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라는 말은 원래 수도(首都)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지만, 현재는 대한민국의 수도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가 되었다. 즉 서울특별시를 약칭할 때 서울이라고 함이 그것이다. 이 항목에서 다루는 내용은 고유 명사로서의 서울이 아니라 수도로서의 의미에 관해서이다.
서울이라는 말의 유래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서나벌(徐那伐)·서야벌 등으로 불려진 데서 비롯되었다. 또한, 백제 말기의 수도인 부여(扶餘)를 ‘소부리(所夫里)’라고 불렀던 점에서 삼국시대 수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통 명사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의 서는 수리·솔·솟의 음과 통하는 말로서 높다·신령스럽다는 뜻을 가진 말에서 유래했고, 울은 벌·부리에서 변음된 것으로 벌판, 큰 마을, 큰 도시라는 뜻을 가진 말에서 유래했다. 서울이라는 말은 한자로 경(京)과 도(都)자로 표시되는데, 경은 크다는 뜻이며, 도는 거느린다·번성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서울을 가리키는 한자로는 경성을 비롯해 황성(皇城)·제경(帝京)·경사(京師)·경조(京兆)·도읍(都邑)·왕경·경도·황도(皇都)·왕도(王都)·도성(都城)·수도·국도(國都)·수선지지(首善之地) 등이 있다.
근대의 서울은 ...
1876년(고종 13) 일본과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개화의 물결이 맨 처음 일기 시작한 곳 역시 서울이었다.
부산의 왜관 근처에 있었던 종래의 일본 대표부가 없어지고 이제는 서울의 용산 근처에 공사관을 설치했으며, 개화의 새로운 이기가 점차 들어와 전통적인 서울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1885년 배재학당이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설치되어 신식 교육이 행해졌고, 1886년 이화학당이 설치되어 여인들이 가마를 타고 등교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1888년 한강에 증기선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다녔고, 1883년 조폐창이 설치되어 지폐를 발행했으며, 1884년 우정국이 설치되어 근대적인 우편 업무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1894년 서대문에서 동대문까지의 종로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전차가 놓였다. 1896년 국왕이 나가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으며, 고종은 명동에 원구단을 쌓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1897∼1898년 광화문과 종로에 3만여 명의 시민이 모여 대신들을 불러내 국가의 중대한 정책을 논의하는 만민공동회라는 최초의 대시민 운동이 세 차례나 열렸다. 1897년 파고다 공원이 설치되었고, 정동에 최초의 호텔인 손탁 호텔이 개업되었으며, 근대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이 설치되었다.
1896년 경인선이 부설되어 한강 철교가 놓였다. 이보다 앞서 청나라에 의해 의주와 서울을 잇는 전신선이 설치되었고, 부산과 서울 사이에 전신이 개통되었다. 그리고 이때에 전기가 들어왔으며,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황성신문』·『제국신문』 등이 간행되어 시민에게 배포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는 국문이 국가의 공용 문자로 채택되어 순한문투에서 언문일치의 문장으로 표현되기 시작했으며, 유길준(兪吉濬)·주시경(周時經)·지석영(池錫永)에 의한 국어문법 연구에서 서울말이 표준말로 채택되었다.
서울은 1876년부터 30여 년 사이에 급변해갔다. 즉, 각 곳에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고 서양의 새로운 문물이 수용되었다. 이때 서울 시민을 위시한 전국의 지도자들은 국민 운동으로서 교육부흥 운동·언론 운동 등을 일으켜 개화와 자주라는 구호 아래 민족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러한 근대 문물의 수용으로 인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40년 간은 한국인의 의식과 사상적인 측면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이고, 이러한 변화는 수도인 서울에서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빠르게 나타났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서울은 정치·군사·경제·교육·문화·종교의 중심지로 의식되었는데, 이러한 민중의식은 당시의 속담에 잘 나타나 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거나 “모로 가나 기어가나 서울 남대문만 가면 그만이다.” 라는 속담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쓰던 말이다. 이러한 속담에서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서울은 진출의 목표지였음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서울은 지방 사람들에게는 살고 싶어하는 곳이다. “망아지를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이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은 교육을 받고 또 출세하기 위해서는 서울로 가야 한다는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서울은 지방 사람들에게는 지체가 높은 곳이고 무서운 곳이기도 했다. 평안도나 함경도에서조차도 서울 갈 때는 “서울에 올라간다.”고 한 표현에서 지체 높은 곳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또, “서울은 낭떠러지라 과천에서부터 기어간다.”라든가 “서울이 무섭다니까 새재부터 기어간다.”라는 속담은 지방 사람이 서울 나들이에 공포증을 가지는 것을 비유한 표현들이다.
