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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나누는 생각+정보 스크랩 유란시아서 1편~11편
삼신마고 추천 0 조회 47 11.07.25 22:2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유란시아서 요약



제 1 부  중앙 우주와 초 우주  



하느님의 성품을 기술하는 명료한 글로 1부가 시작된다. 난해했던 삼위일체(Trinity) 개념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며,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느님(God)과 삼위 일체에 대한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유한 존재가 무한 존재를 이해하거나 그 완전한 진리를 알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책은 유한 존재가 이해할 수 있는 시간적 개념, 순차적 개념을 이용하여, 도저히 이해가 어려운 개념, 하느님과 삼위 일체의 개념을 유한 존재인 인간이 부분적으로 이해하도록 설명한다.


하느님은 스스로 계신 이요, 시작한 때가 없고, 전지자이시며, 전능자이시다. 그리고 절대를 분별하여 아시는 분이 아니고 그 자체이시며, 만물을 있게 하신 분이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느님이 계신 낙원, 그 파라다이스는 어디에 있는가?  하느님은 동시에 우주에 어디에나 계시며, 특히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분신(分身)인 조절자로서 깃들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고, 사람을 영원한 삶이 있는 하늘로 이끌려고 언제나 일하신다.


시간 없이 존재하며 우주 안에 위치하고 있으나 공간 속에 위치가 없는 거대한 파라다이스 주위에는 거대한 10억 개의 구체를 지닌 하보나 천체가 있으며, 그 주위를 시간과 공간이 있는 일곱 초 우주가 둘러싸고 있다.


각 초 우주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 (Ancient of Days) 세 분의 영향 안에 있으며, 각 초 우주에는 100,000 지역 우주(Local Universe)로 구성되어 있고 이 지역우주들은 하느님의 아들들의 영향 안에 있다. 우리가 사는 유란시아는 네바돈 지역 우주 안에 있는 작은 행성이다. 이 모든 광우주 바깥에는 아직 생명체가 살지 않는 외계 우주가 있고, 현재 네 겹의 띠 속에 초 우주 등급의 큰 물질 집합체가 70,000개 이상 성장하고 있다.


아들 창조자 (Creator Son)는 각자 자기의 지역 우주를 지으며 성령(holy spirit)과 함께 그 경영에 필요한 천사들과 기타 아들들을 창조한다. 지역 우주는 1백 별자리(constellation)로, 각 별자리는 1백 체계(system)로, 각 체계는 사람이 살거나 앞으로 살아갈 구체(球體, sphere) 1천 개와 그 밖의 행성들로 구성된다.


사람은 물질로 이루어진 실체만 파악할 수 있으므로, 모든 고유 품성(personality)을 가진 존재는 물질로 구성되는 몸이 (material body)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과 같은 하등 고유성을 가진 존재는 물질로 구성된 몸이 있지만, 하느님이나 천사와 같은 높은 고유 품성을 가진 존재(higher personality)는 고유성은 있어도 인간이 인식하는 물질적 구조에 매여 있지 않으며, 인간과 비교해서 더 자유롭고 막강한 권능을 소유한다. 예를 들면, 단독 사자는 고유성이 있고 물질 구조의 몸이 없으며 빛의 450만 배 속도로 공간을 진행한다. 


우주의 창생과 하느님의 절대성과의 관계, 그리고 온 우주의 모습이 시간과 공간이 초월되는 곳에서부터 물질로 이루어진 초우주까지 상세하고도 구체적으로 제 1부에서 설명하고 있다.



제 2 부  지역 우주  



네바돈 지역 우주는 오르본톤 초 우주의 물질 질량의 10 만분의 1이며 여기에는 사람이 사는 별이 1 천만개가 창조되도록 예정되어 있다.


지역 우주에서 활동하는 하느님의 아들들은 멜기세덱, 보론다덱, 라노난덱, 생명 운반자들이 있으며, 멜기세덱은 창세기(14:18-20)에 십일조(tithe)의 기원으로 아브라함과 기록된 바와 같이 비상시의 임무를 맡는 아들이다. 보론다덱은 별자리를 주관하며 라노난덱은 체계 군주, 또는 인간이 나타난 뒤에 행성의 영주(planetary prince)로서 활동한다. 생명 운반자는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행성에 가서 생명을 이식하여 진화과정을 시작하며, 일단 사람이 나타나면 직접활동 영역에서 물러나고 인간의 자연적 진보에 앞일을 맡긴다.


지역 우주에서 활동하는 천사는 대체로 최상 성(聖)천사(seraphim), 우수 성(聖)천사, 감독 성(聖)천사, 행정 조수, 과도기 봉사자, 미래 성(聖)천사의 등급이 있으며 임무를 위한 여러 준비와 훈련 과정을 거쳐서 봉사에 배치된다.


인생에서 최대의 질문은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가, 아니면 어떤 다른 형태로 계속 사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답으로 저마다의 수많은 종교가 창시되었으나 그에 대한 증명은 유한 존재의 소위 과학적 방법으로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물질로 이루어진 피조물의 의식차원에서는 피조물을 벗어난 차원을 증명할 수는 없다.  인간이 결코 알 수 없는 사실들은 오직 인간이 아닌 존재로부터 들을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러한 이야기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알 것이다.


사람은 죽으면 예수가 말씀한 바와 같이, 거할 처소(mansion world)로 나아간다. 첫째 세계에는 조절자가 보관하고 있던 인간(mortal), 즉 사람의 고유성과 기억, 그리고 그를 지키던 성(聖)천사이 간직했던 혼(soul)을 조합하여 사람을 상물질 형태로 부활시킨다.


여기서 물질적 인간으로서 가졌던 생활 결점이 보충된다. 둘째 세계에서는 정신적 결함이 시정된다. 셋째 세계에서부터는 긍정적, 문화적인 교육이 시작된다. 넷째 세계에서는 이기심이 사라진 사회 생활에 참여하는 것을 배우며, 구원자별어를 통달한다. 제5 세계에서는 유버르사어를 배우고 별자리 및 우주에 대한 의식이 확대된다. 제6 세계에서 대개 인간과 그 조절자의 융합이 일어난다. 엘리야처럼 우수한 인간의 경우에는 죽기 전에 이 융합이 일어나며, 이 때 불 수레를 타고 올라가는 듯한 현상이 일어난다. 제7 세계에는 유리 바다(계시록 4:6)가 있고 여기서 사람은 동물적 모습을 벗는다. 그리고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자유가 언제나 있다.


루시퍼 반란(rebellion)은 약 20만년 전에 일어났고 체계 군주인 루시퍼가 잘못된 자유와 완전 자치(自治, home rule)를 부르짖으며 많은 천사와  중도자(中道者)들을 미혹하였고 생명체 행성의 하나인 유란시아도 여기에 휩쓸리게 되었다.



제 3 부 유란시아의 역사  



지구는 약 10억 년 전에 현재의 크기가 되고, 생명이 없던 시생대(始生代, Archeozoic era)가 시작된다. 약 6억 년 전에 생명 운반자들이 열 개 행성 중에서 하나씩 지정되는 생명 실험행성인 유란시아에 파송된다.  이들은 5억 5천만 년 전에 다시 돌아와 유란시아 세 곳에 생명을 심고 이로서 생명이 싹트며 원생대(原生代 )가 시작되고 고생대(古生代)가 뒤이어 해양 생명이 발달된다.

 

중생대(中生代)에는 시초 육지 동물이 개발되고, 마지막 5천만 년 동안, 즉 신생대(新生代)에 포유 동물(mammal)이 발달된다. 초기의 리머(lemur) 부류에서 영장목(靈長目, Primates)까지 이어지는 생명체의 진화내용과 약 1백만 년 전에 안돈과 폰타 한 쌍의 생명체에서 의지(意志, will)가 활동하는 과정, 그리하여 인간이 탄생되었음을 인정을 받고 생명 운반자들이 유란시아의 현역 봉사활동에서 물러나는 과정이 생생하게 기록되어있다.


안돈과 폰타는 열등한 자기의 동물 부족들을 피하여 북쪽으로 떠나며 불을 사용하는 것을 깨우치게 되고 이들이 종족을 이루어 결국 인류의 조상으로 당시의 지상에 전개되어가는 감을 묘사하고 있다, 이들로부터 바도난의 부족이 생겨나고 인류가 원시사회의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시대를 거치게 됨을 이야기하면서, 약 50 만년 전에 인류의 진화를 위한 신기원이 시작되었음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유란시아에서 여섯 유색 인종 (colored races), 즉 홍색인 (red man), 주황색인, 녹색인, 황색인 (yellow man), 청색인, 남색인(藍人, indigo race)의 조상이 나타나는 시기에 라노난덱 아들 칼리가스티아가 유란시아에 행성 영주로서, 체계우주의 본부구체인 예루셈의 자원자(volunteer)들로부터 선출된 자신의 참모진 1백인의 남녀를 중심으로, 지금 메소포타미아 지방― 달라마시아에 본부를 설치함으로서 인류 문명의 태동과 진화가 본격화  되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각 종족은 어떻게 번창하였으며 이 땅에서의 인류분포, 이동 그리고 권역별 문명상태와 가르침과 그 영향등이 어떠한가를 상세히 기록하여 고고학 또는 인류학에서 고찰되고 있는 문명발달과 진화를 사실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고대 원시사회에서의 진화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신기원을 마지한 인류는 어떤 방법으로 개선되어 지는가를 이야기하면서 안돈종족의  1백 명으로부터 생명질을 얻어서 물질화한 참모진들의 역할과 그들이 인류에게 전해주었던 그 모든 것은 어디까지 영향을 끼치게 하였는가를 설명해주고 있다.


이들 참모진에서 일부 탄생된 5만명의 1차 중도자(Midwayer)가 누구인가를 이야기함으로서 이들이 우리 인류와 가지는 관계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인류를 가르친 초기의 목적인 사냥꾼(hunter), 목자(牧者, herder) 그리고 농부(farmer)는 어떻게 진화에 영향을 주는가를 알게 해 준다. 지역 체계에서의 루시퍼 반란시에 칼리가스티아의 동조로 인하여 유란시아가 겪는 혼돈과 불행을 이야기할 때, 반과 아마돈 그리고 그들의 충실한 추종자들이 진리의 믿음을 어떻게 지켰으며 이들의 굳건함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지를 감동이 넘치게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인간과 행성영주 참모진들의 차이점에서 전해지는 생명나무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들으면 이 생명나무가 훗일에 세워진 에덴 동산(Garden of Eden)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아담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기록을 읽으면, 신화로서 내려오던 모든 이야기들이 생생한 사실로서 더 이상 허황된 신비가 아님을 알게 된다.


약 3만 8천년 전에 인류의 또 다른 영적진화를 위하여 아담과 이브가 유란시아에 도착한 과정과 에덴 동산을 둘러본 후 유란시아에서 하느님의 임무를 시작하였다는 부분을 읽어보면 아담과 이브에 관한 수 많은 이야기와 비슷한 전설들이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전해지었는가를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인류의 진화는 자연발생적으로 저절로 이루어졌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유란시아서 제 3부는 우리의 진화가 어떤 영향을 어떻게 받아 왔는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아담과 이브가 하늘 사명에 잘못을 저질러, 물질 아들에서 인간이 되어, 주위 부족의 침공으로 제1 동산을 버리고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 지역으로 이동하여 보라색 인종(violet race)의 기원이 되었을 때까지의 과정에서는 인간의 아름다움과 하느님의 사랑이 언제나 함께 하였음을 그리고 인류의 진화는 모든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아름다운 진리가 함께 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산긱 종족에서 나온 순수 후손인 아담 손의 여정을 소개하고 라타와의 사이에서 생겨난 2차 중도자 1984명의 탄생과 이들 중도자들이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지를 얘기해 주고 있다, 중도자들이 현재 단일 군단으로 유란시아에서 활동하며, 인간은 지구에서 잠시 머물며 살다가 떠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들 중도자들이야말로 영구시민(permanent citizen)이라 할 수 있음을 설명한다.


아담 이후에 보라 인종에서 시작된 종족의 파생과 각 대륙으로 퍼진 이들 종족의 후손의 상세한 기록들을 소개하면서 투르키스탄 지역의 안돈종족, 유럽의 청색인, 아시아의 황색인, 아메리카의 홍색인, 그리고 아프리카의 남색인종으로서 각기 발전되고 민족이동에 따른 종족간의 혼합과 이것이 후대에 끼친 영향등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동양과 서양에서의 각 우수민족들의 이동과 분포를 시대별로 지역별로 설명하면서 그들의 이룩한 시대적 물질문명, 정신문명 그리고 영적이해력을 세밀히 기술함으로서 현재의 세계인종의 분포는 물론, 사라져 버린 일부 인류문명의 내용과 그 흔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추정할 수 있게 한다.


각 인종간의 차이점과 유란시아와 비슷한 조건에 있는 이웃 행성에 관한 국가구조, 정부형태, 교육제도, 세금, 군사제도에 관한 이야기와 설명에서는 행성진화 단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정상적인 진화단계에서 빛과 생명의 구체로 달성되는 행성의 여정이 어떠한 것인가를 설명하고, 고립된 행성에서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특별한 배려가 새로운 진리계시로서 연관되어지는 모습을 설명한다. 모든 달성이 왜 스스로의 노력과 자유의지에 전적으로 달려있는지를 논리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원시인의 무지한 종교가 시작된 근원부터 구약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인류의 종교적 발달과정과 원인들을 설명하고 있는 데, 여기에서, 현재 인류가 진화시켜 온 모든 종교의 뿌리와 마주칠 수 있게 한다. 하느님과 신 개념의 변화와 고대인간의 속성 그리고 현대까지 유전적으로 이어져온 우리 인류가 말아야 할 요소들이 설명되어 있다.  현재까지 이룩한 과학의 발전이 어디쯤 온 것인가를 얘기하면서 앞으로의 물질문명의 발전에서 인류가 조화를 이루어야 할 목표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유란시아서 제 3부에서의 설명을 보면 그동안 발달해 온 보든 유일신 개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삼 알게 해 준다.  기원전 6세기에 싯달타, 공자, 노자, 조로아스터의 중요성과 그 안에 담긴 진리를 요약하면서, 이들을 통하여 빛이 꺼지지 않게 지켰고, 서기 1세기에 바울과 빌로, 서기 6세기에 모하메드가 활약하고, 15세기에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나낙을 통하여 시크교가 출현하기 까지 인류의 영적진화가 중단됨이 없이 이어지었던 것이 순전히 인간의 자유의지만은 아니었음을 알게 해 준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Be you perfect even as the heavenly Father is perfect)는 운명을 주셨고, 우리를 도우려고 생각조절자 (Thought Adjuster), 곧 하느님의 분신으로서 각 개인의 마음 속에 깃들어 (indwell) 우리를 늘 이러한 목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일깨우신다.


현재 유란시아의 각 인간에게 깃드는 생각조절자(adjuster)들은 진리의 영 그리고 성령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우리를 움직이는 마음과 각자의 본성은 또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를 근원부터 차례로 설명해 주고 있다.


우리가 초월의식적으로 겪는 여러 경험들은 진정한 실체들인가 그렇다면 어떤 것인가. 또한 정신과 마음과 물질은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가 삶을 통하여 겪고 달성할 수 있는 경험과 가치들은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가. 인간의 죽음 뒤에는 윤회가 있는가 아니면 환생하여 정체성을 유지하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사람의 일곱 정신차원(psychic level)과 하느님이 예비한 영원한 삶을 선택한 인간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 존재로 최후자에 도달하여 최극 하느님의 품에 안길 수 있고,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궁극, 절대 하느님의 봉사에까지 고유존재의 의미가 영원히 완성된다는 헤아릴 수 없이 광대한 내용을 이 책에서는 집약된 단어로 차례차례 설명하고 있다.  우주의 모든 참된 의미를 알고 완성할 때까지 하느님은 언제까지나 우리를 붓 돋으시며,  이 책에서 설명되고 있는 모든 우주존재들의 의미와 그 완성의 증거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순과 갈등은 사람은 유한하지만 그에게 무한의 불꽃이 깃들어 있고, 자연 속에 있지만 자연을 초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식이나 논리 또는 지혜로서 우리는 진리를 깨우칠 수는 없으며,  길을 모르면서 마음 설레는 모험을 즐길 수가 없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영적 통찰력과 영적 변화를 통하여 하느님을 알고 믿음이 성취하도록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인간이 답할 수 없었던 문제들이 여기 3부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제 4부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  



유란시아 서(書)의 4부 글들은 현재의 기록으로는 알 수 없는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행로 그리고 사도들의 행적을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은 무엇이며, 우리는 진정 창조주이신 그의 복음을 지금 온전히 따르고 있는가를 확연히 깨닫게 한다.


기원전 8년과 다음해 7년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당시의 유란시아를 중심으로 한 우주적, 역사적 사회적 환경과 탄생을 위한 선택에서부터 마리아의 기적에 이르기까지 당시를 설명하면서 그의 탄생에 대하여 인류가 지금 알고 있는 조각 난 이야기들을 역사적 배경과 함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의 탄생이 갖는 의미 중의 하나가 온 우주에 진리를 다시 드러내는 것이었음을 설명하는 4부의 글은 탄생 이전에서부터 어린아이로 출생되어 성장하는 과정을 사실로서 상세한 사건을 하나씩 들어가며 기술하고 있다.


성경 기록은 요한 마가가 제일 먼저 간단한 복음을 남겼고 베드로가 죽은 직후에 기록을 시작하였다. 마태는 예수의 말씀(Sayings of Jesus)에 관한 기록을 남겼고, 그의 제자 이사돌이 이것과 마가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마태 복음을 쓴다. 의사 누가는 바울이 죽고 나서야 누가 복음을 쓴다.  요한은 이 세 복음(gospel)에 빠진 것이 많음을 발견하고 나단에게 자료를 주어 복음을 기록하게 하였음을 설명하고 있다. 4부에서는 성경기록에서 연결 고리와 그 내용이 빠져있는 예수의 그 순수한 가르침과 일생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다섯 살 이전의 모습과 일곱 살이 되어 유대인 관습에 따라 회당학교(synagogue)에서 공부를 시작할 때까지의 모습에서 우리는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열 살에 예수는 회당 상급학교로 진학하고, 열 세살에 회당학교를 졸업한 후,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의 성전을 처음 방문하면서 점점 더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되는 모든 과정과 그가 유월절(Passover) 기간에 가진 성전(temple) 토론에서 모든 현자들을 놀라게 했던 내용들이 소개되면서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그의 근원적인 질문과 그가 제시하는 의견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지를 자세히 기술해 주고 있다.

 

열 네 살 때 아버지 요셉이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어 가장의 역할을 떠맡은 그가 겪었던 모든 상황들을 시간별로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그가 어떻게 사람의 아들 (人子-Son of Man)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회당에서 처음 설교하였는가를 얘기해주고 있다.


청년기에 들어와서 나사렛의 에즈라의 딸 레베카의 사랑을 안타까이 물리쳤던 일화에서는 그의 고결하고 성스러운 모습이 점차 드러남을 알 수 있으며,  성장시기에 있었던 행적과 말씀 그리고 그의 진정한 말씀이 어떤 뜻이었는지를 새로이 풀이해주고 있다. 청년기를 지나기까지 만난 그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며 한편 배우는 과정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가 가버나움의 조선소에서 일하고, 인도인 고노드와 로마 여행도중 각 도시에서 얘기했던 선과 악, 시간과 공간 그리고 행복과 불행에 대한 당시의 가르침을 자세히 밝히고 있으며, 당시 철학으로 자리잡은 금욕주의(Stoic), 견유학파(Cynic), 신비교(mystery cult)등의 여러 지도자(leader)들과 가진 대담에서 그들이 변화되는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전까지 그가 확신하게 되는 이 땅에서의 진리 계시가 모든 우주에 미치는 영향을 소개하는 글에서는, 그가 진정한 우주의 주권자임을 다시한번 사실에 근거하여  설명해준다,  이후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변화되는 그의 모습과 대중활동에 대한 기록에서는 그가 뽑은 12 사도들의 개인별 행적과 특징 그리고 그들의  역할을 역사적 사실들과 함께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사도들은 개인적으로 어떻게 이해하였는 가를 종합해 줌으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단편적인 의미를 집약하여 재 조명할 수 있게 한다. 대중을 가르치기 위한 그 모든 여정에서 보여준 기적들은 왜 나타나게 되었으며 그 기적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또한 새롭게 알게 해준다.


학대를 피해 멀리 여행하여야 했던 시기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까지 모든 곳에서의 가르침이 빠짐없이 기록되어있으며 죽음을 맞게 되기까지 모든 과정을 시간별로 설명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과 그 이후의 사도들의 행적에서는 그가 왜 이 땅에 머무셨으며 그의 복음 말씀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인류가 받아들여야 하는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종합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가를 철저히 다시 돌아보게 하는 이 4부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퍼 부어졌던 진리의 영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진정한 영적 성장을 위한 그리고 진리 달성을 위한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게 하는 제 4부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은 과학문명 시대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때 묻지 않은, 진정한 그의 원래의 가르침을 순수함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알게 해준다. 


제 4부는 인간의 생각이나 해석이 깃들지 않은 순수한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제 2 편     하느님의 본성

 

하느님에 대한 사람의 가장 높이 가능한 개념이 시원적이고 무한한 품성(稟性)으로 인간의 관념과 이상 속에 포옹될 때, 신(神)의 성격을 구성하고 있는 신성한 본성의 어떤 특징들을 배우는 것이 무방하고, 도움이 될 것이다. 하느님의 본성은 네바돈의 미가엘이 그의 여러 가지 가르침들 속에서 그리고 육신으로의 그의 훌륭한 필사 삶에서 보여주었던 아버지에 대한 계시로 가장 잘 납득될 수 있다. 또한 만일 사람이 스스로를 하느님의 자녀로 생각하고, 낙원 창조주를 참된 영적 아버지로 우러러 본다면 신성한 본성은 사람에 의해 더 잘 납득될 수 있다.

 

하느님의 본성은 최극관념들의 계시 속에서 배워질 수 있고, 신성한 성격은 천상의 이상들에 대한 묘사로서 상상될 수 있지만, 신성한 본성의 모든 계시들 중 가장 잘 깨우쳐주고 영적 교화를 주는 것은, 신성의 충만한 인식에 달성하기 이전과 이후, 나사렛 예수의 종교적 삶에 대한 이해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만일 미가엘의 육신화된 삶이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의 근간으로 채택된다면, 우리는 우주 아버지의 품성의 본성과 성격에 대한 인간 개념의 더 앞선 계몽과 통합에 기여할 가능성이 있는 신성한 본성에 관하여 어떤 관념들과 이상들을 인간 언어 상징으로 나타내려고 시도할 수 있겠다.

 

하느님에 대한 인간 개념을 확대시키고 영성화 시키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에 있어서, 우리는 필사마음이 갖는 제한된 능력 때문에 엄청나게 장애를 받는다. 또한 우리는 신성한 가치들을 묘사하고 유한자, 사람의 필사마음에게 영적 의미들을 제시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 있어서 설명하고 비교하는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재료의 빈곤과 그리고 제한된 언어로 인해 우리의 임무 수행에 심각한 장애를 받고 있다. 우주 아버지의 증여된 조절자가 필사마음 속에 내주하고 창조주 아들의 진리 영이 가득 퍼져있는 그 사실이 아니라면, 하느님에 대한 인간 개념을 확대시키기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은 거의 쓸모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가슴 속에서 하느님에 대한 개념의 확대를 도와주는 이 신성한 영(靈)들의 현존에 의존하면서, 나는 하느님의 본성을 사람의 마음속에 더욱 묘사하고자 시도하는 나의 권한 수행을 기쁘게 시작한다.

 

1. 하느님의 무한성

 

"무한자와 접하지만, 우리는 그를 찾을 수 없다. 신성한 발자취는 알 수 없다." "그의 납득은 무한하고 그의 위대함은 헤아릴 수 없다." 아버지 현존의 눈부신 빛은, 그리하여 그의 하급 창조체들에게는 그가 "짙은 어둠 속에 거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생각들과 계획들을 헤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는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수없이 행한다." "하느님은 위대하시며 우리는 그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의 연세가 얼마인지 알 도리가 없다." "하느님이 정말로 땅 위에 거하겠는가? 보라, 하늘(우주)과 하늘들의 하늘(우주들의 우주)은 그를 담을 수 없다." "그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려운가, 지나간 그 행적들은 얼마나 찾아내기 어려운가!"

 

"오직 한 분의 하느님만 계시다. 무한한 아버지, 그는 또한 진실된 창조주이시다." "신성한 창조주는 또한 우주의결정자, 혼들의 근원인 동시에 운명이다. 그는 최극 혼, 시원(始元)의 마음이며 모든 창조의 제한됨이 없는 영이다." "위대한 조정자는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그는 엄위와 영광으로 찬란하다."  "창조주 하느님에게는 두려움과 미움이 전혀 없다. 그는 불멸하고, 영원하고 자아-존재하며 신성하고 풍성하다." "모든 것들의 천상선조(天上先祖)는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심오하고 불가해한 분인가!" "무한자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에서 가장 탁월하시다. 그는 시작이요 끝이며, 모든 선함과 완전한 목적의 아버지이시다." "하느님과 함께 모든 것이 가능하며 영원한 창조주는 원인들 중의 원인이다."

 

아버지의 영원한 우주 품성의 엄청난 현시의 무한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무한과 영원 둘 모두에 대해 분별불가적으로 자아-의식 하며 마찬가지로 그는 완전성과 힘을 충분히 아신다. 그는 우주에서 자신의 신성한 동격자(同格者)들을 제외하고, 자신에 대한 완전하고 엄밀하고 완벽한 평가를 체험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아버지는 그의 주(主)우주의 다양한 구역들에서 때때로 변함에 따라 자신에 대한 각기 다른 요구의 필요를 끊임없이 그리고 반드시 충족시킨다. 위대한 하느님은 자신을 알고 납득하며 그는 완전성의 모든 그의 시원의 속성들을 무한히 자아-의식 한다. 하느님은 조화우주의 우연한 현상이 아니며 뿐만 아니라 그는 우주의 실험가도 아니다. 우주 주권자들은 모험에 들어갈 수 있고 별자리 아버지들은 실험할 수 있고 체계 우두머리들은 연습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주 아버지는 시작에서 끝을 알며, 그의 신성한 계획과 영원한 목적은 그의 광대한 권역의 모든 우주의 각 세계, 체계 그리고 별자리 안에 있는 그의 모든 종속들의 모든 실험들과 모든 모험들을 실제적으로 포옹하고 이해한다.

 

하느님에게 새로운 사물이란 아무 것도 없으며 조화우주의 어떤 결과도 전혀 놀라운 것이 될 수 없으며 그는 영원의 순환 속에 거주하신다. 그는 시작이나 끝나는 날이 없이 계신다. 하느님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시간은 어떤 주어진 순간에든지 현재이다. 그는 위대하며 유일한 스스로 계신이이다.

 

우주 아버지는 그의 모든 속성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그리고 자격조건 없이 무한하다 바로 이 사실이, 저절로 그리고 그 자체로, 유한한 물질적 존재들 그리고 다른 하급 피조 지능존재들과의 모든 직접적인 개인의 교통으로부터 그를 자동적으로 차단시킨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의 갖가지 창조체들과의 접촉과 교통을 위한, 운명지어진 그러한 주선을 필요로 한다. 첫 번째로, 신성에 있어서 완전함에도, 또한 행성종족들의 바로 그 살과 피를 가진 본성으로 때때로 함께 하는, 하느님의 낙원 아들들의 품성으로 너희들 중의 하나가 되고 너희들과 하나가 되어 그리하여, 말하자면,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기도 하고 사람의 아들이라고도 한 미가엘의 증여에서 나타났듯이, 하느님은 사람이 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급 기원의 물질적 존재들에게 접근하고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을 돌보고 또한 그들에게 봉사하는 무한 영의 품성들, 성(聖)천사군(天使群)들의 다양한 계층 그리고 기타 천상 지능존재들이 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유란시아의 인간들에게 그러한 것처럼, 예고 없이 그리고 설명 없이 보내지는, 내주하도록 보내지는 위대한 하느님 자신의 실제 선물인 비품성의 신비 감시자들, 생각조절자들이 존재한다. 끝없이 풍부하게, 그들은 하느님-의식 또는 이를 위한 잠재 능력을 소유하는 그러한 필사자들의 미천한 마음에게 은혜를 베풀고 그리고 내주하기 위하여 영광의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온다.

 

이러한 방법들 그리고 다른 여러 방법들로, 너희에게 알려지지 않고 유한(有限) 이해력을 철저히 초월하는 방법들로, 낙원 아버지는 사랑으로 그리고 기꺼이 내려오시며, 그리고 다른 한편 그의 창조체 자녀들의 유한 마음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그의 무한성을 변형시키고 희석시키며 약화시킨다. 그리하여, 절대성을 점차 감소시키는 일련의 품성 분배들을 통하여, 무한한 아버지는 그의 멀리 퍼진 우주의 많은 영역에 속한 다양한 지능존재들과의 가까운 접촉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그의 무한성, 영원성, 그리고 시원성(始原性)의 사실 그리고 실체로부터 조금도 낮아짐이 없이, 그는 이 모든 것을 행해왔고 지금도 행하며, 또한 행함을 영원토록 계속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신비, 유란시아에 거하는 그러한 창조체들에게 그들의 존재가 충분히 납득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진실이다.

 

최초 아버지가 그의 계획에서 무한하고 그의 목적에서 영원하기 때문에, 이들 신성한 계획과 목적을 전부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은 어떤 유한 존재에게든지 선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필사사람은 아버지의 목적들을 우주가 진보하는 연속 차원들의 완성되어지는 창조체 상승계획 수행과 이에 따라서 그들이 드러나는데 따라서, 오직 이따금, 여기저기에서, 얼핏 볼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은 무한성의 의미에 에워싸여 있을 수는 없지만, 무한하신 아버지는 모든 우주들 안에 있는 자신의 모든 자녀의 모든 유한을 가장 분명하고 충만하게 이해하고 사랑스럽게 포옹하신다.

 

아버지는 수많은 상급 낙원 존재들과 신성과 영원을 공유하지만, 우리는 낙원 삼위일체인 그의 동격 동료들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와 무한성과 필연인 우주 시원성을 충만히 나누는지는 의문을 갖는다. 품성의 무한성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품성의 모든 유한성을 포옹하며 따라서 "그분 안에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며 우리의 존재를 갖는다"라고 선언하는 가르침은 진리 - 글자 그대로 진리 - 이다. 필사사람 속에 내주하는 우주 아버지의 순수한 신(神)의 그 단편은 첫째 위대한 근원이며 중심, 아버지들의 아버지의 무한성의 일부분이다.

 

2. 아버지의 영원한 완전성

 

너희 옛 선지자들도 우주 아버지의 영원한, 시작도-없고, 끝도-없는 순환적인 본성을 이해하였다. 하느님은 자신의 우주들의 우주 안에 글자 그대로 그리고 영원히 현존한다. 그는 모든 그의 절대 주권과 영원한 위대함을 가지고 현재 순간에 거하신다. "아버지는 자신 안에 생명을 갖고 계시며,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시대에 두루 "모든 생명을 주신" 분은 아버지였다. 신성한 고결 안에 무한한 완전성이 있다. "나는 주이며 나는 변하지 않는다." 우주들의 우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그가 빛들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행성 간 일들에 관한 그의 행위에는 "아무런 변동 가능성도 없고 변화의 그림자조차 없음"을 드러낸다. 그는 "시작에서 끝을 선언한다." 그는 말씀하신다. "나의 조언은 이루어질 것이며 "내가 나의 아들 안에서 세운 영원한 목적에 따라서. "나는 내가 기뻐하는 모든 일을 행할 것이다" 그래서 첫째근원이며 중심의 계획과 목적은 그 자신처럼: 영원하고 완전하며 언제까지나 변함이 없다.

 

아버지의 명령에는 완벽의 최종과 충만의 완전성이 있다. "하느님이 무엇을 하시든지, 그것은 영원할 것이며 어떤 것도 거기에 더해질 수 없고 어떤 것도 거기에서 감해질 수 없다. "우주 아버지는 지혜와 완전성에 대한 그의 기원적 목적을 후회하지 않으신다. 그의 조언들은 확고하고 그의 의도는 변경되지 않으며, 동시에 그의 행위들은 신성하고 오류가 없다. "그에게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시간과 같다." 신성의 완전성과 영원의 장엄함은 필사사람의 제한된 마음으로 충분하게 파악할 수 있는 범위를 언제까지나 초월한다.

 

변함없는 하느님의 반응은, 그의 영원한 목적을 실행함에 있어서, 그의 피조 지능존재들의 변화하는 태도와 바뀌는 마음에 따라 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며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외관상 그리고 피상적으로 바뀔 수 있지만 그러나 표면의 아래 그리고 밖을 향한 모든 현시(顯示)의 밑에는, 영원한 하느님의 변함없는 목적, 영구한 계획이 여전히 있다.

 

바깥 우주들에서는, 완전성은 부득이 상대적인 용어가 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중앙 우주 그리고 특별히 낙원에서는, 완전성은 희석되지 않으며 어떤 위상들에서는 절대이기도 하다. 삼위일체 현시는 신성한 완전성을 다양하게 보여주지만, 그것을 엷게 하지는 않는다.

 

하느님의 시원적 완전성은 어떤 가정되는 정의(正義)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의 신성한 본성인 선천적 선(善)의 완전성에 들어 있다. 그는 최종적이고 완벽하고 완전하다. 그의 의로운 성격의 아름다움과 완전성에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 그리고 공간의 세계들에서 살아있는 실재들의 전체 기획이 아버지의 낙원 완전성을 공유하는 경험인 높은 운명을 향해 모든 의지창조체들을 들어올리는 신성한 목적에 집중되어있다. 하느님은 자아-중심이지도 않고 자아-억제이지도 않으며 그는 광대한 우주들의 우주의 모든 자아-의식 창조체들에게 자신을 증여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

 

하느님은 영원히 그리고 무한하게 완전하며, 그는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는 불완전성을 몸소 알 수 없지만, 모든 낙원 창조주 아들들의 진화 우주들에 속한 모든 투쟁하는 창조체들의 불완전함의 모든 경험에 대한 의식을 공유한다. 완전성의 하느님의 품성적이고 해방시키는 손길은 도덕적 식별의 우주 차원에 올라와 있는 모든 저들 필사창조체들의 본성을 둘러싸고 그 가슴을 감싸고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고는 신성한 현존의 접촉을 통하여, 우주 아버지는 전체 우주의 모든 도덕적 존재의 진화 생애 속에서 미성숙과 불완전성에 대한 경험에 실제로 참여한다.

 

인간의 제한조건들, 잠재적 악은 신성한 본성의 일부분이 아니다. 그러나 악으로 인한 필사 경험과 거기에서의 모든 사람의 관계들은 시간의 자녀들 - 낙원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창조주 아들에 의해 창조되어왔거나 진화되어온 도덕적 책임을 가진 창조체들 - 안에서의 하느님의 항상-확대하는 자아-실현의 일부분인 것이 아주 확실하다.

 

3. 공의와 정의(正義)

 

하느님은 정의(正義)로우시며 따라서 그는 공정하다. "주(主)는 그의 모든 방법에 있어서 정의(正義)롭다." "'내가 행한 모든 것 중에 원인 없이 한 것이 없다'라고 주(主)는 말씀한다." " 주(主)의 심판은 참되고 전적(全的)으로 정의(正義)롭다." 우주 아버지의 공의는 그의 창조체들의 활동과 행위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없는데, "이는 우리 하느님이신 주(主)에게는 어떤 사악함도 없고, 사람들을 차별하지도 않고, 어떤 선물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하느님께, 그의 변치 않는 신(神)의 뜻을 바꾸라고, 그래서 그의 현명한 자연 법칙들과 의로운 영적 명령의 작용으로 인한 마땅한 결과들을 우리가 피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철없이 간청하는 것은 얼마나 헛된 일인가! "속지 말라 하느님은 조롱당하지 않으시는데, 이는 사람이 뿌린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잘못된 행위의 결과를 거두는 공의에 있어서도, 이 신성한 공의는 항상 자비로 완화된다. 무한한 지혜는 어떤 주어진 환경에서든지 내려질 공의와 자비의 비율을 결정하는 영원한 중재자(仲裁者)이다. 잘못된 행위와 하느님 정부(政府)에 대항하는 고의적 반역에 대한 가장 큰 형벌(실제로는 불가피한 결과)은 그 정부의 한 개별적 주체로서의 존재를 잃는 것이다. 진심에서 나온 죄의 최종적 결과는 절멸이다. 결국에는, 그러한 죄와-동일시되는 그러한 개인들은 사악(邪惡)을 포옹함으로 전적으로 비실체(非實體)가 되어 스스로를 파괴해 왔다. 그렇지만 그러한 창조체의 실제 사라짐은 그 우주에서 행해지는 운명지어진 공의의 절차가 충분히 따라졌을 때까지 항상 연기된다.

 

실재의 중지는 대개 영역 또는 영역들의 섭리시대나 신시대적 판결이 있을 때 공포된다. 유란시아와 같은 세계에서는 그것은 행성의 섭리시대의 끝에 온다. 실재의 중지는 행성협의회로부터 창조주 아들의 법정을 거쳐 옛적으로 늘계신이들의 심판법정에 이르는 모든 사법권을 갖는 법정들의 합동적 활동에 의하여, 그러한 시기에 공표될 수 있다. 괴멸의 명령은 잘못한 자가 거주하는 구체에서 비롯된 고발에 대한 파기될 수 없는 확인 이후에 초우주의 상급법원에서 비롯한다. 그 다음에는, 소멸 판결이 높은 곳에서 확인되고 나면, 집행은 초우주의 본부에 거주하는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일하는 판사들의 직접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판결이 최종적으로 확인되면, 죄와-동일시된 존재는 즉시 그가 존재해 오지 않았던 것처럼 된다. 그러한 운명으로부터는 부활이 전혀 없으며 그것은 영구적이고 영원하다. 정체인 살아 있는 에너지 요소들은, 시간의 변환들과 공간의 변형들에 의해, 그것들이 언젠가 출현하였던 조화우주의 잠재들 속으로 분해 된다. 사악하게 된 자의 품성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보증할 수도 있는 선택과 최종 결정에 창조체가 실패함으로써, 지속적인 생명 매체를 빼앗긴 것이다. 연합된 마음에 의한 계속되는 죄 포옹은 사악함과의 완벽한 자아-정체화달성 안에서 극도에 이르고, 그 다음에는 생명이 중지됨에 따라, 조화우주로 분해 됨에 따라, 그렇게 격리된 품성은 창조의 대혼(大魂) 속으로 흡수되어, 최극존재의 진화하는 경험의 일부분이 된다. 그것은 결코 다시 품성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그것의 정체는 그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된다. 조절자-내주 품성의 경우에는, 지속되는 조절자의 실체 속에서 경험적 영적 가치들이 살아남는다.

 

실체의 현재차원들 사이의 어떤 우주 경쟁에서든지, 보다 높은 차원의 품성이 보다 낮은 차원의 품성을 궁극적으로 이기게 된다. 우주 논쟁의 이 필연적 결말은 본질특성으로서의 신성이 어떤 의지창조체이든지 실체성 또는 실제성의 정도와 동등하다는 사실에서 선천적이다. 순전한 악, 완벽한 실수, 고의적 죄, 그리고 수그러지지 않은 사악은 선천적으로 그리고 자동으로 자멸이다. 조화우주의 비실체인 그러한 태도들은 정의(正義)로운 판결의 우주 법정들이 공의-결정의 명령을 보류하는 과도기 자비-관용과 그리고 공정성을-찾아내는 기능구조들 때문에 오직 우주 안에서 생존할 수 있다.

 

지역우주들에서의 창조주 아들의 통치는 창조하고 영성화이다. 이 아들들은 진보하는 필사자 상승이라는 낙원 계획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일에, 반역자들과 잘못 생각한 자들을 복귀시키는 일에 자신들을 헌신하지만, 그러한 모든 사랑하는 수고들이 마침내 그리고 영원히 거부되면 최종 괴멸 명령이 옛적으로 늘계신이들의 관할권 밑에서 움직이는 기세들에 의해 집행된다.

 

4. 신성한 자비

 

자비는 단순히, 지식의 완전성과 유한 창조체들의 타고난 연약성과 환경의 장애를 충분히 인식하는 데서 나오는 그 지혜에 의해 완화된 공의 일 뿐이다. "우리 하느님은 동정심이 가득하시고, 인자하시고, 오래-참으시며, 자비가 풍부하시다." 그러므로 "주(主)를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이니," "이는 그가 충분하리만큼 용서하기 때문이다." "주(主)의 자비는 영구함에서 영구함으로 이어지며"; 정말로,   "그의 자비는 언제까지나 지속된다." "나는 이 세상에서 자애로움, 심판 그리고 정의(正義)를 베푸는 주(主)이며, 이는 이 모든 것들에 있어 내가 기뻐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의 자녀를 고의적으로 괴롭히지도 않고 슬프게 하지도 않는데, "이는 내가 "자비의 아버지이고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선천적으로 친절하고, 본성적으로 인정이 많으며, 영구히 자비로우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그의 자애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영향도 결코 필요하지 않다. 창조체의 필요만 으로도 아버지의 온화한 자비와 그의 구원하는 은혜의 충만한 흐름을 보장하기에 온통 충분하다. 하느님은 그의 자녀들에 대해 모두 알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그에게는 쉬운 일이다. 사람이 자기 이웃을 더 잘 납득할수록, 그를 용서하는 것, 나아가 그를 사랑하는 것이 더욱 쉬워진다.

 

오직 무한한 지혜의 식별력만이 정의(正義)로운 하느님으로 하여금 그리고 동시에 어떤 주어진 우주 상황 안에서도 공의와 자비를 베풀 수 있게 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의 우주 자녀들에 대한 상충되는 입장(立場)으로 괴로움을 결코 받지 않으며 하느님은 결코 상반되는 입장의 희생이 되지 않는다. 하느님의 전지(全知)함은 그의 영원한 본성의 그의 모든 신성한 속성과 무한 본질 특성의 요구들을 완전하게, 동시에, 그리고 균등하게 만족시키는 그 우주 행위의 선택에 그의 자유의지를 틀림없이 이끈다.

 

자비는 선(善)과 사랑의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산물이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선(善)한 본성은 그의 우주 자녀들의 모든 집단의 각 구성원에게 자비의 현명한 사명활동을 억제할 수 없다. 영원한 공의와 신성한 자비는 인간 경험 속에서 소위 공정함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함께 구성한다.

 

신성한 자비는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우주 차원들 사이를 조절하는 하나의 공정(公正) 기법을 나타낸다. 자비는 진화하는 유한자의 상황들에 맞추어진 최극위의 공의, 시간의 자녀들의 가장 높은 이익과 우주 복지를 만족 시키려고 수정된 영원의 정의(正義)이다. 자비는 공의에 대한 위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진화하는 우주들의 물질창조체에게 그리고 종속적인 영적 존재들에게 그것이 공정하게 적용되듯이, 최극 공의의 요구를 납득하는 해석이다. 자비는, 그것이 신성한 지혜에 의해 형성되어지고, 그리고 우주 아버지와 그의 모든 연합 창조주들의 전지(全知)의 마음과 주권 자유의지에 의해 결정되면서, 시간과 공간의 창조계에 있는 갖가지 지능존재들에게 현명하게 그리고 사랑스럽게 내려지는 낙원 삼위일체의 공의이다.

 

5.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우주의 일들에 대한 유일한 그의 품성적 태도는 항상 신성한 애정 반응이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증여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는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태양을 뜨게 하시며 의로운 자들이나 불의한 자들에게 비를 내리게 하신다."

 

자기 아들들의 희생이나 또는 그의 피조 종속들의 탄원 때문에 설득되어서,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 이라고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인데, "왜냐하면 아버지 자신이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버지로서의 애정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주하도록 놀라운 조절자들을 보낸다. 하느님의 사랑은 보편적이며 "누구든지 올 수 있다." 그는 "진리의 지식을 얻어 모든 사람들이 구원되게 하신다." 그는 "누구도 멸망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창조주들은 사람들이 신성한 법칙들을 어리석게 위반함으로써 생기는 비참한 결과로부터 구하려는 시도를 가장 먼저 하시는 이들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아버지로서의 애정이며 따라서 그는 때로   "우리가 그의 거룩함을 함께 하는 자가 되고,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 우리를 역경에 있게 한다." 너희가 불같은 시련에 있는 동안에도 "우리의 모든 고통 속에서 그가 우리와 함께 고통 받고 있음"을 기억하라.

