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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악가- 81화 이원(梨園)-3
곽도성과 황보영이 밖으로 나간 뒤 실내의 분위기는 무거워
졌다. 곽항과 자은 선생은 어두운 안색으로 침묵하고 있었
다. 황보영과 곽도성이 있을 때완 실내의 분위기는 천양지
차(天壤之差)였다. 자은 선생과 곽항은 서로를 물끄러미 처
다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침묵이 갑갑해진 곽항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생겼기에 자네가 북경에 온 것인가?"
"역시 자네는 내 친우라 할 수가 있군. 10년 만에 만났는데도
바로 내 생각을 파악하는군. 과연 자네는 나의 지음(知音)이
라 할 수 있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다시는 북경 땅을 밟지 않겠다던 자
네가 맹세마저 깨뜨렸는가? 게다가 보영이까지 데리고 오다
니 무슨 일인가?"
"그만큼 큰일이었네."
자은 선생은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고소(苦笑)는 안
그래도 씁쓸하게 보이는 자은 선생의 안색을 어둡게 만들었
다. 곽항은 친우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
다.
"하아~."
"그렇게 탄식할 필요는 없네."
"무슨 일인가? 나에게 말해보게. 내 미력한 힘이 도움이 된다
면 돕겠네."
"내 그럼 부탁함세."
"말하게나."
"고신을 비밀리에 만나게 해주게."
"고신!"
곽항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자은 선생은 친우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되자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곽항의 표정이 변
색된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은 선생이 북경에 올
라온 이유는 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비록 친우가 놀
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인 고신은 필히 만나야 했다. 물
론 남은 두 사람 역시 만나지 못한다면 미구(未久)에 발생할
사태를 해결할 수가 없으니 꼭 만나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곽항은 친우가 무슨 생각으로 고신을 만나려고 하는
지 알지 못해 놀라고 말았다. 곽항은 자은 선생을 뚫어지게
처다 보다가 말을 이었다.
"고신이라... 설마 사례감(司禮監)의 수장인 고 태감(太監)을
말하는 건가?"
"맞네. 그 고 태감을 말하는 것이네."
곽항이 자은 선생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어이가 없다는 기색
이 역력했다.
"자네는 환관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이 아닌가?"
"지금도 환관을 좋아하지 않네. 하지만 세상이 싫다고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도대체 무슨 일인지 말해 주게나. 그렇지 않는다면 나는 절
대로 자네를 돕지 않겠네."
곽항은 친우에게 큰 일이 생겼음을 알았다. 환관이라면 치를
떠는 친구가 스스로 환관의 우두머리인 사례태감을 만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할 정도면 보통 큰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단
번에 눈치챌 수가 있는 것이다.
"자네는 내가 등과(登科)를 했음에도 출사를 하지 않은 이유
를 알 것이네."
"그건 자네의 가문에 내려오는 유훈 때문이 아닌가."
자은 선생은 곽항과 동문수학시절에 자기 가문의 유훈을 알
려준 적이 있었다. 전시에 합격하는 일이 있어도 관직을 마
다한다는 자은 선생의 말을 들은 곽항이 집요하게 이유를 물
었기 때문이다.
"우리 가문은 북송구조와 남송구조의 열 여덟 황제를 대대로
모셔온 송나라의 충신이었지. 그런데 송나라가 망하자 출사를
하지 말라는 가훈을 선조께서 내렸네. 그 이후 본 가문은 절
대로 세상에 나가지 않고 학문만 연구했지."
"그거야 자네의 선조께서 원나라에 출사하지 말라는 뜻이 아
닌가. 하지만 지금은 우리 한족이 세운 명나라의 치세이네."
"알고 있네. 하지만 가훈을 어길 수는 없네. 사실 내가 전시
에 나간 것만 해도 가훈을 어긴 셈이네."
"이런 답답한 사람... 그런데 사례태감을 만나는 것과 자네 가
문의 유훈이 무슨 관계이기에 꺼낸 것인가?"
곽항은 의아했다. 자은 선생이 갑자기 자기 가문의 유훈을
꺼낸 것인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간단하네. 우리 가문은 그 동안 송황조의 후손을 모시
고 있네. 아니 아직도 본가는 신하인 셈이지."
"뭐라고! 지금 자네가 한 말이 무슨 뜻 인줄 알고 하는 건
가?"
