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26
10월27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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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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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E3P02h8PW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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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령께서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주신다니,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요!>
젊은 시절 언제나 마음속에 간직했던 희망사항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직 젊고 사목활동에 바쁘니 기도생활이 한심할 정도로 부족한데, 좀 더 나이 들면 나아지겠지. 나이가 들수록 시간 여유도 많아질 테니, 더 자주, 더 오래 성체 앞에 머물 수 있겠지? 늘 기도하는 수도자로서 얼굴도 부드러워지고, 언행도 겸손해지고...
그러나 그건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것을 점점 더 뼈져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나이 든다고 기도생활도 저절로 익숙해지고 성장해나가는 것이 결코 아님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실 충만한 기도 생활은 절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언제나 부족하고 불성실한 기도생활에 부끄러워하고 있는 제게 오늘 첫 번째 독서인 로마서 말씀은 큰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언제나 기도 초보자이며, 기도할 줄 모르는 저를 위해 성령께서 함께, 그리고 대신 기도해주신다니,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모르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서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서 8장 26절)
여러분들, 우리가 걷고 있는 지상 순례 여정 길에 때로 든든한 아버지처럼, 때로 따뜻하고 포근한 어머니처럼 동반해주고 계시는 성령의 존재, 성령의 현존을 자주 의식하며 살아가시는지요?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인간과 함께 머무셨던 33년간의 지상생활 내내 그분을 동반하셨으며, 협조하셨으며, 인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지상생활 내내 우리를 동반하시고, 협조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디든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신 하느님 아버지, 부활하셔서 영원히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어디서 만나뵐 수 있을까요? 바로 성령 체험을 통해서 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힘차게 활동하실 때, 우리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절망과 비참, 무기력과 우울감을 일시에 걷어 가십니다.
성령께 우리 삶의 주도권을 통째로 내어드릴 때,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미소지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기쁘게 질 수 있습니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죽어가면서도 행복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성령께서는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십니다. 우리의 보잘 것 없는 기도에 함께 해주십니다. 너무 나약한 나머지 수시로 기도를 중단하고 포기하는 우리를 보시고 크게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간구해주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네 삶을 기쁨 가득한 축제의 장으로 변화시키십니다. 넘치는 생명력과 활기로 기쁨 충만한 공동체로 바꾸어주십니다. 이 모든 기적들이 바로 성령의 은총으로 인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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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D5Z1R6a3F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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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은 하느님과 이웃을 받아들이기 위한 십자가 고통>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을 선택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복음 본문의 흐름으로 보면 좁은 문은 아주 분명합니다. 우선 예수님은 안식일을 설명하시며 ‘열여덟 해 동안 허리를 펴지 못했던 여인’을 고쳐주십니다. 저는 열여덟이 세속-육신-마귀의 합쳐진 숫자라 해석했습니다. 세속-육신-마귀가 인간을 땅을 보는 짐승처럼 살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말씀과 은총’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녀의 병이 나았다고 말씀하시고 안수로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 다음 ‘하느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시며 ‘겨자씨와 누룩’으로 표현하십니다. 겨자씨는 말씀과 같고 누룩은 은총과 같습니다. 누룩은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어집니다. 세속-육신-마귀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은총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겨자씨가 자라나면 새가 날아와 쉬게 할 휴식처를 제공합니다.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진리의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진리와 은총은 그 사람 안에서 자신을 죽이고 이웃을 위해 살게 만들어 짐승의 삶에서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 말씀에서 ‘좁은 문’은 ‘겨자씨와 누룩’ 때문에 당해야 하는 ‘십자가의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룩으로 자기 자신이 죽는 것도 고통이요, 이웃을 위해 겨자나무가 자라나게 하는 것도 고통입니다.
폴 브랜드는 선교사이고 의사입니다. 루이지애나주에서 의사로 일할 때 한 엄마가 딸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아이의 발엔 붕대가 감겨있었습니다. 폴은 아이가 아프지 않게 붕대를 하나하나 풀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남의 일인 양 진료실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것이었습니다. 붕대를 다 풀었을 때 폴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발바닥에 종양이 생겨 발이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엄마가 어느 날 집에 돌아왔는데 아이는 비닐 위에 빨간색으로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낙서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가까이 와서 보니 아이는 자기 손가락에서 나온 피로 그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입을 보니 치아에도 피가 묻어있었습니다. 아이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손가락을 물어뜯은 것입니다. 아이의 한 손가락은 그렇게 이미 짧아져 있었습니다. 발에 난 상처는 못이 박힌 줄 모르고 돌아다니다가 썩은 것입니다. 남편은 이런 ‘괴물’을 어떻게 키우느냐며 집을 나갔습니다. 결국, 그 아이는 얼마 뒤 양발과 손을 절단해야 했습니다. ‘나병’에 걸린 것입니다.
