차적 이다.
물론 여기서의 의인법적 표현들은 인간주의와는 관계가 없다.
“편집증과 분열증이 갈리는 것은 그램분자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 사이의 돌쩌귀요 경계인 한에서의 기관 없는 몸 위에서이다.”(AO 334) 안티 오이디푸스 4장 1절 말미의 두 그림은 이 점을 요약하고 있다(AO
다).”(AO 142)
335, 336). 들뢰즈에서 편집증에 대한 규정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것은 들뢰 즈의 문제인 무의식의 “반동적, 파시즘적” 투자를 설명해주는 핵심 개념 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사회의 차원에서 편집증을 다시 규정한다.
이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대목을 미리 살피고 가는 것은 뒤의 5장에서 자본 주의 체제에서 욕망의 양극성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i) “편집증적 투자와 분열증적 투자는 무의식적 리비도 투자의 대립되는 두 극과도 같다.
그 한 극은 욕망적 생산을 통치 구성체 및 거기서 유래하는 군집 집합에 종속 시키며, 다른 극은 이 종속을 역전시키고,
권력을 전복하며, 군집 집합을 욕망의 생 산들의 분자적 다양체들에게 복종시킨다.”(AO 452)
ii-1) “실제로, 편집증적 투자는 분자적인 욕망적 생산을 이 생산이 기관 없는 충만 한 몸의 표면에서 형성하는 그램분자적
집합에 종속시키는 데 있으며, 또 바로 이렇 게 함으로써 이 생산을 특정한 조건들에서 충만한 몸의 기능을 수행하는 사회
체의 형식에 예속시키는 데 있다.
편집증자는 대중들을 기계 작동시키며, 끊임없이 큰 집 합들을 형성하고, 욕망 기계들을 지도하고 탄압하기 위해 무거운
장치들을 발명한 다.”(AO 436)77)
ii-2) “편집증자는 대중을 조종한다. 그는 거대한 그램분자적 집합들, 통계적 구성체 들 내지 군집들, 조직된 군중 현상들을 다루는 예술가이다. 그는 모든 것을 큰 수라 는 양상으로 투자한다.”(AO 332)
이 구절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은 “그램분자적(molaire)” 이라는 개념이다.
본래 “그램분자” 또는 “몰(mole)”은 화학 용어이다. 화 학에서는 “분자(molécule)”를 직접 다룰 수 없기 때문에, 분자를 일정한
77) “편집증을 정의하는 것은 바로 [전제군주의] 이 투사 권력, 0에서 다시 출발하 여 완벽한 변형을 대상화하는 [전제군주의] 이 힘이다.”(AO 229)
규모의 집합을 통해 다룬다.
분자를 아보가드로 수(6.02 × 1023 = 6.02 × 1,000,000,000,000,000,000,000,000)만큼 모은 것이 바로 “그램분자” 또 는 “몰”이다. 따라서 이 정도의 엄청난 수를 통해 분자를 파악한다는 것은 결국 “통계적” 방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가 “군집”, “거대한 그램분자적 집합”, “큰 집합”, “통계적 구성체”, “군 집”, “조직화”, “큰 수” 등의 말로 지칭하는 것은 모두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그램분자적으로 파악된 것은 개별 분자의 특성과는 체 제의 차이를 보인다.
물론 모든 분자는 그램분자 차원에서도 파악될 수 있으며 분자들이 그램분자를 이룬다는 점에서 그런 파악은 당연한 일이 지만, 그런 파악을 분자 자신에 대한 파악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래 서 들뢰즈는 니체를 인용하여, 그램분자 차원에서 이야기되는 “화학 법 칙”에 대해 의구심을 드러낸다.78) “통계적
집적은 우연의 결과물, 우연한 결과물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이와 반대로 그것은 우연의 요소들에 행해지는 선별의 결실이다.”(AO 410) 오히려 분자들의 차원은 “우연 또 는 현실적
비조직의 영역”(AO 343)으로, 거기에서 “욕망은 우연과 다양 성 속에서 […] 자유로이 기능”(AO 467)한다.
들뢰즈가 자크 모노(Jacques Monod)의 우연과 필연의 대목들 중에서 화학 반응에 있어 “우연”의 역할을 강조하는 대목을 활용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구절에는 분자 생물학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화학 작용 이 묘사되고 있다.
“구조나 반응에 있어 화학적인 필연적̇ ̇ ̇ ̇ ̇ ̇ ̇ 관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간접적인) 단백질 분자 변형 상호작용들의 작동 원리는 제어들의 선택̇ ̇에 있어 완전한 자유를 허용한다. 이 제어들은 모든 화학적 구속을 벗어나 있다. […]
이 체계들의 근거 없음̇ ̇ ̇ ̇ 이야말로 결정적으로, 분자적 진화에 대해 실천적으로 무한한 탐구와 실험들의 마 당을 열어
주었다.”(AO 343 재인용)
78) “나는 화학 법칙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그 단어에는 도덕적 뒷맛이 있기 때문이 다.”(AO 133 재인용)
여기서는 화학적인 필연적 관계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화학적 구속을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게 제어가 이루어지며, 체계 자체가 근거 없음의 특징을 갖는다고 서술되고 있다.
들뢰즈가 그램분자 차원과 분자 차원 사이에 체제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그토록 애써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램분자 차원에서는 통계적 법칙이 작용하는 데 반해, 분자 차원에서는 우연과 우발의 놀이가 펼쳐진다.
분자 차원으로 가면 “마르코프 사슬”(AO 46; 343-4; 410)이 작동한다.
마르코프 사슬이 란 미래의 상태는 과거의 상태가 아닌 현재의 상태에만 의존하는 특징을 갖는 확률 법칙이다.
이를 들뢰즈는 “부분적으로 서로 의존하는 우발적 현상들을 형성하는 철도 선로 변경과 제비뽑기의 전체 체계”(AO 46)
내 지 “부분적으로 의존하는 우연한 현상들”(AO 343)이라고 이해한다.
그램 분자적 차원에서의 통계적, 법칙적 작용이 욕망과 무의식의 편집증적 투 자를 규정한다면, 분자적 차원에서의 이러한 작용이 욕망과 무의식의 분 열증적 투자를 규정한다.
한편 편집증 기계와 대립 쌍을 이루는 것이 “기적 기계(machine miraculante)”이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기관 없는 몸이 욕망적 생산을 끌어 당겨, 기관-기계들이 기관 없는 몸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물론 가상을 낳 기는 하지만, “외견상의 객관적 운동”(AO 18) 속에서는 욕망 기계들이 기관 없는 몸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이 현상은 1장에서 사회 기계에서 물신에 대해 설명했던 내용의 존재론적 전유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끌어당기는 기계는 밀쳐내는 기계의 뒤를 잇고 있으며, 또 뒤를 이을 수 있다.
편집증 기계 다음에 기적(奇蹟) 기계가 뒤를 잇는다.”(AO 17) 사실 기적 기계는 욕망 기계의 작용으로 생산된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왜냐하면 기관 없는 몸은 실제로는 욕망 기계의 생산물이며, 욕망 기계 의 운행의 순간적인 한 단면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순간적 멈 춤 상태에서 다시 생산의 운동이 재개된다면 이는 당연히 욕망 기계의 작용 덕분이다.
바로 이 계기를 들뢰즈는 기적 기계라고 부르고 있는 것 이다. 기적 기계는 재가동의 계기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관 없는 몸이 두 얼굴을 갖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정지의 계기인 편집증 기계와 재개의 계기인 기적 기계가 각각 그것이다.
4. 분리 종합의 형식 및 이탈-절단과 코드
이제 “등록의 생산”의 법칙을 보자. 앞서 “생산의 생산”은 욕망 기계의 작동이었다.
“등록의 생산”이란 존재론 차원에서 기관 없는 몸의 작동을 가리킨다.
“생산의 생산의 법칙은 연결 종합 또는 연동이었다. 하지만 생산적 연결들̇ ̇ ̇이 기계 들에서 기관 없는 몸으로 이행할 때
(노동에서 자본으로 이행하듯), 그것들은 “자연 적인 또는 성스런 전제”로서의 비생산적 요소와 관련해 하나의 분배̇ ̇를
표현하는 다 른 법칙 아래 들어간다고 할 수 있으리라(자본의 분리들).
기관 없는 몸 위에는, 새 종합들의 그물 전체를 짜서 표면을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하는 수많은 분리 점들처 럼 기계들이
매달린다. 분열증적인 “…이건 …이건”이 “그 다음에”와 교대한다.
어떤 임의의 두 기관을 고려하건, 그 둘이 기관 없는 몸에 매달리는 방식은 그 둘 사 이의 모든 분리 종합들이 미끄러운
표면 위에서 결국 같은 것으로 회귀하는 그런 식 이어야 한다.”(AO 18)
종합은 ‘존재의 종합’이다.
즉, 매 순간 존재가 잠정적이나마 안정된 상태로 존립하는 사태이다.
기관 없는 몸 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기관 없는 몸 위에, 즉 등록 내지 기입 표면 위에, 수많은 분리 점들처럼, 바둑판의 각 눈처럼 짜여 있는 그물 위에, 기계들이 분배된다.
이 기계들 은 앞에서 보았듯이 부분대상들과 같은 의미이다.
그렇지만 이미 알고 있듯이 기관 없는 몸 자신이 분배와 등록에 있어 적극적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기계들의 생산물에 불과하기 때문 이다.
따라서 분배를 행하는 것은 바로 기계들 자신이다.
기계들 자신은 채취-절단(‘봄’의 예를 상기하자)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코드”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모든 기계는 자기 안에 가설하고 비축해 놓은 일종의 코드를 지니고 있다. 이 코드 는 자신이 몸의 상이한 지역들에 등록되고 전달되는 방식과 뗄 수 없으며, 또한 다 른 지역들과 관련해 몸의 각 지역이 등록되는 방식과도 뗄 수 없다. […] 도처에서 등록들, 정보들, 전달들이 바둑판 모양의 분리들을 형성하는데, 이것들은 그 전의 연결들과는 다른 유형을 하고 있다.”(AO 46)
이 분배는 엄밀히 말해 기관 없는 몸 위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 상 거꾸로 이해해야 한다. 말하자면 생산의 생산, 또는 연결, 또 는 연동은 시간의 순서를 따르는데, 그런데
한순간 정지한다.
바로 그 순간 상태를 보자.
4장 A에서 말했듯, 우주의 운행의 한 상태를 찍은 스냅 사진 또는 스크린의 한 장면. 그 위에는 욕망 기계들이 등록되고 분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욕망 기계의 생산의 경과가 있을 뿐이며, 이를 한순간 정지시켰을 때 비로소 기관 없는 몸의 존재 가 탄생 내지 확인될 뿐이다.
이 상황이 분열증적인 “…이건 …이건”이 “그 다음에”와 교대하는 것으로 서술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제3의 시 간에 실존”(AO 14)하고 “제3항으로 도입”(AO 21)된다고 했던 것도 이런 까닭이다.
그런데 “어떤 임의의 두 기관을 고려하건, 그 둘이 기관 없는 몸에 매 달리는 방식은 그 둘 사이의 모든 분리 종합(synthèse disjonctive)들이 미 끄러운 표면 위에서 결국 같은 것으로 회귀하는 그런 식이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매 순간의 우주의 스냅사진에 분배되어 있는 욕망 기계들 의 분포 상태, 기입 내지 등록 상태는, 매번 달라지겠지만, 이는
결국 우 주 전체의 스냅사진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기관 없는 몸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 기계들의 생산의 제3항으로서 생산의 연결 내지 연동 의 와중에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인 것은 욕망 기계들로서의 우주 전체이지 기관 없는 몸 및 그 위에서의 분배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결국 같은 것으로 회귀하는 그런 식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분리(disjonction)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부분대상들과 기관 없는 몸 사이의 관계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분리는 우선 각 순간의 기관 없는 몸 사이의 시간의 분리를 가리킨다.
당연히 이 분리의 와중에 등록, 기입, 분배의 차이가 발생하며, 이것이 우연이 개입하는 계기이다.
다음으로, 더 중요한 것인데, 분리는 이로 인해 야기 되는 등록 표면에서의 포괄적 분리이다.
이 분리가 포괄적인 까닭은 앞서 고찰했던 부분대상들의 특성에서 유래한다. 임의의 부분대상들은 임의 의 다른 부분대상들과 연결 내지 연동될 수 있기에 서로 배타적일 수 없 는 것이다.
동일한 “대상”과 관련해서 시각, 청각, 촉각 등에 의해 절단될 때 그 대상은 각각 다른 것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각각이 서로 다 른 “대상”인 것은 아닌 것이다.79) 그래서 들뢰즈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아니면 …(ou bien)”이 호환 불가능한 항들 간의 결정적 선택(양자택일)을 표시 하려 하는 데 반해, “…이건(soit)”은 이전(移轉)(déplacer, 자리 옮김)되고 미끄러지면 서 늘 같은 것으로 회귀하는 차이들 간의 호환 가능 체계를 가리킨다.”(AO 18)80)
들뢰즈는 욕망적 생산의 등록이 갖는 이런 포괄적 성격을 배타적으로 사 용하는 것을 비판하게 된다.
이런 잘못된 사용이 오이디푸스를 낳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앞에서 기계는 코드를 비축하고 있어서 등록을 행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기계는 코드의 사슬에서 이탈함으로써만 다른 연결 종합
79) “기관 없는 몸은 가장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내재적 실체이다.
그리고 부분대 상들은 이 실체의 궁극적 속성들과 같은 것으로, 이 속성들은 현실적으로 구별되 고 이 때문에 서로 배제되거나 대립될 수 없는 한에서 이 실체에 귀속한다.”(AO 390)
또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현실적 구분(distinction réelle, 실재적 구 분)”의 적용으로서의 기관 없는 몸과 부분대상에 대한 다음 진술도 참조. “기관 없는 몸은 실체 자체이며, 부분대상들은 실체의 속성들 또는 궁극적 요소들이 다.”(AO 369n) 80) 이를 번역의 애로점 때문에 영어에서는 각각 ‘either … or … or’와 ‘either/or’ 로, 독어에서는 ‘sei es … sei es’와 ‘… oder aber’로 옮기고 있다.
에 들어가게 된다. 말하자면 채취-절단은 이미 “이탈-절단”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흐름의 채취는 사슬의 이탈을 내포한다. 또 생산의 부분대상들은, 모든 종합들의 공존과 상호작용 속에서, 등록의 재고들 내지 벽돌들을 전제한다. 흐름에 정보를 제공하게 될 코드 속에서 파편적 이탈이 없다면, 어찌 흐름의 부분적 채취가 있으 랴?”(AO 48)
맑스와 들뢰즈가 각각 연구한 루크레티우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에서 의 이탈(klinamen)의 계기가 바로 이런 귀결을 낳는다는 점도 언급할 수 있겠다.
사실 “에피쿠로스는 모든 합리주의 전통 및 합리적 설명에서 중 요한 근거율(principe de raison)에 대한 비판을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인물이다.”(토젤 2011: 225)
또 우리는 샤틀레가 “유물 론적 난입”을 말하면서 루크레티우스를 언급했던 장면도 기억할 수 있 을 것이다(ID 307).
우리는 1장에서 코드의 잉여가치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코드 개념을 해명한 바 있다. 그것은 가치의 증대, 가치의 창조를
위해 질을 부여하는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코드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즉 “코드화”로 이해되는 것이었다.
들뢰즈는 존재의 수준에서 코드의 작용이 채취-절단의 전제를 이루며(눈이 ‘시각’의 견지에서 모든 것을 본다고 했 을 때,
‘시각’이 코드인 셈이다),
나아가 그것은 이탈-절단에서 비롯된다 (이를 ‘횡단’이라고 앞에서 말한 바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C. 소비의 생산 또는 결합 종합
1. 소비의 생산과 주체의 탄생: 결합 종합 또는 잔여절단
생산의 경과는 하나의 순환(생산, 분배, 소비)을 형성한다.
이 순환이 완성될 때마다 부산물(여분, 잔여)이 생겨난다.
여기서 생산의 경과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순환은 즉각 일어난다.
“생산은 즉각 소비이며 등록이고, 등록과 소비는 직접 생산을 규정하며, 그것도 생 산 자체의 한가운데서 생산을 규정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생산이다. 생산의 생̇ ̇ ̇ ̇ 산̇, 즉 능동들과 수동들의 생산들. 등록의 생산̇ ̇ ̇ ̇ ̇, 즉 분배들과 좌표들의
생산들. 소비̇ ̇ 의 생산̇ ̇ ̇, 즉 쾌감들, 불안들, 고통들의 생산들. 모든 것은 생산이기에, 등록들은 즉각 소비되고 탕진되며,
소비들은 직접 재생산된다.”(AO 9-10)
여기서 다시금 생산의 경과가 하나의 순환을 이루되, 각 단계의 에너지 는 “생산의 생산”의 에너지인 ‘리비도’가 “등록의
생산”의 에너지인 ‘누멘’과 “소비의 생산”의 에너지인 ‘볼룹타스’로 차례로 변형됨으로써 생겨 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생산의 경과를 추동하는 궁극 적인 에너지는 리비도이기 때문이다.
“생산 에너지로서의 리비도의 일부가 등록 에너지( 누멘 )로 변형된 것과 마찬가지로, 등록 에너지의 일부는 소비 에너지
( 볼룹타스̇ ̇ ̇ ̇ [Voluptas])로 변형된다. 바로 이 잔여 에 너지가 무의식의 셋째 종합을, “따라서 그것은 …이다”라는 결합
종합 또는 소비의 생산을 추동한다.”(AO 23)
여기서 ‘소비(consommation)’라고 옮긴 말에 대응하는 동사는 둘이 있는데 하나는 ‘완수’ 내지 ‘소비’(consommer)이며 다른 하나는 다 써버린다는 뜻 에서 ‘탕진(consumer)’이다.
이 말로써 들뢰즈가 뜻하는 것은 과정의 한 순환의 완결이다. 그러나 이 완결은 다시 새로운 과정으로 이어진다.
이 생산의 과정의 한 순환이 완결되는 바로 그 때, 주체(sujet)가 탄생 한다.
“기입 표면에 주체̇ ̇의 차원에 속하는 어떤 것이 눈에 띄게 된다. […] 욕망 기계의 셋째 절단은 여분-절단 또는 잔여-절단
(coupure-reste ou résidu)으로, 이것은 기계 곁에 하나의 주체를, 기계의 인접 부품을 생산한다.”(AO 22-3, 48)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주체(sujet)와 자아(moi)의 구별이다.
주체는 능동적이지 않고, 고정된 정체성을 갖고 있지도 않고, 행동의 출발점 또는 중심에 있지 않고, 주도적이지 않다.81)
말 그대로 그것은 여분으로서, 잔 여물로서 제일 마지막에 탄생한다.
여기서의 ‘주체’는 생산을 주도하는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2장 3절에서도 지적했듯이, 생산 자신이 “자기-생산”
으로 이해될 때의 그 “자기”와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상한 주체이다. 고정된 정체성이 없고, 기관 없는 몸 위를 방황하며, 늘 욕망 기계들 곁에 있고, 생산물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몫에 의해 정의되며, 도처에서 생성 내지 아바타(化身)라는 덤을 얻고, 자신이 소비하는 상태들에서 태어나고 또 각 상태마다 다시 태어나니까. “따라서 그것은 나다, 따라서 그것은 내 것이다….””(AO 23)82)
우리는 이 문장의 마지막에 표현에 주목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다
81) 본래 불어 sujet는 주체(主體)이기도 하지만 본래 subjectus에서 유래한 ‘신민(臣 民)’의 의미가 더 강했으며 subjectum에서 유래한 ‘주체(主體)’라는 의미는 나중에 야 생긴 것이다. 그 의미와 역사에 대해서는 Etienne Balibar, Barbara Cassin, Alain de Libera, le mot Sujet in Vocabulaire européen des philosophies , Éditions du Seuil / Dictionnaires Le Robert, Paris, 2004 참조. (번역은 발리바르, 「주체」, in 에띠엔느 발리바르 외, 법은 아무 것도 모른다, 강수영 옮김, 인간사 랑, 2008, pp. 27-51.)
82) 또한, “이 주체가 특유한 또는 인물적 동일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또 이 주체 가 기관 없는 몸의 미분화상태를 부수지
않으면서 거기를 돌아다닌다면, 그것은 이 주체가 기계 곁에 있는 하나의 몫일 뿐 아니라, 기계에 의해 가동되는 사슬의
이탈들과 흐름의 채취들에 상응하는 부분들이 되돌아오는 하나의 분할된 몫이기 도 하기 때문이다.”(AO 49)
(c'est donc …)”는 들뢰즈가 “잔여-절단”이라고 부른 것의 형식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어권 들뢰즈 연구자 중 한 사람이 유진 홀랜드(Eugene Holland)는 주체의 생산과 관련해 생산의 결과인 주체를
생산의 주인공 으로 바꾸고 만다(Holland 1999: 34).
이 오류는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이 후 영어권 연구자들에게 전반적으로 반복해서 나타나는 오류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하지만 이는 안티 오이디푸스영어 번역의 오류에서 기인한 흥미로운 오류이다. 불어 원문은 “C'est donc moi, c'est donc à moi …”(AO 23)로 되어 있는데 영어 번역은 “It's me, and so it's mine …”(18)이라고 되어버렸다.
