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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악가-79화 이원(梨園)-1
드넓은 화북평야(華北平野)에 동서북의 삼면이 120장에서 150
장 높이의 연산(燕山), 군도산(軍都山), 소오대산(小五臺山)으
로 쌓인 분지에 북연부(北緣部)가 있었다. 해하(海河)의 지류
인 영정하(永定河)와 조백하(潮白河)가 북서와 북동쪽 산지에
서 발원해 북연부를 가로질렀고 두 하천의 중앙부에 수도인
북경이 있었다.
북경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매서울 장도로 추우며 봄에
는 황사로 살기 힘든 도시이다. 악삼 일행이 북경에 도착했
을 때 그들을 반긴 것은 혹독한 추위였다. 각기 운남성과
강소성에서 살아온 갈씨 자매와 황보영은 살인적인 북경의
추위에 이를 딱딱 부딪치며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북경의 강추위를 처음 접한 갈씨 자매와 황보영은 이런 혹독
한 환경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북경의 주민들은 그녀들의 생각과 달리 별 동요 없
이 거리를 오가고 있자 자신들만 특별나게 추위를 타는 것인
가 생각했다.
척신명과 척금방은 물론 자은 선생마저 북경의 강추위에 대
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자 갈씨 자매와
황보영은 혹독한 추위를 어떻게 이기고 있는지 궁금했다. 주
위를 둘러본 그녀들은 다른 사람들이 추위를 느끼지 않는 듯
이 별 표시를 내지 않고 있자 자신들만 유별나게 추위를 타
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을 정도였다.
갈운지는 언니와 황보영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피마저 동
결시킬 듯한 추위에도 별 동요가 없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혹독한 추위를 무시하는 힘이 어디서 나는지 궁
금했다. 그녀는 주위를 살피다가 상대하기가 껄끄럽지 않은
척금방에게 다가갔다.
"그, 금방 동생..."
"네. 운지 언니."
"도, 동생은 춥지도 않아."
"춥지요. 하지만 북해에 비하면 이 곳의 추위는 별것도 아니
에요. 그야말로 북해의 추위는 상상을 초월하지요."
"이, 이 추위보다 더 춥다고!"
"네, 언니."
갈운지는 사색이 됐다. 지금 느끼는 추위만으로도 전신이
얼어붙는 것 같은데 이보다 더한 추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
자 악몽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더한 추위가 존재한다는 척
금방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얼어버렸다. 갈운지가
심할 정도로 추위에 떨자 척금방은 악삼을 가리키며 말했다.
"악 소협을 보세요. 언니."
"악 가가를 왜?"
"악 소협도 북경은 처음일텐데 별로 추위에 떨지 않잖아요."
척금방의 시선은 태연하게 서있는 악삼을 힐끗 지나갔다.
"악 가가야 산동 출신이니까 나보다 추위에 강한 것이지. 무
슨 특별난 이유가 있겠어."
"악 소협은 강남에서 오랜 세월을 살았다면서요. 그렇다면 악
소협도 이번 추위는 아마 처음 당한 것이에요."
악삼은 갈운지와 척금방이 북경의 추위를 논하다가 자신을
도마 위에 올리고 설전을 펼치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악삼은 두 여인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며 자기를 놓고 설
왕설래하고 있음에도 막지 않았다.
갈운지와 척금방이 수다를 떨며 희희낙락해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사실 두 여인과 황보영은
선상에서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장강수로연맹
과 치른 전투가 요구한 많은 죽음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규
방의 생활을 해온 그녀들에게 수많은 피를 뿌리는 전투는 크
나큰 충격이었다. 특히 생명의 가치가 파리보다 못할 정도
로 가볍게 사그라지는 전장의 현실은 여린 심성을 가진 여인
들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전을 치르고 나서
한참이 지나도 여인들의 마음에 드리워진 그늘을 거두어지지
않았다.
