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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악가- 80화 이원(梨園)-2
자은 선생이 도착한 곳은 곽항의 자택이었다. 곽항은 자은
선생과 동문수학을 한 절친한 사이였다. 그는 관직에 흥미가
없는 자은 선생과 달리 출사 후 승승장구(乘勝長驅)해 현재는
호부시랑(戶部侍郞)에 재직하고 있었다. 자은 선생이 자기
수양이나 후학을 양성하는데 뜻을 두었다면 그는 국가에 충
성하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살수 있게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두 길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의 친분은 동문
수학 시절과 별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두 사람의 관계는 시
간이 지날수록 돈독해 졌다. 그것은 두 사람이 서로가 지향
하는 뜻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사람은 동문수학시
절 자식이 태어나면 성혼을 시키자고 약속해 두었다. 황보영
은 태어나기도 전에 부친이 혼처를 정해둔 것이었다.
곽항은 자은 선생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찍 업무를 끝
내고 퇴청하기로 했다. 그런데 자금성의 성문을 나가기도 전
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아들인 곽도성이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곽항은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곽도성에게 말했다.
"아비를 기다리고 있었느냐?"
"그렇습니다. 아버님."
"어허, 도찰원(都察院)이 언제부터 한가한 부서가 됐느냐?"
"제가 할 업무는 모두 끝을 냈습니다."
곽항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곽도성이 근무하는 도찰원은
관료의 비리를 감시하는 감찰기관(監察機關)으로 시간이 남아
도는 한직이 아니었다. 도찰원이 맡고 있는 감찰은 행정,
군사와 함께 국가의 3대 중요 부서 중에 하나였다. 그만큼
업무량이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게다가 곽도성은 종오
품(從五品)에 해당하는 경력(經歷)으로 실무의 관리를 맡고
있었다. 한마디로 퇴청하는 아버지를 한가롭게 기다릴 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다.
그런데 아들이 업무를 끝냈다며 퇴청할 준비를 갖추고 자신
을 기다리고 있으니 당혹스럽다가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곽
도성이 국가의 소임을 다하지 않고 자기가 편리한 대로 움직
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 업무를 끝냈다는 말을 들은 곽항의 안색이 좋지 않는
데도 곽도성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곽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아버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곽도성은 당당한 음성으
로 곽항에게 말했다.
"아버님, 이 아들은 자신이 맡은 일만큼은 책임집니다. 걱정
하지 마세요."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이 아비도 할 말이 없구나."
곽항은 곽도성에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자신이 그만 아들
을 의심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한 것이 미안했던 것이다. 곽
도성이 평소 업무에 충실했음을 기억한 곽항은 아들보기가
민망해졌다. 그는 곽도성에게 탄식과 함께 한마디를 던졌
다.
"흐흠... 내가 과민했구나."
"아닙니다. 아버님. 소자는 맡은 일에 충실한 아버님의 자세
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고맙구나."
곽항은 장성한 아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아버님. 이만 가시지요. 황 어른의 기다림이 길어지겠습니
다."
곽도성이 재촉하자 곽항의 얼굴에 기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재촉하는 이유가 무언지 생각났기 때문이다.
"자은이 온 것이 그리도 반갑더냐?"
"스승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늦장을 부린다면 제
자의 도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빙장(聘丈)어른이 왔기 때문은 아니고?"
"무, 무슨 말씀입니까! 그분은 제게 문무를 가르친 스승님이
십니다. 어려운 걸음을 하신 스승님을 찾아뵙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곽도성은 벌게진 얼굴로 극구 부인했다. 그러자 곽항은 빙
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은이 왔다는 소식을 너도 받았지."
"그렇습니다. 아버님."
"그렇다면 보영이가 동행했다는 이야기도 알고 있겠구나."
"네! 그, 그렇습니다. 하지만..."
곽도성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 다음은 무엇이냐?"
"아, 아버님..."