"알고 있네. 세상에 태양은 하나인 듯이 황제도 단 한 분이
지. 그런데 그것을 어기고 다른 분을 황제로 모시고 있다면
대역죄인 반역으로 몰리지."
"설마... 고신을 만나려고 한 이유가..."
자은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곽항은 너무나 놀라운 사실을
듣게되자 어안이 벙벙했다. 자은 선생은 친우의 안색을 보고
는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현재 본가가 모시는 분의 함자는 조덕창이네."
"조덕창이라..."
"내가 가문이 모셔왔던 송황조의 후예를 배신하려는 이유는
간단하네. 그분께서 현 국가를 몰락시키고 송나라를 부활시키
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네."
"무서운 이야기로군. 그런데 이유가 뭔가? 잘못된 유훈마저
지키는 자네가 황씨 가문이 고대하던 송나라의 부활을 저지
하려는 이유 말일세."
곽항은 자은 선생이 원하는 목적이 무언지 궁금했다.
"간단하네. 송나라가 부활하려면 현 국가체제가 무너져야 하
네. 전란이 난다는 이야기지 그렇게 된다면 수없이 많은 사람
들이 죽음을 당하게 되네. 특히 아무것도 모르는 무고한 민초
들이 죽어나가네."
"과연, 과연 자네답네."
"많은 사람들이 평온하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네. 하
지만 나는 가문이 모셔온 모든 것을 부정하고 배반한 인물이
되겠지..."
자은 선생의 안색은 참담했다.
"큰일을 위해서는 작은 것은 버리는 법이네. 진정한 대의를
위해 작은 의리를 버린 자네는 위인이지 절대로 배신자 따위
의 속물이 아니네. 그런 말은 하지 말게나. 자네는 대의멸친
(大義滅親)을 감행한 진정한 의인이네."
곽항은 친우의 안색이 안쓰러울 정도로 나빠지자 위로했다.
또한 위로이지만 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세상에 중요한 것은 황제도 아니고 국가도 아니네. 가장 중
요한 것은 국가를 이루고 있는 대부분의 백성이네. 그래서 민
심이 천심이라고 하지 않는가. 자네는 자책할 필요가 없네."
"고맙네. 자네에게 말하고 나니 그나마 마음이 가벼워졌네.
정말 고맙네."
"쓸데없는 소리. 내가 뭘 했다고 고맙다는 말을 듣는가. 오히
려 10년 만에 만난 나를 친구라고 믿고 비밀을 말해준 자네
가 고맙네. 자네가 나를 진정한 벗으로 생각했다는 증거가 아
니겠는가."
"그렇게 해석해 주니 자네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느끼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상대에 대한 믿음이 가득했다. 곽항은 자은 선생
에게 미소를 짓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잠시 고민하다 질
문했다.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있는데 그걸 질문해도 되겠나."
"무엇이 이상한 건가?"
"한 나라를 전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면 힘이 있어야
하네. 기본적으로 세가지 힘이 필요하지."
"권력, 무력, 재력을 말하는 건가?"
곽항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그런데 조덕창이라는 이름은 내가 생소하네. 게다가
이 명나라를 전복시킬 만한 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네."
"자네는 모르겠지만 강호에 사해방이라는 조직이 있네. 네 가
문이 연합한 세력으로 강호의 음지에서 암약하고 있지."
"사해방?"
곽항은 처음 듣는 방파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강
호의 방파가 아무리 힘이 있다해도 국가의 존망을 흔들고 새
로운 국가를 세울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은 선생이 너무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은 선생은 곽항의 안색을 보고 무슨 생각
을 하는지 눈치챘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네. 하지만 사해방의 힘
을 알게 되면 그런 생각은 못할 것이네."
"그럼 강호의 일개 무뢰배 집단이 국가의 기조를 흔들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가?"
"사해방은 충분히 가지고 있네. 우선 사해방의 중추인 네 가
문을 알면 이해가 갈 걸세."
"그럼 내게 설명 좀 해주게나."
곽항은 사해방이 어떤 조직인지 궁금했다.
"사해방의 네 가문 중에 동해방 장씨 가문은 장사성의 후손
이네."
"장사성! 설마 태조 폐하와 천하를 다투었다는 그 장사성 말
인가?"
자은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곽항의 질문에 대답했
다. 곽항의 안색은 무섭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남해방은 송황조의 후손인 조씨 가문이고 서해방은 대리국
단씨 가문이네."
"갈수록 태산이라 더니 정말 엄청나군."
