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라는게 시대에 따라서 변화하고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새로운 용어가 탄생한다는 것은 다들 아실 겁니다.
유럽같은 경우야 워낙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하다보니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단어나 어휘들이 많지만 동아시아는 상대적으로 적습니다(물론 한반도건 일본이건 '중국 한자'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기때문에 한자단어의 영향을 받았던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요)
근데 약간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한 때가 있었으니 바로 고려말.
소위 '원간섭기'로 불리는 시대로, 한반도 역사상 정말 특별하게도 왕이 외국인 공주와 혼인하고 왕자시절 외국에 가서 생활하다가 돌아오고 몽골 사람 요동사람이 고려에 와서 정착을 한다던지, 고려사람들이 원나라 수도 혹은 요동에서 정착을 한다던지 하는 - 여기서는 긍정적, 부정적 의미부여를 떠나서 - 인적물적 교류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한어가 아닌 몽골어의 영향도 받았을 것입니다. 조인규처럼 몽골어를 잘하여 재상의 반열에 오른 경우도 있고요(이런 경우도 매우 드문케이스죠, 참고로 조인규의 증손이 전제개혁의 실무자이자 조선개국일등공신이었던 조준)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이 몽골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만한 단어가 있는가? 라고 한다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발도(拔都, 바투)입니다.
이 단어가 '용맹하다는 몽골어 바투(어떤 책에서는 바토르라고 한 것 같은데 좀 복잡하기는 하네요)'를 음차한 것이라고들 많이 이야기들 하지요.
한반도의 사서들이 한자로 적혀 있다보니 몽골 혹은 여진의 고유명사를 음차해서 한자로 표기하였죠. 다만 저 발도라는 단어는 엄밀히 말하면 고유명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고유명사화(?)가 되어서 사용된 특이케이스라 할 수 있겠죠.
그리고 몽골에서도 보면 저 단어를 이름으로 쓰고 있는 것 또한 확인이 가능하고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작명법을 연상하면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요(제가 몽골어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해서ㅜㅜ)
영화 '늑대와 함께 춤을' 처음에는 제목이 왜 '늑대와 함께 춤을' 인지 몰랐죠.
고려말기 홍건적을 격파하는데 공을세운 안우(安祐)라는 무신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아명(兒名)이 발도(拔都)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저 단어가 얼마나 퍼져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지요.
열전이건 드라마에서건 항상 세트로 등장하는 안우, 김득배, 이방실
(야 이 놈들아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데 세트로 묶어!)
저 단어가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바로 고려말 이성계의 일생일대 가장 처절했던 전투였던 '황산전투'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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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소년장수가 있었는데 그 장수가 입고있는 갑옷이 워낙 단단해서 화살이 튕겨나오자 이지란과 콤비플레이로 자신이 투구꼭지부분을 맞추어 투구를 벗기고, 이지란이 연속으로 맞추어 죽인 사실은 매우 유명합니다.
지라이 달려라! 알았슴메 성니메!
그 소년장수를 당시 사람들이 아지발도(阿只拔都, 혹은 아기발도阿其拔都)라 불렀다고 해서, 이후로는 아예 이름이 되어버렸죠.
하지만 그 당시 묘사한 기록을 보면 '이름'은 아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갓 십오륙 세 되는 적장 하나가 용모가 수려하고 비할 데 없이 용맹스러웠는데,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면서 돌진해오니 그가 가는 곳마다 아군은 감당을 못하고 쓰러졌다. 아군은 그를 아지발도[阿只拔都]라 부르며 다투어 피했는데(我軍稱阿只拔都, 爭避之)......."
아지발도 무쌍을 실감나게 보여준 드라마 정도전
즉 저 상황 묘사를 보면 이름을 모르니까 그냥 아지발도라고 부른 것임을 확인 할 수 있죠.
그렇다면 고려사람들 대부분이 '발도'라는 말을 알았다는 뜻일까? 안우의 사례를 보면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기 보다는 당시 아지발도와 몸으로 부딫혀 전투를 치르면서 아지발도라고 소리지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성계의 가별초 즉 동북면의 이성계 친위부대였을 거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죠.
동북면, 서북면 남방 등 고려전역은 물론 요동에서까지 이성계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북면 가별초(家別抄)들
(이성계 : 야 근데 니들 왜 나중에는 나 배신때리고 방원이 편드냐;;)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어있어서 다른 여타의 고려 지역보다 몽골 여진족과의 교류가 훨씬 많았을 지역 사람들이 이성계 친위부대였으니, 아마 그 친위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몽골어인 발도라는 단어를 썼다는게 더 자연스러운 추측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어쨌든 나중에는 아예 이름이 되어서 그냥 아지발도라고 부르는데, 본명을 알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요.
