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서울로 가겠다고 했다. 두어 학기 졸업을 미루면서 취업 준비를 했건만 여의치 않았던지 무작정 올라가 보겠다고 했다. 아직은 바람 끝이 매섭다고, 앞산마루에 잔설이 저렇게 남았다며 아내는 짐을 싸면서 눈물을 찍어냈다. 나 역시 무연한 척 짐짝 하나를 받아 들고 문을 나섰다.
아들은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중고등학교에서도 딱히 앞서거나 뒤처지지 않는 보통의 아이였다. 대학교 진학할 때는 수출로 먹고사는 좁은 나라에 산다면서 중간 정도는 되는 지방 대학의 무역학과를 선택했었다. 남들이 가는 군에도 다녀오고, 전공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스펙을 쌓는다며 요란을 떨기도 했었다. 그런 아들이 졸업을 하면서 밥벌이할 때를 못 찾아 저렇게 기가 죽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퇴직하는 선생님을 대신할 기간제 교사 한 사람을 초빙했다. 공고가 나간 지 사나흘 만에 백 통 가까이 이력서가 쌓이는 것을 보고 적잖게 놀랐다. 어떻게 보고 듣고 알았는지 구석구석에서 지원서가 답지했다. 그들의 이력서를 하나하나 들춰보면서 또 한 번 놀랐다. 첨부한 고등학교 때의 학생부에는 대부분 우수수 우수수한 성적들이 나보란 듯이 오뚝 서서 자랑들을 하고 있었다. 교과목이 외국어라서 그러했겠지만 어학연수는 기본이었고, 외국어검증 성적도 보 800~900점대였다. 거기다가 전공과 관련 없는 국가자격증도 한두 개쯤 들어 있었다. A4용지 두어 장에 적어놓은 자기 소개서에는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것을 여한 없이 써먹어 보겠다는 의지가 전방을 주시하는 전투병의 눈처럼 종이를 뚫었다. 계약직 자리를 두고 이렇게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들고 그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깝고 서글펐다.
오래전에 ‘졸업’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더스틴 호프만을 대스타로 만든 이 영화는 미국에서 60년대 말에 제작되었으나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윤리적 정서 때문에 20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극장에서 구경할 수 있었던 영화다. 교문을 나서는 젊은이들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 방황 그리고 사랑의 메시지가 잘 버무려져 당시의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었다.
이 영화는 짜임새 있는 스토리 못지않게 세기의 듀엣 사이먼과 가펑클의 배경음악이 유명세를 타 ‘침묵의 소리(The sounds of silence), 스카브루 페어(Scarborough Fair) 등의 노래는 지금까지도 중년들의 가슴에 깊은 여운으로 남아 있다. 특히 라스트 신에서 남자 주인공이 결혼식장에 뛰어들어 연인의 손을 잡고 뛰쳐나오는 장면은 새 세상을 향해 모험을 감행하는 젊은이의 표상처럼 각인되어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졸업을 앞둔 젊은이들의 앞날이 낭만적인 해피엔딩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월은 졸업시즌이다. 봄을 기다리는 젊은이들의 조바심을 보다 못해서 이삼일 짧게 만들어놓은 설렘의 달이기도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졸업식장은 축하의 인파들로 미어터지고, 추운 겨울인데도 오색의 꽃다발이 상기된 얼굴처럼 피어났었다. 하지만 긴 불황의 터널에 갇혀서인지 여기저기 들리던 졸업의 함성을 듣기가 어렵다. 가라앉은 졸업식장, 처진 어깨들이 시든 꽃다발처럼 애처로울 뿐이다.
서울로 가는 아들을 보고, 책상에 쌓인 이력서를 보면서 젊은이들에게 닥친 시련의 이월을 짐작한다. 그럼에도 딱히 해줄 말이 마땅치 않은 것이 안타깝다. 다만 겨울 같지 않은 이월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다. 결국 인생의 삼월은 오고 말 것이며, 단물 같은 봄비가 다시 언 땅을 녹일 것이다. 그때 우리 젊은이들이, 내 아들이 마디 굵은 대나무가 되어 푸른 잎을 달고서 불안했던 이즈음의 졸업 시즌을 추억의 노래로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