지방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순라군에게 붙잡히면 억울하게 당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방학중과 순라군』이라는 소설에서 “순라군에게 잡히면 두들겨 맞기만 한다.”는 표현은 순라군의 횡포를 묘사한 것이다.
지방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할 길이 없자, 이를 비유해 “서울에서 매맞고, 송도에 가서 주먹질 한다.”라든가, “종루에서 뺨맞고 한강가서 눈흘긴다.”는 속담이 유포되었다.
서울은 상업이 발달해 지방 사람은 서울에 오면 많이 속았다. 이에서 연유해 “시골깍쟁이 서울 곰만 못하다.”, “서울은 눈뜨고 코베가는 곳”이라는 속담이 생겼다.
서울은 사람이 많이 살다 보니 지방처럼 인심이 후하지 않고 각박하다는 뜻에서 “서울 인심이다.”라는 속담이 생겨났다. 약삭빠른 서울 사람을 일컬어 ‘서울 까투리’라 부르고, “서울 까투리가 시골 의뭉이에게 속는다.”는 속담이 생겼다.
조선시대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서울에 가려면 한 달 이상이나 걸어야 했다. 이러한 장거리에 신고 갈 짚신도 준비해야 하고, 의복과 식량도 짊어지고 와야 했음으로 서울에 한번 가려면 짐꾸림이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라도 불필요한 것을 줄이려고 노력하였던 까닭에 “서울 가는 놈이 눈썹빼고 간다.”는 속담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서울은 시골 사람이 가서 살고 싶은 곳이었다. 이는 “사는 곳이 서울이다.”, “내 집이 서울이다.”, “살아 정들면 서울이다.”라는 속담에서 서울 지향적인 의식을 살필 수 있다. 또, 서울에 나들이를 한 번 한 사람은 시골에 가서 허풍을 대단히 떠는 사람을 비유해 “서울 가본 놈하고 안 가본 놈하고 싸우면 서울 안 가 본 놈이 이긴다.”는 속담이 생겼다.
서울은 인구가 많았던 관계로 여러 면에서 복잡했다. “서울 가서 김서방 찾기.”라든가, “광주(廣州)생원 첫 서울이다.”라는 속담은 서울의 복잡함을 비유한 것이다. 또한, 복잡한 서울에 살다 보니 서울 사람은 시골 물정에 대단히 어두웠다. “서울 놈은 비만 오면 풍년이란다.”라는 속담은 이를 비유한 말이다.
서울은 시골에 대비되어 도시의 상징으로서 인식되었는데, 서울과 시골은 서로 이해가 상반되는 의식을 보통 사람들이 가졌으면서도 시골 사람들에게 서울은 선망의 도시로 동경됐다.
광복 후의 서울은 ...
1945년 광복이 되자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에 들어오고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서울은 국제적인 관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군정 하에서 1946년 8월 15일 서울헌장이 공포되고 경성부에서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되었다.
1949년 서울특별시로 승격되었으나 지방의 각 도와 마찬가지로 중앙 정부의 직접 통제를 받다가 1962년 수도 서울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국무총리 직속이 되었다.
1950년 6·25전쟁으로 수도를 잠시 부산으로 옮겼다가 몇 개월 만에 다시 환도했으나, 이때 서울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다.
1870년대 이후 40여 년의 변화가 문화적·정신적인 면에서 극적인 변화라고 한다면, 1950년대 이후 최근 40여 년의 변화는 물질적·외형적인 면과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엄청난 변화이었다. 이러한 변화의 특징을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말처럼 40년 간에 서울 인구는 10 배 이상 증가했다. 제주도 면적의 3분의 1이 조금 넘는 면적을 가진 서울에 인구는 1000여 만 명 이상으로 전국민의 4분의 1이 살고 있다.
출퇴근 시간에 버스와 전철도 만원이고 병원·예식장도 만원이고 공동묘지도 만원이다. 이러한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가난하면 서울에 가라.’든가, ‘서울에 가야 출세할 수 있다.’는 일화에서처럼 지방 사람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서울 지향적인 사고 방식은 서울이 비대화된 중요한 심리적인 이유이다. 그러한 사고 방식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한국사의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것이라 할 것이다. 물론, 서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심리적인 측면보다는 오히려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요인이 보다 중요한 것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40여 년 간 대통령 중심제의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가 유지되어왔으며 한국 자본의 60% 이상이 서울에 몰려 있고, 굴지의 금융 기관, 대재벌의 본사가 모두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명문 대학이 서울에 있으며 자식을 명문 대학에 보내고 싶은 학부모들의 욕구가 서울로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제 서울은 모든 생활면에서 한국의 중심이 되었고 교통·통신망은 서울로부터 지방으로 뻗어졌다. 서울이 만원이라는 것은 지방에서 업무로 일시 올라오는 사람과 서울 근교와 직접 닿은 인천광역시·과천시·성남시·광명시·부천시·안양시·의정부시·고양시·하남시·구리시 등의 사람들이 서울에 자주 내왕함으로써 더욱 심하게 느껴진다.