"하하하, 그래 알았다. 자은이 나를 기다리다 지치기 전에 어
서 가자. 그리고 보영이는 너를 기다리다 지치기 전에 말이
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곽도성이 난처한 기색을 드러낼수록 곽항은 즐거웠다. 평소
흠잡을 데 없던 아들이 안절부절 하는 모습을 드러내자 인간
미가 느껴져 유쾌해진 것이다. 곽항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
며 집으로 향했다.
"아, 아버님..."
곽도성은 애절한 목소리로 곽항을 불렀다. 그러나 곽항은
한마디 대꾸도 없이 걸어갔다. 곽도성은 한숨을 쉬고는 아버
지 뒤를 따랐다. 그는 더 이상의 변명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절망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곽항의 뒤를
따르는 곽도성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또한 곽도성의 얼굴에
는 묘한 떨림과 기쁨이 어려 있었다. 곽도성의 눈에는 앞장
선 곽항의 등보다 5년 만에 재회하는 황보영의 얼굴이 아련
하게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자은 선생은 곽항 부자가 도착했다는 전언을 받자마자 황보
영에게 시비를 보냈다. 곽항 부자와 만나는 자리에 황보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 기다리던
황보영이 아니라 곽항 부자가 나타났다. 황보영이 도착하기
도 전에 곽항 부자가 먼저 도착한 것이다. 자은 선생은 곽
항 부자를 만나자 반가움이 앞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네. 포한."
"그렇구먼. 정말 오랜만이네. 자은."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반가움을 나타냈다. 서로의 호를 부
르자 동문수학 시절이 생각났는지 두 사람의 눈동자는 추억
이 주는 즐거움으로 반짝였다.
"자네를 다시 보게 되니 너무나 기쁘네."
"자은 이 사람아. 나 역시 마찬가지네."
두 사람은 근 10년 만에 만난 것이다. 기쁨은 당연했다.
두 사람이 만남의 기쁨을 나누는 동안 곽도성은 뒤에 서서
기다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이 진정됐는지 의
자에 앉아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때를 기다리고 있던 곽
도성은 자은 선생 앞에 서서 인사를 올렸다.
"스승님. 도성입니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오~, 도성이구나. 너도 그동안 잘 지냈느냐?"
"제자는 항상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히려 스승님께서 평안하
셨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하하. 이 스승은 항상 건강하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것보다
너의 모습을 보니 5년 동안 얼마나 수양을 쌓았는지 알겠구
나."
"제자는 언제나 스승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습니다."
곽도성은 자은 선생의 수제자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는
학문뿐 아니라 유문에서 비전으로 내려오는 위유무기진해(衛
儒武技眞解)마저 전수 받았다. 그는 문과 무 양쪽에 걸쳐
높은 수준에 오른 인재였다. 그리고 자은 선생이 한눈으로
보아도 월등하게 무위가 높아졌음을 알 정도로 수련에 매진
해 왔었다.
"아버님, 부르셨어요?"
문밖에서 갑자기 황보영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방안에서 대화
를 나누던 세 사람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일제히 문을 바
라보았다. 특히 곽도성의 두 눈동자는 열의로 번뜩였다.
"들어오너라."
"네, 아버님."
문이 열리면서 황보영이 들어왔다. 방안에 들어간 황보영의
눈에 부친과 곽씨 부자가 들어왔다. 아버지만 있으리라 생각
했던 방에 두 사람이나 있자 그녀는 당황했다. 그런데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는 느낌이 들자
그녀는 의아해 했다.
"보영 아가씨, 오랜만이오. 도성이외다."
"아!"
그 남자가 자신의 약혼자인 것을 안 순간 황보영의 입술에서
터져 나온 것은 놀람이 숨겨진 탄성이었다. 황보영이 탄성을
지른 이유는 5년 전에 선교장을 떠나 북경에 갔던 약혼자의
얼굴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곽도성은 그녀의 탄성을 오해했다.
'보영 아가씨가 나를 뜻밖에 만나 놀라나 보구나.'