상처가 났는데 아프지 않으면 자신의 몸이 망가집니다. 성장할 수 없습니다. 나병균이 손과 발, 눈 등에 영향을 주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나병균은 그저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뿐입니다. 눈이 이물질이 들어가면 고통을 느껴 깜빡이거나 이물질을 빼내야 하는데 눈이 곪고 썩어들어가도 감각이 없으니 눈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기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발에 뼈가 드러나도 그 뼈로 걷고, 불에 데면서도 손으로 뜨거운 것을 짚습니다. 처음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 특권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때문에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 고통이 없는 이 병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상에서 체험될 수 있는 가장 큰 지옥의 고통이 됩니다.
폴 박사가 해외에서 나병 환자를 위해 봉사하고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심하게 지쳐있는 데다 몸에 열이 난 상태로 강연까지 소화해야 했습니다. 간신히 기차를 타고 강연장까지 가서 연설하고 집에 돌아와 누웠을 때는 발에 아무 감각이 없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바늘로 발을 찔러보았더니 아무 감각이 없었습니다. 더 깊이 찔러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폴 박사는 절망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의사가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환자를 치료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에 감각이 있어야 치료해 줄 수 있고 눈이 보여야 하는데 나병에 걸렸다면 이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뿐입니다. 다음날 다시 바늘로 찔렀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따끔했습니다. 몸이 안 좋은 상태로 기차를 타고 왔는데 한 다리가 눌려서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일시적으로 마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폴 박사는 고통이란 것이 그렇게 큰 은총인지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조: 『고통이라는 선물』, 폴 브랜드와 필립 얀시, 두란노서원]
다미안 신부님도 나병 환자들만 모아놓은 섬에 들어가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려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주받은 삶을 사는 그들은 신부님의 사랑을 그저 하나의 동정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신부님도 나병이 걸리고 자신들을 형제라고 부르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는 신부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정말 많은 나병 환자들이 주님을 받아들입니다. 만약 다미안 신부님이 본래 나병 환자였다면 그저 환자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감사하게도’ 나병에 걸려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은총과 진리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만 보이게 하신 것이라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이웃을 위해 고통을 받을 준비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데 왜 아파야 해요?”라고 묻는다면 사랑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 나를 봉헌하는 것도 고통이어야 하고 또 이웃에게 내 피를 흘려주는 것도 고통이어야 합니다. 고통이 없으면 누룩도 밀가루 서 말을 부풀게 할 수 없고 겨자씨도 나무로 자라지 못합니다.
따라서 고통의 신비를 아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이웃을 그리스도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 때문에 사랑이 가능함을 믿는 사람이 됩시다. 그래서 그 은총의 고통을 할 수 있는 한 조금 더 받으려고 노력합시다. 딸아이가 나병에 걸린 것을 보고 도망치는 아버지처럼 되지 맙시다. 좁은 문, 십자가의 길. 이는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받아야 하는 고통, 이웃을 위해 받아야 하는 고통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좁은 문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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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3,22-30 :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23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받겠느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을 것인지가 더 중요함을 말씀하신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24절) 그래서 이렇게 동문서담 같이 대답을 하셨다.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 것인지 아는 중요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생명으로 가는 문은 왜 좁다고 하시는가? 그리고 들어가려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바르고 더럽혀지지 않은 믿음과 흠없는 도덕성을 갖추어, 의로운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 중에 누가 이런 사람에 해당될까?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고 하셨다. 그 길을 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4절)라고 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수적으로 적다 많다가 아니라 질적으로 어떤 사람들이냐를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으로 선택받았다.” 혹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세례 받은 자답게 살고, 있는 힘을 다해서 신앙생활에 충실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26절) 세례를 받고 성당에 와서 미사 봉헌을 하고 복음의 가르침을 듣기는 하나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 삶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를 갈며 비통해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모른다고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하셨다. 세례를 받는 그 자체로써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고 부름을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25.27절) 하신 이유는 “불의를 일삼았었다”는 데 있다고 하신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의를 일삼게 되면 그 하느님 백성의 자리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을 올바로 실천한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29절)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그들만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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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들려줍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적은지에 관한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받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애쓰고 노력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우리말 ‘힘쓰다’로 번역되는 이 낱말은,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투쟁하다’라는 뜻으로, 훨씬 강한 어감을 지닙니다. 곧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치열한 싸움을 치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며 적당히 노력하는 태도는 우리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고 닫힌 문을 보게 하리라고 경고합니다.