 

하느님은 죄인들에게 신성하게 다정하시다. 반역자들이 정의로움으로 돌아올 때, 그들은 자비롭게 받아들여지며, "이는 우리 하느님은 풍성하게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너희 죄악들을 지워버리는 자이며, 나는 너희 죄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가 어떤 사랑의 태도를 우리에게 증여해서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는지 보라."

 

결국, 하느님의 선함에 대한 가장 큰 증거와 그를 사랑해야 되는 최극 이유는 아버지의 내주하는 선물 - 너희 두 존재가 영원히 하나가 될 그때를 그토록 인내하며 기다리는 조절자- 이다. 비록 너희가 하느님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만일 너희가 내주하는 영의 인도를 따르면,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애 한 생애, 우주에 우주를 거쳐서 그리고 한 시대 한 시대, 너희가 우주 아버지의 낙원 품성의 현존 앞에 마침내 서게 될 때까지, 틀림없이 인도될 것이다.

 

인간 본성의 한계와 너희 물질적 창조체의 장애들이 너희가 그를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너희가 하느님을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너희와 하느님 사이에는 건너야 되는 엄청난 거리(물리적 공간)가 있다. 마찬가지로 거기에는 다리를 놓아야만 하는 영적 차이의 거대한 심연(深淵)이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낙원 품성의 현존으로부터 너희를 물리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격리시키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너희 안에 살고 계시다는 엄숙한 사실을 멈추어 숙고해 보라 그는 자신의 방법으로 이미 그 심연(深淵)에 다리를 놓았다. 그는 너희가 너희의 영원한 우주 생애를 추구할 때 너희 안에 살면서 너희와 함께 수고하기 위하여 그 자신, 그의 영을 보내 왔다.

 

나는 그토록 위대하고 동시에 그의 하급 창조체들을 들어올리는 사명활동에 그토록 애정을 담아 헌신하는 그분을 경배하는 일이 쉽고도 기쁜 일임을 발견한다. 나는 창조에서 그리고 그것들의 조정에서 그토록 능력이 있는데도, 선함에 그토록 완전한 그리고 또한 우리에게 끊임없이 드리우는 자애로움에 그토록 신실하신 분을 당연히 사랑한다. 나는 그가 그토록 위대하고 능력이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가 그렇게 선하고 자비롭다면, 똑같이 하느님을 사랑하리라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의 놀라운 속성들을 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본성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

 

공간 우주들의 진화에 선천적으로 있는 시간의 갖가지 어려움들과 그토록 용맹스럽게 투쟁하는 창조주 아들들 그리고 그들의 종속 행정자들을 내가 바라볼 때, 나는 내가 우주들의 비교적 작은 이들 통치자에게 크고 심오한 애정을 갖고 있음을 깨닫는다. 결국 나는, 영역들의 필사자들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우주 아버지와 신성하거나 인간인 다른 모든 존재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우리가 이 품성들이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식별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경험은 사랑을 받는 경험에 대한 매우 직접적인 응답이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그의 최극위, 궁극위 그리고 절대라는 모든 속성들이 그로부터 없어지게 된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그를 최극으로 사랑할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현재와 그리고 영원한 시대의 끝없는 순환에 두루 우리를 따라온다. 너희가 하느님의 사랑하는 본성을 숙고할 때,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타당하고도 자연스러운 품성 반응이 있다: 너희는 너희 조물주를 점점 더 사랑하게 되겠고 자녀들이 이 세상의 부모에게 바치는 것과 비슷한 애정을 너희가 하느님께 그렇게 드리게 되는데 이는 아버지, 실제 아버지, 진정한 아버지가 자기 자녀를 사랑하듯이, 그렇게 우주 아버지는 그의 피조 아들들과 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복지를 영원히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현명하고 통찰력 있는 부모의 애정이다. 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지혜와 우주 아버지의 완전 본성의 다른 모든 무한 특징들과 합일된 연합 속에서 기능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지만, 사랑이 하느님은 아니다. 필사 존재들에 대한 신성한 사랑의 가장 큰 현시(顯示)는 생각조절자들의 증여 안에서 보이지만, 그러나 너희의 아버지 사랑에 대한 가장 큰 계시는 이 땅에서 이상적인 영적 삶을 살았던 그의 미가엘 아들의 증여 삶 속에서 보여 진다. 각각의 인간 혼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개별화하는 이는 바로 내주하는 조절자이다.

 

사랑이라는 인간의 언어 상징을 사용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그의 우주 자녀들에 대한 신성한 애정을 묘사하라고 강요된 것이 가끔 나는 상당히 고통스럽다. 이 단어는, 그것이 비록 존경과 헌신이라는 필사 관계들에 대한 사람의 최고 개념이라 하더라도, 너무 많은 인간관계를 너무 자주 나타내기 때문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우주 창조체들을 향한 그의 비길 데 없는 애정을 나타내는데, 또한 사용되는 어떤 언어로 알려지기에는 온통 저급하고 전혀 맞지 않는다! 낙원 아버지의 신성한 애정의 참된 본성과 절묘하게 아름다운 의미를 사람 마음에게 전달할 수 있는 몇 가지 숭고한 그리고 전용(專用)적인 단어를 내가 사용할 수 없음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사람이 한 품성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단지 선(善)한 나라가 될 뿐이다. 신성한 본성인 무한한 합일성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그의 창조체들과 하느님의 모든 품성적 관계에서 지배적인 특징이다.

 

6. 하느님의 선함

 

물리적 우주에서 우리는 신성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지적 세계에서 우리는 영원한 진리를 식별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선함은 오직 품성적 종교 경험의 영적세계에서만 발견된다. 그것의 참된 본질에 있어서, 종교는 하느님의 선함에 대한 신앙-신뢰이다. 철학적으로 볼 때, 하느님은 위대하고 절대적이며 심지어는 지능적이고 품성적 일 수 있지만, 종교적으로 볼 때 하느님은 또한 도덕적임에 틀림없고 그는 선하다. 사람은 위대한 하느님은 두려워하겠지만, 그는 선하신 하느님만은 신뢰하고 사랑한다. 하느님의 이 선함은 하느님의 품성의 일부분이며, 그것에 대한 그 충만한 계시는 오직 하느님의 믿는 아들들의 품성적 종교 체험에서만 나타난다.

 

종교는 영 본성의 초(超)세계가 인간 세계의 근본적 필요를 인식하고 거기에 응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화종교는 윤리적으로 될 수 있지만, 오직 계시 종교만이 참되게 그리고 영적으로 도덕적이 된다. 하느님이 임금으로서의 도덕으로 지배하는 신이라는 옛 개념은 예수에 의해 부모-자녀 관계의 친밀한 가족으로서의 도덕인, 자애로운 손길이 미치는 차원으로 향상되었는데, 필사자의 경험에서 이것보다 더 온화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

 

"하느님의 선함의 풍부함이 실수를 범한 사람을 뉘우침으로 인도한다." "모든 선한 재능과 모든 완전한 재능은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온다." "하느님은 선하시며 그는 사람들의 혼이 쉴 영원한 피난처이다." "주 하느님은 자비롭고 인자하시다. 그는 오래 참으시고 선(善)과 진리가 풍부하시다" "주(主)의 선함을 맛보고 알라! 그를 신뢰하는 자는 복이 있다." "주는 인자하시고 동정심이 가득하시다. 그는 구원의 하느님이 시다.""그는 절망에 빠진 자를 고치시고 혼의 상처를 싸매신다. 그는 사람의 전능한 은인이시다"

 

왕-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개념은, 그것이 비록 높은 도덕기준을 육성하고 그리고 법을 존중하는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만들었지만, 개별 신자(信者)를 시간과 영원 안에서의 그의 지위에 있어서 불안이라는 슬픈 처지에 내버려 두었다. 후기의 히브리 선지자들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임을 선언하였으며 예수는 하느님을 각 인간 존재의 아버지로 드러냈다. 예수의 일생은 하느님에 대한 필사자 개념 전체를 초월하여 조명하고 있다. 자신을 생각지 않는 것은 부모의 사랑 속에 선천적으로 있다. 하느님은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사랑하신다. 그는 모든 우주 품성의 낙원 아버지시다.

 

정의(正義)는 하느님이 우주의 도덕 법칙의 근원임을 의미한다. 진리는 하느님을 계시자로, 가르치는 자로 보여준다. 그러나 사랑은 애정을 주고 갈망하며, 부모와 자녀 사이에 있는 것과 같이, 납득하는 동료관계를 추구한다. 정의(正義)는 신성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사랑은 아버지의 태도이다. 하느님의 정의(正義)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신을 생각지 않는 사랑과 모순 된다는 잘못된 추측은, 신(神)의 본성에 합일성이 없을 것이라고 가정했고 그리고는 하느님의 합일성과 자유-의지성 둘 모두에 대한 철학적 공격인, 보상(補償) 교리라는 고심작으로 직접 가도록 이끌었다.

 

그의 영이 땅에 있는 그의 자녀들 속에 거주하는, 하늘에 계신 자애로운 아버지는, 분리된 품성 - 공의의 품성 그리고 자비의 품성  - 이 아니며 뿐만 아니라 그것은 아버지의 은혜 또는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중재자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신성한 정의(正義)는 엄격한 인과응보의 공의로 지배되지 않으며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은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을 초월한다.

 

하느님은 결코 분노하거나 복수하시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지혜가 종종 그의 사랑을 억제하며 한편, 공의가 그의 거부된 자비의 조건을 정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의 정의(正義)의 사랑은 죄에 대한 미움과 같은 것으로 보여 질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일관성 없는 품성이 아니며 신성한 합일성은 완전하다. 낙원 삼위일체 안에는, 하느님과 동격자들의 영원한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합일성이 있다.

 

하느님은 죄인은 사랑하지만 죄는 미워하신다는: 그러한 말은 철학적으로는 참말이지만, 하느님은 초월적 품성이며, 품성체만이 다른 품성체를 사랑하고 미워할 수 있다. 죄는 품성이 아니다. 하느님은 죄인이 품성 실체(잠재적으로 영원한)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반면, 죄에 대해서는 하느님이 어떤 품성 태도도 취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죄는 영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것은 품성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오직 하느님의 공의는 단지 그것의 실재에 대해 인식할 뿐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죄인을 구원하며 하느님의 법이 죄를 괴멸시킨다. 필사마음이 내주하는 영 조절자와 스스로를 충만히 동일시 할 수도 있는 것과 똑같이, 만일 죄인이 자기 자신을 죄와 최종적으로 온통 동일시하면 신성한 본성인 이 태도는 분명히 바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죄-동일시된 필사자는 본성에서 온통 비(非) 영적인 상태가 되며 (따라서 품성으로 비실제적) 결국에는, 존재의 소멸을 경험하게 된다. 비실체는, 심지어는 창조체 본성의 미완성조차도, 점진적으로 현실이 되고 점점 더 영적으로 되는 우주 안에서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다.

 

품성의 세계와 대면할 때, 하느님은 사랑하는 품성체임이 발견되며 영적 세계와 대면할 때에는, 그는 품성적 사랑이며 종교적 경험에 있어서는 그는 둘 모두에 해당한다. 사랑은 하느님의 자발적 의지를 그렇게 확인해 준다. 하느님의 선함은 신성한 자유의지성 - 사랑하고, 자비를 보이고, 인내를 나타내고, 용서를 베푸는 보편적 성향 - 의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다.

 

7. 신성한 진리와 아름다움

 

모든 유한 지식과 창조체 납득은 상대적이다. 정보와 지능은, 비록 높은 근원들에서 단편적으로 수집되었더라도, 오직 상대적으로 완벽하고 부분적으로 정확하며 품성적으로 참될 뿐이다.

 

물리적 사실들은 상당히 일정하지만, 진리는 우주의 철학에 있어서 살아있고 유연한 어떤 요소이다. 진화하는 품성들은 그들의 교통에서 부분적으로 현명하고 상대적으로 참될 뿐이다. 그들은 오직 그들의 품성적 경험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만 확신할 수 있다. 한 장소에서 겉으로 보기에 온통 참된 것으로 보이는 그것이 다른 창조 구역에서는 오직 상대적으로 참된 것일 수 있다.

 

신성한 진리, 최종 진리는 한결같고 보편적이지만, 영적인 것들에 관한 이야기는, 다양한 구체에서 흩어져 나온 수많은 개별존재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때로는 지식의 완벽성에 있어서의 이 상대성 때문에 세부사항에 있어서 다를 수 있고, 그리고 그것은 경험의 길이와 정도에서뿐만 아니라 품성적 경험의 충만함에서 다를 수 있다. 첫째 위대한 근원이며 중심의 법칙과 뜻, 생각과 태도가 영원히, 무한히 그리고 보편적으로 참된 반면 동시에, 각 우주, 체계, 세계와 창조된 지능존재에 대하여 이것들을 적용하고, 그리고 그들을 조절하는 것은, 무한 영과 다른 모든 연합된 천상의 품성들의 지역적 계획과 과정에 조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창조주 아들들이 그들 각자의 우주에서 기능하는 대로 그들의 계획과 기법에 일치한다.

 

유물론의 잘못된 과학은 필사사람을 우주 속에 버림을 받은 것으로 판결할 것이다. 그러한 부분적인 지식은 잠재적으로 악이며 그것은 선과 악 둘로 이루어진 지식이다. 진리는 충만하면서도 균형이 잡혀있기 때문에 아름답다. 사람이 진리를 찾을 때, 그는 신성한 실제를 추구한다.

 

철학자들은 추상적 관념의 오류, 실체의 한 측면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리고는 그러한 고립된 양상이 진리 전체가 되는 것으로 장담하는 습관으로 그들이 잘못 인도될 때 그들의 가장 중대한 실수를 범한다. 현명한 철학자는 항상 모든 우주 현상 뒤에 있는 그리고 그것보다 선재(先在)하는 창조적 설계를 찾으려 할 것이다. 창조자의 생각은 항상 창조적 행동보다 앞선다.

 

지적 자아-의식은, 진리의 아름다움, 그것의 영적 본질, 특성을, 그 개념에 대한 철학적 일관성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항상-현존하는 진리의 영의 어김없는 반응으로 말미암아 더욱 확실하고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행복은 진리를 인식함으로부터 생기는데, 이는 그것이 활동으로 옮겨질 수 있고 그것은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망과 슬픔은 실수라는 결과에서 일어나는데 왜냐하면, 실체가 아니어서, 경험 속에서 실제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성한 진리는 그 영적인 향기에 의해 가장 잘 알려진다.

 

영원한 탐구는 통합을 위한, 신성한 결합을 위한 것이다. 멀리-퍼지는 물리적 우주는 낙원 섬에서 결합하며 지적 우주는 마음의 하느님, 공동행위자 안에서 결합하며 영적 우주는 영원 아들의 품성 안에서 결합한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에 속한 고립된 필사자는 내주하는 생각조절자 와 우주 아버지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결합한다. 사람의 조절자는 하느님의 단편이고 신성한 통합을 영구히 추구하며 그것은 첫째근원이며 중심의 낙원 신(神)과 함께 그리고 그 안에서 결합한다.

 

최극의 아름다움을 식별함은 실체의 발견 그리고 통합이다. 영원한 진리 안에 있는 신성한 선(善)을 식별함, 그것은 궁극의 아름다움이다. 인간 예술의 매력조차도 그 합일성의 조화 속에 있다.

 

히브리 종교의 큰 오류는 과학의 실제적 진리들과 예술의 매력적인 아름다움을 하느님의 선함과 연합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문명이 진보됨에 따라, 그리고 종교가 진리를 상대적으로 배제하고 아름다움을 무시하도록 하느님의 선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어리석은 길을 일관되게 추구한 이래로,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격리된 선(善)에 대한 추상적이고 분열된 관념으로부터 돌아서려는 경향이 점점 더 생겨났다. 많은 20-세기의 사람들의 헌신과 충성을 붙잡는데 실패한, 현대 종교의 지나치게 강압적이고 고립적인 도덕성은, 만일 그 도덕적 명령에 추가하여 과학과 철학과 영적 체험의 진리들을, 물질 창조의 아름다움, 지적 예술의 매력, 그리고 진정한 성격 성취라는 웅장함과 똑같이 배려한다면, 그 스스로 회복될 것이다.

 

이 시대의 종교적 도전은, 조화우주의 진리와 우주 아름다움 그리고 신성한 선(善)의 확대되고 절묘하게 통합된 현대 개념들로부터 살아 나오는, 새롭고도 매력적인 생활철학을 과감히 구축하게 될, 그러한 영적 통찰력을 가진 선견지명이 있고 진취적인 남녀들을 향한 것이다. 그러한 도덕의 새롭고도 정의(正義)로운 시각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선한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그리고 인간의 혼속에 있는 가장 좋은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다. 진리(眞)와 아름다움(美)과 선(善)함은 신성한 실체들이며, 사람이 영적 삶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영원자의 이 최극 본질특성들은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서 점점 더 합동되고 통합될 것이다.

 

모든 진리  - 물질적, 철학적, 또는 영적 - 는 아름다운 동시에 선하다. 모든 실제적 아름다움 - 물질적 예술 또는 영적 균형성 - 은 참된 동시에 선하다. 모든 진정한 선(善) - 품성적 도덕성, 사회적 공평성, 또는 신성한 사명활동, 그 어떤 것이든지 - 은 똑같이 참되고 아름답다. 건강과 건전한 마음과 행복은 인간 경험 속에서 그것들이 혼합되듯이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善)의 통합이다. 능률적인 삶의 그러한 차원들은 에너지 체계들과 관념 체계들 그리고 영 체계들의 통합을 통하여 나온다.

 

진리는 응집력이 있고, 아름다움은 매력적이며, 선(善)은 안정을 이룬다. 실제적인 이러한 가치들이 품성 경험 속에서 합동될 때, 그 결과는 지혜에 의해 조건이 갖추어지고 충성에 의해 자격이 갖추어지는 높은 계층의 사랑이다. 모든 우주 교육의 실제적인 목적은 세계들의 고립된 자녀가 그의 확대되는 경험의 더 큰 실체들과 더 나은 합동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실체는 인간 차원에서는 유한하고, 좀더 높은 그리고 신성한 차원들에서는 무한하고 영원하다.

 

[유버사에 있는 옛적으로 늘계신이들의 권한에 의해 활동하는 신성한 조언자에 의해 제시되었음]



제 3 편   하느님의 속성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우주 아버지는 영원의 순환계(巡環系)를 통치하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낙원 창조주 아들들의 품성체 속에서, 나아가 그는 이 아들들을 통하여 생명을 증여함으로써, 지역우주 안에서 통치하신다.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고, 이 생명은 그의 아들들 안에 있다." 하느님의 이 창조주 아들들은 시간의 구역들에서의, 그리고 공간의 진화 우주들의 소용돌이치는 행성에 있는 자녀들에 대한, 그 자신의 품성적 표현이다.

 

고도로 품성체구현된 하느님의 아들들은 피조 지능존재들의 낮은 계층들에 의해 분명하게 식별될 수 있으며, 그리고 그렇게 그들은 무한하고 그리하여 잘 식별할 수 없는 아버지의 불가시성(不可視性)을 보상한다. 우주 아버지의 낙원 창조주 아들들은, 낙원 신들의 품성 안에 그리고 영원의 순환계(巡環系) 안에 선천적인 절대성과 무한성 때문에 보이지 않는, 그렇지 않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계시이다.

 

창조자관계는 하느님의 속성이라고 볼 수 없으며 그것은 오히려 그의 활동본성의 집합이다. 그리고 창조자관계의 이 우주 기능은 첫째근원이며 중심의 무한하고도 신성한 실체의 모든 합동 속성들에 의해 그것이 조절되고 조정되는 것으로 영원하게 명시된다. 우리는 신성한 본성 중 어느 한 특징이 다른 것들보다 선재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에 대해 진정으로 의문스럽다, 만일 그 경우가 사실이었다면, 신(神)의 창조자관계 본성은 다른 모든 본성들, 활동들 그리고 속성들 보다 선행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神)의 창조자관계는 하느님이 아버지신분이라는 우주의 진리에서 정점을 이룬다.

 

1. 하느님의 어디에나 - 계심

 

어디에나 그리고 동시에 현존할 수 있는 우주 아버지의 능력이 그의 전재(全在)를 이룩한다. 하느님 홀로만 두 곳에, 수많은 곳에 동시에 계실 수 있다. 하느님은 "위에 있는 하늘에 그리고 아래에 있는 땅에" 동시에 현존하시며 시편 기자는 이렇게 외쳤다: "당신의 영으로부터 내가 어디로 갈 수 있으며 당신의 현존으로부터 내가 어디로 도망 갈 수 있겠습니까?"

 

"주(主)는 '나는 멀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가까이에도 있는 하느님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지 않느냐?'" 우주 아버지는 그의 멀리-퍼지는 창조 안에서 모든 부분들 속에 그리고 모든 가슴 속에 항상 현존하신다. 그는 "만물을 채우고 만물 속에 충만한," 그리고 "만물 속에서 모든 일을 하는 그의 충만함 "이며, 더 나아가, 그의 품성의 개념은 "하늘(우주)과 하늘들의 하늘(우주들의 우주)도 그를 담을 수 없다"는 것과 같다. 하느님이 모든 것이고 모든 것 속에 계시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하느님의 전부가 아니다. 무한자는 오직 무한 속에서만 최종적으로 드러날 수 있으며, 원인은 결과에 대한 분석으로는 결코 충만하게 이해될 수 없다 살아 계시는 하느님은 그의 속박되지 않는 자유 의지의 창조적 활동들의 결과로서 존재로 되어 온 그 창조의 전체 총계보다도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다. 하느님은 조화 우주에 두루 계시되지만, 그 조화우주는 결코 하느님의 무한성 전체를 포함하거나 둘러쌀 수 없다.

 

아버지의 현존은 주(主)우주를 끊임없이 순찰한다. "그의 나아감은 하늘 끝으로부터 이고, 그의 순환회로는 그 끝까지 이고, 아무 것도 그 빛으로부터 숨겨진 것이 없다."

 

창조체가 하느님 안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도 또한 창조체 속에 사신다. "그가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그의 안에 거하고 있음을 알며 그가 그의 영을 우리에게 주셨다. 낙원아버지로부터의 이 선물은 사람의 떨어질 수 없는 동행자이다." "그는 항상-현존하는 만물에-스며드는 하느님이다."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영은 모든 필사 자녀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다." "사람은 친구를 찾아 나아가지만, 바로 그 친구는 그의 가슴속에 살아있다." "참된 하느님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그는 우리의 일부분이며 그의 영은 우리 안에서 말한다." "아버지는 자녀안에 사신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는 영원한 운명의 안내하는 영이다."

 

인간 종족들이, "너희는 하느님께 속하니" 이는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느님 안에 거하고, 그의 안에 하느님이 거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들어온 것은 참이다. 잘못된 행위에 있을 때조차 너희는 하느님의 내주하는 그 선물을 괴롭히는데, 이는 생각조절자가 악한 사고(思考)의 결과들을 그가 갇혀있는 인간 마음과 함께 겪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전재(全在)는 실체 안에서 그의 무한한 본성의 일부분이며 공간은 신에게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직 낙원에서 그리고 중앙 우주 안에서만. 하느님은 완전성으로 그리고 제한 없이, 식별될 수 있도록 현존한다. 따라서 그는 하보나를 감싸고 있는 창조계에서는 눈에 보이도록 현존 하지 않으시는데, 이는 하느님이 시간과 공간 우주들의 합동 창조자들과 통치자들의 주권과 신성 한 특권들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현존을 제한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성한 현존의 개념은, 영원 아들과 무한 영 그리고 낙원 섬의 현존 순환회로들을 포함하는 명시의 형식과 경로 둘 모두의 넓은 범주를 고려해야 한다. 우주 아버지의 현존과 그의 영원한 합동자들 그리고 대리자들의 활동은 항상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그의 변하지 않는 목적의 모든 무한한 요구들을 그렇게 완전하게 충족시킨다. 그러나 품성회로와 조절자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으며 여기에서 하느님은 독특하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독점적으로 활동하신다.

 

우주의 조정자는 우주의 모든 부분에 있는 낙원 섬의 중력 순환회로 속에, 질량에 따라서, 이 현존에 대한 물리적 요구에 응답하여 그리고 만물을 응집하고 그의 안에 존재하도록 만드는 모든 창조의 선천적 본성으로 인하여, 동시에 그리고 똑같은 정도로 잠재적으로 현존한다. 마찬가지로 첫째근원이며 중심은 분별불가 절대자, 영원한 미래에 속하는 창조되지 않은 우주들의 저장소 안에 잠재적으로 현존한다. 하느님은 그렇게 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물리적 우주들 속에 잠재적으로 가득 퍼져있다. 그는 소위 물질적 창조의 응집성의 시원적 기초이다. 이 비(非)영적 신(神)의 잠재는, 우주 활동의 단계에서 그의 독점적 대리자들 중 어느 하나의 불가해(不可解)한 침입으로 인하여 물리적 실재들의 차원에 두루 여기저기에서 실제화 된다.

 

하느님의 마음 현존은 공동행위자, 무한 영의 절대 마음과 관련되어 있지만, 유한 창조계에 서는 그것이 낙원 주(主) 영(靈)들의 조화우주 마음이 기능하는 모든 곳에서 좀더 잘 식별된다. 첫째근원이며 중심이 공동행위자의 마음 순환회로들 안에 잠재적으로 현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우주 절대자의 긴장들 속에 잠재적으로 현존한다. 그러나 인간 계층의 마음은 공동행위자의 딸들, 진화 우주들의 신성한 사명활동자들의 증여물이다.

 

우주 아버지의 어디에나-있는 영은 영원 아들의 우주 영 현존 그리고 신(神) 절대자의 영존하는 신성한 잠재의 기능과 합동된다. 그러나 영원 아들 그리고 그의 낙원 아들들의 영적 활동은 물론이고 무한 영의 마음 증여들까지도, 그의 피조 자녀들의 가슴속에 있는 하느님의 내주하는 단편들인 생각조절자들의 직접적 행동을 제외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행성, 체계, 별자리 또는 우주 안에서의 하느님의 현존에 관하여, 어떤 창조적 단위에서든지 그러한 현존의 정도는 최극존재의 진화하는 현존의 정도의 척도가 된다. 그것은 체계들 그리고 행성들 자체에 이르기까지 점차로 약해지는, 광대한 우주의 부분에서 하느님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과 그리고 그에 대한 충성심에 의하여 정해진다. 그러므로 어떤 행성들(또는 심지어는 체계들) 이 영적 어두움 속으로 멀리 던져졌을 때,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격리되거나 또는 보다 큰 창조 단위들과의 교류로부터 부분적으로 고립된 것은 때때로 하느님의 고귀한 현존의 이 위상들을 보존하고 보호하려는 희망에서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유란시아에서 작용되고 있듯이, 완고하고 사악하며 반역적인 소수의 이간 행위들로 인한 고립되는 결과의 고통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그들 자신을 구하기 위하여 그 세계들의 대다수(大多數)가 영적으로 방어하는 반응이다.

 

아버지가 모든 그의 아들들 - 모든 품성들 - 을 어버이로서 순환회로 안에 두지만, 그들 안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신(神)의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품성체들로부터 그들의 기원이 멀리 떨어져있음에 의해 제한되고, 그들의 운명 달성이 그러한 차원들에 가까이 감에 따라 증대된다. 창조체 마음들 안에 하느님이 현존한다는 사실은 신비 감시자들과 같은 아버지 단편들이 그들에게 내주 하느냐 안하느냐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의 유효한 현존은 그들이 머무는 마음들이 이 내주하는 조절자들과 조화되는 협동의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아버지의 현존의 동요들은 하느님의 가변성에서 기인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소홀히 여김을 받는다고 해서, 격리되어 물러나 있는 것이 아니며 그의 애정은 창조체의 잘못된 행위로 인하여 멀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선택의 힘을(자기 자신에 관하여) 타고났기 때문에, 그의 자녀들은, 선택권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들 자신의 가슴과 혼 안에서의 아버지의 신성한 영향력의 정도와 한계들을 직접 결정한다. 아버지는 제한과 편애함이 없이 우리에게 자신을 무상으로 증여하셨다. 그는 개인들, 행성들, 체계들 또는 우주들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시간 구역들에서 그는 칠중 하느님의 낙원품성들, 유한한 우주들의 합동 창조자들에게만 서로 다른 명예를 수여한다.

 

2. 하느님의 무한한 힘

 

모든 우주들은 "전능한 주 하느님이 지배하심"을 안다. 이 세계와 다른 세계들의 일들은 신성하게 감독된다. "그는 하늘 군대(天軍) 속에서 그리고 이 땅의 거주자들 가운데에서 그의 뜻대로 행하신다." "하느님의 힘 이외에는 아무 힘도 없다"는 말은 영원히 참되다.

 

신성한 본성과 일치되는 그 한계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면 모든 것들이 가능하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참이다. 사람들, 행성들 그리고 우주들이 길게 이어져 겪는 진화과정들은 우주 창조자들과 행정자들의 완전한 조정 아래에 있으며 우주 아버지의 영원한 목적에 일치하여 펼쳐진다. 조화와 질서 속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전지(全知)한 계획과 일치하여 진행한다. 오직 한 분의 입법자(立法者)만이 있다. 그는 세계들을 공간에 유지시키고 영원한 순환회로의 끝없는 순환계(巡環系)를 따라 우주들을 회전 진동시킨다.

 

모든 신성한 속성들 중에서 그의 전능(全能)하심은, 특히 그것이 물질적 우주 안에 널리 퍼져있어, 가장 잘 납득된다. 비(非)영적 현상으로 본다면, 하느님은 에너지이다. 물리적 사실에 대한 이 선언은, 첫째근원이며 중심이 모든 공간의 우주의 물리적 현상의 시원적 원인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 신성한 활동으로부터 모든 물리적 에너지와 다른 물질적 현시들이 도래된다. 빛, 이것은, 열이 없는 빛은, 신들의 비(非)영적 현시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유란시아에 실제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비(非)영적 에너지 형태가 존재한다. 그것은 아직 인지되지 않고 있다.

 

하느님은 모든 힘들을 조정하시며 그는 "번개가 지나가는 길"을 만드셨으며 그는 모든 에너지의 순환회로들을 정하셨다. 그는 에너지-물질의 모든 형태의 현시 시간과 방법을 정하셨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그의 영존하는 장악 안에 - 하부 낙원에 중심을 두는 중력의 조정 속에 - 영원히 붙들려 있다. 영원한 하느님의 빛과 에너지는 그의 웅장한 순환회로, 곧 우주들의 우주를 구성하는 별 무리들의 끝없는 그러나 계층적인 행렬을 따라 그렇게 영원히 회전 진동한다. 모든 창조체는 낙원-만물과 존재들의 품성 중심을 영원히 돈다.

 

아버지의 전능하심은, 물질적 마음적 그리고 영적 세 에너지들이 그에게 아주 근접된 가운데 구별할 수 없는 그러한 곳 - 만물의 근원, 절대 차원이 지배하는 모든 곳에 속한다. 창조체 마음, 낙원 단일력도 아니고 낙원 영도 아닌 것은 우주 아버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응답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불완전성의 마음에 - 생각조절자들을 통하여 유란시아 필사자들에 조율하신다.

 

우주 아버지는 과도기적인 기세나 뒤바뀌는 힘 또는 동요하는 에너지가 아니다. 아버지의 힘과 지혜는 어떤 그리고 모든 우주 위급사태들에 대처하기에 전적으로 충분하다. 인간 경험의 긴급사태들이 나타날 때, 그는 그들 모두를 예견해 왔고, 따라서 그는 분리된 방법으로 우주의 문제들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지혜의 지시에 따라서 그리고 무한한 심판의 명령들의 조화 속에서 반응한다. 겉으로 나타난 것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힘은 우주 안에서 맹목적인 기세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긴급 통치가 이루어졌고, 자연 법칙이 중지되었고, 그릇된 적응이 인정되었고, 그리고 그 상황을 시정하도록 어떤 수고가 행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환경들이 나타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느님에 대한 그러한 개념들은 너희 관점의 제한된 범위에서, 너희 이해력의 유한성에서, 그리고 너희의 한정된 검사범위에서 기인되는 것이며 하느님에 대한 그러한 잘못된 납득은 영역의 더욱 높은 법의 실재함, 아버지의 성격의 장엄함, 그의 속성의 무한함, 그리고 그의 자유-의지함이라는 사실에 관하여, 너희가 깊은 무지(無知)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공간의 우주들에 두루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영이 내주하는 행성창조체들은, 그 수와 계층에 있어서 너무나 무한에 가깝고, 그들의 지능들은 너무나 다양하며, 그들의 마음은 너무나 제한되고 때로는 조잡하며, 그들의 시야는 너무나 단편적이고 지엽적이어서, 아버지의 무한 속성들을 알맞게 표현할 수 있는 개괄적인 법칙을 만들고 동시에 이들 피조 지능체들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너희 창조체에게는, 전능하신 창조주의 행위들 중 많은 것이 독단적이고, 개별적이고, 종종 냉혹하고 잔인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너희에게 다시 단언한다. 하느님의 행위들은 모두 목적이 있고, 지능적이고, 현명하고, 친절하며, 최상의 선을 영원히 고려하는데, 언제나 한 개별존재나 개별종족이나 개별행성 또는 심지어 개별 우주를 위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가장 낮은 자들로부터 가장 높은 자들에게 이르기까지, 관계된 모든 존재의 복지와 최상의 선(善)을 위한 것이다. 시간의 섭리시대에 있어서 일부분의 복지가 어떤 경우에는 전체의 복지와 다른 것처럼 나타나는데 영원의 순환계(巡環系)에 있어서는 그러한 외견상의 차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가족의 일원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때로 가족 시련을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를 그토록 혼란시키고 혼동시키는 하느님의 활동들 중 많은 부분은, 공동행위자가 무한 마음의 결코 틀림이 없는 의지선택을 수행하며, 광대하고 멀리-퍼지는 창조 전반의 가장 높고 영원한 복지를 포옹하는 완전성의 품성의 관찰, 안목 그리고 배려의 결정들을 실시하도록 힘을 주는, 전지(全知)한 최종 판정들과 결정들의 결과이다.

 

그래서, 너희가 보거나 이해하거나 또는 알 수 없는 많은 신성한 행위들의 지혜와 친절함이, 너희에게 그렇게 부숴 버리는 냉혹함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고, 너희 이웃 창조체들의 행성 행복과 개인 번영에 대해, 위로와 복지에 대해 그렇게 철저한 무관심으로 특징 지워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그러한 어떤 장애를 만들게 하는 것은 너희의 분리되고 단편적이고 유한적이고 조잡하고 매우 물질적인 관점과 그리고 너희 존재의 본성 속에 선천적으로 들어 있는 한계들이다. 너희가 하느님의 동기들을 잘못 납득하고 목적들을 오해하는 것은, 인간 시야의 한계 때문이고, 너희의 한정된 납득과 그리고 유한한 납득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 아버지의 품성 행위들이 아닌 많은 것들이 진화 세계에서 일어난다.

 

신성한 전능(全能)은 하느님의 품성의 다른 속성들과 완전하게 합동을 이룬다. 하느님의 힘은, 대개, 그 우주 영적 현시 속에서 세 가지 조건 또는 상황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1. 하느님의 본성에 의해, 특별히 그의 무한한 사랑에 의해,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善)에 의해.


2. 하느님의 뜻에 의해, 그의 자비로운 사명활동 그리고 우주의 품성들과의 아버지로서의 관계에 의해.


3. 하느님의 법에 의해, 영원한 낙원 삼위일체의 정의(正義)와 공의에 의해.

 

하느님은 힘에 있어서 제한됨이 없고, 본성에 있어서 신성하고, 의지에 있어서 최종이고, 속성들에 있어서 무한하고, 지혜에 있어서 영원하며, 실체에 있어서 절대이다. 그러나 우주 아버지의 이 모든 특징들은 신(神) 안에서 합일되어 있고 낙원 삼위일체 안에서 그리고 삼위일체의 신성한 아들들 안에서 우주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 와는 달리, 낙원 그리고 하보나라는 중앙우주 밖에서는, 하느님께 속하는 모든 것이 최극자의 진화적 현존으로 제한되고, 궁극위의 결과로서 생기고 있는 현존으로 조절되며, 세 존재적 절대자들 - 신, 우주, 그리고 분별불가 - 로 합동된다. 그리고 하느님의 현존은 그러한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제한된다.

 

3. 하느님의 우주 지식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신성한 마음은 모든 창조체의 생각을 의식하고 그것을 밝게 알고 있다. 사건들에 대한 그의 지식은 우주적이며 완전하다. 그로부터 나아가는 신성한 실존 개체들은 그의 일부분이며 "구름을 저울로 다는" 그 분은 "지식에 있어서도 완전하다." "주(主)의 눈은 어디에나 있다." 너희 위대한 선생이 하찮은 참새에 대하여, "그들 중 하나도 내 아버지께서 알지 못하는 가운데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으며," 그리고 "너희 머리에 있는 바로 그 머리카락 숫자도 헤아리신다."고 말하였다. "그는 별들의 숫자를 말하며 그것들을 그 이름대로 부른다."

 

우주 아버지는 공간의 별들과 행성들의 숫자를 실제로 아는 온 우주 안에서의 유일한 품성이시다. 각각의 우주에 속한 모든 세계들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의식 안에 있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아왔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 왔으며, 그들의 슬픔을 알고 있다." 이는 "주(主)는 하늘로부터 바라보며 모든 사람의 아들들을 보시며 그의 거처에서 땅에 있는 모든 거주자들을 내려다보시기" 때문이다. 모든 창조체 자녀는 정말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는 내가 가는 길을 아시며, 그가 나를 다 시험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아갈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그는 멀리에서 우리 생각을 납득하시고 모든 우리의 길을 잘 아신다." "우리가 함께 해야 하는 그 분의 눈앞에 모든 것들이 벌거벗었고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가 너희의 구조를 아시며 너희가 티끌임을 기억 하신다"는 것을 납득하는 것은 모든 인간 존재들에게 참된 위로가 될 것이다. 예수는, 살아 계신 하느님에 대해,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그에게 요청하기도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신다"고 말씀하였다.

 

하느님은 모든 것들을 아는 제한됨이 없는 힘을 소유하고 계시며 그의 의식은 우주적이다. 그의 품성회로는 모든 품성체들을 에워싸며, 심지어 낮은 창조체에 대한 것이라도 그의 지식은 내려오는 일련의 신성한 아들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그리고 내주하는 생각조절자들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보완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무한 영이 항상 어디서나 실재한다.

 

우리는 하느님이 죄의 사건들을 미리 아시기로 선택하는지 아니하는지 전적으로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느님이 자기 자녀들의 자유의지 활동들을 미리 아신다 하더라도, 그러한 선견(先見)은 그들의 자유를 조금도 폐기시키지 않는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하느님은 결코 놀라지 않는다.

 

전능(全能)은 행할 수 없는 것들, 하느님답지 않은 행위를 하는 힘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전지성은 알 수 없는 것들을 아는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말들은 유한 마음에게는 거의 납득시킬 수 없다. 창조체는 창조주의 뜻의 범위와 한계들을 거의 납득할 수 없다.

 

4. 하느님의 한계 없으심

 

우주들이 생겨나게 됨에 따른 그것들에 대한 자신의 연속적 증여는 그것들이 신(神)의 중앙 품성 속에 계속 존재하고 머무르고 있을 때의 힘의 잠재 또는 지혜의 저장고를 결코 경감시키지 않는다. 기세와 지혜 그리고 사랑의 잠재에 있어서 아버지는, 낙원 아들들에 대한, 그의 종속 창조에 대한, 그리고 그것의 다양한 창조체에 대한 아낌없는 자기증여의 결과로, 그의 소유 중 어떤 것도 줄어들지 않으며 그의 영광스러운 품성의 어떤 속성도 빼앗기지 않는다.

 

모든 새로운 우주의 창조는 중력의 새로운 조절을 요구한다. 그러나 비록 창조가 무기한적 으로, 영원하게, 그리고 심지어는 무한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결국에는 물질적 창조가 한도 없이 존재하게 된다 하더라도, 낙원 섬에 평온히 있는 조정과 합동의 힘은 그러한 무한한 우주에 대한 지배, 조정 그리고 합동에 상응하고 또한 그것에 알맞은 것으로 발견될 것이다. 그리고 한없는 우주에 대한 무제한적 기세와 힘의 이 증여 이후에, 무한자는 여전히 같은 정도의 기세(氣勢)와 에너지로 충전되어 있을 것이며 분별불가 절대자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을 것이며 하느님은 마치 기세(氣勢), 에너지 그리고 힘이 우주와 우주마다의 자질을 쏟아 내지 않았던 것과 똑같이, 동일한 무한한 잠재를 여전히 소유하신다.

 

그리고 지혜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영역들의 사고(思考)에 그토록 자유롭게 배분된다는 사실이 신성한 지혜의 중앙 근원을 조금도 허약하게 만들지 않는다. 우주들이 몇 배가되고 영역의 존재들이 포용의 한계까지 숫자가 늘어나고, 마음이 이 높고 낮은 지위의 존재들에게 증여되는 일이 중지되지 않고 계속된다 해도, 하느님의 중앙 품성은 똑같이 영원하고 무한하며 모든-지혜 마음을 여전히 계속하여 포옹할 것이다.

 

그가 너희 세계 그리고 다른 세계들의 남자와 여자들에게 내주하도록 자신으로부터 영(靈) 사자(使者)들을 보낸다는 사실은, 신성하고 전능한 영 품성으로서 기능하는 그의 능력을 조금도 줄이지 않으며 그가 보낼 수 있고 또 보내게 될 그러한 영 감시자들의 범위와 숫자에는 절대적으로 제한이 없다. 이렇게 그의 창조체들에게 자신을 내어줌은, 신성하게 부여 받은 이 필사자들을 위한 진보하고 연속하는 실재의 무한한, 거의 믿을 수 없는 미래 가능성을 창조한다. 그리고 사명활동하는 이 영 실존개체들로서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분배하는 이 일은, 모든-지혜, 모든 것-아심, 그리고 모든-힘을 가진 아버지의 품성체 안에 평온히 있는 진리 그리고 지식의 지혜로움과 완전성을 조금도 경감시키지 않는다.

 

시간의 필사자들에게는 미래가 있지만, 하느님은 영원 속에 거하신다. 비록 내가 신(神)이 거하는 바로 그곳 근처로부터 흩어져 나왔지만, 나는 여러 신성한 속성들의 무한성에 관하여 납득의 완전성으로 말한다고는 감히 할 수 없다. 마음의 무한만이 실재의 무한과 행동의 영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필사자 사람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무한성을 알 길이 없다. 유한 마음은 그러한 절대 진리 또는 사실을 생각해 낼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유한 인간 존재는 그러한 무한 아버지 사랑의 충만하고도 경감되지 않은 영향을 실제적으로 느낄 - 글자 그대로 경험할 - 수 있다. 그러한 사랑은 정말로 경험될 수 있는데, 경험의 본질특성이 제한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경험의 양은 영적 수용력에 대한 인간능력에 의해 그리고 이에 답하여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는 연합된 능력에 의해 엄격히 제한을 받는다.

 

무한한 본질특성에 대하여 유한한 인식이, 그 창조체의 논리상 제한능력을 훨씬 초월하는 것은 그 필사자 사람이 하느님의 상징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 그의 속에 무한의 단편이 살고 있는 - 사실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에게 사람이 가장 가까이 그리고 가장 친밀하게 접근하는 일은 사랑에 의해 그리고 사랑을 통해서 인데,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독특한 관계 전체는 조화우주의 사회학에서의, 창조주- 창조체 관계 - 아버지-자녀 애정 - 에 대한 실제적 경험이다.

