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가 고갱과 동거하면서 명작들을 남긴 미술사상(美術史上)의 고소(高所) 아를에서 그가 정신병으로 입원했던 생 레미를 가자면 퐁베이유라는 마을을 지납니다. 여기서 몽마졸 쪽으로 빠지는 길은 마을을 막 벗어나면서부터 양 쪽으로 노송(老松)들이 길게 도열(堵列)합니다.
땡볕의 땅을 식히는 청송(靑松)의 청량감(淸凉感), 이 솔밭 사이로 문득 대머리처럼 훤히 까진 언덕마루에 풍차가 하나 나타납니다. 바람을 마중 나와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알퐁스 도데의 풍차>라고 부릅니다. 풍차까지 올라가는 언덕길은 관목 사이사이로 바위 투성입니다. 무슨 성지(聖地) 순례라도 하듯이 사람들이 풍차를 향해 줄을 있습니다.
* 프로방스 지도
등마루에 오르면 사위(四圍)는 툭 트인 파노라마. 이 자리에서 경관은 <나의 풍차에서의 편지> 맨 첫머리에 나오는 <자리 잡기>편(篇)에 잘 그려져 있지요.
"아름다운 송림(松林)이 햇빛에 번쩍거리며 저 언덕 밑까지 내 앞을 달려 내려간다. 멀리는 알피유 산맥이 뾰족한 봉우리들을 드러내고 있다. 아무 기척도 없다. 다만 이따끔씩 피리소리, 라벤더나무 속의 마도요새소리, 길을 가는 암노새의 방울소리....., 프로방스 지방의 이 모든 아름다운 경치는 빛 없이는 없다."
알퐁스 도데의 기념관이 된 풍차는 바람에 그을려졌습니다. 안은 한창 시절의 방앗간 모양이 되살려져 있습니다. 바깥에 따로 있는 지하실은 전시실입니다. <나의 풍차에서의 편지>의 교정쇄(校正刷)들, 그리고 <아를의 여인>을 썼다는 책상 등이 거기 있습니다.
풍차의 벽에는 명판(銘板)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내게는 하나의 고향이었고 나의 거의 모든 작품에 그 장소와 인물들이 등장하는 암산(岩山)의 모퉁이."
도데가 친구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그의 말대로 <나의 풍차에서의 편지>에 실린 작품들은 이 풍차 주변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도데가 퐁비에이유에 처음 온 것은 1860년 여름 그의 나이 20세 때였습니다. 풍차가 선 언덕 아래의 몽토방이란 성관(城館)에 아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파리의 훤소(喧騷)에 지칠 때마다 수시로 이 풍차의 마을을 찾아왔습니다. 1867년 결혼을 하자 신혼여행을 온 곳도 여기였습니다.
* 훤소(喧騷) : 왁자지껄하며 소란스럽고 시끄러움
몽토방 성관을 둘러싼 송림(松林)은 그의 그리운 산보로였고 죽을 때까지 그 안식의 그늘을 잊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님’이 태어난 고향인 도데로서는 남프랑스는 향수(鄕愁)의 고향이었습니다.
도데가 이곳에 마지막으로 온 것은 51세 때인 1891년 11월이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성치않은 몸이었습니다. 그가 글을 쓰던 몽토방 성관의 방은 창문이 오래 전부터 닫혀 있었습니다. 집지기가 벽난로를 지펴 그의 원기를 돋구어 주었습니다.
도데는 걷기가 힘들어 마차를 타고 풍차 있는 데로 올라갔습니다. 언덕 마루에 선 그는 멀리 고향쪽 하늘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명상에 잠겨있곤 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도데는 이 풍차의 언덕에서 밀을 빻으러 온 농부들을 만나 민화(民話)들을 주워 모았습니다. 겨울밤에는 농가의 벽난로에 올리브나무의 등걸을 지피며 옛 전설을 들었습니다. 이 소재들을 파리로 돌아온 후 하나씩 작품화했고 그것을 묶은 것이 <나의 풍차에서의 편지>였습니다.
도데가 묵던 몽토방 성관은 지금도 소나무숲 속에 은자(隱者)처럼 숨어 있습니다. 건물 정면에 “자연을 찾아 파리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내가 여기에 온 것이 몇 번이었던가”라는 도데의 말이 새겨져 그의 목소리를 듣는 듯 합니다.