또한 닫힌 문을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과 함께 먹은 것이 아니었으며,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주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자기 진술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저 예수님 앞에 머문다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구원의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당에 간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머무르고자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과 싸우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투쟁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경고의 말씀이 아닙니다. 구원을 위한 초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눈과 귀가 조금씩 주님께 향하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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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좁은 문>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3-24)
예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으신 것은,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결과를 이미 다 알고 계시겠지만,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충실하게 노력해서 구원받을 자격을 얻는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을 보면,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고, 구원받기를 바라면서도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끝까지 충실하게 노력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문을 ‘좁은 문’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정원 제한’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자격 제한’이 있다는 뜻입니다. 만일에 ‘모든 사람’이 자격을 얻는다면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으니, 실제로는 ‘넓은 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들어가는 사람들 수에 제한이 없으니 경쟁률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 나라는 들어가려고 노력하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인데,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좁은 문’이라는 말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 대단히 어렵고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어렵고 힘든 일이어서 좁은 문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안 들어가려고 해서 좁은 문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원래는 대단히 넓은 문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느님께서 일부러 ‘좁은 문’으로 만들어 놓으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 쪽에서 우상 숭배에 빠지고, 죄를 짓고, 하느님 나라를 외면하면서 그 문을 좁은 문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여기서 “힘써라.”라는 말은, 성실함, 또는 충실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하고 쉬운 일입니다. 몸이 약해도, 지적 능력이 떨어져도, 재능 같은 것이 하나도 없어도, 복음서의 표현대로 정말로 보잘것없는 ‘작은 이’라고 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끝까지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려고 하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억지로 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라고 하시는 분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면서도 끝까지 노력하지 않고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쪽에서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요한복음 6장에 있는 다음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6-69)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그 말씀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은 예수님 곁을 떠났고, 열두 사도와 몇몇 제자들만 예수님 곁에 남았습니다. 떠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했지만 중간에 그만둔 사람들이고, 끝까지 남은 사도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 곁에 남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씀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우선 먼저 믿으려고 노력했고, 믿음을 통해서 결국 그 말씀을 깨닫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렇게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닙니다. ‘떠난 사람들’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어서 떠난 사람들이 아니라 ‘믿기 싫어서’ 떠난 사람들입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3,25)
이 상황은 모든 것이 끝난 뒤에, 즉 심판이 다 끝난 뒤에, 뒤늦게 후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항상 기회를 주시는 분이고, 기다려 주시는 분인데(2베드 3,9), 인간들이 마지막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그것은 인간들 쪽에서 스스로 기회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렇게 거부하는 사람은 나중에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모른다.” 라는 말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 12,8-9) 뒤늦게 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두드리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들이 이미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말한 사람들입니다. (자기들 스스로 주님과 자신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주님께서 자기들을 알아 주셔야 한다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냉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이미 주님을 아주 냉정하게 대했습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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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용산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성당은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행정구역상 성당의 대부분은 용산구에 있었지만 수녀원이 있는 곳의 일부는 마포구에 속해 있었습니다. 지리산이 경산도와 전라도의 경계에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성당이 두 개의 행정구역에 속해 있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애리조나 피닉스에 홍보를 갔었고, 본당 신부님의 배려로 ‘앤텔롭 캐넌(Antelope Canyon)’엘 다녀왔습니다. 그랜드 캐넌이 지상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면 앤텔롭 캐넌은 땅 아래에 아름다운 경치가 있었습니다. 경치를 보려면 땅 아래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빛과 계곡이 조화를 이루면서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앤텔롭 캐넌을 보면서 색다른 경험을 하였습니다. 앤텔롭 캐넌은 유타와 애리조나 주의 경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타와 애리조나는 시차가 1시간 있었습니다. 시간의 경계에 있는 체험이었습니다. 유타 주에 속한 앤텔롭 캐넌에서는 분명 11시였는데 애리조나 주에 속한 입구는 10시였습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우리가 정한 약속이라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어제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희망은 영원한 생명을 향한 이정표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딸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33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날의 일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합니다. 카세트테이프를 바닥에 떨어트린 청년이 카세트테이프를 줍는 과정에서 그만 사고를 내고 말았다고 합니다. 꿈속에서 사랑하는 딸이 환한 빛을 향하여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슬픔은 컸지만 청년의 실수를 용서하였고, 일상의 삶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땅 아래에 있는 계곡이 빛을 만나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듯이, 우리는 신앙을 가지면서 이 세상에서 천상의 삶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무한 경쟁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서 나눔과 희생, 겸손과 인내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삶이 우선인 사람에게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 너무 좁게 느껴질 것입니다. 