 

5. 아버지의 최극의 통치

 

하보나-이후 창조계에 대한 그의 접촉에 있어서, 우주 아버지는 그의 무한한 힘과 최종적 권한을 직접적인 전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들의 종속 품성들을 통하여 행사한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자유 의지로 행한다. 위임된 힘의 일부 또는 전부는, 만일 특별한 일이 발생되면, 만일 그것이 신성한 마음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면, 직접 행사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러한 행위는 오직 위임 받은 그 품성이 신성한 신탁을 만족시키는데 실패한 결과로서만 발생될 뿐이다. 그러한 때에 그러한 불이행 앞에서 그리고 신성한 힘과 잠재가 유보되는 한계 안에서, 아버지는 독자적으로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통치를 행하신다. 그 선택은 항상 어김없는 완전성이거나 무한한 지혜 중의 하나이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들을 통하여 통치하시며 우주 조직의 아래로 내려가면, 아버지의 광대한 권역에 속하는 진화 구체들의 운명들을 가름하는 행성영주들에게서 끝이 나는 중단 없는 통치자들의 연결고리가 있다. 그들은 이렇게 외친 것은 단순히 시적인 표현이 아니다: "이 땅은 주(主)의 것이며, 주(主)는 그것을 충만케 하신다." "그가 왕들을 폐(廢) 하기도 하고 왕들을 세우기도 하신다." "지고자들이 사람들의 나라에서 통치하신다."

 

사람의 가슴속 일들에 있어서 우주 아버지는 자신의 방법을 항상 취하지는 아니하더라도 행성의 지도와 운명에 있어서는 신성한 계획이 널리 퍼져있다 지혜와 사랑의 영원한 목적이 승리한다.

 

예수는 말씀하였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나의 아버지는 모든 것들보다 크시며 누구도 내 아버지 손에서 그들을 뺏을 수 없다." 너희가 하느님의 거의 한없는 창조의 다양한 일들을 얼핏 바라보고 그리고 어마어마한 광대함을 볼 때, 너희는 그의 시원성에 대한 너희 개념에 있어서 움칫 할 수도 있겠지만, 너희는 그가, 모든 것들의 낙원중심에서 확실하고 영존하는 보좌에 올라 있으며, 그리고 모든 지능 존재들의 자애로운 아버지임을 받아들이는 일에 실패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 위에 그리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한 분 하느님 그리고 모두의 아버지"가 계시며, "그는 모든 것들 이전에 계시고, 그 안에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

 

생명의 불확실성과 존재의 변천성은 하느님의 우주의 주권에 대한 개념에 어떤 방법으로도 모순 되지 않는다. 모든 진화 창조체 삶은 어떤 불가피성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다음을 고려해 보라:

 

1. 용기 - 성격의 강한 힘 - 가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사람은 어려움에 부딪치고 실망에 반응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어떤 환경 속에서 자라지 않으면 안 된다.

 

2. 이타심 - 자기 동료에 대한 봉사 - 이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삶의 체험이 사회적 불평등과 마주치는 상황이 준비되지 않으면 안 된다.

 

3. 소망 - 신뢰의 절정 - 이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인간 실존은 불안정성과 되풀이되는 불확실성에 끊임없이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신앙 - 인간 생각의 최극 확신  - 이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은 그것이 믿을 수 있는 것보다 항상 적게 아는 곤란한 궁지에서, 바로 그것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5. 진리에 대한 사랑과 그것이 인도하는 곳은 어디든지 가고자 하는 기꺼이 따름이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사람은 실수가 존재하고 허위가 항상 가능한 세계 속에서 자라야만 한다.

 

6. 이상주의 - 신성한 것에 다가가는 개념 - 가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사람은 상대적 선함과 아름다움의 환경, 더 나은 것들에 도달하고자 하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적 환경 속에서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7. 충성심 - 가장 고귀한 의무에 대한 헌신 - 이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사람은 배반과 이탈의 가능들의 한 가운데에서 견디어내야 한다. 의무에 헌신하는 용기는 불이행이라는 내재된 위험 속에 존재한다.

 

8. 반(反) 이기주의 - 자아를-잊도록 하는 영(靈)- 가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필사사람은 인정받음과 명예를 위하여 끊임없이 외치는 피할 수 없는 자아의 함성과 마주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은 만일 버리고자 하는 자아-생활이 없다면 신성한 삶을, 힘을 동원하여 선택할 수가 없다. 만일 선(善)을 드높이고 그와 차별할 수 있는 어떤 대비로서의 잠재 악(惡)이 없다면 사람은 결코 정의(正義)위에 그 구원이 되는 발판을 놓을 수가 없다.

 

9. 기쁨 - 행복에 대한 만족감 - 이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사람은 가능한 경험이 될 수 있도록, 그와 대비되는 다른 쪽인 고통과 그리고 고난 받을 가망이 언제나-실재하는 그런 세계에서 살아야만 한다.

 

우주에 두루, 각 단위는 전체의 일부분으로 간주된다. 부분의 생존은 전체의 계획 그리고 목적과의 협동, 아버지의 신성한 뜻을 행하고자 하는 전심의 욕구와 완전히 자진하는 마음에 의존한다. 실수(어리석은 심판의 가능성)가 없는 유일한 진화 세계는 자유로운 지능존재가 없는 세계일 것이다. 하보나 우주에는 그들의 완전한 거주민들을 갖는 10억 개의 완전한 세계들이 있지만, 진화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자유롭게 되고자 한다면 잘못을 범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유롭고 경험이 없는 지능존재는 처음에는 도저히 한결같이 현명할 수 없다. 오류인 판단(악)의 가능성은 인간 의지가 의식적으로 시인하고 고의적으로 비도덕적 판단을 알면서 포옹할 때에만 죄가 된다.

 

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선(善)에 대한 완전한 인식은 신성한 우주의 완전성 속에 선천적으로 들어 있다. 하보나 세계들의 거주민들은 선택의 자극으로서 상대적 가치차원이라는 잠재를 필요로 하지 않다 그러한 완전한 존재들은 대조되는 그리고 생각을-강요하는 전체 도덕적 상황들이 없을 때에도 선한 것들을 식별하고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완전한 존재들은, 도덕적 본성과 영적 지위에 있어서, 실재의 사실이라는 이유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선천적인 지위 안에서만 경험적으로 진보를 이룩한다. 필사자 사람은 상승하는 후보자로서의 자기지위도 자기 자신의 신앙과 소망에 의해 얻는다. 인간 마음이 파악하고 인간 혼이 획득하는 신성한 모든 것은 경험적 달성이며 그것은 품성적 경험의 실체이고, 따라서 하보나의 과오 없는 품성들의 선천적인 선(善)과 정의로움과는 대조적인 독특한 재산이다.

 

하보나의 창조체들은 선천적으로 용감하지만, 그들은 인간 감각에서는 용감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친절하고 동정심이 있지만, 인간적인 방법으로 도저히 이타심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즐거운 미래를 기대하는 자들이지만, 불확실한 진화 구체에 속한 믿음 있는 필사자 들의 아름다운 방법으로 희망에 부풀지는 않는다. 그들은 우주의 안정성에 있어서 신앙을 갖고 있지만, 필사자 사람으로 하여금 동물지위로부터 낙원의 입구까지 의지하여 상승하는 구원의 신앙에 대하여는 전혀 이방인이다.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지만, 그것의 혼-구원 본질특성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들은 이상주의자들이지만, 그들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들은 활기 넘치는 선택으로 그렇게 되어가는 그 황홀경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다. 그들은 충성되지만, 불이행의 유혹에 부딪쳐서, 전심으로 그리고 총명하게 의무에 헌신하는 전율은 결코 경험한 적이 없다. 그들은 사심이 없지만, 호전적인 자아를 당당하게 정복함으로, 그런 차원의 체험을 결코 얻은 적이 없다. 그들은 기쁨을 즐기지만, 그러나 잠재된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기쁨의 그 달콤함은 이해하지 못한다.

 

6. 아버지의 시원성(始原性)

 

신성한 사심(私心) 없음, 더할 나위 없는 관대함을 가지고, 우주 아버지는 권한을 양도하시고 힘을 위임하시지만, 그는 여전히 시원적이시다 그의 손은 우주의 영역들의 환경에 대한 전능의 지렛대 위에 있으며 그는 모든 최종 결정들을 유보하였으며 밖으로 뻗친, 소용돌이치는, 그리고 항상 돌고 있는 창조의 복지(福祉)와 운명에 대한, 도전 받을 수 없는 권한을 가지고 그의 영원한 목적의 전능한 거부권을 조금도 틀림없이 행사한다.

 

하느님의 주권은 제한됨이 없다 그것은 모든 창조의 근본적 사실이다. 우주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우주는 우연한 현상이 아니며, 자아-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우주는 창조의 작품이며 따라서 전적으로 창조주의 뜻에 종속된다. 하느님의 뜻은 신성한 진리, 살아있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진화하는 우주의 완전하게 되는 창조계는 선함 - 신성에 가까움 - 과 잠재적 악 - 신성으로부터 멀어짐 - 으로 특징되어 진다.

 

모든 종교 철학은, 조만 간에, 통일된 우주 통치의 개념, 한 하느님의 개념에 도달한다. 우주 원인들은 우주 결과들보다 낮을 수 없다. 우주 생명의 그리고 우주의 마음의 흐름들의 근원은 그들 현시(顯示)의 차원들보다 높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 마음은 더 낮은 계층의 실재를 가지고 일관되게 설명될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더 높은 차원의 생각과 목적 있는 의지의 실체를 깨달음으로써만 정말로 이해될 수 있다. 도덕적 존재로서의 사람은 우주 아버지의 실체가 인정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기계론적 철학자들은 우주적이고 주권적 의지, 그가 그토록 숭배하는 우주법칙의 정교한 노작에서 작용하는 바로 그 주권적 의지에 대한 개념을 거부하는 것처럼 선언한다. 그가 그러한 법칙들이 자아-작용하고 자아-설명된다고 생각할 때, 기계론자는 법칙-창조주에게 정말 생각지도 않은 경의를 바치고 있다!

 

내주하는 생각조절자에 대한 개념의 경우를 제외하고, 하느님을 인간화시키는 일은 큰 실책이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첫째 위대한 근원이며 중심에 대한 관념을 완벽하게 기계화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다.

 

낙원 아버지는 괴로워하시는가? 나는 알지 못한다. 창조주 아들들은 필사자들이 하는 것처럼 아주 분명하게 할 수 있고 때로는 그렇다. 영원 아들과 무한 영은 한정된 감각에서 볼 때 괴로워하신다. 나는 우주 아버지도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그런지는 납득할 수 없으며 아마도 품성 순환회로를 통해 또는 생각조절자들의 개체성 그리고 그의 영원한 본성의 다른 증여들을 통해서 일 것이다. 그는 필사 종족들에 대해 "너희의 모든 고통들 속에서 내가 괴로워한다."고 말씀하였다. 그는 아버지로서의 그리고 동정적인 납득을 의심할 여지없이 경험하신다. 그는 정말로 괴로워하실 수 있지만, 나는 그것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주들의 우주의 무한하고 영원한 통치자는 힘, 형태, 에너지, 과정, 원형틀(元型), 원칙, 현존, 그리고 이상화된 실체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이며 그는 품성체이며 그는 주권적 의지를 행사하고, 신성에 대한 자아-의식을 경험하며, 창조적 마음의 명령을 실행하고, 영원한 목적의 실현에 대한 만족을 추구하며, 그의 우주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애정을 나타낸다. 그리고 아버지의 더욱 품성적인 이 특색들 전체는, 너희 창조주 아들인 미가엘의, 그가 유란시아에 육신화 되었던 동안에, 증여 삶 속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그것들을 살펴봄으로써 더 잘 납득될 수 있다.

 

아버지 하느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아들 하느님은 사람들을 섬기시며 영 하느님은, 영 하느님의 은혜의 사명활동을 통하여 아들 하느님들이 정해놓은 방법들에 의해 아버지 하느님을 발견하는 늘-상승하는 모험을 하도록 우주의 자녀들에게 영감을 준다.

 

[우주 아버지의 계시를 발표하도록 배정된 신성한 조언자로서, 나는 연이어서 신(神)의 속성들에 대한 이 글을 써왔다.]


제 4편  우주에 대한 하느님의 관계

 

우주 아버지는 우주들의 우주의 물질적, 지적, 그리고 영적 현상들에 대하여, 그가 모든 시간에 두루 이행하는 영원한 목적을 갖고 있다. 하느님은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주권의지에 따라 우주들을 창조하셨으며, 자신의 모든-현명함 그리고 영원한 목적에 따라 그것들을 창조하셨다. 낙원 신들과 그들의 최고 동료들을 제외하고 하느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하여 실제적으로 매우 많이 알고 있는 자가 과연 있는지 의심스럽다. 심지어는 낙원의 고귀한 시민들도 신들의 영원한 목적의 본성에 관하여 매우 다양한 견해들을 갖고 있다.

 

완전한 중앙우주인 하보나를 창조하는 목적이 순수하게 신성한 본성의 만족이었다는 점은 쉽게 추론된다. 하보나는 낙원을 향해가는 도중의 시간 순례자들을 위한 최종 학교로서 그리고 다른 모든 우주들을 위한 원형틀 창조로서 쓰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러한 천상의 창조는 완전하고 무한한 창조주들의 기쁨과 만족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

 

진화하는 필사자들을 완전하게 하는, 그리고, 그들이 낙원과 최종의 무리단의 달성 후에, 어떤 알려지지 않은 앞날의 일을 위한 연이은 훈련을 제공하는 놀라운 계획이, 현재로서는, 일곱 초우주들과 그들의 여러 종속부서들의 주요한 일들 중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필사자들을 영성화 시키고 훈련시키는 이 상승 기획은 결코 우주 지능존재들의 유일한 업무는 아니다. 정말로, 시간을 지배하고 천상무리들의 에너지들을 가져오게 만드는 매혹적인 수많은 다른 일들이 있다.

 

1. 아버지의 우주 태도

 

오래 동안 유란시아의 거주민은 하느님의 섭리를 잘못 알아왔다. 너희 세계에 대한 신성한 작용의 섭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많은 필사자들이 그럴 것이라고 상상하는 유치하고 독단적인 물질적 보살핌이 아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우주의 법칙에 따라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그의 우주 자녀들의 영적 진보를 위하여 끊임없이 수고하는, 천상의 존재들과 신성한 영들의 상호 연결된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사람과 관계되는 하느님에 대한 너희 개념에서, 우주의 표어가 진보인 것을 너희가 깨닫는 그 차원으로 너희는 나아갈 수 없겠는가? 긴 세월 동안 인간 종족은 그 현재 위치에 도달하기 위하여 투쟁해 왔다. 이 모든 수천 년 동안 섭리는 진보적인 진화 계획을 수행해 왔다. 실제에 있어서는 두 가지 생각들이 서로 대립되지 않으며, 오직 사람의 잘못된 개념 속에서만 그러하다. 신성한 섭리는, 현세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참된 인간적 진보에 대하여 결코 정 반대의 위치에 놓여지지 않는다. 섭리는 최극 입법자의 불변(不變)이고 완전한 본성과 항상 일치한다.

 

"하느님은 신실하시고", "모든 그의 계명은 옳습니다." "그의 신실함은 바로 하늘 안에서 세워졌습니다"


"오 주(主), 당신의 말씀은 하늘 안에 영원히 확립되었습니다. 당신의 신실함은 모든 세대에 이어지며 당신이 땅을 지으셨고 그것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는 신실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목적을 유지시키고 자기 창조체들을 부양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기세들과 품성들에는 제한이 없다. "영원한 하느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고, 그 아래는 영존(永存)의 방패가 있다." "지고자의 비밀한 곳에 거하는 그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머물 것이다." "보라, 우리를 보호하시는 이는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하여 선함을 이루는 것을 안다," "이는 주(主)의 눈이 의로운 자들을 보시고, 그의 귀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힘인 말씀으로 모든 것들을" 지탱한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들이 탄생될 때, 그는 "자기 아들들을 내보내며 그들은 창조된다." 하느님은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보존하신다." 하느님은 모든 물질적 물체들과 모든 영적 존재들을 계속해서 지탱하신다. 우주들은 영원히 안정되어 있다. 외견상 불안정한 그 한가운데에 안정성이 있다. 별들의 영역에 있는 에너지 격변과 물리적 변동 한가운데에는 근저(根低)를 이루는 질서와 안전함이 있다.

 

우주 아버지는 우주들에 대한 관리로부터 물러나신 적이 없다 그는 활동하지 않는 신(神)이 아니다. 만일 하느님이 모든 창조의 현재유지자에서 물러난다면, 우주 붕괴가 즉각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하느님이 없으면, 실체로서 그러한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바로 이 순간에도, 과거의 먼 시대처럼 그리고 영원한 미래에, 하느님은 계속 지탱하신다. 신성한 범위는 영원의 순환계(巡環系) 둘레까지 확장된다. 우주는 태엽이 감긴 만큼 작동하다가 기능을 멈추는 그러한 시계처럼 감겨진 것이 아니다 모든 것들은 계속해서 새롭게 되고 있다. 아버지는 에너지와 빛과 생명을 끊임없이 쏟아 부으신다. 하느님의 일은 영적일 뿐 아니라 글자 그대로 이다. "그는 북쪽을 빈 공간 너머로 힘껏 뻗게 하시고 땅을 무(無)에 매다신다."

 

내 계층에 속하는 존재는 궁극적 조화를 발견할 수 있고 우주 관리의 일상적인 일들 속에서 멀리-도달하고 그리고 심오한 합동을 탐지할 수 있다. 필사자 마음에게 흐트러져 있는 것처럼 그리고 우연한 것처럼 보이는 많은 것들이 내가 납득하기로는 질서 정연하고 구조적이다. 그러나 내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매우 많은 것들이 우주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나는 지역우주들과 초우주들의 인지된 기세, 에너지, 마음, 모론시아, 영 그리고 품성들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 왔고, 그리고 다소 정통하다. 나는 어떻게 이들 대리자들과 품성들이 작용하는지에 대해 전반적인 납득을 가지고 있으며, 광우주의 인가 받은 영 지능존재들의 하는 일을 상세하게 알고 있다. 우주들의 현상에 대한 나의 지식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충분히 알아낼 수 없는 조화우주 반응에 끊임없이 마주치고 있다. 나는 내가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는. 기세, 에너지, 지능 그리고 영들의 상호 연합된, 외견상 우연한 협력을 이루는 것으로 보이는 일에 끊임없이 부딪힌다.

 

나는 우주 아버지와 영원 아들과 무한 영 그리고 크게는 낙원 섬의 기능에서 직접 생겨나는 모든 현상의 활동을 추적하고 분석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다. 나의 곤혹스러움은 그들의 신비로운 합동, 세 잠재성의 절대자들의 솜씨처럼 보여 지는 것에 부딪힘으로써 생겨난다. 이 절대자들은 물질을 대체하고 마음을 초월하며 영을 산출시킨다. 나는 분별불가 절대자와 신(神) 절대자 그리고 우주 절대자의 현존과 행위의 탓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이 복잡한 활동행위들을 이해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혼돈되고 종종 당황한다.

 

이 절대자들은 우주 안에서 널리, 충분히-계시되지는-않은 현존들임에 틀림이 없는데, 그것은 물리학자, 철학자들 또는 심지어 종교인들에게까지도, 공간 잠재력 현상 속에서 그리고 다른 초(超)궁극체들의 역할 속에서, 기세, 개념 또는 영의 시원존재들이, 어떻게 최극 조절 그리고 궁극적 가치들을 포함하는 한 복합 실체 상황 안에서 일어나는 요구에 대하여, 정확히 응답하는가에 관하여 확실성을 가지고 예측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조화우주의 사건들의 전체 구조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보이는 시간과 공간의 우주에는 또한 유기적 합일체가 있다. 진화하는 최극존재의 이 살아있는 현존, 계획된 미완성의 내재성(內在性)은, 겉보기에 관련이 없는 우주 사건들이 놀랄 만큼 우연한 합동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에 의해, 때때로 불가해하게 현시(顯示)된다. 이것은 섭리의 기능 - 최극존재와 공동행위자의 영역 - 임이 틀림없다.

 

나는 변화 많고 이렇게 잡다하고 겉보기에 희망 없이 혼동된 물리적, 정신적, 도덕적, 그리고 영적 현상들을 일으키는 것이, 우주 활동의 모든 위상과 형식의 합동과 상호-연합에 대한 이 멀리-퍼지고 일반적으로 식별할 수 없는 조정이고, 그러면서 어김없이 하느님의 영광으로 그리고 사람들과 천사들의 행복을 위하여 결과를 이룬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조화우주의 외견상 "우연한 현상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절대자들의 영원한 조종 속에서의 무한자의 시-공간 모험의 유한 드라마의 일부이다.

 

2. 하느님과 자연

 

제한된 감각에서 볼 때, 자연계는 하느님의 물리적 성향이다. 하느님의 활동 또는 처리행위는 지역우주, 별자리, 체계, 또는 행성의 실험 계획들과 진화의 원형틀들에 의해 자격이 갖추어지고 일시적으로 변경된다. 하느님은 널리-퍼지는 주(主)우주에 두루 명확하고, 바뀌지 않고 변하지 않는 법칙에 따라서 행동하신다. 그러나 그는 자기 활동의 원형틀을, 진화적으로 전개되는 유한한 투영들의 지역적 목표, 의도 그리고 계획에 맞추어, 각 우주, 별자리, 체계, 행성, 그리고 품성의 합동되고 균형 잡힌 처리행위에 기여하도록, 변경한다.

 

그러므로 자연계는, 필사자 사람이 그것을 납득하고 있는 것처럼, 변함없는 신(神)의 숨어있는 기초와 기본 배경 그리고, 지역우주와 별자리와 체계와 행성 기세들 그리고 품성체들에 의해 시작되어 왔고 수행되고 있는 지역 계획과 목적과 원형틀과 그리고 조건들의 활동인, 그 활동에 의하여 변경되고, 그 활동을 통하여 동요를 경험하는, 그의 불변 법칙을 나타내 보인다. 예를 들자면, 하느님의 법칙이 네바돈에서 선포되었을 때, 그것들은 이 지역우주의 창조주 아들과 창조자 영에 의해 확립된 계획에 의해서 변경되며 이 모든 것 이외에, 이 법칙들의 작용은 너희 행성에 거주하는 그리고 사타니아라는 너희의 즉각적 행성 체계에 속하는 어떤 존재들의 실수와 불이행과 반란에 의해 더욱 영향을 받아 왔다.

 

자연은 두 가지 조화우주 요소의 시-공간 결과이다. 즉: 첫째는, 낙원 신(神)의 불변함, 완전성 그리고 정당함이며 두 번째는,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 가장 낮은 곳에 이르기까지, 바깥-낙원 창조체들의, 실험에 의한 계획, 집행상의 실책, 반란을 일으키는 실수, 발육의 불충분함, 그리고 지혜의 불완전성이다. 그러므로 자연계는 균일하고 불변하고 웅대하고 굉장한 완전성의 끈을 영원함의 순환계로부터 가져오지만 각 우주, 각 행성, 그리고 각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이 자연계는 진화 체계와 우주에 속한 창조체들의 행위, 오류 그리고 불충에 의해 변경되고 자격이 갖추어지며 아마도 훼손될 것이다. 따라서 자연계는, 저변(低邊)은 안정되어 있지만, 항상 변화하는, 게다가 변덕스러운, 분위기에 있어야만 하고 그리고 한 지역우주의 운영과정에 따라 바뀌어져야만 한다.

 

자연계는 미완성된 우주들의 불충분함, 악 그리고 죄에 의해 나뉘어진 낙원의 완전성이다. 이 몫은 완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 둘 모두를,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둘 모두를 그렇게 나타낸다. 계속되는 진화는 낙원 완전성의 내용을 증대시킴으로써 그리고 악, 실수 그리고 상대적 실체의 부조화를 줄임으로써 자연계를 변경한다.

 

하느님은 자연계 속에 또는 자연계의 기세들 중 어떤 것 속에도 직접 계시지 않는데, 이는 자연계의 현상은 점진적 진화의 미완성의 초(超)부담(負擔)이며, 때로는 하느님의 우주 법칙인 낙원기초에 대한 반항적인 반란의 결과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란시아와 같은 그러한 세계에 나타날 때, 자연계는 모든 현명함 그리고 무한하신 하느님에 대한 적절한 표현, 참된 표상, 신실한 묘사가 결코 될 수 없다.

 

너희 세계에 있어서 자연계는 지역우주의 진화 계획에 의한 완전성의 법칙의 자격조건이다. 어느 한계 안에서, 그것이 하느님에 의해 가득 퍼지게 된 자격을 갖춘 감각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이 우주적이고 신성한 힘의 위상이기 때문에, 자연계를 경배한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자연계는 또한 조화우주 진화 안에서 우주실험의 발육, 성장, 그리고 진보의 미완성되고, 불충분하고 불완전한 것의 현시(顯示)이다.

 

자연세계의 외견상 결함들이, 하느님의 성격 안에서 그에 대응되는 어떠한 결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관찰된 불완전들은 무한함을 영화처럼 묘사하는 계속 움직이는 필름상영에서의 불가피한 정지 순간에 불과하다. 물질적 사람의 유한 마음으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신성한 실체를 스쳐 지나가며 얼핏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완전성-연속성에 대한 바로 이 결함- 중단이다. 신성의 물질적 현시들이 사람의 진화적 마음에는 결점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오직 필사자 사람이 자연계의 현상을 타고난 눈, 시간 세계에서 보완되는 대용품인, 모론시아 모타나 혹은 계시의 도움을 얻지 않고, 인간적 시각을 통하여 보기를 계속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계는, 자연계의 일부이면서, 그러면서도 시간 속에서 자연계의 외상(外傷)을 제공해 온 무수한 창조체들의 반란, 비행, 잘못된 생각에 의해서, 훼손되고,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상처가 나 있으며, 그 모습은 시들어 버렸다. 결단코, 자연계는 하느님이 아니다. 자연계는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3. 하느님의 변치 않는 성격

 

 너무 오래 동안 사람은 하느님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해 왔다. 하느님은 우주들의 우주에 있는 사람 또는 다른 존재에 대해서도 질투하지 않으시고, 그런 적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창조주 아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행성 창조의 대표작이 되게 하려 하였으며, 모든 땅의 통치자가 되게 하려고 하였음을 알았기에, 그의 존재가 그들 자신의 속된 욕망에 지배당하는 모습, 나무와 돌과 금과 그리고 이기적인 야망의 우상 앞에 절하는 광경 - 이러한 더러운 장면들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들을 격동시켜서, 사람을 위하여 질투하게 한 것이지, 사람에 대해서는 결코 아니다.

 

영원한 하느님은 이러한 인간 감정들의 감각에서 그리고 사람이 그러한 반응들을 납득하는 것처럼, 분노하거나 화를 낼 수는 없다. 이러한 감상들은 비열하고 경멸적이며 그것들은 인간적이라 불릴 가치가 없고, 신성이라고는 더욱 할 수 없으며 그러한 태도들은 우주 아버지의 완전한 본성과 자비로운 성격에는 전혀 맞지 않는다.

 

유란시아 필사자들이 하느님 납득에 있어서 갖고 있는 어려움의 대부분, 거의 대부분은, 루시퍼 반란과 칼리가스티아 배신의 멀리-미치는 영향들에 기인한다. 죄에 의해 격리되지 않은 세계들의 경우에는, 진화 종족들이 우주 아버지에 대한 훨씬 더 나은 관념들을 조성할 수 있으며 그들은 혼돈과 왜곡 그리고 개념의 곡해를 덜 겪는다.

 

하느님은 전에 했던, 지금 하고 있는, 앞으로 계속 하게 될, 어떤 것에 대해서도 후회하지 않으신다. 그는 전지할 뿐만 아니라 전능하시다. 사람의 지혜는 인간 경험의 실수로부터 자라며 하느님의 지혜는 그의 무한한 우주 통찰력의 분별불가적 완전성 속에 있고, 그리고 이 신성한 예지가 창조적 자유 의지를 효과적으로 지시한다.

 

우주 아버지는 결과적으로 슬퍼하거나 후회하게 만드는 어떤 것도 하지 않지만, 그러나 밖으로 멀리 퍼져있는 우주들에서, 자신의 창조주 품성들이 계획하고 그리고 만든 의지 창조체들은, 그들의 불행한 선택에 의해, 때때로 그들의 창조주 부모들의 품성 안에서 신성한 슬픔의 감정들을 일으킨다. 그러나 비록 아버지가 오류를 하지 않고, 후회를 품지도 않고, 슬픔을 경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는 아버지의 애정을 가진 존재이며, 우주들의 영 달성 계획들 그리고 필사 상승정책들에 의해 그토록 자유롭게 제공되어 온 도움으로 그들이 다다를 수 있는 영적 차원에 도달하는 데 그의 자녀들이 실패할 때 그의 가슴은 확실히 애통해 하신다.

 

아버지의 무한한 선함은 시간의 유한한 마음의 이해력을 초월한다. 따라서 적절한 선의 모든 위상들에 대한 효과적인 표현을 위하여 상대적인 악(죄가 아니라)에 대해 항상 대조될 수 있게 되어야만 한다. 신성한 선의 완전성은 통찰력의 필사 불완전성에 의해 식별될 수 있는데, 그것은 오직 공간 운동의 시간과 물질의 관계에서 그것이 상대적 불완전성과 대조적 연합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성격은 무한하게 초인간적이며 따라서 신성의 그러한 본성은, 신성한 아들들 안에서처럼, 그것이 사람의 유한 마음에 의해 신앙-파악될 수 있기 전이라도, 품성체구현되어야만 한다.

 

4. 하느님의 실체화

 

하느님만이 전체우주들의 우주 안에서 유일하게 정지되고 자아-억제적이며 변함이 없는 존재인데, 밖이 없고 초월도 없고 과거도 없으며 미래도 없다. 하느님은 분명한 목적이 있는 에너지(창조 영)이고 절대 의지이며, 이것들은 자존(自存)하고 보편적이다.

 

하느님이 자존(自存)하기 때문에, 그는 절대적으로 자주적이다. 하느님의 바로 그 정체성은 변화와 반대된다. "나, 주는 변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불변이지만 너희가 낙원지위를 성취하기 전에는, 하느님이 어떻게 단순함으로부터 복잡함으로, 일치로부터 변화로, 정지로부터 운동으로, 무한으로부터 유한으로, 신성한 것으로부터 인간으로, 그리고 합일체로부터 이원일체(二元一體) 그리고 삼원일체(三元一體)로 옮겨갈 수 있는지를 조금도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신성한 불변함이 부동(不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래서 하느님은 그의 절대에 대한 현시를 그렇게 변형시킬 수 있다. 하느님은 의지를 갖고 있다 - 그가 의지이다.

 

하느님은 절대적 자아 결단의 존재이며 자아 부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의 우주 반응에 제한이 없고, 그의 자유의지 행위들은 오직 그의 영원한 본성을 선천적으로 특징짓는 신성한 특성본질들과 완전한 속성들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최종적 선(善)의 존재로서 더 나아가 창조적 무한함의 한 자유로운 의지로서 우주에 관계하신다.

 

아버지-절대자는 중앙 그리고 완전한 우주의 창조자이고 다른 모든 창조주들의 아버지이다. 하느님은 품성, 선(善), 그리고 수많은 다른 특징들을 사람 그리고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시지만, 의지의 무한함은 그에게만 있다. 하느님은 그의 창조적 행위들에 있어서 오직 그의 영원한 본성의 감성에 의해서만, 그리고 그의 무한한 지혜의 명령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하느님은 무한히 완전한 것만을 직접 선택하시고, 따라서 중앙우주는 천상의 완전성이다 창조주 아들들이 자신의 신성, 심지어는 자신의 절대성의 위상들도 전적으로 공유하는 반면, 그것들은 아버지의 의지 무한함을 가리키는 지혜의 그 최종에 의해 전혀 제한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미가엘 계층의 아들관계에 있어서, 창조적 자유 의지는 더욱 활동적이 되며, 절대는 아니더라도, 전적으로 신성하고 거의 궁극적이다. 아버지는 무한하고 영원하지만, 그의 의지적인 자아-제한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그의 의지적인 절대성의 바로 이 개념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의 절대성은 우주 실체의 일곱 차원들 전체에 가득 퍼져 있다. 그리고 이 절대 본성 전체는 그의 우주 창조체 가족에 대한 창조주의 관계에 종속된다. 우주들의 우주에서는 정확성이 삼위일체설의 공의의 특징이 되겠지만, 그러나 시간의 창조체들과 맺는 그의 광대한 가족 관계 전체에 있어서는 우주들의 하느님이 신성한 감성에 의해 다스려진다. 처음과 끝까지 - 영원히 - 무한한 하느님은 아버지이시다. 그를 적절하게 알려줄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명칭들 중에, 나는 모든 창조의 하느님을 우주 아버지로 묘사하도록 배워 왔다.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자유의지 행위는 힘으로 다스려지지 않으며 지성으로만 인도되지도 않는다. 신성한 품성은 영으로 존재하며 그리고 우주에 사랑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정의(正義)된다. 그러므로 우주들의 창조체 품성들에 대한 그의 모든 품성적 관계에 있어서, 첫째근원이며 중심은 항상 그리고 계속적인 사랑하는 아버지이시다. 하느님은 그 단어의 가장 높은 의미에서 아버지이시다. 그는 신성한 사랑의 완전한 이상주의에 의해 영원토록 동기를 부여 받으며, 그 부드러운 본성은 사랑함과 사랑 받음 속에서 그것의 가장 강한 표현과 가장 큰 만족을 찾는다.

 

과학에 있어서, 하느님은 첫째 원인이며 종교에 있어서는, 보편적이고 사랑하는 아버지이며 철학에 있어서는,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며, 존재를 위하여 다른 존재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과 그리고 모든 다른 존재들에게, 실재(實在)라는 실체를 자비롭게 수여한다. 그러나 과학의 첫째 원인 그리고 철학의 자존(自存) 합일체가 종교의 하느님, 자비와 선이 가득하고 땅 위에 있는 그의 자녀들의 영원한 생존이 임하도록 보장하는 하느님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는 무한자의 개념을 갈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에 대한 우리의 최고 개념의 품성과 그리고 신성 요소들을 우리가 어디서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파악할 수 있는 능력, 하느님에 대한 경험 - 관념을 경배한다.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인간 삶에 대한 자각은, 인간적 제한조건들의 무서운 장면에 직면할 때 각각의 실재(實在)의 되풀이되는 사건에 감히 도전하는 그 창조체 신앙에서 생겨나는데, 그것은, 내가 이것을 할 수 없을지라도 내 몸 속에, 그것을 할 수 있고 또 하게 될, 우주들의 우주 아버지-절대자의 일부가, 살고 있다는 확실한 선언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를 그리고 심지어는 너희 신앙도 정복하는 승리"이다.

 

5.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

 

종교적 전통은 지나간 시대들의 하느님을-아는 사람들의 경험을 불완전하게 보존한 기록이지만, 그러한 기록들은 종교적 삶을 위한 안내자로서 또는 우주 아버지에 관한 참된 정보의 근원으로서는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그러한 고대의 믿음들은 원시인이 신화를 만드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에 의해 늘 변형되어 왔다.

 

하느님의 본성에 관한 유란시아에서의 가장 큰 혼돈의 근원들 중 하나는, 낙원 삼위일체의 품성들 사이 그리고 낙원 신(神)과 지역우주 창조자들 그리고 행정자들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일에 있어서 너희의 성스러운 책들이 실패함으로부터 생겨난다. 부분적으로 납득하는 과거 세대들 동안, 너희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행성영주들, 체계주권자들, 별자리 아버지들, 창조주 아들들, 초우주 통치자들, 최극존재, 그리고 우주 아버지 사이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하였다. 생명운반자들 그리고 다양한 천사 계층들과 같은, 종속적 품성들의 메시지들 중 대부분이, 너희 기록들 속에서는,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처럼 나타내어 왔다. 유란시아의 종교적 생각은 신(神)의 연합 품성들과 우주 아버지 자신을 여전히 혼돈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가 하나의 명칭 속에 포함되어 있다.

 

유란시아에 속한 민족은 하느님에 대한 원시적 개념들의 영향으로부터 계속 괴로움을 당해오고 있다. 폭풍 속에서 날뛰며 돌아다니는 하느님들 분노에 차서 땅을 흔들고 화를 내면서 사람들을 때려눕히는 굶주림과 홍수의 때에 불만의 심판을 내리는 이들은 원시적 종교의 하느님들이다. 그들은 살아서 우주들을 통치하시는 하느님들이 아니다. 그러한 개념들은, 그러한 허구적(虛構的) 하느님들의 변덕스러움의 안내와 지배 아래에 우주가 놓여 있다고 사람들이 가정하였던 그 시기의 유물이다. 그러나 필사자 사람은, 최극 창조주들과 최극 조정자들의 행정적 정책들과 처리행위에 관한 한, 자신이 비교 되어지는 법칙과 질서의 영역 속에 살아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희생 제물들과 고행을 통하여 그리고 심지어는 피를 흘림으로, 성난 하느님을 달래고, 감정이 상한 주(主)의 비위를 맞추고, 신(神)의 은혜를 얻으려는 야만스러운 관념은, 전혀 미숙하고 원시적인 종교를 대표하며, 과학과 진리로 깨우친 시대에 맞지 않는 철학을 대표한다. 그러한 믿음들은 우주들 안에서 봉사 하고 다스리는 천상의 존재들과 신성한 통치자들에게는 철저히 혐오감을 주는 것들이다. 그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또는 가상적인 신성한 진노를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무죄한 피가 뿌려져야만 된다고 믿거나 고집부리거나 가르치는 것은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피 흘림이 없이는 죄의 용서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모세가 그의 순진한 베도윈 추종자들의 원시적인 마음들 속에서 인간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일을 금지하고 그 대신에 동물을 제례적 희생 제물로 대신하게 하였을 때 뚜렷한 진전을 이루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들은 피를 보지 않고는 달래질 수 없다는 옛날의 이교적 관념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였다.

 

너희 세계에 대한 낙원 아들의 증여는 행성 시대를 마감하는 상황 속에 본래 있었으며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은 하느님의 은혜를 사기 위한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이 증여는 창조주 아들이 자신의 우주에 대한 경험적 주권을 얻는 긴 모험여행에 있어서 그의 최종적인 몸소 활동이 되게 되어 있었다. 그의 엄격한 아버지로서의 냉담함과 견고한 가슴이 그의 창조체들의 불운과 슬픔에도 그렇게 움직이지 않아서, 그의 죄 없는 아들이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고 죽어 가는 것을 보기까지, 그의 부드러운 자비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가르치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성격에 반하여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그러나 유란시아의 거주민들은 우주 아버지의 본성에 관한 이러한 고대의 실수들과 이교적 미신들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하느님에 관한 진리의 계시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인류는 사람의 아들과 하느님의 아들로서 유란시아에 머물렀던 창조주 아들에 의해 그토록 숭고하게 묘사되었던 성격의 아름다움과 속성들의 사랑스러움으로 우주 아버지를 모두 알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유버사의 신성한 조언자에 의해 제시되었음]


  

5 편   개인에 대한 하느님의 관계

 

만일 사람의 유한한 마음이, 우주 아버지처럼 그토록 위대하고 그토록 장엄한 하느님이 어떻게 무한한 완전성 속에 있는 그의 영원한 거처로부터 내려오셔서 개별적 인간 창조체와 친해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면, 그러한 유한한 지성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실제적 단편이, 모든 정상-마음을 가진 그리고 도덕적으로 의식하는 유란시아 필사자의 그 지성 안에 거주한다는 사실의 진리 위에서 신성한 동료관계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내주하는 생각조절자들은 낙원 아버지의 영원한 신의 일부분이다. 사람은,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와의 교제를 시도하기 위하여 이 영적-실체 현존에 관한 혼의 깊은 사색으로서의 그 자신의 내적 경험보다 더 멀리 나갈 필요가 없다.

 

하느님은 자신의 영원한 본성의 무한함을 그의 여섯 절대 동격자들의 존재적 실체들에 두루 분배해 왔지만, 그러나 언제든지 그는 자신의 전(前)품성 단편들의 중재로 창조의 어떤 부분이나 위상 또는 종류와 직접적인 품성적 접촉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영원한 하느님은 또한 우주들의 우주의 살아있는 창조체들과 신성한 창조주들에게 품성(稟性)을 증여하는 특권을 자신이 보유하여 왔고, 동시에 더 나아가 그는 품성(稟性) 순환회로를 통하여 이 품성적 존재들 전체와 직접적인 그리고 어버이로서의 접촉을 유지하는 특권을 보유하여 왔다.

 

1. 하느님께 다가가는 길

 

유한 창조체가, 무한한 하느님께 다가갈 수 없는 것은 선천적인데, 아버지의 무관심에서가 아니고, 창조된 존재들의 유한함과 물질적 한계 때문이다. 우주 실재 중 가장 높은 품성(稟性)과 창조된 지능존재들 중 가장 낮은 집단들 사이에 있는 영적 차이의 크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비교적 지능존재의 낮은 계층들이 아버지 자신의 현존 속으로 즉시 전환되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그곳에 있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지금 있는 곳과 마찬 가지로 그곳에서도 우주 아버지의 현존에 대해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필사자 사람의 앞에, 그가 가능성의 영역 내에서 우주 아버지의 낙원 현존 속으로의 안전한 처리행위를 일관되게 요구할 수 있기 전까지는, 멀고도 먼 길이 있다. 영적으로, 사람은 일곱 주(主) 영(靈)들 중 어느 한 분이라도 볼 수 있게 하는 영적 시각을 이룩하게 될 수준에 도달하기 전에 여러 차례 전환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아버지는 숨어있지 않으며 그는 독단적으로 은둔해 있지 않으시다. 그는 자신의 우주 권역에 있는 자녀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기 위하여 신성한 지혜의 자원들을 끝임 없는 노력으로 동원하여 왔다. 그를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또는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모든 창조된 존재의 연합을 그가 갈망하도록 만든 그의 사랑의 장엄에는 무한한 숭고함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관대함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너희의 유한한 품성(稟性) 그리고 물질적 실재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너희 안에 있는 선천적 한계들이, 너희가 필사상승의 여행 목표를 성취하고 만물의 중심에 있는 아버지의 현존 속에 서게 되는 시간과 장소와 상황들을 결정한다.

 

비록 아버지의 낙원 현존에 다가감은 너희가 영 진보의 최고 유한 차원들을 달성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너희는, 너희 내면의 혼 그리고 너희의 영성화하는 자아와 그렇게 긴밀하게 연합된 아버지의 증여 영과 즉각적 교제가 항상 존재가능 함을 인식하며 기뻐해야만 한다.

 

시간과 공간의 영역에 속한 필사자들은 타고난 능력들과 지적 자질에 있어서 크게 다를 수 있고, 또는 그들은 사회적 발전과 도덕적 진보에 예외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누릴 수도 있거나, 아니면 그들이 문명 예술에 있어서 예상되는 진보와 문화에 거의 모든 인간적 도움의 부족함에서 오는 괴로움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승하는 생애에 있어서의 영적 진보에 대한 가능성은 모두에게 동일하다. 영적 통찰력과 조화우주 의미의 증가하는 차원들은 진화 세계에 있는 다양한 물질 환경들의 그러한 모든 사회-도덕적 차이들과는 매우 독립적으로 달성된다.

 

유란시아 필사자들이 그들의 지적, 사회적, 경제적, 심지어는 도덕적 기회들과 자질들에 있어서 다르다 하더라도, 그들의 영적 자질은 일정하며 특유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들은 모두 아버지 선물의 동일한 신성한 현존을 누리며, 그들은 모두 신성한 기원을 갖는 내주하는 이 영과의 긴밀한 품성적 교제를 추구하는 특권을 똑같이 누리며, 또 한편 그들 모두는 이 신비 감시자들의 일정한 영적 안내를 받아들이기를 똑같이 선택할 수 있다.

 

만약에 필사자 사람이 전심을 다하여 영적으로 동기를 부여 받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로 서슴없이 헌신한다면, 그는 내주하는 신성한 조절자에 의해 그렇게 확실하게 그리고 그렇게 효과적으로 영적으로 부여 받기 때문에, 하느님을 아는 고결한 의식과, 그리고 더욱 그와 같아지는 진보적 경험으로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한 숭고한 생존의 확신이 그 개인의 경험 속에서 체현(體現) 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에게는 살아남는 생각조절자가 영적으로 내주된다. 만일 그러한 인간 마음이 진지하게 그리고 영적으로 동기부여를 받는다면, 만일 그러한 인간 혼이 하느님을 알고자 하고 그와 같이 되고자 한다면, 진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신성하게 동기부여를 받은 혼을 낙원 입구를 향하여 확실하게 상승하는 일에서 막을 수 있는 어떤 필사자 박탈이란 부정적 영향도 그리고 어떤 훼방 가능한 적극적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모든 그의 창조체들이 자신과의 품성적 교제 안에서 있기를 원하신다. 그는 그들의 생존지위와 영적 본성이 그러한 달성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그들을 받아들일 장소를 낙원에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영원히 너희 철학에 자리 잡게 하라. 너희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은 가까이 갈 수 있는 분이고, 아버지에게 도달할 수 있고, 그 길은 열려 있다. 신성한 사랑의 기세들과 신성한 관리의 방법과 그리고 수단들은 우주 아버지의 낙원 현존을 향한 모든 우주의 모든 가치 있는 지능존재의 진보를 촉진시키려는 노력에서 모두가 서로 연동(聯動) 되어 있다.