황보영과 곽도성이 서로를 바라보며 멍하니 있자 곽항과 자
은 선생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허허허, 보영아. 낭군을 본 것이 그리도 놀라운 일이냐?"
"그런가 보네. 보영이는 그렇다 치고 어리석은 내 아들도 마
찬가지 행동을 하고 있구먼."
자은 선생과 곽항은 두 사람의 행동을 보며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황보영이 곽도성을 몇 번 보다가 고개를
숙이고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쉰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또
한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으며 심적으로 큰 충
격을 받았는지 전신을 미세하게 떨고 있다는 사실도 보지 못
했다.
"보영아. 어서 와서 인사드리거라. 이 아비의 둘도 없는 친우
인 곽 시랑이다. 너에게는 개인적으로 미래의 시아버님이 될
분을 처음 뵙는 것이니 정중히 인사 올리거라."
"네! 네 알았습니다. 아버님."
황보영의 안색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곽항에게 시선을 돌린
황보영은 무릎을 끓고 절을 올렸다.
"황보영이 인사드립니다."
미래의 며느리에게 절을 받은 곽항은 기쁨을 주체못하고 대
소(大笑)를 터트렸다.
"하하하, 이렇게 아름다운 아이가 내 며느리가 된다니 이 무
슨 복인지 모르겠소."
"그게 어디 포한의 행운이오. 모두 도성이의 복이지 않겠소."
"하하하, 그렇구려. 자은의 말의 옳소이다."
곽항은 자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그리곤 황보영
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었다.
"자은. 떡본 김에 제사를 차린다는 말이 있네."
"이번에 날짜를 잡자는 건가?"
"그렇다네. 보영이는 올해가 지나면 21세고 도성이는 23세이
네. 혼기가 지나 이제 노처녀 노총각 소리를 듣게 됐네. 게다
가 올해는 이제 반달도 안 남았네."
"그렇군. 자네 말대로 아이들의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됐군. 아
무래도 올해는 힘들어도 내년 봄에는 혼사를 치러야겠네."
자은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황보영의 혼사를 빨리 치러야
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곽항은 때를 잡은 어부처럼 앞으로
나섰다.
"자네가 다른 일에 너무 치중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네. 이
번에 올라온 만큼 아예 날짜를 잡는 게 어떤가?"
"좋네. 자네 의견을 이번엔 따르겠네. 하지만 먼저 처리할 것
부터 끝내고 하는 것이 좋겠네."
곽항은 자은 선생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얼굴에 함박웃음을
드러냈다. 곽도성은 자신의 혼사 이야기가 거론된 후부터
단 한마디조차 하지 않고 귀만 기울였다. 자기 혼사를 논하
는 자리가 된지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은 선생과 곽항이 혼사 날짜를 잡자는 의견을 나누
자 겉으로는 드러내지 못해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곽도
성은 5년 전에 선교장에서 학문과 무학을 배우는 동안 황보
영에게 푹 빠져 있었다. 황보영은 15세의 나이가 되기도 전
에 그 미모와 자태를 갖추었다.
게다가 20살의 성숙한 황보영은 너무도 아름다워 곽도성의
마음을 일순간에 황홀하게 만들었다. 주위에 어른이 있어
그녀에게 말을 제대로 건네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성혼 날짜가 곧 잡는다는 두 어른의 대화를 듣고는
그 생각을 접었다.
자은 선생과 곽항, 곽도성 세 사람은 혼사를 생각하자 기분이
좋은지 싱글거렸다. 그런데 그들은 혼사의 당사자 중에 한
사람인 황보영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비록 곽도성이 황보영을 바라보며 신경을 곤두 세
웠지만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수 없었다.
황보영은 곽도성을 본 뒤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얼굴을 굳
히고 있었다. 특히 곽항에게 절을 하면서 더욱 굳어져 창백
하게 변했다. 그런데 혼사 날짜를 잡자는 자은 선생과 곽항
의 대화가 있은 뒤부터는 창백하다 못해 납이라도 마신 듯이
안색이 회색 빛을 띄었다.