둘째, 서울의 시가지가 크게 변모했다. 광복 직후는 5층의 화신건물이 제일 높은 빌딩이었으나 이제는 30층 이상의 고층 건물이 세워져 빌딩 숲을 이루었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의 도로망이 바둑판 모양이었으나 서울이 강남·강동·강서 쪽으로 확장되면서 크게 볼 때 방사선 형태로 변했다.
광복 직후 좁았던 도로가 크게 확장되기는 했으나, 아직도 서울의 도로는 차량의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므로 교통난은 갈수록 어렵게 되었다. 도로 가운데를 달리던 느린 전차와 선로가 철거되고, 이제는 지하철이 시민들의 중요한 대중교통 수단이 되었다. 옛날의 서울에 처음 온 시골 사람이 어리둥절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해졌다.
셋째, 옛날 서울이 가졌던 자연지형적 의미가 상실되었다. 광복 직후 한강을 건너려면 한강교가 유일한 다리였고, 뚝섬·노들(노량)·용산·삼개(마포)·양화진에 나룻배가 있어 배를 타고 건넜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강이 가지는 방어선으로서의 구실은 대단했다. 1950년 6·2전쟁 때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한강교가 폭파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강을 건너는 교량이 13개나 되어 나룻배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이고 한강은 이제 방어선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서울의 중심이 되어 버렸다.
또한, 중앙으로 흘렀던 청계천은 지금도 흐르고 있지만 이제는 볼 수 없게 완전히 복개되고 그 위에 고가도로까지 생겼다. 따라서 그 위를 지나면서도 청계천이 흐르고 있다는 의식을 가질 수 없다. 맑은 물이 흘렀던 청계천은 이제 하수구로서의 구실을 할뿐이다.
또한, 인왕산과 낙산을 좌청룡과 우백호로 설명했던 풍수지리설도 이제 적용될 수 없게 되었다. 낙산 위에 주택이 가득 들어섰으며 인왕산에는 터널을 뚫어 지맥이 끊어졌다.
서울의 안산으로 시민의 사랑을 받았던 남산은 이제 세 개의 터널이 뚫려 더 이상 안산이 아니라 중앙에 있는 언덕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다. 예전에 성문 안만을 서울이라고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광복 이전만 해도 섬으로서 존재했던 여의도와 밤섬도 이제는 섬의 기능을 상실했다. 이와 같이 확대된 서울의 방어 전략을 서울의 지형에서 찾는다는 것은 완전히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넷째, 서울의 전통적인 생활 풍습과 풍속이 점차 쇠퇴되고 서양화되었다. 8·15광복 직후만 해도 혼인식에서 신랑은 사모관대하고, 신부는 원삼을 입고 족두리를 쓰고 혼례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예식장에서 30분 내외에 끝나는 것으로 일반화되었고, 음식과 주거 생활에서도 서양화가 크게 진전되었다.
식생활에서는 아직도 쌀밥과 김치·된장찌개 등의 전통 음식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어린이들은 이보다 양식을 즐겨먹는 성향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주거 생활은 아파트가 크게 늘어나면서 부부 중심의 생활로 핵가족화하고 있다. 자식이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에 생활 기반을 가진 경우 노부모들이 서울에 오면 갑갑하고 답답해 곧바로 내려가는 경향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이뿐만 아니라 자식 둘 낳기 운동을 벌인 가족 계획이 추진됨에 따라 가족 성원도 축소되어 핵가족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결과로 여성들의 사회 참여도 크게 확장되었다. 이제 여성은 집에서 밥 짓고 아기 기르는 일을 하던 옛날의 여성과는 크게 달라졌다. 여성도 직업 사회에 뛰어들어 사회 활동에 이바지하고 있다.
이러한 생활 습속의 서양화를 급속히 촉진시킨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으로 기독교의 급속한 전파를 들 수 있다. 도시에는 교회 건물이 모든 구역마다 있고, 교직자와 신도의 수적인 면에서도 한국 제일의 종교가 되었다. 비록, 통계 수치에 있어서는 기독교세가 불교와 대등한 비율을 보이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기독교가 우세한 편임은 상식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기독교인은 제사와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함으로써 전통적인 생활 습속을 크게 위축시켰다. 따라서, 오직 남아 있는 습속이라면 음력 정월과 8월 보름 한가위 명절이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절에도 전통적인 유희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다섯째, 서울은 이제 한국의 도시로만 아니라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다. 1947년 서윤복(徐崙福)이 미국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1등을 했을 때 미국 시민들 대부분이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를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서울이 알려질 리가 없었다.