 

하느님에게 도달하기까지 광대한 시간이 소요된다는 사실은, 무한자(無限者)의 현존과 품성을 조금도 비실제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너희의 상승은 일곱 초우주들의 순환회로의 일부분이며, 너희가 셀 수 없을 정도로 그 둘레를 돈다 하더라도, 너희는 영에 있어서 그리고 지위에 있어서 안쪽을 향해 계속 회전 진동되기를 기대해도 된다. 너희는 구체에서 구체로, 외부 순환회로에서 계속 더 내부 중심 가까이로 전환되고 있음을 믿어도 좋다. 그리고 언젠가는, 너희가 신성한 중앙 현존 안에 서게 될 것을 그리고 상징적으로 말해서 얼굴을 마주하고 그를 보게 될 것임을 의심 하지 마라. 그것은 실제적인 그리고 글자 그대로의 영적 차원의 달성에 대한 현안이다 그리고 이 영적 차원들은 신비 감시자가 내주하였던, 그리고 나중에 그 생각조절자와 영원히 결합한 어떤 존재든지 달성할 수 있다.

 

아버지는 영적 은둔 속에 계시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그의 창조체들은 그들 자신의 의지적 결정들의 안개 속으로 스스로 멀리 숨어왔으며, 그들 자신의 비뚤어진 길을 선택함으로써, 그리고 그들의 편협한 마음들과 비(非)영적 본성의 자아-주장에 빠짐으로써, 그의 영과 그리고 그의 아들의 영의 교제로부터 스스로를 한동안 분리해왔다.

 

필사사람은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도 있고 그리고 선택의 힘이 남아 있는 한 신성한 뜻을 반복적으로 저버릴 수도 있다. 사람의 최종 파멸은 그가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는 힘을 잃기 전까지는 확정되지 않는다. 자기 자녀들의 필요와 청원에 대하여 아버지의 가슴은 결코 닫힘이 없다. 그의 신성한 뜻을 행하고자 - 그를 알고자 하고 그와 같이 되고자 하는 - 하는 욕망을 그들이 최종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잃을 때는, 아버지의 이끄는 힘에 대하여 그의 자손이 그들 가슴을 영원히 닫을 때뿐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은, 조절자 융합이 그러한 상승자가 아버지의 뜻을 살기로 최종적이고도 취소할 수 없는 선택을 하였음을 우주에 선언할 때 확인된다.

 

위대하신 하느님은 필사사람과 직접적 접촉을 만들며 그리고 그의 안에 살고 거주하도록 그의 무한하고 영원하며 이해할 수 없는 자아의 일부분을 내어주신다. 하느님은 사람과 함께 영원한 모험 여행에 오르셨다. 만일 너희가 너희 안의 그리고 너희 둘레의 영적 기세들의 안내를 따른다면, 너희는 공간의 진화 세계들로부터 상승하는 그의 창조체들의 우주 목표로서, 사랑하는 하느님에 의해 수립된 그 높은 운명을 달성하는데 실패할 수 없다.

 

2. 하느님의 현존

 

무한자의 물리적 현존은 물질 우주의 실체이다. 신(神)의 마음 현존은 개별 지적 경험의 깊이에 의해 그리고 진화적 품성차원에 의해 결정되어야만 한다. 신성의 영적 현존은 필연적으로 우주 안에서 차별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영적 수용력 의해 그리고 신성한 뜻을 행하려는 창조체 의지의 헌신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하느님은 그의 영-탄생 아들들 각자 안에 살아 계신다. 낙원 아들들은 하느님의 현존, "아버지의 오른 손"에 항상 들어갈 수 있으며, 그의 창조체 품성들 모두는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그리고 어떻게 접촉되든지 품성 순환회로에 관한 것이며, 혹은 그렇지 않다면, 우주 아버지가 중앙 거주지 또는 낙원의 일곱 성스러운 구체들 중 하나처럼, 다른 지정 장소에서, 품성적, 자아-의식적 접촉과 그리고 교제를 필요로 한다.

 

아무튼, 신성한 현존은 자연의 그 어디서나 또는 심지어 하느님을 아는 필사자들의 삶 속에서도, 내주하는 신비 감시자, 낙원 생각조절자와 가지는 너희의 시도된 교제에서처럼 그렇게 충분하게 그리고 그렇게 분명하게 발견될 수는 없다. 우주 아버지의 영이 너희 자신의 마음 안에서 살아 있는 데, 하늘 멀리에서 하느님을 꿈꾸는 것은 얼마나 큰 오류인가!

 

너희들에게 내주하는 하느님의 단편 때문에, 너희가 조절자의 영적 인도와 조화에서 진보할수록 너희를 둘러싸고 너희에게 밀접하나 그러나 너희 전체의 한 부분으로 기능하지는 않는, 다른 영적 영향들의 현존과 변환 힘을 더욱 충분하게 식별하도록 너희가 소망할 수 있다. 너희가 내주하는 조절자와의 가깝고도 긴밀한 접촉에 대해 지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 어떤 드높여진 경험을 최소한 반증(反證)하는 것은 아니다. 신성한 조절자와의 동료성에 대한 증거는 전적으로 개별 신자(信者)의 삶의 경험 속에서 수확되는 영의 열매들의 종류와 크기에 있다. "그들의 열매로서 너희는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빈약하게 영성화된 필사자 사람의 물질적 마음으로, 낙원 조절자처럼 그렇게 신성한 실존개체들의 영 활동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경험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마음과 조절자의 공동창조의 혼이 더욱더 실재함으로, 신비 감시자들의 그 현존을 경험할 수 있는, 그리고 영 인도와 다른 초물질 활동들을 인식할 수 있는, 혼 의식의 새로운 위상이 역시 진화한다.

 

조절자 교제의 온전한 경험은 도덕적 지위, 정신적 동기부여 그리고 영적 경험이 하나로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한 어떤 성취인 자아-실현은 주로, 배타적은 아니더라도, 혼 의식의 영역에 국한되지만, 그러나 그 증거들은 모든 그런 내부-영 접촉자들의 삶 속에서 영 열매들의 현시(顯示)에서 나타나며 그리고 풍부하게 있다.

 

3. 참된 경배

 

우주 관점에서 볼 때, 낙원 신(神)들은 유란시아에 거주하는 그러한 존재들과 맺는 그들의 영적 관계에 있어서 하나로 존재하지만, 그들은 또한 별개의 분리된 세 품성체들이다. 품성적인 호소와 친교, 그리고 다른 긴밀한 관계들에 관하여 신격(神格)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최고의 감각에서, 우리는 우주 아버지를 그리고 오직 그분만을 경배한다. 진실로, 우리는 그의 창조주 아들들 안에서 그가 현시(顯示)되는 아버지를 경배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지만,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경배를 받고 찬미를 받는 분은 아버지이시다.

 

모든 종류의 간청은 영원 아들 그리고 아들의 영적 조직의 영역에 속한다. 기도, 모든 의례적인 교통, 우주 아버지에 대한 찬미와 경배를 제외한 모든 것은 한 지역우주에 관련되는 일들이다. 그것들은 대개 창조주 아들의 관할 영역을 벗어나서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경배는 아버지의 품성 순환회로 기능에 의해 의심할 여지없이 순환회로에 연결되어 창조주 품성체에게 보내진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조절자, 내주 창조체들의 그러한 경의(敬意)함의 기록은 아버지의 영 현존에 의해 용이해진다고 믿는다. 이런 믿음을 입증시키는 굉장히 많은 증거가 있으며, 나는 아버지 단편들의 모든 계층이, 그들의 주체들의 진실한 찬미를 우주 아버지의 현존 속에 수용할 수 있도록 기록하는 권한을 부여 받았음을 알고 있다. 조절자들은 또한 하느님과 대화하는 전(前)품성 통로들을 의심할 여지없이 직접 활용하며, 그들은 마찬가지로 영원 아들의 영-중력 순환회로들도 활용할 수 있다.

 

경배는 그 자체를 위한 것이다. 기도는 자아 -또는 창조체- 이익 요소를 포함한다. 이것이 경배와 기도의 큰 차이이다. 참된 경배 속에는 자아- 요청 또는 품성적 이익의 기타 요소가 전혀 없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가 그가 어떠하리라고 이해하는 하느님께 경배할 뿐이다. 경배는 경배자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한 숭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어떤 것 때문에 아버지를 경배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아버지의 비길 데 없는 품성을 인식함에 대한 자연적이고도 자발적인 반응으로서, 그리고 그의 사랑할 만한 본성과 찬미할만한 속성들 때문에 그렇게 헌신을 바치고 그렇게 경배에 참여하게 된다.

 

자아-이익의 요소가 경배에 끼어드는 순간, 그 순간의 헌신은 경배에서 기도로 전환되고 그리고 오히려 영원 아들 또는 창조주 아들의 품성체에게 적절하도록 방향 짓게 된다. 그러나 실제적인 종교적 경험에 있어서는 기도가 참된 경배의 일부분으로서 아버지 하느님에게 드려져서는 안 될 이유가 없다.

 

너희가 너희 일상생활의 실제적 일들을 다룰 때, 너희는 셋째근원이며 중심에 기원을 갖는 영 품성들의 통제 아래에 있다. 너희는 공동행위자의 대행자(代行者)들과 협동하고 있다. 그런즉 이런 것이다. 너희는 하느님께 경배를 드리며 아들에게 기도하고 그와 교제한다. 너희 세계에서 그리고 너희 우주에 두루 활동하는 무한 영의 지능존재들과 관련하면서, 너희의 땅에서 머무름의 세부 일들을 처리해 간다.

 

지역우주들의 운명을 지배하는 창조주 또는 주권자 아들들은 낙원의 우주 아버지와 영원 아들 두 분의 자리에 있다. 이 우주 아들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경배의 찬미를 받고 그들 각자의 창조계에 두루 탄원하는 그들 백성들의 요청에 귀를 기울인다. 지역우주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모든 실제적 의도와 목적들에 대해 미가엘 아들이 하느님이시다. 그는 우주 아버지와 영원 아들의 지역우주 품성화(稟性化)이다. 무한 영은 우주 영(靈)들, 낙원 창조주 아들들의 행정적 그리고 창조적 동료들을 통하여 이 영역에 속한 자녀들과 품성적 접촉을 유지한다.

 

진지한 경배는 진화하는 혼의 지배 아래에서 그리고 연합된 생각조절자의 신성한 방향 지시 받음이 있었을 때, 인간 품성의 모든 힘들이 동원됨을 의미한다. 물질적 한계를 갖는 마음은 참된 경배의 실제 의미를 결코 깊이 의식하게 될 수 없다. 경배 경험의 실체에 대한 사람의 깨달음은 주로 그의 진화하는 불멸 혼의 발달 지위에 의해 결정된다. 혼의 영적 성장은 지적 자아-의식과는 전적으로 독립하여 일어난다.

 

경배 경험은 합일을 약속하는 조절자가 인간 혼의 하느님을 찾는 필사자 마음과 하느님을 계시하는 불멸 조절자의 공동창조의 형언할 수 없는 염원들과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갈망들을 신성한 아버지에게 전달하려는 숭고한 시도이다. 그러므로 경배는, 그의 영화(靈化)하는 자아가 연합된 영의 안내를 따라, 우주 아버지의 신앙 자녀로서 하느님과 교통(交通)하려는 시도에 물질적 마음이 동의하는 행위이다. 필사자 마음은 경배에 동의하며 불멸 혼은 경배를 갈망하고 일으키며 신성한 조절자 현존은 필사자 마음과 진화하는 불멸 혼을 대신하여 그러한 경배를 지휘한다. 참된 경배는, 결국에는 네 가지 조화우주에서 실현되는 영화(靈化) 자아의 경험이 된다. 지적, 모론시아적, 영적, 그리고 품성적 차원들 - 마음, 혼 그리고 영의 인식 그리고 품성 안에서의 그들의 통합 - 에서 실현되는 경험이 된다.

 

4. 종교에서의 하느님

 

진화하는 종교들의 도덕은 하느님 탐구에 있어서 두려움이라는 원동력에 의해 사람들을 앞으로 몰아간다. 계시의 종교들은 사랑의 하느님을 찾도록 사람들을 유도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그처럼 되기를 열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는 단순히 "절대적 의존"과 "생존의 보장"이라는 소극적인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성 봉사에 근거를 두는 신성 달성의 살아있고 역동적인 경험이다.

 

참된 종교의 크고 즉각적인 봉사는 인간 경험 속에서의 영속하는 합일, 영존하는 평화와 깊은 확신의 수립이다. 원시인에게 있어서는, 심지어 다신교(多神敎) 조차도 신(神)에 대한 진화적 개념의 상대적 통합이다. 다신교는 발달 중인 유일신교이다. 머지않아서, 하느님은 가치들의 실체, 의미들의 본체, 그리고 진리의 생명으로서 이해되도록 예정되어 있다.

 

하느님은 운명의 결정자일 뿐만 아니라 그는 사람의 영원한 목적지이다. 인간의 모든 비종교적 활동들은 우주를 자아의 왜곡된 봉사에 맞추려고 모색한다. 참으로 종교적인 개인은 자아를 우주와 동일시하고 그 다음에는 합일된 이 자아의 행위들을, 인간이든지 초인간이든지, 동료 존재들의 우주 가족에 대한 봉사에 바치려고 모색한다.

 

철학과 예술의 권역들은 인간 자아의 비종교적 활동과 종교적 활동 사이에 있다. 예술과 철학을 통하여, 물질적- 마음을 - 가진 사람은 영원한 의미의 영적 실체와 그리고 우주 가치에 대한 깊은 사색으로 유인된다.

 

모든 종교는 신(神)에 대한 경배와 인간 구원에 대한 교리를 가르친다. 불교는 고해로부터의 구원, 끝남이 없는 평화를 약속하며 유대교는 어려움들로부터의 구원, 정의(正義)에 근거를 둔 번영을 약속하며 그리스 종교는 아름다움의 실현으로, 부조화, 추함으로부터의 구원을 약속하며 기독교는 죄로부터의 구원, 거룩함을 약속하며 회교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가혹한 도덕기준들로 부터의 해방을 제공한다. 예수의 종교는 자아로부터의 구원, 시간 속에서의 그리고 영원 속에서의 창조체 고립이라는 악으로부터의 해방이다.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선(善)에 기초하였으며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에 기초하였으며 두 종교가 모두 진리를 추구하였다. 예수는 사랑의 하느님을 계시하였고, 사랑은 진리, 아름다움 그리고 선(善)의 모든 것을 망라한다.

 

조로아스터 교도들은 도덕의 종교를 가졌으며 힌두인 들은 형이상학(形而上學)의 종교를 가졌으며 유교도들은 윤리의 종교를 가졌다. 예수는 봉사의 종교를 실천하였다. 이 모든 종교들은 예수의 종교에 접근하기에 유효한 가치를 그 안에 갖고 있다. 종교는 인간 경험 속에서 선하고 아름답고 그리고 진실한 그 모든 것의 영적 통합의 실체가 되도록 예정되어 있다.

 


그리스 종교는 "너 자신을 알라"는 표어를 가졌으며 히브리인들은 "하느님을 알라"는 그들의 가르침에 중심을 두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목표로 하는 복음을 전파하였다. 예수는 "하느님을 알고, 너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인 것을 알라"는 복된 소식을 선포하였다. 종교의 목적에서 서로 다른 이러한 개념들이 다양한 생활환경 속에서의 개인의 태도를 결정하며 그리고 그의 개인적 기도 습관의 본성과 경배의 깊이를 예시한다. 어떤 종교든지 그 영적 지위는 그 기도의 본질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반(半)인간이고 질투하는 하느님에 대한 개념은 다신교와 숭고한 유일신교 사이의 필연적 과도기이다. 드높여진 신인동성동형론(神人同性同型論)은 순수하게 진화 종교의 최고 달성 차원 이다. 기독교는 신인동성동형 개념을, 인간의 관념으로부터,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라는 인물의 초월적이고 신성한 개념으로 높여놓았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신인동성동형이다.

 

하느님에 대한 기독교 개념은 분리된 세 가르침들을 병합하려는 시도이다:


1. 히브리 개념 - 도덕적 가치의 옹호자로서의 하느님, 정의(正義)로운 하느님.


2. 그리스 개념 - 통합자로서의 하느님, 지혜의 하느님.


3. 예수의 개념 - 살아 계시는 친구로서의 하나님, 사랑하는 아버지, 신성한 현존.

 

그러므로 혼합된 기독교 신학이 일관성을 달성하는 데 큰 어려움에 부딪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이 어려움은, 초기 기독교의 교리들이 일반적으로,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나사렛의 예수, 그리고 타르수스의 바울, 서로 다른 이 세 사람들 각자의 개인적 종교적 경험에 기초를 두었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악화되어있다.

 

예수의 종교적 삶을 연구할 때, 그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라. 그의 죄 없음보다는 그의 정의(正義), 그의 사랑스러운 봉사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라. 예수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에 대해 히브리 개념 속에 계시된 수동적 사랑을, 모든 개인의, 심지어 잘못을 범한 자에게도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더 높은 능동적이고 창조체를-사랑하는 애정으로 올려놓았다.

 

5. 하느님에 대한 의식

 

도덕은 자아-의식의 이성에 그 기원이 있다. 그것은 초 동물적이지만 전적으로 진화적이다. 인간 진화는 조절자들을 증여하기까지 그리고 진리의 영이 부어지기까지, 선행되는 모든 자질들을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 속에 포옹한다. 그러나 도덕 차원의 달성은 사람을 필사 삶에서의 실제 투쟁으로부터 해방하지 않는다. 사람의 물리적 환경은 실존(實存)을 위한 싸움을 수반하며 사회적 상황들은 윤리적 조정을 필요로 하며 도덕적 상태는 최고의 이성 영역에서 선택을 하도록 요구하며 영적 경험은(하느님을 깨달은) 사람이 그를 발견하고 그와 같이 되기를 진지하게 분투하기를 요구한다.

 

종교는 과학의 사실들, 사회의 책무, 철학의 가정, 또는 도덕의 암시적 의무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 종교는 삶의 환경에 대한 인간 응답의 독립된 영역이고 그리고 도덕 이후 인간 발전의 모든 단계들에서 어김없이 나타난다. 종교는 가치들을 실현하고 우주 동료관계를 즐기는 네 차원들: 자아- 보존의 물리적 또는 물질적 차원, 동료관계의 사회적 또는 감정적 차원, 이성의 도덕적 또는 의무적 차원, 신성한 경배를 통한 우주 동료관계 의식의 영적 차원, 이 네 가지 모두에 골고루 스며들 수 있다.

 

사실을 추구하는 과학자는 하느님을 최초의 원인, 기세의 하느님이라고 생각한다. 감정적인 예술가는 하느님을 아름다움의 이상(理想), 미학(美學)의 하느님으로 이해한다. 추론하는 철학자는 때로 우주적 합일의 하느님으로 가정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심지어는 범신론적 신으로 가정한다. 신앙을 가진 종교가는 생존을 돌보는 하느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 사랑의 하느님을 믿는다.

 

도덕적 행위는 진화종교와 계시 종교의 일부분에 항상 선행되지만, 그러나 종교 경험 전체보다는 선행되지 않는다. 사회적 봉사는 도덕적 사고(思考)와 종교적 생활의 결과이다. 도덕은 생물학적으로 종교적 경험의 더 높은 영적 차원으로 이끌지 않는다. 추상적인 아름다움의 찬미는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며 자연계를 드높여 받드는 것이나 합일을 공경하는 것도 또한 하느님에 대한 경배가 아니다.

 

진화적 종교는, 사람을 조절자 증여와 진리의 영의 오심을 포함하여, 계시 종교가 수용 가능한 차원으로 높여주는, 과학과 예술과 철학의 모체이다. 인간 실재(實在)에 대한 진화적 풍경은, 매우 다른 종교의 본질특성, 하나는 진화적이고 생물학적이고 다른 하나는 계시적이고 주기적이긴 해도, 종교로 시작하고 종교로 끝난다. 그리하여, 종교는 사람에게 통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한편, 그것은 또한 선택적이기도 하다. 사람은 자신의 뜻에 반대하면서 종교적일 이유는 없다.

 

종교적 경험은, 본질적으로 영적이기 때문에, 물질적 마음에 의해서는 결코 충만하게 납득될 수 없다. 그래서 신학의 기능이나 종교의 심리학으로도 이해될 수 없다. 하느님에 관한 인간 실현의 본질적 교리는 유한한 납득력 안에서 하나의 역설을 낳는다. 인간의 논리와 유한한 이성이, 내주하는 하나님이며, 각 개인의 일부분인, 신성한 내재의 개념을, 우주들의 우주에 대한 신성한 지배인 하느님의 초월성 관념과 조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 두 가지 신(神)에 대한 본질적 개념은, 지능적 경배를 증명해주기 위한 신앙 - 파악에서의 품성적 하느님의 초월성 개념에서, 그리고 품성 생존의 소망을 유효하게 하기 위한 하느님 단편이 내주하는 현존의 실현 안에서, 합일되어야만 한다. 종교의 난제들과 역설들은, 종교의 실체들이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필사 수용력을 철저히 벗어난다는 사실속에 선천적으로 들어 있다.

 

필사사람은 그의 땅에서의 일시 머무르는 세월 동안에도 종교적 경험에서 세 가지 큰 만족감을 획득한다.

 

1. 지적으로 그는 더욱 합일된 인간 의식의 만족감을 얻는다.

 

2. 철학적으로 그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자신의 이상(理想)의 실체화를 즐긴다.

 

3. 영적으로 그는 참된 경배의 영적 만족 안에서, 신성한 동행자 신분에 대한 경험 안에서 자라난다.

 

하느님-의식은, 그것이 영역의 진화하는 필사자에 의해 경험되듯이, 변화하는 세 요소들, 실체 실현의 서로 다른 세 차원들로 이루어진다. 첫번째로는 마음 의식 - 하느님관념에 대한 이해 - 이 있다. 다음에는 혼 의식 - 하느님의 이상(理想)에 대한 실현 - 이 따라온다. 마지막으로는, 영 의식 - 하느님의 영 실체에 대한 실현  - 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성한 실현의 이 요소들의 통합에 의하여, 아무리 불완전 하더라도, 필사 품성은, 하느님의 품성에 대한 실현과 함께 모든 의식 차원들에 항상 널리 퍼진다. 최종의 무리단에 도달한 그 필사자들에게, 이 모든 것은 때가 되면 최극위(最極位) 하느님에 대한 실현으로 이끌 것이고, 그 다음에는 낙원 아버지의 아(亞) 절대 초(超)의식의 어떤 위상인 궁극위(窮極位) 하느님 실현으로 결과로서 생기어질 것이다.

 

하느님-의식 경험은 대대로 변함없이 같지만, 인간 지식에서 진보하는 각 신(新)시대마다 하느님에 대한 철학적 개념과 신학적 정의(正義)는 반드시 변한다. 종교적 의식인 하느님을 아는 것은 우주적 실체이다. 그러나 종교적 경험이 얼마나 효력이 있든지 (실제) 간에, 그것은 지능적 비평과 그리고 합당한 철학적 해석에 기꺼이 자신을 종속화 시켜야 한다. 인간 경험의 전체성 속에서 동떨어진 어떤 것이 되도록 추구해서는 안 된다.

 

품성의 영원한 생존은, 그의 결정이 불멸 혼의 생존 잠재를 정하는, 필사자 마음의 선택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마음이 하느님을 믿고 혼이 하느님을 알 때, 그리고 돌보는 조절자와 함께 그들 모두가 하느님을 원할 때, 생존이 보증된다. 지능의 한계, 교육의 부족, 문화의 박탈, 사회 지위의 열악, 그리고 심지어는 교육적, 문화적, 그리고 사회적 이점이 불행하게 부족됨으로 유래되는 도덕의 인간 기준의 열등함 조차도, 그렇게 불행하고 인간으로의 장애가 있어도 믿음을 가진 개인 속에 있는 신성한 영의 현존을 무효로 만들 수 없다. 신비 감시자의 내주가 불멸 혼의 성장 그리고 생존의 잠재의 시초를 이루고, 가능성을 보장한다.

 

출산에 대한 필사 부모의 능력은 그들의 교육적, 문화적, 사회적, 또는 경제적 지위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 자연적 환경 아래에서 어버이의 요소결합은 자손을 낳기에 매우 충분하다. 옳고 그름을 식별하고 신성한 조절자와의 결합으로, 하느님을 경배하는 수용력을 소유한 인간 마음이, 만일 영(靈)- 부여 받은 개인이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와 같이 되기를 진지하게 갈망한다면, 만일 정직하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로 결정한다면, 생존되는 본질특성을 가진 불멸(不滅) 혼의 생산을 시작하고 돌보기 위해 그 필사자가 필요한 것의 전부이다.

 

6. 품성의 하느님

 

우주 아버지는 품성들의 하느님이다. 품성 지위의 가장 낮은 필사자 그리고 물질적 창조체로 부터 창조자 존엄이며 그리고 신성한 지위에 있는 가장 높은 품성체에 이르기까지, 우주 품성의 권역(權域)은 그 중심과 테두리를 우주 아버지 안에 둔다. 아버지 하느님은 모든 품성의 증여자인 동시에 보존자이다. 그리고 낙원 아버지는 마찬가지로 신성한 뜻을 행하기로 전심으로 선택한 모든 유한 품성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의 그 운명이다.

 

품성은 우주의 풀리지 않은 신비들 중 하나이다. 우리는 품성의 다양한 계층과 차원을 꾸미는데 들어가는 요소들의 적당한 개념들을 형성할 수는 있지만, 품성 자체의 실제 본성을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함께 모아져 있을 때, 인간품성을 위한 매체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을 뚜렷이 감지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유한 품성의 본성과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품성은 자아-의식인 최소로부터 하느님-인식인 최대에 걸쳐서 마음자질을 소유하는 모든 창조체들 안에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마음자질 자체만으로는 품성이 아니며, 또한 영도 아니고 물리적 에너지도 아니다. 품성은 물질, 마음, 그리고 영의 연합되고 합동된 에너지의 이 살아있는 체계 위에 아버지 하느님에 의해 배타적으로 증여되는, 조화우주 실체에 있는 그 본질특성과 그리고 가치이다. 뿐만 아니라 품성은 점진적으로 성취하는 것도 아니다. 품성은 물질적 또는 영적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어느 쪽도 품성이 있든지 또는 품성이 없든지 둘 중 하나이다. 품성적이 아닌 것은 낙원 아버지의 직접 활동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품성을 가진 차원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품성의 증여는 우주 아버지의 배타적 기능, 우주 아버지가 살아있는 에너지 체계에 대하여 상대적인 창조 의식의 속성과 그리고 그곳에 대한 자유의지 조정을 자질로서 부여하는, 그 살아있는 에너지 체계의 품성체구현(稟性化)이다. 아버지 하느님과 분리된 품성이 없으며, 어떤 품성도 아버지 하느님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인간 품성의 중심 핵(核), 절대조절자와 마찬가지로, 인간 자아신분의 토대가 되는 속성들은, 우주 아버지, 조화우주 사명활동으로서 그의 배타적 품성 권역 안에서 활동하는 이의 증여이다.

 

전(前)품성 지위의 조절자들은 필사 창조체들의 수많은 유형(類型)들 속에 내주하며, 동일한 이 존재들이, 필사 죽음을 품성체구현하여, 궁극적 영 달성의 잠재를 가지는 모론시아 창조체로 생존되도록 그렇게 보증한다. 이는, 품성 자질의 그러한 창조체 마음이, 품성이신 아버지의 전(前)품성 증여, 영원 하느님의 영 단편으로 내주되면, 이 유한 품성은, 신성의 그리고 영원의 잠재를 소유하고 그리고 궁극자와 동족(同族)의 운명을 열망하며, 잇달아 절대자의 실현을 향해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신성한 품성에 대한 수용력은 전(前)품성 조절자 안에 선천적으로 있다. 인간 품성에 대한 수용력은, 인간 존재의 조화우주-마음 자질 속에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필사사람의 경험적 품성은, 필사창조체의 물질적 생명 매체가 우주 아버지의 해방시키는 신성의 손길을 받고, 그래서 자아-의식으로, (상대적인) 자아- 결정으로, 그리고 자아- 창조적 품성으로 경험의 바다 위에 항해에 나서게 되기까지는, 실제적이고 기능적인 실체로서 목격되지 않는다. 물질적 자아는 진정한 그리고 분별불가한 품성이다.

 

물질적 자아는 품성과 정체성, 일시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 전(前)품성 영 조절자 역시 정체성, 영원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이 물질적 품성과 이 영 전(前)품성은, 불멸 혼이라는 생존되는 정체성 실재(實在)가 이루어지도록, 그들의 창조 속성들을 그렇게 연합시킬 수 있다.

 

그렇게 불멸 혼의 성장을 위해 준비해 왔고 그리고 선행(先行) 원인성에 절대 의존하는 족쇄로부터 사람의 내부 자아를 해방시켜 왔기에, 아버지는 옆으로 비켜 계신다. 사람이, 적어도 영원한 운명에 관계해서는, 원인성 응답의 족쇄로부터 그렇게 해방되어 왔고, 그리고 불멸 자아, 혼의 성장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져 왔으며, 선택하는 대로 자기 것이 되는 이 생존되고 그리고 영원한 자아의 창조를 원할 것인지 아니면 금할 것인지는, 이제 사람 자신에게 남아 있다. 넓은 우주들의 우주 전체에서 어떤 존재, 기세, 창조자, 혹은 행위수행자라도, 선택하고 있는 필사자 품성의 영원한 운명에 관하여, 선택의 영역 안에서 그것이 작용하는 한, 필사 자유의지의 절대적 주권에 조금도 간섭할 수 없다. 영원한 생존과 관계해서는, 하느님은 물질적이고 필사자 의지에 주권이 있음을 선포해 왔으며, 그 선포는 절대적이다.

 

창조체 품성의 증여는 선행(先行)되는 원인성에 대한 노예적 반응으로부터 상대적 해방을 수여하며, 그러한 모든 도덕적 존재들의 품성은, 진화적이든지 아니든지, 우주 아버지의 품성 속에 집중되어진다. 그들은 광대하고 우주적인 가족 계(界), 그리고 영원한 하느님의 형제적 순환회로를 이루는, 그 존재의 동족관계에 의해 그의 낙원 현존을 향하여 계속 끌어 당겨진다. 모든 품성 속에는 신성한 자발성인 동족관계가 있다.

 

우주들의 우주의 품성순환회로는 우주 아버지의 품성체 속에 집중되고 있으며, 낙원 아버지는 자아-의식 실재의 모든 차원의 모든 품성들을 품성적으로 의식하고, 품성으로 접촉한다. 그리고 전체 창조체의 이 품성 의식은 생각조절자들의 임무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모든 중력이 낙원 섬 안에서 순환회로화 되어있는 것처럼, 모든 마음은 공동행위자 안에 순환회로화 되어있고, 모든 영이 영원 아들 안에 순환회로화 되어있는 것처럼, 모든 품성은 우주 아버지의 품성적 현존 속에 순환회로화 되어있으며, 이 순환회로는 모든 품성들의 경배를, 기원적이고도 영원한 품성에게 어김없이 전한다.

 

조절자가 내주하지 않는 그 품성들의 경우에는, 선택-해방의 속성이 우주 아버지에 의해 역시 증여되어 있고, 그러한 품성체들은 신성한 사랑의 위대한 순환회로, 우주 아버지의 품성순환 회로 속에 마찬가지로 포옹되어 있다. 하느님은 모든 참된 품성들의 주권적 선택을 제공하신다. 어떤 품성 창조체도 영원한 모험여행 속으로 강요될 수 없다. 영원의 문은 자유의지 하느님의 자유의지 아들의 자유의지적 선택에만 응답해서 열린다.

 

지금까지 나는 시간의 자녀들에 대한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관계를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말하고 마치면서, 나는 하느님이 너희의 우주 아버지이심을, 그리고 너희는 모두 그의 행성 자녀들임을 반복해 말하는 것 이상으로, 더 해 줄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유버사의 신성한 조언자에 의한 우주 아버지에 대한 일련의 이야기들 중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이다.]


  

제 6 편   영원 아들

 

영원 아들은 우주 아버지의 "첫 번째" 품성적이자 절대 개념에 대한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품성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때마다 그리고 방법마다, 그는 언제나 그러하였고, 지금도 그러하고, 또 언제나 그러할 살아 계신 이이며 그리고 신성한 말씀인, 그의 영원 아들을 통하여 행하신다. 그리고 이 영원 아들은, 품성적 현존을 즉각적으로 감싸는, 영원한 우주 아버지와 연합하면서, 만물의 중심에 거(居)한다.

 

우리들은 인간지능의 생각 통로로 가는 접근경로를 얻기 위하여 하느님의 "첫 번째" 생각을 이야기하고 그리고 영원 아들의 불가능한 시간기원에 대하여 언급한다. 이러한 언어의 왜곡은 시간에 매인 필사 창조체들의 마음과 접촉, 절충하려는 우리의 최선의 노력을 나타낸다. 순차적 감각에서, 우주 아버지에게 결코 첫 번째 생각이 있었을 수도 없고, 또한 영원 아들에게 결코 시작됨이 있었을 수도 없다. 그러나 나는 필사자들의 시간에 제한된 마음에게 그러한 사고의 상징들로서 영원의 실체들을 묘사하고 그리고 그러한 순차성의 시간개념으로 영원의 관계성을 나타내라는 지시를 받았다.

 

영원 아들은, 신성한 실체, 분별불가의 영, 그리고 절대 품성에 대한 낙원 아버지의 우주적이고 무한한 개념의 영적 품성체구현이다. 그리고 이로서, 아들은 우주 아버지의 창조자 정체성(正體性)에 대한 신성한 계시를 조성한다. 아들의 완전 품성은, 아버지가 실제로 영적이고, 의지적이며, 목적이 있으며, 그리고 품성적인 모든 의미와 가치의 영원하고 우주적인 근원임을 드러낸다.

 

시간의 유한한 마음들이 낙원 삼위일체의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들의 관계에 대하여 다소 순차적 개념을 형성할 수 있게 하려는 노력으로, 우리는 "아버지의 첫 번째 품성적, 우주적, 그리고 무한한 개념"으로 참조하는 것처럼 그렇게 허락된 개념을 사용한다. 신(神)들의 영원한 관계에 대한 어떤 적절한 관념도 인간 마음에게 전달하는 일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용어들을 씀으로써 그렇게 뒤이어 오는 시대에서 이러한 영원한 존재들의 관계에 대한 어느 관념의 얼마큼을 유한 마음에게 제공할 것이다. 우리는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솟았다고 믿는다. 우리는 두 분 모두 분별불가적으로 영원하다고 배웠다. 그러므로 어떤 시간 창조체도, 아버지로부터 유래되었고, 그럼에도 여전히 아버지 자신과 동등하게 영원한, 한 아들의 이 신비를, 영원토록 충만하게 이해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1. 영원 아들의 정체성

 

영원 아들은 하느님의 기원적이고도 오직 하나 낳은 아들이다. 그는 아들 하느님이시고, 신(神)의 둘째 품성체이시며, 만물의 연합 창조자이시다. 아버지가 첫째 위대한 근원이며 중심인 것처럼, 영원 아들은 둘째 위대한 근원이며 중심이다.

 

영원 아들은 우주들의 우주의 영적 정부의 신성한 관리자이며 영적 중심이다. 우주 아버지는 첫째로 창조자이시고, 그 다음으로는 조정자이시다. 영원 아들은 첫째로 공동창조자이시고, 그 다음으로는 영적 관리자이시다. "하느님은 영이시며," 아들은 영의 품성적 계시이다. 첫째 근원이며 중심은 의지적 절대자이며 둘째 근원이며 중심은 품성 절대자이다.

 

우주 아버지는, 아들과 또는 아들의 합동 활동과 공동으로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창조자로서 몸소 기능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의 저자가 다음과 같이 썼던 것이 영원 아들에 관하여 참조했었던 것이라면, 그는 진리를 말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있었으며, 그 말씀은 곧 하느님이셨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만들어졌고, 그가 없이 만들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영원 아들의 한 아들이 유란시아에 나타났을 때, 인간 형태로 있는 이 신성한 존재와 형제처럼 지냈던 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바 있고, 우리들의 눈으로 본바 있으며, 우리들이 바라본바 있고, 그리고 심지어 생명의 말씀까지도 우리의 손으로 만져본바 있던, 처음부터 계신 그 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기원아들이 진실로 그러하였던 것과 똑같이, 이 증여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왔으니 그의 땅에서의 기도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내 비추어졌다: "그리고 이제, 오, 아버지시여, 이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당신과 함께 했던 영광과, 당신의 자신으로 저를 영광되게 하소서."

 

영원 아들은 여러 다른 우주에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우주에서는 합동 근원, 공동창조주, 그리고 연합절대자로 알려져 있다. 초우주 본부인 유버사에서 우리는 이 아들을 합동 영 중심, 그리고 영원한 영 관리자라고 나타낸다. 너희 지역우주의 본부인 구원자별에서는, 이 아들이 둘째 영원근원이며 중심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멜기세덱들은, 그를 아들 중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창조체가 거주하는 구체들로 이루어진 너희 체계에서는 아니지만, 너희 세계에서는 이 기원 아들이, 유란시아의 필사 종족에게 스스로를 증여한 네바돈의 미가엘, 합동창조주 아들과 혼동되어 왔다.

 

낙원 아들 중 누구든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적절하게 불릴 수 있겠지만, 둘째 근원이며 중심이고, 우주 아버지와 함께 완전성과 힘의 중앙우주의 공동창조자이면서 그리고 무한 신(神)들로부터 솟아난 모든 다른 신성한 아들의 공동창조자인, 이 기원 아들을 지칭하기 위하여 "영원 아들" 이라는 명칭을 항상 예비해 두는 습관이 우리에게 있다.

 

2. 영원 아들의 본성

 

영원 아들은 우주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변함이 없으시고 무한히 믿을 수 있다. 그는 바로 아버지와 똑 같이 영적이시며, 정말로 똑같이 제한됨이 없는 영이다. 낮은 기원인 너희에게는, 그가 우주 아버지보다 한발자국 더 너희에게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이 아들이 좀더 품성적으로 나타나 보일 것이다.

 

영원 아들은 영원한 하느님 말씀이시다. 그는 온통 하느님과 같으시며 사실, 영원 아들은 우주들의 우주에 품성으로 드러낸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영원 아들과 그리고 모든 합동 창조주 아들에 대한 이 말은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리고 영원토록 진실이다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본성에 있어서 아들은 온통 영 아버지와 같다. 우리가 우주 아버지를 경배할 때, 정말로 우리는 아들 하느님과 영 하느님을 동시에 경배한다. 아들 하느님은 아버지 하느님처럼 그렇게 본성에 있어서 신성하게 실재하며 그리고 영원하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무한하고 초월적인 정의(正義)를 소유할 뿐만 아니라, 아들은 또한 아버지의 모든 성격의 성스러움까지도 반영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완전성을 함께 나누며, 신성한 완전성에 도달하려는 저들의 영적 노력에 있는 모든 불완전성의 창조체들을 도와주는 책임도 함께 나눈다.

 

영원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신성의 성격과 영성(靈性)의 속성을 소유한다. 아들은 품성과 영에서 하느님의 절대성의 충만함이며, 그리고 이 아들은 이러한 본질특성을 우주들의 우주의 영적 정부에 대한 그의 품성적 경영에서 드러낸다.

 

하느님은, 참으로, 우주 영이시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 영 본성은 영원 아들의 신(神) 안에 초점화구현되고 품성체구현 되어있다. 아들 안에서, 모든 영적 특징들이 첫째 근원이며 중심의 보편성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분명하게 크게 증진되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의 영 본성을 아들과 함께 나누듯, 그들은 무한 영, 공동행위자와 더불어, 신성한 영을 마찬가지로 충분하고 남김없이 함께 나눈다.

 

아들이 우주 가치를 가진 전적으로 영적인 미(美)의 실현에 자신을 더욱 헌신 것으로 보이는 점을 제외하고는, 아버지와 아들은 진리의 사랑에서 그리고 미의 창조에서 동일하다. 신성한 선(善)에 있어서, 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아무런 차이점을 식별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그의 우주자녀들을 아버지로서 사랑하시며, 영원 아들은 모든 창조체들을 아버지로서 그리고 또 형제로서 바라본다.

 

3. 아버지 사랑의 사명활동

 

아들은 삼위일체의 공의와 정의(正義)를 나누어 가지지만, 그러나 이들 신성 특색들은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의 무한한 품성체구현에 의해 빛이 가려지고 있다 아들은 우주에게 신성한 사랑을 계시한 것이다. 하느님이 사랑인 것처럼, 아들은 자비이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지만, 그는 한 가지 추가적 방법으로 창조체들에게 자비를 보여 줄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아버지처럼 시원적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같은 아버지의 영원 아들이기에, 우주 아버지의 다른 모든 아들들의 아들관계 경험을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영원 아들은 모든 창조체에게 위대한 자비의 사명활동자이시다. 자비는 아들의 영 성격의 본질이다. 영원 아들의 통치는, 그것들이 둘째 근원이며 중심의 영 순환회로들을 건너 나아갈 때, 자비의 격조로 맞추어진다.

 

영원 아들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그것의 신성한 근원, 사랑이신 아버지를 너희가 먼저 알아차려야 하며, 그 다음에는, 무한 영(靈)과 그리고 그의 거의 한없는 사명활동하는 품성무리의, 멀리-퍼지는 사명활동에서 이 무한한 애정이 펼쳐지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영원 아들의 사명활동은 우주들의 우주에게 사랑의 하느님을 계시하는 데에 바쳐진다. 이 신성한 아들은 그의 인자한 아버지가 미천한 창조체들을 사랑하도록 그리고 시간의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설득하려 애쓰는 미천한 과업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 아버지에게 공간의 물질세계에 있는 그의 낮은 창조체들을 위하여 자비를 보여주시도록 간청하는 모습으로 영원 아들을 그려보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하느님에 대한 그러한 개념은 원시적이고도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오히려 너희는, 하느님의 아들들의 모든 자비로운 직무가, 우주의 사랑과 무한한 동정을 가진 아버지 진심의 직접 계시임을 깨달아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이 가진 자비의 실재이자 영원한 근원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아들은 자비이시다. 자비는 적용된 사랑, 그의 영원 아들의 품성체 안에서 행하여 지는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우주 아들의 사랑도 마찬가지로 우주적이다. 사랑이 성(性)의 구별이 있는 행성에서 이해되는 경우, 하느님의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에 좀더 견주어 볼 만하고 반면, 영원 아들의 사랑은 어머니의 애정에 좀더 비슷하다. 이러한 설명은 정말로 미숙하기 그지없지만, 나는 그것들을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사랑 사이에, 그 신성한 내용이 아닌 본질특성과 표현의 기법에서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인간 마음에게 전했으면 하는 희망에서 사용한다.

 

4. 영원 아들의 속성

 

영원 아들은 조화우주 실체의 영 차원 동기가 된다. 아들의 영적 힘은 모든 우주 실체성에 대한 관계에서 절대적이다. 그는 영 중력(重力)에 대한 자신의 절대적인 파악을 통하여 실제화 된 모든 영 실체에 대해 그리고 차별화되지 않은 모든 영 에너지의 상호연합에 대해 완전한 조정을 행사한다. 순수하고 단편화되지 않은 모든 영과 모든 영적 존재와 가치는 시원 낙원 아들의 그 무한의 끌어내는 힘에 응답을 보인다. 그리고 만일 영원한 미래가 제한됨이 없는 우주의 출현을 목격하는 경우, 기원 아들의 영 중력과 영의 힘은, 그러한 한없는 창조에 대한 영적 조정과 효율적 관리에 온통 적합하다는 것이 발견될 것이다.

