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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악가- 82화 명공강(冥空?)-1
척신명은 이장도와 강휘, 한비의 인피면구를 왕씨 삼 형제에게 전해 주었다.
왕씨삼 형제는 인피면구를 받자 얼굴에 약품을 바르고는 인피면구를 착용했다.
인피면구를 착용한 왕씨 삼형제는 완벽하게 이장도 일행으로 변장이 끝났다.
척신명은 그들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지, 잘못된 부분이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
한참 동안을 살펴보던 척신명은 만족한 표정을 짓고는 왕씨 삼 형제에게
눈짓을했다. 이상 없으니 출발하라는 신호였다. 왕씨 삼 형제는 척신명의
허락이떨어지자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척신명은 왕씨 삼 형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서있었다. 그들이 보이지
않자뒤로 돌아 자기 거처로 향했다. 그런데 그는 거처에 들어가기도 전에
걸음을멈추고 말았다. 척금방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 새벽인데 벌써 일어났느냐.”
“아무리 이른 새벽이라도 재미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멍청하게 잠이나 자고
있을수는 없잖아요.”
“보았느냐?”
“당연하죠. 그런데 하필 왕씨 삼 형제를 보낸 건가요?”
왕씨 삼 형제는 척신명의 부하들 중에서 무력과 충성심이 가장 높았다.
그만큼운문상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으며 척신명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느냐. 이 장도로 변장하고 움직여 시선을 돌리는 일은
중요한일이다. 그런 큰일을 처리하려면 뛰어난 무공과 머리뿐 아니라 비밀을
엄수해야한다. 왕씨 삼 형제는 충성심이 높으니 배반할 일도 없고, 순발력이
뛰어나돌발상황을 대처하는 능력마저 가지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인선(人選)이
어디있겠느냐.”
“물론 아버지의 말씀은 옳아요.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들을
사지(死地)로몰만큼 이익이 있는지 궁금한 것이에요? 사실 왕씨 삼 형제정도의
충견(忠犬)은쉽게 구할 수가 없잖아요.”
“무슨 말이냐? 그들을 사지로 내몰다니!”
“아버지. 계략은 숨기면 성공한다는 말이 있지만 저마저 속이려고 하면 안
되죠.”
척금방의 입가에 교활한 미소가 그려졌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척신명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자 척금방의 입가에 떠있던 교활한
미소는더욱 짙어졌다.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다면 저도 생각이 있어요.”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대운하에서 장강수로연맹의 선단과 자폭한 2호선의 선장을 기억하시죠.”
“괴로운 이야기를 갑자기 꺼낸 이유가 무엇이냐?”
척신명은 슬픈 안색을 하고 물었다. 슬픔과 안타까움이 물씬 묻어나는
척신명의안색은 보는 것만으로도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척금방은
아버지의슬픈 안색을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흥!”
척금방은 부친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슬퍼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척금방의눈에는 악어의 눈물로만 보였다.
“지금 아버지의 모습은 닭을 잡아먹는 여우가 닭의 죽음을 애통하며 슬피 우는
것같은 모습이에요.”
“허어...”
“제 앞에서 경극을 벌일 필요가 있나요. 그리고 2호선의 선장은 왕씨 삼
형제만큼아버지한테 충성을 다하던 인물이었죠. 그는 미리 아버지한테 자폭에 관한
명령을받았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도화선의 길이를 짧게 만들었다는 것을 몰랐어요.
그는너무 아버지를 믿었어요. 멍청하게 말이죠.”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구나.”
곽신명은 언제 슬픈 안색으로 자폭한 선장을 애도했냐는 듯이 표정이 바뀌어있었다.
입가에는 떠오른 미소는 가증스러웠다. 게다가 척금방을 바라보는곽신명의
눈빛에는 척금방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척금방은
끝까지 오리발을 내미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이없었다.
“아버지는 제가 원하는 것이 무언지 알고 있잖아요.”
척금방의 목소리엔 원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척신명은 끝까지 모른 척 했다.
척금방이 원하는 것은 간단했다. 앞으로 벌일 사업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해달라는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아버지가 벌이는 사업에 부속품처럼 움직이고싶지
않았다.
척신명과 동등한 입장이 돼서 여러 가지 일을 상의하면서 집행하고 싶었다.
그래서2호선의 선장과 왕씨 삼 형제를 거론한 것이다. 즉 그들처럼 아무 것도
모르고꼭두각시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또한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척신명의 사업에 따라 사용됐다가 용도가 다되면 폐기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던것이다.
그런데 척신명은 딸의 외침을 듣고도 외면했다. 오히려 척금방에게 무슨
소리냐며시치미를 뗐다. 척금방은 원하는 대답이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지 않자
울화가치밀었다. 살쾡이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며 대들려고 했다. 그런데
척신명이갑자기 그녀에게 눈짓을 했다.
“왜 그러세요?”
평소의 척금방은 눈빛만으로도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박자를 맞추었다.
그런데흥분을 한데다 화까지 난 상황이라 사고(思考)가 조금 늦게 움직였다.