"사해방은 강호에서 암약하면서 힘을 길러 왔네. 나라를 전복
하고 자신들의 국가를 만들 생각으로 말이네."
"두렵기 그지없네. 하지만 숨어서 키운 무력이 얼마나 되겠는
가? 게다가 그들에겐 재력과 권력이 없네."
곽항은 세 가문이 자신들 꿈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서 숨어
힘을 기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모골이 송연했다. 그리고 그
세 가문이 세상을 엎어 버리겠다며 튀어 나올까봐 두려워 두
가지 힘이 부족하다고 말하며 부정적인 반응을 드러냈다.
"사해방이 모아둔 금력은 대단하네. 밀염을 비롯해 수많은 불
법적인 사업을 자행해 엄청난 부를 모았지. 하지만 그 재력은
장난에 불과할 정도로 느끼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양의 재화
를 구할 길을 그들은 찾아 버렸네."
"그건 무슨 말인가?"
"원 세조 쿠빌라이는 죽기 전에 엄청난 양의 재화를 천장별
부(天藏別府)에 숨겨 두었네."
"천장별부?"
곽항은 갑자기 보물섬같은 이야기를 듣자 심장이 뛰기 시작
했다. 꿈과 모험이라는 세계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남자에
겐 피가 끓어오르는 내용으로 일종의 동경(憧憬)과 같았다.
"천장별부에 들어가려면 지도와 열쇠가 필요하네. 열쇠는 오
행도라는 다섯 자루의 작은칼이고 지도는 세 개의 푸른 늑대
의 조각에 나누어 숨겨져 있지."
"푸른 늑대! 설마..."
"맞네. 자네 집안에 내려오는 푸른 늑대 조각이 그 중에 하나
이네. 내가 자네에게 얻을 도움 중에 하나가 그 조각이네."
자은 선생은 곽항을 뚫어지게 처다 보며 말했다. 푸른 늑대
조각을 자신에게 달라는 의향이 여실이 드러나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곽항의 안색은 시간이 지날수록 굳어져 가자 자은 선
생은 의아해 하는 기색을 짓고 말았다. 자은 선생은 곽항의
안색이 이상하자 질문했다.
"왜 그러시는가?"
"나에게 없네."
"무슨 말인가?"
"푸른 늑대 조각은 나에게 없네."
자은 선생의 안색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설명을 부탁하겠네."
"몇 년 전에 조 태감이 들렀네. 그를 내 서재에서 만났지. 그
런데 서재에 있는 푸른 늑대 조각에 이상할 정도로 관심을
표명하더군. 그래서 내가 선물하고 말았네."
"조 태감의 이름이 조환인가? 동창의 수반인 조환!"
곽항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자은 선생의 안색은 창백
하게 변하더니 탄식했다.
"하아~, 이를 어쩌란 말인가."
자은 선생의 안색은 너무나 심각했다. 생각 밖으로 자은 선
생의 안색이 좋지 않자 곽항은 오히려 의아했다.
"왜 그러시는가? 푸른 늑대 조각이 우리 손에 없다고 하지만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가 다시 조 태감을 만
나서 사정을 말한다면 다시 얻어 올 수가 있네."
"그건 불가능한 일이네. 그분은 절대로 내놓지 않을 걸세."
"그분? 자네 설마 조 태감에게 그분이라고 했나?"
곽항은 깜짝 놀랬다. 자은 선생이 일개 환관에게 존칭을 쓸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대가 서슬이 시퍼런 동
창의 제독이라고 해도...
"그분의 본명은 조덕환이네. 조환은 가명이지. 그분의 두 동
생 중에 한 분이네."
"그분이라면 송황조의 후예라는 조덕창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네."
"허어... 송황조의 후손이 스스로 거세하고 환관이 됐단 말인
가?"
자은 선생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군. 너무 무서워."
"사해방에 있는 권력은 바로 그분을 지칭하는 것이네. 그래서
고신을 비밀리에 만나려고 한 것이네. 고신만이 그분을 상대
할 수가 있기 때문이지."
"그렇군. 오직 폐하와 사례태감만이 동창의 수반을 제어할 수
가 있지."
곽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자은 선생이 고신을 만나려
고 한 이유를 이해했다. 그런데 자은 선생의 두 눈동자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자은, 무슨 고민을 하시는가?"
"지금 두려운 추측이 생각나서 그렇다네."
"두려운 추측?"