 

아들은 영적 영역 안에서만 전능(全能)하시다. 우주관리의 영원한 섭리에서, 기능의 낭비적이고 불필요한 반복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신(神)들은 우주사명활동에서 쓸모없이 중복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기원 아들의 전재(全在)는 우주들의 우주의 영적 합일을 구성한다. 모든 창조의 영적 응집(合着)은 도처에 있는 영원 아들의 신성한 영의 활발한 현존에 달려있다. 우리가 아버지의 영적인 현존을 그릴 때, 우리의 사고(思考) 속에서 그것을 영원 아들의 영적 현존과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아버지의 영은 아들의 영 속에 영원히 거(居)하신다.

 

아버지는 영적으로 전재(全在)하는 것이 틀림없지만, 그러한 전재(全在)함은 영원 아들의 모든 곳에서의 영 활동과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우리는 이원적(二元的)인 영적 본성을 갖는 아버지-아들 현존의 모든 상황들에 있어서 아들의 영이 아버지의 영과 합동한다고 믿는다.

 

품성과의 접촉에 있어서, 아버지는 품성순환회로 안에서 행하신다. 그의 영적 창조와의 품성적이면서도 탐지 가능한 접촉에 있어서, 그는 자신의 신(神)의 전체성의 단편들 속에서 나타나며, 아버지의 이 단편들은 그들이 우주들 안에서 언제 어느 곳에 나타나든지 단독의, 독특한, 그리고 배타적인 기능을 갖는다. 그러한 모든 경우에도 아들의 영은 우주 아버지의 단편화된 현존의 영적 기능과 합동한다.

 

영원 아들은 영적으로 전재(全在)하신다. 영원 아들의 영은 가장 분명하게 너희와 함께 하시고 너희 둘레에 계시지만, 그러나 신비 감시자처럼 너희 안에 그리고 너희의 일부로서 있는 것은 아니다. 내주하는 아버지의 단편은 인간 마음을 점진적으로 신성한 태도에 맞추어 조절하는데, 그리하여 그렇게 상승하는 마음은 둘째 근원이며 중심의 전능한 영-중력 순환회로의 영적으로 끌어내는 힘에 점점 더 응답하게 된다.

 

기원 아들은 우주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자아- 의식을 가진다. 지혜에 있어서 아들은 아버지와 충만하게 동일하시다. 지식의 영역, 전지(全知)함에 있어서, 우리는 첫째 근원과 둘째 근원을 구별할 수가 없다. 아버지처럼 아들도 모든 것을 아신다. 아들은 어떠한 우주 결과에도 결코 놀라지 않는다. 그는 시작에서 끝을 이해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우주들의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영들과 영성화 된 존재들의 숫자와 소재(所在)를 정말로 다 아신다. 아들은 자신의 전재(全在)하는 영으로 만물을 아실뿐만 아니라, 아버지 그리고 공동행위자와 동등하게, 최극존재의 방대한 반영성 지능을 충만하게 인지하시는데, 그 지능은 일곱 초우주에 속한 모든 세계들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언제나 아신다. 그리고 낙원아들이 전지(全知)하신 또 다른 방법도 있다.

 

사랑이시고, 자비롭고 돌보시는 영적품성으로서의 영원 아들은, 온통 그리고 무한하게 우주 아버지와 동일하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 낮은 영역의 상승하는 존재들과의 그 모든 자비롭고 애정 어린 품성적 접촉에 있어서, 영원 아들은 진화하는 시간 세계에 그렇게도 자주 자신들을 수여하는 지역우주들의 낙원 아들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렇게 친절하시고 자상하시며, 그렇게 인내하시고 참을성이 있으시다.

 

영원 아들의 속성에 관하여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 언급했던 예외들과 함께, 아들 하느님의 속성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납득하기 위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영적 속성을 연구하는 것만이 오직 필요하다.

 

5. 영원 아들의 한계

 

영원 아들은 물리적 권역에서 품성적으로 기능할 수 없으며, 공동행위자를 통하지 않고는, 창조체에게 마음 사명활동의 차원에서 기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자격조건들은, 영적인 전지, 전재(全在), 그리고 전능이라는 모든 신성한 속성을 충만하게 자유롭게 행사함에 있어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영원 아들을 달리 제한하지는 않는다.

 

영원 아들은 신(神) 절대자의 무한 속에 선천적으로 들어있는 영 잠재를 몸소 가득 퍼지게 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잠재들이 실제화 되면서, 그것들은 아들의 영-중력 순환회로의 전능한 파악으로 들어온다.

 

품성은 우주 아버지의 배타적 선물이다. 영원 아들은 품성이 아버지로부터 얻은 것임을 알고, 아들은 오직 아버지 없이 품성을 증여하지 않는다. 아들은 광대한 영 무리를 기원시키지만, 그러한 파생체들은 품성들이 아니다. 아들이 품성을 창조할 때에는, 아버지와 함께 하든지 혹은 그러한 관계에 있어서 아버지를 대신할 수도 있는, 공동 창조주와 함께 한다. 그와 같이 영원 아들은 품성들의 공동창조자이지만, 그는 어떤 존재에게도 품성을 증여하지 않으며, 그리고 혼자서는 결코 품성적 존재를 창조하지 않으신다. 아무튼, 행위에 대한 이러한 제한은, 품성적 - 실체 - 이외의 일부 또는 모든 다른 유형들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아들에게서 빼앗지는 않는다.

 

영원 아들은 창조자 특권을 물려주는 데에서 제한되어 있다. 아버지는 기원 아들을 영원하게 하면서, 창조 속성을 가진 추가 아들들을 낳는 신성한 행위에, 계속하여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힘과 특권을 그에게 부여하셨고,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해왔고, 지금도 하신다. 그러나 이 합동 아들들이 나오게 되면, 창조자로서의 특권은 더 이상 물려질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영원 아들은 창조자로서의 힘을 오직 최초의, 또는 직접적 품성체구현에만 물려준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창조주 아들을 품성체구현하려고 결합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한다. 그러나 이렇게 실제로 출현된 창조주 아들은, 가장 높은 지역우주 아들 안에서, 창조주 아들의 창조 속성의 매우 제한된 반영이 나타나 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하여 창조할지 모르는 다양한 계층의 아들에게 창조자신분의 특권을 결코 물려주거나 또는 위임할 수 없다.

 

영원 아들은, 무한하고 배타적으로 품성적인 존재로서, 우주 아버지나 그리고 무한 영이 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본성을 단편화시킬 수 없으며, 그의 자아신분의 개별화된 부분을 다른 실존개체나 품성에게 분배할 수도 없고 증여할 수도 없다. 그러나 아들은 모든 창조체를 적시도록, 제한됨이 없는 영으로서 자신을 증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으며 모든 영 품성과 영적 실체를 자신에게로 끊임없이 끌어들인다.

 

영원 아들이 모든 창조체에게 영 아버지의 품성적 묘사임을 늘 기억하라. 아들은 품성적이고 신(神) 감각에서 오직 품성적 일뿐이다. 그러한 신성하고 절대적인 품성은 해체될 수도 없고 단편화될 수도 없다. 아버지 하느님과 영 하느님은 참으로 품성적이시지만, 그들은 그러한 신(神) 품성 존재일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것이기도 하다.

 

비록 영원 아들이 생각조절자 증여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는 영원한 과거에 아버지가 생각조절자 증여를 투영하면서 아들에게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필사자 사람을 만들자"라고 제안하셨을 때, 그 계획을 승인하시고 끝없는 협동을 서약하면서, 우주 아버지와의 협의에 참가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영 단편이 너희 속에 거(居)하는 것과 같이, 아들의 영 현존이 너희를 감싸며, 동시에 이 둘은 너희의 영적 전진을 위하여 영원히 하나로서 일하신다.

 

6. 영 마음

 

영원 아들은 영이시고 마음을 가졌지만, 필사자 마음이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나 영은 아니다. 필사자 사람은 마음을 유한의, 조화우주의, 물질적인 그리고 개인적 차원에서 알아차린다. 또한 사람은 하급-품성적(동물적) 차원에서 기능하는 살아있는 유기체 안의 마음 현상도 지켜보지만, 그러나 초물질적 존재와 그리고 배타적 영 품성의 한 부분으로서 연합될 때, 마음의 본성을 파악하는 일은 그에게 어려운 것이다. 아무튼, 마음은 그것이 존재의 영 차원을 언급할 때와, 그리고 그것이 지능존재의 영 기능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될 때는, 다르게 정의되어야만 한다. 영과 직접적으로 결연을 맺은 그러한 종류의 마음은, 영과 물질을 합동시키는 마음이나 혹은 오직 물질과 결연을 맺은 마음 그 어느 것으로도 필적할 수 없다.

 

영은 정체성의 다양한 위상들을 항상 의식하고, 유념하고, 그리고 갖고 있다. 어떤 위상에서 마음이 없다면, 영 존재들의 동료성에는 아무런 영적 의식이 없을 것이다. 마음에 상당하는 것, 알고 그리고 알려지는 능력은 신(神)에게 타고난 것이다. 신(神)은 품성적, 전(前)품성적, 초(超)품성적, 또는 비(非)품성적일 수도 있으나, 신(神)에게 결코 마음이 없을 수 없으니, 다시 말하자면, 비슷한 실존개체들, 존재들, 혹은 품성들과 최소한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결코 없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영원 아들의 마음은 아버지의 그것과 같지만, 그러나 우주에 있는 어느 다른 마음과도 같지 않으며, 아버지의 마음과 함께 그것은 공동 창조주의 다양하고 멀리- 퍼지는 마음들의 조상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절대적 마음의 원조(元祖)인 지성은, 아마도 생각 조절자의 전(前)마음 속에서 가장 잘 설명되는데, 이는, 아버지의 이 단편들이 전적으로 공동 행위자의 마음 순환회로밖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전(前)마음의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알려진 그대로 알고 있고 그들은 인간의 사고와 동등한 것을 누린다.

 

영원 아들은 온전히 영(靈)적 이시며 사람은 거의 온통 물질적이다. 따라서 영원 아들의 영 품성, 낙원을 에워 도는 그의 일곱 개의 영적 구체들, 그리고 낙원 아들의 비품성적 창조계 본성에 관한 많은 것들은, 너희가 네바돈 지역우주에서 모론시아 상승을 완성을 마치고 나서 너의 영 지위 달성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너희가 초우주를 지나 하보나에 이르면서, 너희가 "영의 마음"-영적 통찰력- 자질을 부여 받음에 따라, 영-숨겨진 비밀들 대부분이 분명해질 것이다.

 

7. 영원 아들의 품성

 

영원 아들은, 우주 아버지를 속박한 바로 그 분별불가적 품성으로부터 삼위일체화의 기법에 의해 탈출한, 그 무한한 품성이며, 그 덕분으로 그는 그 후로 늘 계속 창조주들과 창조체들의 늘- 팽창하는 그의 우주 위에 끝없는 풍부함으로 자신을 증여해 왔다. 아들은 절대 품성이시다. 하느님은 아버지 품성- 품성의 근원, 품성의 증여자, 품성의 원인- 이시다. 모든 품성적 존재는 기원 아들이 낙원 아버지로부터 그의 품성을 영원히 얻은 것과 같이, 우주 아버지로부터 품성을 얻는다.

 

낙원 아들의 품성은 절대이고, 순수하게 영적이며, 이 절대 품성은 또한, 우선은 공동행위자에 대한 아버지의 품성 증여의, 다음으로는, 멀리-퍼지는 우주에 두루 그의 수많은 창조체에 대한 품성 증여의, 신성하고 영원한 원형틀이다.

 

영원 아들은 진실로 자비로운 사명활동자이시고, 신성한 영이시며, 영적 힘이시고, 참 품성이시다. 아들은 우주에 현시된 하느님이 만드신 영적이고 품성적인 본성- 비품성적이고, 신성함을 벗어나고, 비(非)영적이고, 그리고 순수한 잠재적인 모든 것을 벗겨낸 첫째 근원이며 중심의 전체이자 본체-이다. 그러나 영원 아들의 숭고한 품성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말로써 인간 마음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주 아버지를 가려서 희미하게 이끄는 모든 것이, 거의 똑같은 영향력을 가지고, 영원 아들에 대한 개념적 인식을 막는다. 너희는 너희의 낙원 달성을 기다려야만 하며, 그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왜 유한한 마음이 납득하도록 이 절대 품성의 성격을 묘사할 수 없었는지, 납득하게 될 것이다.

 

8. 영원 아들의 실체화

 

품성의 정체성과 본성 그리고 기타 속성들을 살펴보면, 영원 아들은 충만한 동일함이고 완전한 보충함이며 그리고 우주 아버지의 영원한 짝이시다. 하느님이 우주 아버지라는 것과 같은 감각에서, 아들은 우주 어머니이시다. 그리고 우리들 모두는 신분이 높든 낮든 그들의 우주 가족을 이루고 있다.

 

아들의 성격을 올바르게 알기 위하여, 너희는 아버지의 신성한 성격에 대한 계시를 연구해야만 한다.  그들은 영원히 그리고 뗄 수 없는 하나이시다. 신성한 품성으로서, 그들은 비교적 낮은 계층의 지능존재에게는 실질적으로 분별될 수 없다. 신(神) 자신들의 창조적 활동 안에서 기원한 자들에게는, 그들을 따로 인식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중앙우주와 낙원에서 태어난 존재들은 아버지와 아들이 우주적 조정의 한 품성적 합일체일 뿐 아니라 우주 관리의 한정된 권역(權域) 안에서 기능하는 두 개의 분리된 품성임을 식별한다.

 

품성체로서의 너희는 우주 아버지와 영원 아들을 분리된 개별존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는 그들은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들의 관리에 있어서 그들은 너무도 서로 엮어지고 서로 상관되어 있어서, 그들 사이를 식별하는 것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주의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이 혼란스러운 상호연합 속에서 마주칠 때, 그들의 작용을 격리시키려 는 시도는 항상 유익하지 않다. 하느님은 창시(創始)하는 생각이고, 아들은 표현 풍부한 말씀임을 오로지 기억하여라. 각 지역우주에서는, 이 불가분성(不可分性)이, 창조주 아들의 신성 안에서 품성체구현 되어있고, 그는 천만 거주세계의 창조체들에게 아버지와 아들 두 분 모두를 상징한다.

 

영원 아들은 무한하시지만, 그러나 그의 낙원 아들들의 품성체를 통하여 그리고 무한 영의 참을성 있는 사명활동을 통하여 그에게 다가갈 수 있다. 낙원 아들들이 베푸는 증여 봉사와 무한 영의 창조체에 대한 사랑의 사명활동 없이는, 물질적으로 기원된 존재들이 영원 아들에게 도달할 희망은 거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말은 똑같이 참되다: 하느님을-의식하는 필사자는, 이 천상의 행위수행자들의 안내와 도움으로 확실하게 낙원에 도달할 것이며, 언젠가는 이 위엄 있는 아들들 중의 아들의 품성적 현존에 서게 될 것이다.

 

비록 영원 아들이 필사 품성이 달성하는 것의 원형틀이라 할지라도, 너희는 아버지와 영의 두 분 실체를 파악하기가 더 쉽다는 것을 발견할 것인데, 왜냐하면 아버지는 너희의 인간 품성의 실제 증여자이고, 무한 영은 너희의 필사자 마음의 절대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진보의 낙원 경로 속에서 너희가 상승함에 따라, 영원 아들의 품성이 너희에게 점점 더 실제가 될 것이고, 그의 무한하게 영적인 마음의 실체는 점진적으로 영성화 되어가는 너희의 마음에게 더 많이 식별될 수 있게 된다.

 

영원 아들에 대한 개념은 너희의 물질적 마음 또는 그 이후의 모론시아 마음속에서 결코 환히 빛날 수는 없다. 너희가 영성화되고 그리고 너희 영의 상승을 개시하기까지는, 영원 아들의 품성 이해는, 품성체 속에서 그리고 한 품성체로서, 한때 유란시아에 육신화되었고 사람들 중의 한 사람 으로서 살았던 분인, 낙원에서 기원된 창조주 아들 품성에 대한 너희 개념의 선명함과 동일해지기 시작한다.

 

너희 지역우주에 두루 인간에 의해 그 품성이 이해될 수 있는 창조주 아들 경험이, 낙원의 영원 아들에 대한 더욱 배타적 영적인,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성적인, 그 충만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너희의 무능력을 보상해 주어야만 한다. 너희가 오르본톤과 하보나를 통하여 진보할 때, 너희가 너희 지역우주의 창조주 아들에 대한 깊은 기억과 생생한 모습을 뒤로 하고 떠날 때, 떠나가는 이 물질적인 경험과 모론시아 경험은 낙원의 영원 아들에 대한 강화되는 이해와 계속 넓어지는 개념에 의하여 보상을 받을 것인데, 그의 실체와 친숙함은 너희가 낙원을 향하여 진보함에 따라 더욱 증대될 것이다.

 

영원 아들은 장대하고 영광스러운 품성이시다. 그처럼 무한한 존재의 품성의 실제성을 파악하는 것은 비록 필사이면서 그리고 물질적 마음의 힘이 미치지는 못하지만, 의심할 바 없이, 그는 하나의 품성체이시다. 나는 내가 말하는 바를 잘 알고 있다. 나는 거의 셀 수 없이 수많은 시간을 영원 아들의 신성한 현존 속에 섰었고, 그런 다음 그의 인자하신 권유를 실행하기 위하여 우주로의 여행을 떠나왔다.

 


제 7 편    영원 아들과 우주와의 관계

 

기원 아들은, 아버지의 영원한 목적이 진화하고 있는 우주의 현상들 안에서 그것들에 속한 다양한 집단들의 살아있는 존재들과 함께 진보적으로 펼쳐짐에 따라서, 이 목적의 영적인 측면을 집행하는 데에 항상 관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영원한 계획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지만, 낙원 아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아들은 그와 동격의 아들들 그리고 그들의 종속 아들들에게 자신의 가능한 모든 것들을 증여하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비슷하다. 그리고 아들은 그들의 공동 집행자인 무한 영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증여하는 아버지의 자아-분배 본성도 또한 공유하고 있다.

 

영 실체들의 유지자로서의 둘째 근원이며 중심은, 만물을 매우 훌륭하게 유지하는 낙원 섬의 영원한 평형추이다. 이와 같이, 첫째 근원이며 중심은 중앙 섬의 절묘한 원형틀들의 물질적 아름다움 안에서 그리고 영원 아들의 천상 품성의 영적 가치 안에서 영원히 계시된다.

 

영원 아들은 영 실체들 그리고 영적 존재들의 광대한 창조의 실질적 유지자이다. 영 세계는 아들의 기질, 품성적 행위이며, 영 본성의 비품성 실체들은 절대 아들의 완전한 품성의 뜻과 목적에 항상 응답한다.

 

그러나, 아들은 모든 영 품성들의 행위에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지지는 않는다. 품성적 창조체의 의지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우며, 따라서 그러한 의지적 존재들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자유의지의 영 세계가 영원 아들의 성격을 언제나 진정으로 대표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유란시아의 자연계도 낙원과 신(神)의 완전성과 불변성을 진정으로 계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나 천사의 자유의지의 행동을 어떻게 특징짓던지 간에, 모든 영 실체에 대한 아들의 우주 중력조정의 영원한 장악은 절대적으로 계속된다.

 

1. 영-중력 순환회로

 

하느님의 내재하심, 그의 전재, 전능, 그리고 전지에 대하여 가르쳐진 모든 것은, 영의 권역(權域)에서 아들에게도 똑같이 참이다. 모든 창조의 순수하고 우주적인 영 중력인, 배타적으로 영적인 이 순환회로는 낙원에 있는 둘째 근원이며 중심의 품성체에게로 직접 되돌아가도록 안내한다. 그는 참된 모든 영 가치들에 대한 항상- 현존하는 그리고 정확한 그 영적 장악의 조정과 작용을 주재한다. 그리하여 영원 아들은 절대적인 영적 주권을 행사한다. 그는 글자 그대로 모든 영 실체들과 영성화한 가치들을, 과거에도 그러하였듯이, 그의 손바닥 안에 담고 있다. 우주의 영 중력에 대한 조정이 우주의 영 주권이다.

 

영적인 것들에 대한 이 중력 조정은 시간과 공간에 독립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영 에너지는 전달과정에서 줄어들지 않는다. 영 중력은 시간 지연을 당하는 일이 결코 없으며, 또한 공간의 감축도 겪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이 전달되는 거리의 제곱에 따라 줄어들지 않으며 순수한 영 힘의 순환회로들은 물질적 창조의 크기에 의해 지체되지 않는다. 그리고 순수한 영 에너지로서의 시간과 공간의 이러한 초월은 영원 아들의 절대성안에 선천적이다. 그것은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반중력(反重力) 기세의 간섭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영 실체들은 그들의 질적 가치, 영 본성의 실제적 등급에 따라서 영적 중력의 중심의 당기는 힘에 응답한다. 영 본체(본질특성)는, 물리적 물질(양-量)의 조직된 에너지가 물리적 중력에 응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 중력에 응답한다. 영적 가치들과 영 기세들은 실제적이다. 품성의 관점에서 보면, 영은 창조의 혼이며 물질은 그림자와 같은 물리적 몸체이다.

 

영 중력의 반응들과 동요들은 한 개인이나 혹은 한 세계의 질(質)적 영적 지위, 영적 가치들의 내용과 언제든지 일치한다. 이 당기는 힘은 모든 우주 상황 또는 행성 조건 아래에서의 상호-그리고 내부-영 가치들에 대해 즉시 응답한다. 영적 실체가 우주 안에서 실재화 될 때마다, 이러한 변화는 영 중력의 재(再)조절을 즉각 그리고 순간적으로 필요로 한다. 그러한 새로운 영은 실제로 둘째 근원이며 중심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필사 인간이 영적으로 변화되는 존재가 되는 것과 똑 같이, 그는 영 중력의 중심이자 근원인, 영 아들에 도달할 것이다.

 

아들의 영적으로 당기는 힘은, 많은 아들관계의 낙원계층들에게 점차 적은 규모로서 선천적 이다. 이는 점차로 적은 창조 단위들에서 기능하는 영적 끌어당김의 지역 체계들이 절대 영-중력 순환회로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 중력의 이러한 하위-절대 초점화구현들은 시간과 공간의 창조주 품성들의 신성의 일부분이며, 최극존재의 출현하는 경험적 총괄과 상호 관련되어 있다.

 

영-중력의 당김과 응답은 우주들에서 전체로서 만이 아니라 개인들 그리고 개인들의 집단 사이에서도 작용한다. 어느 세계, 인종, 국가, 또는 개인들의 신앙 집단의 영적 품성들과 영성화(靈化) 된 품성들 가운데에는 영적 응집(合着)력이 있다. 영적으로 비슷한 기호나 열망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는 영 본성의 직접적인 끌어당김이 있다. 유사(類似) 영들이란 단어는 전적으로 비유적 표현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낙원의 물질적 중력과 마찬가지로, 영원 아들의 영적 중력도 절대적이다. 죄와 반란이 지역우주 순환회로들의 작용을 방해할 수도 있지만, 영원 아들의 영 중력을 중단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루시퍼의 반란은 거주세계들로 이루어진 너희 체계에 그리고 유란시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우리는 그 결과로 말미암은 너희 행성의 영적 격리가 영원 아들의 전재(全在)하는 영 또는 관련된 영 - 중력 순환회로의 현존과 기능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를 관찰하지 못한다.

 

광우주의 영-중력의 모든 반응들은 예측이 가능하다. 우리는 영원 아들의 전재(全在)하는 영의 모든 활동과 반응을 인식하며, 그것들이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람이 유한한 물리적 중력의 작용을 계산해 내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잘-알려진 법칙들에 따라, 우리도 영적 중력을 측정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다. 모든 영 사물들과 존재들 그리고 품성체들에 대한 아들의 영의 변함없는 응답이 있으며, 이 응답은 언제나 그러한 모든 영적 가치들의 실제성의 정도(실체의 질적인 정도)에 따른다.

 

그러나 영원 아들의 영적 현존의 바로 이러한 신뢰할 만하고 예측 가능한 기능 이외에, 그 반응을 예측할 수 없는 현상을 접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러한 현상들은 아마도 출현하는 영적 잠재 영역에서의 신(神) 절대자의 합동 활동을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영원 아들의 영 현존이 웅대하고 무한한 품성의 영향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품성체로서의 신(神) 절대자의 행위로 추측되는 것과 연합된 반응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품성 관점에서 그리고 품성체로서 본다면, 영원 아들과 신(神) 절대자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원 아들이 실질적인 영적 가치들의 권역을 지배하는 반면, 신(神) 절대자는 잠재적 영 가치들의 광대한 권역에 가득 퍼져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 본성 을 가진 모든 실재적 가치는 영원 아들의 중력 장악 안에 머물지만, 만약 잠재적이면, 겉으로 보기에 신(神) 절대자의 현존 안에 머무는 것처럼 보인다.

 

영은 신(神) 절대자의 잠재로부터 출현하는 것으로 보이며 진화하는 영은 최극자와 궁극자의 경험적이고 불완전한 장악 속에서 상호관련성을 발견하며 영은 결국에는 영원 아들의 영적 중력의 절대 장악 속에서 최종 운명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경험적 영의 순환주기로 보이지만, 존재적 영은 둘째 근원이며 중심의 무한 속에 선천적이다.

 

2. 영원 아들의 관리

 

낙원에서는 기원 아들의 현존과 그의 품성적 활동이 심오하며, 영적 감각에서 절대이다. 우리가 낙원으로부터 하보나를 거쳐 일곱 초우주들 영역 속으로 나갈수록, 우리는 영원 아들의 품성적 활동에 대해 점점 덜 감지하게 된다. 하보나- 이후 우주들에서는 영원 아들의 현존은, 최극자와 궁극자의 경험적 실체들에 의해 조건을 갖추고, 또한 신(神) 절대자의 제한됨이 없는 영 잠재와 합동을 이루면서, 낙원 아들들 안에서 품성체구현(稟性化) 된다. 중앙우주에서 기원적 아들의 품성적 활동은 영원한 창조의 절묘한 영적 조화 안에서 식별된다. 하보나는 너무나 완전하기 때문에 이 원형틀 우주의 영적 지위와 에너지 상태는 완전하고 영속적인 균형을 이룬다.

 

초우주에서는 아들이 직접 현존하거나 거주하지 않으며 이러한 창조계들에서 그는 단지 초월품성적 표상(表象)을 지속할 뿐이다. 아들의 이러한 영 현시는 품성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우주 아버지의 품성순환회로 속에 있지 않다. 우리는 이들을 규정하는데 초(超)품성이라는 말보다 더 좋은 용어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유한한 존재들이며 아(亞)절대도 아니고 절대도 아니다.

 

초우주들 안에서의 영원 아들의 관리는, 배타적으로 영적이고 초(超)품성적인데, 창조체 품성에 의해 식별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품성적 영향력의 전체에 스며드는 영적 충동은 옛적으로 늘계신이들의 권역에 속하는 모든 구역들의 모든 활동 위상 속에서 접하게 된다. 한편, 지역우주에는 영원 아들이 낙원 아들들의 품성체 속에서 직접 현존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한다. 여기에서 그 무한 아들은 합동하는 창조주 아들들의 웅대한 집단의 품성체들 속에서 영적으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기능한다.

 

3. 개인에 대한 영원 아들의 관계

 

지역우주 상승에 있어서 시간의 필사자들은 창조주 아들을 영원 아들의 개인적 대표자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들이 초우주 훈련체제의 상승을 시작하게 되면, 시간의 순례자들은 영원 아들의 영감을 주는 영의 숭고한 현존을 점점 더 감지하게 되며, 그들은 이러한 영적 격려의 사명활동을 받아들임으로써 혜택을 입을 수 있다. 하보나에서 그 상승자들은 전체에 스며드는 기원 아들의 영의 사랑으로 감싼 품을 더욱 많이 의식하게 된다. 전체 필사자 상승의 어떤 단계에서도 영원 아들의 영은 시간 순례자의 마음이나 혼 안에 거주하지 않으나, 그의 자비는 진보하는 시간자녀들의 복지와 영적 보호와 항상 관계하고 늘 그 곁에 있다.

 

영원 아들의 영-중력 끌어당김은 생존되는 인간 혼들의 낙원 상승의 선천적 비밀로 되어있다. 모든 진정한 영 가치들 그리고 진실한 영성화된 개인들은 영원 아들의 영 중력의 확실한 장악 안에 붙들려 있다. 예를 들면, 필사자 마음은 물질적 기능구조로서 그의 생애를 시작하고, 결국에는 거의 완전한 영 존재로서 최종의 무리단에 편입되는데, 이 전체 경험 동안 점차적으로 물질중력에 덜 지배되고 이에 대응하여 영 중력의 안쪽으로 당기는 충동에 더욱 응답한다. 영-중력 순환회로는 문자 그대로 사람의 혼을 낙원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영- 중력 순환회로는 믿음이 있는 인간 가슴의 진정한 기도를 인간 의식의 차원에서 신(神)의 실질적 의식으로 전달하는 기본적인 통로이다. 너희의 청원들 속에 있는 참된 영적 가치를 나타내는 그것은, 영 중력의 우주적 순환회로에 의해 점유될 것이고, 관계된 모든 신성한 품성들에게 즉각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전달될 것이다. 각자는 자기 품성구역에 속한 일에 종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실질적인 종교 경험에 있어서, 너희가 탄원할 때, 너희 지역우주의 창조주 아들을 떠 올리든지 아니면 만물의 중심에 계시는 영원 아들을 떠 올리든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영- 중력 순환회로의 분간하는 기능은 물질적 인간 몸속에 있는 신경 순환회로들의 기능과 아마도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느낌은 신경 경로들을 통해 안쪽으로 이동한다. 어떤 것들은 하부 자율 척추 중심에 의해 억류되거나 응답되며 또 어떤 것들은 하부 뇌의, 덜- 자율적이지만 습관- 길들여진 중심으로 가며, 반면 가장 중요하고 치명적인 유입신호는 이들 종속 중심을 순간적으로 지나고 즉각적으로 인간 의식의 최고 차원 안에 등록된다.

 

그러나 영적 세계의 뛰어난 기법은 얼마나 더 완전한지 모른다!  최극의 영적 가치를 담은 어떤 것이든지 너희의 의식 속에 생기면, 그리고 일단 네가 그것을 표현하면, 모든 창조의 절대 영(靈) 품성에게 그것이 직접 번개처럼 전해지는 것을 막을 힘이 우주 안에는 전혀 없다.

 

반대로, 만일 너희가 간청한 것들이 순수하게 물질적이고 전적으로 자아- 중심적이라면, 그러한 무가치한 기도들이 영원 아들의 영 순환회로 안에 머무를 곳을 찾을 수 있는 어떤 계획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으로 쓴" 것이 아닌 어떤 청원의 내용이든지 우주적인 영적 순환회로 안에서 머물 곳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순수하게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요청들은 죽어버릴 것이며 그것들은 참된 영 가치들의 순환회로들 속에서 상승하지 못한다. 그러한 말들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 필사자의 탄원을 유효하게 하는 것은, 동기가 되는 생각, 영적 내용물이다. 말은 아무 가치가 없다.

 

4. 신성한 완전 계획

 

영원 아들은 신성한 진보 계획: 의지 창조체의 창조, 진화, 상승 그리고 완전을 위한 우주 계획의 성공적인 실행에서, 아버지와 영구한 접촉을 이룬다. 그리고 신성한 신실함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영원히 동등하다.

 

아버지와 그의 아들은 영원함의 완전을 향하여, 시간의 물질적 존재들을 전진하게 하는 이 거대한 달성계획의 조성과 실행에서 하나가 되신다. 공간의 상승하는 혼들의 영적 높임을 위한 이 투영은 아버지와 아들의 합해진 창조며, 그들은 무한 영의 합동을 받아 그들의 신성한 목적의 연합 집행에 몰두해 있다.

 

완전성 달성의 이 신성한 계획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독특한 우주 모험의 세 가지 사업들을 포옹한다.


 

1. 진보적 달성 계획: 이것은 진화적 상승에 대한 우주 아버지의 계획인데, "우리 자신의 형상대로 필사 창조체들을 만들자" 라는 아버지의 제안에 영원 아들이 찬성하였을 때, 그에 의해 기탄없이 받아들여진 계획이다. 시간의 창조체들을 올라가도록 하려는 이러한 준비 속에는 생각조절자들을 아버지가 증여하는 것 그리고 품성이라는 특권을 물질적 창조체들에게 부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2. 증여 계획: 그 다음의 우주적 계획은 영원 아들과 그의 합동 아들들의 위대한 아버지-계시 사업이다. 이것은 영원 아들이 제안한 것이며 이 계획은 그가 하느님의 아들들을 진화 창조계에 증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품성체구현(稟性化)하고 사실화하고,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를 모든 우주들의 창조체들에게 육신화하고 현실로 만드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증여 계획에 선천적으로 들어 있는, 그리고 사랑의 이 봉사사명의 일시적 모습으로서 낙원 아들들은, 잘못 인도된 창조체 의지가 영적 위험 속에 자리해 온 그러한 것의 복구자로서 활동한다. 달성 계획의 기능 속에 지연이 발생할 때는 언제든지, 그리고 어느 곳이든지, 만일 반역이 이 사업을 우연히 망치거나 복잡하게 만든다면, 증여 계획의 긴급 조치가 즉시 시행된다. 낙원 아들들은 반란이 일어난 바로 그 영역 속으로 가서, 거기에서 그 구체들의 영적 지위를 복구하는 구출자로 활약할 것을 서약하며 준비를 갖춘다. 그리고 주권을 얻은 경험적 증여 생애와 관련하여, 한 합동 창조주 아들이 유란시아에서 그러한 영웅적 봉사를 수행했다.

 

3. 자비 사명활동의 계획: 달성계획과 증여계획이 작성되고 선포된 후에, 무한 영은 혼자서 그리고 스스로, 자비 사명활동의 거대하고도 우주적인 사업을 투영하고 시행에 들어갔다. 이것은 달성사업과 증여사업 둘 모두에 대한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작용에 매우 본질적인 봉사이며,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영적 품성들 모두는, 그렇게 신(神)의 셋째 품성체 본성의 일부인, 자비 사명 활동의 영을 함께 한다. 창조뿐만 아니라 관리에 있어서도, 무한 영은 아버지와 아들의 공동 집행자로서 진실 되게 그리고 글자 그대로 기능한다.

 

영원 아들은 창조체 상승에 대한 아버지의 우주 계획의 품성적 수탁자(受託者), 신성한 보호관리자이다. "내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 는 우주적 명령을 공표한 후에, 아버지는 영원 아들에게 이 거대한 사업을 맡겼으며 영원 아들은 자신의 신성한 협조자인 무한 영과 이 숭고한 사업을 함께 촉진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신(神)들은 창조, 조정, 진화, 계시, 그리고 직무에서, - 필요한 경우에는 복구와 재건의 경우에도 - 효과적으로 합동한다.

 

5. 증여의 영

 

"하보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는 엄청난 명령을 모든 창조로의 알림에 영원 아들은 우주 아버지와 아무 조건 없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 후로 계속, 그 초청 - 명령은 영원 아들과 그의 합동의 그리고 연합 아들들의 광대한 가족의 생존계획과 증여 투영 모두에 동기를 부여해 왔다. 그리고 바로 이 증여들에 있어서 하느님의 아들들은 모든 진화 창조체들에게 "길, 진리, 그리고 생명"이 되어 왔다.

 

영원 아들은 아버지가 전(前)품성 생각조절자라는 선물을 통하여 하는 것처럼 그렇게 직접 인간 존재들과 접촉을 이룰 수 없지만, 영원 아들은 그가 인간의 현존 속에서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사람 자체로서 나타나게 될 수 있을 때까지 신성한 아들관계의 일련의 단계적으로 낮아지는 변화에 의해, 창조된 품성들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영원 아들의 순수한 품성적 본성은 단편화 될 수 없다. 영원 아들은 영적 영향력으로서 또는 어떤 품성체로서 사명활동할 수 있고, 다르게는 결코 할 수 없다. 아들은 아버지- 조절자가 거기에 참여하는 그 감각에서는, 창조체 경험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 불가능함을 발견하지만 그러나 영원 아들은 증여의 기법에 의해 이 한계를 보충한다. 단편화된 실존개체들의 경험이 우주 아버지에게 의미를 주는 것은, 낙원 아들들의 육신화 경험이 영원 아들에게 의미를 주는 것과 같다.

 

영원 아들은 신성한 뜻, 인간 마음속에 거주하는 생각조절자로서 필사자 사람에게 오지 않지만, 영원 아들은 그의 아들의 신성한 품성, 네바돈의 미가엘이 나사렛의 예수의 인간적 본성으로 육신화되었을 때 유란시아에 있는 필사자 사람에게 왔었다. 창조된 품성들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낙원 아들들은 그러한 창조체들의 바로 그 본성을 취하고 실제적 창조체 자신들로서 그들의 신성한 품성들을 육신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들별의 비밀인 육신화는, 그렇지 않다면 품성 절대론이라는 만물을- 둘러싸는 족쇄가 되는 그것에서 아들이 벗어나는 기법이다.

 

아주 먼 옛날, 영원 아들은 상승하는 시간 순례자를 포함하여 하보나의 모든 거주민과 순례자의 계몽과 전진을 위하여 중앙 창조의 순환회로 각각에 자신을 증여했었다. 일곱 번의 이 증여들 중 어느 경우에도 그는 상승자 또는 하보나 시민으로서 기능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였다. 그의 경험은 독특했었다. 그것은 어떤 인간이나 다른 순례자와 함께 또는 그러한 존재로서가 아니었지만, 어떤 면에서 초(超)품성적 감각에서 연합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내부 하보나 순환회로와 낙원의 가장자리 사이에 끼어 있는 수면(睡眠) 상태를 지나가지도 않았다. 품성의 의식이 중지되는 일은 절대 존재인 그에게 전혀 불가능한 일인데, 왜냐하면 그분 안에 모든 계통의 영적 중력이 중심을 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증여기간 동안, 영적 광명의 중앙 낙원 거점은 빛을 잃지 않았고, 우주 영 중력에 대한 아들의 장악이 줄지 않았다.

 

하보나에서의 영원 아들의 증여들은 인간이 상상하는 범위 안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초월적이다. 그가 그 당시와 그 이후에 전체 하보나의 경험에 첨가시켰지만, 우리는 그가 그의 존재적 본성의 예상되는 경험적 수용력에 첨가시켰는지 아닌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낙원 아들들의 증여 신비 속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영원 아들이 이 증여 임무들에서 무엇을 획득하였든지 우리는 그가 그 후로 영원히 존속시키고 있다고 믿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신(神)의 둘째 품성체의 증여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의 어려움이 어떤 것이든지, 우리는 영원 아들의 한 아들의 하보나 증여를 이해하는데, 그는 중앙우주의 순환회로들을 확실하게 지나갔고 신(神) 달성을 위한 상승자의 준비가 되는 그 경험들을 실제적으로 공유하였다. 이 분이 최초-탄생 창조주 아들인 기원적 미가엘이었으며, 그는 그랜드판다, 모든 필사자들 중에서 하보나에 처음으로 도달한 자의 시대에 그들과 함께 각 순환계(循環系)의 단계를 직접 여행하면서, 이 순환회로에서 다음 순환회로로 상승하는 순례자들의 일생 경험을 두루 거쳐 갔다.

 

이 기원적 미가엘이 다른 무엇을 계시하였던지 간에, 그는 기원적 어머니 아들의 초월 증여를 하보나의 창조체들에게 실제화 시켰다. 하느님의 영원 아들은 점진적으로 하보나에 도달하는 일곱 순환회로들에서 시- 공간 순례자들의 체험에 참여하기 위해 낙원의 힘과 영화로움을 일곱 번이나 버렸으며, 이것을 분명하게 앎으로써, 그 증여가 너무나 실제적이라 하보나 순환회로를 순회하는 모험여행에서 수고하는 시간 순례자 각자는 언제까지나 기운을 내고 힘을 얻는다.

 

영원 아들은 시간과 공간의 우주에 두루 그들의 증여 봉사사명에 있어서 하느님의 아들 전체에게 본보기적 영감이 된다. 합동 창조주 아들들 그리고 연합 집정관 아들들은, 아들관계의 계시되지 않은 다른 계층들과 함께, 창조체 삶의 다양한 계층에게 그리고 창조체 자신들로서 자기들을 증여하려는 이 훌륭한 자발적 행위에 모두 참여한다. 그러므로 영에 있어서 기원의 사실들뿐만 아니라 본성에서의 동족관계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 각자가 공간에 속한 그 세계들에게 증여될 때, 이 증여들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고 또 그것에 의해서, 영원 아들이 우주의 지능적 의지 창조체에게 자신을 증여해 오는 일이 이루어진다.

 

모든 속성에 있어서는 아닐지라도, 영과 본성에 있어서, 각 낙원 아들은 기원적 아들에 대한 신성하고 완전한 초상화이다. 낙원 아들을 본 자는 누구든지 하느님의 영원 아들을 이미 본 것이라는 말은 정말로 옳다.

 

6. 하느님의 낙원 아들들

 

하느님의 아들들이 다수 있다는 지식의 부족함이 유란시아에서의 큰 혼돈의 근원이다. 그리고 이 무지함은 이 신성한 품성들의 비밀회의에 대한 기록으로서, "하느님의 아들들이 기쁨을 선포 하였고, 모든 새벽별 들이 함께 노래하였다."는 말씀을 대면할 때에도 그대로 있다. 구역 표준시간 으로 매 천년마다, 다양한 계층의 신성한 아들들이 그들의 주기적 비밀회의를 위해 함께 모인다.

 

영원 아들은 하강하는 하느님의 아들들의 모든 계층에게 창조에 두루 그들이 기능하듯이 그토록 풍성하게 특징짓는 자비와 봉사의 찬미할만한 속성들의 품성적 근원이다. 영원 아들은, 속성의 무한함 전체는 아니더라도, 모든 신성한 본성을, 그의 신성한 성격을 계시하기 위하여 영원한 섬으로부터 우주들의 우주에게로 내보내는 낙원 아들들에게 확실하게 전달한다.

 

기원이며 영원한 아들은 "최초로" 완벽하고 그리고 무한한 사고를 가진 우주 아버지의 후손-품성체이다. 우주 아버지와 영원 아들이 새롭고, 기원적이고, 동일하고, 독특하고, 절대적인 품성적 사고를 함께 투영할 때마다, 바로 그 순간에 이 창조적 개념은 새롭고도 기원적인 창조주 아들의 존재와 품성 안에서 완전하게 그리고 최종적으로 품성체구현(稟性化)된다. 영 본성과 신성한 지혜 그리고 합동으로 창조하는 힘 안에서, 이 창조주 아들들은 아버지 하느님과 잠재적으로 대동하다.

 

창조주 아들들은 낙원으로부터 시간의 우주들 속으로 들어가고,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조정하는 그리고 창조적인 대리자들의 협동을 얻어서, 진보적 진화의 지역우주의 조직을 완성한다. 이 아들들은 물질과 마음과 영에 대한 중앙의 그리고 우주적인 조정에 배속되지도 않고 관여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첫째 근원이며 중심과 그의 합동 절대자들의 선재(先在)와 우선권과 시원성에 의해 그들의 창조적 행위들 속에 제한된다. 이 아들들은 그들이 현존시킬 수 있는 것들만 관리할 수 있다. 절대적인 관리는 실재(實在)의 우선권 속에 선천적으로 들어 있고 현존의 영원함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아버지는 우주들 안에서 여전히 시원적으로 남아 계신다.

 

창조주 아들들이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 품성체구현(稟性化)되는 것과 똑같이, 집정관 아들들은 아들과 영에 의해 품성체구현(稟性化)된다. 이들은 창조체 육신화의 경험 속에서, 시간과 공간 창조계의 생존의 심판관들로서 봉사하는 권한을 얻는 아들들이다.

 

또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다재다능한 삼위일체 교사 아들들을 품성체구현(稟性化)시키기 위하여 결합하는데, 그들은 인간과 그리고 신성한 모든 품성들에 대한 숭고한 선생들로서 광우주를 돌아다닌다. 그리고 또 유란시아 필사자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던 아들관계의 수많은 다른 낙원 계층들이 있다.