"아버님. 저에게 다른 말씀이 계시는지요?"
"특별히 할 말은 없구나. 너를 부른 이유는 포한에게 인사를
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럼 더 이상 저에게 할 말씀이 없는 것으로 알고 이만 자
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이 자리가 불편한 것이냐?"
"아닙니다.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
"어디가 아픈 것이냐? 그리고 보니 네 안색이 무척 좋지 않
구나."
자은 선생은 걱정스런 안색으로 말했다.
"여행이 힘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알았다. 어서 가서 쉬거라."
"네. 그럼 이만 가보겠어요."
황보영은 아버지와 곽항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곽도성은 황보영이 밖으로 나가자 안색이 변했다. 황보영
과 더 오래 있고 싶은 마음과 그녀의 건강에 대한 걱정과 안
타까움으로 안색이 칠면조처럼 수시로 변했다.
"네 색시가 걱정되느냐?"
"네! 아버님, 그, 그게 아니오라..."
곽도성은 황급한 표정을 지으며 부인했다. 그런데 그 표정
이 재미있었는지 곽항과 자은 선생은 폭소를 터트렸다.
"으핫하하."
"하하하, 그렇게 걱정이 되면 따라가 보거라."
"아, 아닙니다. 스승님."
곽도성은 난감했다. 그러나 곽항과 자은 선생은 곽도성이
난감해 할수록 입가에 그려진 웃음은 더욱 커져갔다. 시간
이 지날수록 커지는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없었는지 곽도성
은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만 뚫어지게 처다 보았다.
자은 선생은 곽도성의 행동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힘있는
관직에 적을 둔 젊은이답지 않게 순진한 점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자은 선생은 곽도성이 빠져 있는 곤경에서 건져 주
기로 했다.
"도성아."
"예, 스승님."
"네 부친과 긴히 나눌 이야기도 있으니 이만 나가 보거라."
"네! 아, 알겠습니다."
곽도성의 표정이 한순간에 환해졌다. 스승인 자은 선생이 내
린 배려는 그의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게 한 것이다. 곽도성
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자은 선생과 곽항에게 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곽도성은 황보영을 찾는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런데 황보영은 보이지 않았다. 곽도성은 재빠른 걸음으
로 후원을 향해 달려갔다. 후원에 있는 별당을 황보영에게
거처로 주었을 것이라는 예측을 했기 때문이다.
곽도성의 예측은 정확했다. 황보영이 후원으로 가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곽도성은 빠른 걸음으로 황보영에게 달려
가며 외쳤다.
"보영 아가씨!"
황보영은 갑자기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뒤
로 돌았다. 그녀는 자기를 부른 사람이 곽도성이라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곽도성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황보영
의 안색은 굳어졌다.
"보, 보영 아가씨."
"곽 공자.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나요?"
"그, 그게..."
"할 말이 있으시면 어서 말하세요."
황보영의 말투에는 일체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없이
무겁고 쌀쌀하게 느껴졌다. 곽도성은 자신에게 대하는 황보
영의 말투와 태도가 냉정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선교장에
서 보아왔던 황보영이 5년 동안 너무나 달라져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곽도성이 선교장에서 지낼 때 황보영은 새침했지만 다정한
소녀였다. 그리고 그녀가 자기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도
곽도성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5년 만에 다시 만난 황보영
에게 사랑을 고백하려고 마음을 먹고 한달음에 달려 온 것이
다.
그런데 황보영의 태도는 곽도성의 생각을 원천봉쇄(源泉封鎖)
해버렸다. 곽도성은 황보영이 야속했다. 선교장을 떠나기
전부터 사랑했고 북경에서 지낸 5년 동안 한시도 잊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그녀가 미웠다. 게다가 가슴 깊은
곳에서 키워 왔던 사랑을 표현조차 못하게 만드는 그녀의 태
도가 너무도 야속하게 느껴졌다.