“금방 동생,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척금방 등뒤에서 들린 목소리의 주인이 갈운지였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아차이런
실수를!’ 이라고 외쳤다. 한순간에 끓어오르던 척금방의 마음이
싸늘하게식어버렸다. 척금방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갈운지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지었다.
“운지 언니.”
“응,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방금 척 대인과 같이 있는 동생이 심상치
않게느껴져서 그래.”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어서요.”
척금방은 순진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니...”
갈운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척금방의 행동거지는 멀리서 봤을 때 느껴졌던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거짓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운지 아가씨 잘 쉬셨소?”
“어머! 이런 실수가! 죄송합니다.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갈운지는 척신명이 밤새 평안했느냐고 물으면서 인사를 먼저 하자 호들갑을
떨었다.
“허허허, 아니외다.”
“아니에요 제가 그만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를 바랍니다.”
“용서라니, 그 무슨 말이오. 그보다 안색을 보니 뭔가 불편한 것이 있었구려.”
“불편하다니요. 거처로 내주신 방은 편안했습니다.”
갈운지는 당황한 얼굴로 편안하게 쉬었다며 걱정을 하지 말라는 뜻을 내비쳤다.
사실 그녀는 밤새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들어온 갈운영을 추궁하느라고 잠을
자지못해 안색이 좋지 못했다. 그런데 척신명이 잠자리가 불편해서 그렇게
피곤해보이는 것이 아니냐는 뜻을 내포한 질문을 던져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은데...”
“그건 여행의 피로가 쌓여서 그런 것이에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허! 알겠소.”
“고맙습니다. 그럼 대인. 저는 그만 언니에게 가보겠습니다.”
갈운지는 척신명과 계속 대화를 나누기가 거북했다. 그래서 갈운영을
방패막이로삼고는 급히 인사를 하고 빠져나가기로 했다. 다행히 갈운영이
거처에서 나와산보를 하고 있었다. 척신명은 갈운지가 속이 훤히 보이는 행동을
하자 희미한웃음을 짓고 말았다.
“알겠소이다. 잠시 후에 아침식사가 준비되면 시비를 보내리다.”
“고맙습니다. 척 대인.”
갈운지는 부랴부랴 달려갔다. 갈운지가 산보하고 있는 장소로. 그런데
발걸음을채 삼보를 떼기도 전에 멈춰야했다.
“운지 아가씨.”
“네! 왜 그러세요. 척 대인.”
갑자기 척신명이 자신을 부르자 갈운지는 고개를 돌렸다.
“운영 아가씨와 같이 산보를 하실 생각이라면 금방이도 데려가 주시겠소.”
“아! 그거야 괜찮죠.”
척금방의 눈매에 원망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아버지와 담판을 내기로 했다.
이번만큼은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결정을 보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런데척신명이 아예 원천봉쇄 해버리자 욱하고 치밀어 오르면서 강한 원망이
생긴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울화가 치밀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복받쳐 올라도
드러낼수가 없는 입장이 척금방의 신세였다.
“금방 동생. 어서 가자.”
“예! 네... 언니.”
척금방은 고개를 숙인 채 갈운지의 뒤를 따랐다. 아버지에 대해 커져
가는원망으로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참아야 했다. 척금방의 눈동자는 타오르는 분노의 불꽃으로 빛나고 있지만
고개를숙이고 있어 누구도 보지 못했다. 척신명은 갈운지 뒤를 따라가는 딸을
보며비릿한 미소를 던지고는 몸을 돌렸다.
갈운영은 동생이 척금방을 데리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선을다른 곳으로 향한 채 산보를 하고 있었지만 청각을 극대화시켜 그들의
대화를엿듣고 있었다. 대화를 엿듣는 동안 그녀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사라지지않고 있었다. 그런데 갈운지와 척금방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언제
그랬느냐라는 듯이 미소를 거두고는 몸을 돌렸다.
“금방 동생도 일찍 일어났구나.”
“네, 운영 언니.”
척금방은 순진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산보 중이란다. 같이 하자꾸나.”
“좋아요. 언니.”
척금방이 기뻐하는 모습은 천진해 보였다. 아무리 보아도 순수하게
기뻐하는모습이었다. 그러나 갈운영의 눈에 비친 척금방의 모습은 전혀 달라
보였다.
‘이런 사갈 같은 년. 내 별호인 사갈미인은 너한테 더 어울리겠구나.’
갈운영은 척금방의 본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척금방이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도알고 있었다. 하지만 갈운영은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고, 오히려
척금방을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그녀의 마음은 겉으로 드러난
눈빛과 전혀달랐다.
‘아직은 속아 주지. 너희 부녀가 가진 패를 모두 드러내기 전까지 속아 주는
척해주마.’
갈운영은 척금방에게 미소를 지어 주고는 고개를 돌렸다. 미소는
삽시간에사라졌다. 천천히 걸어가는 갈운영의 뒤를 아무 생각도 없는 갈운지와
나름대로머리를 굴리는 척금방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엔 아름다운
세 미녀가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산보하는 광경은 아름다웠다.
왕씨 삼 형제는 북경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사람에게 각인시켰다.