바깥 정문의 문주(門柱)에는 <나의 풍차에서의 편지>가 잉태된 곳임을 자랑하여 풍차 그림과 함께 염소가 한 마리 그려져 있습니다. 염소는 그의 단편 중의 하나인 <스갱 씨네의 염소>의 주인공일 겁니다.
성관에 달린 농가 앞의 돌탁자는 도데가 이 단편을 쓴 자리로 전해집니다.
<나의 풍차에서의 편지>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스갱 씨네의 염소>는 우리에 갇힌 염소 한 마리가 들판이 그리워 달아났다가 늑대를 만나 밤새도록 싸운 끝에 새벽녘에 결국 잡혀 먹히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퐁비에이유 마을에는 <나의 풍차에서의 편지>에 등장하는 코르니유며 스갱 등의 성씨(姓氏)를 가진 사람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알퐁스 도데 애호가 협회가 풍차를 도데의 기념관으로 만들기로 한 것은 1935년, 당시 퐁비에이유 마을에서는 4개의 풍차가 남아 있어서 어느 것을 <알퐁스 도데의 풍차>로 정하느냐가 문제였다고 합니다.
도데는 풍차 속에 실제로 살았던 것도 아니고 어느 특정의 풍차를 지적하여 <나의 풍차>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결국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날개를 돌린 지금의 풍차가 도데의 기술(記述)과 비슷하고 보존 상태도 가장 좋았기 때문에 선정이 되었다고 하네요.
1814년에 만들어진 생 피에르라는 이름의 이 풍차는 1915년까지 꼭 1세기를 돈 후 날개를 멈추었습니다. 주인 리데 영감은 1938년에 죽었습니다. 그가 소설 속 코르니유 영감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도데가 <코르니유 영감의 비밀-아래에서 설명>을 쓸 때는 풍차들이 한창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도데는 당시 이미 풍차방앗간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 풍차로 올라가는 길
작가는 예언자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나의 풍차에서의 편지>가 책으로 나온 것이 1869년이니까 도데는 실로 50년 뒤를 예언한 셈이 된 것이죠.
이 단편집의 서문에서 도데는 공증인 앞에서 풍차 하나를 매입하는 계약서를 쓰고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작가의 장난일 뿐, 그리고 그의 오랜 원망(願望)의 표현일 뿐 실제로 그가 풍차를 사들인 적은 없다고 합니다.
작가의 꿈은 먼 훗날의 현실입니다. 풍차를 자기 서재로 만들고 싶었던 도데의 꿈은 그의 사후(死後) 40년 만에 <알퐁스 도데의 풍차>로 달성이 되었습니다.
* 프로방스 지역의 명물, 라벤더
알퐁스 도데의 <나의 풍차에서의 편지>에 나오는 단편 <코르니유 영감의 비밀>은 대충 다음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60년동안 풍차를 돌려온 방앗간 주인 코르니유 영감은 마을에 제분공장이 들어서자 미칠 지경이 되었다. “이 놈들은 제분공장의 가루로 프로방스를 독살하려 든다”고 고함을 질러대면서 동네사람들을 아무도 거기 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으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코르니유 영감의 방앗간에는 이제 아무도 밀을 빻으러 가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풍차는 여전히 씩씩하게 돌고 있었다. 방앗간의 문은 항상 잠긴 채 절대로 안을 엿보지 못하게 하고는 영감은 이따끔씩 밀가루 부대를 노새의 등에 지우고 마을을 지나갔다.
풍차에서 쫓겨나온 영감의 손녀딸이 어느 날 남자 친구와 함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안을 들여다 보았다. 텅 빈 방앗간에는 밀가루는 커녕 밀알 한알도 떨어진 것이 없었다. 풍차는 건성으로 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불쌍한 영감의 비밀을 안 마을 사람들은 다시 밀을 가지고 풍차를 찾아갔다. 영감은 기뻐 울었다.