"할말이 없으신 가요? 그럼 저는 피곤해서 이만 자리를 뜨겠
습니다."
"보, 보영 아가씨..."
"그럼 평안한 밤이 되세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황보영은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멍하니 서있는
곽도성에게 한 조각의 감정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후원으
로 가는 문을 향하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자로 잰 듯이 정확
하기만 했다. 문을 열고 후원으로 들어간 황보영을 곽도성
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었다.
황보영이 사라졌지만 곽도성은 움직이지 않고 하염없이 후원
을 바라만 보았다. 매서운 찬바람이 주위를 혹한으로 몰았
지만 곽도성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후원으로 사라진
황보영 생각으로 가슴에 안타까움이 소용돌이쳐 다른 것은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곽도성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
다. 그저 멍하니 후원을 막은 담장만 바라보았다.
안타까움이 가득 채워진 눈동자로...
하염없이...
황보영은 후원에 있는 별당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후원
에 있는 별당은 곽씨 집안이 그녀에게 마련해준 거처로 소박
했지만 은은한 풍취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정
원에 둘러 쌓인 소주의 저택에서 살아온 그녀에게 사방이 밀
폐된 주거형태를 띠고 있는 북경의 저택은 답답하기만 했고
별당의 풍취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북의 실용적인 주거 양식은 아무래도 멋과는 거리가 멀었
고 곽항의 집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제아무리 별
당에 멋을 추구한다 해도 화려한 소주의 저택에 익숙한 황보
영의 눈에는 답답하게 보였다. 게다가 추운 겨울을 나기 위
해 발전된 북경의 주택양식은 개방식 구조를 가진 소주의 주
택양식에서 살아온 황보영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황보영은 창문을 열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당이 마치 감
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열려진 창문을 통해 들어온 매
서운 찬바람은 실내를 싸늘하다 못해 얼음창고처럼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창문을 닫지 않았다. 그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차가운 달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숨만 쉬었다.
황보영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는 이유는 북
경의 밀폐식 구조의 가택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를 답답하게
만든 것은 곽도성과 재회하는 순간 알게된 자기 마음의 변화
때문이다. 황보영은 약혼자인 곽도성과 재회한 순간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됐다.
곽도성을 보는 순간 다른 사람의 얼굴이 겹쳐졌던 것이다.
그 순간 황보영은 자기 마음 속에 곽도성의 자취가 사라졌고
다른 남자의 그림자가 스며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5
년 전에 헤어진 곽도성을 낭군으로 생각하며 기다렸던 마음
이 조석처럼 변한 사실에 표현하기 힘든 비애를 느꼈다.
사실 곽도성은 젊은 나이에 도찰원(都察院)의 경력(經歷)에
오른 인재였다. 종오품(從五品)의 경력은 결코 낮은 지위
가 아니었다. 게다가 곽도성은 문무 두 방면에 뛰어난 성취
를 이루었고 용모도 뛰어난 미남인데다 황보영만 생각하며
기다린 순정파였다. 그러나 황보영은 그런 곽도성을 나두고
다른 남자를 생각하며 번민에 휩싸여 있다.
"하아~."
황보영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한번 곽도성과 재회한 순간
을 회상했다. 곽도성을 보자마자 과거부터 가지고 있던 호
감은 사라지고 이상한 괴리감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혼사
를 논하는 숨막혔던 그 시간을 되새기자 그녀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고 말았다.
그녀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는 생각만 남았던 그 순간을 생
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 곽도성과 몇 마디의 대화를 나
누고는 서둘러 자신의 거처로 발길을 옮기며 참담한 기분에
빠져야 했던 상황이 그녀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때 악소협의 모습의 생각난거지...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긴
것일까... 어떻게..."