악삼은 죽은 동료들 생각에 슬픔에 젖은 선원들과 무거운 분
위기가 가득했던 상선을 기억했다. 상선은 엄청난 양의 피를
뿌리고 나서야 겨우 탈출했지만 분위기는 암울했다. 살아남
은 자는 죽은 동료를 생각하며 깊은 탄식에 빠졌다. 특히 자
폭을 감행해 길을 뚫은 상선을 생각할수록 그들의 마음은 무
거웠다.
자폭을 감행한 동료들 덕분에 살아 남았다는 사실이 선원들
의 안색은 납을 마신 것처럼 굳게 만들었다. 그들은 죽어
간 동료들에게 크나큰 빚을 얻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었다.
생명의 빚이라는 무거운 빚은 그들 마음속에 커다란 멍에가
되었다. 또한 악삼 일행을 비롯해 자은 선생과 척신명의 가
솔도 선원만큼 굳은 표정으로 일관했다. 배를 내려 북경에
도착해도 그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이 북경의 추위에 별 신경을 쓰지 않은 것도 얼어붙은
마음이 더 차가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갈운지가 북경의 추위
에 대해 척금방과 수다를 나눠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버리자
악삼을 비롯해 모든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악삼은 두 여인이 수다를 떨면서 마음속에 남아 있던 앙금이
사라지기를 원했다. 또한 황보영도 자연스럽게 그 분위기에
젖어들기를 바랬다. 악삼의 시선은 네 여인을 훑고 지나가
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네 여인을 지나친 시선
이 자연스럽게 자은 선생과 척신명에게 도착했고 악삼의 안
색은 굳어졌다.
자은 선생과 척신명은 다른 사람들과는 틀렸다. 북경에서
해야 할 일 때문인지 몰라도 갈운지와 척금방이 나누는 대화
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냉담한 안
색은 이상한 괴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자은 선생은 척신
명과 몇 마디를 나누더니 식솔을 이끌고 북경에 미리 정해둔
거처로 향했다.
두 사람이 담담한 이별을 나눈 것에 비해 조 집사와 석진은
짧지만 강렬한 정이 느껴지는 헤어짐을 보여 주었다. 비록
"다음에 보세." 라는 짧은 인사말을 한 것이 다였지만 그 속
에는 뜨거운 정이 숨어 있었다. 그에 비해 미사여구로 치장
된 자은 선생과 척신명의 이별인사는 삭막할 정도였다.
자은 선생이 식솔을 이끌고 사라지자 악삼과 갈씨 자매는 척
신명을 따라 갔다. 북경에 있는 운문상회의 지부에 척신명
이 마련해준 거처에서 자은 선생을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부인 묵창 악풍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는 척신명이 내민 거래에 따를 수밖에 없는 악삼은 시
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악삼은 척신명이 마련해준 객실에 여장을 풀고 난 후에 고민
했다. 척신명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끌려 다니
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또한 자신에 대해
너무나 많이 알고 있는 척신명이 부담스러웠다.
"척신명은 무엇을 원하는 걸까?"
악삼은 생각할수록 오리무중에 빠지는 것 같았다. 척신명을
관찰하면서 상인이 어떤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꼈기에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최소한 상대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아야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척신명은 이익이
나지 않는 장사는 시작도 하지 않으며 투자보다 큰 이문을
남기려는 인물임을 알고 있기에 고민의 시간은 길어졌다.
"도대체 송 도공이 누구이기에 만나기만 하면 된다는 쉬운
조건을 걸었을까? 무슨 이득을 볼려고 나와 송 도공이라는
인물을 한 것일텐데... 도저히 알 수가 없군."
악삼은 침상에 앉아 독백했다. 척신명이 노리는 수가 무엇
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끌려 다니고 있는 현실이 짜증을 나게
했다. 그렇다고 기분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현실에 처해 있
었다. 악삼은 솟구치는 노기를 참고 척신명이 내건 조건을
천천히 되짚으며 닥쳐올 앞날에 대해 생각했다.
"곧 있으면 알게 되겠지."