불어를 영어로 정확히 옮기면 “so it's me, so it's mine …” 정도가 맞다.
다시 말해, “그것은 나다, 따라서 그것은 내 것 이다…”로 이해하는 것은 오역이며, “따라서 그것은 나다, 따라서 그것은
내 것이다…”가 되어야 한다.
홀랜드가 자신의 해석을 위해 활용한 “so” 는 인용문의 앞부분과 뒷부분 사이의 추론 과정을 나타내는 접속사가 전혀 아니다.
donc의 번역어로서 so는 생산의 한 순환이 마무리되는 결과로서(“따라서”) 주체가 생산되고 주체에 속하는 것이 생산된다는 것을 가 리키는 말로, 원문에서는 사실상 앞 문장과 뒷 문장에서 거듭 등장하는 말인 것이다.
다시 주체의 탄생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지 살피도록 하자. 출 발점은 ‘욕망 기계들’과 ‘기관 없는 몸’ 사이의 대립이다.
“원초적 억압의 편집증 기계에서 나타났던 식의 저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저 밀쳐냄 은 기적 기계에서 하나의 끌어당김에
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끌어당김과 밀쳐냄 사이에 대립은 지속된다.”(AO 23)
우선 편집증 기계와 기적 기계 사이의 변전에 주목해 보자.
편집증 기계 는 밀쳐냄, 즉 욕망 기계들이 작동을 멈추는 정지의 계기를, 기적 기계는 끌어당김, 즉 욕망 기계들의 재가동의 계기를 가리킨다.
정지한 것이 재가동하다니 이 어찌 기적이 아니겠는가?
기적은 세계가 다음 순간에도 여전히 이어진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는 힘의 존재론을 살피는 과정에서 존재의 지속이 존재론의 핵심 문제로서 자리하는 것을 보았다.
들뢰즈는 멈춤과 재가동이 순차적이라고 말함으로써, ‘왜’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어떻게’의 물음에 답하는 것으로 그친다.
이 대목은 존재론의 구성에 관련된다. 말하자면 어떤 존재론이 세계에 대한 더 적합한 진술이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 결단의 문제가 개입한다.
한편으로는 진실성이 문제겠으 나, 궁극적 정당화가 불가능하다면 진실성의 문제는 결단의 문제로 변한 다.
그러나 이를 종교적 믿음의 문제와 동렬에 놓아서는 안된다.
단순한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실증성과의 정합성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왜’의 물음에 대한 앞의 진술을 기억하자. “이 물음조차도 추상의 산물이 다.”(AO 14) 이제 “독신 기계(machine célibataire)”의 층위에서 욕망 기계와 기관 없 는 몸 사이의 밀쳐내고(“편집증 기계”) 끌어당기는(“기적 기계”) 긴장 관 계가 화해한다.
“실효적 화해는 “억압된 것의 회귀”로 기능하는 새 기계의 층위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것 같다. […] 신인류 또는 영광스런 유기체의 탄생을 위해 욕망 기계들과 기관 없는 몸 사이에 새 결연을 형성함으로써, 편집증 기계와 기적 기계의 뒤를 잇는 이 기계를 지칭하기 위해 “독신 기계”란 이름을 빌려오자.”(AO 23-4)
여기서 억압된 것은 표면에 등장하지 못한 것, 등록되지 못한 것을, 현행 적인 것의 이면에 잠재적인 것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킨다. 억압된 것 은 이면으로서 언제나 생겨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그 다음 순간으로 이행하는 와중에 회귀할 수밖에 없다.
반복은 억압을 낳는 동시에 억압 된 것의 회귀를 낳는다.
억압되었기에 반복되는 게 아니라, 반복되기에 억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왜 ‘독신 기계’라는 이름에 주목하 는가?
독신(獨身)은 결혼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성과 생산에 대한 인간주의적 견해(남녀의 결합을 통한 생산)를 넘어서려는 의도에 부합한다.
즉 홀로 생산한다는것. 이는 ‘고아(孤兒) 및 자기 생산’으로서의 무의식 개 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신인류(新人類)” 또는 “영광스런 유기체”라는 슈레버의 표현은, 지금까지 유기체를 부정했지만, 기존의 인간을 대체한 새로운 인간상을 가리킨다.
이것이 바로 분열자이다.
분열자만이 (슈레버, 렌츠, 베케트의 인물들, 아르토 등) 인간의 본질을 밝혀주는 존재다.
“분열증적 특유성도 분열증적 임상실체도 없다.
분열증은 생산과 재생산을 행하는 욕망 기계들의 우주요, “인간과 자 연의 본질적 현실”로서의 본원적인 보편적 생산이다.”(AO 11)
분열증이 특유한 것이 아니라, 분열증의 중단이, 과정의 중단이 특유한 환자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분열증은 우주, 욕망 기계들의 우주, 생산과 재생산 을 행하는 욕망 기계들의 우주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 분열자를 병원의 무기력한 환자로 만들며, 이른바 유순한 주체만을 허용한다.
그 까 닭은 분열자는 자본주의 생산의 부품으로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나는 느낀다”
독신 기계가 생산하는 것은 “강도량들(des quantités intensives)”이다.
“
순수 상태에서의, 거의 견딜 수 없는 한 점에서의, 강도량들에 대한 분열증적 경험이 있다.
즉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유예된 아우성처럼 최고의 지점에서 체험되는 독신의 비참과 영광, 강렬한 이행감(移行感), 형태와 형식을 벗어 던진 순수하고 생생 한 강도 상태들이로다.”(AO 25)
칸트는 순수이성비판(B207ff.)에서 연장적 크기와 구별되는 “강도적 크기(intensive Größe)”를 정의하는데, 들뢰즈는
이 개념을 감정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다.
“무릇 감각 그 자체는 전혀 아무런 객관적 표상도 아니고, 감각 안에서는 공간에 대한 직관도 시간에 대한 직관도 발견되지 않으므로, 감각에 연장적 크기가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일종의 크기, ― 말하자면, 그 안에서 어떤 시점에서의
경 험 의식이 무=0에서부터 일정한 정도까지 증가할 수 있는 감각의 포착에 의해 — 그러니까 강도적 크기̇ ̇ ̇ ̇ ̇는 속한다.
이 강도적 크기에 대응해서 지각의 모든 객체들에 는, 이 지각이 감각을 함유하는 한에서, 강도적 크기̇ ̇ ̇ ̇ ̇, 다시 말해 감관에 미치는 영향 의 도[度]가 부여되지 않을 수 없다.”(Kant 2006: B208)
들뢰즈가 칸트의 개념을 통해 가리키고자 하는 바는 “나는 느낀다(je sens)”라는 감정이다.
느끼는 존재인 ‘나’(moi)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의 경과의 끝에서 어떤 느낌을 겪은 존재가 탄생하며, 이것이 주체
라는 것이다.
또한 느낌의 순간들이 계속 이행한다(“강렬한 이행감(un sentiment de passage intense)”)는 점이 중요한데, 느낌의 순간
각각은 강도 량으로 지칭된다.
그리고 이것은 “분열증적 경험”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데, 이는 미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기존 상태를 잃고, 해체
되 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에 대한 경험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종종 환각들과 망상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환각 현상(나는 본다, 나는 듣는다)과 망상 현상(나는 …라고 생각한다)은 더 깊은 차원의 나는 느낀다̇ ̇ ̇ ̇ ̇를 전제 하며, […] 먼저 강도들, 생성들, 이행들만을 체험하는 참으로 1차적인 감정에 비하 면, 망상과 환각은 2차적이다.”(AO 25)
“나는 느낀다”라는 순수한 감정은 망상과 환각보다 일차적이다.
이렇게 느끼는 나가 들뢰즈가 말하는 주체인 것이다.
그리고 이 주체는 개인보 다는 집단으로 이해되는데, 이로부터 사회 이론에 있어 “제도 분석” 내 지 “집단 분석”의 중요성이 도출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5장 3절에서 상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이 순수 강도들은 편집증 기계와 기적 기계의 밀쳐내고 끌어당기는 운동에서 생산된다. 그
리고 그것은 강도=0에서 출발해서 모두 플러스 값 을 갖는다. 가령 속도나 온도에 절댓값 마이너스는 없다.
속도의 마이너 스는 방향을 가리키며, 온도의 마이너스는 절대온도로 보면 플러스이다.
플라스와 마이너스의 중간이나 평형은 없다.
“강도들은 기관 없는 충만한 몸을 지칭하는 강도=0에서 출발해서 모두 플러스 값 을 갖는다. […] 요컨대, 끌어당기는 힘[引力]과 밀쳐내는 힘[斥力]의 대립은 항상 플 러스 값을 갖는 강도 요소들의 열린 계열을 생산하는데, 이 요소들은 한 체계의 최종 적 평형상태 말고 한 주체가 경유하는 무수한 준(準)안정적 멈춤 상태들을 표현한다.”(AO 25-6)
여기서 ‘계열’은 시간상으로 뻗어나가는 것이지 공간상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계열은 시간의 흐름의 일방향성과 함께 한다. 독신 기계는 “강도 요소들의 열린 계열”을 생산한다.
느낌들의 계열이 연속적으로 생산된다 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매 순간 다시 새롭게 달라지지만 일시적으로는 안정적인 “무수한 준안정적(métastable) 멈춤 상태”를 경유하는 그
무엇, 즉 주체가 탄생한다.
이 주체는 ‘고정된 자아’와는 관계가 없으며 거꾸로 그 상태의 ‘겪음의 연속’이 주체이다.
들뢰즈는 칸트를 나름의 방식으로 전유하여 슈레버에 근접시킨다.
말 하자면 들뢰즈는 슈레버의 회상록에 칸트의 강도량 이론을 적용하여 읽 어내고 있는 것이다.
“법원장 슈레버의 설에 따르면, 끌어당김과 밀쳐냄̇ ̇ ̇ ̇ ̇ ̇ ̇ ̇은 기관 없는 몸을 잡다한 정도 로 채우고 있는 강렬한 신경 상태들̇ ̇ ̇ ̇ ̇을 생산하며, 슈레버-주체는 이 상태들을 경유 함으로써 영원회귀의 원(圓)에 따라 여자도 되고 어떤 다른 것들도
된다. […]
주체 자신은 기계에 의해 점유된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 고정된 정체성 없이 있으며, 중심에서 늘 벗어나고, 자신이 경유하는 상태들로부터 귀결̇ ̇된다. […]
주체는 그 계 열의 각 상태마다 태어나고, 한 순간 그것을 규정하는 그 다음 상태에서 항상 다시 태어나며, 자신을 태어나게 하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이 모든 상태들을 소비한다 (체험된 상태가 이 상태를 사는 주체에 비해 1차적이다).”(AO 26-7)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가 슈레버를 직접 인용하는 까닭은 두 가지이다.
첫째, 슈레버가 프로이트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에 의해 해석되 어 왔다는 점에서 이를 교정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이 그 하나이다.
둘째, 더 중요하게는, 슈레버는 극히 드물게도 자신의 체험을 꼼꼼히 기록한 분열자라는 점이 다른 하나이다.
즉 들뢰즈는 분열자 자신의 체험 기록 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려 하는 것이다.
우선 슈레버의 체험에 따르면 강렬한 신경 상태들이 생산된다는 것인데, 바로 “슈레버-주 체”는 이 강렬한 신경 상태들을 “경유”함으로써 이런 저런 것들로 생성한다(devenir).
더 정확히 표현하면, 매 순간 생성되는 이 강렬한 신경 상 태들을 경유함으로써 이런 저런 것들로 생성하는 것이 바로 슈레버-주 체이다.
그리고 이 슈레버-주체의 생성은 “영원회귀의 원(un cercle d’éternel retour)”을 따른다.
말하자면, 상태들의 순간은 영원히 회귀한다.
순간은 매번 다음 순간으로 이행한다.
매 순간 정지와 재개가 영원히 반 복된다. 생성은 바로 그에 따라 일어난다.
여기서 인간주의적인 면은 전혀 없다.
주체란 존재 생성의 경과에서 마지막에 생산되는 신경 상태들의 연속인 셈이다.
주체는 체험된 상태들을 소비한다. 주체는 중심에 있 거나 시작에 있지 않으며, 생산의 한 순환이 끝날 때 느낌과 함께 등장하 고 생산된다.
“여기서 그 무엇도 재현(再現)이 아니다.
모든 것은 삶이고 체험이다.”(AO 26) 그런데 우리는 들뢰즈의 다음 진술을 해명하고 가야 할 필요를 느낀다.
“맑스의 말처럼, 괴로움마저도 자기 향유이다(mê̂me souffrir est jouir de soi). 분명 모든 욕망적 생산은 이미 즉각 완수이자 소비이며, 따라서 “쾌감”이다.”(AO 23)
해당 대목은 맑스의 “인간적으로 파악해서, 괴로움(=겪음)은 인간의 자기 향유이다(das Leiden, menschlich gefaßt, ist ein
Selbstgenuß des Menschen)”(Marx M 268; 540)라는 말을 거칠게 인용한 것이다.
맑스는 “겪 음(Leiden)”를 인간학적 규정을 넘어 존재론적 규정으로 이해하려 한다.83)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인간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괴로움이 자기 향유라는 말인가.
여기서 “쾌감”은 라틴어 voluptas에서 유래한 volupté의 번역인데, 본래 성적 쾌감이라는 의미가 강하지만, 여기서는 “자기
향유”라는 말과 관련해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왜 괴로움이 향유이고 쾌감이란 말인가?
쾌감이란 어떤 감각을 느끼는 것, ‘아, 이렇구나’라고 느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등급 면에서는 저질일지 몰라도, 고통도 아픔도 쾌감의 일종이다.
아픔, 기쁨, 슬픔, 화남 등은 모두 누리는 것(jouir, jouissance)이다. 쾌락과 고통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보 는 것은 오해이다.
쾌(快)와 고(苦)는 실은 하나의 연속된 감각으로, 일련 의 등급을 거치면서 궁극적으로는 서로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쾌감(快 感)=불쾌감’이다.
쾌감을 즐거움으로 한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맑스 및 들뢰즈의 ‘향유(Genuß; jouissance)’는 쾌감의 질과는 일단 무관하다.
근데 생산의 경과의 셋째 국면에서 바로 이렇게 ‘느끼는/향유하는 자’가 탄생하며, 이것이 주체이다.
그리고 이것이 결합 종합 또는 소비의 생산 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는 클로솝스키(Klossowski)의 책 니체와 악 순환84)의 탁월한 해석을 활용한다.
“그는 가장 높은 사고와 가장 날카 로운 지각을 구성하는 물질적 감정으로서의 기분̇ ̇( Stimmung )의 현존을 보 여주었다.”
(AO 27) 여기서 니체의 ‘기분’은 슈레버의 ‘신경 상태’와 같은 것을 가리킨다.
“정체성이란 본질적으로 우연한 것이며, 이 개인 또는 저 개인의 우연성이 개체성들을 모두 필연적이 되게 하려면 개체성들의 한 계열이 각자에 의해 주파되어야만 한다.”(AO 28 재인용)
이에 대한 들뢰 83) “만일 인간의 느낌̇ ̇, 겪음 등이 고유한 의미에서의 인간학적 규정이 아닌 참으 로 존재론적인̇ ̇ ̇ ̇ ̇ 본질적 (자연적) 긍정들이라면, 그리고 만일 그것들이 단지 그 대̇ 상̇이 그것들에 대해 감각적̇ ̇ ̇이라는 이유로 긍정되는 것이라면, 다음과 같은 점은 자명하다.”(Marx M 318; 562) 84)
아쉽게도 번역본(조성천 옮김, 그린비, 2009)은 큰 참고가 못 된다. 원서는 니체 의 독일어를 섬세한 뉘앙스를 살려가며 불어로 해석하고 해설하는 책인데, 역자가 독일어 뉘앙스 파악에 실패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본의 아닌 오역이 되고 말았다.
들뢰즈의 해석은 이렇다.
“갑작스레 이성을 잃어 낯선 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될, 문헌학 교수 니체-자 아는 없다. 상태들의 계열을 경유하는, ‘역사의 모든 이름이 나다̇ ̇ ̇ ̇ ̇ ̇ ̇ ̇ ̇ ̇…’라며 역사의 이 름들을 이 상태들에 동일시하는, 니체-주체가 있다.
주체는 자아가 그 중심을 저버 린 원의 원주 위에서 자신을 펼친다. 중심에는 욕망의 기계가, 영원회귀의 독신 기계가 있다. 그 기계의 잔여 주체, 즉 니체-주체는 그 기계가 돌아가게 만드는 모든 것에서 […] 행복에 겨운 덤(볼룹타스)을 끌어낸다.”(AO 28)
니체-자아가 있어 그가 일련의 경험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들을 경 유하면서 매 순간 탄생하는 니체-주체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점에 서 앞에서 잠시 보았던 다음 구절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심리적 현실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특수한 실존 형식이란 없다. 맑스의 말처럼, 결핍은 없으며, 다만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대상적 존재”로서의 겪음(passion comme “être objet naturel et sensible”)이 있다.”(AO 34)
우리가 흔히 “심리적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겪음이며, 이 겪음이란 생산의 경과 또는 우주의 운행에서 “나는 느낀다” 또는 “강렬 한 신경 상태” 또는 “기분”을 향유한다는 의미이다.
3. 호모 히스토리아 또는 역사의 이름들
느낌과 체험은 역사의 이름들로 표현된다.
역사의 이름들, 또는 인종, 종족, 대륙, 나라, 지명, 문화 등이 이 느낌과 동일시되어 표현되는 것이 다. 들뢰즈는 분열자가 언급하는 이 수많은 이름들을 책을 관통해서 계속 언급한다.
“여기서 물질(matière)의 현실계는 모든 연장을 떠나 있다. 마치 내면 여행이 모든 형식과 성질을 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이제는 밖에서나 안에서나 유목적 주 체가 통과하는 강도들, 거의 감당할 수 없는, 서로 짝지어진 순수 강도들만이 눈에 띄게 된다.
이것은 환각적 경험도 망상적 사고도 아니며, 하나의 느낌, 즉 강도량의 소비 로서의 감정들(émotions)과 느낌들의 계열이다.
이 감정들과 느낌들은 뒤이어 일어나 는 환각들과 망상들의 재료를 형성한다.
강도적 감정, 즉 정감(affect)은 망상들과 환각 들의 공통의 뿌리인 동시에 이것들의 분화의 원리이다.
또한 모든 것은 이 강렬한 생성 들과 이행들과 이주들 속에서 뒤섞인다고 생각해도 좋겠다.
시간을 오르내리는 이 모든 표류가 그렇다.
즉, 나라들, 인종들, 가족들, 부모의 명칭들, 신의 명칭들, 역사 의 인명들, 지명들, 심지어 갖가지 사실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나는 신이 된다, 나는 여자가 된다, 나는 잔 다르크였다, 나는 헬리오가발루스이다, 또한 그 위대한 몽골인, 한 중국인, 한 아메리카 인디언, 한 성당기사이다, 나는 내 아버지였다, 나는 내 아들이었다(고 나는 느낀다̇ ̇ ̇ ̇ ̇). 또한 모든 죄인들, 죄인들의 전 목록, 정직한 죄 인들과 부정직한 죄인들이었다. […]
모든 것이 이렇게 뒤섞인다면, 그것은 강도에 있어서이다. 여기에 공간들과 형식들의 혼란은 없다.”(AO 100-1)
여기서 역사의 이름들이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고 가자.
가령 모차르트는 그저 이름인 것이 아니라 차라리 모차르트라는 효과이다.
역사의 이름과의 동일시는 결국 그 인물을 가로지르는 상태들, 효과 들과의 동일시이며, 자신이 겪은 느낌에 대한 해석인
것이다.
“자신을 인물들과 동일시하지 말고, 역사의 이름들을 기관 없는 몸 위의 강도 지대 들과 동일시하라. 그러면 그때마다 주체는 “이게 나다, 따라서 이게 나다!”라고 외 친다.
분열자만큼 역사를 이용한 사람은, 분열자가 하는 방식으로 이용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단번에 세계사를 소비한다.”(AO 28)
이처럼 역사의 이름들을 소비하는 분열자로서의 인간을 들뢰즈는 “호모히스토리아(homo historia)”라고 칭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분열자를 현실에서 격리되고 삶에서 절단된 무기력한 자폐증 환자로 그려내고 또 그런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사실 그는 “정신이 물질과 접촉하 여 물질의 모든 강도를 살고 그것을 소비하는”(AO 26) 존재인데 말이다.
4. 결합 종합의 분리차별적 사용과 유목적 사용
이제 주체의 탄생과 관련해 사회적 수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들뢰즈 가 결합 종합의 “분리차별적 사용(usage ségérgatif)”이라 부르는 것이다. 우선 느낌의 수준에서, 환각과 망상의 수준에서 주체(호모 히스토리아) 는 역사를 소비한다.
“기관 없는 몸 위에 맨 먼저 할당되는 것은 인종들, 문화들, 신들이다. 분열자가 얼 마만큼이나 역사를 만들었고 세계사를
환각하고 망상했으며 전 세계 인종들을 증 식시켰는가 하는 점은 지금까지 충분히 주목되지 않았다.
모든 망상은 인종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꼭 인종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
모든 망상은 세계사 적 정치적 인종적 내용을 갖고 있다.