황보영의 안색은 당혹스런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가 곽
도성을 보는 순간 악삼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곽도성
이 자기 정체를 밝히자 황보영은 '이 남자와 평생을 해로해야
하는구나. 내 낭군이 이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악삼의 얼굴이 뇌리에 떠오르더니 곽도성의
얼굴을 가려버렸다.
황보영은 악삼과 곽도성을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
리고 그녀의 뇌리에서 약혼자인 곽도성은 사라지고 악삼만
남아버렸다. 악삼을 생각하자 황보영은 답답했던 가슴이 뚫
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상한
달콤함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이래선 안 돼. 그에겐 운지 동생이 있잖아. 그리고 나에겐...
나에겐..."
황보영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서 우러나는 달콤함을 부정하려 했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머리 속에 있는 악삼의 영상을 지우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
에게 곽도성이라는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입으로 내뱉어
인정하려 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 사실을 생각한 순
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마음이 미어졌던 것이다. 눈가에
자연스럽게 눈물은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영롱하게 빛나는
진주처럼 아름다운 눈물이 아련한 슬픔이 되어 그녀의 볼에
조용히 흘러내렸다.
"악 소협이 내 마음에 언제 들어왔을까?"
황보영은 양손으로 가슴을 잡아 서러움과 슬픔으로 터져 나
갈 것 같은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인력으로 되지
않는 것이 마음이었다. 그녀는 솟구치는 비애를 주체하지 못
해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양손으로 창문을 잡아 주
저앉는 몸을 막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황보영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벽면에 머리를 대고 서럽게
울었다. 그런데 선교장의 처소에 갑자기 처 들어온 악삼을
생각한 황보영의 입가에는 슬픈 미소가 피어났다. 언제 울었
냐며 말할 정도로 서럽게 울던 그 모습은 사라지고 슬픔이
묻어나던 미소는 즐거움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눈가에 매달린 눈물만이 황보영이 울었다는 증거로 남았을
뿐 온통 달콤한 기쁨만이 남았다. 황보영의 뇌리에는 지금
까지 보아왔던 악삼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
작했다. 아무런 의미조차 없는 악삼의 행동마저 자기를 위
해 움직였다는 착각마저 들기 시작했고 그것은 기묘할 정도
로 달콤한 감정으로 변했다.
한동안 달콤함에 취해 있던 황보영은 갑자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억지로 내리
누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마음 속엔 기쁨과 비애, 유교적
가치관이 한꺼번에 충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바보... 가슴속에 묻어야 해. 아니 잊어야만해."
황보영은 유교 교육으로 뿌리깊게 박힌 삼종지도의 틀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갈운지와 약혼자인 곽도
성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처지를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안 된
다고 마음을 다졌다. 그녀는 악삼을 억지로 잊기로 했다.
그러나 악삼이 자기 마음에 채워지는 것을 뜻한 것이 황보영
의 의지가 아니듯 지우는 것도 생각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다. 곽도성과 재회하는 순간에 겨우 알아챌 정도로 느껴지
지 않게 사랑에 빠진 황보영이 의식한 상태에서 악삼을 지운
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저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가
있을 뿐이다.
후원을 막은 담장 위에 조 집사는 유령처럼 서있었다. 그는
별당에서 괴로움에 빠져 한없이 슬퍼하는 황보영을 자애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황보영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
에는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러나 담장밖에 멍하니 서있는 곽도성을 보는 눈동자는 전
혀 달랐다. 칼날 같은 눈빛으로 싸늘하게 처다 보았던 것이
다. 눈빛으로 살인이 가능했다면 곽도성은 일격에 즉사를
면치 못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후우우~."
나지막하게 숨을 내쉬자 하얀 서리가 조 집사의 얼굴을 가렸
다. 조 집사는 별당을 향해 부드러운 눈빛으로 다시 한번
바라보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곽
도성을 노려보았다. 곽도성을 노려보던 조 집사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그려졌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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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입니다
즐독 ㄳ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고맙습니다
악삼도 멋이좀있는모양 ㅎㅎ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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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보았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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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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