 

기원적 어머니 아들과 전체 창조 전반에 흩어져 있는 이 낙원 아들들의 무리들 사이에는, 직접적이고도 배타적인 대화 통로가 있는데, 그것은 거의- 절대적인 영적 연합의 굴레 속에 그것들을 결합하는 영적 동족관계의 본질특성 속에 그 기능이 선천적으로 들어 있는 통로이다. 이 아들관계 내부의 순환회로는, 둘째 근원이며 중심의 품성체 안에 역시 중심을 두는 영 중력의 우주 순환회로와 전혀 다르다. 낙원 신(神)들의 품성체들 안에서 기원되는  하느님의 아들들 전체는 영원한 어머니 아들과 직접적이고도 계속적인 대화를 유지한다. 그리고 그러한 대화는 순간적이며 그것은 때로 공간에 의해 조건이 갖추어짐에도 불구하고 시간과는 독립적이다.

 

영원 아들은 낙원 아들관계의 모든 계층들의 지위와 생각들 그리고 다양한 활동들에 관하여 항상 완전한 지식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함의 시원적 중앙 창조 안에 있는 그리고 합동 창조주 아들들의 2차 창조계 안에 있는 모든 창조체들의 가슴속에 존재하는 영적 가치 모두에 관하여 항상 완전한 지식을 갖고 있다.

 

7. 아버지의 최극(最極) 계시

 

영원 아들은 우주 아버지의 영과 품성에 대한 완벽하고도 배타적이고 우주적이고 최종적인 계시이다. 그리고 아버지에 관한 모든 지식과 정보는 영원 아들 그리고 그의 낙원 아들들로부터 와야만 한다. 영원 아들은 영원부터 존재하고, 전적으로 그리고 영적 자격조건 없이 아버지와 하나이시다. 신성한 품성에 있어서 그들은 합동을 이루며 영적 본성에 있어서 그들은 동등하다. 신성에 있어서는 그들이 동일하다.

 

하느님의 성격은 아들의 품성체 안에서 본질적으로 개선될 가능성이 있을 수 없는데, 이는 신성한 아버지가 무한하게 완전하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그 성격과 품성은 피조 존재들의 계시를 위하여 비품성적이고 비(非)영적인 박탈로 증대되어진다. 첫째 근원이며 중심은 품성을 훨씬 뛰어넘지만, 첫째 근원이며 중심의 아버지 품성의 영 본질특성들 전체는 영원 아들의 절대적 품성 안에 영적으로 존재한다.

 

기원 아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모든 창조에게 아버지의 영적 그리고 품성적 본성의 우주적 계시를 이룩하는 일에 몰두되어 있다. 중앙우주, 초우주들, 지역우주들, 또는 거주되는 행성들에서, 사람들과 천사들에게 우주 아버지를 계시하는 이는 낙원 아들이다. 영원 아들과 그의 아들들은 우주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창조체의 넓은 길을 계시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높은 기원을 갖는 우리들도 영원 아들 안에서 그리고 영원 아들의 아들들 안에서 그의 성격 그리고 품성에 대한 계시를 공부할 때 훨씬 더 풍부하게 아버지를 납득한다.

 

아버지는 영원 아들의 신성한 아들들을 통해서만 품성으로서 너희에게 내려오신다. 그리고 너희는 이 동일한 살아있는 길에 의해 아버지에게 도달한다. 너희는 신성한 아들들의 이 집단의 안내에 의해 아버지에게로 상승한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너희의 품성이 우주 아버지의 직접적 증여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실로 남아 있다.

 

영원 아들의 멀리- 퍼지는 영적 관리에 속하는 이 광범한 활동들 전체 속에서, 아버지가 품성체이신 것처럼 진실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아들이 품성체라는 것을 잊지 말라. 정말로, 한 때 인간 계층이었던 존재들에게는 영원 아들이 우주 아버지보다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시간 순례자들이 하보나 순환회로들을 통해 진보할 때, 너희는 너희가 아버지를 식별할 준비를 갖추기 전에 아들에게 도달할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너희는 한 때 땅에서 사람의 아들이었고 지금은 너희 지역우주의 드높여진 주권자인 -사람의 아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 너희 자신의 창조주 아들에 의해 사랑하는 봉사 속에서 만들어졌던 이 신성한 속성들에 대한 계시를 너희가 묵상하면서 너희는 영원 아들의 성격과 자비로운 본성을 더 많이 이해해야만 한다.

 

 

 

제 8 편    무한 영

 

영원으로 돌아가서, 우주 아버지의 "최초" 무한 그리고 절대 생각이 영원 아들 안에서 그것의 신성한 표현을 위한 그러한 완전하고도 합당한 말씀을 발견할 때, 상호 표현과 병합된 행동의 우주적이고 무한한 대리자에 대하여 생각- 하느님과 말씀- 하느님 모두의 최극욕망이 뒤따른다.

 

영원의 여명기에 아버지와 아들 모두는 그들의 상호 내부의존에 대해 무한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성한 동반자 관계의 무한하고도 영구한 서약을 맺게 된다. 결코- 끝남 없는 이 협정은 영원의 모든 순환계(循環系) 에 두루 그들의 결합된 개념들의 집행을 위하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영원 결과 이후 아버지와 아들은 언제나 이 신성한 결합 안에 여전하시다.

 

우리는 무한 영, 신(神)의 셋째 품성체의 영원함의 기원과 마주하고 있다.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하느님이 동일한 그리고 무한한 행동- 절대적 생각- 계획의 집행- 을 공동으로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무한 영이 어엿한 실재(實在)로 솟아난다.

 

신(神)들의 기원의 계층을 그렇게 설명함에 있어서, 나는 너희로 하여금 그들의 관계에 대하여 단지 생각할 수 있게 할 뿐이다. 실제적으로 그들은 모두 영원으로부터 실재하는 세분이다. 그들은 존재적이다. 그들은 시간적인 시작과 끝이 없으며 그들은 합동, 최극, 궁극, 절대, 그리고 무한이다. 그들은 현재 존재하고 항상 존재해 왔으며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셋으로 분명하게 개별화되어 있지만 영원하게 연합된 품성체들,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하느님 그리고 영 하느님이다.

 

1. 행동의 하느님

 

과거의 영원 속에서, 무한 영의 품성체구현에 따라 신성한 품성 주기는 완전하게 되고 완성된다. 행동하는 하느님이 실재하며, 우주의 광대한 무대는 창조의 거대한 연극 - 우주적 모험 - 영원한 시대들의 신성한 파노라마를 위한 장치이다.

 

무한 영의 첫 번째 활동은 그의 신성한 부모들, 아버지- 어머니와 어머니-아들에 대한 점검과 인식이다. 그분, 그 영은 분별불가적으로 두 분 모두를 동일시한다. 그는 그들의 병합된 본성과 결합된 기능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분리된 품성들 그리고 무한 속성들에 대해 충분하게 인식한다. 그 다음은, 초월적인 자의성과 영감이 이는 자발성과 함께, 자진하여, 신(神) 의 셋째 품성체는, 그의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품성체와의 동등성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하느님에 대하여 영원한 충성심을 맹세하고 아들 하느님에 대하여 영원한 의존을 인정한다.

 

영원의 주기는 이 활동행위의 본질 속에 그리고 각각의 품성 독립성과 세분 모두의 집행적 결합에 대한 상호적 인식 안에 선천적으로 확립되어 있다. 낙원 삼위일체는 실재하고 있다. 우주적 공간의 그 무대는 영원 아들의 품성을 통하여 그리고 아버지- 아들 창조자 동반자 관계의 실체 행위에 대한 집행대리인인 행동의 하느님의 집행에 의해, 우주 아버지의 목적에 대한 창조적 전개의 중첩적이고 영원한 파노라마를 위해 마련된다.

 

행동의 하느님이 기능하고 그리고 죽은 듯하던 공간의 창공은 움직여 일어난다. 10억 개의 완전 구체들이 실재(實在)로 확 생긴다. 가정의 이 영원순간 이전에 낙원 속에 선천적으로 있는 공간- 에너지들은 실재하고 있으며 잠재적인 작용성이지만, 그것들은 존재의 실제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끌어당김에 대한 물질적 실체들의 반응에 의하지 않고는, 물리적 중력도 측정될 수 없다. 이 영원하게 멀리 있는 (가정된) 이 순간에 물질적 우주는 존재 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10억 세계들이 물질화하는 바로 그 즉시, 낙원의 영구한 장악 안으로 그것들을 붙잡기에 충분하고 적당한 중력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하느님들의 창조를 통해서, 이제는 두 번째 에너지가 확 생기며, 넘쳐흐르는 이 영은 영원 아들의 영적 중력에 의해 즉시 장악된다. 그래서 2중적 중력- 포옹된 우주는 무한의 에너지와 접촉하고 있고 신성의 영 안에 잠겨져 있다. 이런 방법으로 생명의 토양이 무한 영의 연합된 지능 순환회로들 안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마음의 의식함에 대하여 준비된다.

 

잠재적인 실재의 이 씨앗들이 하느님들의 중앙 창조에 두루 확산하게 되면, 아버지가 활동하고, 창조체 품성이 나타난다. 그 다음에는 낙원 신(神)들의 현존이 모든 조직된 우주를 채우고 모든 사물과 존재를 낙원방향으로 실질적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무한 영은 아버지와 아들의 병합된 개념들과 결합된 뜻에 순종하여 자신에 의해 자신과 함께 그리고 자신 안에서 창조되는 이 중앙우주인, 하보나 세계들의 탄생과 동시에 영원화 된다. 셋째 품성체는 바로 이 공동창조의 활동에 의해 신(神)구현화 되며, 그리하여 그는 언제까지나 공동 창조주가 된다.

 

이때는, 그들의 공동 연합체이고 배타적 집행자인,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행동에 의한 그리고 그 안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창조적 확대의 웅장하고도 경이로운 시기이다. 휘저어 일어나는 이 시기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이 강대한 활동행위들을 확증하려는 무한 영의 빈약한 개방자료를 갖고 있으며, 그는 다만 중앙우주와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이 품성과 의식적 실재(實在)에 대한 그의 달성과 동시에 그것으로 영원하게 된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이다.

 

간단히 말해서, 무한 영은 그가 영원하기 때문에 중앙우주 또한 영원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들의 우주의 역사의 전통적인 시작점이다. 만물의 중앙에 존재하고, 매우 절묘하게 기능하고 있는 광대한 우주를 구체화시킨 창조 에너지와 관리 지혜의, 이 엄청난 분출 이전의 사건 또는 활동행위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 없고 어떤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건 너머에는 탐구할 수 없는 영원의 활동행위 그리고 무한함의 심연(深淵) - 절대 신비 - 가 깔려있다.

 

그리고 우리는 필사 창조체들의 시간에- 묶이고 그리고 공간에- 조건이 갖추어진 마음에 대한 해석상의 겸손으로서,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순차적 기원을 그렇게 묘사한다. 사람의 마음이 우주 역사를 마음에 그려보기 위해서는 하나의 출발점을 반드시 가져야만 되며, 나는 영원의 역사적 개념에 접근하는 이 기법을 제공하도록 지시를 받아 왔다. 물질적 마음 안에서는, 첫째 원인이 있어야 모순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주 역사의 모든 위상들에 있어서 그리고 창조적 활동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아들과 영이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공존한다는 사실을 모든 창조체 마음들에게 동시에 가르치면서, 우주 아버지를 모든 창조의 첫째 근원이며 절대적 중심으로 가정한다. 그리고 우리는 낙원 섬의 그리고 분별불가, 우주, 그리고 신(神) 절대자들의 실체성과 영원성을 어떤 감각에서도 무시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한다.

 

시간 자녀들의 물질적 마음은, 영원 속에 계신 아버지를 마음에 그려보는 것에 도달하기가 충분하다. 우리는 어떤 자녀든지 처음에 자녀- 부모 상황의 관계들을 숙지함으로써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 개념을 하나의 전체로써 가족을 포옹하기까지 확대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실체로 가장 잘 연결시킬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 후에 그 자녀의 성숙되는 마음은 가족 관계의 개념을, 공동체, 종족 그리고 세계에 대한 관계성으로, 그 다음에는 우주, 초우주, 그리고 심지어는 우주들의 우주에 대한 것으로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2. 무한 영의 본성

 

공동 창조주는 영원으로부터 계시며 우주 아버지 그리고 영원 아들과 온통 그리고 자격조건 없이 하나이다. 무한 영은 낙원 아버지의 본성뿐만 아니라 기원 아들의 본성 역시 완전성 속에 반영한다.                 


셋째 근원이며 중심은 여러 이름들로 알려져 있다. 우주 영, 최극안내자, 공동창조주, 신성한 집행자, 무한 마음, 영들의 영, 낙원 어머니 영, 공동행위자, 최종 합동자, 전재(全在) 영, 절대 지능, 신성한 행동 그리고 유란시아에서는 때때로 그는 조화우주 마음과 혼동되고 있다.

 

신(神)의 셋째 품성체를 무한 영이라고 부르는 것이 전적으로 타당한데, 이는 하느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질을 기본적 실체로 보고, 그리고 영과 함께 마음을 물질에 뿌리를 둔 것으로 가정(假定)하는 실수를 범하는 경향이 있는 물질적 창조체들은, 만일 그가 무한 실체, 우주 조직가, 또는 품성 합동자로 불려진다면 셋째 근원이며 중심을 더 잘 이해할 것이다.

 

신성의 우주 계시로서의, 무한 영은 탐구될 수 없으며 철저하게 인간 이해력을 벗어난다. 영의 절대성을 감지하기 위해서, 너희는 오직 우주 아버지의 무한성을 묵상하고 기원 아들의 영원에 대한 경이로움 속에 서 있으면 된다.

 

무한 영의 품성체 안에는 정말로 신비로움이 있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더욱 그러하다. 아버지의 본성의 모든 측면에서, 공동 창조주가 그의 무한성을 가장 현저하게 드러낸다. 주(主)우주가 결국에는 무한성에 이르기까지 확대되더라도, 공동행위자의 영 현존과 에너지 조정 그리고 마음 잠재는 그러한 무제한 창조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것으로 발견될 것이다.

 

모든 면에서 우주 아버지의 완전성과 정의로움 그리고 사랑을 공유하지만, 무한 영은 영원 아들의 자비의 속성을 향하는 경향이 있고, 그리하여 광우주에 대해 낙원 신(神)들의 자비 사명 활동자가 된다. 언제든지 그리고 항상- 우주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영은 자비의 사명활동자인데, 하느님의 사랑을 신성한 아들들이 계시하듯이 신성한 영이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모든 선(善)이 아버지 안에서 기원되기 때문에 영이 아버지보다 더 선(善)을 소유할 수 없지만, 영의 활동들 안에서 우리는 그러한 선(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의 신실하심과 아들의 불변성은 영 존재들에게 그리고 그 구체들의 물질적 창조체들에게 무한 영의 품성들의 사랑스러운 사명활동과 끊임없는 봉사에 의해 매우 실제적인 것이 된다.

 

공동 창조주는 아버지의 사고의 아름다움과 진리의 성격 전체를 물려받는다. 그리고 신성의 이 장엄한 특색들은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마음의 무한하고도 영원한 지혜에 복종하여 조화우주 마음의 최극-인접 차원들에서 합동을 이룬다.

 

3.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영의 관계

 

영원 아들이 우주 아버지의 "첫 번째" 절대 그리고 무한 사고에 대한 말씀 표현이듯이, 공동 행위자는 절대적 생각- 말씀 결합의 아버지- 아들 품성 동반자 관계에 의한 병합된 행동을 위한 "처음" 완성된 창조적 개념, 곧 계획의 완전한 실행이다. 셋째 근원이며 중심은 중앙이면서도 명령에 의한 창조와 함께 영원성을 갖게 되며, 오직 이 중앙 창조만이 모든 우주들 중에서 실재(實在)로서 영원하다.

 

셋째 근원이 품성체구현된 이후로, 첫째 근원은 더 이상 우주 창조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우주 아버지는 자신의 영원 아들에게 모든 가능한 것을 위임한다. 마찬가지로 영원 아들은 모든 가능한 권한과 힘을 공동행위자에게 증여한다.

 

영원 아들과 공동행위자는, 동반자들로서 그리고 그들의 합동 품성들을 통하여, 실재하게 되는 모든 하보나- 이후 우주를 계획하고 만든다. 영은 최초이자 중앙의 창조에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유지하는 동일한 품성적 관계를 뒤이어 일어나는 모든 창조 안의 아들에 대해 유지한다.

 

영원 아들의 창조주 아들과 무한 영의 창조 영이 너희와 너희 우주를 창조하였다. 그들이 이미 조직한 것을 아버지가 신실함으로 유지하는 동안, 그들의 일을 촉진시키고 지탱하며, 또한 마찬가지로 그들 스스로 만든 창조체들에 대한 사명활동은 이 우주 아들과 이 우주 영에게 맡겨진다.

 

무한 영은, 모든 사랑의 아버지와 모든 자비의 아들의, 시간과 공간의 모든 세계에 있는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혼들을 자신들에게로 이끄는 그들 공동 투영의 실행을 위한, 유능한 대리자다. 영원 아들이 우주들의 창조체가 완전성 달성이라는 그의 아버지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 상승 투영이 아버지-아들 계획이 되는 순간, 무한 영은 그들의 결합된 그리고 영원한 목적의 실행을 위해 아버지와 아들의 공동 관리자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함에 있어서 무한 영은 신성한 현존에 대한 그리고 영 품성들에 대한 자신의 모든 자원들을 아버지와 아들에게 바친다. 그는 생존되는 의지창조체들을 낙원 완전의 신성한 경지로 드높이는 엄청난 계획에 모든 것을 헌신해 왔다.

 

무한 영은 우주 아버지와 그의 영원 아들에 대한 완벽하고 배타적이며 우주적인 계시이다. 아버지-아들 동반자관계에 대한 모든 지식은 무한 영을 통하여 생각- 말씀 결합의 공동 대표자를 갖게 되어야만 한다.

 

영원 아들은 우주 아버지에게 접근하는 유일한 통로이며, 무한 영은 영원 아들을 달성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상승하는 시간 존재들은 오직 영의 끈기 있는 사명활동에 의해서만 아들을 발견할 수 있다.

 

만물의 중심에서 무한 영은 상승하는 순례자들에 의해 달성될 낙원 신(神)들 중 첫 번째이시다. 셋째 품성체는 둘째 그리고 첫째 품성체를 감싸고 있으며 그러므로 아들과 그의 아버지에게 현존됨이 되려는 모든 후보자들에 의해 항상 처음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른 여러 면에서 영은 아버지와 아들을 동일하게 대표하고 비슷하게 봉사한다.

 

4. 신성한 사명활동의 영

 

낙원 중력이 만물을 거기에서 함께 잡아두는 물리적 우주와 나란히 평행하여, 영적인 우주는 거기에서 아들의 말씀이 하느님의 생각을 해석하고 그리고 "육신이 되어" 연합된 창조주들의 병합된 본성인 사랑하는 자비를 명시한다. 그러나 이 물질적 그리고 영적인 창조 전체 안에 그리고 그것들에 두루, 무한 영과 그의 영 자손들이 그들이 협동으로 고안하고 만든 지능적 자녀들에게 신성한 부모들의 병합된 자비, 인내심 그리고 영구적인 애정을 보여주는 광대한 무대가 존재한다. 마음에 대한 영구적인 사명활동은 영의 신성한 성격의 본질이다. 그리고 공동행위자의 모든 영 자손은 사명활동에 대한 이 열정, 봉사하고자 하는 이 신성한 충동에 참여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아들은 자비이고, 영은 사명활동 - 모든 지능 창조체에 대한 신성한 사랑과 끝없는 자비의 사명활동 - 이다. 영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의 품성화(稟性化) 이며 그의 안에서 그들은 우주적 봉사를 위해 영원하게 결합되어 있다. 영은 창조체 창조에 적용되는 사랑, 아버지와 아들의 병합된 사랑이다.

 

유란시아에서는 무한 영이 전재(全在)하는 영향력, 우주적 현존으로 알려져 있지만, 하보나 에서는 너희가 그를 실제적 사명활동의 품성적 현존으로 알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낙원 영의 사명활동은 그의 합동 영들 그리고 시간과 공간 세계들에 있는 창조된 존재들을 돌보는 권속 품성들 각각에게 모범적이고 영감을 주는 원형틀이다. 이 신성한 우주 안에서 무한 영은 영원 아들의 초월적인 일곱 가지 모습들 속에 충만하게 참여했으며 마찬가지로 그는 하보나의 순환회로에서의 일곱 번 증여에 기원적 미가엘 아들과 함께 하였고, 그리하여 이들 높은 곳의 완전한 이 순환계(循環系)를 지나가는 시간의 각 순례자에게 공감해주고 납득해주는 영 사명활동자가 된다.

 

하느님의 창조주 아들이 투영된 지역우주를 위해 창조자 자격으로서의 책임을 지기로 수락할 때, 무한 영의 품성들은 이 미가엘 아들이 창조하는 모험의 자기 임무 위에서 나아갈 때, 그의 지칠줄 모르는 사명활동자들로서 자신들을 바친다. 특히 창조적 딸들의 품성체들, 지역우주 어머니 영 안에서, 우리는 점점 더 높은 차원의 영적 달성을 향해 물질적 창조체들의 상승을 촉진하는 과업에 헌신되어 있는 무한 영을 발견한다. 그리고 창조체 사명활동의 이 모든 작업은 이 지역우주 창조주 아들들의 목적들과 완전한 조화 속에서, 그리고 그 품성들과 긴밀한 연합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주에게 아버지의 사랑의 품성을 계시하는 거대한 임무에 하느님의 아들들이 참여하고 있듯이, 무한 영은 각 우주의 모든 자녀들의 개별 마음들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병합된 사랑을 계시하는 끝없는 사명활동에 헌신되어 있다. 이 지역 창조계 안에서 영은 하느님의 아들들 중 어떤 이처럼 필사 육신의 모습으로 물질적 인종들에게로 내려오지는 않지만, 무한 영과 그의 합동 영들은 자신들을 낮추는 일을 하는데, 그들은 이 세상 실재의 낮은 경로들을 통하여 너희 옆에 서서 너희를 안내하는 천사들로서 나타나기까지, 놀라운 일련의 신성 감소과정을 기쁨으로 견딘다.

 

바로 이 일련의 감소 과정에 의해 무한 영은 실제적으로 그리고 하나의 품성체로서, 동물-기원 구체들의 각 존재에게 매우 가까이 접근한다. 그리고 영은 자신의 실재를 조금도 무효로 만들지 않은 채, 모든 것들의 중앙에서 신(神)의 셋째 품성체로서 이 모든 것을 행한다.

 

그 공동 창조주는 정말로 그리고 영원토록 위대한 돌보는 품성, 우주적 자비 사명활동자이다. 영의 사명활동을 이해하려면, 그가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에 대한 그리고 아들의 영원한 자비에 대한 병합된 묘사라는 진리를 깊이 생각하라. 아무튼, 영의 사명활동이 오로지 영원 아들과 우주 아버지를 나타내는 일에만 제한된 것은 아니다. 무한 영 역시 자기 자신의 이름과 권한으로 그 영역의 창조체들을 돌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셋째 품성체는 신성한 존엄으로 있으며 또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비의 우주적 사명활동을 증여한다.

 

무한 영의 창조 가족의 비교적 낮은 계층의 사랑하는 그리고 지침이 없는 사명활동을 사람이 더 많이 배울 때, 그는 우주 아버지와 영원 아들의 병합된 행동의 초월적 본성과 비할 데 없는 성격을 훨씬 더 찬양하고 찬미할 것이다. 정말로 이 영은 "항상 정의(正義)를 바라보는 주(主)의 눈"이며 "그들의 기도를 항상 듣고 있는 신성한 귀"이다.

 

5. 하느님의 현존

 

무한 영의 현저한 속성은 전재(全在)이다. 모든 우주들의 우주에 두루 만물에- 스며드는 이 영이 어디에나 현존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주적이고 그리고 신성한, 마음의 현존과 너무나도 비슷하다. 신(神)의 둘째 품성체 그리고 셋째 품성체 모두는 그들의 항상- 현존하는 영들에 의해 보든 세계에서 나타내진다.

 

아버지는 무한하며 그렇기 때문에 오직 자의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조절자들의 증여에 있어서 그리고 품성의 순환회로화에 있어서, 아버지가 홀로 활동하지만, 지능존재들과의 영 기세의 접촉에서는 그가 영원 아들 그리고 무한 영의 품성들과 영들을 이용한다. 그는 자기 뜻에 따라 아들과 또는 공동행위자와 동일하게 영적으로 현존한다. 그는 아들과 함께 그리고 영 안에서 현존한다. 아버지는 가장 확실하게 어디에나 현존하며, 우리는 이들 다양하지만 그러나 연합된 기세, 영향 그리고 현존들의 어느 부분 또는 전체를 통하여 그리고 그것에 의해, 그의 현존을 식별한다.

 

너희의 종교적 기록들에서는 하느님의 영이라는 용어가 낙원에 있는 무한 영과 너희 지역우주의 창조자 영 모두를 번갈아 나타내곤 하는 것 같다. 성령은 낙원 무한 영의 이 창조적 딸의 영적 순환회로이다. 성령은 각 지역우주에 고유한 순환회로이고 그 창조의 영적 영역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나 무한 영은 전재(全在)이다.

 

많은 영적 영향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모두 하나로 존재한다. 심지어는 생각조절자들의 활동도, 다른 모든 작용들과는 독립적임에도 불구하고, 무한 영과 지역우주 어머니 영의 병합된 영향들의 영 사명활동과 일정하게 부합한다. 이 영적 현존들이 유란시아인들의 삶 속에서 작용할 때, 그들은 분리될 수 없다. 그들의 다양한 기원에도 불구하고, 너희 마음속에서 그리고 너희 혼 위에서 그들은 하나의 영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결합된 이 영적 보살핌이 경험될 때, 그것은 너희에게 "너희를 실패하지 않도록 항상 지켜줄 수 있고 높은 곳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 앞에서 네가 죄 없음을 제시할 수 있는" 최극자의 영향이 된다.

 

무한 영이 공동행위자임을 아버지와 아들 모두 다 그의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기능함을 그가 그 자신으로서 뿐만 아니라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그리고 아버지- 아들로서 현존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이것을 인정하여 그리고 많은 추가적 이유들로 인하여 무한 영의 영 현존은 종종 "하느님의 영"으로 간주된다.

 

모든 영적 사명활동의 접촉을 하느님의 영으로 계속 간주될 수도 있는데, 이는 그러한 접촉이 아버지 하느님, 아들 하느님, 영 하느님, 그리고 칠중 하느님의 영들 - 심지어는 최극자 하느님 영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6. 무한 영의 품성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광범위한 증여와 멀리 퍼지는 분배가, 그의 품성의 사실성을 흐리게 하거나 혹은 그 밖의 방법으로 손상되게 만들지 말라. 무한 영은 우주 현존, 영원한 행동, 조화우주 힘, 거룩한 영향력, 그리고 우주 마음이며 그는 이 모든 것인 동시에 무한하게 그 이상이지만, 또한 그는 하나의 참되고 신성한 품성이다.

 

무한 영은 하나의 완벽하고 완전한 품성, 우주 아버지와 영원 아들의 신성한 동일 존재 그리고 합동 존재이다. 공동 창조주는 아버지와 아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주들의 좀더 높은 지능존재들에게는 실제이며 눈에 보이고 정말로 그 이상인데, 이는 모든 상승자들이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에게 다가갈 수 있기 전에 반드시 이 영을 달성해야 되기 때문이다.

 

무한 영, 신(神)의 셋째 품성체는 너희가 품성과 연합하는 모든 속성들을 소유한다. 영은 절대 마음을 부여 받았다. "영은 모든 것들, 심지어는 하느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한다." 영은 마음뿐만 아니라 의지도 부여 받았다. 자신의 선물을 증여함에 있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똑같은 영이 하시고, 각 사람 저마다에게 그리고 그가 바라는 대로 나누어준다."

 

"영의 사랑"은 실제적이고, 그의 슬픔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을 슬프게 만들지 말라." 우리가 무한 영을 낙원 신(神)으로 보든지 또는 지역우주 창조 영으로 보든지, 우리는 공동 창조주가 셋째 근원이며 중심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신성한 품성체임을 발견한다. 이 신성 한 품성은 또한 우주에게 하나의 품성체로서 반응한다. 영은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귀가 있는 자는 영이 말하는 것을 들어라." "영 자신이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 영은 창조된 존재들에게 직접적이고도 개인적 영향을 주는데, "이는 하느님의 영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자마다, 그들이 하느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설사 우주들의 우주의 멀리 있는 세계에 대한 무한 영의 사명활동의 현상들을 우리가 지켜본다 해도, 셋째 근원이며 중심 안에서 기원되는 각가지 존재들로 구성된 설명되지 않은 큰 무리 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활동하는 이 동일 합동 신(神)을 우리가 고찰한다 하더라도, 설사 영의 전재(全在)성을 우리가 깨닫는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 동일한 셋째 근원이며 중심이 하나의 품성체, 만물과 모든 존재와 모든 우주의 공동 창조주인 것을 단언한다.

 

우주의 관리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완전하게 그리고 영원하게 상호 연합된다. 비록 각자가 모든 창조에 한 품성적 사명활동으로 관여하지만, 세 분 모두는, 언제까지나 자신들을 하나로 만드는 창조의 봉사와 조정안에서, 신성하게 그리고 절대적으로 연동되어 있다.

 

무한 영의 품성체 안에서 그리고 분별불가 완전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상호적으로, 항상 현존하는데, 이는 영은 아버지와 다름없고 아들과 다름없으며, 또한 마찬가지로 그 두 분이 언제까지나 하나인 아버지와 아들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무한 영의 본성과 활동을 묘사하기 위하여 옛적으로 늘계신이들에 의해 임명된 유버사의 신성한 조언자에 의해 유란시아에 제시되었음]



  

제 9 편   우주에 대한 무한 영의 관계

 

낙원의 현존 안에서 우주 아버지와 영원 아들이 자신들을 품성체구현시키기 위하여 결합할 때 생소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 영원 상황에서 공동행위자가 절대 마음과 합동을 이루고 에너지 조작의 독특한 특권들을 부여 받은 무제한 영성으로서 품성체구현되는 것은 아무 것도 사전조짐이 없었다. 그의 존재로서의 나타남은, 중심화 하는 완전의 속박에서의 그리고 품성 절대론의 구속에서의 아버지의 해방을 완성한다. 그리고 이 해방은 섬기는 영들로서 봉사하도록 잘 적응되는 존재들 그리고 뒤이어 지는 진화하는 우주들의 물질적 창조체들까지 창조하는 공동행위자의 놀라운 힘에서 드러난다.

 

아버지는 사랑과 의지에 있어서, 영적 생각과 목적에 있어서 무한하다. 그는 우주 유지자이다. 아들은 지혜와 진리에 있어서, 영적 표현과 해석에 있어서 무한하며 그는 우주 계시자이다. 낙원은 기세 증여를 위한 잠재에 있어서 그리고 에너지 지배를 위한 수용력에 있어서 무한하다. 그것은 우주 안정자이다. 공동행위자는 합성하는 독특한 특권, 모든 실재하는 우주 에너지들, 모든 실제적 우주 영들, 그리고 모든 실질적 우주 지능존재들을 합동시키는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다. 셋째 근원이며 중심은 우주 아버지의 신성한 계획과 영원한 목적의 결과 안에서 나타난 각가지 에너지와 다양한 창조계의 우주 통합자이다.

 

무한 영, 공동행위자는 우주적이고 신성한 사명활동자이다. 영은 아들의 자비와 아버지의 사랑을, 나아가 낙원 삼위일체의 안정되고, 변함없고 의로운 공의의 조화 속에서, 끊임없이 베푼다. 그의 영향과 품성들은 항상 너희 주변에 있으며 그들은 실제적으로 너희를 알고 진정으로 너희를 납득한다.

 

우주에 두루 공동행위자의 행위수행자들이 모든 공간의 기세와 에너지들을 끊임없이 조작한다. 첫째 근원이며 중심과 마찬가지로, 셋째 근원이며 중심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모두에 대해 응답한다. 공동행위자는 하느님의 합일성에 대한 계시이며, 그의 안에 만물 - 사물, 의미, 그리고 가치 에너지, 마음, 그리고 영들 - 이 이루어져 있다.

 

무한 영은 모든 공간에 가득 퍼져 있으며 그는 영원의 순환계에 내주한다. 그리고 영은, 아버지와 아들과 마찬가지로 완전하며 변함없으며 절대이다.

 

1. 셋째근원이며 중심의 속성

 

셋째근원이며 중심은 여러 이름들, 모든 정의되어지는 관계성과 기능의 인식으로 알려져 있다. 영 하느님으로서, 그는 아들 하느님과 아버지 하느님의 동등한 합동하는 그리고 신성한 품성이다. 무한 영으로서, 그는 전재(全在)하는 영적 영향력이다. 우주 조작자로서, 그는 힘- 조정 창조체들의 조상이며 공간의 조화우주 기세들을 활성화시키는 이이다. 공동행위자로서, 그는 아버지-아들의 공동 대표자이며 동반자신분 집행자다. 절대 마음으로서, 그는 우주 전반에 걸친 지성 자질의 근원이다. 행동의 하느님으로서, 그는 동작과 변화 그리고 관계의 명백한 조상이다.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속성들 중 일부는 아버지로부터 기인되고 일부는 아들로부터 기인되지만, 반면에 아버지 또는 아들 안에서 실제적으로 그리고 품성적으로 현존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다른 것들, 셋째 근원이며 중심을 영구화시키는 아버지- 아들 동반자 관계가 낙원의 절대성이라는 영원한 사실과 공명 속에서 그리고 인식 속에서 일치하여 기능하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방법 이외에는 거의 설명될 수 없는 속성들이 여전히 있다. 공동 창조주는 신(神)의 첫째 그리고 둘째 품성체의 병합된 그리고 무한한 개념의 충만함을 구현한다.

 

너희가 아버지를 기원적 창조자로 상상하고 아들을 영적 관리자로 상상하는 반면, 너희는 셋째 근원이며 중심을 우주 합동자, 무제한한 협동의 사명활동자로 생각해야만 한다. 공동행위자는 모든 실제적 실체를 상호 관련시키는 존재이다. 그는 아버지의 생각과 아들의 말씀의 말할 수 있는 자 신(神)이고 그리고 행동으로 중앙 섬의 물질적 절대성을 영원토록 간주한다. 낙원 삼위일체는 진보(進步)라는 우주 계층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는 공동 창조주와 진화(進化)하는 최극존재의 권역이다. 어떤 실제적 또는 실재화 되는 실체도 셋째 근원이며 중심과의 결과로서 생기는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우주 아버지는 전(前)에너지, 전(前)영 그리고 품성의 영역들을 다스리며 영원 아들은 영적 행동들의 구체들을 지배한다. 낙원 섬의 현존은 물리적 에너지와 물질화되는 힘의 권역을 통합한다. 공동행위자는 아들을 대표하는 무한 영으로서 뿐만 아니라 낙원의 기세와 에너지들의 우주 조작자로서 작용하고, 그리하여 우주 실재(實在)와 그리고 절대 마음을 생기게 한다. 공동행위자는 광우주에 두루 적극적이고 뚜렷한 품성으로서 기능하는데, 특별히 영적 가치들, 물리적-에너지 관계들 그리고 참된 마음 의미들의 좀더 높은 구체들에서 그러하다. 그는 에너지와 영이 연합하고 상호 작용하는 곳마다 그리고 그러한 때마다 특별하게 기능한다. 그는 마음과의 모든 상호작용들을 지배하고, 영적인 세계에서 거대한 힘을 발휘하며, 에너지와 물질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셋째 근원은 항상 첫째 근원이며 중심의 본성에 대한 표현이다.

 

셋째 근원이며 중심은 첫째 근원이며 중심의 전재(全在)성을 완전하게 그리고 자격조건 없이 공유하는데, 때로는 전재(全在) 영으로 불린다. 특유함 속에서 그리고 매우 품성적인 방법으로, 마음의 하느님이 우주 아버지 그리고 영원 아들의 전재(全在)성을 공유한다. 영의 지식은 심오하고 완벽하다. 공동 창조주는 우주 아버지의 전능의 어떤 위상들을 현시하지만 마음의 권역 안에서만 실제적으로 전능하다. 신(神)의 셋째 품성체는 마음 영역들에 대한 지적 중심이고 우주적 관리자이며 이 면에 있어서 그는 절대이다 - 그의 주권은 분별불가이다.

 

공동행위자는 아버지-아들 동반자 관계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모든 행동들은 아버지-낙원 관계를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때로는 그리고 특정 기능들에 있어서는 그가 경험적 신(神)들 - 최극자 하느님과 궁극자 하느님 - 의 발전의 미완성을 보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무한한 신비가 있다. 무한자는 아들 안에서 그리고 낙원으로서 자신의 무한을 동시적으로 계시했고, 그리고는 신성에서 하느님과 동등하고, 아들의 영적 본성을 반영하고, 그리고 낙원 원형틀을 활성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존재, 주권에서는 잠정적으로 종속적이지만 행동에서는 여러 면에서 명백하게 가장 다재다능한 존재가 실재(實在)로서 솟는다. 그리고 행동에서의 그러한 명백한 탁월성은, 심지어 물리적 중력 - 낙원 섬의 우주적 현시(顯示) - 보다도 우월한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속성 안에서 나타난다.

 

물리적인 에너지와 사물들에 대한 이 초월적 조정 이외에도, 무한 영은 자신의 영적 사명활동 속에 그토록 절묘하게 계시된 인내와 자비 그리고 사랑의 속성들을 최상으로 증여 받았다. 영은 사랑을 베풀고 그리고 자비로 공의를 덮기에 최극으로 적당하다. 영 하느님은, 기원이며 영원한 아들의 숭고한 친절과 자비로운 애정 전체를 소유한다. 너희가 기원된 우주는 공의라는 모루와 고난이라는 망치 사이에서 만들어졌지만 그 망치를 사용하는 자들은 자비의 자녀들, 무한 영의 영 후손들이다.

 

2. 전재(全在)하는 영

 

하느님은 삼중적 의미에서 영이다. 그 자신이 영이며 그는 그의 아들 안에서 자격조건 없이 영으로 나타나며 공동행위자 안에서 마음과 결연된 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영적 실체들 이외에, 우리는 경험적 영 현상들 - 최극존재와 궁극 신(神) 그리고 신(神) 절대자의 영들 - 을 식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한 영은 아들이 우주 아버지에 대한 보충적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 아들을 보충한다. 영원 아들은 아버지의 영성화된 품성체구현이며 무한 영은 영원 아들과 우주 아버지의 품성체구현된 영성화이다.

 

유란시아의 민족을 낙원 신(神)들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초물질적 힘의 영적 기세와 근원들인 속박되지 않은 많은 계통들이 있다. 생각조절자들의 우주 아버지와의 직접적인 연결, 영원 아들의 영- 중력의 광범위한 영향, 그리고 공동 창조주의 영적 현존이 존재한다. 아들의 영과 영의 영 사이에는 기능적으로 차이가 있다. 셋째 품성체는 그의 영적 사명활동에서, 마음과 영이 합하여 또는 영 단독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 낙원 현존들 이외에, 유란시아 인들은 신성의 이상(理想)과 최극 완전의 목표를 향하여 위쪽으로 그리고 안쪽으로 향하는 진정한 목적과 진심의 정직을 언제까지나 인도하는, 사랑의 품성들로 이루어진 저들의 거의 끝없는 배열들로 인한, 지역우주와 초우주의 영적 영향들과 행동들 덕분에 이익을 얻는다.

 

우리는 영원 아들의 우주 영의 현존을 안다 - 우리는 틀림없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무한 영, 신(神)의 셋째 품성체의 현존은 심지어 필사자 사람도 알 수 있는데, 이는 물질적 창조체들이, 인류 종족들에 대한 증여인 지역우주의 성령으로 기능하는 이 신성한 영향의 혜택을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들은 또한 조절자, 우주 아버지의 비품성적 현존도 어느 정도 의식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을 들어올리고 그리고 영성화하는 데 일하는 이들 신성한 영들 모두는 일치 속에서 그리고 완전한 협동 속에서 활동한다. 그들은 필사자 상승과 완전성 달성계획들에 대한 영적 작용 안에서 하나로서 존재한다.

 

3. 우주 조작자

 

낙원 섬은 물리적 중력의 근원이며 본체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체 물리적 우주들의 우주 안에서 중력이 가장 사실이며 영원하게 믿을만한 것 중 하나임을 너희에게 알려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 공동으로 후원되는 기세들과 에너지들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면, 중력은 변경되거나 폐기될 수 없는데, 그것은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품성체에게 위탁되어 왔으며 기능적으로 그와 연합되어 있다.

 

무한 영은 독특하고도 놀라운 힘 - 반중력(反重力) - 을 소유한다. 이 힘은 아버지나 아들 안에서는 기능적으로 (관찰되도록) 현존하지 않는다. 셋째 근원 속에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적 중력의 끌어당기는 능력에 저항하는 이 능력은 우주 관계들의 특정 위상들에 대한 공동행위자의 품성적 반응들 안에서 계시된다. 그리고 독특한 이 속성은 무한 영의 특정한 높은 품성들에게 전송할 수 있다.

 

반중력은 지역 구조 안에서 중력을 폐기시킬 수 있으며 그것은 동일한 기세 현존의 행사에 의해 그렇게 한다. 그것은 오직 물질적 중력과 관련하여 작용하며, 마음의 활동이 아니다. 자이로스코프의 중력-저항 현상은 반중력의 효과를 잘 예시하지만 반중력의 원인을 예시하는 데는 아무 가치는 없다.

 

공동행위자는 기세를 초월하고 에너지를 중화시킬 수 있는 힘들을 더욱 나타낸다. 그러한 힘들은 물질화 지점까지 이르는 에너지 늦춤으로 그리고 너희에게 알려지지 않은 다른 기법으로 작용한다.

 

공동 창조주는 에너지도 아니고 에너지의 근원도 아니고 에너지의 운명도 아니다. 그는 에너지의 조작자이다. 공동 창조주는 활동 - 동작, 변화, 변형, 합동, 안정, 그리고 평형 - 이다. 낙원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 조정에 종속하는 에너지들은 셋째 근원이며 중심과 그의 다중 매개체들의 활동에 대해 자연적으로 응답한다.

 

우주들의 우주는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힘- 통제 창조체들, 물리통제자들, 힘 지휘자들, 힘 중심들, 그리고 물리적 에너지들에 대한 규제와 안정에 관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행동의 하느님의 다른 대표자들로 가득 차 있다. 물리적 기능을 갖는 독특한 이 창조체들 전체는 반중력과 같은 힘 조정의 다양한 속성들을 갖는데, 그들은 광우주의 물질과 에너지의 물리적 평형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활용한다.

 

행동의 하느님의 이 모든 물질적 활동들은 자신의 기능을 낙원 섬에 관계시키는 것으로 보이며, 정말로 힘의 매개자들은 모두 영원한 섬의 절대성을 존중하고 심지어는 거기에 의존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공동행위자는 낙원을 위해서나, 또는 응답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그는 직접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위해 활동한다.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무(無)품성적, 비(非)품성적, 그리고 품성적이지 않은 다른 행위들은 모두 공동행위자 자신의 의지적인 행동들이다. 그것들은 어떤 존재나 또는 어떤 것의 반영, 파생 또는 반향도 아니다.

 

낙원은 무한성의 원형틀이다. 행동의 하느님은 그 원형틀을 활성화시키는 분이다. 낙원은 무한성의 물질적 지레받침이며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매개자들은 물리적 창조의 기능구조 안으로 물질적 차원의 동기를 주고 자발적 행위를 주입시키는 지능의 지렛대들이다.

 

4. 절대 마음

 

그의 물리적 그리고 영적 속성들로부터 구분되는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지적 본성이 존재한다. 그러한 본성에 접촉하는 것은 어렵지만 연합 - 품성적은 아니지만 지적으로 - 할 수는 있다. 그것은, 셋째 품성체의 물리적 속성들 그리고 영적 성격과 기능의 마음 차원에서 구별할 수 있지만, 이 본성은 품성들의 식별에 대하여 독립적으로 물리적 또는 영적 현시(顯示) 로서 기능하는 일은 결코 없다.