어느 날 아침, 코르니유 영감은 죽었다. 그리고 마을의 마지막 풍차 날개는 이번에야말로 영원히 돌지 않게 되었다. 영감이 죽은 후 아무도 그를 계승하지 않았다. 풍차의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 알퐁스 도데(1840-1897) >
* 알퐁스 도데와 책 <풍차에서의 편지>
알퐁스 도데는 자연주의 계열의 작가이기는 하지만 시적 정조(詩的 情調)와 유머가 있는 그 특유의 작풍(作風)으로 인간미 흐르는 작품을 썼습니다. 단편집 <나의 풍차에서의 편지>는 그의 출세작입니다.
작가의 고향인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풍경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을 정감(情感)있게 소묘한 이 단편집의 작품들은 1886년 경에 쓰기 시작하여 <르 피가로>지(紙)에 연재되었다가 1869년 단행본으로 나왔습니다.
이 가운데 <코르니유 영감의 비밀>, <스갱 씨네의 염소>, <별>, <법왕의 노새> 등이 널리 읽혔고 <아를의 여인>은 작자가 후에 3막 짜리 희곡으로 다시 쓴 것을 비제가 곡을 붙였습니다.
* 도데와 부인
[ 알퐁스 도데의 고향, ‘님(Nim)’의 유적과 풍광 ]
* 도데의 고향 '님'
* 로마인들의 놀라운 과학, 퐁 뒤 가르
퐁 뒤 가르는 ‘강의 다리’라는 뜻으로 기원전 19년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건설한 거대한 규모의 수로 겸 다리입니다. 아그리파(1) 지휘 하에 만들어졌으며 강에서 50km 떨어진 님(Nim)까지 무려 5백 년 동안 물을 공급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다리 용도로만 사용되었습니다.
총 길이가 275m, 높이는 49m로 그 규모만 해도 어마어마합니다. 다리는 3단으로 쌓여져 있는데 미적으로도 상당히 아름답습니다. 하단과 중단에 있는 다리는 이동 통로로 사용했고 가장 상단에 있는 다리가 바로 수로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아무런 동력도 없이 1km당 34cm의 경사도를 만들어 님까지 물을 공급했다는 사실입니다. 100m당 3.4cm의 아주 미세한 경사도인 것입니다.
이 다리는 만든 지 2천 년이나 되었습니다. 요즘 만드는 우리네 아파트들은 20년 이상이 넘으면 무너뜨리고 다시 짓는다는데 이 다리는 2천 년 동안 지진과 홍수를 견디면서 지나왔지만 무엇 하나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 수로를 사람들이 막...
* 로마인들의 신전, 메종 카레(Maison Carree)
기원전 1세기에 지은 메종 카레는 님을 상징하는 유적으로 현재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신전 중 하나입니다. ‘사각형의 집’이라는 뜻의 메종 카레는 폭이 15m, 높이가 17m, 길이가 26m 규모인 아주 작은 신전으로, 근처 론 강의 채석장에서 운반해온 석회암으로 지었습니다.
미국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은 프랑스 공사 시절, 남프랑스 일대를 누비는 여행을 마치고 지인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파리와 첫사랑에 빠진 후 이번에 두 번째 사랑에 빠진 것 같습니다. 저는 메종 카레를 한 시간 동안이나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애타게 애인을 바라보듯이 말입니다.”
이 신전에 크게 영감을 받은 토머스 제퍼슨은 이후 님에서 본 로마 천재들의 건축물들을 두루 참고해서 버지니아의 주도인 리치먼드 시를 설계했다고 합니다.
파리의 마들렌 사원도 나폴레옹이 님의 메종 카레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그의 제국이 2천 년 전 로마제국의 환생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사원을 건설했을 겁니다. 이 사원은 그의 충성스러운 대육군을 신격화하기 위한, 그야말로 신전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마들렌 사원은 성당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파리 마들렌 사원
(1) 아그리파
젊은 시절부터 아우구스투스와 친교를 맺어 카이사르가 죽은 후에 아우구스투스의 정계 진출을 도왔으며, 그의 군사적·외교적 성공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대항한 악티움해전의 공은 절대적이었다. BC 21년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 결혼하였고, 로마시(市)의 미화를 위해 수도, 욕장, 판테온(원형신전) 등을 신설하였다. 또한, 로마 제국을 널리 측량하고 지리서(地理書)를 저작하여 로마제국에 있어서 세계지도 작성의 기초를 닦았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한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