악삼은 차갑게 내뱉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거래의 조건
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차가운 독백은 조용히 퍼지더니
곧 실내는 침묵에 빠져 버렸다.
악삼과 갈씨 자매가 거처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확
인한 척씨 부녀는 밀실에 들어갔다. 운문상회의 북경지부에
비밀리에 만들어진 밀실은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었다.
밀실에 들어간 척씨 부녀의 안색은 각기 달랐다. 음흉한
눈빛을 흘리는 척신명이 포식을 기다리는 맹수와 같은 표정
이었다면 척금방의 안색은 얼어붙은 빙벽처럼 싸늘했다. 척
금방은 밀실의 중앙에 있는 탁자 앞에 놓여진 의자에 앉으면
서 척신명에게 말했다.
"아버지, 악삼 일행을 잡아둔 이유를 북경에 도착하면 알려준
다고 하셨죠."
"그렇게 말했지."
"그럼 알려 주세요."
"약속을 했으니 당연히 지켜야지."
척신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고 있듯이 우리의 세력은 약하지 않다. 하지만 적에
비해서는 약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우리에겐 고수가 절대적
으로 부족하다."
"설마 악삼을 끌어들일 생각인가요?"
척금방은 부친이 그렇게 어리석은 생각을 했는가 하는 표정
으로 반문했다.
"악삼은 손을 내민다고 쉽게 잡을 자가 아니지."
"잘 아는군요. 게다가 그는 누구 밑에 들어갈 사람도 아니잖
아요."
"그래, 악삼은 누구 밑에 들어갈 자는 아니다. 또한 조직의
우두머리가 될 사람도 아니지. 홀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혼자
살아갈 인물이다."
"그걸 아시면서 왜 북경까지 끌고 왔어요?"
척금방은 부친이 무엇을 꾸미는지 궁금했다.
"그거야 간단하다. 악삼이 옆에 있기만 해도 우리에겐 이익이
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악삼은 잘 사용하면 전가의 보도이지만 잘못 사용하다간 오
히려 사용자를 다치게 하는 양날의 검과 같다."
척신명이 내린 악삼에 대한 결론은 척금방도 생각하고 있던
내용이었다. 같이 지낸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악삼에 관해
많은 정보를 입수하고 검토를 했던 척금방이었다. 게다가 직
접 만난 뒤부터 치밀하게 관찰해 악삼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척금방은 아버지가 악삼에 관해서는 자기보다
더 많이 파악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어떤 방법을 생각한 것이군. 악삼을 움직일 수 있
는 무언가를 찾아낸 것이야.'
그녀는 부친이 악삼을 이용하기 위해 마련한 패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골똘히 생각을 하던 척금
방은 갑자기 한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것은 척신명이
환객을 죽이지 않은 것으로 그녀가 알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이 아니었다.
보통 적이나 간자를 발견하면 가차없이 죽이던 아버지가 위
험을 초래할 뻔한 환객을 죽이지 않고 가둔 것은 이상한 일
이었다. 그것도 인질의 가치도 없는 인물을 억류한 것은 비
생산적인 일이었다. 그런데도 환객을 생포했다면 다른 가치
가 생겼다는 논리가 생성됐다.
척금방은 악삼과 환객이라는 두 존재를 생각하다 두 사람이
맺은 관계가 기억났다. 원한이라는 관계가. 악삼을 이용할
수 있는 해답을 만들 수 있는 도식(圖式)이 간단하게 나오자
척금방은 탄성을 질렀다.
"아하!"
척금방은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궁금해 척신명에게 질문을
던졌다.
"환객을 잡아둔 것은 악삼을 이용하기 위해서 인가요?"
"그렇다. 환객은 악삼을 움직일 수 있는 중요한 패지."
척신명의 입가에는 음험한 웃음이 떠올랐다. 척금방은 아버
지의 웃음에 교활한 미소로 화답했다. 어려운 문제가 간단
하게 해결 됐다고 생각한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다
른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부친이 그 문제
의 해결방안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아버지. 우리 상선에 이 장도가 탔다고 다들 알고 있잖아
요."