성공, 돈, 명예, 출세가 우선인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는 먼 훗날 가도 되고, 안가도 할 수 없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잠시의 쾌락과 경쟁에서의 승리 때문에 기도와 미사는 나중에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는 아주 먼 나라의 이야기 일 것입니다. 예전에 맹인가수 이용복씨가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은 어린 시절입니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 눈사람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 내 마음. 아름다운 시절은 꽃잎처럼 흩어져 다시 올 수 없지만 잊을 수는 없어라.”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추억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사람에게는 결코 좁은 문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하늘나라는 사법고시 보듯이 공부를 해서 가는 곳은 아닐 것입니다. 월등한 체력과 실력이 있어야 가는 곳은 아닐 것입니다. 엄청난 재력이 있어야 가는 곳도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뛰어나고, 능력이 있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더 좁게만 보이는 곳이 하늘나라일지 모릅니다. 하늘을 두려워하며 섬기는 사람, 가족을 사랑하고 돌보며, 이웃과 더불어 평화롭게 지내는 사람에게 하늘나라는 결코 좁은 문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구원의 문을 열수 있는 열쇠는 희생과 나눔입니다. 십자가와 사랑입니다. 믿음과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사랑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믿음과 희망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희생과 나눔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길은 편하고 좋은 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길은 비록 좁고 험하지만 누구나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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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예수님께서 바로 좁은 문이시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좁은 문은 어떤 문입니까? 궁극적으로 좁은 문은 바로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문입니다. 그 문은 사랑의 문이며, 겸손과 비움, 나눔과 희생의 문입니다. 그리고 그 문은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매일의 일상은 선택해야 할 수 많은 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남들이 다 가는 질투의 문, 이기심의 문, 욕심의 문이 아니라 용서와 희생, 인내의 문을 택해야 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 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이 떠올랐습니다. 성인께서는 안티오키아의 주교로써 110년경 로마 콜로세움에서 사자들에 의해 물어 뜯겨 순교하셨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중에 교우들이 주교님을 순교로부터 구하려고 노력을 하자 로마의 교우들에게 자신을 구하려고 하지 말고, 사자의 먹이가 되어 순교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을 선택한 것입니다. 성인께서는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나는 모든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여러분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내가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죽으러 간다고 모두에게 알렸습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 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마음으로는 세속을 원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나쁜 마음이 여러분 안에 자리잡지 않도록 하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구원받기 위해, 즉 하느님 나라에서 살기 위해서는 남들이 다 들어가는 쉽고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저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을 통해 좁은 문을 여러분과 함께 들어가고 싶습니다. 먼저 좁은 문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먼저 저는 예수님께서 바로 좁은 문이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분 속에 들어가 그분과 하나 되는 것 그것이 가장 빠르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제가 말씀 드린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도 “일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희생하시어 십자가를 지신 것과 똑같이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가 예수님께로 들어가는 좁은 문은 내 안에, 그리고 우리의 가족과 이웃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좁은 문은 사람들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를 물어뜯는 사자처럼 날마다 우리를 통해 성체성사를 완성하셨던 것처럼 자신도 사자의 밥이 되어 그분과의 일치를 통해 부활에 이르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과의 일치를 사자의 밥이 되는 순교와 같은 거창한 괴롭히는 아내의 잔소리와 남편의 성난 고함소리, 그리고 날마다 사자처럼 자신을 물어뜯고 있는 우리 내면의 성난 마음이 바로 예수님께로 가는 좁은 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내 마음은 한없이 넓어지고 그 사람이 무엇을 하든 예쁘게 보이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 내 마음은 한없이 좁아져 그 사람이 무엇을 하든 밉게만 보입니다. 하지만 좁아진 내 마음 안에서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미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맘에 계신 그분이 깨어나 그분과 일치하여 그분의 마음으로 미운 이들을 보게 될 때, 더 큰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모든 것을 감싸 줄 수 있게 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좁은 내 마음의 문으로 들어가 더 큰 사랑에 이르는 구원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받아들이기 힘든 이들, 아픈 이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가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우리 삶의 좁은 문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마음 안에 일치해 나갈 때,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좁은 문을 따라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라는 그 좁은 문을 예수님의 힘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우리 가까이에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가장 훌륭하고도 좁은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주는 문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쉽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둘째로 우리의 삶에서 좁은 문은 수많은 선택과 연관이 있습니다. 일상의 수 많은 선택 가운데 우리가 예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택할 때가 바로 좁은 문을 선택하는 때이고 우린 바로 그 순간 구원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자신에게 손해가 오고 힘들게 느껴질지라도 자꾸 그 좁은 문으로 가다 보면 아주 편안하게 그 문을 택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좁은 문을 택하게 되면 넓은 문을 가던 사람들도 그 좁은 문의 가치를 새롭게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선교요, 구원의 표징이 되지 않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들은 하느님 나라 안에 있고 여러분은 밖으로 쫓겨난 것을 스스로 보게 될 때에 거기서 울고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라는 오늘 복음 말씀이 우리 자신의 일이 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좁은 문은 자신을 감추고 있어서 마음을 닫고 있는 이기적인 우리가 쉽게 찾을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좁디 좁은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잠시 침묵 가운데 지금 우리는 과연 일상 안에서 주로 좁은 문을 택하고 있는지, 영적인 자만심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구원에 이르는 문인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있는지 그리고 주님의 뜻을 얼마나 실천에 옮기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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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님]
<좁은 문>
"꼴찌로서 자신의 모습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오늘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구원은 문을 통과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주님의 말씀이십니다. 말씀은 계속 이렇게 이어집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지금 주님으로부터 내쫓기는 이들이,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길거리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이런 면에서 이들과 아주 비슷한 환경 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우리는 압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이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입니다.