모든 망상은 인종들, 문화들, 대륙들, 왕국들을 혼합하고 끌어들인다.”(AO 101, 106)
그런데 이 과정에서 주체는 자신을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한다.
다시 말 해, 결합 종합들의 사용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1) “무의식 속에서의 결합 종합들의 분리차별적 사용”이 있다.
“바로 이 분리차별적 사용이 “우리 편이어서 좋다”는 느낌, 바깥의 적들의 위협을 받 고 있는 우등 인종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구성한다. 이렇게 해서 개척자들의 작은 백인 아들, 자기네 조상의 승리를 기념하는 아일랜드 프로테스탄트, 주인 인종이라 는 파시스트가 생겨난다. […] “나는 우등 인종이다” 따위가 바로 그런 사용이다.”(AO 123, 125)
이 점은 니체가 바그너의 경우에서 독일인이 보인 당대의 경향성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대중을 알고 있으며 극장을 알고 있네. 거기에 앉아 있는 최고 관객, 독일젊은이들, (…) 요컨대 민중̇ ̇(Volk) ― 이들도 마찬가지로 숭고함, 깊이, 압도적인 것 을 필요로 하네. 그들은 모두 한 가지 논리만을 갖고 있다네. “우리를 뻑 가게 하는 자는 강하다. 우리를 고양시키는 자는 신적이다. 우리를 예감케 하는 자는 깊이가 있다.” (…) 거기에는 덕̇(Tugend)만이 ― 즉 훈련, 자동 작용, “자기 부정”만이 어울립 니다. 취향도, 목소리도, 재능도 아닙니다. 바그너의 무대는 단 하나만 필요합니다. ― 독일인̇ ̇ ̇(Germanen)만이! … 독일인의 정의(定義): 복종과 성실…. 바그너의 등장이 “제국(Reich)”의 등장과 시간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은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두 사실은 하나의 동일한 것을 ― 복종과 성실을 입증합니다. ― 그 누구도 더 잘 복종 받지도 더 잘 명령 받지도 않았습니다.”(Nietzsche W 6, 11)
이 묘사에서 독일인은 자신보다 숭고하고 깊고 압도적인 것에 대한 복종과 (명령에 따르는) 성실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이 바그너의 음악과 독일 제국의 탄생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정하면서 더 큰 것 에 복종하는 성실함, 이는 국가라는 더 크고 불멸하는 것에 대한 동일시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이것은 집단 환상에 대한 분석의 다른 좋은 사례이며, 니체 자신이 독일 파시즘을 경고하고 있음을 잘 보여
주 는 대목이다.
다른 한편, 2) “결합 종합들의 유목적(nomadique) 사용”이 있다.
“혁명적 무의식적 투자란, 욕망이, 여전히 자기의 고유한 양태로, 착취당하는 피지 배 계급들의 이해관계를 재절단하여,
모든 분리차별들 및 그 오이디푸스적 적용들 을 동시에 부술 수 있는 흐름을 흘러가게 하며, 역사를 환각하고 인종들을 망상하 고 대륙들을 불태워버릴 수 있는 흐름들을 흘러가게 하는 그런 식의 투자이다. 아 니, 난 너희와 다른 부류야, 난 이방인이고 영토가 없어, “난 영원히 열등 인종이야… 난 짐승, 검둥이야”.”(AO 125)
이처럼 무의식의 결합 종합들의 두 사용은 “파시즘”과 “혁명”이라는 양극성을 띤다.
그러나 양자는 명료하게 분절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망 상에는 “애매성”과 “다의성”이 있다.
“망상은 두 극(極)과 같은 것을, 인종주의적 극과 인종적 극, 분리차별적-편집증적 극과 유목적-분열증적 극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극 사이에는 어떤 미묘한 미끄러짐이 있어서, 무의식 자체가 그 반동적 충전(充電)들과 그 혁명적 잠재력들 사이를 오간다.”(AO 125)
결합 종합의 형식인 “따라서 그것은 …이다!”는 1) “따라서 나는 우등 인 종에 속한다”, “우리 편이어서 좋다”라는 형식의
인종주의적-분리차별적 -편집증적 극을 띠게 되기도 하고, 2) “따라서 나는 영원히 열등 인종이다”, “따라서 나는 짐승, 검둥이다”, “따라서 나는 이방인이야”, “난 너희 와 다른 부류야”라는 형식의 인종적-유목적-분열증적 극을 띠게 되기도 한다. (명시적으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후자를 잘 보여주는 것은 랭보(Arthur Rimbaud)이며, 그 많은 인용과 암유 속에서만 등장한다.) 분 열-분석의 과제는 그 망상의 본성을 분석하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은 이 데올로기에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 밑에서, 무의식 차원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 * *
지금까지 우리는 “생산의 종합”의 세 국면을 살폈다.
그것은 들뢰즈의 존재론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존재론이 사회 이론에 대해 갖 는 함의의 일부를 살피기도 했다.
이어지는 5장에서 우리는 정신분석 쪽 에서 들뢰즈에게 가한 대표적인 비판을 고찰하고 그에 대한 들뢰즈의 가능한 대응을 제시할 것이다.
정신분석이 핵가족 및 그 구성원인 아빠-엄 마-나의 삼각형을 고착화함으로써, 자본주의에 어떻게 복무하는지, 그리하여
책이 왜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제목을 얻게 되었는지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가 흐름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들 뢰즈의 ‘화폐 이론’을 중심으로 설명할 것이다.
5장. 자본주의 비판
우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 대해 정신분석 입장에서 가한 비판의 몇 몇을 알고 있다.
그 중에서 우리가 고찰하려는 것은 지젝과 맹정현의 비판이다(1절과 2절).
다 알다시피 지젝은 들뢰즈에 대한 가장 최근의 가장 강력한 비판서를 쓴 바 있다.
한편 맹정현은 한국의 훌륭한 라캉 학자로서 자신의 저서에서 많은 분량을 안티 오이디푸스비판에 할애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이 두 학자의 비판적 논의는 지금까지 안티 오이 디푸스와 관련해 개진된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그에 대한 고찰과 응대 는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고 본다.
이어서 우리는 정신분석을 비판하면서 들뢰즈가 개진하는 분열-분석 의 작업을 ‘제도 분석’(3절) 및 ‘자본주의 비판’(4절)
이라는 맥락에서 고찰 할 것이다.
특히 5절에서는 자본주의의 기능 원리를 ‘화폐 이론’의 관점 에서 살피게 될 것이다.
바로 화폐의 층위에서만 ‘자기 예속의 욕망’ 내지 ‘순응하는 유순한 주체’의 문제가 해명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들뢰즈의 존재론이 실천 철학의 관점에서 어떤 독자성 을 지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1. 들뢰즈를 과타리에서 구출하라?
지젝의 안티 오이디푸스비판은 직접적이지 않고 우회적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신체 없는 기관. 들뢰즈와 결과들(2004)의 서론에서 이 책 의 “시류에 역행”하는 특성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의 출발 전제는, 이러한 들뢰즈(펠릭스 과타리와 공동 저술한 책들의 독서에 기초한 유행하는 들뢰즈 이미지) 이면에는 정신분석과 헤겔에 훨씬 가까운 또 다른 들뢰즈가 있으며, 이 들뢰즈의 결과들은 훨씬 더 파열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안티 오이디푸스와 의미의 논리사이에서 — 즉 존재의 물화된 질서에 맞서 생성 (Becoming)의 생산적 다수성(multitude)을 찬미한 들뢰즈와 의미 - 사건 (Sense-Event)의 비물체적 생성의 불모성과 관련된 들뢰즈 사이에서 — 들뢰즈 사고 의 내적 긴장을 식별하는 데서 시작한다.”(Žižek 2004: xi)
요컨대, 생성의 생산적 다수성을 강조한 안티 오이디푸스(1972)와 의 미-사건의 비물체적 생성의 불모성을 강조한 의미의
논리(1969) 사이에는 내적 긴장이 있으며, 지젝 자신은 후자를 중심으로 과타리의 “나 쁜” 영향을 통해 “과타리화된” 들뢰즈를 구출하겠다는 전략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과타리에 의해 나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들뢰즈 가 직접적으로 정치적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을 가리킨다.
“들뢰즈 자신의 텍스트 중 단 한 가지도̇ ̇ ̇ ̇ ̇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지 않다̇ ̇. 들뢰즈 “자 신”은 정치에 무관심한 고도의
엘리트 작가다. […]
들뢰즈를 과타리에게로 돌아서 게 한 본래적인 막다른 골목은 무엇일까? 들뢰즈의 저서 중 아마 최악일 안티오이디푸스는 단순화된 “평면적” 해결책을 통해 교착상태(deadlock)의 완전한 대치를 회피한 결과 아닐까?”(Žižek 2004: 20-1)
그리하여 지젝은 들뢰즈를 관통하는 두 개의 논리, 두 개의 개념적 대립 들을 지적하기에 이르며, 이 둘 사이의 교착상태를 다시 검토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단히 흥미롭게도 지젝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고 제시하는 두 개의 논리는 들뢰즈의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델란다(Manuel DeLanda) 의 강도적 과학과 잠재적 철학(2002)에서 유래한다.
지젝이 제시하는 대목은 정확히 이렇다(Žižek 2004: 21).
“(1) 한편으로 의미의 논리가 있다. 즉 의미-사건으로서의, 신체적-물질적 과정들원인들의 효과̇ ̇ (EFFECT)로서의 비물질적 생성의 논리가 있다.
이 논리는 발생적 과 정과 그것의 비물질적 의미-효과 사이의 근본적 간극의 논리다.
“물질적 원인의 비 물질적 효과인 다양체들은 무감수적인(impassible) 또는 인과적으로 불모적인 존재물들이다.
언제나 이미 지나간 동시에 영원히 아직 도래할 순수 생성의 시간은 다양 체들의 이러한 무감수성 또는 불모성의 시간적
차원을 형성한다.”[DeLanda 2002: 107-8] […]
(2) 다른 한편으로 존재들 (Beings)의 생산̇ ̇ (PRODUCTION)으로서의 생성의 논리가 있 다. “계량적 또는 연장적 성질들의 창발(emergence)은 연속적인 잠재적 시공간̇ ̇ ̇ ̇ ̇ ̇이 점 차 현행적인 불연속적 시간-공간적 구조들로 분화하는 어떤 단일한 과정으로 다루 어져야 한다.”[DeLenda 2002: 102]”
여기서 (1)은 의미의 논리의 논리를 가리키며 (2)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논리를 가리킨다.
지젝이 들뢰즈에서 재발견하려는 것은 (1)에 나타난 “의미의 논리”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그 핵심을 이루는 “준-원인 (quasi-cause)”의 논리이다.
지젝 자신이 안티 오이디푸스의 텍스트 내적 비판을 수행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비판 논거를 지젝 자신의 텍스트에서 단지 추정해 볼 수밖에 없다.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에서 안티 오이디푸스로 진행 한 것은, 지젝이 보기에는 ““물화된” 결과에서 그것의 생산 과정으로
퇴 행한다는 오래된 인간주의적-관념론적 토픽의 재가동”(Žižek 2004: 28)에 불과하다.
그것은 “발생적 과정(generative process)으로서의 생성”(28) 또는 “현실을 발생시키는 역량(power that generates reality)
으로서의 사건”(30)에 만 집중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적어도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억압”의 힘을 욕망에 내속하는(inherent) 것으로 착상한다.
일종의 니체적 계보학 속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욕망의 바로 그 내재적 전개로부터 반동적인, 삶을-부정하는 결핍과 단념의 태도를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
들뢰즈에게서 욕망은 욕망 자체와 그것의 “억압”(즉 욕망의 부정하 는 힘)을 포괄하는 통일체이다. […]
들뢰즈에게 (머리 없는, 익명의, 비인물적인 …) 주체 (Subject)는 욕망 (Desire) 자체이며 그것은 자신의 대립물(“억압”)을
포괄한다/발 생시킨다.”(71-2)
여기서 지젝이 지적하려는 것은, 어떻게 욕망 자체와 욕망의 억압이 통일체를 이룰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래서 이를 지젝은 “헤겔적 몸짓”(72)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점에서, “들뢰즈는 헤겔과 같다 (equals).”(49) 아마도 들뢰즈의 한계는 “생기론(vitalism)”에, 즉 “ 생명 (Life) 개념을 ‘ 존재 (Being) 자체의 유일하게 참된 포괄적 전체 (Whole)로서의, 존 재 자체의 일자 - 성 (One-ness)으로서의 생성 (Becoming)’에 대한 새 이름으 로 고양”시켰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28).
사실 이러한 “욕망의 딜레마”는 더 최근에도 다루어진 바 있다.
문성원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문성원 2008: 68-70), 들뢰즈가 욕망을 중심 개념으로 들고 나온 까닭은 욕망의 해방적 성격
때문이었다.
“이러한 해방 적인 욕망, 즉 사회를 해방하는 욕망이자 스스로 해방되는 욕망은 미규 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목적론의 덫에 빠지지 말아야 욕망은 해방적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욕망의 산물을 예측하기는 곤란”하며, “욕망에 대한 기대는 일종의 비합리에 의존하는 모험”으로 비 칠 수
있다.
그렇지만 비합리가 우리의 예측을 넘어선다고 해서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일 비합리가 합리의 바탕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비합리의 차원은 합리의 차원보다 더 실재적일 수가 있다.”
들뢰즈가 받아들이는 것이 이러한 비합리적 욕망의 실재성 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단지 해체나 파괴에 초점을 맞춘 욕망이 아니 라 생산적 욕망이다.
“그것은 어떤 정해진 것의 생산, 나아가 어떤 동일한 것의 재생산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생산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의 생산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산이다. 그것은 차라리 자연의 생산에 해당하며, 더 정확히 말하면 자연과 인간의 구별을 넘어서는 흐름과 절단의 끝없는 과정을 나타낸다. 그런 점에서 이 생산은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1969)에서 말하는
차이, 즉 끊임없이 달라지면서 생성하는 차이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만하다.”(문성원 2008; 69)
이 욕망 개념의 도입을 통해 “기성의 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움의 도래”를 노린 것은 유의미한 시도이다.
그렇지만 “생산하는 욕망”을 앞세운 그 시도는 “욕망의 분출을 억압하는 현실”의 문제와 관련하여 “욕망의 딜레마”에 부딪히고 만다.
“욕망이 혁명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이 욕망을 억누르는 것 또한 욕망이 아닌가. […]
욕망의 억압 또한 욕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76, 82) 왜냐하면 “탄압 역시도 욕망되고 있으니 말 이다.”(AO 138-9)
그래서 “욕망의 분출에 걸었던 기대와 희망은 상당히 퇴색”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욕망의 결과, 반목적론적인 결과”라고 여겨진다(문성원 2008: 80)
아마도 천 개의 고원에서 “욕망 의 해방과 욕망의 억압이라는 선명한 대치 대신에 욕망의 다양한 배치와 다양한 길이
제시”(79)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성원의 이런 비판적 고찰은 지젝이 생략적으로 다룬 안티 오이디푸스의 논리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4장에서도 언급되었고 이어지는 절에서도 논의되겠지만, “욕 망의 억압”이나 “욕망의 딜레마”는 들뢰즈에서 제기
되는 문제가 아니라 는 점을 잠시 지적해야 하겠다.
이런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인간 주의적 관점에서 욕망을 이해한 결과이다.
일단 억압은 욕망적 생산 내부에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주의 운행의 한 원리로서 존재한다.
다음으로, 사회적 차원에서의 욕망의 탄압은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욕망의 억압에서 비롯되지만, 탄압되는 것은 바로 욕망적 생산이다.
따라서 인간 욕망의 억압이라든지, (인간) 욕망의 분출을 억압하는 욕망이라는 이해 방식은 들뢰즈의 욕망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들뢰즈는 호모 나투라로서의 인간, 즉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에 합류하는 것을 욕망의 해방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미치도록 사는 것이 욕망 의 해방이라는 말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러한 실 천이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3절 이후의 논의에서 확인하게 될 것 이다.
이제 우리는 지젝이 의미의 논리의 논리라고 부른 것을 본격적으로 살필 차례이다.
지젝은 들뢰즈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잠재(le virtuel)” 내지 “잠재성(virtualité)” 개념을 중심에 놓는다.
책의 서두에서 지젝은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들뢰즈의 잠재(the virtual)라는 개념을 지탱해주는 존재 (Being)와 생성 (Becoming) 간 의 존재론적 대립은, 그 궁극적 준거점이 (생성 없는 순수 존재라는 형이상학적 개 념과 대립되는) 존재 없는 순수 생성̇ ̇ ̇ ̇ ̇ ̇ ̇ ̇이라는 점에서 근본적 대립이다.
이 순수 생성 은 어떤 물체적 존재물의̇ 특수한 생성,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 물체적 존재 물의 이행이 아니라, 그것의 물체적 기반에서 완전히 추출된 생성-그-자체 (becoming-it-itself)이다.”(Žižek 2004: 9)
여기서 지젝이 “생성 없는 순수 존재”라는 말로 지칭하는 것은 파르메니 데스의 존재이다.
이에 대립해서 들뢰즈는 “존재 없는 순수 생성”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
러나 지젝의 이런 언급은 대단히 잘못된 지적 이다. 들뢰즈는 어디서도 “존재 없는 순수 생성”을 말한 적이 없다.
이미 초기 저술인 니체와 철학에서부터 들뢰즈는 “생성만이 존재”하며, “존 재란 생성의 존재”라고 반복해서 말한다(NP 27 등).
지젝이 이처럼 무리 한 외삽을 통해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를 단순화해서 제시하는 까닭은 들뢰즈로부터 “준-원인(quasi-cause)” 또는 “준-인과성(quasi-causality)”의 개념을 끌어내기 위해서이다.
여기서도 지젝은 들뢰즈의 텍스트가 아닌 델란다의 텍스트에서 간접 인용한다. 우선 그 개념이 인용되는 전후 맥락을 보도록 하자.
“들뢰즈는 다양체들을 물체적 원인들의 비물체적 효과들̇ ̇ ̇ ̇ ̇ ̇ ̇ ̇ ̇ ̇ ̇ ̇ ̇ ̇, 즉 그 자체의 인과적 역 량들을 전혀 소유하지 않은 현행적 원인들의 역사적 결과물로 본다. 다른 한편, 그 가 쓰고 있듯이, “그것들이 이 원인들과 본성상 서로 다른 한에서 그것들은 서로 준̇-인과성̇ ̇ ̇의 관계를 맺게 된다. 서로 함께 그것들은 어떤 준̇-원인̇ ̇과, 그 자체로 비 물체적이면서 그것들에게 매우 특별한 독립성을 확보해주는 준̇-원인̇ ̇과 관계를 맺 게 된다.” … 언제나 변용시키고 변용하는 능력인 현행적 능력과는 달리, 잠재적 정 감들은 (무감수적 다양체들이 보여주는) 순수한 변용할 능력과 순수한 변용시킬 능̇ ̇ ̇ ̇ ̇ ̇ ̇ ̇ 력̇으로
예리하게 나뉜다.”(DeLenda 75; Žižek 2004: 26 재인용; 중간 인용은 의미의 논리 영역본 169쪽에서, LS 198)
여기서 지젝이 구분하려고 하는 것은 물체적 차원과 비물체적 차원의 예 리한 구분이다.
전자는 “현행(actual)”의 차원에 속하는 반면, 후자는 “잠 재(virtual)”의 차원에 속한다. 그리고 전자의 세계에 속하는 인과의 그물 은 후자의 개입을 통해서, 말하자면 “준-인과성”을 매개로 해서만 완성 된다.
“준-원인은 이차적 층위의 원인이다, 즉 그것은 (물체적) 원인들을 초과하는 효과의 바로 그 과잉의 메타원인(metacause of the very excess of the effect over its (corporeal) causes)이다. […] 들뢰즈의 존재론의 기본 전제는, 정확히, 물체적 인과성은 완결되 어 있지 않다̇ ̇(is not complete)는 것이다. 물체적 원인들과 결과들의 수준에서는 적절 하게 기술될 수 없는̇ ̇ 무엇인가가, 새로운 것 의 창발(emergence of the New) 속에서, 일어난다. […] 준-원인은 물체적 인과성의 틈을 메운다̇ ̇ ̇ ̇ ̇ ̇ ̇ ̇ ̇ ̇ ̇
̇( fills in the gap of corporeal causality ).”(Žižek 2004: 27)
하지만,“생산적 생성 대 물화된 존재를 방향을 취한 안티 오이디푸스에는 “준-원인”이라 는 들뢰즈의 핵심 개념을 위한 자리가 없다. “준-원인”은 물체적 원인들과 관련해 서 사건들의 불모이며 무감수적인 흐름의 자율성을 유지하기 위해 들어온 다.”(91-2)
여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지젝은 물체적 인과 과정만 존재한다면, 자유의 여지가 사라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지젝은 칸트의 현상계에 나타나는 물체적 인과 과정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를 마련하기 위해 들뢰즈의 “준-원인” 개념을 적극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유의 문제에 대한 논의를 더 살펴보기 전에, 지젝의 의미의 논리 독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는, 델란다의 들뢰즈 이해가 표준적인 것에서 벗어난다는 점, 가령 들뢰즈의 철학을 “창발”을 통해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점이고, 둘째 는 지젝이 생각하는 “준-원인” 개념은 들뢰즈의 것과 다르며, 그 개념이 의존하는 “잠재” 개념은 의미의 논리에서 거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것이다.