1949년까지만 해도 서울에 두·세 개밖에 없었던 댄스홀에는 한국인 단독 입장이 금지되었고 미국 군인이나 외국인과 동행해야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1950년 6·25로 한국과 서울이 외국에 알려졌으나 이때의 서울은 전쟁으로 인한 폐허로 빈곤한 도시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1970년 이후의 급성장한 경제력은 해외에 한국 상품을 수출하고 해외 건설에 나섬으로써 중동·아프리카 지역에 한국과 서울이 알려졌고, 1986년에 치른 아시아경기 대회는 서울의 명성이 아시아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질서정연한 입장, 공평한 응원 태도, 거기에 중국과 금메달 수에서 1위를 다툰 좋은 성적 등은 한국 민족의 저력이 왕성함을 우리 자신들에게 재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의 무한한 발전을 예견하게 했다. 더구나, 굳게 닫혀 있던 중국에 경기 실황이 중계됨으로써 인구 10억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서울의 발전상을 새로이 인식시켰다.
1988년의 서울 올림픽대회 개최는 서울의 국제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몰려드는 외국 관광객을 수용하기 위해 훌륭한 호텔이 지어졌고, 우수한 경기장, 훌륭한 경기 운영과 경기 결과는 한국과 서울을 세계에 알리는 대단히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여섯째, 서울은 교육의 도시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서울 인구의 4분의 1이 학생이므로 교육에 관여하고 있는 인구를 살핀다면 그 비율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여기에 사회 교육까지 합친다면 교육 인구는 서울 총인구의 절반 가량이라고 볼 수 있다.
서울의 교육 수준이 전국적으로 제일 높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명문 대학이 서울에 몰려 있어 매 년 지방의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하며, 이들 중 대부분이 입학과 동시에 서울의 시민이 되는 것이 예정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취업을 주로 서울에서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나라가 여러 부문에서 급속한 발전을 보이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은 교육의 힘이다. 교육받은 우수한 인적 자원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저력이다.
한국 교육이 이처럼 왕성한 것은 부모들이 교육을 출세의 기초라고 믿어온 데 있다. 이는 조선시대 이래의 역사적 전통이며, 오늘날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부모들은 모든 희생을 바친다. 따라서, 교육에 쏟는 한국인의 정열은 불길과 같다. 이러한 교육의 힘은 서울, 나아가서는 한국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값진 원천이며, 현대 한국의 역사를 창조하는 힘이다.
모든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근본도 교육에 있다고 한국인은 믿는다. 교육은 한국의 무한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기반이다. 그러므로 교육의 중심인 서울은 한국의 모든 문제를 풀어가고 한국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도시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서울을 깨끗하고 명랑하며, 아름답게 전진하는 희망에 찬 도시로 키워나가는 것은 곧바로 한국을 그렇게 키워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의 비대화는 상대적으로 지방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앞으로는 서울 중심에서 지방 중심으로 국가의 모든 시책이 강구되어 전국의 어느 곳이나 균등한 발전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울의 자연 환경은 급속도로 파괴되어 가고 있다. 매일 쏟아내는 자동차의 매연은 여름에 오존 경보가 울리며, 서울의 상수도인 한강은 이미 폐수가 흘러 들어와 오염되었고, 식수로 이용하기 어려운 정도이며, 서울의 공원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자동차의 급증으로 소방 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해 화재를 당하면 소방차가 출동할 수 없도록 길이 차로 막혀 있으며, 생활 쓰레기를 처리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랐다. 그리고 서울에는 재개발 구역이라고 하는 낙후된 집들이 꽉 차 있는 곳이 많다. 이제 서울은 도시 계획을 하기에는 너무나 비대해졌다.
1997년 말 한국이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는 체제로 들어가 경제와 산업의 구조 조정이 일어나고 1998년 6월 현재 150만에 달하는 실업 인구가 생겨 가정을 잃은 노숙자가 증가하고 있으며, 경기의 침체는 처음으로 서울인구의 감소 경향을 띄기 시작했다.
자연 환경을 복구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생존할 수는 없다. 또한 서울이 축소되지 않고는 엄청난 물류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도도 없다. 서울의 도시 계획은 장기적인 전망 하에 종합적으로 세워져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도시로 바뀌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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