꼴찌의 위치에서 자신을 처신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를 향한 주님의 끝없는 용서와 사랑에 의지하면서 있는 힘을 다 할 뿐입니다. 그러한 나를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거두어 주십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꼴찌로서 자신의 모습을 잘 맏아들일 수 있는 오늘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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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오성기 요한크리스토머 신부님]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2-30)
프랑스 작가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의 일생 중에 깊은 절망적 상태에 빠질 때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히 내리는 시기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항상 고통 중에 있는 사람 바로 곁에 계시기 때문이다”
과연 인생을 살다보면 여러 가지 역경과 만납니다. 그 역경을 우리는 ‘苦悲(고비)’라고 부릅니다. “이 고비만 넘기면 되겠는데…”하고들 말합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삶의 고비’를 넘기면서 성장합니다. 고비가 닥칠 때마다 용기를 잃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 가노라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을 보는 안목을 갖게 됩니다. 고생을 겪지 않고 삶의 지혜를 배우고, 깨닫고, 용기를 내고,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물어봅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 안되겠지요?”(루카13,23)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들이 적거나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구원에로 나아갈 결단을 촉구하시며 특별히 의미심장한 몇 가지 상징적 개념들로써 그 결단의 절박성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좁은 문’과 그 문이 ‘닫혀지게 될 시간’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짊어져야 할 과제의 어려움과 절박성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선을 행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 앞에서 특권을 누릴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그렇듯 위대한 선물, 하느님의 나라, 행복, 구원, 생명을 앞에 두고 시간을 허비할 수 있으며 머뭇거릴 수 있겠는가!
이글거리는 태양 밑에서 곡식이 알알이 익어가고, 불속에서 쇠가 강하게 연마되고, 인간은 삶의 고비에서 성숙해집니다. 생명과 도움의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굳건히 믿으며, 구원을 향하여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갑시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 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루카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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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고병수 요한 신부님]
비록 세상에서 꼴찌일지라도 신앙에선 첫째가 되어야 하겠다. 3년째 교구청에 근무하고 있다. 새벽 6시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미사를 드리고, 7시 30분에 아침식사를 하고, 9시에 출근하여 점심식사 시간을 빼고 줄곧 책상 앞에 앉아 업무를 본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간다. 유일한 낙은 본당 신부 때와는 달리 주일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괜한 걱정이 생겨나고 있다. 마냥 이렇게 살아도 될까, 세상의 직업인처럼 말이다.
그래도 본당에 있을 때는 영적으로 해이해질 때면 간절히 기도하는 신자나 혹은 한두 시간씩 성체조배를 정성껏 하는 신자들을 보면서 자극을 받곤 했다. 또 인간적인 실수를 할 때면 충고를 해주는 신자가 있어 일상을 되돌아보고 쇄신할 기회를 갖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회가 없다. 그래서일까, 한편으로는 참 잘사는 것 같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적으로 꼴찌가 되어가는 게 아닌가 싶다.
사실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얼마만큼 이루면서 잘 사는가?’ 하는 것보다는 ‘지금 이 순간 주님 앞에 다가와 그분과 얼마만큼 하나 되어 살아가는가?’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적어도 세상에선 첫째이면서 신앙에서 꼴찌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비록 세상에서 꼴찌일지라도 신앙에선 첫째가 되어야 하겠다.
깨끗한 물도 한군데 고여 있으면 썩듯이 현세의 삶에 안주하며 살기보다는 주님의 일상을 돌이켜보면서 매순간 그분과 하나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그럴 때 우리는 신앙의 진정한 첫째로 거듭날 것이 분명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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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던 중에,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동문서답을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 받을 사람이 많은지 적은지’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구원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지’를 대답하십니다. 그것이 더 본질적인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첫 번째 충격>은 구원의 문이 “좁은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이는 어찌 들으면, 참으로 모진 말씀으로 들립니다. 마치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의 보편성에 어긋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문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문이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닌 “좁은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모든 이가 부르심은 받지만, 모두가 응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당신은 “문”이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당신을 따라 들어가는 이에게 열려 있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문은 동서남북 온 세상에 열려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루카 13,29)
<두 번째 충격>은 ‘집주인이 문을 닫아버리면 아무도 열 수 없는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우리가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구원이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닫는 집주인에게 달려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3,25)
또한, 이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지금 문이 열려있으니 당장 들어오라는 다급함을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곧 영원을 사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 ‘문’은 내일 들어가야 하는 문이 아니라, 오늘 당장 들어가야 하는 문입니다. 곧 지금 나와 함께 계신 당신이 바로 ‘그 문’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 번째 충격>은 지금과 그때에는 ‘첫째와 꼴찌’가 바뀌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의 눈과 그분의 눈이 서로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곧 그것은 민족이나 혈통, 출신이나 가문 혹은 세상의 출세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에 따라 정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첫째와 꼴찌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정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이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모두를 충격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 다급함과 절실한 요청에, 지금 이 자리에서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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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루카 13,24)
주님!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문이 좁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소서.
열린 문이신 당신이 저의 희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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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13,24)
<좁은 문!>
오늘 복음은 '구원과 멸망'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은 문'이고, 그 구원의 문은 유다인들에게만 열려있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음'을 선포하십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의 나라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13,29)
'구원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보라, 지금은 꼴지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13,30)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모두에게 열려져 있는 구원의 좁은 문은 '언제나 지금 깨어 있는 자들에게 열려져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은 어떤 문일까?
이 좁은 문은 예수님께서 삶으로 직접 보여주신 다음과 같은 문입니다.
내가 더 낮아지고 져야하는 좁은 문!