"조덕환, 그 분은 동창의 수반인 조환말고도 다른 이름이 있
으시네. 바로 사해방의 북해방주이지."
"북해방주! 자네가 아까 말하기론 사해방은 네 개의 가문이
연합한 세력이라고 했지 않은가?"
곽항은 자은 선생이 사해방에 대해 설명한 것과 다른 내용이
나오자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며 반문했다.
"북해방은 원래 원나라의 잔당이 세운 가문이네. 원나라에 의
해 나라를 잃은 조씨 황가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들
을 그냥 나두었겠는가."
"그렇다면?"
"조덕창님이 예전에 그 가문을 멸문시켰네. 그리고 탈취한 북
해방의 세력을 동생인 조덕환님께 넘겼지. 원의 잔당을 관리
하는데 동창의 힘이 있어야 한다면서 말이네."
"능히 가능한 일이군. 원의 잔당이라면 동창의 서슬에 노예로
전락했겠구먼."
자은 선생의 이야기는 사리에 맞는지라 곽항의 고개를 끄덕
이게 만들었다.
"조덕창님은 여태까지 조덕창님의 명령에 따라 착실하게 움
직이셨네. 그런데 푸른 늑대 조각을 얻었다는 사실은 숨겼네.
그렇다면..."
"형제들 간에 다툼이 있다는 이야기로군. 아무래도 골육상쟁
(骨肉相爭)이 생길 것 같네."
"그런 것 같군. 역시 자기를 환관으로 몰아 놓은 형을 용서하
지 않겠지. 아니면 조덕환님도 자신의 야망을 드러낸 것일 수
도 있겠지."
"그건 나중에 알 일이고 지금 먼저 할 일은 자네가 고신을
만나는 일이네. 내 지금 당장 자금성으로 달려가서 고신을 면
담하고 오겠네."
곽항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섰다. 그런데 자은 선생은 고개
를 흔들었다.
"안 되네."
"무슨 말인가?"
"자네가 지금 자금성으로 갔다간 큰일나네. 내일 근무시간에
맞춰 출근하게. 그리고 고신을 만날 때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
게 해야 하네. 분명히 감시인이 붙을 걸세."
"감시인?"
"내가 자네 집에 온 이상 감시인이 붙었을 걸세. 비록 보영이
를 데리고 와 혼사를 논하는 것처럼 위장했어도 철두철미한
그분의 성격상 분명히 감시자가 붙어 있을 걸세. 그리고 내
식솔 중에서도 간세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니..."
곽항은 다시 자리에 주저 않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하아~."
친우인 자은 선생이 칼날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만 신경을
쓰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고 있으리라는 친우가 알고 보
니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는 관직생활보다 더 험한 삶을
지내고 있다는 현실이 서글프게 다가왔던 것이다.
"허허허, 그래서 보영이를 데리고 온 건가. 나는 자네가 보영
이를 데리고 왔기에 어서 짝을 맺어 주려고 한 것 인줄 알았
네."
곽항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딸마저 이용해야 하는 친우
의 처지가 불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보영이를 데리고 온 것은 그일 때문만이 아니네."
"그건 무슨 뜻인가?"
"보영이를 데리고 온 주요 목적은 세 가지네. 첫째는 도성이
와 만나게 해주는 것이네. 곧 혼사를 치러야겠다고 생각한 것
이지. 둘째는 물론 감시인이나 간세의 눈을 속이기 위함이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부인의 외조부를 만나기 위해서
네."
"자네 부인의 외조부라니 그건 무슨 말인가?"
곽항은 의아했다. 자은 선생이 자기 부인의 외조부를 만나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기 부인의 외
조부를 만나는데 황보영이 필요한 이유는 더구나 알 수가 없
었다. 자은 선생은 곽항이 궁금해하자 빙그레 미소를 지었
다.
"자네 신창(神槍)이라는 불리던 서문종 어른을 기억하는가?"
"신창 서문종... 설마 그 어른 말씀인가?"
곽항은 놀라고 말았다. 그가 아는 신창 서문종은 강호의 인
물이 아니라 군부의 장군이었다. 신창이라는 별명은 황제에
게 하사 받은 것이다. 서문종은 젊은 시절부터 창을 사용하
는데 있어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신기를 가지고 있어 소문
이 자자했다.