둘째 문제는 지젝이 델란다의 논의에서 자신의 논거를 끌어오면서 야기된 것으로서, 첫째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 실 지젝은 들뢰즈 자신의 의미의 논리와 안티 오이디푸스에 대한 텍스트 내적 비판을 수행하지 않음으로써 독자에게
많은 모호함을 남긴다.
우리는 둘째 논점부터 살펴보도록 하겠다.
사실 들뢰즈의 의미의 논 리에서 방금 인용한 지젝의 구절에 언급된 “물체적 원인들과 결과들”이 라는 표현은 애초에 성립
되지 않는다.
‘의미’의 문제와 관련하여 들뢰즈 가 참조하는 것은 스토아학파의 이론이다.
스토아학파에서 원인들은 물 체적인 것에 속하며, 결과들 내지 효과들(effets)은 비물체적인 것에 속한다.
“준-원인” 개념이 처음 등장하는 대목을 전후로 해서, 더 자세히 살 펴보자.
“스토아학파는 원인들을 원인들에 관련시키며, 원인들 사이에서 원인들의 연관(운 명)을 긍정한다.
스토아학파는 결과들(effets)을 결과들에 관련시키며, 결과들 사이에 서 결과들의 어떤 연줄들을 정립한다.
하지만 이는 결코 같은 방식으로가 아니다.
비물체적 결과들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 원인들이 결코 아니며, 단지 “준-원인들 (quasi-causes)”일 뿐으로, 필경 각
경우에서 그 결과들이 자신들의 현실적 원인들로 서 의존하고 있는 상대적 통일성 내지 물체들의 혼합을 표현하는 법칙
들을 따른 다.”(LS 15)
여기서 들뢰즈가 구별하고 있는 것은 i) 심층(profondeur)에서 현재에 작 용(actions, 능동)과 겪음(passions, 수동)의 관계를 맺고 있는 물체들(corps) 과 ii) 표면(surface)에서 그 작용과 겪음의 결과물(résultas)로서 아무 것도 겪지 않는(impassible, 무감수적) 비물체적 결과이다.
후자가 들뢰즈가 말 하는 “의미(sens)”이고 “사건(événement)”이다.
다시 말해, 들뢰즈는 원인들은 심층의 물체의 영역에만 있으며, 이 원인들과는 본성을 달리하지만 이 원인들을 표현하는
표면의 결과들(des effets de surface)이 (실존(exister) 한다는 것과 구별되는 차원에서) 존속(subsister)하거나 내속(insister)한다 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LS 14).
이처럼 들뢰즈가 “준-원인”이라는 표현을, 그것도 따옴표를 통해, 도 입한 것은, “자유(liberté)”를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그렇지만 이는, 뒤에서 보게 될 지젝의 지적과는 달리, “자유의지”를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스토아학파의 용어로 말하면, “운명애(amor fati)”(LS 175, 177)를 위해서였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가 드는 특권적인 사례는 조에 부스케(Joë Bousquet)이다.85)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척추에 부상을 입 고 이후 30년 넘게 침대에서 떠날 수 없었다.
그러한 부스케의 “윤리”는 들뢰즈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에,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건이 우리에게 만들어주는 이 의지에 도달하는 것, 우리 안에서 자신을 생산하 는 것의 이 준-원인이 되는 것, 조작자 (l’Opérateur)가 되는 것, 사건이 자신을 반영하 는 표면들 내지 대역배우들(doublures)을 생산하는 것. […] 도덕은 아무 의미를 갖지 않거나, 아니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도달하는 것에 걸맞지 않 지 않기(ne pas ê̂tre ingigne de ce qui nous arrive)’이며 이것 말고는 다른 의미를 전혀 갖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다. 반대로, 도달하는 것을 불의이며 부적격이라고 파악 하는 것(그건 항상 누군가의 잘못이야)은 우리의 역겨운 상처들을 되찾는 것, 인물 로 나타난 원한감정(ressentiment), 사건에 대립하는 원한감정이다. 그밖에 나쁜 의지 란 없다. […]
부스케는 말한다. “나는 의지의 파탄인 내 죽음의 취향을, 의지의 영예 일 죽으려는 선망(envie)으로 대체하리라.”
이 취향에서 이 선망으로 가면서, 의지의 변화 말고는, 그의 정신적 의지에 대항하는 유기적 의지를 바꾸는 몸 전체의 일종 의 제자리에서의 도약 말고는, 유머적인 모호한 부합(obscure conformité)의 법칙들에 따라, 지금 정확히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도달하는 것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바라 는, 도달하는 것에 부합하는 것으로부터 도래하는 무엇인가를 바라는 일종의 제자 리에서의 도약 말고는, 즉 사건 (Evénement) 말고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
바로
85) 또한 DRF 363 참조.
이런 의미에서 운명애̇ ̇ ̇는 자유인들의 전투와 하나일 따름이다.”(LS 174-5)
“우리에게 도달하는 것에 걸맞지 않지 않기”라는 들뢰즈의 표현은 이어 “우리에게 도달하는 것에 걸맞은 생성(devenir digne de ce qui nous arrive)”(LS 175)이라는 표현을 얻기에 이른다.
여기서 이야기되는 것은 우 리에게 도달한 것(사고[accident])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윤리이다.
특히 부스케처럼 큰 부상을 입었을 경우 사람들은 니체적인 뜻에서의 원한 감정에 사로잡히기 쉽다.
말하자면, 더 이상 사는 것이 아니라 복수심 속 에서 저주하기만 하는 상태를 지속하기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스케는 자신을 일종의 “준-원인”으로 만들어, 사고(事故, accident)를 극복하여 하나의 연기자(doublure)로서 살아가고자 한다.
그것이야말로 부스케의 윤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이 삶의 방식에 대해 계속해서 말한다.
여기서 들뢰즈는 뜬금없는 듯 보이지만 배우 또는 희극배우를 예로 들고 있다.
“배우(acteur)는 재현한다. 하지만 그가 재현하는 것은 언제나 아직 미래와 이미 과 거이다.
반면 그의 재현은 무감수적이며(impassible), 파열 없이, 작용과 겪음 없이, 자신을 나누며 이중인격이 된다(se dédoubler). 희극배우(comédien)의 역설이 존재하 는 건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그는 끊임없이 앞서가고 뒤처지는 어떤 것, 끊임없 이 희망하고 상기하는 어떤 것을 연기하기(jouir) 위해, 순간 속에(dans l’instant) 머문 다. […] 배우는 사건을 실효화하지만, 사건이 사물들의 심층에서 자신을 실효화하 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식으로 그렇게 한다.
또는 차라리, 배우는 이 우주적 물리적 실효화(effectuation)를 또 다른 자기 나름의 특이하게 표면적인 방식으로, 말끔하고 예리하고 순수하게, 이중화하며, 그것은 첫 번째 것을 제한하게 되며, 첫 번째 것에 서 추상적인 선을 뽑아내고 사건에서
윤곽과 광채만을 간직한다. 자신의 고유한 사 건의 희극배우 되기, 맞-실효화(contre-effectuation).”(LS 176)
여기서 배우 또는 희극배우가 하는 일은, 자신에게 닥친 어떤 사고 (accident)를 무릅쓰고,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그런 사고에도 불구하고(trotzdem), 어떤 다른 연기를 행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이중인 격”이라 부를 만하며, “순간 속에서” 사고를 사건으로 바꾼다.
이것이 “준-원인”으로서의 연기자, 배우, 희극배우가 하는 일이며, 이것이 들뢰 즈가 생각하는 부스케 식의 윤리적 삶이다. 여기서는 일어난 일에 걸맞 은 삶의 태도가 어떻게 행해져야 할지만이 문제이다.
가령 배우는, 특히 희극배우는, 연기를 할 때, 무대 밖에서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과 스스로 단절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연기는 불가능하다.
특히 희극 연기는 무대에 오르기 전의 일을 간직한 채로 있다면 원리상 불가능 하다.
따라서 배우가, 특히 희극배우가 행하는 윤리적 행위의 기초는 그 자신이 “이중인격자”가 되어 그에게 닥친 일과 그가 행하는 일을 철저히 분리하는 데 있다.
들뢰즈가 거듭 부스케를 강조하는 것은 이런 까닭이 다.86)
나아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분열자의 모습을 배우처럼 묘사할 때 이런 특성은 더 두드러지게 된다(AO 103-4).
이상에서 우리는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에서 “준-원인” 개념을 도입 한 것이 물리적 세계의 인과에 효력을 미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세계에 서 일어난 일에 대해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하느냐 하는 윤리적 과제에 답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준-원인”이라는 개념은 물체적 세계에 작용할 수 있는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 명칭을 얻게 되었다는 점 또한 확인된다.
그러나 지젝은 이 점을 오해해서 “자유의 지”의 도입을 위해, 말하자면 물체적 인과에 개입하는 한 요인으로서 “준-원인”의 위상을 설정했던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이차적 층위의 원 인”인 “준-원인”은 “(물체적) 원인들을 초과하는 효과의 바로 그 과잉의 메타원인”으로, “물체적 인과성의 틈”을 메운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것
86) 가령 차이와 반복의 다음 구절들을 보라. “배우는 코레(Koré, 고대 그리스의 처녀 조각상)의 역할을 하는 중인 노인의
역할을 해야 한다.”(DR 18) “하지만 셋 째 종합에서, 현재는 단지 하나의 배우(acteur), 자신을 지우기로 예정된 하나의 저자, 하나의 담지자(agent)일 뿐이며, 과거는 결여(défaut)에 의해 작동하는 하나 의 조건에 불과하다. 여기서 시간의 종합은 자신의 조건과 관련한 생산물의 무제 약적(inconditionné) 성격은 물론 자신의 저자 또는 배우와 관련한 작품의 독립성 도 긍정하는 하나의 장래(avenir)를 구성한다.”(DR 125)
의 창발”을 낳는 것으로 이해된다. 심지어 지젝은 “물질로부터 그것의 “창발적 성질”로서의 정신의 출현이라는 문제”(Žižek
2004: 88)를 의미 의 논리의 핵심 문제로 이해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여기서 지젝의 수사 학을 걷어버리고 나면 남는 것은,
물리적 세계의 인과 그물 바깥에서 물 리적 세계의 원인에 해당하는 무엇인가(“준-원인”)가 물리적 세계의 인 과 그물에
개입해 그 인과의 사슬을 끊을 수 있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이는 들뢰즈의 주장이 결코 아니며, 지젝이 들뢰즈에서 끌어낼 수 있는 귀결도 결코 아니다.
그것은 들뢰즈에 대한 과잉 해석이며, 정확히 말하 자면, 창조적이지 못한 오독일 따름이다.
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지젝의 첫째 논점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들뢰즈의 ‘잠재’ 개념과 관련된다. 앞에서 보았듯이, 지젝은 델란다 를 경유해서 “존재 없는 순수 생성”으로서의
“잠재”의 개념을 뽑아내는 데, 그것은 “무감수성(impassibility, 겪지 않음)” 및 “인과적 불모성”을 특 징으로 한다.
그리고 의미의 논리의 “준-원인”은 바로 이 잠재의 차원 에 속하는 것으로 소개된다.
나아가 이를 통해 자신의 책의 제목이 유래 한 “신체 없는 기관(organs without bodies)”이라는 표현을 이끌어내기까지 한다.
“생산적 생성 (Becoming)의 장소로서의 잠재와 불모적인 의미 - 사건 (Sense-Event)의 장소로서의 잠재의 대립, 이는 동시에 “기관 없는 몸”과 “신체 없는 기관”의 대립이지 않은가?”(Žižek 2004: 30)
의미의 논리가 참조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속에 나오는 순수 사건으로서의 미소 만 남은 고양이가 바로 ‘신체 없는
기관’을 대표한다.
“‘그래! 웃음 없는 고양이는 종종 본 적이 있어.’ 앨리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고양이 없는 웃음이라니! 내 생에 본 것 중 가장 신기하군!’” 그리하여 지젝은 의미 의 논리의 들뢰즈에서 결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낸다.
“들뢰즈의 전 요점 은, 의미가 물질적 원인들의 무감수적 불모적 효과라 하더라도 실로 그 나름의 자율성과 효능을 갖는다는 것이다.”(69)
그런데 이 추론은 철저히 허구적이다.
왜냐하면 의미의 논리에는 이 추론의 핵심이 되는 잠재로서의 순수 생성 내지 의미-사건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순수 생성 내지 의미-사건은 “잠재”로서 등장 하지 않는다.
사실상 이 책에는 아예 “잠재”라는 개념 자체가 등장하지 않으며, 몇 군데 등장하고 있다 해도 그것은 개념으로 등장한 것이 전혀 아니다.
요컨대 의미의 논리를 진행하는 주요 개념군에는 “잠재”라는 말이 없다.
다 알다시피, 그 개념은 주로 베르그손주의를 비롯한 베르 그손 연구와 차이와 반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바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지젝의 들뢰즈 독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우리가 추정 하건대, 델란다의 개입이 있다. 최소한 지젝은 들뢰즈의 원문이 아닌 델 란다의 정리를 통해 자신의 독해를
정립하고 있으며, 델란다의 편향된 해석과 더불어 지젝 자신이 좋아하는 “징후적 독해”가 결합해서 들뢰즈 에 대한 허구
이미지를 산출한 것이 아닌가 싶다.
가령 델란다와 지젝이 사용하는 “창발(emergence, 떠오름)” 개념만 해도 그렇다.
복잡계 (complexity) 이론에서는, 하위 계층에 없는 성질이 상위 계층에서 생겨날 때 이를 창발이라 부른다.
가령 개미 각각에는 지능이 없지만, 개미 사회 는 정교한 지능에 의해 조직된 것처럼 살아간다.
그렇다면 들뢰즈가 말 하는 비물체적 생성(의미-사건)이 과연 창발 현상인가?
앞에서 심층의 물체들에 존재하는 원인들과 원인들의 관계는 표면의 결과들 간의 관계들과 구별된다는 것을 보았다.
원인들은 원인들과만 관계를 맺고, 결과들은 결과들과만 관계를 맺는다.
이는 통상 말하는 인과관계도 아니고, 복잡계 이 론의 창발 현상도 아니다.
게다가 지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표면의 결 과들”이 지닌 “나름의 자율성과 효능”을 통해 인간 자유의지를 재도입하려
한다(Žižek 2004: 41-5, 111-47).
이는 지젝이 들뢰즈에게 비난의 어조 로 사용했던 “인간주의적-관념론적 토픽”을 그 자신이 도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젝은 자유의 문제에 자신의 저서 2부 1장(「과학」) 전체를 할애한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자유로운 주체이다. 앞에서 보았듯 자유로운 주체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성립 불가능하다.
따라서 지젝이 안티 오이디푸스전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 하겠다.
조금 길기는 하지만, 자유와 인과성에 대한 지젝의 입론은 현대철학 일반 및 정 신분석에서의 최신 논의를 집약하기
때문에 충분히 살필 의의가 있다.
“주체는 반성성의 주름인바, 이를 통해 나는 나를 규정하도록 허용된 원인들을 소급 적으로(retroactively) 규정하며, 또는
적어도 이 선형적 규정의 양태̇ ̇를 규정한다.
그리하여 “자유”는 본래부터 소급적이다.
가장 기초적인 차원에서, 자유는 아무 데도 아닌 곳(nowhere)으로부터 새로운 인과적 연계(link)를 시작하는 자유로운
행위에 불 과한 것이 아니라, 나아가 필연성들의 어떠한 연계/연쇄가 나를 규정하게 될 것인지를 승인하는 소급적 행위이다. […] 자신의 원인들에 대한 결과의 이 과잉(excess)은 또한 결과가 소급적으로 자신의 원인의 원인임을 의미한다. […]
이 소급적 인과성은, 결 과 그 자체에 의해 자신의 원인들에 행사되는바, 자유의 최소한의 필수조건(sine qua non)이다.
만약 이 자유가 없다면 결과들은 어떤 면에서 자신의 원인들 속에 선 재할 뿐 아니라 곧바로 자신의 원인들보다 선재하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만약 원 인과 결과 사이에 과잉/틈이 없다면 결과는, 자신의 원인에 앞서 미리 주어지리라는 — 그리고 인과적
연계의 전개를 그 전개의 숨겨진 목적(telos)으로서 규제할 것이라 는 — 의미에서, 자신의 원인보다 선재하리라. (헤겔의
말처럼) 목적론은 선형적 기 계적 인과성의 진실이니까.
한 발 더 나아가본다면,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자신의 원 인에 대한 결과의 과잉에 관한 이러한 언명이, 자유의 가능성에
관한 이러한 언명이, 들뢰즈의 유물론̇ ̇ ̇의 근본적인 언명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요점은 단지 다수 의 물체들의 물질적 현실에 대한 비물질적 과잉이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이 과잉이 물체들 자체의 층위에 내재적이라는 점이기도 하다. […]
의미 - 사건 은 물체적 원인들의 복합적 그물로부터 창발̇ ̇하는 어떤 것이지 않은가? […]
자유는 내가 결코 전적으로 환경의 희생물이지는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제나 나는 어떤 환경이 나를 규정할 지를 규정하는 최소한의 자유를 이용한다. […]
해결책은 바로 물리적 인과성의 불완 전성이라는 생각에 있다. 자유는 나를 규정하게 되는 인과 사슬을 소급적으로 규정
하며, 이와 같은 선택의 최소 공간은 물리적 과정들 그 자체의 본래적 비결정성에 의해 지탱된다.
실체적 의미에서, 당연히 자유는 의식의 인과적 역할이 순수하게 타 동사적(transitive)이지 않다는 것을, 의식은 “그것이
야기하도록 야기되어지지 않는 것들을 야기할(cause things it isn’t caused to cause)”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칸트 자신이 말했듯, 새로운 인과적 선/사슬을 무에서(ex nihilo)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 다.
그렇지만 이 “무(nihilo)”는 물리적 현실 그 자체 안에 그것의 인과적 불완전성으로서 위치하고 있다. […]
자유의 공간을 또 다른 실정적(positive) 인과성에 의해 채 워지지 않은 채 열어놓는 것은 바로 물리적 인과성 속의 틈
그 자체이다.
들뢰즈가 표현했듯이, 물체적 인과성의 “너머에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유일한 인과성은 비물질적인 준-원인의 인과성이다.”(Žižek 2004: 112-4)
지젝의 추론 과정은 꽤나 명료하고 간결하다는 장점을 보여준다.
의식적 주체는 물리적 인과 과정의 과잉 또는 틈에 소급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자유를 실현한다.
칸트가 잘 지적했듯이, 자유란 새로운 인과 사슬을 무에서 시작한다는 뜻인데, 이것이 의식의 인과적 역할이다.
그런데 의식은 어떻게 물리적 인과성의 틈에 개입해서 새로운 인과적 사슬을 야기할 수 있는가?
바로 들뢰즈가 말한 “비물질적인 준-원인”으로서 개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의식적 주체는 물리적 환경의 희생물에 그치지 않고, 거기에 소급적으로 작용해서, 나를 규정하게 될 필연성들의 사슬을 선별해 내서 승인한다.
바로 이 점에서, “비물질적인 준-원인” 개 념은 그토록 소중했던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지젝의 추론은 두 가지 점에서 들뢰즈를 위반하고 있다.
우선 지젝은 “준-원인” 개념을 오해하고 있다.
들뢰즈는 오히려 인간은 물리적 현실의 희생물이되, 일어난 일에 걸맞지 않은 존재가 되지 않도록 애쓰는 존재이다.
둘째로, 들뢰즈는 의식적 주체의 자유를 거부한다. 사실상 무의식을 그토록 강조하는 지젝이 오히려 의식적 주체와 자유를 지키려는 것 자체가 모순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이를 통해 지젝이, 그리고 정신분석이, 염두에 두는 무의식은 의식의 외삽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겨나기
까지 한다.
사실이지 무의식에 관한 지젝의 언급은 기묘한 균열을 내포한다.
“그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무의식은 접근 불가능한 현상(inaccessible phenomenon) 이며, 나의 현상적 경험을 규제하는 객관적 메커니즘이 아니다.”(Žižek 2004: 96)
무의식은 “나의 현상적 경험”을 규제하는 “객관적 메커니즘(기계론)”이 아니며, “접근 불가능한 현상”이다.
칸트에서 나의 현상적 경험을 규제하 는 것은 시공간, 상상력, 범주 등이었다.
그러나 지젝이 보기에 무의식은 이런 식으로, 즉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렇지만 무의 식은 왜 현상이라고 이야기되는가? 현상이란 의식적 경험의 대상이 아 닌가?
이런 점에서 기묘한 균열이 감지되는 것이다.
지젝과 관련해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필 대목은 정신분석을 의미의 논리와 연관시키는 지점이다.
“우리가 정신분석을 신체적 원인 대 비물질적 생성의 흐름이라는 이 들뢰즈적 대립 내에 위치시키려고 한다면, 정신분석은 심적 삶의 “현실적인” 신체적 원인들의 과 학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건들의 흐름의 “표면” 층위에서 움직이는 과학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심지어 (그리고 정확히) 정신분석이 신체를 다룰 때조차 그 신체는 신체의 생물학적 “내부”가 아니라, 모두 표면 (SURFACE)에 위치해 있는 다수의 성감대로서의 신체이다.”(Žižek 2004: 93)
지젝이 강조하는 것은 정신분석이 다루는 영역이 “물체 내지 물질”의 차 원이 아닌 “비물질적 표면”의 차원이라는 점이다.