"네가 걱정하는 것이 이 장도의 실종이 불러올 화근 때문이
냐?"
"네, 아버지."
이장도의 실종이 불러올 문제를 아버지가 파악하고 있자 그
녀는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척신명은 딸의 걱정이 기우
(杞憂)에 불과함을 알려주기로 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떤 복안이라도 있나요?"
"환객이 이장도로 변장했다면 우리라고 변장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느냐."
"아하~, 그런 수가 있었군요."
척금방은 손바닥을 치며 탄성을 질렀다. 척신명은 환객의
계략을 역으로 사용해 화를 피할 방법마저 생각해 두었던 것
이다. 그는 환객보다 한 수 위였다. 환객이 사용한 이장도
의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움직이기만 하면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러 사람들이 목격하도록 움직여야
한다는 선결과제가 필요했지만...
"사실 환객은 남해방의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장강수로
연맹의 수적들과 교전을 치를 때 사망한 것으로 위장할 생각
이었다."
"장강수로연맹의 뒤에는 팔마당이 있고, 팔마당은 남해방의
전단(戰團)이죠. 강남 흑도를 장악했다는 팔마당이 아무리 강
해도 소림사가 움직인다면 괴멸뿐이 없죠. 게다가 비밀을 유
지해야 하는 사해방의 특성상 팔마당은 잘려진 도마뱀 꼬리
신세가 되었겠죠."
"내가 있는 상선에 타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됐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환객은 정말 재수가 없었군요."
척금방은 환객을 비웃으며 기뻐했다.
"그것보다 정보의 부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알려주는
좋은 사례가 된 셈이란다."
"그런 셈이군요. 그런데 환객이 꾸민 음모를 생각해보니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오네요."
"어떤 추측이냐?"
척신명은 딸이 어느 정도까지 이면을 읽어 내는지 궁금했다.
기대가 섞인 눈으로 척금방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첫째는 환객의 단독행동일 경우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추
측은 답이 아니라고 보여요. 생기는 이익에 비해 위험도가 높
은 일을 벌이는 인물은 없는 법이지요."
"환객이 매수를 당해 행할 수도 있지 않느냐?"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다니 우습군요. 저를 시험하는 건가
요? 아버지."
척금방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딸
의 어이없어 하는 눈빛 속에 불쾌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간파한 척신명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런 걱정은 접어 두거라."
"그렇겠죠.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아버지가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죠."
척금방은 두 눈을 번뜩이며 아버지를 노려보며 말했다. 척
신명은 딸의 차가운 눈빛을 슬쩍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아
버지가 고개를 돌리며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하자 척금방은
코웃음을 친 후에 말을 이었다.
"둘째는 집법원이 외부의 방파와 손을 잡은 것이지요. 그런데
이 추측은 첫 번째보다는 확률이 높지만 정답은 아니라고 생
각해요."
"그렇단다. 집법원이 타파와 전략적 제휴를 맺어 남해방을 공
격했다고 쳐도 사해방은 세 방파가 더 남아 있다. 게다가 남
은 세 방파의 인물들이 그리 어리석은 인물들이 아니다. 하나
같이 뱀이나 여우같은 작자들만 우글거리는 곳이지. 집법원이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역시 제 생각과 아버지의 예상이 일치하는군요."
두 부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나눴다.
"자, 이제 네가 생각하고 있는 정답을 말해보렴."
"알았어요. 아버지. 마지막으로 세 번째인데 그것은 집법원이
사해방의 네 방파 중에 한 방파의 수족으로 들어갔다는 생각
이에요. 특히 남해방을 먼저 쳐야 하는 방파로 말이죠."
척금방이 단순한 정황 증거로 사해방 내부의 상황을 추리해
내자 척신명의 안색은 밝아졌다. 총명한 딸을 바라보는 아
버지의 마음은 흐뭇한 것이다. 척신명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
으며 세 번째 가설이 옳았다는 것을 알려 주기로 했다.
"네 생각이 정확하다."