그렇다면 이 발도라는 단어는 한반도에서 정착이 되었는가?
전해져서 가끔 쓰인 것은 맞는데 이게 보편적으로 쓰였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연산군대 전주사는 사람이 태조 이성계를 가리켜 이발도(李拔都)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있습니다만, 고려조 안우처럼 아명으로 쓴다던지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까요. 다만 또 조선왕조실록에 발도가 '방언(方言)으로 상대가 없다는 뜻이다'라는 기록이 있으니 남아있기는 했던 것 같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여진족들이 자주 쓰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는데(이걸보면 당시 여진언어가 몽골언어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제가 언어학에대한 지식이 얕아서 속단 할 수는 없겠죠)
우리나라 사람들중에 용맹하거나 대단한 사람들을 가리켜서도 발도라고 부른 사례도 가끔 등장합니다.
중종년간에 만포진에서 활약한 토병 차유(車宥)·계이상(桂以常)을 용맹하다고 해서 여진족들이 발도라고 불렸다는 기록도 있고요,
더 재미있는 건, 세종조 세조가 진양대군이었던 시절 세종을 따라 사냥하고 있을때 같이왔던 동나송개라는 여진사람이 수양대군을 보고 "우리땅에 계셨더라면, 참으로 발도이셨을 것입니다(則眞拔都也)"라고 했었고, 나중에 서울로 돌아와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진양대군은 발도'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물론 총서기록을 다 믿을수가 있어야지...)
내가 발도(拔都)의 상인가~?
참고로 일본인 학자 타카하시 키미아키(高橋公明)같은 연구자는 저 아지발도의 발도가 몽골어라고 해서 제주 목호(牧胡)가 아니겠냐는 주장을 했지만, 이건 사료의 문맥을 확인하지 않고 그냥 고유명사로 판단해서 짜맞춘 '오류'의 결과라 봅니다.(물론 최영에게 패한 제주목호가 왜구에 일부 포함되었을 가능성은 있겠지요. 삼별초가 오키나와로 갔을 확률만큼?)
그리고 사실 이에 대한 '언어학적' 접근은 이미 수백년 전에 조선시대 학자인 이덕무가 먼저 한 사례도 있습니다(지난번에도 한번 이야기 했지만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
.......그런데 우리 태조(太祖)가 왜(倭)의 추장(酋長) 아기발도(阿只拔都)를 섬멸하였는데, 언뜻 보면 이것이 왜의 이름인 것 같으나 사실은 아니다.
우리나라 방언(方言)에 소아(小兒)를 ‘아기(阿只)’라 한다 운봉(雲蜂)의 싸움에서 목이 잘린 왜구(倭寇)는 나이가 매우 어렸지만 뛰어나게 용감했었다고 한다. 대개 고려(高麗)가 호원(胡元)에 복속(服屬)되었을 때에 모든 명칭(名稱)이 다 몽고(蒙古) 말로 불렸기 때문에 그때의 왜추(倭酋)는 나이 어리지만 장령이 되었으므로 그 성명과 관작을 자세히 알 수 없어서 그냥 ‘아기발도’라고만 일컬은 것이다. 다만 발도의 칭호는 어느 등급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사천택과 장홍범의 무리들이 이 호칭을 얻은 것을 보면, 이는 곧 존귀(尊貴)한 자의 칭호로써 우리나라의 대감(大監)이나 영감(令監)과 같은 것이다......
앙엽기 발도 편
이 발도(拔都)라는 단어는 한국사에 있어서 언어학적측면에서건, 문화 교류측면에서건 가지는 의미가 매우 높다고 봅니다.
첫댓글 재밌는 글 잘 봤습니다. 몽고어의 잔해가 조선 중기까지 한국어에 남아있었나 보네요.
몽골의 영향이 그만큼 컸던 것이겠지요 ㅎ
오...발도에 그런뜻이...처음 알아가는 지식이네요. 고맙습니다.
옙 ㅋㅋㅋ
아..바투
잘 읽었습니다! 아지발도가 이름인줄 알았는데 일종의 별명이었던 거군요
본명을 몰라서 별명을 이름으로 쓴 것이죠 ㅋ
울란바토르의 그 바토르인가 보네요
예 울란바토르 뜻이 붉은 영웅이라는 뜻입니다 ㅎㅎ 울란-붉다 바토르-영웅
몽고어의 영향이 있었군요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남아있는게 있을정도니까요 ㅎ
몽골어가 어감이 모르도르어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비슷한 언어 쓰시는 분이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