지젝이 안티 오이디 푸스를 비판하면서 의미의 논리에 머문 것은 이유가 없지 않다.
우리 가 보기에 지젝은 물체 내지 물질이 “표면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을 회피하려 한 것 같다.
반면 들뢰즈는 직접 존재의 세계로 뛰어든다.
그 작업이 안티 오이디푸스의 존재론과 정치 철학이었다.
지젝은 이런 작 업에 대해, 바디우(Badiou 1997: 8)에 동의하면서, “들뢰즈 자신의 비합리 주의적 생기론의 파시즘”(Žižek 2004: 191)이라는 격한 비판을 감행한다.
물론 이 비판은 어떤 근거 제시도 없고 감정적이며, 그런 점에서 부당하기 그지없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지젝은 안티 오이디푸스에 대한 “징후적 독해”에 머물렀을 뿐, 텍스트 내적 이해 또는 비판을 감행하지 않았 다.
심지어는 의미의 논리마저도 전혀 들뢰즈의 것이 아닌 책으로서 읽고 말았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이 “인간주의적-관념론적 토픽”에 머문 결과로서 이해되며, 정신분석 전체가 혹시 그런 식은 아닌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2. 정신분석의 모범적인 들뢰즈 비판
우리는 정신분석 또는 라캉의 입장에서 안티 오이디푸스를 비판하는 드물지만 좋은 사례를 알고 있다.
맹정현(2009)은 리비돌로지의 3부 3-4장에 걸쳐 들뢰즈와 라캉을 대결시키면서, 라캉의 입장에서 들뢰즈 를 비판한다.
그는 우선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라캉’이란 이름은 (그리 고 우리가 보기에는 ‘프로이트’라는 이름도 마찬가지로) 세 맥락에서 등 장한다고 지적한다.
i) 라캉이란 이름 대신 “라캉주의”나 “라캉의 제자 들”을 등장시켜 “교조적 라캉주의”와 라캉을 분리하고 “라캉의 대변해
라캉의 제자들과 논쟁하는” 들뢰즈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층위가 있고,
ii) 라캉이 “정신분열을 분열증화한 최초의 인물”로 등장하는 층위가 있으며,
iii) 오이디푸스 비판에 있어 “거세”라는 논점을 내세운다는 이유 로 “퇴행의 조짐을 보이는” 라캉이 등장하는 층위가 있다
(맹정현 2009: 331-3).
하지만 우리는 이 세 층위 중 첫째 층위를 구분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맹정현이 언급한 “라캉의 제1세대 제자 들”은 장 라플랑슈(Jean Laplanche), 장베르트랑 퐁탈리스(Jean-Brtrand Pontalis), 에드몽 오르티그(Edmond Ortigue), 세르주 르클레르(Serge Leclaire), 모 마노니(Maud Mannoni) 등인데, 사실 이들은 들뢰즈가 라캉의 대변자를 자처하면서 맞서 싸우는 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라캉에 맞서는 데 있어 우군으로 삼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제외한다면 맹정현의 구분은 안티 오이디푸스에 라캉 및 정신분석 이론가들이 등장하는 세 층위를 일별하기에는
무리가 없다. 물론 들뢰즈의 작업은 둘째 층위 와 셋째 층위를 오가면서 진행되고 있다.
맹정현이 문제로 삼는 첫째 쟁점은 “거세(castration)”이다.
“거세란 오이디푸스화 이전에 주체가 말하는 주체로서 언어를 관통할 때 발생하는 성적 주이상스[향유]의 상실”을 가리키며, “나와 타자̇ ̇가 말의 장벽에 의해 가로막혀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334-5).
라캉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거세란 바로 이 ‘실재적 타자̇ ̇’와 ‘상징적 타자̇ ̇’의 간극”을 가리키며, “남근” 또한 전제군주적 기표에 의해 초래된 어떤 효과가 아니라 “그것의 상징 적 효과에 의해 포섭되지 않는 성적 차이”를 가리킨다(335-6).
그리고 “성적 타자̇ ̇와의 거리로서의 거세가 실재적인 것은 성적 차이가 바로 그 실재의 핵을 이루기 때문”이며, “남성은
‘동일성’으로 귀착하는 반면, 여성은 남성에게뿐 아니라 그 자신에게조차 타자̇ ̇의 위치에” 놓인다 (338-9).
우리는 여기서 i) 언어에 의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른바 “불가 능한 실재”가 강조되는 것을, 또한
ii) “동일한 개념군”에 속하는 “실재와 거세”의 중핵에 남성과 여성을 통한 비유가 사용되는 것을 목격한다.
우선 언어는 라캉의 논의의 중심에 있다(상징계, 기표, 기의, 의미화 등은 모 두 언어를 세분한 것들이다).
언어는 인간적 현상이며, 언어를 둘러싼 타자와의 거리 내지 차이가 라캉 정신분석을 추동하는 힘이다.
언어 (langue)건 언어활동(langage)이건 간에, 그것은 인간에 고유한 것임에는 변함이 없다.
다른 한편 ‘성’에 대한 두 규정 방식의 차이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분화가 일어난다고 하지만, 그것이 왜 굳이 (인간적인) ‘남성’과 ‘여성’으로 지칭되고 있는지는 알기 어렵다.
“성적 차이는 어떤 해부학적 기관의 존재/부재에 의해 결정되거나 신체의 외양이나 이미지에 의해 결 정되는 것이 아니”
(338)라고는 하지만, 최소한 논리의 전개만 보면 ‘남근’ 과 ‘거세’가 “성적 차이”의 구분에서 중요하게 기능함을 알 수 있다
(339).
성적 차이는 “불가능성의 수준, 실재의 수준”(338)에, 즉 ‘상징계’ 내지 ‘언어의 질서’를 넘어선 곳에 위치한다는 것인데,
들뢰즈에게 성이란 존 재의 생산, 현실의 생산을 가리킨다.
사실 이 장면은 라캉과 들뢰즈의 개 념 체계 및 그 기저에 있는 사상 자체가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하기 때문에 흥미롭다.
이 대목을 조금 더 살펴보자.
상징계(le symbolique) 즉 언어의 차원은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인 실재(le reél, réalité)를 설정하는 장치인데, 실재는
언어가 도달할 수 없다 는 점에서 “불가능”의 수준에 있으며, 라캉은 이 실재를 두 수준에서의“성적 차이”를 통해 분석하려 한다.
“우선 상징계 자체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그 자체로 불가능성의 수준에 자리 잡는 ‘성 적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실재로서의 성적 차이를 어떻게 주체화하느냐에 따라, 다시 말해 실재를 주체화하는 데 오이디푸스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발생하 는 또 다른 ‘성적 차이’가 있다.
즉 남근 지향적 남성(혹은 여성)과 타자 지향적 여성 의 차이가 있다. 성
적 차이가 무의식 속에 기록될 수 없다고 한다면, 여성 또한 무의 식 속에 기록될 수 없다는 것이다. […]
‘하나’의 성과 ‘타자’의 성, ‘같은 것’으로 회 귀할 수 있는 동일자의 성인 남성과 항상 ‘다른 것’으로 분산되는 타자의 성으로서의 여성이 있으며, 이 둘의 성적 차이는 애초에 불가능성의 수준에서 상정되었던 성적 차 이를 배가시킨다.
성의 조합이나 다중적 양태들로는 환원될 수 없는 본원적 간극을 여성의 ‘비존재’라는 간극으로 배가시키는 것이다.
라캉은 바로 이 이중의 간극으로 부터 시작해 실재를 향해 정신분석을 추동하고 있는 것이다.”(맹정현 2009: 340)
이 요약적 진술에서 다시 확인되는 것은, 언어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남녀 성차를 통한 설명이 라캉 작업의 중심을 이룬다는 점이다.
그런데 들뢰즈가 비판하는 것이 바로 이 두 지점이다.
우리가 한국어 로 le réel 또는 réalité를 “현실계” 또는 “현실”로 번역하고자 한다면, 라캉 의 사상적 구도가 들뢰즈의 그것과 다른 위상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우주에 불가능은 없다. 아니 차라리, 가능과 불가능이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오류의 근원이다.
우리가 3장 A에서 살 펴보았듯이,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가능성(le possible, possibilité)” 개념 비판을 적절히 수용했다.
요컨대, 일어난 모든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우주에서 발생한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일어날 힘이 있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단언한다.
“실재[현실계]는 불 가능하지 않다. 반대로, 실재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다.”(AO 35; 또한 42) 나아가 들뢰즈는 라캉과는 달리 무의식 이 현실 그 자체라고, 인간적 차원을 넘어 존재하는 우주적 현실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무의식은 상상계도 상징계도 아니다.
무의식은 실재그 자체요, “불가능한 실재[현실계]” 및 그것의 생산이다.”(AO 62)
이 장 면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점은, 들뢰즈가 인간을 언어적 존재로 규정하 기는커녕 역으로 존재의 차원에서 출발해서 인간을 파악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 쟁점은 맹정현에 의해 “주체”의 문제로 이전된다. 물론 그가 염두 에 두는 것은 인간 주체이다.
“라캉에게 주체는 이론과 실천의 출발점이다. […] 진정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주체 없는 기관들의 욕망(혹은 “기관 없는 몸”의 욕망)과 기관이 아닌 주체의 욕망 사이 에서 욕망의 분석은 과연 어느 쪽에 손을 들어줄 수 있을까? […] 욕망은 기계일까 주체일까?“(맹정현 2009: 342)
우리가 보기에 이 물음은 정확하다. 이 물음이야말로 라캉이 인간 주체 를 중심에 놓고 논의를 개진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들뢰즈는 욕 망을 기계라고 본다. 그리고 기계는 우주이다.
“분열증은 생산과 재생산을 행하는 욕망 기계들의 우주요,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현 실”로서의 일차적인 우주적[보편적] 생산이다. […] 인간은 온갖 형태 또는 온갖 종류 의 깊은 삶과 접촉해 있으며, […] 우주의 기계들의 영원한 담당자이다.”(AO 11; 10)
따라서 우리 식으로 물음을 바꿔 본다면 이러하다.
인간이 먼저일까 우주가 먼저일까? 인간학이 우선일까 존재론이 우선일까? 신학인가 자연 학인가?
우리는 “실천적” 관점에서 인간 주체라는 문제를 더 깊이 따라 갈 필요를 느낀다.
맹정현의 논의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라캉의 입장을 잘 집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맹정현은 라캉의 노선에서 들뢰즈의 분열-분석과 정신분석을 그 지향 과 목표에 있어 흡사하지만 실천적 전략에 있어 차이가 난다고 본다.
i) “어떤 점에서 정신분석과 분열분석의 실천적 목표는 매우 흡사하다.
정신분석이 겨냥하는 바가 환상에 의해 지탱되는 욕망을 환상으로부터 떼어내 충동의 수준으로 고 양시키는 것이라면,
분열분석은 반생산적 욕망을 생산적 욕망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 표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문제는 바로 ‘어떻게’이다.
결국 양자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것은 목표의 수준에서라기보다는 실천적 전략의 수준에서이다.
양자의 전략은 전혀 다른 전제를 상정하며 결국 전혀 다른 윤리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맹정현 2009: 346)
ii) “어떤 면에서 정신분석과 분열분석은 모두 ‘실재’를 향해 나아가며 그런 점에서 동일한 목표를 향해 수렴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이 하의 실천’이냐 ‘전이 밖의 실천’이냐는 문제는 양자가 실재에 대해 취하고 있는 윤리적 입장이 얼마나 다른지 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352)
그러나 우리는 이 진술에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분열-분석과 정신 분석은 서로 다른 지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맹정현은 분열-분석의 지향에 대해 옳게 말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모든 욕망의 기저에 잠재되어 있다고 간주되는 욕망의 혁명적 본성을 되찾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욕망 기계들’이 가지고 있는 ‘생산적 욕망’이라는 본성을 되찾는 것이다.”(343)
말하자면 분열-분석은 정치적 과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인식론적 작업에서 “주안점은 주체에게 반욕망이 투자되는 과정을 분석하는 일에 놓인다. […]
즉 주체가 반욕망을 욕망하는 지점, 주체의 욕망이 반욕망으로 반동적으로 굴절되는 지점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344)
하지만 이 진단은 부정확하다.
여기서 언급된 “반욕망”이라는 표현은 들뢰즈의 것이 아니다.
맹정현은 “어떻게 욕망이 욕망하는 주체 속에서 자기 자신의 탄압(répression)을 욕망하게끔 규정될 수 있는가를 밝혀야”
(AO 125) 한다는 언급을 “반욕망”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앞 절에서도 잠시 지적했듯이, 들뢰즈에게 “반욕망”은 성립하지 않는다.
욕망은 우주의 운행의 순수한 에너지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욕망 은 흐르게 하고 흐르고 절단한다.”(AO 11) “무엇인가가 흐르고 흘러가는 곳에는 어디에나 욕망이 있다.”(AO 125)
그렇지만 여기서 맹정현의 오해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대부분의 비판자들이 그러하듯이 들뢰즈의 욕망 개념을 인간적인 수준에서 해석하는 전형적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그가 들뢰즈의 현실[실재]관에 관해 비판하는 대목 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실재를 생산하는 힘(생산력)으로 규정하면서, 분열분석은 정신분석이 애써 벗어나려고 했던 동력학적 자연주의로의
회귀를 도모한다.
그리고 이러한 회귀의 대가는 욕망, 무의식, 충동을 뒤섞어버리는 것이다.”(맹정현 2009: 345)
이 이해는 정곡을 찌르고 있다.
들뢰즈의 일차적 관점은 존재론이라는 점에서, 나아가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손을 따르는 힘의 존재론이라는 점에서
매우 타당하다.
맹정현의 비판은 역으로 들뢰즈의 성취라는 점에서 정신분석과 들뢰즈의 차이가 스펙터 클하게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인간 주체의 문제는 들뢰즈와 라캉의 차이가 부각되는 마지막 쟁점인 “전이(transfer)”에 이르러 정점에 다다른다.
전이의 문제를 둘러싸고, 들 뢰즈와 라캉의 실천적 문제의 차이가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다.
다 알다시피 정신분석에서의 전이는 신경증자와 정신분석가 사이의 위계를 전제 한다.
그 위계는 “치료”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그런데 라캉의 입장에서 과제는 “욕망의 현실”이요 “신경증자의 현실”을 변화시키는/치료하는 일이다.
“하지만 과연 실천을 통해 변화시켜야 할 현실이 욕망의 현실인 경우에, 게다가 그 욕 망의 현실이 타자의 욕망과 연루되어 있는 경우에, 과연 그 믿음이 신경증자의 현실 을 변화시키는 데 얼마나 쓸모가 있을까?”(맹정현 2009: 348)
치료가 문제일 때, 분열-분석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이 경우 “비판적 실천”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나아가 소외를 낳는다는 점에서 해롭다.
분열-분석은 “비판”이란 용어가 갖는 전통적인 의미, 즉 ‘비판자’와 ‘비판 받는 것’의 거리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자신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믿음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 말해, 분열-분석의 실천은 일종의 “인식론적 작업”으로서, “욕망의 장 속에서 전이 과정 없이 지식을 전수하는 것 자체가 곧바로 하나의 정치적 실천이 될 수 있다”고 부당하게 전제한다(344). 하
지만 “결국 지식을 실천으로 변형시켜야 하 는 지점에서 분열분석은 일종의 ‘견본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으며”, 분열 분석은 “모방의 대상으로서의 이론”이 될 수밖에 없다(349-50).
그리고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정치적으로 실재의 급진성에 매달린 분열분석은 윤리적으로 ‘비판하는 자’와 ‘비판 받는 자’, ‘정상성’과 ‘병리성’의 변증법 속에서 주인의 욕망으로 나아갈 위험을 안고 있다.
그것은 ‘반동적 병리성’을 ‘비판받는 자’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그것을 치유하 기보다는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
자신에게는 ‘혁명에 대한 욕망’이었던 것 이 부지불식간에 타인에게 ‘주인의 욕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밖에
없 다.”(맹정현 2009: 352)
여기서 맹정현의 비판이 향하는 지점은, 이른바 욕망의 현실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자(‘비판하는 자’, 정상인 자, 분열-
분석가)가 그것을 알지 못해 병에 걸린자(‘비판받는 자’, 환자, 신경증자)에게 우월적 지위에서 옳은 지식을 전수함으로써, 그 스스로가 일종의 ‘견본’이 되고 자신을 모방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주인’이 되려는 욕망을 분열-분석이 감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비판은 분열-분석의 실천적 작업과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니체, 푸코와 더불어 들뢰즈가 “사제 권력”이라 부르는 것 의 실행이 정신분석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 점은 조금 뒤에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 전에 이 비판이 전제하는 몇 가지 지점은 분열-분석과 정신분석의 차이를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짚어 보고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우리는 이 비판에서 두 가지 특징을 가려낼 수 있다.
우선, 라캉의 관 심은 욕망의 현실, 신경증자의 현실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욕망의 현실은 사회-정치적 현실과 대립되거나 구별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들뢰즈가 다루는 다양한 정신의학의 대상(분열증, 편집증, 정신병, 신경증, 변태 등) 중 유독 신경증자가 부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라캉이 대상으 로 삼는 것은 신경증자의 욕망의 현실로서, 여기서의 욕망은 심리적-무 의식적(그리고 언어적) 차원에 국한된다는 점이다.
들뢰즈가 욕망의 현 실로서 지칭하는 것이 우주적-무의식적(그리고 물질적) 현실, 더 좁게는 사회적-인간적 현실 전반을
가리킨다는 점과 대비되는 지점이라 하겠다.
“욕망의 대상적 존재란 실재 [le Réel; 현실계]그 자체이다. 심리적 현 실(rélalité psychique)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특수한 실존 형식이란 없다.”(AO 34)
둘째 특징은, 라캉의 입장에서 분열-분석은 인식론적 작업, 즉 지식의 전수 내지 깨우침의 작업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
이다.
물론 이를 통해 달성하려는 목표는 신경증의 ‘치료’이다.
그러나 들뢰즈의 작 업은 인식론적 작업이 아니라 존재론적 작업, 나아가 사회-정치적 작업 이다.
이를 위해 들뢰즈가 행하는 작업은 “집단(groupe, collectivité)”에 대한 분석 또는 “제도 분석(analyse institutionnelle)”이다.
들뢰즈는 신경증자에 대 한 일종의 초월론적 분석을 수행하는데, 이는 신경증자가 발생하는 사회적 조건에 대한 분석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사회 집단에 대한 분석을 수반한다.
정신분석이 대상으로 삼는 사적(私的) 개인 자체가 사적 소유를 기초로 해서 형성된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며, 신경증자는 그런 개인의 병리 상태의 한 유형일 뿐이다.
우리는 4절에서 이 점을 더 살피게 될 것이다.
우리가 라캉의 작업과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점검할 점은 ‘전이를 통한 치료’ 내지 “전이 하의 실천” 또는 “전이 하의 임상”
이다.
이는 다음 과정 을 거친다(맹정현 2009: 350-2; 또한 137-55 및 224-44 참조).
우선 정신 분석 실천은 “주체와 증상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전이는 분석가가 주체의 대상 a의 자리를 잠시 빌려, “주체로 하 여금 자신의 대상 a에 대해 다른 포지션을 취하도록” 만들기 위한 과정 이다.
분석가는 “대상 a의 상블랑(semblant)”이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 는 “주체의 병리성의 근원이 되는 욕망의 원인인 대상 a가 됨으로써 무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병리적 현실을 재활성화”시킴으로써, “처음에 실패했던 [실재와의] 만남을,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만남의 실패를 반복” 함으로써, 또한 “환자의 욕망의 원인이자 충동의 대상으로서의 대상 a와 환상의 간극을 최대한 벌려놓”음으로써, 환자를 새로운 주체로 탄생시키 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이는 환자의 리비도적 구조를 정신분석가와 의 관계 속에서 현재화하는 정신분석의 핵심적인 축이다.”
이러한 현재 화 없이 오이디푸스의 자기비판은 불가능하다.
라캉 정신분석의 입장에서 들뢰즈 분열-분석에 가해지는 가장 강력한 비판으로서, 맹정현의 결론적 진술은 이렇게 요약
된다.
“몽상가가 아닌 임상가로서 라캉[은 …] 신경증자가 머뭇거리면서 선택했을 바로 그 실재의 언저리를 더듬으면서 그에게
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왜냐 하면 세계의 병리성은 그것이 ‘비판’이라는 초월적 시선에 의해 허구적인 것이라고 폭로된다고 해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병리성은 좀 더 단단한 껍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병리성을 지탱하는 믿음과 신앙은 맹목적인 귀를 가지고 있 다. 따라서 누군가가 그 믿음과 신앙의 일부가 되어주지 않는다면, 그 맹목적인 귀는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라캉의 출구가 있다.”(맹정현 2009: 353)
라캉은 치료라는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임상가”이기 때문에 분열-분석 을 행하는 목표만 앞서는 “몽상가”와는 달리, 전이의 방법을 통해 환자 의 욕망적 현실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환자의 맹목적인 “병리성”을 깨고 열어가는 작업을 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프로이트 이래 정신분석가가 공통적으로 수행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물론 들뢰즈는 이 치료의 과정이 ‘끝나지 않는 치료’ 및 ‘환자의 치료비를 대는 자’를 은폐 하고 있다고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지만 말이다(AO 65; 69; 140; 284-5; 373; 427-8; 438).