"그건 아버지의 단순한 예측인가요? 아니면 다른 정황증거가
있는 건가요?"
척금방은 아버지가 세 번째 가설이 정확하다고 말하자 의아
해 했다.
"집법원은 북해방과 손을 잡았다."
척신명은 딸의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켰다.
"환객에게 확인했나요?"
척금방은 아버지가 포로가 된 환객의 증언을 듣고 확신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내지 않기를 빌며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렇단다."
척신명의 대답은 척금방의 소박한 소원을 허망하게 만들었다.
"그런 중요한 사실을 한 사람 말만 듣고 믿을 수는 없잖아
요?"
"그거야 당연한 일이다."
척신명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하자 척금방은 한가지 사
실을 눈치챘다.
"다른 정보가 있군요."
"과연 내 딸이구나. 정확히 알아 맞췄다."
"사해방의 정보는 구하기 힘들어요. 그런데 평범한 내용도 아
닌 중요한 비밀을 알아냈다면 간자를 심었다는 것 외에는 달
리 설명할 방법이 없지요."
척금방은 그 정도 분석은 간단한 것이다라는 듯이 말했다.
"정확하다. 나는 사해방에 간자를 심었다. 그것도 핵심의 위
치에..."
"사해방에 간자를 심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정말로 아버지의 능력은 놀랍군요."
사해방의 핵심에 간자를 심은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척금
방은 부친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감
탄하다가 환객이 생각났다. 아버지는 환객에게 알고 있는
내용을 확인하는 작업을 했을 것이고, 그것을 모르는 환객은
어리석게 조직의 정보는 알리지 않겠다며 버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객은 바보처럼 버텼겠군요."
"그래. 그 멍청이는 두 시진이나 버티더구나."
"하아~, 그 정도 시간을 버텼다면 만신창이가 됐겠군요. 아버
지."
척금방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안타까워했다. 척신명은
딸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
다.
"앞으로 여러 번 볼 수 있으니 그리 아까워하지 말거라."
"그건 알아요. 하지만 가을철에 잡은 잠자리의 날개를 한 개
씩 떼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줄 알잖아요. 오도 가도 못한
채 바스러지는 것을 본다는 것은 너무나 즐겁죠. 특히 자기가
잠자리가 됐다는 것을 모르는 인간은 구하기 힘든 법이에요."
"나중에 네가 직접 고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마."
아버지는 딸의 잔인(殘忍)한 성품을 보았는데도 슬퍼하지 않
았다. 오히려 더욱 부추기고 있으니 과연 친부인지 궁금했
다.
"그런건 별로 재미없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은 환객이 당한
것과 같은 경우죠.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고문을 하는 나,
그 사실도 모르고 버티는 포로, 고문을 버티다 못해 죽음을
기다리면 네가 숨기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고 말하죠. 그때 포
로가 지을 표정을 생각하면 미치도록 기쁨을 느껴요."
척금방은 생각보다 잔인했다. 그런데 척신명은 딸이 표출하
는 잔혹성을 보고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기뻐했다. 척금방
은 자신이 내보인 잔혹함을 아버지가 좋아하자 새침한 표정
을 짓다가 화제를 돌리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왠지 자신의
본 모습을 누구에게 보인다는 것은 기분이 좋지가 않았던 것
이다. 비록 그 상대가 아버지라 해도...
"아버지. 소림사가 뛰어들지 않게 이장도가 상선에서 떠났다
는 사실을 만들어야 하잖아요."
"그건 어려운 일은 아니란다."
"이장도의 인피면구는 환객이 쓴 것을 떼어내면 간단하지만
다른 두 사람이 문제잖아요."
"걱정할 필요 없단다. 변장에 관해서는 환객에 못지 않은 대
가가 누구더냐!"
"설마... 두 사람의 얼굴가죽을 벌써 벗겨 냈어요?"