 

절대 마음은 셋째 품성체의 마음이다. 그것은 영 하느님의 품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마음은, 기능하고 있는 존재 안에서, 에너지, 혹은 영, 또는 그 모두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마음은 에너지 안에 선천적으로 들어 있지 않다. 에너지는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고 마음에 대해 응답할 수 있으며 마음은 에너지 위에 얹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의식이 순수한 물질적 차원 안에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마음이 순수한 영에 더해져야만 하는 것도 아닌데, 이는 영이 태생적으로 의식적이고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영은 항상 지능적인데, 어떤 면에서는 마음이 있다. 그것은 이 마음 또는 저 마음일 수 있고, 그것이 전(前)마음 또는 초(超)마음 심지어는 영적 마음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것 그리고 아는 것과 동등하다. 영의 통찰력은 마음의 의식을, 초월하고, 초래하며 이론적으로 앞서서 일어난다.

 

공동 창조주는 마음의 권역, 우주적 지능존재의 영역들 안에서만 절대적이다.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마음은 무한하며 그것은 우주들의 우주의 활동적이고 기능하는 마음 순환회로들을 철저하게 초월한다. 일곱 초우주들의 마음 자질은 일곱 주(主) 영들, 공동 창조주의 1차 품성들로부터 기인된다. 이 주(主) 영들은 조화우주 마음으로서 광우주에 마음을 분배하며, 너희 지역우주는 조화우주 마음의 오르본톤 유형의 네바돈 변형으로 가득 퍼져있다.

 

무한 마음은 시간을 상대하지 않으며, 궁극적 마음은 시간을 초월하며, 조화우주 마음은 시간의 제약을 받는다. 그리고 공간에서도 그러하다. 무한 마음은 공간으로부터 독립되지만, 무한으로부터 마음의 보조차원들로 강하할 때, 지성은 공간의 사실과 한계들을 점점 더 고려해야만 한다.

 

조화우주 기세는, 조화우주 마음이 영에 응답할 때 똑같이, 마음에 응답한다. 영은 신성한 목적이고, 영 마음은 행동하는 신성한 목적이다. 에너지는 사물이고, 마음은 의미이며, 영은 가치이다. 심지어 마음은, 영원 안에서 상호 동족관계가 암시되는 에너지와 영 사이의 그 상대적 관계들을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도 수립한다.

 

마음은 영의가치들을 지능의 의미들로 변형시키며 의지작용은 물질적 그리고 영적 권역들 모두에서 마음의 의미들이 열매를 맺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낙원 상승은 영, 마음 그리고 에너지에 있어서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성장을 포함한다. 품성은 경험적 개별성의 이들 요소의 통합자이다.

 

5. 마음의 사명활동

 

셋째 근원이며 중심은 마음에서 무한하다. 만일 우주가 무한을 향해 성장해야 한다면, 그의 마음 잠재는 여전히 한없는 수의 창조체들에게, 적절한 마음 그리고 그 밖의 지능의 필요조건들을 부여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창조된 마음의 권역 안에서 셋째 품성체는 그의 합동 그리고 종속 동료들과 함께 최극을 다스린다. 창조체 마음의 영역들은 셋째 근원이며 중심 안에서 배타적으로 기원되며 그는 마음의 증여자이다. 심지어 아버지 단편들도 무한 영의 마음 행동과 영적 기능에 의해 그 길이 그들에 맞게 준비되기 전까지는 사람들의 마음에 내주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발견한다.

 

마음의 독특한 특징은 그것이 그러한 광범위한 생명에게 증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창조 동료들과 창조체 동료들을 통하여 셋째 근원이며 중심은 모든 구체들에 있는 모든 마음들에 대해 사명활동한다. 그는 그 지역우주들의 보조자들을 통해 인간 그리고 인간 이하 지성존재에 대해 사명활동하며, 물리통제자들의 매개체들을 통해서는 가장 원시적인 유형의 살아있는 물체들 중 가장 낮은 비경험적 실존개체들에 대해서까지 사명활동한다. 그리고 마음-영 또는 마음-에너지 품성들의 사명활동이 항상 마음의 동향이다.

 

신(神)의 셋째 품성체가 마음의 근원이기 때문에, 진화하는 의지창조체들이 영원 아들 또는 우주 아버지 둘 중 어느 하나에 대해 하는 것보다 무한 영에 대한 이해할 수 있는 개념들을 형성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매우 자연스럽다. 공동 창조주의 실체는 바로 그 인간 마음의 실재 안에서는 불완전하게 드러난다. 그 공동 창조주는 조화우주 마음의 조상이며, 그리고 사람의 마음은 개별화된 순환회로로서, 그것은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창조적 딸에 의해 지역우주 안에 증여되어지는 그 조화우주 마음의 비품성적 부분이다.

 

셋째 품성체가 마음의 근원이기 때문에, 마음의 모든 현상을 신성하다고 짐작해서 가정하면 안 된다. 인간 지능은 동물 종족의 물질적 기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물리적 본성이 낙원의 아름다움과 조화에 대한 참된 계시가 아닌 것처럼, 우주 지능은 마음이신 하느님의 참된 계시가 아니다. 완전함이 자연 안에 있지만 자연은 완전하지 않다. 공동 창조주는 마음의 근원이지만 마음은 공동 창조주가 아니다.

 

유란시아에서, 마음은 생각 완전성의 본질과 너희의 미성숙한 인간 본성의 진화하는 정신활동 사이에 있는 하나의 타협이다. 너희의 지적 진화에 대한 계획은 정말로 숭고한 완전성의 하나이지만, 육신의 장막 안에서 너희가 기능하는 한 너희는 그러한 신성한 목표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마음은 정말로 신성한 기원이 있고, 신성한 운명을 갖지만, 너희 필사자 마음들은 아직 신성한 존엄성이 없다.

 

너무나도 종종, 아주 너무나도 종종, 너희는 너희 마음을 불성실로 훼손시키고 부당함으로 상처를 입히며 너희는 그것을 동물적 두려움에 굴복시키고 쓸데없는 걱정으로 왜곡시킨다. 그래서 마음의 근원은 신성하지만, 상승하는 너희 세계에서는 너희가 잘 아는 것처럼 마음은 위대한 찬미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찬양이나 경배는 더 더욱 될 수 없다. 미성숙하고 비활동적인 인간 지성의 깊은 사색은 오직 겸허함의 반응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6. 마음-중력 순환회로

 

우주적 지능존재인 셋째 근원이며 중심은 모든 창조 안에서 각 마음, 각 지능존재를 품성적으로 의식하며, 그리고 그는 멀리 퍼지는 우주들 안에 있는 이 모든 물리적, 모론시아적, 그리고 마음 자질의 영적 창조체들과 품성적이고도 완전한 접촉을 유지한다. 마음의 이 모든 활동들은, 셋째 근원이며 중심 안에 초점화구현 되어있고 그리고 무한 영의 품성적 의식의 한 부분인, 절대 마음- 중력 순환회로 안에 장악된다.

 

아버지가 모든 품성을 자신에게로 이끌고 그리고 아들이 모든 영적 실체를 끌어당기는 것과 매우 흡사하게, 공동행위자도 그렇게 모든 마음들에게 이끄는 힘을 행사한다. 그는 우주적 마음 순환회로를 분별불가적으로 지배하고 조정한다. 모든 참되고 진정한 지적 가치들, 오든 신성한 생각들과 완전한 관념들은 반드시 마음의 이 절대 순환회로 안으로 이끌린다.

 

마음 중력은 물질적 그리고 영적 중력과 무관하게 작용할 수 있지만, 그 두 개가 부딪치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마음 중력이 항상 기능한다. 셋 전체가 연합할 때, 품성 중력이 물질적 창조체 - 물리적 또는 모론시아적, 유한 또는 아(亞)절대 - 를 포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과는 상관없이, 마음의 자질부여는 비품성 존재 안에서도, 그들이 생각하는 자격을 갖추게 하며 그리고 품성이 전적으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의식함이 있도록 자질을 부여한다.

 

인간적인 혹은 신성한, 불멸적인 혹은 잠재 불멸적인, 품성 존엄성의 자아신분은 어떤 식으로도 영, 마음 또는 물질에서 기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 아버지의 증여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품성 중력의 출현에 전제조건인, 영과 마음과 그리고 물질적 중력의 상호작용도 아니다. 아버지의 순환회로는 영 중력에 반응하지 않는 마음과-물질의 존재를 포옹하거나, 혹은 물질적 중력에 반응하지 않는 마음과- 영의 존재를 포함할 수 있다. 품성 중력의 작용은 항상 우주 아버지의 의지적 활동이다.

 

마음이, 순수하게 물질적인 존재들 안에서 연합되는 에너지이고, 순수하게 영적인 품성들 안에서 연합되는 영이지만, 인간을 포함하여 수많은 품성 계층들은 에너지와 영 모두와 연합되는 마음들을 소유한다. 창조체 마음의 영적 측면들은 반드시 영원 아들의 영- 중력 당김에 대해 응답한다. 물질적 특성을 지닌 것들은 물질적 우주의 중력 충동에 응답한다.

 

조화우주 마음은, 에너지나 영 그 어느 것과도 연합하지 않을 때, 물질적 또는 영적 순환회로 그 어떤 것의 중력 요구에 따르지 않는다. 순수 마음은 오직 공동행위자의 우주적 중력 장악에만 종속된다. 순수 마음은 무한 마음과 가까운 일가이고, 무한 마음은 (영과 에너지의 절대성의 이론적 합동) 분명히 자체로서의 하나의 법칙이다.

 

영-에너지 분기가 크면 클수록, 마음의 관찰 가능한 기능도 더욱 커지며 에너지와 영의 다양성이 적으면 적을수록, 마음의 관찰 가능한 기능도 적어진다. 분명하게, 조화우주 마음의 최대 기능은 공간의 시간 우주들 안에 있다. 이곳에서 마음은 에너지와 영의 중간- 지대에서 기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음의 더 높은 차원들에서는 이것은 참말이 아니다. 낙원에서는, 에너지와 영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마음-중력 순환회로는 신뢰할 만하다. 그것은 낙원에 있는 신(神)의 셋째 품성체로부터 발산되지만, 관찰 가능한 마음의 기능이 모든 다 예측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알려진 창조에 두루, 그 기능이 예측될 수 없는 거의 납득할 수 없는 현존이 마음의 이 순환회로와 나란히 있다. 우리는 이 예측 불가능성이 우주 절대자의 기능에 부분적으로 기인한다고 믿는다. 이 기능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 한다 그것이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오직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오직 창조체들에 대한 관계에 관하여, 우리는 오직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유한 마음의 예측 불가능성의 어떤 위상들은 최극존재의 미완성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공동행위자와 우주 절대자가 접(接)할 가능성이 있는 그러한 곳인, 광대한 활동의 지대가 존재한다. 마음에 관한 알려지지 않은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것을 확신한다. 무한 영은 모든 창조체들에 대한 창조주의 마음의 완전 표현이며 최극존재는 자신들의 창조주에 대한, 모든 창조체들의 마음의 진화하는 표현이다.

 

7. 우주 반영

 

공동행위자는 정신적, 물질적, 그리고 영적인 것에 대한 동시적 인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우주 실제성의 모든 차원들을 합동시킬 수 있다. 이것이 우주 반영성의 현상, 그들이 초우주에 두루 배출함에 따라서 그리고 어떤 원하는 지점에서도 모든 이 정보와 지식을, 반영성에 의해, 초점화구현되어 만물을 보고 듣고 느끼고 그리고 아는, 독특하고도 불가해한 힘이다. 반영성의 행동은 일곱 초우주들의 본부 세계들 각각에서 완전성으로 보인다. 그것은 또한 초우주들 모든 구역들에 두루 그리고 지역우주들의 경계선 안에서 작용한다. 반영성은 최종적으로 낙원에 초점화구현된다.

 

반영성의 현상은, 초우주 본부 세계에서 그곳에 위치한 반영적 품성들의 놀라운 행위들에서 나타나듯이, 모든 창조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실재 위상의 가장 복잡한 내부연합을 나타낸다. 영(靈) 계통들은 아들에게로, 물리적 에너지는 낙원에로, 마음은 셋째 근원에게로 되돌아 추적할 수 있지만 우주 반영성의 비상한 현상 안에는 셋 모두의 독특하고도 이례적인 통합이 있는데, 그로서 우주 통치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존재발생과 동시에 즉각적으로 먼 곳의 조건들을 알 수 있도록 그렇게 연합되어 있다.

 

우리는 반영성의 기법 대부분을 이해한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많은 위상들이 있다. 우리는 공동행위자가 마음 순환회로의 우주 중심이라는 것과, 그가 조화우주 마음의 조상이라는 것, 그리고 조화우주 마음이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절대 마음 중력의 지배 아래에서 작용한다는 것을 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조화우주 마음의 순환회로들이 알려진 모든 실재의 지적 차원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안다. 그들은 우주 공간 보고서들을 담고 있으며, 확실하게 일곱 주(主) 영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셋째 근원이며 중심 안에 집중한다.

 

유한한 조화우주 마음과 신성한 절대 마음 사이의 관계는 최극자의 경험적 마음 안에서 진화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시간의 여명기에 이 경험적 마음이 무한 영에 의해 최극자에게 증여되었다고 배웠으며, 우리는 최극 마음의 활동을 가정함으로써만, 반영성 현상의 특성들이 설명될 수 있다고 추측한다. 만일 그 최극자가 반영성에 관여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조화우주 의식의 뒤얽힌 활동행위들과 조금도 틀리지 않는 작용을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다.

 

반영성은 경험적 유한의 한계들 안에서 전지(全知)인 것처럼 나타나고, 그리고 최극존재의 현존-의식의 출현을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이 추론이 사실이라면, 그 위상들 중 어떤 것에서든지 반영성의 활용이, 최극자의 의식과의 부분적인 접촉과 동등할 것이다.

 

8. 무한 영의 품성들

 

무한 영은 자신의 힘들과 특권들 중 많은 부분을 그와 합동하고 종속되는 품성들 그리고 매개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충만한 힘을 소유하고 있다.

 

무한 영의 첫 번째 신(神)- 창조 행위는, 삼위일체와는 별개로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는 계시되지 않은 어떤 연합된 상태에서 기능함으로써, 낙원의 일곱 주(主) 영들, 우주들에 대한 무한 영의 분배자들의 실재 속에 품성체구현(稟性化)된다.

 

초우주의 본부에는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직접적인 대표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일곱 창조계들 각각은 낙원의 주(主) 영들 중 하나에게 의존하는데, 그는 그 초우주의 수도에 위치한 일곱 반영 영들을 통해 활동한다.

 

무한 영의 그 다음 그리고 계속되는 창조적 활동이 때로는 창조 영들의 생산 속에서 드러난다. 우주 아버지와 영원 아들이 창조주 아들에게 부모가 될 때마다, 무한 영은 모든 뒤따르는 우주 경험에서, 그 창조주 아들의 가까운 동료인 지역우주 창조 영에 대한 조상이 된다.

 

영원 아들과 창조주 아들들 사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한 영과 창조 영들, 창조주 아들의 지역우주 합동자들 사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전체 창조에 대한 무한 영의 그것은, 지역우주에 대한 창조 영의 그것과 같다.

 

셋째 근원이며 중심은 일정한 물리적, 모론시아적, 그리고 영적 본성의 순환회로 감독자들과 함께, 사명활동하는 영들, 사자(使者)들, 선생들, 재판관들, 조력자들, 그리고 충고자들의 광대한 대열들로서 광우주 안에 대표된다. 이 존재들 모두가 그 단어의 엄격한 의미에서, 품성들은 아니다. 유한- 창조체 다양성의 품성은 다음과 같은 특성화 되어진다:


1. 주관적 자아-의식.


2. 아버지의 품성 순환회로에 대한 객관적 응답.

 

창조자 품성들과 창조체 품성들이 존재하며, 기본적인 이 두 유형들 외에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품성들이 있는데, 무한 영에게 품성적이지만 창조체 존재들에게는 분별불가하게 품성적이 아니다. 이 셋째 근원 품성들은 아버지의 품성 순환회로의 일부분이 아니다. 첫째 근원 품성과 셋째 근원 품성은 상호 접촉할 수 있다 모든 품성은 접촉할 수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해 품성을 증여한다. 우리는 단지 왜 그렇게 하는지를 추측할 수 있을 뿐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셋째 근원이 왜 비(非)- 아버지 품성을 증여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무한 영이 너희에게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방법으로 그리고 영원 아들과의 창조적 연대 속에서 그 자신을 위해 이렇게 한다. 또한 무한 영은 첫째 근원 품성의 증여에서 아버지를 위해 활동할 수 있다.

 

셋째 근원 품성들에는 수많은 유형들이 있다. 무한 영은 특정한 힘 지휘자들과 같이, 아버지의 품성 순환회로에 속하지 않은 수많은 집단들에게, 셋째 근원 품성을 증여한다. 마찬가지로 무한 영은, 순환회로를 이루는 아버지의 창조체들에 대한 비할 데 없는 그들의 관계 안에서 그들 자신에 의한 등급 안에서, 창조 영들과 같은, 수많은 집단의 존재들을 품성들로 간주한다.

 

첫째 근원과 셋째 근원 품성들 모두는, 품성의 개념과 연결되는 사람의 모든 것 그리고 그 보다 더 많이 부여 받는다 그들은 기억, 이성, 판단, 창조적 상상력, 관념 연합, 결정, 선택, 그리고 필사자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추가적 지성의 힘을 포옹하고 있는 마음을 가진다. 소수의 예외들이 있지만 너희에게 계시된 계층들은 형태와 분명한 개체성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은 실재 존재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영 실재의 모든 계층들의 눈에 보인다.

 

너희도 현재의 물질적 눈의 제한된 시야로부터 너희가 해방되자마자 비교적 낮은 계층들에 해당하는 너희 영적 동료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며 영적 사물들의 실체에 대한 그 확대된 감수성과 함께 모론시아 형태를 부여 받는다.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기능적 가족은, 이 글들 안에서 계시된 것처럼, 세 개의 거대한 집단으로 나뉜다.

 

I. 최극 영 : 다른 것들 중에서 다음과 같은 계층들을 포옹하는 합성 기원의 집단:


1. 낙원의 일곱 주(主) 영.


2. 초우주들의 반영 영.


3. 지역우주의 창조 영.

 

II. 힘 지휘자 : 모든 조직된 공간 전체에 두루 기능하는 조정의 창조체들과 매개자들의 집단.

 

III. 무한 영의 품성 : 그들 중 일부가 의지 창조체들로서 독특함에도 불구하고, 이들 존재들이 셋째 근원 품성들이라는 것을 이 명칭이 반드시 의미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대개 세 개의 주요 부류로 나뉜다.


1. 무한 영의 높은 품성.


2. 공간의 사자(使者)무리.


3. 시간의 사명활동 영.

 

이 집단들은 낙원에서, 중앙 또는 거주 우주에서, 초우주들에서 봉사하며, 그들은 지역우주 안에서, 심지어 별자리들과 체계들 그리고 행성들에 이르기까지 기능하는 계층들을 포옹한다.

 

신성하고 무한한 영의 광대한 가족에 속하는 영 품성들은 시간과 공간의 진화 세계들의 모든 지능 창조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의 사명활동으로 봉사하는 일에 영원히 바쳐져 있다. 이 영 존재들은 필사자 사람이 혼돈으로부터 영광을 향하여 기어오르는 살아있는 사다리를 이루고 있다.

 

 

제 10 편   낙원 삼위일체

 

영원한 신(神)들의 낙원 삼위일체는 품성 절대론으로부터의 아버지의 벗어남을 촉진시킨다.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무한 품성적 의지의 무제한적 표현을 신(神)의 절대성과 완전하게 연합시킨다. 영원 아들과 신성한 기원의 다양한 아들들은, 공동행위자 그리고 그의 우주 자녀들과 함께, 시원성, 완전, 무변, 영원, 보편성, 절대성, 그리고 무한성 안에 선천적인, 달리 말하면 한계들로부터의 아버지의 해방을 효과적으로 제공한다.

 

낙원 삼위일체는 신(神)의 영원한 본성에 대한 충분한 표현과 완전한 계시를 효과적으로 제공한다. 삼위일체 고정아들들도 마찬가지로 신성한 공의에 대한 충분하고도 완전한 계시를 제공한다. 삼위일체는 신(神) 합일이며, 이 합일은, 기원적이고 합동적이며 공존하는 세 품성들,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하느님 그리고 영 하느님의 신성한 하나됨의 절대기초 위에 영원히 놓여 있다.

 

영원의 순환계에 있는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끝없는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우주 사건들에 있어서 오직 한 가지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이 낙원 삼위일체이다. 나는 삼위일체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을 바라볼 때, 나는 그 이외 어떤 것도 우주들의 우주 전체 안에서 필연적이어야만 하는 것을 찾을 수 없다. 되돌아보거나 앞을 내다 볼 때, 현재의 주(主)우주는 삼위일체 없이 생각될 수 없다. 낙원 삼위일체가 주어졌기에, 우리는 만물을 행하는 교차적 또는 복합적 방법에 이르기까지 생각 할 수 있지만,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영의 삼위일체 없이는, 신(神)의 절대적 하나됨 앞에서 무한자가 어떻게 삼중(三重)의 그리고 합동의 품성체구현을 성취할 수 있는지 우리가 알 수 없다. 창조에 대한 어떤 다른 개념도, 신(神)의 삼중적 품성체구현 안에 선천적인 의지적 해방의 충만함 과 결합하여, 신(神) 합일 안에 선천적인 절대성의 완벽함의, 삼위일체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다.

 

1. 첫째 근원이며 중심의 자아-분배

 

영원 안에서 되돌아가면, 아버지가 심오한 자아- 분배의 원칙을 개시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우주 아버지의 사심이 없고, 사랑하는 그리고 사랑스러운 본성 안에는, 그가 증여하거나 위임하기에 불가능하다고 분명하게 발견한 오직 그 힘들과 그 권한에 대해서만 자신을 그 실행으로 남겨두는 그 어떤 것들이 선천적으로 있다.

 

우주 아버지는 모든 다른 창조주 또는 창조체에게 증여될 수 있었던 자신의 모든 부분을 처음부터 자신으로부터 벗어버렸다. 그는 위임될 수 있는 모든 힘과 모든 권한을 자신의 신성한 아들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연합된 지능체들에게 위임해 왔다. 그는 건네줄 수 있는 행정적 권한의 모든 특권을, 그의 주권자 아들들에게, 그들의 각 우주들 안으로, 실제적으로 건네주었다. 지역우주의 일들에 있어서, 그는 영원 아들이 기원적인 그리고 중앙에 있는 우주 안에서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주권자 창조주 아들 각각을 완전하고 유능하며 권위 있게 만들어 왔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 그리고 자기 속성 전체를, 모든 방법으로, 모든 시대에, 모든 장소에서, 그리고 모든 자들에게, 그리고 그의 중앙 내주를 제외한 모든 우주에서 그가 자신을 벗을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것을, 품성소유의 존엄성과 거룩함과 함께 내어주었고, 실제적으로 증여하여 왔다.

 

신성한 품성은 자아- 중심적이 아니며 자아- 분배와 품성의 나누어 가짐은 신성한 자유의지 자아신분을 특징짓는다. 창조체들은 다른 품성적 창조체들과 연합하기를 갈망하며 창조주들은 그들의 우주 자녀들과 신성을 나누도록 감동되며 무한자의 품성은, 두 합동 품성들, 영원아들과 공동행위자로서 자신의 존재의 실체성과 동등성을 나누어가지는, 우주 아버지로서 나타난다.

 

아버지의 품성과 신성한 속성들에 관한 지식을 위하여 우리는 항상 영원 아들의 계시에 의존할 것인데, 왜냐하면 창조의 공동 행위가 발효되었을 때, 신(神)의 셋째 품성체가 품성 실재로 떠오르고 자신의 신성한 부모들에 대한 병합된 개념들을 실행하였을 때, 아버지는 분별 불가 품성으로서, 존재하기를 중단하였기 때문이다. 공동행위자가 존재하게 되고 창조의 중앙 핵 이 물질화됨에 따라, 어떤 영원한 변화들이 발생되었다. 하느님은 자신의 영원 아들에게 절대적 품성으로서 자신을 주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무한성의 품성"을 자신의 오직 하나- 낳은 아들 에게 증여한 반면, 그 둘 모두는 무한 영"에게 그들의 영원한 결합의 "공동 품성"을 증여하였다.

 

유한 마음의 개념을 벗어나는 이들 그리고 다른 이유들 때문에, 그것이 영원 아들 안에서 우주적으로 계시되고, 아들과 함께 무한 영 안에서 우주적으로 활동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인간 창조체가 하느님의 무한한 아버지- 품성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느님의 낙원 아들들이 진화하는 세계들을 방문하고 때로는 심지어 필사자 육신과 비슷한 모습으로 그곳에 거주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증여들이 필사자 사람으로 하여금 신성한 품성의 본성과 성격 중 일부를 실제적으로 알 수 있게 만들기 때문에, 그 행성 구체들의 창조체들은 이 낙원 아들들의 증여들을 아버지와 아들과 영에 관한 확실하고도 믿을만한 정보로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2. 신(神) 품성체구현

 

삼위일체화 기법에 의해, 아버지는 분별불가 영 품성을 벗어버리고, 그것이 곧 아들이지만, 그렇게 함에 있어서 그는 스스로 바로 이 아들의 아버지가 되며 그리하여 창조되는, 결과로서 생기는, 또는 또 다른 지능적 의지 창조체들의 품성체구현 유형들의 신성한 아버지가 되기에 제한이 없는 능력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절대적이고 분별불가의 품성으로서 그 아버지는, 오직 아들로서 또는 아들과 함께 기능할 수 있지만, 품성적 아버지로서 그는 지능적 의지 창조체들의 서로 다른 차원의 다양한 무리에게 품성을 계속 증여한다, 그리고 이 거대한 우주 자녀 가족과 사랑하는 연합의 품성적 관계를 영원토록 유지한다.

 

아버지가 자신의 충만함을 자기 아들의 품성에게 증여한 후에, 자아- 증여의 이 행위가 완성되고 완전할 때, 그리고 아버지- 아들 결합 안에 그렇게 실재하는 무한 힘과 본성의, 영원한 동반자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다른 존재를 여전히 이루는 그 본질특성들과 속성들을 공동으로 증여 한다. 그리고 이 공동 품성, 무한 영은 신(神)의 존재적 품성체구현을 완성한다.

 

아들은 하느님의 아버지신분에 필요불가결하다. 영은 둘째 그리고 셋째 품성체의 동료성에 필요불가결하다. 세 품성체가 사회집단의 최소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공동행위자의 필연성을 믿게 하는 많은 전체 이유들 중 가장 작은 것이다.

 

첫째 근원이며 중심은 무한 아버지-품성, 한이 없는 근원 품성이다. 영원 아들은 분별불가 적 품성- 절대자, 하느님의 품성적 본성의 완전한 계시로서 모든 시간과 영원에 두루 계시는 신성한 존재이다. 무한 영은 공동 품성, 영존하는 아버지-아들 결합의 독특한 품성적 결과이다.

 

첫째 근원이며 중심의 품성은 영원 아들의 절대 품성을 뺀 무한성의 품성이다. 셋째 근원 이며 중심의 품성은 해방된 아버지-품성과 절대 아들-품성의 결합의 초(超)부가적 결과이다.

 

우주 아버지와 영원 아들 그리고 무한 영은 독특한 품성들이며 아무도 중복되지 않으며 각자가 기원적이며 모두 결합되어 있다.

 

영원 아들은 신성한 품성 관계성의 충만함, 아버지와의 아들관계와 영에 대한 아버지 되심 둘 모두와 그리고 아버지- 조상과 영- 연합으로의 둘 모두의 신성한 동등성에 대한 의식(意識)을 홀로 경험한다. 아버지는 자신과 동등한 아들을 가지는 경험을 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어떤 조상되는 선조도 없음을 안다. 영원 아들은 아들관계의 경험, 품성 선조에 대한 인식을 가지며, 동시에 아들은 무한 영에 대해 공동 부모가 됨을 의식한다. 무한 영은 이중적 품성 선조를 인식한다, 그러나 합동 신(神) 품성에 대해서 부모가 되지는 않는다. 신(神) 품성체구현의 존재적 주기는 영과 함께 완벽성을 달성하며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1차 품성들은 경험적(經驗的)이고 숫자로서 일곱이다.

 

나는 낙원 삼위일체 안의 기원에 속한다. 나는 삼위일체를 합일된 신(神)으로 알고 있다; 또한 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그들의 분명한 품성적 능력 안에서 존재하고 활동함을 안다. 나는 그들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활동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집단화 안에서 그들의 행위를 합동시키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이 일곱 개의 다른 단수적 그리고 복수적 능력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일곱 연합체들이 그러한 신성 조합을 위한 가능성을 다 소모함으로서, 우주의 실체들이 가치, 의미 그리고 품성의 일곱 변화들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3. 신(神)의 세 품성체


오직 하나의 신(神)만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신(神)의 세 가지 긍정적이고 신성한 품성체구현들이 존재한다. 신성한 조절자들을 받는 사람의 자질에 관하여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였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형상대로 필사자 사람을 만들자." 복수(複數)의 신(神)의 활동들과 행위들에 대해 유란시아의 기록들에 두루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세 근원이며 중심들의 실재와 작업을 인식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아들과 영이 삼위일체 연합 안에서 아버지에 대한 동일하고 동등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배웠다. 영원 안에서 그리고 신(神)들로서 그들은 틀림없이 행하지만, 시간 안에서 그리고 품성들로서는 그들이 매우 다양한 본성의 관계성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낙원으로부터 우주들을 바라볼 때, 이 관계성들은 매우 비슷하게 보이지만, 공간의 권역들로부터 바라보았을 때에는, 그들은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신성한 아들들은 정말로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영의 자녀들은 정말로 "하느님의 활동"이다. 하느님은 아들을 통하여 그리고 아들과 함께 말씀하고 무한 영을 통하여 활동하는 반면, 모든 우주 활동에 있어서 아들과 영은 절묘하게 형제적이며, 영광을 받고 신성하게 존경을 받는 공동 아버지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을 갖는 동등한 두 형제로서 일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본성에서 분명하게 동등하고 존재에서 합동을 이루지만, 그들의 우주 행위에 있어서는 명백한 차이들이 있으며, 홀로 활동할 때에는, 신(神)의 각 품성체가 절대성 안에서 분명하게 제한된다.


우주 아버지는, 아들과 영을 구성하는 품성, 힘, 그리고 속성들에 대한 자신의 자아-의지적 벗어버림 이전에, 분별불가적, 절대적, 무한적 신(神)이었던 것으로 (철학적으로 고려할 때) 보인다. 그러나 아들이 없는 그러한 이론적 첫째근원이며 중심은 어떤 말의 의미에서 보더라도 우주 아버지라고 간주될 수 없다; 아버지신분은 아들관계 없이는 실제가 아니다. 더욱이, 전체적인 감각에 있어서 절대적이어야만 하는 아버지는 영원하게 먼 어떤 순간에 홀로 존재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렇게 외롭게 존재한 적이 결코 없으며; 아들과 영 둘 모두 아버지와 함께 공동영원이다. 첫째근원이며 중심은 항상 기원 아들의 영원한 아버지이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며 아들과 함께 무한 영의 영원한 선조였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가 절대적 아버지신분과 절대적 의지를 제외한 절대성의 모든 직접적 현시들을 벗어버린 것을 관찰한다. 우리는 의지가 양도할 수 없는 아버지의 속성인지 아닌지 알지 못 한다; 우리는 오직 그가 의지를 벗지 않았음을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의지의 무한성은 첫째근원이며 중심 안에 영원하게 선천적인 것이 분명하다.


품성의 절대성을 영원 아들에게 증여함에 있어서, 우주 아버지는 품성 절대론의 족쇄로부터 벗어났지만, 그렇게 하면서 그는 그로 하여금 품성-절대자로서 홀로 활동하는 것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단계를 거친다. 그리고 공존하는 신(神) ─ 공동행위자 ─ 의 최종적 품성체구현으로, 절대에서의 신(神) 기능의 전체성과 관련된, 세 신성한 품성들의 불가결한 삼위일체설의 상호의존이 잇따라 일어난다.


하느님은 우주들의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품성들의 아버지-절대자이다. 아버지는 행동의 자유에 있어서는 품성 절대이지만, 그러나 만들어진, 만들어지고 있는, 그리고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시간과 공간의 우주들 안에서, 낙원 삼위일체를 제외하면 아버지는 전체 신(神)으로서 인식할 수 있는 절대가 아니다.


첫째근원이며 중심은 하보나 밖에서 다음과 같은 현상적 우주들 안에서 기능한다:


1. 창조자로서, 창조주 아들들, 그의 손자들을 통하여.


2. 조정자로서, 낙원의 중력 중심을 통하여.


3. 영으로서, 영원 아들을 통하여.


4. 마음으로서, 공동 창조주를 통하여.


5. 아버지로서, 그는 자신의 품성 순환회로를 통하여 모든 창조체들과 어버이의 접촉을 유지한다.


6. 한 품성체로서, 그는 자신의 배타적 단편(斷片)으로 ─ 생각조절자들에 의해 필사자 사람 안에 ─ 창조에 두루 직접적으로 활동한다.


7. 전체 신(神)으로서, 그는 오직 낙원 삼위일체 안에서 기능한다.


우주 아버지에 의한 관할권의 이 모든 양도와 위임은 전적으로 자발적이며 스스로 행한 것이다. 전능하신 아버지는 우주 권한의 이 한계들을 의도적으로 떠맡는다.


영원 아들은, 하느님 단편(斷片)들의 증여에서 그리고 다른 전(前)품성적 활동들을 제외하고, 모든 영적 관점에서 아버지와 하나로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들은 물질적 창조체들의 지적 활동이나 물질적 우주들의 에너지 활동, 그 어느 것으로도 밀접하게 동일시되지 않는다. 절대일 때 아들은 한 품성체로서 그리고 오직 영적 우주의 권역 안에서만 기능한다.


무한 영은 그의 모든 작용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우주적이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융통성이 있다. 그는 마음, 물질 그리고 영의 구체들 안에서 수행한다. 공동행위자는 아버지-아들 연합을 대표하지만, 그는 또한 자기 자신으로서 기능한다. 그는 물리적 중력, 영적 중력, 또는 품성 순환회로와는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지만, 모든 다른 우주 활동들 전체에 대체로 참여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세 존재적이고 절대적 중력 조정에 종속적이지만 반면에, 무한 영은 세 초(超)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삼중적 자질은, 절대성의 초(超)궁극 경계선에 이르기까지 1차 기세와 에너지들의 현시조차도 초월하고 겉보기에 중성화 시키는 여러 방법에 종사되어 있다. 특정의 상황들에서 이 초(超)조정들은 조화우주 실체의 1차 현시까지도 절대적으로 초월한다.


4. 신(神)의 삼위일체 결합


모든 절대적 연합체들 중에서, 낙원 삼위일체(첫 번째 삼원일체)는 품성적 신(神)의 배타적 연합체로서 독특하다. 하느님은 하느님에 관해서만 그리고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자들에게만 하느님으로서 기능하지만, 오직 낙원 삼위일체 안에서만 그리고 우주 전체성과의 관련 안에서만 절대 신(神)으로 기능한다.


영원 신(神)은 완전하게 합일되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神)의 완전하게 개별화된 세 품성체들이 있다 . 낙원 삼위일체는 첫째근원이며 중심과 그의 영원한 합동체들에 대한 그리고 나뉘지 않은 신(神)의 우주 기능들의 모든 신성한 합일에 대한 성격 특색들과 무한 힘들의 모든 다양성의 동시적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삼위일체는 비품성적 능력 안에서의 무한 품성체들 기능의 연합이지만 그러나 품성의 위반은 아니다. 미숙한 예증(例證)이겠지만, 비품성적이 되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품성적 의지에 종속하는, 집합적 실존개체를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가 형성할 수 있다.


낙원 삼위일체는 실제이다. 그것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영의 신(神) 결합으로 존재한다; 그렇지만 아버지, 아들 또는 영, 또는 그들 중 어떤 둘도 이 바로 똑같은 낙원 삼위일체에 관련하여 기능할 수 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영은 비(非)-삼위일체 방법으로 협력할 수 있다, 그러나 세 신(神)들로서는 그렇지 않다. 품성체들로서 그들은 그들이 선택하는 대로 협력할 수 있지만, 그것은 삼위일체가 아니다.


무한 영이 행하는 것은 공동행위자의 기능임을 항상 기억하라. 아버지와 아들 모두는 그 안에서, 그를 통하여 그리고 그로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로서 그리고 하나 안에서, 그리고 둘인 하나이면서 둘을 위해 활동하는, 삼위일체 신비를 밝히려고 시도하는 것은 헛된 일일 것이다:


삼위일체는 그것이 모든 고립된 조화우주 결과 또는 품성 관계성의 전체성을 설명하려는 우리 시도들 안에 고려될 정도로, 전체 우주 일들에 크게 연관되어 있다. 삼위일체는 우주의 모든 차원들에서 기능하고, 필사자 사람은 유한 차원에 제한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삼위일체로써 삼위일체에 대한 유한 개념에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는 육체 속에 있는 한 필사자로서 너희의 개별적 계몽에 따라 그리고 너희 마음과 혼의 반응과의 조화 속에서 삼위일체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너희는 삼위일체의 절대성을 매우 조금 알 수 있지만, 너희가 낙원을 향해 상승할 때 너희는, 비록 절대위는 아니지만, 최극위와 궁극위 삼위일체에 대한 계속적인 계시들과 예상치 못한 발견들 앞에 여러 차례 깜짝 놀라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5. 삼위일체의 기능


품성적 신(神)들은 속성들을 갖지만, 삼위일체가 속성들을 갖는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신성한 존재들의 이 연합은 공의 관리, 전체성 태도, 합동 행동, 그리고 조화우주 총괄 등과 같은 기능들을 갖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이 기능들은 품성가치의 모든 살아있는 실체들에 관한 한, 실제적으로 최극, 궁극 그리고 (신(神)의 제한조건들 안에서) 절대적이다.


낙원 삼위일체의 기능들은 단순히 신성이라는 아버지의 외견적 자질 전체에, 아들과 영의 품성적 실재 안에 독특하게 있는 특화된 속성들을 더한 것이 아니다. 세 낙원 신(神)들의 삼위일체 연합은, 우주적 계시, 행동 그리고 관리를 위한 새로운 의미, 가치, 힘, 그리고 역량들의 진화, 결국되어짐, 그리고 신(神)구현화를 가져온다. 살아있는 연합체들, 인간 가족들, 사회 집단들, 또는 낙원 삼위일체는 단순한 산술적 합계에 의해 증대되는 것이 아니다, 집단 잠재는 구성원 각자들의 속성들에 대한 단순한 합계를 항상 훨씬 뛰어넘는다.


삼위일체는 그 삼위일체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전체 우주를 향함에 따라서 독특한 태도를 유지한다. 그리고 그 삼위일체의 기능들은 삼위일체의 우주 태도들에 대한 관계 속에서 가장 잘 고려될 수 있다. 그러한 태도들은 동시적이고 그리고 그 어떤 고립된 상황이나 결과와 관계하여 다중적일 수 있다:


1. 유한을 향한 태도. 삼위일체의 최대 자아-제한은 유한세계를 향한 태도이다. 삼위일체는 품성체가 아니며,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의 배타적 품성체구현인 최극존재도 아니다, 그러나 최극자는 유한 창조체들에 의해 이해될 수 있는 삼위일체의 힘-품성 초점화구현에 가장 접근되어 있다. 따라서 유한세계와 관계하는 삼위일체는 때로 최극위의 삼위일체로 이야기된다.


2. 아(亞)절대를 향한 태도. 낙원 삼위일체는 유한보다는 높지만 절대보다는 낮은 차원들과 관련을 가지며, 이 관계는 때로 궁극위의 삼위일체라고 일컬어진다. 궁극자뿐만 아니라 최극자도 낙원 삼위일체를 전적으로 하게 대표하지 않지만, 자격이 갖추어지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들 각각의 차원들에 대하여, 그 각각은 경험적-힘 발달의 전(前)품성적 시대들 동안 삼위일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인다.


3. 낙원 삼위일체의 절대적 태도는 절대 실재(實在)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전체 신(神)의 행동 안에서 극에 달한다.


삼위일체 무한자는 첫째근원이며 중심의 모든 삼원일체(三元一體) 관계들에 대한 합동 행동 ─ 비(非)신(神)화 된 것뿐만 아니라 신(神)화 된 것 ─ 을 포함하며 그러므로 품성들이 이해하기에 매우 어렵다. 삼위일체를 무한한 존재로 깊은 사색함에 있어서, 일곱 삼원일체(三元一體)들을 무시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납득하기에 특별히 어려운 것들을 피할 수 있고, 어떤 모순들은 부분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낙원 삼위일체의 충만한 진리와 영원한 의 그리고 무한 완성의 세 존재들의 결코-끝남이 없는 상호 연합의 본성을, 내가 제한된 인간 마음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하는 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


6. 삼위일체 고정아들


모든 법칙은 첫째근원이며 중심으로부터 기원되며; 그는 법칙이다. 영적 법칙에 대한 관리는 둘째근원이며 중심에게 부여되어 있다. 법의 계시, 신성한 법령들에 대한 공표와 해석은 셋째근원이며 중심의 기능이다. 법칙의 적용, 공의는 낙원 삼위일체의 지역 안에서 일어나며 특정 삼위일체 아들들에 의해 수행된다.


공의는 낙원 삼위일체의 우주적 주권 안에 선천적이지만, 선함, 자비 그리고 진리는, 그 신(神) 결합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신성한 품성들의 우주 소명봉사이다. 공의는 아버지나 아들 또는 영의 태도가 아니다. 공의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소명봉사에 대한 이들 품성들의 삼위일체 태도이다. 낙원 신(神)들 중 아무도 공의의 관리를 돌보지 않는다. 공의는 결코 개인적 태도가 아니며; 그것은 항상 복수(複數) 기능이다.


실증, 공평성(자비로 조화된 공의)의 기초는, 셋째근원이며 중심의 품성들, 모든 창조의 지능 존재들의 모든 영역들과 그리고 마음들에 대한 아버지와 아들의 공동대표자, 에 의해 제공된다.


심판, 무한 영의 품성들에 의해 제출된 실증에 따른 공의의 최종 적용은, 삼위일체 고정아들들, 결합된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영의 삼위일체 본성을 함께 하는 존재들의 업무이다.


삼위일체 아들들의 이 집단은 다음의 품성들을 포옹한다:


1. 삼위일체화 최극위의 비밀.


2. 영원으로 늘계신이.


3. 옛적으로 늘계신이.


4. 완전으로 늘계신이.


5. 최근으로 늘계신이.


6. 결합으로 늘계신이.


7. 충심으로 늘계신이.


8. 지혜의 완전자.


9. 신성한 조언자.


10. 우주 검열자.


우리는 삼위일체로서 기능하는 세 낙원 신(神)들의 자녀들인데, 이는 내가 우주 검열자들인, 이 집단의 10번째 계층에 속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 계층들은 우주적 감각에서는 삼위일체의 태도의 대표자는 아니다; 그들은 집행적 심판 ─ 공의 ─ 의 권역들 안에서만 신(神)의 이 집단적 태도를 나타낸다. 그들은 그들이 배정받은 엄밀한 업무를 위하여 삼위일체에 의해 특별히 예정되었으며, 그들이 이것을 위하여 품성체구현된 그 기능들 안에서만 삼위일체를 나타낸다.


옛적으로 늘계신이와 그들의 삼위일체-기원 연합체들은 일곱 초우주들에게 최극 공평성의 정당한 심판을 나누어준다. 중앙 우주 안에서는 그러한 기능들이 이론적으로만 존재한다; 거기에서 공평성은 완전 안에서 자명하고, 하보나 완전은 부조화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한다.


공의는 정의로움에 대한 집단적 생각이다; 자비는 그것의 품성적 표현이다. 자비는 사랑의 태도이며; 정확은 법률 실행의 특징이다; 신성한 심판은 공정성의 마음이며, 삼위일체의 공의에 항상 순응하고, 하느님의 신성한 사랑을 항상 성취한다. 온전하게 인식되고 완벽하게 납득되었을 때, 삼위일체의 의로운 공의와 우주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이 일치한다. 그러나 사람은 신성한 공의에 대한 그러한 충분한 납득을 가지지 못한다. 그리하여 삼위일체 안에서는, 사람이 그것을 보는 데에 따라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영의 품성들이 시간의 경험적 우주들 안에서 사랑과 법률의 합동하는 소명봉사에 조절되어 진다


7. 최극위의 총괄


신(神)의 첫째, 둘째, 그리고 셋째품성체는 서로 동등하고, 그들은 하나이다. "우리 주 하느님은 한 하느님이다." 영원한 신(神)들의 신성한 삼위일체 안에는 목적의 완전성과 집행의 하나됨이 존재한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공동행위자는 정말로 그리고 신성하게 하나이다. 진리 가운데에는 그것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는 처음이고, 나는 마지막이며, 나 외에는 어떤 하느님도 없다."


