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량청周樑成 ! 카메라용 렌즈를 생산하는 화궈華國 광학기재光學器材 회사의 사장이며, 불산佛山시 대만기업협회 회장이다.
그는 중국에 투자한 지 20년이 되었다. 그가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일은 창업 초기에 받았던 오다였다. 당시 대만의 광학렌즈 시장은 규모가 작아 주문을 받기가 아주 힘든 시절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대문의 도어폰에 사용되는 렌즈를 주문받게 되었다. 주문을 한 사람은 젊은 주씨보다 20여세나 많은 루盧사장이었다.
루사장은 주씨에게 말했다. “젊은 사람이 창업해서 참 열심히 하는군. 만일 카메라용 렌즈를 주문받지 못했다면, 우리 회사의 도어폰용 렌즈를 만들어 달라.” 이때 루사장은 이해에 얽매이지 않고 젊은 주씨를 적극 도와주었다. 젊은 주사장은 루사장으로부터 4년 동안 주문을 받아 기업을 살려 나갈 수 있었다. 그때의 도움을 평생 잊지 않고 기억한다. 그 후 주사장은 대만의 카메라 조립업체들에게 렌즈를 공급하며 사업을 이어 나갔다.
그는 카메라 렌즈 생산에 전념하면서 “차별화된 고급품 생산”, “뒤로 물러날 길을 없애버린 결단“ 으로 성공하였다. 또한 그는 중국에서 브랜드를 중요시하지 않으며 사업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광동성 불산시의 화궈 광학렌즈 회사는 대만의 찐궈今國 광학공업사가 1992년 중국 광동성 불산시에 투자해서 창업한 광전光電 과학기술科技 기업이다. 주요 생산품은 광학렌즈로서 전량 수출한다.
고객은 일본, 유럽, 동남아 등 전역에 분포되어 있다. 일본의 캐논Canon, 니콘Nikon, 소니Sony, 파나소닉Panasonic, 펜탁스Pentax, 올림푸스Olympus 등이 주요 고객으로 모두 대만의 화궈 광학이 생산한 렌즈를 사용한다.
연구개발은 화궈 렌즈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이다. 초기에는 연구개발 인력이 1명이었으나 지금은 40명이 넘는다. 모든 일본 카메라 회사들이 화궈의 렌즈를 사용하기 때문에 주사장과 모든 직원들은 항상 위기 의식을 가지고 일한다.
영업적인 측면에서 화궈는 오다가 부족한 일은 없다. 그러나 새로운 고객을 더 발굴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판매보다 A/S 를 더 중요시 한다. 주사장은 거안사위居安思危, 편안할 때 위기를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남에게 추월당하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 광동성은 기업들에게 산업구조 고도화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사실 고도화란 기업의 체질을 강화시켜 더욱 경쟁력을 가지는 것이다. 본업을 버리고 전혀 다른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것이 절대 아니다.
주사장은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유럽의 채무위기에 대해서도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유럽의 오다가 줄면, 시간이 많아지므로 이 여유를 이용해 미래에 발전할 아이템을 개발해야 한다. 광전光電 제품도 생산라인을 자동화해야 한다.“
사실 주사장은 광학 분야 출신이 아니다. 그는 대학에서 재무, 세무를 전공하고 1980년 졸업했다. 졸업 후 은행의 합격 통지서를 받았으나, 이를 포기하고 당시 찐궈今國 광학의 사장이었던 천칭치陳慶棋와 함께 창업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은행 봉급은 매우 높아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는 리스크를 무릅쓰고 천칭치와 창업전선에 뛰어든 것이다.
초기의 카메라는 초점, 광선조정, 셔터, 노출시간 등의 기술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필수품도 아니었다. 그래서 광학기재의 성장이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바보 카메라가 나오자, 찐궈는 시장의 발전 파도를 타기 시작했다. 바보 카메라의 소형 렌즈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광학기재 산업은 기술, 자금, 노동집약 산업으로 에너지 소모가 많은 업종이다. 당시 대만의 많은 카메라 조립업체들이 중국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품 공급상들에게 가까운 곳에 공장을 세워 원가를 낮추어 달라고 요구했다. 주량청은 대만에서 12년 동안 경력을 쌓은 다음, 1992년 7월 중국에 가기로 결심했다.
당시 대만기업들은 동관東莞으로 집중했으나, 주사장은 불산佛山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동관은 많은 혜택을 주었지만 치안이 엉망이었고, 불산은 치안이 안정되었고 환경도 비교적 단순했다.
주량청은 불산에 공장을 설립한 다음부터 공급 대상을 대만계 기업에서 일본 기업으로 확대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화궈의 고객들중 일본 카메라 회사들을 포함한 90% 이상이 모두 화궈의 명망을 듣고, 제발로 찾아온 고객들이라고 자랑한다.
주사장은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 본다. ”사업초기에 나는 루사장으로부터 돈을 모으는 것은 덕을 쌓는 것만 못하다는 것과 성실하고 우직해야만 오랫동안 사업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신은 고지식하고 우직한 사람을 더 아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사장의 아버지는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녀들이 공부를 많이 하기를 바랬다. 그의 아버지는 항상 주량청과 누나에게 책을 많이 읽지 않으면 밥을 안 준다고 했다. 그리고 반드시 대학에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량청의 누나는 대중현台中縣 우루쩐梧棲鎮 시골 마을에서 처음 대학에 들어간 여성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일을 했다. 그 영향으로 주사장도 5시에 일어나 6시에 공장에 가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신체 접촉이 별로 없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부모가 몸으로 직접 모범을 보이며, 자녀 교육을 시킨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주량청은 지금도 매일 5시에 일어나 6시에 출근한다. 그리고 직원들을 퇴근시키고 비로서 휴식을 취한다. 그는 겸손하게 말한다. “나는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시간으로 보충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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