그런데 더 흥미롭게도, 이 구절에서 누구라도 “누군가가 그 믿음과 신앙의 일부가 되어주지 않는다면”이라는 신학-종교적 표 현을 놓칠 수는 없을 것이다.
들뢰즈는 정신분석이 ‘사제 권력’임을 곳곳 에서 지적한다.
i) “사랑받고자 하는 비천한 욕망. 충분히 사랑받고 있지 못해, “이해받고” 있지 못 해, 라는 넋두리. […] 이 모두는 사제의
심리학̇ ̇ ̇ ̇ ̇ ̇이다.”(AO 320)
ii) “위반, 죄책감, 거세 ― 이것들은 무의식의 규정들인가, 아니면 사제가 사물들을 ̇ ̇ ̇ ̇ ̇ ̇ ̇ 보는 방식̇ ̇ ̇ ̇인가? 그리고 필경 정신분석 외에도 무의식을 오이디푸스화하고 그것에 죄책감을 주고 그것을 거세하는 다른 힘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정신분석은 이 운 동을 뒷받침하고 최후의 사제를 발명한다.”(AO 133)87)
요컨대, 들뢰즈에 따르면, 정신분석은 정신분석을 받기를 원하는 사랑받 고 이해받고 싶어 하는 징징대고 칭얼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며, 나아가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현대 사회의 핵심 분과이다.
하지만 “정신분석은 스스로는 인정하기를 경계하면서 실은 경제적-화폐적 의존 체계 전체를 자신이 다루는 각 환자의 욕망의 핵심에 등록하고, 잉여가 치를 흡수하는 매머드급 기업을 나름으로 구성한다.”(AO 284-5)
이에 맞서, 들뢰즈는 헨리 밀러의 섹서스의 한 구절을 통해 정신분석에서 벗 어날 것을 제안한다.
“이제 분석가가 당신에게 제공하는 부드러운 소파 위에 누워, 다른 뭔가를 생각해 내세요. … 분석가는 신이 아니라 당신과 같은 인간 존재이며, 근심들, 결함들, 야심 들, 약점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지혜(=코드)의 보고(寶庫) 가 아니라, (탈영토화된) 길을 따라 가는 방랑자라는 것을 당신이 깨닫게 된다면, 아마 당신은 당신 귀에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린다 해도 하수도처럼 그걸 쏟아내길 그칠 것이며, 당신의 두 발로 일어서서 신이 준 당신 목소리(누멘)로
노래 하게 될 것이오.
고백하고 흐느끼고 불평하고 동정하는 일은 언제나 돈이 들지요. 노래하는 것은 한 푼도 들지 않을뿐더러, 실제로 (남들을 전염시키는 대신) 남들을 풍요롭게 해주지요. … 허깨비 세계는 결코 충분히 정복된 적 없는 세계지요.
그것 은 과거의 세계이지, 미래의 세계가 아니에요. 과거에 집착하면서 전진한다는 것은 쇠사슬에 금속구(球)를 부착한 족쇄를 질질 끌고 가는 것과 같아요. … 우리는 모두
87) 또한 천 개의 고원(MP 191-2)에서의 사제 권력으로서의 정신분석 비판을 참 고.
죄가 있어요, 삶을 충만하게 살지 않는다고 하는 큰 죄 말이에요.”(AO 399-400 재인 용)
이는 “고칠 수 없는 유일한 것 그것은 신경증”이라는 것을 알고, 그 굴레 에서 벗어나기를 권유하는 것이다.
이는 “설사 아무리 걱정스럽고 모험 적인 것이라 해도, 하나의 병이나 “붕괴”가 아니라 하나의 “돌파”인 분열 증적 과정”으로의 권유이다. “분열증적 과정이란, 우리를 욕망적 생산과 떼어 놓는 벽이나 극한을 뛰어넘고, 욕망의 흐름들을 지나가게 하는 것 이다.”(AO 434)
3. 제도 분석과 식민화
지금까지 우리는 라캉의 입장에서 들뢰즈를 비판하는 맹정현의 목소리를 살펴보았다.
우리는 거세, 주체, 전이라는 라캉 정신분석의 중요한 주제를 놓고 들뢰즈의 분열-분석과 라캉의 정신 분석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들뢰즈의 입장에서 ‘거세, 주체, 전이’라는 라캉적 주제는 각 각 ‘인간적 성, 자아로서의 주체, 사제 권력’이라는 상대역을
지니는 것으 로 확인되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볼 것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라캉이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사적 개인이라는 심리적 주체’라는 토픽에 맞선 들뢰즈의 ‘사회 집단의 제도 분석’이라는 토픽이다.
들뢰즈는 공저자인 과 타리의 작업에서 진행된 ‘제도 분석’이라는 주제를 구체화한다.88)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전개된 반-정신의학의 움직임은 다양한 형 태로 전개되었다.
과타리는 장 우리(Jean Oury)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던 ‘라보르드(La Borde)’ 병원에서 의사로서 활동하면서 “의사-간호사-
환자 라는 제도적으로 결합된 삼자 관계를 종래의 틀에서 해방하고, 거기에서 새로운 사회변혁 모델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횡단성’ 개념을 착상”했다 (윤수종 2009: 42).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누가 제도를 생산하고 누가
88) 과타리의 “제도 분석”에 관해서는 윤수종(2009)의 제3장을 참고.
제도와 그것의 하위 집단을 관련시키는가? 이 제도의 생산 방향을 바꾸 는 방법이 있을까?”라는 물음이며, 이렇게 제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제 반 사회 문제들과 연결시킬 수 있는 입지를 마련했다(76).
이 과정에서 과타리가 고찰한 것은, 모든 의료 스태프가 제도상의 환경, 활동들, 분위 기 등에 관련해 스스로의 역할, 연구, 제도, 제한된 수단들, 그 유효성들 등을 검토할 필요성이었다.
의료시설 관계자 전원이 환자와 맺는 관계가 중요하며, 이를 통해 각자의 노동 환경, 노동 시간, 직업 훈련 등도 정비 되고, 각자가 환자와의 접촉 기회를 증가시키고 공동으로 활동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며, 의료의 장이 확장될 가능성이
나타날 수 있게 된다.
“특권적인 제도상의 처방은 없으며, 오히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체 험된 국면에서 적어도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다양한 직업적 역할을 근본 적으로 재편성하는 전체적인 방침을 채택하는 것이다.”(84)
요컨대 집단 의 분석 활동은 “개인들을 집단에 적응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으 며, “상정된 질문에 논리(logos)를 제공
하고 완전히 만들어진 답을 제공하 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문제틀을 심화하고 역사 과정의 각 단계의 독자 성을 끌어내는” 것이다(Guattari 2003: 238).
정신분석에서 “환상(Phantasie, fantasme)”은 “주체가 등장하는 상상적 각본”(라플랑슈&퐁탈리스 2005: 541)이라고 정의된다.
임진수는 이 정의 에서 세 가지 특징을 주목한다(임진수 2005: 235-7).
우선 환상은 “각본 (scenario)”으로서, “어떤 상상적 이야기로 하나 내지 여러 개의 시퀀스로 이루어져” 있다.
다음으로 환상에는 “주체가 등장”하는데, 그렇기에 환상 은 대상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어떤 방식으로든 “주체가 연출하는
무대” 이다.
셋째로, 환상은 “상상적 드라마”로서, “현실의 반영”이 아닌 “현실 의 변형”으로 그 변형은 주체의 욕망에 의해 일어난다.
“욕망은 환상을 통해 발현되고, 환상은 욕망을 위장하는 옷과 같은 것이다.”
프로이트에 게 욕망과 환상의 관계는 한 단어나 다름없으며, 그 둘은 선후 내지 종속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 조건”
이다.
정신분석에서 환상은 개인 주체의 체험을 넘어 “원환상(Urphantasien, fantasmes originaires)”으로까지 향한다.
그것은 “각 개인이 실제로 체험한 장면을 증거로 내세울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 존재에게서 만나게 되는 것”
(라플랑슈&퐁탈리스 2005: 292)이다.
정신분석 입문 강 의(1916/7)에서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분석에서 이야기되는 모든 환상은, […] 아마 옛날 원초적인 시대의 인간 가정에서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아이가 환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선사 시대 의 진실의 도움으로 개인적인 진실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다.”
(프로이트 2003a: 501)
이러한 원환상은 신경증의 기원에서, 즉 “모든 개인의 환상 뒤에 있는 최 종적인 요인”에 대한 필요에서 도입된 것이다.
이 점에서 원환상은 인간 의 유전적, 계통 발생적 무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환상에 대한, 그리고 이와 표리 관계에 있는 욕망에 대한, 정신분석의 규정이 지닌 개인적 성격에 반대해 들뢰즈는 환상이 집단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단언한다.
“환상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집단 환상̇ ̇ ̇ ̇ (fantasme de groupe)인바, 제도 분석은 이를 잘 보여준 바 있다.”(AO 38)
그리고 들뢰즈는 오이디푸스의 자기-비판을 추진하는 조건의 하나로 이 런 과제를 제시하기까지 한다.
“개인 환상 아래서 집단 환상들의 본성을 발견하라.”(AO 323)
따라서 우리는 어떤 점에서 환상이 집단 환상인지, 그리고 제도 분석을 통해 그것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봐야 한다.
장 우리가 제도 분석을 통해 밝히려는 처음 과제는 집단 환상과 개인 환상의 본성의 차이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세 차원에서 구별된다.
i) “집단 환상은 현실적인 것(réel)으로서의 사회 마당을 정의하는 “상징적” 마디들 (articulations)과 뗄 수 없는 반면,
개인 환상은 이 사회 마당의 집합을 “상상적” 소여 들로 몰고 간다.”(AO 73)
개인 환상 자체는 현존하는 사회 마당에 접목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를 상상적 성질들을 통해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상상적 성질들로 말미암아,
ii-1) “사회 마당에는 일종의 초월성 내지 불멸성이 부여되고, 이것들을 빙자해 개인, 즉 자아는 자신의 사이비-운명을
누린다. 그래서 장군은 이렇게 말한다, 군( 軍) 은 영 원하기 때문에 내가 죽는 것은 대수롭지 않다고.”(AO 74)
이 불멸성은 자아 속에 억압의 모든 투자들을, 이 사회 질서를 위해 죽겠 다는 욕망-체념들마저도 끌어넣는다.
이런 한에서 개인 환상의 상상적 차원은 죽음 충동에 대해 결정적으로 중요하며, 게다가 죽음 충동 자체 는 바깥으로
투사되어 타인들을 겨냥한다. “외국인에게 죽음을, 우리 편 이 아닌 자들에게는 죽음을!” 반면,
ii-2) “집단 환상의 혁명적 극(極)이 나타나는 것은, 제도들 자체를 필멸(必滅)인 것으 로서 살아갈 수 있는 역량 속에서,
그리고 죽음 충동을 참된 제도적 창조성으로 만들 면서 욕망과 사회 마당의 마디들을 따라 제도들을 파괴하거나 바꾸는
역량 속에서이 다.”(AO 74)
교회들, 군대들, 국가들 따위는 스스로는 결코 죽고자 하지 않는다. 이에 맞서 집단 환상은 제도는 불멸이 아니라 파괴되고 바뀌기 마련이요, 그 파괴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내는 힘이라고 제시한다.
이 경우 집단 환 상은 푸리에(Fourier) 식의 일종의 “유토피아”(AO 75)로 이해될 수 있다.
iii) “개인 환상은, 합법적이고 합법화된 제도들에 의해 규정된 한에서 또 그런 제도 들 안에서 “자신을 상상”하게 된 한에서의 자아를 주체로 갖고 있다. […] 하지만 집 단 환상은 충동들 자체만을, 그리고 이 충동들이 혁명적 제도와 더불어 형성하는 욕 망 기계들만을 주체로 갖고 있다.”(AO 74)
이 셋째 구별에서는 환상의 주체와 관련해 중요한 점이 지적되고 있다.
개인 환상은 제도가 허용하고 상상토록 한 그런 자아를 주체로 갖고 있다. 반면 집단 환상에서는 충동들 자체 내지 욕망
기계들89)이 주체라는 것이다. 이상의 구별들을 종합해 보자.
“환상의 두 유형, 또는 차라리 환상의 두 체제는, “재화”의 사회적 생산이 하나의 자아를 매개로 해서 자신의 규칙을 욕망에 부과하느냐 아니면 정감들(affects)의 욕 망적 생산이 자신의 규칙을 제도들에 부과하느냐에 따라 구별된다.
전자에 있어 자 아의 허구적 통일은 재화 자체에 의해 보증되며, 후자에 있어 제도들의 요소들은 이제 단지 충동들일 따름이다. […] 정감들 내지 충동들은 경제적 형식들 속에서 [i] 자신 의 탄압뿐 아니라 [ii] 이 탄압을 부수는 수단들도 창조함으로써 하부구조의 일부가 ̇ ̇ ̇ ̇ ̇ ̇ ̇ ̇ 되고 온갖 방식으로 거기에 현존해 있다̇ ̇ ̇ ̇ ̇ ̇ ̇ ̇ ̇ ̇ ̇ ̇ ̇ ̇ ̇ ̇.”(AO 75)
여기서 자아는 재화에 의해 탄생된다고 지적된다.
말하자면, 자아란 자본주의 체제가 재화(즉 사적 소유)를 매개로 해서 만들어낸 생산물로서, 자본주의 체제의 규칙을 욕망(즉 생산 일반)에 부과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에 의해 수행되는 개인 환상은 사회적 수준에서 만들어진 변형된 형태의 집단 환상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따라서 “개인 환상이란 없다.
오히려 두 종류의 집단들이, 즉 주체-집단 들(groupes-sujets)과 예속 집단들(groupes assujettis)이 있다.”(AO 75)
물론 이 두 종류의 집단들은 매끈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두 종류의 집 단은 끊임없이 서로의 안으로 미끄러져 가고 있다.
“주체-집단은 언제나 예속될 위험에 직면해 있으며, 예속 집단은 어떤 경우에는 억지로라도 혁명적 역할을 떠맡아야만 하는 수도 있다.”(AO 75)
두 종류의 집단 간의 이런 특성의 구분은 들뢰즈에서 자주 드러나는데, 가령 천 개의 고원에서 리좀과 나무의 관계가
그러하다.
“리좀 안에는 나무 구조나 뿌리 구조가 있다. 하지만 역으로 나무의 가지나 뿌리의 갈래가 리좀으로 발아할 수도 있다. […] 나무의 심장부에서, 뿌리의 공동(空洞)에서, 가지의 겨드랑이에서 새로운 리좀이 형성될 수 있다. […]
리좀에는 나무의 마디가
89) “충동들은 그저 욕망 기계들 자체이다.”(AO 42)
있고 뿌리에는 리좀의 발아가 있다. […]
중요한 점은, 뿌리-나무와 수로-리좀이 대립 되는 두 모델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자는 자신의 고유한 도주를 이뤄내면서도 초월 적 모델로서 그리고 초월적 사본으로서 작동한다.
반면 후자는 자신의 고유한 위계 를 구성하고 독재적 수로를 생겨나게 하면서도 그러한 모델을 전복시키고 지도를 스케치
하는 내재적 과정으로서 작동한다.”(MP 23, 30, 31)
이는 결국 어떤 구체적 복합체(complexe)가 지니고 있는 두 경향성 내지 양극성을 섬세하고 신중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요청과 다르지 않다.
들뢰 즈는 이 복합체를 판별하기 위한 “기계적 지표들(indices machiniques)”로서 “성욕(sexualité)”을 제시하기에 이른다(AO 419-21; 439).
즉, 성욕을 인간적 성의 수준에서 보느냐 우주적 생산의 수준에서 보느냐에 따라, 두 경향성이 구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현실태로 존재하는 분열-분석들”의 사례로 “원시적 치료 들”을 고찰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터너(Victor Turner)에 의해 묘사된 은 뎀부(Ndembu) 족의 치료 과정을 예시한다(AO 196ff.).
은뎀부 족의 환자 K의 사례는 현대 유럽인의 눈으로 볼 때는 무엇보다 오이디푸스적으로 보일 만큼 놀랍지만, 이들의 작업은 전혀 다른 절차를 따르고 있기 때문 이다.
“은뎀부 족 만세. 왜냐하면 […] 오직 은뎀부 족 의사만이 오이디푸스를 하나의 외 양, 하나의 장식으로 다룰 줄 알았고,
또 사회 마당의 무의식적 리비도 투자들에까 지 거슬러 올라갈 줄 알았기 때문이다.”(AO 432)
우리는 은뎀부 족 환자 K의 증례를 더 자세히 살필 필요를 느끼게 된다.
들뢰즈가 정리한 K의 증례는 다음과 같다.
“환자 K는 여성화되고, 참을성이 없고, 허세를 부리고,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데, 그 를 호되게 꾸짖는 그의 외할아버지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다. 은뎀부 족은 모계제여서 외가에서 살아야 하지만, K는 아버지가 그를 총애하여 아버지의 모계에서
예외적으로 오랜 시간을 지냈고, 친가의 사촌누이와 결혼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죽자, 그는 쫓겨나 외가 마을로 되돌아온다. 여기서 그의 집은 두 구역, 즉 친가 집단의 구성원들의 집들과 자기 외가 구성원들의 집들 사이에 끼여 있는 그의 상황을 잘 표현해준다. 그러면 병의 원인을 지적해야 할 점술과 병을 고쳐야 할 의료는 어떻 게 시작되는가? 원인은 이[齒]이다.
그것은 사냥꾼이었던 조상의 위쪽 앞니 두 개인 데, 신성한 자루에 들어 있지만, 여기서 빠져 나와 환자의 몸속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그 앞니의 효과들을 진단하고 쫓아버리기 위해, 점쟁이와 의사는 영토와 그 근방, 족장제와 부(副)족장제들,
가문들과 그 분파들, 결연들과 혈연들에 관한 사회 분석에 착수한다.
그들은 정치 경제 단위들과의 관계 속에서 욕망을 밝히기를 그치지 않는다.”(AO 197)
그러면 환자 K의 치료 과정에서 무엇이 드러나는가? 증인들은 점쟁이와 의사를 속이려 한다.
실제 문제는 다른 데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식민지배자-식민지인 관계 때문에 복잡해진다.”(AO 197-8)
사실 K의 외할아버지는 “위대한 족장”이었지만, 영국인들은 족장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병을 유발한 앞니는 외할아버지의 앞니인 것 같으며, 식 민지배자 때문에 K는 병에 걸린 것 같다.
여기서 치료는 어떤 과정을 거 치는가?
“의사는 사회 드라마를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중심으로 진정한 집단 분석을 조직한다. […]
중요한 것은 그저 이해관계들을 통한 사회 마당의 전의식적 투자들을 발견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깊게는 욕망을 통한 사회 마당의 무의식적 투자들을 발견 하는 일이며, 그리하여 환자의 결혼, 마을에서 그의 지위, 그리고 족장이 집단 속에 서 강도적으로 체험하는 모든 지위들을 지나가도록 하는 일이다.”(AO 198)
여기서 모든 것은 오이디푸스적 분석의 반대 방향으로 향한다.
그것은 “사회 조직과 해체에 직접 연결되어” 있다.
아버지나 외할아버지의 이름 은 가족의 틀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이름들”로, “족장제, 가문, 식민화의 관계” 등으로 열린다. 그렇다면 인디언이나 아프리카의 오이디푸스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가?
들뢰즈에 따르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식민화의 결과로 부분적으로 오이디푸스적이 된다.”(AO 198-9)
가령 식민지배자는 이런 식으로 강제한다.
“네 아버지, 그는 네 아버지이지 다른 무엇도 아니다. 네 외조부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을 족장으로 오해하지 마라, […] 네 가족은 네 가족이지 다른 무엇도 아니다, 사회적 재생산은 더 이상 네 가족을 지나가지 않는다, 설사 재생산의 새 체제에 종 속하게 될 인재를 공급하려면 네 가족이 꼭 필요하겠지만….”(AO 199)
이렇게 해서 “판자촌의 오이디푸스”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민족말살에서의 안락사와 같은 것이다.
사회적 재생산이 그 본성과 외연에서 집단의 구성원들을 빠져나가면 나갈수록, 사회적 재생산은 이 구성원들 을 덮쳐,
이 구성원들 자신을 오이디푸스를 담당자로 하는 제한되고 신경증화된 가 족적 재생산으로 내몬다.”(AO 199-200)
요컨대, 오이디푸스는 사회적 재생산을 가족적 재생산의 틀로 내몰아, 사회적 구성원들이 단지 가족적 구성원에 불과한 것으로 강제함으로써,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적 개인들이 탄생하며, 그리고 이 개인들 은 사회적 재생산에 필요한 재료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된다.
이로써 가족적 재생산이 사회적 재생산과 공통의 외연을 갖는다는 점은 은폐되며 망각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 유럽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비록 역사적 식민 화와는 다른 경로를 밟겠지만, 유럽인들의 오이디푸스도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산물인 것이다.