유한 차원에서 필사자들에게 사물들이 나타날 때, 낙원 삼위일체는, 최극존재처럼, 오직 전체 ─ 전체 행성, 전체 우주, 전체 초우주, 전체 광우주 ─ 와 관련된다. 이 전체성 태도는 삼위일체가 신(神)의 전체이고 그리고 많은 다른 이유들 때문에 존재한다.


최극존재는 유한 우주들 안에서 기능하는 삼위일체보다는 낮은 그리고 어딘가 다른 어떤 존재이지만; 일정한 한계들 안에서 그리고 미완성 힘-품성체구현의 현재 시대 동안, 이 진화 신(神)은 최극위의 삼위일체의 태도를 반영하려고 나타난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최극존재와는 품성적으로 기능하지 않지만, 현재 우주 시대 동안 그들은 삼위일체로서 그와 함께 협동한다. 우리는 그들이 궁극자에 대하여 비슷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납득한다. 우리는 그가 최종적으로 진화되었을 때 이루어지는 낙원 신(神)들과 최극자 하느님 사이의 품성적 관계에 대하여 종종 추측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알지 못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예측될 수 있는 최극위의 총괄을 발견하지 못한다. 더욱이 이 예측 불가능성은, 틀림없이 최극자의 미완성의 표식이자 그리고 낙원 삼위일체에 대한 유한 반응의 미완성에 속하는, 어떤 발전의 미완성에 의하여 특징되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필사자 마음은 수많은 것들 ─ 비극적인 물리적 사건들, 무시무시한 우연한 현상들, 무서운 재난들, 고통스러운 질병들, 그리고 세계적인 재난들 ─ 을 즉각 생각하고는 그러한 재앙이 최극존재의 이 있음직한 기능의 알려지지 않은 책략과 상호 연관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질문할 수 있다. 분명히 말해서,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정말로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 모든 어렵고도 다소 신비스러운 상황들이 항상 우주들의 복지와 진보를 위해 일어남을 관찰한다. 실재의 환경들과 삶의 설명할 수 없는 변천들은 모두 최극자의 기능과 삼위일체의 총괄에 의해, 높은 가치의 의미심장한 원형틀(元型틀) 속으로 서로 엮어지는 것 같다.


하느님의 한 아들로서 너희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든 활동들 안에서 사랑의 품성적 태도를 식별할 수 있다. 그러나 너희가 낙원 삼위일체의 우주 활동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공간의 진화 세계들에 있는 개별 필사자의 선(善)을 초래하는지를 항상 납득할 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영원의 진보에 있어서, 삼위일체의 활동들은 전적으로 의미심장하고 신중하게 계시되겠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시간의 창조체들에게 항상 그렇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8. 유한을 넘어서는 삼위일체


낙원 삼위일체와 관계하는 많은 진리들과 사실들은 유한을 초월하는 기능을 인식함으로써만 부분적으로라도 이해될 수 있다.


궁극위 삼위일체의 기능들을 논의하는 일은 권장할 만하지 못하겠지만, 궁극자 하느님이 초월자들에 의해 이해되는 삼위일체 현시라는 사실은 밝혀도 된다. 우리는 주(主)우주의 통합이 궁극자의 결국 되어지고 있는 활동이며 전부는 아니지만, 아마도 일정한 낙원 삼위일체의 아(亞)절대 총괄의 위상에 대한 반영이라고 믿으려 한다. 궁극자는, 단지 최극자가 유한과의 관계에 있어서 삼위일체를 부분적으로 그렇게 대변한다는 감각에서는, 아(亞)절대와의 관계에서 자격 갖춘 삼위일체 현시이다.


우주 아버지, 영원 아들, 그리고 무한 영은, 어떤 감각에 있어서는, 전체 신(神)의 구성요소 품성들이다. 낙원 삼위일체 안에서의 그들의 결합과 삼위일체의 절대적 기능은 전체 신(神)의 기능과 동등하다. 그리고 그러한 신(神)의 완성은 유한과 아(亞)절대 둘 모두를 초월한다.


낙원 신(神)들 중 어느 한 품성체도 실제적으로 전체 신(神) 잠재를 채우지 못하는 반면, 셋 전체가 집단적으로 그렇게 한다. 세 무한 품성체들은 전체 신(神) ─ 신(神) 절대자 ─ 의 전(前)품성적 그리고 존재적 잠재를 활성화하는데 요구되는 최소 숫자의 존재들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주 아버지, 영원 아들, 그리고 무한 영을 품성체들이라고 알고 있지만, 나는 신(神) 절대자에 대해서는 품성적으로 알지 못한다. 나는 아버지 하느님을 사랑하고 경배한다; 나는 신(神) 절대자를 존경하고 공경한다.


나는 영원 안에서 최종자가 결국에는 신(神) 절대자의 자녀들이 되는 것을 어떤 존재들의 집단이 가르쳤던 한 우주에 머문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최종자의 미래를 싸 숨기는 이런 신비의 해결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최종의 무리단은, 특히, 하느님의 뜻에 맞는 모든 것 안에서 완전을 달성한 시간과 공간의 그 필사자들을 포옹한다. 창조체들로서 그리고 창조체 능력의 한계 안에서 그들은 하느님을 충분히 그리고 참되게 안다. 하느님을 모든 창조체들의 아버지로 그렇게 발견하면, 이 최종자는 언젠가 반드시 초(超)유한 아버지를 향한 탐구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 탐구는 낙원 아버지의 궁극적 속성들과 성격의 아(亞)절대 본성파악을 포함한다. 영원이 그러한 달성이 가능한지 아닌지를 드러내겠지만, 우리는 만일 그 최종자가 이 신성의 궁극을 파악하더라도 그들이 아마 절대 신(神)의 초(超)궁극 차원들을 달성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최종자가 신(神) 절대자를 부분적으로 달성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그들이 그렇게 되더라도, 영원들의 영원 안에는 우주 절대자에 대한 문제가 상승하는 그리고 진보하는 최종자에게 여전히 계속해서 흥미를 돋우고 어리둥절하게 하며 당황하게 하고 도전을 걸 것인데, 이는 우주 절대자의 조화우주 관계들의 불가해성(不可解性)이 물질적 우주들 그리고 그들의 영적 관리가 계속 확대됨에 비례하여 성장하는 경향이 있게 될 것이라고 우리가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무한만이 아버지-무한자를 드러낼 수 있다.


 

제 11편   낙원의 섬

 

낙원은 우주들의 우주의 영원한 중심이며 우주아버지와 영원아들과 무한 영 그리고 그들의 신성한 합동자들 그리고 동료들이 거주하는 장소이다. 이 중앙 섬은 주(主)우주 전체 안에서 조화우주 실체 중 가장 거대한, 조직된 천체이다. 낙원은 물질적 구체일 뿐만 아니라 영적 거주지이다. 우주 아버지의 모든 지능적 창조는 물질적 거주지들 위에 있다. 따라서 절대 조정중심 역시 말 그대로 물질적이다. 그리고 또한 영 사물들과 영적존재들이 실제임을 반복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낙원의 물질적 아름다움은 그 물리적 완전의 장엄함에 있다. 하느님 섬의 장관(壯觀)은 거기에 거주하는 존재들의 화려한 지적 업적들과 마음 발달 안에서 전시되고 있으며 중앙 섬의 영광은 신성한 영 품성 - 생명의 빛- 의 무한 자질 안에서 내보여 지고 있다. 그러나 영적 아름다움의 깊이와 이 장엄한 총체의 경이로움은 물질적 창조체들의 유한 마음의 이해력을 철저히 넘어선다. 신성한 거주지의 영광과 영적인 광채는 필사자의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낙원은 영원에서 나오며 핵을 이루는 이 빛과 생명의 섬의 기원에 관해서는 그 기록도 없고 전승도 없다.

 

1. 신성한 거주지

 

낙원은 우주적 영역들에 대한 관리에서 많은 목적들을 제공하지만, 창조체 존재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1차적으로 신(神)의 거주 장소로 존재한다. 우주 아버지의 품성적 현존은, 거의 둥글지만 구형은 아닌 이곳의 위쪽 면의 정 중앙, 신(神)들의 주거지에 거주하신다. 우주 아버지의 이 낙원 현존은 영원 아들의 품성적 현존에 의해 즉각적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러면서 그들 둘 모두는 무한 영의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뒤덮여 있다.

 

하느님은 동일한 이 중앙 그리고 영원 주거지에 거주하고 있고 거주해 왔으며 또 영구토록 거주할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항상 그를 발견해 왔으며 또한 항상 그렇게 될 것이다. 우주 아버지는 조화우주적으로 초점화구현 되어있고, 영적으로 품성체구현되어 있으며, 우주들의 우주의 이 중심에 지리적으로 거주한다.

 

우리는 모두 우주 아버지를 발견하려고 추구하는 직선 진로를 알고 있다. 너희는 그것이 너희로부터 멀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공간의 광대함 때문에 신성한 거주지에 관해 많이 이해할 수 없지만, 이 거대한 간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자들은 마치 너희가 유란시아에 명확하게 그리고 지리적으로 위치하고 있는 도시들인 뉴욕, 런던, 로마, 또는 싱가포르를 아는 것처럼 그렇게 확실하게 그리고 실제로 하느님의 위치와 거주지를 안다. 만일 너희가 배와 지도 그리고 나침반을 갖고 있는 지능적인 항해자였다면, 너희는 쉽게 이 도시들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너희가 영적으로 자격이 갖추어지고 항해 시간과 수단을 가졌다면, 그리고 필요한 안내를 받았다면, 너희는 별이 총총한 지역들을 통하여 안쪽으로 계속 여행하면서 마침내 너희가 우주 아버지의 영적인 영광이 빛나는 한 중앙 앞에 서게 될 때까지 이 우주에서 저 우주로 그리고 이 순환회로로부터 저 순환회로를 통하여 안내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여행을 위한 모든 필수품들을 가지고 있다면, 너희 자신의 행성에서 먼 도시들을 찾는 것처럼 만물의 중앙에 있는 하느님의 품성적 현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이 장소들을 방문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그들의 실체성 또는 실제적 실재(實在)를 어떤 점에서도 부정하지 못한다. 우주 창조체들 중 매우 적은 숫자가 낙원에 있는 하느님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만물의 중심에 있는 그의 실재의 실체성 또는 그의 영적 품성체의 실제성을 어떤 점에서도 부정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이 중앙 위치에서 항상 발견되어진다. 그가 움직였다면 우주적 대 혼란이 일어났을 것인데, 왜냐하면 창조의 끝에서부터의 중력의 우주적 계통들이 이 거주지 중심에 있는 그의 안으로 집중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주들을 통하여 품성 순환회로를 거슬러 가거나 또는 아버지를 향하여 안쪽으로 여행하면서 상승하고 있는 품성들을 따라가든지, 우리가 낙원 아래쪽을 향하는 물질적 중력의 계통들을 추적하거나, 또는 조화우주 기세의 굽이치는 주기를 따라가던지, 영원 아들을 향하는 영적 중력을 계통을 추적하던지, 혹은 하느님의 낙원 아들들의 안쪽을 향한 행렬을 따라가든지, 우리가 마음 순환회로들을 추적하든지, 혹은 무한 영으로부터 나오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천상의 존재들을 따라가든지 - 이러한 관찰 중 그 어떤 것으로도 또는 그것들 모두에 의해, 우리는 아버지의 현존을 향해, 그의 중앙 거주지를 향해 직접적으로 인도된다. 이곳에 하느님 품성이 있고, 분명하게, 그리고 실제적으로 현존한다. 그리고 그의 무한 존재로부터 생명, 에너지 그리고 품성의 노도- 줄기가 모든 우주들을 향해 흘러나간다.

 

2. 영원한 섬의 본성

 

너희가, 비록 너희 천문상의 위치, 항성 체계 안에서의 너희 공간 자리에서이지만, 식별할 수 있는 물질적 우주의 광대함을 일견하기 시작하면, 그러한 거대한 물질적 우주가 적절하고도 그럴만한 중심지, 물질적 영역과 살아있는 존재들의 모든 이 광대하고도 멀리 퍼지는 창조의 우주통치자의 존엄성과 무한성과 균형이 맞는, 본부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 너희에게 명백하게 될 것이다.

 

형태에 있어서 낙원은 거주되는 우주 천체들과는 다르다. 그것은 구형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하게 타원체인데, 남북 지름이 동서 지름보다 6분의 1 더 길다. 중앙 섬은 본질적으로 평평하며, 윗면으로부터 아랫면까지의 길이는 동서(東西) 지름의 길이의 10분의 1이다.

 

그것의 정지상태와 그 섬의 북쪽 끝에서의 기세- 에너지의 더 큰 외향- 압력과 관련하여 고려되는 규모에서의 이 차이들이, 주(主)우주 안에서 절대 방향을 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중앙 섬은 지리적(地理的)으로 세 활동 권역들로 나뉘어 있다:


  1. 상부(上部) 낙원.


  2. 주변 낙원.


  3. 하부 낙원.         

 

우리는 품성 활동에 바쳐져 있는 낙원의 표면을 상부 면으로, 그 반대 표면을 하부 면으로 이야기한다. 낙원의 주변지역은, 순전히 품성적이 아니거나 비품성적인 활동에 대비(對備)한다. 삼위일체가 품성적 또는 상부 평면을, 분별불가 절대자가 하부 또는 비품성적 평면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분별불가 절대자를 품성체로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절대자의 기능적 공간 현존을 하부 낙원에 초점화구현된 것으로 생각한다.

 

영원한 섬은 물질화의 단일 형태 - 실체의 고정된 체계 - 로 구성되어 있다. 낙원의 이 순전한 내용물은 광대한 우주들의 우주 전체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공간 잠재력의 균일한 조직이다. 그것은 다른 우주들에서 여러 이름들로 불려져 왔으며, 네바돈의 멜기세덱들은 오래 전부터 그것을 절대소(絶對素)라고 불렀다. 이 낙원 근원 물질은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다. 그것은 첫째근원이며 중심의 기원적인 비(非)영적 표현이며 그것은 낙원이다. 낙원은 중복되어 있지 않다.

 

우리에게는 첫째근원이며 중심이 무한성 한계로부터 자아- 해방이라는 그의 기법의 한 부분으로서, 시- 공간 창조조차도, 가능한 하위- 무한으로 만드는 방법으로서, 낙원 안에 조화우주 실체를 위한 모든 절대 잠재를 집중시켜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주들의 우주가 이 본질특성들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낙원이 시- 공간 제한된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낙원은 시간 없이 존재하고 공간 안에 위치가 없다.

 

개략적으로 말해서, 공간은 하부 낙원 바로 아래에서 기원되는 것으로 보이며 시간은 상부 낙원 바로 위에서 기원되는 것으로 보인다. 중앙 섬의 시민들은 결과들의 시간 없는 순차를 충분하게 인식하지만, 너희가 납득하는 바와 같이, 시간은 낙원 실재의 특색이 아니다. 움직임은 낙원에서 선천적이 아니다. 그것은 의지적이다. 그러나 거리의 개념은, 절대 거리라고 하더라도, 낙원에서 상대적 위치들에 적용될 수 있듯이, 그것은 매우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 낙원은 비(非)공간적이며 따라서 그 지역들은 절대이고 그러므로 필사자 마음의 개념을 뛰어넘는 많은 방법에서 쓰이고 있다.

 

3. 상부 낙원

 

상부 낙원에는 광대한 세 활동 구체들, 신(神) 현존, 최고거룩 구체, 그리고 거룩지대가 있다. 바로 그 다음이 신(神)들의 현존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 광대한 지역은 최고거룩 구체로 제외되어 있고 경배, 삼위일체화 그리고 높은 영적 달성의 기능들을 위해 예비 되어있다. 이 지대에는 물질적 구조물도 없고 순수하게 지적인 창조계들도 없다. 그것들은 거기에 존재할 수 없다. 낙원의 최고거룩 구체의 신성한 본성과 아름다운 웅장함을 인간 마음에게 묘사하려고 시도하는 일이 나에게는 헛된 일이다. 이 영역은 전적으로 영적이고, 너희는 거의 전적으로 물질적이다. 순수하게 영적인 실체는, 순수하게 물질적인 존재에게 있어서, 외관상 존재하지 않는다.

 

최고거룩의 지대에 물리적 물질화가 존재하지 않는 반면, 거룩한 땅에서 보낸 너희의 물질적인 날들에 대한 풍부한 기념품들이 있고 그리고 주변 낙원의 추억의 역사지역들에는 여전히 더욱 많다.

 

거룩지대, 바깥에 놓인 혹은 거주지역은 일곱 개의 동심원 지대들로 나뉘어 있다. 낙원은 때로 "아버지의 집"이라고 불리는데 그것이 그의 영원한 거주지이기 때문이며, 이 일곱 지대들은 종종 "아버지의 낙원 맨션들"이라고 불린다. 내부 혹은 첫 번째 지대는 낙원 시민들과 낙원에서 거주할 기회를 갖는 하보나의 원주민들이 차지한다. 그 다음 또는 두 번째 지대는 시간과 공간의 일곱 초우주들의 원주민들의 거주 지역이다. 이 두 번째 지대는 부분적으로 거대한 일곱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진화적 진보의 우주들로부터 흩어져 나오는 영 존재들과 상승하는 창조체들의 낙원 고향이다. 이 부문들 각각은 한 단일 초우주의 품성들의 복지와 전진에 배타적으로 바쳐져 있다, 그러나 이들 시설들은 현재 일곱 초우주들의 필요를 거의 무한하게 뛰어넘는다.

 

낙원의 일곱 부문들 각각은 10억 개의 영화롭게 된 개별 활동 집단들의 거점 본부에 알맞은 거주단위들로 나뉘어 있다. 이들 단위 1천개가 모여 한 부분을 이룬다. 10만 개의 부문들이 한 회중과 같다. 1,000만 개의 회중들이 한 집회를 구성한다. 10억 개의 집회들이 하나의 광단위(廣單位)를 만든다. 그리고 이 상승하는 계열들은 두 번째 광단위, 세 번째, 그리고 계속하여 일곱 번째 광단위로 이어진다. 그리고 광단위 일곱 개가 모여 주(主)단위를 이루며, 일곱 주(主)단위들은 하나의 상급단위를 이루며 그리하여 일곱으로 상승하는 계열들이 상급, 초(超)상급, 천계, 초(超)천계를 지나 최극 단위에 이른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가능한 모든 공간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 개념을 뛰어넘는 숫자인, 낙원에 있는 거주전용의 경이적인 숫자는 거룩한 땅의 배정된 지대 중 1%보다 훨씬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심지어는 영원한 미래의 시간이 이를 때까지 낙원 상승(上昇)을 시작하지 않을 존재들을 위한, 안쪽을 향한 그들의 길을 가는 존재들을 위한 매우 풍부한 공간이 여전히 남아 있다.

  

4. 주변 낙원

 

중앙 섬은 주변지역에서 갑자기 끝나지만, 그 크기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이 종단 각도는 모든 둘러싸인 지역들 안에서 상대적으로 분간될 수 없다. 낙원의 주변 표면은, 부분적으로, 영 품성의 다양한 집단들을 위한 도착 그리고 출발장소들이 차지하고 있다. 비충만(非充滿)- 공간 지대들이 거의 주변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모든 품성 운송수단들은 이 지역들 안에서 낙원 땅으로 가게 되어 있다. 운송 초(超)천사 또는 다른 유형의 공간 횡단자들은 상부 낙원뿐만 아니라 하부 낙원에 접근할 수 없다.

 

일곱 주(主) 영들은, 아들의 빛나는 천체들과 하보나 세계들의 내부 순환회로 사이에 있는 공간 안에서 낙원을 회전하는, 영의 일곱 구체들 위에 힘과 권한이 있는 그들의 개인적 자리들을 갖지만, 그들은 낙원 주변에 기세- 초점 본부를 유지한다. 여기에서 서서히 회전하는 일곱 최극 힘 지휘자들의 현존은, 일곱 초우주들을 향하여 앞으로 나가는 어떤 낙원 에너지들을 위한 일곱 섬광(閃光)장소들의 위치를 표시한다.

 

이 주변 낙원에는 시간과 공간의 지역우주들에게 바쳐진, 창조주 아들들에게 배정된 거대한 역사적 그리고 예언적 전시 장소들이 있다. 거기에는 현재 설치되었거나 또는 예정된 이 역사 보호구역들이 정확하게 7조 개가 있지만, 이러한 준비들 전체는 그렇게 배정된 주변 지역 중 그 부분의 약 4%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광대한 이 예정지들이, 현재 알려졌고 그리고 거주되는 일곱 초우주들의 경계선을 벗어나는 곳에 언젠가 있게 될 창조계에 속한다고 추론한다.

 

실재하는 우주들의 사용을 위하여 지정되어 온 낙원의 그 부분은 오직 1내지 4%만 사용되고 있으며, 반면에 이러한 활동에 배정된 그 장소는 그러한 목적을 위해 실제적으로 요구되는 것보다 적어도 1백만 배가 된다. 낙원은 거의 무한한 창조의 활동들을 수용하기에 충분할 만큼 크다.

 

그러나 낙원의 영광들을 너희에게 보여주려고 더 이상 시도하는 것은 헛될 것이다. 너희는 기다려야만 하며, 기다리는 동안 상승해야만 하는데, 이는 진실로 "우주 아버지가, 시간과 공간의 세계들에서 육신 안의 생명을 생존한 자들을 위해 준비하신 것들을, 눈이 본적이 없고, 귀가 들은 적이 없으며 그것이 필사자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간 적도 없기 때문이다."

 

5. 하부 낙원

 

하부 낙원에 관하여, 우리는 계시된 것만을 알며 품성들은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영 지능체들의 문제들과 관계되는 것은 어떤 것도 없으며, 뿐만 아니라 신(神) 절대자도 거기에서 기능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물리적- 에너지와 조화우주-기세 순환회로들이 하부 낙원에서 기원되었다고, 그리고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고 들었다:

 

  1. 하부 낙원의 중앙 부분 중에서, 삼위일체의 위치 바로 아래는 알려지지 않은 그리고 계시되지 않은  무한성의 지대이다.

 

  2. 이 지대는 이름 없는 지역에 의해 즉각적으로 둘러싸여 있다.

 

  3. 아래 표면의 외곽 가장자리들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주로 공간 잠재력과 기세- 에너지로서 행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 광대한 타원형 기세 중심의 활동들은 어느 삼원일체(三元一體)의 알려진 기능들로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공간의 원초(原初)기세- 충전이 이 지역 안에 초점화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중심은 세 동심 타원지대로 구성된다. 가장 안쪽은 낙원 자체의 기세-에너지 활동들의 초점이며 가장 바깥쪽은 분별불가 절대자의 기능들로 동일시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중간- 지대의 공간 기능들에 관하여는 확신이 없다.

 

이 기세 중심의 내부 지대는, 물리적 우주의 가장 외부에 있는 경계선들을 향해 그 맥동들이 직접 흐르는 거대한 심장처럼 활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기세- 에너지들을 지시하고 변경시키지만 그것들을 작동하지는 않는다. 이 원초(原初)기세의 실체 압력-현존은 남쪽 지역들에서보다 낙원 중심의 북쪽 끝에서 분명하게 더 크다. 이것은 균일하게 나타난 차이이다. 공간의 모체 기세는, 기세- 에너지의 이 기초 형태의 확산과 관계되는 어떤 알려지지 않은 순환적 체계의 작동을 통하여, 남쪽에서 흘러들어 오고 북쪽에서 흘러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동-서 압력들 속에는 때때로 두드러진 차이들이 또한 있다. 이 지대로부터 발산되는 기세들은 관찰할 수 있는 물리적 중력에 응답하지는 않지만, 낙원 중력에는 항상 순응한다.

 

기세 중심의 중간-지대가 이 지역을 즉시 둘러싼다. 이 중간-지대는, 활동의 3순환주기를 통하여 그것이 확대하고 축소하는 것을 제외하면,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소한의 이들 맥동은 동-서 방향으로 일어나고 그 다음은 북-남 방향으로 일어나며, 반면 가장 큰 동요는 모든 방향, 일반화된 확대와 축소로 일어난다. 이 중간-지역의 기능이 실질적으로 동일시된 적은 없었지만, 그것은 기세 중심의 내부와 외부 지대 사이에서 교차적 조절로서 무언가를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중간-지대가 주(主)우주의 연속적인 공간 차원들을 분리하는 중간 공간 또는 고요한 지대들의 조정 기능구조라고 믿는 자들이 많지만, 어떤 증거 또는 계시도 이것을 확인한 바 없다. 이 추론은 이 중간-지역이, 주(主)우주의 비충만-공간기능구조의 기능함과 관련된 어떤 방식이라는 지식에서 유래되고 있다.

 

외부지대는 동일시되지 않은 공간 잠재의 세 동심원의 그리고 타원형 띠들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활동적이다. 이 지역은 추측되지 않는 장소이며, 모든 방향에서 일곱 초우주의 최 외곽 경계 쪽으로 공간을 향하여 나아가는 그리고, 그 너머로 모든 외부공간의 거대하고 이해할 수 없는 권역들을 온통 뒤덮는, 발산의 중앙 순환회로점이다. 이 공간 현존은, 삼위일체로서 행동할 때 드러나지 않은 어떤 방식으로 무한(無限) 신(神)들의 의지와 명령들에 대해 간접적으로 응답하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비품성적이다. 이것은 분별불가 절대자의 공간 현존의 낙원 중심, 중앙 초점화구현인 것으로 믿어진다.

 

기세의 모든 형태들과 에너지의 모든 위상들은 순환회로를 이루게 되는 것처럼 보이며 그것들은 우주에 두루 순회하고 확실한 경로들에 의해 돌아온다. 그러나 이들은 분별불가 절대자의 활성화된 지대의 방사물들과 함께, 나가거나 혹은 들어오는 것으로 나타난다. 결코 둘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이 외부 지대는 거대한 비율의 오랜 세월에 해당하는 주기로 맥동한다. 이 중심의 공간-기세는 유란시아 시간으로 10억년 보다 약간 더 오래 밖으로 나가며 그 다음에는 그것과 비슷한 시간 안에 돌아온다. 그리고 이 중심의 공간-기세 현시들은 우주적이며 그것들은 퍼질 수 있는 모든 공간에 두루 확장한다.

 

모든 물리적 기세, 에너지 그리고 물질은 하나이다. 모든 기세-에너지는 기원적으로 하부 낙원으로부터 나왔으며 그것의 공간 순환회로를 완성한 후에는 결국에는 그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우주들의 우주의 에너지들과 물질적 조직들 모두가 그들의 현재 현상적 상태들 그대로 하부 낙원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공간은 물질과 전(前)물질의 여러 형태들의 발상지이다. 낙원 기세 중심의 외부 지대가 공간- 에너지들의 근원임에도 불구하고, 공간은 거기에서 기원되지 않는다. 공간은 기세나 에너지 또는 힘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지대의 맥동들은 공간의 호흡 작용을 설명하지 않지만, 이 지대의 흡입과 발산은 공간의 20억년 확대- 축소 주기와 동조되어 있다.

 

6. 공간 호흡 작용

 

우리는 공간 호흡 작용의 실제적인 기능구조를 알지 못 한다. 우리는 다만 모든 공간이 교대로 축소하고 확대하는 것을 관찰할 뿐이다. 이 호흡 작용은 충만된 공간의 수평적 확장과 낙원 위쪽 그리고 아래쪽의 광대한 공간 저장소들 속에 실재하는 비충만(非充滿) 공간의 수직적 확장들 둘 모두에 영향을 준다. 이 공간 저장소들의 부피 윤곽들을 상상해 보려고 시도함에 있어서, 너희는 모래시계를 생각할 수 있다.

 

충만된 공간이 수평적으로 확장하는 우주들이 팽창할 때, 비충만 공간이 수직적으로 확장하는 저장소들은 거꾸로 축소한다. 하부낙원 바로 아래에는 충만 그리고 비충만 공간의 합류점이 있다. 두 공간 유형들은 변형하는 조정통로들을 통해 흐르는데, 그곳에는 조화우주의 축소 그리고 확대주기 안에서 충만 가능 공간을 충만 불가능하게 만들고 또 그 반대로 만드는 변화들이 일어난다.

 

"비충만" 공간이 의미하는 것은, 충만하게 된 공간 속에 실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 기세들과 에너지들과 힘들 그리고 현존들이 비충만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수직 (저장소)공간이 항상 수평 (우주)공간의 평형추로 기능하게 되어 있는지 아닌지 알지 못 한다. 우리는 비충만 공간에 관하여 거기에 창조적 의도가 있는지 아닌지 알지 못 한다 우리는 공간 저장소들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다만 그것들이 실재한다는 것과 그것들이 우주들의 우주의 공간- 확대- 축소 주기들을 균형 잡는 것처럼 보임을 알뿐이다.

 

"비충만" 공간이 의미하는 것은, 충만하게 된 공간 속에 실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 기세들과 한 위상에서 우주들이 팽창하며 다음 위상에서 그것들이 축소한다. 충만 공간은 지금 확대하는 위상의 중앙-지점에 접근하고 있는 반면, 비충만 공간은 축소 위상의 중앙-지점에 접근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론적으로 볼 때 두 공간 확장들의 최 외곽 한계들이 지금 낙원으로부터 거의 같은 거리에 있다고 들었다. 비충만- 공간 저장소들은 우주의 충만 공간이 주변 낙원으로부터 제4 외부 공간 차원을 향해 그리고 심지어는 그것을 초월하여 바깥쪽을 향해 수평적으로 확장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지금 상부 낙원 위로 그리고 하부 낙원 아래를 향해 수직적으로 확장한다.

 

유란시아 시간으로 10억년 동안 그 공간 저장소들이 축소하는 반면 전체 수평 공간의 주(主)우주와 기세 활동들은 확대한다. 그리하여 전체 확대- 축소 주기를 마치는 데에는 유란시아 시간으로 20억년보다 약간 더 소요된다.

 

7. 낙원의 공간 기능

 

낙원 표면에는 어디에도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가 낙원의 상부 표면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바라본다면", 그는 나가거나 들어오는, 방금 들어오는 비충만 공간 외에는 "보지" 못할 것이다. 공간은 낙원에 닿을 수 없다. 오직 조용한 중간공간 지대들만이 중앙 섬과 접촉하게 된다.

 

낙원은 충만 공간과 비충만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상대적으로 조용한 지대들의 실제적으로 움직임이 없는 핵이다. 지리적으로 이 지대들은 낙원의 상대적 확장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들 안에는 아마 어떤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줄어든 공간 움직임의 이 지대들이 충만 공간과 비충만 공간을 분리시키는 것을 관찰한다. 비슷한 지대들이 충만 공간의 차원들 사이에 한 때 존재했었지만, 이것들은 지금 더욱더 조용하다.

 

전체 공간의 수직적 횡단 부분은 말타 십자가를 약간 닮았을 것인데, 수평축들은 충만 (우주) 공간을 그리고 수직 축들은 비충만(저장소) 공간을 나타낸다. 네 축들 사이에 있는 지역들은 마치 중간공간 지대들이 충만 공간과 비충만 공간을 분리시키는 것처럼 그것들을 분리시킬 것이다. 정지된 이 중간공간 지대들은 낙원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거리에서 점점 더 크게 자라고 있으며 결국에는 모든 공간의 경계선들을 에워싸게 되고 공간 저장소들 그리고 충만 공간의 전체 수평 확장(擴張) 둘 모두를 완벽하게 포함시킬 것이다.

 

공간은 분별불가 절대자 안에서 하위-절대 상태에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분별불가 절대자의 현존도 아니며 궁극자의 기능도 아니다. 그것은 낙원의 증여이다, 그리고 광우주의 공간과 모든 외부 지역들의 그것은, 분별불가 절대자의 선조(先祖) 공간 잠재력에 의해 실제적으로 충만하게 될 것으로 믿어진다. 주변 낙원을 향한 가까운 접근으로부터, 이 충만 공간은 제4 공간 차원을 통해 바깥으로 그리고 주(主)우주의 주변을 뀌어 넘어서, 수평적으로 확장하지만, 얼마나 멀리 지나갈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만일 너희가 유한하지만, 그러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V자 모양의 평면이 그 꼭지점을 주변 낙원에 거의 접하고, 낙원의 상부 그리고 하부 표면들 둘 양쪽을 향해 직각으로 위치했다고 상상하고, 그 다음에는 낙원을 중심으로 타원 회전을 하는 이 평면을 눈에 그려본다면, 그 회전은 충만 공간의 부피를 대략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우주들 안에 있는 어떤 주어진 위치에서도, 수평 공간에 대한 상부 그리고 하부 한계가 있다. 만일 누군가가 오르본톤의 평면을 향해 직각으로 위쪽 또는 아래쪽에서 충분히 멀리 멀어질 수 있다면, 충만 공간의 상부 또는 하부 한계와 결국에는 만나게 될 것이다. 주(主)우주의 알려진 규모 안에서 이들 한계는 낙원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거리에서 점점 더 멀리 벌어진다. 공간은 두꺼워진다. 그리고 창조의 평면, 우주들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어느 정도 더 빨리 두꺼워진다.

 

첫 번째 외부 공간 차원으로부터 일곱 초우주들을 분리시키는 것과 같은, 공간 차원들 사이에 있는 비교적 고요한 지대들은, 정지된 공간 활동들의 거대한 타원형 지역들이다. 이 지대들은 규칙적으로 진행하면서 낙원 주변을 도는 거대한 성운들을 분리시킨다. 너희는 아마 첫 번째 외부 공간 차원을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인데, 그곳에는 알려지지 않은 우주들이, 낙원 둘레를 회전진동하는 은하계들의 거대한 행진으로서, 상대적으로 고요한 공간 지대들에 의해 내부 그리고 외부 주변지역에 정지되고 묶인 중간공간 지대들에 의해 위 아래로 묶인 상태에서, 지금 형태를 이루어 가고 있다.

 

공간 차원은 상대적 정지됨에 의해 모든 측면들에서 둘러싸인 움직임의 타원형 지역으로 그렇게 기능한다. 움직임과 정지됨의 그러한 관계들은 그것들이 낙원의 섬 둘레를 영원히 회전함에 따라 조화우주 기세와 출현 에너지에 의해 우주적으로 따라오는, 움직임에 대하여 줄어든 저항의 구부러진 공간 경로를 구성한다.

 

주(主)우주의 이 교대 지대 설정은, 성운들의 시계 방향 그리고 반시계 방향의 교대 흐름과 관련하여, 붕괴와 분산 활동지점에 대한 중력 압력의 강조화를 방지하도록 고안된 물리적 중력의 안정화에 있는 요소이다. 그러한 준비는 반중력 영향을 발휘하고 그리고 아니면 위험한 속도인 것에 대한 제동장치로서 활동한다.

 

8. 낙원 중력

 

벗어날 수 없는 중력의 끌어당김이 전체 공간의 모든 우주들의 세계들을 모두 효과적으로 장악하고 있다. 중력은 낙원의 물리적 현존의 전능한 장악력이다. 중력은, 만물이시고, 모든 것들을 채우며 그의 안에 만물이 있는, 영원한 하느님의 우주적 물리적 장식품을 구성하는 빛나는 별들과 타오르는 태양들 그리고 소용돌이치는 구체들을 묶는 전능한 끈이다.

 

절대적 물질 중력의 중심 그리고 초점은 낙원 섬인데, 하보나를 도는 암흑 중력체들에 의해 보충되고 상부 그리고 하부 공간 저장소들에 의해 평형을 이룬다. 하부 낙원의 알려진 모든 방사물들은 주(主)우주의 타원 공간 차원들의 끝없는 순환회로 위에서 작동하는 중앙 중력 끌어당김에 일정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응답한다. 조화우주 실체의 알려진 모든 형태는 시대들의 굴곡, 순환의 경향, 거대한 타원의 회전진동을 갖는다.

 

공간은 중력에 대해 반응하지 않지만, 중력에 대해 평형추로서 활동한다. 공간 완충물이 없다면, 폭발 활동이 주변의 공간 본체들을 비틀어버릴 것이다. 충만 공간 역시 물리적 또는 직선적 중력에 반중력(反重力) 영향을 발휘한다. 공간은 그러한 중력 활동을 지연시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제적으로 중화시킬 수 있다. 절대 중력은 낙원 중력이다. 지역적 또는 직선적 중력은 에너지 또는 물질의 전기적 단계에 속해 있으며 그것은 중앙, 초우주 그리고 외부 우주 안에서, 적당한 물질화가 발생된 곳이면 어디서나 작동한다.

 

조화우주 기세, 물리적 에너지, 우주 힘, 그리고 다양한 물질화의 수많은 형태들은 완전하게 분명하지는 않지만 낙원 중력에 응답하는 일반적인 세 단계들을 나타낸다.

 

1. 중력 이전(以前) 단계들 (기세). 이것은 우주 기세의 에너지- 이전형태 안에 있는 공간 잠재력의 개별화에서의 첫 단계이다. 상태는 때로 순수 에너지 또는 분리력이라고 불리는, 공간의 원초기세- 충전의 개념과 비슷하다.

 

2. 중력 단계들 (에너지). 공간의 기세-충전에 대한 이 변경은 낙원 기세조직자들의 활동에 의해 산출된다. 그것은 낙원 중력의 끌어당김에 응답하는 에너지 체계들이 나타난다는 신호이다. 이 출현 에너지는 기원적으로 중성이지만 이어진 변형의 결과로 소위 음성 그리고 양성의 본질특성들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단계들을 궁극력이라고 부른다.

 

3. 중력 이후 단계들 (우주 힘). 이 단계에는 에너지-물질이 직선적 중력의 조정에 대하여 응답을 나타낸다. 중앙 우주 안에는 이 물리적 체계들이 삼원력(三元力)라고 알려진 삼중적 조직들이다. 그들은 시간과 공간의 창조계에 대한 초(超)힘 모체 체계들이다. 초우주들의 물리적 체계들은 우주 힘 지휘자들과 그들의 동료들에 의해 동원된다. 이 물질적 조직들은 조성에서 이원적(二元的)이며 중력통제력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보나를 돌고 있는 암흑중력체들은 삼원력(三元力)도 아니고 중력통제력도 아니며, 그것들의 이끄는 힘은 물리적 중력의 직선적, 그리고 절대적 두 형태들 모두를 나타낸다.

 

공간 잠재력은 중력의 어떤 형태의 상호작용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낙원의 이 시원적 자질은 실체의 실재적 차원은 아니지만, 모든 상대적인 기능적 비(非)영 실체들 - 기세- 에너지의 모든 현시들, 그리고 힘과 물질의 조직에게 조상이 된다. 공간 잠재력은 정의를 내리기 힘든 용어이다. 그것은 공간의 조상이 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의미는 공간 안에 실재하는 잠재와 잠재력의 개념을 전달해야 할 것이다. 낙원으로부터 발산하고 분별불가 절대자의 공간 현존을 구성하는 그 모든 절대적 영향들과 잠재들을 포함하는 것은 대략 이해가 될 것이다.

 

낙원은 우주들의 우주에 있는 모든 에너지- 물질의 절대적 근원이자 영원한 초점이다. 분별불가 절대자는 계시자이고 조정자이며 낙원을 그 근원이자 기원으로 갖는 저장소이다. 분별불가 절대자의 우주적 현존은, 낙원 현존의 유연한 긴장, 중력 확장의 잠재적 무한성의 개념에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개념은 모든 것이 낙원을 향해 안쪽으로 이끌림을 받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표현이 미숙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움이 된다. 그것은 또한 낙원의 서로 다른 규모들과 둘러싸는 창조계를 가리키는 현상, 그 집합체와 수직을 이루는 평면 안에서, 중력이 왜 항상 우선적으로 활동하는가를 설명한다.

 

9. 낙원의 독특성

 

낙원은 그것이 시원적 기원 영역이고 모든 영 품성들을 위한 운명의 최종목적지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지역우주들의 비교적 낮은 영 존재들 모두가 즉각적으로 낙원을 향한 운명에 있지 않다는 것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낙원은 모든 초물질적 품성들을 위한 욕망의 목적지로 여전히 남아 있다.

 

낙원은 무한성의 지리적 중심이며 그것은 우주 창조의 일부분이 아니고, 심지어는 영원한 하보나 우주의 실제 부분도 아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중앙 섬을 신성한 우주에 속하는 것으로 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낙원은 영원하고 배타적인 실재다.

 

과거의 영원 속에서, 우주 아버지가 영원 아들의 존재 안에서 자신의 영(靈) 자아에 대한 무한 품성 표현을 할 때, 그는 동시적으로 자신의 비품성 자아의 무한 잠재를 낙원으로써 계시하였다. 비품성적 그리고 비(非)영적 낙원은 기원 아들을 영존시킨 아버지의 의지와 행위에 필연적 영향이 되어 왔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실제적 두 위상들 - 품성적 그리고 비품성적, 영적 그리고 비(非)영적- 안에 실체를 투영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에 의한 행동에 대한 의지에 직면하여, 그들 사이의 긴장은 공동행위자와 그리고 물질적 세계들과 영적 존재들의 중앙 우주에게 실재함을 주었다.

 

실체가 품성적 존재와 비품성적 존재로 (영원 아들과 낙원) 차별화될 때, 그 어떤 자격 갖춤이 없다면 비품성적인 그것을 "신(神)"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신(神)의 활동에 해당하는 에너지와 물질적 반향들은 신(神)이라고 불릴 수 없다. 신(神)은 신(神)이 아닌 많은 것에 원인이 될 수 있고, 그리고 낙원은 신(神)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필사자 사람이 그러한 용어를 언젠가 가능하게 납득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의식되는 것도 아니다.

 

낙원은 어떤 존재 또는 살아있는 실존개체에 대해서도 조상이 되지 않으며 그것은 창조자가 아니다. 품성과 마음-영 관계들은 전달될 수 있지만, 원형틀은 그렇지 않다. 원형틀은 결코 반영이 아니다 그것들은 복제 - 재생산 - 이다. 낙원은 원형틀의 절대이며 하보나는 실제성 안에서의 이들 잠재들의 전시이다.

 

하느님의 주거지는 중앙이며 영원하고, 영화로우며 이상(理想)이다. 그의 집은 모든 우주 본부 세계들을 향한 아름다운 원형틀이며 그의 즉각적인 내주인 중앙우주는, 그들의 이상, 조직 그리고 궁극적 운명에서 모든 우주들을 위한 원형틀이다.

 

낙원은 모든 품성 활동들의 우주적 본부이고 모든 기세- 공간과 에너지 현시의 근원- 중심이다. 존재해 왔거나 지금 존재하고 있는 또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모든 것이, 영원한 하느님들의 이 중앙 거주 장소로부터 도래해 왔거나 지금 오고 있거나 또는 도래하게 될 것이다. 낙원은 모든 창조의 중심이고 모든 에너지들의 근원이며 모든 품성들이 시원적으로 기원된 곳이다.

 

무엇보다도, 필사자들에게 있어서 영원한 낙원에 대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우주 아버지의 이 완전한 거주지가, 하느님의 필사자 물질적 아들들, 시간과 공간의 진화 세계에 속한 상승하는 창조체들의 불멸적 혼의 실질적이고도 멀리 떨어진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생애를 지지해 온 하느님을 아는 모든 필사자는 신성 추구와 완전성 달성의 길고 긴 낙원 길을 이미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낮은 공간 구체들로부터 상승해 오면서, 그러한 한 동물-기원 존재가, 무수한 자들이 지금 하듯이, 낙원에 계신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 그러한 어떤 성취는 최극위의 한계위에서 테두리를 이루는 영적 변환의 실체를 나타낸다.

 


[유버사에서 옛적으로 늘계신이로부터 기능하라고 이렇게 명령을 받은 지혜의 완전자에 의해 제시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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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1.07.25 22:26

    첫댓글 굉장히 깁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조금씩 읽으시면 우주와 나를 아는데 도움이 될것입니다.^^

  • 11.07.26 20:10

    감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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