당시 늙은 황제인 영락제도 서문종의 소문을 들었을 정도였
다. 영락제는 북경으로 천도하고 자금성을 완성한 기념으로
서문종을 불러 무위를 선보이라는 황명을 내렸다. 황명을 받
은 서문종은 자금성 태화전 앞마당에서 필생의 신기를 선보
였다. 서문종이 선보인 창술은 하늘이 놀라고 땅이 울릴 정
도였다.
영락제는 서문종이 선보인 신기에 가까운 무위에 감탄했다.
서문종의 젊음과 강렬한 기세와 신기에 가까운 무위를 부러
워하면서 늙어 버린 자신을 슬퍼했다고 한다. 영락제는 서
문종에게 신창이라는 별명을 직접 지어주고 큰상을 내렸다.
그 후 서문종은 영락제의 총애를 받아 높은 관직에 올랐다.
그런데 영락제가 붕어하자 서자기는 관직을 내놓고 세상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그 당시 서문종이 받은 총애와 그의 무위
가 얼마나 신화적이었는지는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내려오고 있었다.
문관인 곽항이 기억할 정도이니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서문종의 명성은 찬란한 태양과 같았다. 곽항은 오
래 전에 들었던 서문종의 명성을 기억 속에서 꺼내고는 흥분
했다. 마치 홍안의 소년이 신화 속의 인물을 동경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자은 선생은 곽항의 마음을 아는지 미소로 화
답했다.
"정확하네. 그 어른이시네."
"아니, 그 어른이 아직도 생존해 계신단 말인가? 아직까지 살
아 계신다면 연세가 아흔은 넘을텐데..."
곽항은 흥분해 말을 잊지 못했다.
"아직도 정정하시네. 그분은 무남독녀만 두셨는데 그 따님이
내 장모이시네. 게다가 장모님도 딸 하나만 두었지. 내 부인
말이네."
"자네도 보영이 하나만 있지 않은가!"
"맞네. 이상하게도 3대에 걸쳐 무남독녀만 태어난 셈이지."
"그럼 그 어른에게 유일한 후손이 보영이 뿐인가?"
자은 선생은 곽항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네."
"그럼 자네가 그 분에겐 하나뿐이 없는 손서(孫壻)아닌가? 그
런데 그분을 만나기 위해 보영이를 대동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가?"
"있네. 사실 그분은 장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네. 물론 나
도 마찬가지이네. 하지만 혈육에게는 명확할 정도로 다르게
대하시네."
"어허! 설마 자네만 간다면 아예 만날 생각도 안 하시는 건
가?"
자은 선생은 씁쓸한 웃음을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곽항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신창 서문종이 생각 밖으로
괴팍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다. 자은 선생은 곽항의
표정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챘다.
"그 어른은 그렇게 괴팍하시지 않는다네. 단지 혈육을 제외하
고는 다른 모든 것에 큰 흥미가 없으실 뿐이지."
"쩝. 자네가 나보단 그 어른을 자세히 알고 있으니 내가 뭐라
고 하겠나."
곽항은 찜찜한 안색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자은. 그 어른이 북경에 거처를 두셨는가?"
"그렇다네."
"이상하군. 그 어른이 북경 주변에 살고 계시는데 어째서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가?"
"그 어른이 사는 곳은 동구(東丘)밖에 있는 이원(梨園)이네."
"이원!"
이원은 배나무 동산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한 배나
무 동산이라면 곽항의 안색이 경악으로 굳어버릴 리가 없었
다. 곽항은 동구밖에 있는 이원을 예전부터 주시하고 있었
다. 그런데 자은 선생이 신창 서문종이 이원에 살고 있다고
밝혔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원이라는 지명과 살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을 알게 된
후부터 항상 경계의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이원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었고 대부분이 기예를 팔아
서 연명하는 광대들이었고 그 특징이 곽항의 시선을 잡았다.
곽항은 당나라 사서를 통해 이원이라는 특수한 조직을 알고
있었다. 이원은 당나라 현종이 창설한 것이다. 음악과 연극
을 좋아한 현종은 음악가나 무도(舞蹈) 연극인을 장안의 이원
에 모아놓고 있었다. 거기에 속해 있던 사람들은 '이원의 제
자(弟子)'라고 불리며 황제의 제자나 그에 직속된 자들로 취
급되었다.