“저기서나 여기서나 사태는 똑같다. 곧, 오이디푸스, 그것은 언제나 다른 수단들을 통해 추구된 식민화이다, 그것은 내부의 식민지이며, 우리 유럽인 자신에서도 그것 은 우리의 내밀한 식민지 구성체이다.”(AO 200)
들뢰즈가 보기에는, 특히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유럽의 문명인”(AO 320)에게 “내밀한 식민지 구성체”로서, “하나의
전통 규범, 우리의 규 범”(AO 201)으로서 오이디푸스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이다. 일반적으로 가족의 정립은 욕망에 의한 사회 마당의 투자와 연결되어 있다.
은뎀부 족의 분열-분석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족 이미지들은, 이 이미지들이 투쟁과 타협을 통해 짝짓거나 대결하는 사회적 이미지들에 개방됨으로써만 기능한다.
그래서 가족들의 절단들과 절편들을 가로질 러 투자되는 것은, 가족들이 잠겨 있는 사회 마당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절단들 이다.”(AO 321)
이어 자본주의의 주변 지대들에서는, 가령 아프리카의 오이디푸스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식민지배자들의 사회적 착취와 압제에 따라 가족의 파열이 일어나는 모순이 관찰되었다.
하지만, 현대 유럽인에 이르면 식 민지는 사회와 단절된 핵가족이라는 허상에, 그리하여 각자의 내부에 자 리 잡게 된다.
“영토성의 허상으로서의 어머니, 전제군주 법의 허상으로서의 아버지, 그리고 절단 되고 쪼개지고 거세된 나는 자본주의의 산물들이다. […] 자본주의의 부드러운 중심 부에서는, 즉 온화한 부르주아 지역들에서는, 식민지는 내밀하고 사적인 것이 되며, 각자의 내부에 있게 된다. […] 가족은 모든 사회적 규정들의 보유와 공진(共振)의 장소가 되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단지 아버지-어머니만 보이도록 하는 방식으로, 모든 사회적 이미지들을 제한된 가족의 허상들에 적용하는 일은, 자본주의 마당의 반동 적 투자에 속한다. 우리 피부에 엉겨 붙은 저 오이디푸스적 부패여.
그렇다, 나는 내 어머니를 욕망했고 내 아버지를 죽이기를 바랐다.”(AO 321)
어디를 둘러봐도 아버지, 어머니, 나 말고는 없다.
이것이 핵가족의 상황이다.
일단 이러한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갇히게 되면, 각자의 내부에 내 밀하고 사적인 식민지가 완성된다.
그 안에서 욕망은 어머니와 동침하고 아버지를 죽이려는 욕망으로 구조화된다.
이제 성욕은 사회 마당의 생산 과는 무관한, 로렌스의 표현을 빌면 “더러운 작은 비밀(dirty little secret)” 로 환원되고 만다.
4. 자본주의와 정신분석의 가족주의
영토 기계나 전제군주 기계에 있어, 사회 경제적 재생산은 결코 인간 적 재생산 및 이 인간적 재생산의 사회적 형식인 가족과 독립해 있지 않 다. “가족은 하나의 열린 실천, 사회 마당과 외연을 같이 하는 하나의 전 략이다.”(AO 313)
앞에서도 보았듯이, 영토 기계에서 재생산의 경과는 직 접적으로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지역 가계” 내지 “지역 집단”이라는 친 족의 비경제적 요인들을 통과했다.
이런 점은 전제군주 기계에서의 “왕 족”이나 “왕조”의 역할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계에서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는 재생산의 경과는 “생산 활동 자체”와만 관련되는 것이다.
“충만한 몸으로서의 사회체는, 돈-자본인 한에서 직접적으로 경제적인 것이 되었다. 이 사회체는 다른 어떤 전제(前提)도
용납하지 않는다.
기입되거나 표시되는 것은 더 이상 생산자들이나 비-생산자들이 아니라, 관계 맺음 내지 결합 속에서 실효적 으로 구체적인 것이 되는 추상량으로서의 생산력과 생산수단이다.
즉 노동력 내지 자본, 불변자본 내지 가변자본, 혈연 자본 내지 결연 자본 등. 결연과 혈연의 관계들 을 자기에게 탈취해
온 것은 바로 자본이다.
이로부터 가족의 사유화(私有化)가 뒤따 르는데, 이 사유화에 따라 가족은 자신의 사회적 형식을 경제적 재생산에 주기를
멈춘다. 가족은 투자 철회된 것과도 같아서, 마당 바깥에 놓인다.”(AO 313-4)
가족은 이제 “인간 질료 내지 인간 재료의 형식”(AO 314)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가족을 이루는 사적 개인들은 자본과 노동에서 파생된 기능들에 불과한 것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 재료의 재생산의 특 유한 형식인 가족은 그것을 규정하는 사회 마당 밖으로 추방되며, 사적 개인들은 핵가족 안에서 아버지-어머니-아이로서만 규정된다.
이제 가 족은 투자 철회된 것과도 같아서, 사회 마당 밖에 존재하는 준-자율적인 소우주가 된다.
말하자면, 오이디푸스 형식을 따를 뿐인 “삼각형화된 작 은 소우주로서의 각자”(AO 317)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개별 인물들은 무엇보다 사회적 인물들, 말하자면 추상량들에서 파생된 기능들이다. […]
인물화된 자본으로서의 자본가, 말하자면 자본의 흐름에서 파생된 기능으로서의 자본가, 인물화된 노동력으로서의 노동자, 즉 노동의 흐름에서 파생된 기능으로서의 노동자 말이다. […]
그렇지만 인간 재료의 재생산의 특유한 형식은 그것을 규정하 는 사회 마당 밖으로 다시 떨어진다. […]
사적 인물들은 제한된 가족의 장소에서 아버지, 어머니, 아이로서 형식적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이 가족은 결연들과 혈연들 의 도움으로 사회 마당 전체에 자신을 열고 이와 외연을 같이하면서 그 좌표들을 재절단하는 하나의 전략이 아니라, 사회
마당이 닫히고 그 재생산의 자율적 요구들 이 적용되며 모든 차원에서 사회 마당이 재절단하는 하나의 단순한 전술에 불과하 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결연들과 혈연들은 더 이상 인간을 지나가지 않고 돈을 지나간다.
이렇게 되면 가족은 소우주가 되는데, 이 소우주는 가족이 더 이상 지배하지 못 하는 것을 표현하기 일쑤다.
어떤 점에서는, 상황이 바뀌지 않았다.
왜냐하면 가족 을 가로질러 투자되는 것은 언제나 경제·정치·문화·사회 마당이며, 이 마당의 절단들과 흐름들이기 때문이다. […] 하지만 다른 식으로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왜냐하면 가족은 사회적 재생산의 지배적 요인들을 구성하고 펼치는 대신에 이 요인 들을 자기 고유의 재생산양식 속에
적용하고 감싸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
각자̇ ̇ 는 사적인 자격으로 한 명의 아버지와 한 명의 어머니를 갖고 있다. […] 모든 것은 아버지-어머니-아이의 삼각형
으로 복귀하며, 이 삼각형은 사람들이 자본의 이미지들 을 가지고 그것을 자극할 때마다 “아빠-엄마”라고 대답하면서 공진한다.
요컨대, 오 이디푸스가 도래했다.
오이디푸스는 […] 자본주의 체계에서 탄생한다. […] 오이디 푸스는 사회적 주권의 형식에 응답하는 우리의 내밀한 식민지 구성체이다. 우리는 모 두 작은 식민지이며, 바로 오이디푸스가 우리를 식민화한다.”(AO 314-6)
그 결과물을 들뢰즈는 로렌스를 빌려 이렇게 요약한다.
“각각의 남자, 각 각의 여자에게, 우주는 단지 자기 자신의 절대적인 작은 사진의 배경일 뿐이다. … 사진 한 장! 우주에 널린 스냅사진 속의, 코닥 스냅사진 한 장.”(AO 317 재인용) 이 표현에서 잘 드러나듯이, 생산의 경과인 우주는 사적 인물들의
배경에 불과한 것이 되었고, 방대한 우주는 자신만의 작 은 스냅 사진 한 장으로 환원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로소 오이디푸스가 탄생했다.
오이디푸스는 자본주의의 사회적 주권 형식에 응답하는 우리의 내밀한 식민지 구성체이다. 제국주의의 식민화가 아프리카 오이 디푸스를 만들어내었듯이, 우리는 아버지-어머니-나라는 사적 인물들로 이루어진 삼각형 속에서 식민화되었다.
“출발 집합에는 사회 구성체, 아니 차라리 여러 사회 구성체들이 있다. 인종들, 계급 들, 대륙들, 민족들, 왕국들, 주권들이. 잔 다르크, 위대한 몽골인, 루터, 아즈텍의 뱀 이. 도달 집합에는 단지 아빠, 엄마, 나만 있다.”(AO 121)
바로 이 조작(오이디푸스화)을 통해, 여러 사회구성체들로 이루어진 우 주의 생산의 경과는 이제 아빠, 엄마, 나만 있는
핵가족 삼각형으로 환원 되고 말았으며, 이것이 정신분석의 성취였다.
정신분석은 자본주의의 요 구에 따라 “생산의 질서”를 으깨고 그것을 “재현” 속으로 전복시켜 버렸으며, “더 이상 생산하지 않으며 믿는 데 그치는 무의식”을 내세웠다(AO 352).
그런데 “욕망적 사회적 생산을 변질시키고 일그러뜨리며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이 이중의 작용을 수행하는 것은 바로 동일한 심급, 즉 가족이다.”(AO 353)
들뢰즈는 푸코의 말과 사물을 원용하여 재현의 세계에 생산이 난입 하는 18세기 말과 19세기에 대해 언급한다.
그런데 재현에서 생산으로의 절단을 발견하는 최고 지점에 정치 경제학과 정신분석이 있다.
“생산은 노동의 생산 내지 욕망의 생산일 수 있고, 사회적 생산 내지 욕망적 생산일 수 있다.
생산은 더 이상 자신을 재현 속에 포함되게 내버려두지 않는 힘들에 호소하며, 또 모든 측면에서 재현을 꿰뚫고 가로지르는 흐름들과 절단들에 호소한다. 즉, 재현 밑에 펼쳐져 있는 “어둠의 광대한 층”에 호소하는 것이다.”(AO 356)
들뢰즈는, 맑스의 비판을 수용하면서, 스미스와 리카도의 정치 경제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나란히 놓고 그 공과를
평한다.
“맑스는 말했다. 루터의 공적은 종교의 본질을 대상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내면적 종교성으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의 공적은 부의 본질 내지 본 성을 더 이상 대상적 본성으로서가 아니라, 추상적이고 탈영토화된 주체적 본질, 즉 생산 활동 일반으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규정은 자본주의의 조건들에서 행해졌기에, 스미스와 리카도는 이번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라는 형식으로,
이 본 질을 다시 대상화하고 소외시키고 재영토화하고 있다. […]
프로이트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해야 한다. 프로이트의 위대함은 욕망의 본질 내지 본성을 더 이상 대상들, 목 표들 및 심지어 원천들(영토들)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추상적인 주체적 본질, 즉 리비도 내지 성욕으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다만, 그는 이 본질을 여전히 사적 인간의 마 지막 영토성인 가족과 관련시키고 있다. […]
정신분석을 가로질러, 향상되고 자기 양식을 찾는 것은 바로 언제나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에 관한 담론이다(치료라고 불리는 것). […]
정신분석의 핵심인 가족주의는 고전적 정신의학을 파괴하기보다는 이 것에 왕관을 씌워준다. […]
19세기의 정신의학이 수용소 속에서 조직하고자 했던 것 ― “가족이라는 강제적(impérative) 허구”, 아버지-이성(理性)과
미성년자-광인, 어린 시절에 의해서만 병든 부모 ― 이 모든 것은 수용소 밖에서, 정신분석과 분석 가의 진찰실에서 완성
된다.
프로이트는 정신의학의 루터요 애덤 스미스이다. 그는 신 화, 비극, 꿈 등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욕망을 이번엔 내면에서
다시 얽어맨다.
즉, 내밀한 극장. 그렇다, 그렇지만 오이디푸스는 욕망의 보편이며 세계사의 산물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프로이트가 채우지 못한 조건이 하나 있다. 오이디푸스가 적어도 어느 지점까지는 자기비판을 추진할 수 있다는 조건 말이다.
세계사가 그 우연성, 그 독자성, 그 아이러니와 그 자신의 비판의 조건들을 쟁취하지 못한다면, 세계사는 하나의 신학일
따름이다.”(AO 321-3)
들뢰즈가 보기에(AO 356-60), 리카도는 “정치 경제학” 또는 “사회 경제학”을 정초하는 데 있어 “사회적 생산”에 있어 “재현
가능한 모든 가치의 원리”로서 “양적 노동”을, 말하자면 “노동의 주체적 본성 내지 추상적 본 질”을 발견했다.
리카도는 “단적인 노동 자체(le travail tout court)”를 최초로 뽑아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욕망 경제학”을 정초하는데 있어 “욕망적 생산”에 있어 “욕망의 대상들과 목표들의 모든 재현의
원리”로서 “양적 리비도”를, 말하자면 “욕망의 주체적 본질 내지 추상적 본질”을 발견했다.
프로이트는 “단적인 욕망 자체(le désir tout court)”를 최초로 찾아냈던 것이다.
리카도와 프로이트는 “노동”과 “욕망”을 대상 들, 목표들, 원천들에 결부시켜 왔던 모든 “재현”을 넘어 “생산”의 영역을 최초로 찾아냈다.
이와 같은 주체적 추상적 본성의 발견은 재현 아래에서 작동하는 기계들과 담당자들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는 2장에서 주체로서의 무의식을 자기-생산으로 규정한 대목을 살피면서 바로 이 주체적 본성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발견은 자본주의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질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생산과 욕망적 생산 사이의 관계는 아주 긴밀하다.
“욕망 기계들은 사회 기계들 안에 있지, 다른 데 있지 않다.
그래서 자본주의 기계 속에서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결합은 보편적인 주체적 리비도의 자유로운 형상들을 해방시키는 경향이 있다. 요컨대,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은 구별 없는 생산 ̇ ̇ ̇ ̇ ̇ ̇ 활동 일반̇ ̇ ̇ ̇의 발견은 불가분하게 정치 경제학 및̇ 정신분석 둘 모두̇ ̇ ̇의 발견이며, 재현 이라는 규정된 체계들을 넘어선다.”(AO 360)
우리가 앞의 장들에서 보았듯이, 욕망 기계들은 논리적 구성물이 아니라 사회 기계들의 초월론적 조건이다.
본래 “하나의 생산만이, 실재[현실계] 의 생산만이 있을 뿐”(40)이다.
그리고 “사회적 생산은 특정한 조건들에̇ ̇ ̇ ̇ ̇ ̇ ̇ ̇ ̇ ̇ ̇ ̇ ̇ 서 단지 욕망적 생산 자체̇ ̇ ̇ ̇ ̇ ̇ ̇ ̇ ̇ ̇”(37)이며, “모든 사회적 생산은 특정한 조건들 에서 욕망적 생산에서 유래”(40)한다.
그렇지만 이렇다는 사실은 자본주 의에 와서야 비로소 발견되었고, 이런 점에서 “욕망적 생산은 무엇보다 도 사회적이며,
끝에서야 자신을 해방하는 데로 향한다”(40)고 말할 수 있다.
가장 원초적인 수준에서 “욕망적 생산은 생산의 생산”(12)이다. 이 것이 우리가 4장에서 살펴본 생산의 종합의 이론이었다. 그런데 생산으 로서의 세계 및 그 기저에 있는 욕망 기계들은 사회 기계들의 극한에서 야 비로소 발견될 수 있었으며, 그
과업을 수행한 것이 정치 경제학과 정신분석이었다.
그렇지만 욕망적 생산은 극한에 있어 자본주의와 상반된다. 들뢰즈는 묻는다.
“왜 자본주의는 욕망과 노동의 주체적 본질―생산 활동 일반인 한에서의 공통 본질 ―을 발견함과 동시에, 이 공통 본질을
둘로 분리해서 한 쪽에 추상적 노동, 다른 쪽에 추상적 욕망, 즉 정치 경제학과̇ 정신분석, 정치 경제학과̇ 리비도 경제학
으로 분리한 채 유지하는 탄압 기계 속에서 이 본질을 새로이 그것도 즉각 소외시키기를 그치지 않는가?”(AO 360)
자본주의에서 욕망적 생산, 또는 생산의 생산이 발견되긴 했지만, 그것 은 재차 다른 형식의 재현들로 재건되었다.
들뢰즈는 다시 맑스 통찰을 빌어 “주체적 추상적 본질이 자본주의에 의해 발견되는 것은 재차 사슬 에 묶이고 소외되기 위해서요, 또 이는 대상성(objectité)으로서의 외부적 이고 독립된 요소 속에서가 아니라, 사적 소유라는 주관적 요소 그 자체
안에서”(361)라고 말한다.
들뢰즈는 보통 “사적 소유와 노동”이라는 소제 목으로 불리는 세 번째 초고의 첫 부분을 인용한다.
“전에는 인간의 자기 외부 존재̇ ̇ ̇ ̇ ̇ ̇였던 것이, 인간의 실질적 외화(外化)였던 것이, 단지 포기 행위, 양도가 되었다(Was früher sich Äußerlichsein , reale Entäußerung d[es] Menschen, ist nur zur That der Entäußerung, zur Veräußerung geworden).”(Marx M 258; 531)90)
90) 들뢰즈는 이를 의역해서 제시한다(AO 361). “Autrefois, l'homme était extérieur à lui-même, son état était celui de l‘aliénation réelle; maintenant, cet état s’est changé en acte d’aliénation, de dépossession.”(예전에, 인간은 자기 바깥여기서 강조점은, 2장에서 보았던 “대상적 존재”로서의 인간(“인간의 자기 외부 존재”, “인간의 실질적 외화”)이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포기 행위, 양도, 곧 소외로 치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맑스의 존재론에서 “대 상적(gegenständlich)”이라는 말은 “주체적(subjektiv)”이라는 말과 다른 것 이 아니었다.
들뢰즈는 “호모 나투라” 개념을 대상과 주체의 동일성에서 이끌어 낸 바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사정은 달라진다.
말하자면, 대 상과 주체는 다시 분리되고, 양자는 재현/표상적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 이다.
세계는 다시 주관적 재현의 영역이 된 것이다. 앞에서 보았던 로렌 스의 말처럼, “각각의 남자, 각각의 여자에게, 우주는
단지 자기 자신의 절대적인 작은 사진의 배경일 뿐이다. … 사진 한 장! 우주에 널린 스냅 사진 속의, 코닥 스냅사진 한 장.” 자본주의는 “사적 소유”라는 형식으로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공리화”를 수행하고, “자본주의의 인조적인 재-영 토화”를
구성하고, 자본과 노동의 기능으로서의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이미지들”을 생산했다(AO 361).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에서의 정신분석의 고유한 작업이 기능을 발휘한다.
“자본주의가 하나의 사회적 공리계뿐 아니라 사유화된 가족에 대한 이 공리계의 적 용을 요구하고 확립하는 것은 바로 정신분석 운동의 내부에서이다. […] 사적 소유 에서 재현되는 그런 주체적 추상적 노동 은 사유화된 가족에서 재현되는 그런 주체 적 추상적 욕망 을 상관항으로 갖는다. 정치 경제학은 그 첫째 항을 떠맡고, 정신분 석은 그 둘째 항을 떠맡는다.
정신분석은 정치 경제학을 공리계로 삼는 적용 기술 이다.”(AO 361-2)
맑스의 용어로 표현하면, 사적 소유에서 생산은 소외된 노동으로 재현되 며, 사유화된 가족(아빠-엄마-나로 이루어진
핵가족)에서 생산은 소외된 에 있었고, 인간의 상태는 실질적 외화의 상태였다.
지금, 인간의 상태는 소외 행 위, 양도 행위로 바뀌었다.)
욕망으로 재현된다.
정신분석은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사유화된 가족 속 에 적용하는 기술이다.
이로써 “욕망적 생산의 탈코드화된 흐름들”은 다 시 “제한된 가족적 재생산”으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AO 362).
가족주의 를 통해 정신분석에서 “성의 의인적 재현”은 정점에 이르렀고(AO 367), 들뢰즈가 정신분석을 자기비판에까지
이르게 하려 했던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5. 화폐 이론과 반-생산의 구체화
들뢰즈는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주의(휴머니즘)”을 구성하는 두 요소 로 “냉소”와 “독실함”을 든다.
“냉소는 초과노동을 수탈하는 수단으로서의 자본이지만, 독실함은 이 동일한 자본 이되 모든 노동력들이 그로부터 유출
되어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신(神)-자본과도 같다.”(AO 267)
원시 사회에서 잉여가치가 “잔혹”에 의해 생산되었고, 전제군주 사회에 서 잉여가치가 “공포”에 의해 생산되었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가 치는 바로 “이상한 독실함”을 수반하는 “냉소”에 의해 생산된다.
그 결과 는 “자본에 의한 점점 더 깊은 생산 통제”(AO 268)이다. 분명 들뢰즈는 “잉여가치는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에 의해 창조된 가치 사이의 차이에 의해서는 정의될 수 없다”(AO 282)고 말한다.
그렇다 면 자본이 초과노동을 수탈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자본주의 의 잉여가치는 어떻게 생산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들뢰즈는 화 폐에 관한 독자적인 이론을 제시한다.