내가 더 죽어야 하는 좁은 문!
내가 더 희생해야 하는 좁은 문!
내가 더 사랑해야 하는 좁은 문!
그래서 이곳으로 들어가려는 이들이 많지 않고, 이곳으로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불의를 일삼지 않고,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8,28)
사도 바오로는 모두의 구원이라는 공동선(공동이익)에 대해 말하고 있고, 이것이 믿는 이들이 지금 여기에서 함께 해야 할 일이라는 권고입니다.
모두의 구원이라는 공동선(공동이익)을 위해, 오늘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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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과 함께>
루카 13,22-30 (구원과 멸망)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당신과 함께>
당신 앞에
있는 것만으로는
모자라지요
당신 안으로
한걸음 한걸음
들어가서
당신으로
조금씩 조금씩
되어야지요
당신께서
나에게서 당신을
보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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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코로나로 인해 힘든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고용 불안으로 많은 이가 불안 속에 있습니다. 이 형제님도 점점 어려워지는 회사 상황에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 교육비를 포함해서 아직도 지출할 것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노후 자금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실직은 절대로 이루어지면 안 되었습니다. 형제님께서는 매일 성당에 가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자신이 실직되지 않기를 그리고 회사가 잘 되기를, 그래서 우리 가족에 불행이 닥치지 않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형제님의 바람대로 되었을까요? 아쉽게도 형제님은 실직하셨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기도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기도 바치는 시간이 행복하게 느껴졌고,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실직했어도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하며 희망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곧바로 취업하게 되어 기쁘게 지금을 살고 계십니다.
기도는 자신이 원하는 것 이상의 선물을 얻게 합니다. 그러나 원하는 것만을 보다 보니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서도 기도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통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일이 되며, 내가 원하는 것 이상의 필요한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는 어떤 사람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이란 어떤 문을 말하는 것일까요?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 특히 불의를 일삼는다면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불의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물론 그 불의로 자신의 욕심은 충분히 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자격은 사라지고 맙니다. 주님의 일을 했다면서 주님께 매달릴 수 있습니다.
“저는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건축금도 성실하게 봉헌했습니다.”, “주일미사에도 몇 번 빠지지 않았습니다.” 등등의 말을 하면서 주님께 구원의 문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간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했다는 그 모든 주님의 일이 주님의 영광이 아닌,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실 것입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어떤 순간에서도 멈추지 않는 기도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처럼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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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로, 38만 점이 넘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모든 작품을 보려면 일주일이 걸린다고 하는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이 박물관에 들어가는 사람은 목표로 삼은 작품이 생깁니다.
아마 많은 관람객의 목표 1순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세로 77㎝, 가로 53㎝의 작은 크기지만, 이 그림을 보기 위해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두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사실 이 작품은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911년 6월 21일에 모나리자를 도둑맞았지만, 없어진 것도 모를 정도로 평범한 취급을 받던 작품이었습니다.ㅇ그런데 도난 사실을 발견하고, 이 도난에 피카소와 연관되어 있으리라는 소문이 돌면서 ‘모나리자’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존하는 천재 작가가 탐내는 작품이라고 하니 이 작품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관심’ 때문에 작품의 의미가 새롭게 추가되었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이런 관심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한 번 더 바라보고, 한 번 더 생각한다면 분명 새로운 의미가 내 삶 안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이런 발견을 통해 우리는 더 힘차게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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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 여기서 힘써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에는 유명한 매장 패션밸리가 있습니다. 한국의 백화점이나 마찬가지인데 규모는 훨씬 큽니다. 한국은 땅이 귀한 까닭에 위로 치솟지만, 미국은 땅이 넓은 탓인지 바닥에 넓게 펼쳐놓았습니다.
지진을 대비한 안배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고층빌딩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참으로 매장이 넓습니다. 동행한 분이 명품코너를 가리키며 아름다운 보석들이 있는데 아주 비싸다고 하시며 한번 구경하시겠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석인데 어디서 보석을 찾습니까?” 했더니 “신부님은 왕자 병”이랍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답고 귀한 보석을 들여다보면 욕심이 납니다. 귀한 보석을 보는 사람들은 그 보석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보석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귀한 보석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석을 아름답게 빛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13,23)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를 얘기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13,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된 미래는 오늘을 통해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나의 보석을 잘 가꾸어야지 남이 만들어 놓은 보석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운동선수가 사력을 다해서 승리를 얻으려고 애써 노력하듯이 우리도 구원을 위해 힘을 쏟아야 합니다. 물론 구원은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하지 않고 주어진 기회를
최선을 다해 활용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영원을 살지 않으면 결국은 마지막 날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루카13,28) 지금 노력하지 않고 훗날 우정과 연줄에 매달려 호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같은 고향 사람이나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 형제들이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루카8,21참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요한사도는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라고 선언합니다.