척금방은 떨리는 눈빛으로 척신명을 바라보았다. 파르르 떨
리는 그녀의 눈빛 속에는 잔혹함이 넘실거렸다. 그녀는 마
지막 재미마저 볼 수가 없는 것인가 생각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척신명의 대답은 그녀의 기대를 무참하게 부
셔버렸다.
"약품처리가 끝났으니 내일부터 사용할 수 있단다."
"그래요... 그렇다면 두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지금쯤이면 염라대왕과 면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얼굴가죽
이 벗겨졌으니 염라대왕도 누군지 몰라 헤매겠지만 내가 상
관할 일은 아니지."
척신명은 담담한 안색으로 두 사람의 생명을 장난감처럼 느
끼게 하는 말을 태연하게 내뱉었다. 척금방은 잔인한 내용
을 듣고도 별일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마지막 재
미마저 보지 못해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그녀는 부친의 말속
에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쯤이라고요! 그럼 바로 죽인 것이 아닌가요?"
"이승에서의 삶을 조금 더 연장시켜주었단다. 내가 자비(慈
悲)를 베풀었지."
"아깝네요."
척금방은 진심으로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피에 굶주려
있었던 것이다. 척신명이 고통을 느끼지 않게 즉사시켰다고
말했다면 그녀는 허탈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비록 처절
하게 죽어 가는 두 사람을 못 본 것은 아깝게 생각하는 그녀
지만 너무 쉽게 죽었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는 나았다고 생각
한 것이다.
"나중에 더 재미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정도 일에 안색
을 찌푸리면 되겠느냐."
"알았어요."
척금방은 지나간 일은 포기하고 다음을 기대했다. 그리고 자
신이 궁금했던 화제를 꺼냈다.
"아버지. 자은 선생이 황보영을 동행시킨 이유가 무엇인지 아
세요?"
황보영을 만나면 친근한 자매처럼 지냈던 척금방의 본 모습
이었다. 겉으로는 언니라고 불렀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 이유가 궁금하냐?"
"당연히 궁금하지요. 자은 선생은 자타가 인정하는 석학으로
행동과 사고가 유교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그런데
여자는 삼종지도를 지켜야 하며 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그가 딸을 데리고 여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렇구나. 미혼의 딸을 데리고 혼약을 약속한 가문을 만나러
간다는 것은 분명히 이상한 일이구나. 분명히 무슨 비밀이 있
겠구나."
"뭐라고요! 그럼 황보영이 약혼자를 만나는 것인가요?"
척금방은 생각지도 않은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라 되물었
다. 그런데 척신명은 딸이 놀라 반문했음에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은 선생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이
제야 깨우쳤다는 사실에 자책하며 숙고(熟考)했다. 척금방
의 질문을 듣고서야 자은 선생의 북경행이 생각보다 이상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고고한 유학자인 자은 선생이 왜 딸을 데리고 북경에 왔다.
사위가 될 사람을 보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무
엇 때문에 딸을 데리고 움직였을까?'
척신명의 두뇌는 맹렬한 속도로 움직였다. 그러나 답을 내기
에는 정보가 부족하다는 결론만 나왔을 뿐 명쾌한 해답은 나
오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런 간단한 의문을 눈치채지 못했단 말인가? 자은
선생 같은 인물이 미혼의 딸을 데리고 움직였다면 분명히 이
유가 있는 법인데 어쩌다 이런 실수를 저질렀단 말인가... 그
래 아직 늦은 것은 아니다. 최대한 빨리 정보를 모아야겠다.'
척금방은 아버지가 눈을 깔고 숙고하자 기묘한 느낌이 들었
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생각하는 범위 밖의 생각을 했다는
것이 이상한 희열을 맛보게 했다. 게다가 부친이 저런 모습
을 보일 때마다 누군가 죽거나 피해를 당하는 것을 과거부터
수없이 보았기에 그녀의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쁨을 느
꼈다. 특히 이번의 목표가 황보영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
다.