그런데 현종이 이원을 창설한 것은 단순한 취미활동을 위해
서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첩보나 모략 요원을 이원에 들여보내 황제가 직접 민의(民意)
나 세사(世事)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이원의 특수
기예인들은 하나같이 암살의 명수였다. 가무음곡(歌舞音曲)
은 한낱 위장술에 불과 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파악하고 있는 곽항의 눈에 수도 근방
에 이원이라는 지명에 기예인들이 모여 산다는 것이 범상치
않게 보였다. 당나라 이후 첩보와 암살, 감시의 기능을 가
진 조직이 활동한 이후 사라졌던 이원이 다시 나타났으니 당
연했다. 곽항은 이원의 등장이 오비이락(烏飛梨落)이기를
빌었다. 단순하게 명칭만 같은 기예인의 마을이기를 기원했
다.
그런데 자은 선생이 이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말하자 우려했
던 악몽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 같아 전신이 떨렸다. 곽항은
동창이 있는데 이원이 다시 창설될 일은 없다고 생각하려 했
지만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
각한 곽항은 자은 선생에게 진실이 무엇인지 묻기로 마음먹
었다.
"자네가 나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내 질문에 답해주게."
신중하고 무거운 말투였다.
"질문하시게."
자은 선생의 안색도 굳어졌다.
"동구밖에 있는 이원은 당나라 시절의 이원과 같은가?"
"맞네."
"정말인가!"
곽항은 믿을 수가 없어 다시 한번 질문했다. 그러나 답은 같
았다. 자은 선생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
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흉악한 조직을 부활시킨 것인가! 동
창만으로도 부족하단 말인가!"
"맞네. 동창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셨네. 아니 동창조차
믿지 않으신 게지."
"신하들을 믿지 못해 동창을 만들었거늘, 이젠 그 동창마저
믿지 못하겠다고 이원을 부활시켰단 말인가!"
"권력이란 그만큼 사람을 추하게 만드는 법이지."
자은 선생의 어투는 차가웠다. 곽항은 씁쓸한 얼굴로 천장
을 바라보며 한탄하다가 자은 선생에게 시선을 돌렸다.
"금상 폐하께서 이원을 부활시킨 건가?"
"아니네. 이원을 창설하신 분은 영종 폐하이시네. 그분이 이
원을 만든 것은 왕진을 믿었다가 오이랏트에 억류되었다가
황위마저 빼앗긴 경험을 하셨기 때문이네."
"그럼 재위에 다시 오른 후에 이원을 창설하셨군."
"그렇다네."
곽항은 자은 선생의 대답을 듣고 절망했다. 누구도 믿지 못
하고 탄압을 하거나 감시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군주가 지
배하는 나라의 관리가 되었다는 것이 슬펐다. 그는 관리가
되어 백성들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신념이 뿌리 채 흔들렸다.
자은 선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곽항을 바라만 보았다.
이럴 땐 어떤 위로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곽
항은 한참 동안 탄식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자 마음을 정
리했는지 한숨을 쉬고는 자은 선생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가 이원에 가려는 것은 서문 어른을 배알하기 위해서
인가?"
"맞네. 그래서 보영이를 데리고 왔네. 이원은 나 혼자 들어
갔다간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곳이네."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아는 자네의 무위는 강호에서 능히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알고 있네."
곽항은 깜짝 놀랐다.
"이원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암살의 명수들이네.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세상을 하직할 수가 있는 곳이지. 게다가 순
수한 무력만 따져도 나보다 강자가 무려 네 사람이 있다네."
"그게 정말인가!"
자은 선생은 놀라 눈이 동그래진 곽항을 보며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원에 가서 만나려는 두 사람이 그 네 사람 중에 둘
이지."
"신창 서문종. 그 어른이 한 사람이겠군. 그럼 다른 한 사람
은 누군가?"
"이원에서 도자기를 굽는 사람이네. 송철방이라는 이름의 40
대 중년인이지."
"송철방?"
금시초문의 이름인지라 곽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는 알 필요가 없네. 아니 모르는 것이 좋네."
"알겠네."
곽항은 순순히 수긍했다. 비록 궁금증이 났지만 자은 선생
의 표정이 섬뜩한 지라 송철방에 대한 의문을 접기로 했다.
자은 선생이 저렇게 나오는 것엔 분명히 이유가 있음을 믿었
기 때문이다. 곽항이 간단하게 수긍하자 자은 선생은 안도
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고신을 만나 나와 회동할 수만 있게 도와주게."
"그건 걱정 말게."
"고맙네."
"고맙긴 자네가 그런 고생을 하는데 겨우 이것뿐이 돕지 못
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엔 강한 신뢰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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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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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 표면보다 이면이 더 다사다난 하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