사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힘을 다하십시오.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 24,13)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지금 영적인 갈망으로 힘쓰고 있는 하나하나의 수고와 땀을 헤아리십니다. 문은 좁지만 들어가면 있을 곳이 많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요한 14,2)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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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우정의 여정>
-구원과 멸망-
지난 월요일 교황님을 방문한 독일의 루터교회 젊은 신자 500명의 순례자들 앞에서 하신 교황님의 강론 주제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서두에 강론을 요약한 듯한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중에 하느님의 멜로디를 들으십시오."(Listen to the melody of God in your lives)
일상의 삶중에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말씀을 잘 경청傾聽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구원과 멸망’이며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분투의 노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결코 값싼 구원의 은총은 없음을 깨닫습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하루하루 좁은 문을 통과하라는 것입니다. 멀리 밖에 있는 막연한 좁은 문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각자 통과해야할 고유의 좁은 문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첩첩산중疊疊山中 매일 넘어야 하는 산같은 하루이듯, 매일 온힘을 다해 통과해나가야 할 구원의 좁은 문같은 하루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생각난 예전 강론시 인용했던 ‘하늘과 산’이라는 시詩와 여러 말마디입니다. 모두가 주님과 우정의 관계를 지칭한 내용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핵심 진리는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다음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을 보며 쓴 24년이 지난 지금도 애송하는 ‘하늘과 산’이라는 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하늘의 배경이 주님이라면 산은 우리 각자입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우리 삶의 배경이자 영원한 도반인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 관계인가 자문하게 됩니다. 또 이런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은 둘중 하나이다.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주님 앞에 가면 천국문 통과에 앞서 얼굴 검사후 당신 얼굴을 닮은 이들만 통과시킬 것이다. 바로 한결같은 항구한 사랑의 기도로 당신을 닮은 얼굴을 지닌 이들만 통과시킬 것이다.”
“자연환경이 좋아 천국이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천국이다. 주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나와의 관계가 날로 깊어져야 천국이다. 아름다운 경관의 수도원에 살아도 주님과는 물론 이웃과도 무관無關한 관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함께 사는 부부도 남남처럼 무관한 관계로 살아가듯 말이다. 참 깊은 관계의 좋아하는 이들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듯 주님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갖고 갈 것은 평생 키워온 주님과 우정의 관계 하나뿐이다.”
기도는 테크닉 기술이 아니라, 주님과 대화이자 소통의 관계를 뜻합니다. 참으로 기도하면서 주님과 깊어지는 앎의 관계와 더불어 주님의 뜻을 깨달아가면서 좁은문의 통과도 수월해질 수 있습니다. 밖에서 볼 때 좁은 문이지 주님을 사랑하는 당사자에게는 역설적으로 날로 내적으로 넓어지는 감미로운 사랑의 좁은 문이자 길일 수 있습니다. 베네딕도 규칙 머리말 마지막 부분도 이와 일치합니다.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말아라, 그러면 수도생활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성규;머리말48-49)
예전 초등학교 교편시절, 내심 저를 못마땅해 했던 선배 여교사와의 대화도 생각납니다. 밖에서 볼 때는 힘든 좁은 문 같아도 당사자에게는 쉬운 넓은 문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선생,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 쉽게 살아요.”
“저는 이게 쉽게 사는 것인데요.”
바로 그분을 참 놀랍게도 수도원 입회 후 8년후 1990년 사제 서품 다음해 요셉수도원에서 만났고, 저를 피하는 불편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동안 신자가 되었고 당시 안토니오 원장을 돕는 후원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 후반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구원문으로의 입장이 거부된 자는 바로 우리일 수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잘 살았다 생각했는데 주님과 무관한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던 것입니다. 평생을 주님과 함께 살았다 자부했는데 주님은 나를 모른다 하시니 완전히 헛 산 것입니다. 대화를 들어보십시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 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해 외적으로 주님과 함께 아주 모범적 신자로 잘 살아왔다는 고백입니다. 주님으로 상징되는 집주인의 반응이 청천벽력의 충격입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나는 주님을 잘 안다 자부했는데 주님은 나를 모른다 하니 완전히 착각속에 살았던 것이니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요. 아무리 회개해도 후회해도 이미 늦었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젊고 힘있을 때부터 기도와 사랑의 수행을 통해 주님과 소통의 관계에 힘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주님과 서로의 앎을 깊이했어야 했습니다. 바로 이점에서 완전히 실패한 실패인생을 산 사람을 상징합니다.
반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한 이들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모든 예언자들이니 이들은 분투의 노력으로 주님의 뜻에 따라 주님과 사랑의 앎의 관계를 깊이하면서 각자 주어진 좁은 문들의 여정을 통과해온 사람들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이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을 꼴지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방심이나 장담은 금물입니다. 누가 구원받을지는 눈밝은 주님만이 아십니다. 바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좁은 문을 통과하도록 주님의 뜻에 따라 참으로 겸손히, 한결같이, 끝까지, 온갖 분투의 노력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에 가면 세 사실에 놀란다 합니다.