황보영을 만날 때마다 언니라고 부르며 허리를 굽혀야 한다
는 사실이 치욕이라고 느끼는 그녀였다. 나이를 떠나 신분
의 차이 때문에 황보영을 누를 수 없다는 점이 그녀에게 참
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자기보다 아름다운 자태와
고고한 성품은 척금방에게 열등감을 심어 주었다. 척금방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기원했다. 황보영이 최악의 치욕을 느
끼며 처참하게 죽어가기를...
밀실이 마련된 건물의 지붕에 암회색의 천으로 만들어진 옷
을 입은 사람이 엎드려 있었다. 그 사람은 기와에 귀를 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일체의 미동조차 없는 그 사람은 마치
지붕에 매달려 있는 부조와 같았다.
척씨 부녀의 대화를 기와에 울리는 미약한 진동을 통해 도청
한 의문의 인물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다 얻었다고
생각했는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팽이가 움직이는
듯이 느릿하게 움직였지만 단 한 점의 소음도 없었다. 그는
고양이보다 더 미묘한 움직임을 선보이며 지붕에서 사라졌다.
그 의문의 인물이 겨우 한 숨을 쉰 것은 운문상회 지부의 한
별채 앞에 도착한 뒤였다. 으슥해 보이는 담벼락 밑에서 그
의문의 인물은 복면을 벗어 던졌다. 복면이 벗겨지자 긴 머
리카락이 구름처럼 퍼지더니 폭포수같이 흘러 내렸다. 뜻밖
에도 의문의 인물은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녀는 암회색 밀행 복을 벗어 던지고 준비해둔 옷을 입었다.
평범한 청색 의상이었지만 그녀가 입자 전혀 다른 아름다움
을 선보였다. 여인은 생각보다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왼손에
착용된 검은 장갑은 옥의 티라고 할 정도로 그 아름다움을
깍아내렸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언제나 왼손
에 검은 장갑을 착용하고 다녔다.
그것은 그녀의 비밀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정도 손해는 충분히 참아낼 수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곽씨 부녀가 밀담을 나누던 건물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상당히 재미난 부녀였어."
그녀는 곽씨 부녀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밀실이 있
는 건물 방향에서 시선을 돌려 전방에 있는 별채를 바라보며
그녀는 한숨 지며 말했다.
"운지가 깨어 있으면 골치가 아픈데... 아무리 봐도 일어나 있
는 것 같군."
별채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별채의
창문이 열리더니 갈운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언니, 잘 왔어."
"그, 그래..."
"나에게 할 말이 있겠지. 그리고 나는 들을 권리도 있다고 생
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토라진 갈운지를 바라보며 그녀는 한숨을 짓고 말았다. 그녀
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별채를 향해 걸어갔다. 동생에게
어떻게 변명을 해야하나 고민하며 힘없이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갈운영이었다.
갈운영이 별채 안에 들어가 토라진 갈운지를 달래는데 진땀
을 빼기 시작했다. 사실을 밝힌다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
지만 마음을 숨기는데 익숙하지 않은 갈운지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척씨 부녀라면 갈운지의 안색을 보고도 이상한 변
화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말할 단계가 아니라
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갈운영은 시간이 지날수록 화를 내는
동생을 달래는데 곤혹해져 갔다.
그런데 갈씨 자매가 별채에서 난상토론을 벌리고 있는 동안
한 인물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는 별채와 안채를 가르는
벽의 어두운 곳에 붙어 있었다. 구름 속에 들어 가있던 달
이 빛을 뿌리며 암천을 밝히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석진이었고 서늘한 시선으로 별채를 보고 있었다.
"상당히 재미난 자매로군."
더 이상 들어봐야 별 소득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석진은
갈씨 자매에 대해 논평을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일체의 파
공성도 없이 사라지는 석진의 신법은 유령의 움직임과 진배
없었다. 그런데 석진의 움직임을 만약 악삼이 보았다면 놀라
고 말았을 것이다. 석진의 신법은 악삼이 너무나 잘 아는 신
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진이 별채에 있었다는 것이나
조용히 사라진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즐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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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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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즐감하고 갑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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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 입니다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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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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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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