우선 들뢰즈는 화폐가 완전히 상 이한 두 차원에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임금 노동자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돈과 기업의 대차대조표에 기입되는 돈이 같은 돈이 아니다.”(AO 271)
전자는 “교환 가치”를 재현한다.
즉, 소비재 및 사용 가치에 상응하는 지불 수단들, 그리고 화폐와 생산물 간의 일대일 대응 관계가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상품을 구매할 때 지불하는 돈이 바로 이것이다.
반면 후자는 자본의 권력의 기호인 “융자의 흐름”을 재현한다.
이는 “여기서 지금 실현될 수 없”으며, “장기경제전망 능력 내지 장기 평가”와 관련된다.
쉽게 말해 PF(Project Financing) 대출처럼, 미래의 이익 실현을 전제로 현재 동원할 수 있는 돈이 바로 이것이다.
들뢰즈는 이를 다른 말로 표현 한다.
“하나는 임금 노동자의 계좌 속에 있고 다른 하나는 기업의 대차대조표 속에 있는 돈의 이원성, 두 테이블, 두 기입으로
돌아가 보자.
크기의 두 차원을 같은 분석 단 위로 측정하는 것은 순전한 허구이자 희극적 사기로, 이는 마치 은하계들 간 거리 나 원자
내부의 거리를 미터나 센터미터로 측정하는 것과도 같다.
기업들의 가치와 임금 노동자들의 노동력의 가치 사이에는 공통 척도가 전혀 없다.”(AO 273)
하지만 은행은 이 두 돈 모두에, 이 둘의 돌쩌귀에 있으면서 “지불과 융 자라는 돈의 두 형식의 이원성”(AO 272)을 은폐하면
서 자본주의를 작동 시킨다.
그런데 지불 수단의 유통에 뿌리를 두는 “순수 상업적 신용”(가 령 환어음)의 경우는 별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은행 신용”의 경우이다.
그것은 “무한 부채”의 일종인데, 들뢰즈는 이를 베르나르 슈미트(Bernard Schmitt)의 표현을 빌려 “순식간의 창조적 흐름”이라고 말한다.
“이 흐름은 은행들이 자기들 자신에 대한 부채로서 자발적으로 창조하는 무에서의 ̇ ̇ ̇ ̇ 창조̇ ̇이다. 이 창조는 지불 수단으로 마련된 화폐를 전달하는 대신, 충만한 몸의 한 극단에서 마이너스 화폐(은행의 채무로 기입된 부채)를 파내고, 다른 극단에서 플러 스 화폐(은행에 기초한 생산적 경제의 채권)를 투사한다.
이 창조는 소득에 들어가̇ ̇ ̇ ̇ ̇ ̇ 지도 않고 구매로도 향하지 않는̇ ̇ ̇ ̇ ̇ ̇ ̇ ̇ ̇ ̇ ̇ ̇ ̇ “돌연변이 권력(pouvoir)을 지닌 흐름”이고, 순수한 처분 가능성이며, 소유물도 부도 아니다.”(AO 282)
이 은행 신용 화폐는 말 그대로 은행과 기업의 대차대조표에만 기록되는 돈으로, 은행의 대차대조표에 기업에 대한 채권과 채무로 “기록”되는 것 을 통해서 “창조”되는 돈이다.
이 돈은 소득이나 구매 바깥에 존재하며, 나아가 소득이나 구매로 다시 유입(“환류”)되는 돈이다.
왜냐하면 이 돈은 노동자들 내지 생산 요인들에게 분배됨으로써 소득으로 할당되어 구 매력을 획득하고 이 소득들을 현실적 재화로 변환될 수 있게 해주는 돈 이기 때문이다(AO 283).
그렇다면 은행의 대차대조표에 기록된 채권과 채무 그 자체는 어떻게 성립하는가?
은행은 기업에 대출을 해줌으로써 그 자신은 채권을 갖고 기업은 부채를 갖게 되지만, 이 경우 은행은 막대한 위험 요소(risk)를 떠 안게 된다.
이 경우 이 은행은 부도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떤 경우이건 예금자에 대한 은행의 지급 능력을 보증해 줄 확실한 장 치가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국가가 행하는 기능이다.
“조절자로서의 국가는, 직접 금(金)과의 관련을 통해서건, 간접적으로 신용 보증인, 단일 금리, 자본 시장의 통일성 등을 포함하는 중앙 집중화 양식을 통해서건, 이 신용 화폐의 원리상의 태환(兌換) 가능성을 보증한다.”(AO 272)
이렇게 되면, 은행이 대차대조표에서 마이너스로 기록함으로써 창출한 플러스 화폐는 기업으로 이전되어 은행 자신은 채권
만을 가진 채 마이너 스 화폐만을 지니게 되지만, 이 은행은 여전히 굳건하게 마치 아무런 부채도 없는 양 기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은행은 빚을 내어 (장부상의 마이너스 화폐) 기업에 빌려주었는데(장부상의 플러스 화폐), 이미 돈은 기업에 넘어갔으므로 현재로서는 은행 자신은 빚더미에 앉아 있는 셈이므로, 은행과 거래하려는 이들은 은행이 기업으로부터 부채를
상환하지 못할 경우의 위험 요소 때문에 거래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이럴때 국가가 은행을 보증함으로써 은행과의 거래를 유지하게 한다는 말이다.
이는 세계적인 규모에서 가동된다.
“최근의 화폐의 역사, 달러의 역할, 단기 이동 자본들, 화폐들의 변동, 융자와 신용 의 새 수단들, 국제통화기금의 특별 인출권, 위기와 투기의 새 형식, 이것들은 탈코 드화된 흐름들의 길의 표지를 보여준다.”(AO 291)
어쨌건, 국가 내지 국가 연합이 보증하는 바로 이 “태환 가능성”이 사람 들을 안심시키며, 생산 활동에 전념하게 하여, 결과적으로는 기업의 상 환을 가능케 하는 요소인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사람들이 생산 활동 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발행된 신용 화폐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태환 가능성이라는 이 원리의 그림자가 없다면 피지배 계급의 통합은 전혀 실효성 이 없을 테지만, 이 원리만 있으면 가장 낙후된 피조물의 욕망 이, 경제를 알건 모르 건, 전력을 다해 자본주의 사회 마당의 집합을 투자하는 일이 일어나기에 충분하다. 흐름들을 보자면, 그 누가 흐름들, 흐름들 간의 관계들, 흐름의 절단들을 욕망하지 않으랴?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돈의 이 조건들 속에서 흐름들을 흐르게 하고 절단할 줄 알고 있었다.”(AO 272)
여기서 우리는 ‘자기 예속의 욕망’이라는 문제에 대한 중요한 답변 하나 를 찾게 된다.
돈의 이중성을 가동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질적으로는 그 누구도 “착취”하지도 “착취”당하지도 않는다는 이유에서, 자본주의는 고유의 “냉소”를 지니고 있다(AO 283-4).
사람들은 그저 자기 자신과 가 족을 위해 성실히 일터로 향하고, 또 향해야 하는 것이다.
“맑스는 자본가가 자기 고유의 냉소를 숨기지 않는 자본가의 황금시대에 대해 종종 넌지시 말하곤 했다.
적어도 처음에는 자본가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 즉 잉여가치 를 수탈하는 일을 모를 수 없었다.
하지만 자본가가 ‘아니, 아무도 도둑맞지 않았어’ 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면, 이 냉소는 얼마나 커져버렸는가.
왜냐하면 이때에는 모든 것이 마치 이윤과 잉여가치가 태어나는 지독한 심연 속에 있는 듯 두 종류의 흐름 들 간의 어긋남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 하나는 시장 자본의 경제력의 흐름이며, 다른 하나는 조롱하듯 “구매력”이라고 명명된 흐름으로, 산업 자본가의
상대적 의존성뿐 아니라 임금 노동자의 절대적 무력함을 재현하는 진정 무력화된̇ ̇ ̇ ̇ 흐 름이다. 자본주의의 진짜 경찰,
그것은 화폐와 시장이다.”(AO 284)
요컨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할수록, 물론 노력하지 않을 도리 도 없지만, 사람들은 돈의 이중 구조 때문에, 점점
더 자신을 굴레에 빠 지게 하는 것이다.
“공장은 감옥이다. 공장은 감옥을 닮은 것이 아니다. 공장은 실제 감옥이다.”(AO 448)
사람들을 끊임없이 일하게 만드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기능 구조이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자본의 외견상의 객관적 운동은 결코 의식의 오인도 가상도 아니며, 자본주의의 생산적 본질이 그 자체 필연적으로 그것을 지배하는 상품 내지 화폐의 형식으로만 기능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 형식의 흐름들 및 이 흐름들 간의 관계들은 욕망의
투 자의 비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욕망의 통합[積分]이 일어나는 것은 흐름들의 차원, 화폐 흐름들의 층위에서지, 이데올로기 층위에서가 아니다.”(AO 284)
자본주의가 욕망의 흐름의 길을, 욕망의 수로(水路)를 만든 방식은 전례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앞에서 언급했던 “냉소”의 힘이다. 아무도 착취하 지 않고, 아무도 착취당하지 않는다.
“더 이상 주인조차 없으며, 지금은 다만 다른 노예들에게 명령하는 노예들만 있을 뿐이다.
더 이상 밖에서 동물에게 짐을 지울 필요가 없으며, 동물 스스로 짐을 진다. 인간은 결코 기술 기계의 노예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 기계의 노예이다.
부르주아가 그 사례이다.
부르주아 전체를 놓고 보면, 부르주아는 자기의 향유와 아무 관련도 없는 목적들을 위해 잉여가치를 흡수한다.
부르주아는 가장 천한 노예보다 더 천한 노예요, 굶주린 기계의 우두머리 종이요, 자본을 재생산하는 짐승이요, 무한 부채의 내면화이다. “나도 종이다”라는 것이 주인의 새로운 말이다.”(AO 302)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삶을 자발적으로 자본의 부품으로 내맡기는 일이 벌어진다.
이는 이해관계의 층위에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욕망의 흐름이 그렇게 되도록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작동에는 한 가지 맹점이 도사리고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융자의
흐름을 통한 은행 신 용의 투자가 실현되어야만 하는데, 이 실현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실현을 위해 자본주의 고유의 “반-생산”이 조 직되며, “죽음 본능”이 전쟁 내지 파시즘의 형태로 구체화된다.
i) “실현되지 않은 흐름의 잉여가치는 생산되지 않은 것과 다름없으며, 실업과 침체 속에 구현된다. 소비와 투자 바깥에서 [잉여가치를] 흡수하는 주요 방식들을 나열하 는 것은 쉬운 일이다. 광고, 시민 통치, 군국주의, 제국주의가 그것이다.
이런 점에 서 자본주의 공리계에서 국가의 역할은, 국가가 흡수하는 것은 기업들의 잉여가치 에서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 잉여가치에 덧붙이는 것이라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이 일은 자본주의 경제를 주어진 극한들 내에서 최대 생산량에 접근시키고, 또 나 름대로 특히 사기업과 전혀 경쟁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인 군비(軍費)의 차원 에서 이 극한들을 확대함으로써 이루어진다(오직 전쟁만이 뉴딜̇ ̇이 결핍하고 있던 것을 성공해냈다).
정치-군사-경제 복합체의 역할은, 주변부에서 또 중심부의 전유 된 지대들에서 인간적 잉여가치의 추출을 보증한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또한 그 자신이 지식 정보 자본의 자원을 동원하여 막대한 기계적 잉여가치를 낳고, 결국은 생산된 잉여가치의 가장 큰 부분을 흡수한다는 점에서도 더욱 중요하다. 국가, 경 찰, 군대는 반-생산의 매머드 급 기업을 형성하지만, 생산 자체의 한복판에서, 생산 을 조건 지으면서 그렇게 한다. […]
이 반-생산 장치는 더 이상 생산에 대립되고 생산을 한정하거나 저해하는 초월적 심급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도처에서 생산 기계에 스며들어, 이 기계와 밀접하게 맺어져 그 생산성을 조절하고 그 잉여가치를 실현한다. […] 반-생산 장치의 유출은 자본주의 체계 전체의 특징이다.”(AO 279-80)
ii) “죽음 본능은 정신분석과 자본주의의 혼인을 거행한다. […]
돈-자본의 몸이 된 충만한 몸은 생산과 반-생산의 구별을 제압한다. 자본주의는 항상 확대되는 그 자신의 극한들의 내재적 재생산(공리계) 속에서, 도처에서 반-생산을 생산력들 속에 섞는다. 죽음의 사업은 자본주의에 있어서의 잉여가치 흡수의 주요하며 특유한 형 식들 중 하나이다. 정신분석이 죽음 본능을 갖고서 다시 발견하고 다시 행하는 일 이 바로 이 전진 자체이다. […]
내재적이고 전파되고 흡수된 죽음, 이런 것이 자본 주의 속에서 기표가 취하는 상태이며, 분열증적으로 빠져나간 자들을
틀어막고 도 주들을 옭죄기 위해 사람들이 도처에서 이전하는 빈 오두막이다. 현대의 유일한 신 화는 좀비 신화이다.
좀비는 일을 잘 하고 이성을 되찾은 고행의 분열자들이다. […]
많은 실업자가 있어야 한다, 많은 사망자가 있어야 한다, 알제리 전쟁은 주말 교통 사고, 벵골의 계획된 죽음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
여기[죽음 본능 이라는 표현]서 일반적으로 본능이라 불리는 것은 한 체계 속에서 생산과 반-생산 의 관계들에 의해 역사적 사회적으로 규정된 삶의 조건들을 가리킨다. […]
모든 것 은 죽음 안에서 일하고, 모든 것은 죽음을 위해 욕망한다.”(AO 400-4)
생산 자체 속에 반-생산이 현존한다. 반-생산이야말로 자본주의가 투자 를 통해 생산해 낸 막대한 생산물을 이윤으로 실현하는 계기이다. 이로 써 엄청난 부의 생산과 현존하는 빈곤의 양립 가능성이 생겨난다.
또한 정신분석은 죽음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이 일을 돕는다.
언제나 너무 많 이 있지만 언제나 너무 부족하게 된다. 이제 모든 것은 죽음 안에서 일하고, 모든 것은 죽음을 위해 욕망한다. 결핍은 자본주의에 의해 생산되며, 그 속에서 각자는 탈바꿈하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실을 뽑아내기만 하는 누에처럼 실존
한다.
자본주의의 참된 공리계는 “사회 기계 자체의 공리 계”(AO 277)요, “세계 자본주의 시장의 공리계”(AO 278)이다.
“자본주의 의 진짜 경찰, 그것은 화폐와 시장이다.”(AO 284) 그리하여 인간은 “사회 기계의 노예”(AO 302)가 된다.
결론: 분열증으로서의 삶
자본주의는 탈영토화와 탈코드화의 결합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자본 주의의 탈영토화는 언제나 “이윤”의 제약 아래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 탈영토화”라 불리며, 그런 의미에서
“화폐와 시장”의 품 안으로 재영토화된다.
한편 자본주의의 탈코드화는 언제나 “공리계”에 포획된다는 점 에서, 절대적으로 탈코드화된 흐름에까지 이르지 못한다.
들뢰즈가 자본 주의의 극한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절대적 탈영토화와 절대적 탈코드화의 결합, 즉 “분열증”의 과정이다.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이야말로 유일한 보편이다.”(AO 162)
분열증은 존재론의 대상이지 병리학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각자의 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성실히 일터로 향하 는 현대인들 모두가 병리학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편이 적절하리라.
“정신의학 또는 반정신의학의 참된 정치는,
1) 광기를 정신 질환으로 변형시키는 모 든 재-영토화들을 해체하고,
2) 모든 흐름에서 그 분열증적 탈영토화 운동을 해방 시키는 데 있으며, 그 결과 이 성격은 어떤 특수한 잔여물을 광기의
흐름으로 규정 할 수 없으며, 노동, 욕망, 생산, 인식, 창조의 흐름들 역시도 그 가장 깊은 경향성 속에서 변용한다.
광기는 더 이상 광기로서 실존하지 않으리라.
이는 광기가 “정신 질환”으로 변형되겠기 때문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광기가, 과학과 예술을 포함한 모든 다른 흐름의
협조를 받겠기 때문이다.”(AO 383)
이 점에 대해 들뢰즈는 푸코의 말을 환기하기도 한다. “우리가 오늘날 극̇ 한̇, 또는 낯섦, 또는 견딜 수 없음의 양태로 체험하는 모든 것은 훗날 긍 정적 평온함으로 돌아오게 되리라.”(AO 384n 재인용)
사실 푸코는 19세 기에 “인간 과학”에 의해 형성된 정상적인 “인간”의 죽음을 바로 이런 맥 락에서 말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 인” “마지막 인간”으로서의 현대인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한 니체가 “인간-너머”
(초인, Übermensch)를 고지했음을 알고 있다.
나아가 우리는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소외된 인간을 극복한 인간상으로서 “사회주의 적 인간”을 꿈꾸었다는 것도 살펴
본 바 있다.
들뢰즈가 이 동일한 과업 에 할애한 명칭이 “분열자”임을 우리는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 의 작업이 “비인간주의”의 양상을 띠는 까닭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과 인간의 본질적 통일성”으로서의 본래적인 분열자는 어떤 존재인가?
들뢰즈는 야스퍼스(Karl Jaspers)와 레잉(Ronald Laing)의 작업을 참조한다.
이들은 분열증 또는 광기가 병으로서, 끔찍한 악화로 서, 붕괴와 와해로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정말 광기라고 불러야 하는 것은 과정이요 병은 이 과정의 위장 내지 풍자화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병만이
과정에 의해서만 우리가 치유되 어야 할 유일한 광기인지 더 이상 알 수 없다.”(AO 162)
왜냐하면 생산의 과정이 그 경로에서 벗어나 갑자기 중단될수록, 과정이 공백속에서 계속되어 과정의 와해를 초래하는
일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는 이로 인 해 병들게 된 것이다.
“문제는 무엇보다도 이런 것[오이디푸스화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그가 병들었는지, 아니면 반대로 바로 그것이, 설사 아무리 걱정스럽고 모험적인 것이라 해도, 하나의 병이나 “붕괴(breakdown, effondrement)”가 아니라 하나의 “돌파(breakthrough, percée)” 인 분열증적 과정인지를 아는 것이다.
분열증적 과정이란, 우리를 욕망적 생산과 떼어 놓는 벽이나 극한을 뛰어넘고, 욕망의 흐름들을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 분열자는 과정으로서의 분열증 때문에 병든 것이 아니니 무엇으로 인해 병들었는 가? 무엇이 돌파를 붕괴로 변형시키는가? 반대로 그가 병든 것은, 과정의 강제된 정지, 또는 과정의 공전의 연속, 또는 과정이 억지로 목적으로 여겨지게 되는 방식 때문이다.”(AO 434)
사실이지, 분열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가 없다. 분열자는 노동자로 서 상품이 될 수 없다(AO 292).
들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를 통해 소개 한 분열자들의 초상 모두가 이 점을 증언한다.
하지만, 자본의 이윤 창출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회적 생산의 경과와 분리된 핵가족 성원 들에게 커다란 폐를 끼친다고 해서, 이들이 사회의 모든 규범을 넘나든 다고 해서, 이들을 정신병원에 감금해야 할 정당성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감금과 배제가 자본주의 사회의 정상성과 일상성을 구성하고 있다.
들뢰즈가 비인간주의를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일들을 저지르고 있다.
우주의 운 행 내지 자연의 경과에서 사람들은 절연되고 있다.
오늘날 인간은 자본 주의의 부품과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각자는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여러 이유로 말미암아 자신의 예속을 바라는 경우도 많다.
가족의 안위를 위해 아빠나 엄마로서 책임감을 짊어지며 산다든지, 스스 로는 너무도 싫지만 자본주의 사회 조건 때문에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만 하고 이 와중에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전부인 삶을 살아가고 만다든지, 아니면 잠깐 미친 척함으 로써 내일의 노동을 위한 활력을 얻는다든지, 실제로 죽기 전에는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누릴 수도 없는 자산(부동산) 가치의 상승을 기대하 면서 자신의 현실적 삶을 죄어 오는 정치인을 선택한다든지, 비록 자신 은 보잘것없지만 더 강한 전체에 속하기를 동경함으로써 설사 현실화되 지 않는다 하더라도 위안을 얻는다든지 하는 식의 삶이 우리의 일상인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화폐의 이중성에 근거한 자본의 작동 체계와 사회와 절연된 가족 속에서 몸부림쳐야 하는 개인의 탄생이 현대의 인간주의를 가장 잘 묘사해 준다.
이에 대한 들뢰즈의 비인간주의적 대안은 고흐 (Vincent van Gogh)의 편지에 나타난 다음 구절로 갈무리할 수 있으리라.
“어떻게 이 벽을 가로질러야 하는가. 강하게 두드려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이 벽을 파고 줄로 갈아 가로질러야 한다, 내 느낌에 천천히 참을성 있게.”(AO 162 재인용)
주요 참고문헌
(참고문헌은 본문에 인용된 것들과 여타 중요하게 참고한 것들만을 수록했음.)
1. 들뢰즈의 1차 문헌 및 약어. (모든 번역은 한국어 번역본과 무관하게 원문에서 다시 했음.)
- 이하 생략 -
김재인(2013)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