‘첫째 나같은 부족한 사람이 천국에 왔다는 사실에 놀라고, 둘째 천국에 도저히 올 거라 생각 못한 사람이 천국에 와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셋째 천국에 분명히 올 거라 생각했던 이들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놀란다’는 웃어 넘길수만 없는 예화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좁은 문을 굳이 찾아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나름대로 각자 고유의 십자가를 져야 하듯 각자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 주어진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삶이 참 외롭고 힘들고 고독한 것입니다. 누가 대신 져줄수 없고 내가 져야 하는 제 십자가 이듯, 누가 대신 통과해 줄 수 없고 내가 통과해야할 제 좁은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이 우리의 희망이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들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바로 성령께서 무지한 우리들을 깨우치시어 주님을 알고 또 나를 알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우리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러니 성령의 인도하에 주 예수님과 우정의 사랑과 앎을 날로 깊이하면서 구원의 좁은문을 잘 통과해 갈 때 주님을 닮은 본래의 참 내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우정의 사랑을 날로 깊이해 주시면서 구원의 좁은문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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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긴장시키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예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십니다. 구원이 좁은 문의 심상과 직결되는 듯 들리지요. "좁은 문"은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좁은 곳을 통과하려면 존재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단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외적으로 세상 것 다 움켜쥐고, 또 내적으로도 탐욕이 가득해서는 그렇게 될 수 없으니 선택과 집중이 필요해 보입니다.
물리적으로 소유한 많은 것을 몽땅 다 끌어안고 하느님 나라의 문을 통과해 보려는 이, 탐욕과 이기심에 정신과 영혼이 잔득 비대해져 도무지 비워지지 않는 이, 고통과 희생은 회피하고 설렁설렁 편하게만 가고 싶은 이에게 어쩌면 하느님 나라의 문은 지나치게 좁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모른다."(루카 13,25.27)
게다가 집주인은 정해진 때가 오면 가차없이 문을 닫아버리고,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주인과 스친 인연을 내세우는 이들에게 주저없이 "모른다" 하는 분이십니다. 힘써서 좁은 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이들은 반기지만, 너무 거대하고 둔중한 자아 때문에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냉정하기까지 하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차근히 알려 줍니다.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로마 8,30)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려는 이들을 미리 뽑으시고 정하십니다. 친히 그에게 당신 목소리를 들려 주시어 부르시고, 믿음의 은총을 내려 주시지요. 그가 기꺼이 믿음으로 응답하면 그 믿음을 의롭다 인정해 주시고, 그에게 당신 영광을 나누어 주십니다. 구원의 여정이지요.
누구도 세상에 펼쳐진 모든 길을 욕심껏 다 갈 수는 없습니다. 어느 길을 선택한다면 다른 길은 포기했다는 표현이니까요. 구원이 "좁은 문" 너머에 있다면 그 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선택하여 그 여정에 집중해야 합니다.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의 선별은 그 여정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지요.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로마 8,26)
이 여정 안에서 부르심과 믿음, 의화가 이어집니다. 주님의 선제적 주도권과 우리의 응답이 없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어렵지요. 영적 여정 안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우리를 대신해 간구해 주시는 성령과 함께 이 과정을 거치면서 영혼은 더 단촐해지고 존재는 더 경쾌해집니다. 구원에 알맞게 정화되고 성화되어 설령 문이 없어도 통과하게 되지요. 구원입니다.
"하느님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셨네."(복음 환호송)
하느님께서 구원으로 건너가는 좁은 문을 지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복음을 건네셨습니다. 복음에는 우리가 가야할 길의 내용과 방향이 적혀 있지요. 어떤 격려는 기쁘고 어떤 가르침은 버겁지만, 무지하고 나약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무엇을 선택하고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세세히 알려 주십니다.
각자의 구원 여정에 놓인 "좁은 문"을 들어갈 수 있도록 말씀 안에서 길을 찾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 문이 좁은 이유는 저마다 다를 것이고, 왜 좁은 문인지도 자신이 제일 잘 알 겁니다. 우리를 위한 간구를 그치지 않으시는 성령께 의지하여, 좁은 문을 향해 힘써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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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FRt0z-dY4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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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 24)
큰 문과
좁은 문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
길을 잃어 버린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좁은 문을
제시하신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의(義)를 행하는
좁은 문이다.
길은 언제나
우리 내면에
있다.
거짓을 찢고
욕심을 벗지
않고서는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다.
우리가
작아지면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올바름은
좁은 문을 통해
드러난다.
간절하면
좁은 문도
활짝 열린다.
회개하지
않고서는
좁은 문을
빠져나갈 수
없다.
하느님의 문(門)은
닫히지 않았다.
길을 내시고
길을 여시는
분이시다.
좁은 문 앞에서
우리 자신을
만난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바르게
사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죽이는 것은
너무 커져버린
우리 자신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살리는
좁은 문의
구원이다.
좁을수록
넘쳐나고
넓을수록
아쉬운
우리들 삶이다.
우리를 끝내
살리시는
좁은 문을 통한
깊이 있는
사랑이다.
오늘 우리가
따르고
들어가도록
힘써야 문은
다름아닌
좁은 문(門)
이다.
우리는 점점
작아지고
주님께서는 점점
커지셔야 되는
좁은 문의
역설(逆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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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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