일부로이름을 밝히기도 했다. 특히 긴 여행을 한다며 세 마리의 말과 식량, 기타
장비를구입했다. 차후에 이장도 일행을 추적할 사람들의 이목을 교란시킬
계획인것이다.
왕씨 삼형제는 오후가 지나는 동안 북경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군데에
흔적을남기고는 구입한 말을 타고 팔달령(八達嶺)이 있는 북쪽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팔달령을 넘어 북으로 이백 리 이상 이동한 다음에 역용을 지우기로 했다.
그리고 본 모습을 한 채 북경으로 되돌아오는 계획에 따라 이동했다.
그런데 왕씨 삼형제의 계획은 팔달령을 넘어가기도 전에 장벽에 부딪쳤다.
삿갓을쓴 황의를 입은 괴한이 앞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왕씨삼 형제는 말고삐를 움직여 옆으로 가기로 했다. 괴인이 길의 중앙에
버티고 있기때문에 샛길 정도의 폭을 따라 움직여야 했지만 왕씨 삼 형제는 참기로
했다.
그런데 괴인은 옆으로 이동하려는 왕씨 삼형제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다시앞을 가로막았다. 괴한은 분명하게 시비를 드러냈다. 하지만 왕씨
삼형제는참기로 했다. 시비를 가리기엔 자신들이 맡은 임무가 중대하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고삐를 당겨 옆으로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왕씨 삼 형제의 인내를 시험하려는
듯괴한은 다시 움직이더니 앞을 가로막았다. 앞을 가로막은 괴한은
바위처럼움직이지 않았고 말을 탄 왕씨 삼 형제도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그들은대치 상태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은
고조되었다.
팽팽한 대치 정국은 무려 일 각이 지나도록 지속되었다. 그런데 괴한이
냉정함을유지하고 있는데 비해 왕씨 삼 형제는 그렇지 못했다.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이기지 못해 고삐를 세차게 잡거나 양다리로 말의 허리를 강하게 조이고
있었다.
그런 식이라도 풀지 않으면 터질 것 같은 분노에 정신을 읽어 사고를 칠 것
같았기때문이다. 그런데 왕씨 삼 형제가 분노를 참기 위해 타고 있는 말에 압력을
가하자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말들이 더 이상 견디지를 못한 것이다.
“푸르릉. 푸르르릉.”
세 마리 말들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헛걸음질을 치면서 투레질을 하기 시작했다.
침묵의 대치상태는 말들의 투레질로 깨져 버렸다. 동시에 왕씨 삼형제 중에둘째와
막내의 인내는 바닥을 드러냈다.
“나는 낙양 금도표국의 국주인 이장도요. 형장은 누군데 앞길을 막고 있소.”
왕씨 삼 형제 중에 첫째가 괴한에게 질문했다. 그러나
괴한은묵묵부답(??不答)이었다. 왕씨 첫째는 괴한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격한분노를 느꼈다. 사실 그가 질문을 한 것은 두 동생이 참지 못하고 사고를 칠
것같아 한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사고 없이 조용히 넘어가려는 자신의
생각을철저히 무시해 버린 것이다.
“다시 한번 묻겠소. 형장의 정체를 밝히시오. 그게 싫다면 길을 비키시오.”
왕씨 첫째는 남아 있는 인내를 모두 끌어들여 분노를 내리 누른 후 다시 한번정체를
밝히라고 말했다. 게다가 길만 터주면 정체를 밝히지 않아도 된다는아량마저
베풀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침묵이었다.
“이런 처 죽일 놈! 네놈이 뭐 하는 놈인지 모르겠지만 오늘이 제사상을
받는날이다.”
왕씨 둘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칼을 뽑으며 외쳤다. 그리고 고삐를 당겼다.
왕씨 둘째가 탄 말은 고삐가 당겨지자마자 바로 두 발로 일어서면서 괴한을짓밟으려
했다. 그런데 괴한은 말의 앞발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데도 움직이지않았다.
“히이이잉.”
기수에게 받은 고통과 짜증을 앞에 서 있는 괴한에게 풀려는지 말은 자신의
앞발을강하게 밀어 쳤다. 그런데 말의 앞발이 괴한의 가슴에 닫기도 전에 엄청난
변화가발생했다. 한순간에 괴한이 사라져 버렸다.
“끼이이잉~.”
그리고 말의 복부 부근에서 가공할 소음이 터져 나왔다. 쇠와 쇠가 마찰할 때
나는듣기 싫은 소음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사라졌던
괴한이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나타났다. 괴한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났지만특별히 바뀐 것은 없었다. 단지 왼손에 피가 묻어 있는 칼을 들고 있는
것을 빼고는다른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왕씨 둘째는 아니었다. 말이 들어 올렸던 앞발을 땅바닥에 다시
내리는짧은 시간이었지만 큰 변화가 생겼다. 왕씨 둘째와 말의 정수리에서 피가
흐르는것이었다.
“똑. 똑. 똑...”
말의 정수리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은 땅바닥에 떨어져 붉은 꽃을 화려하게 그렸다.
왕씨 둘째의 정수리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은 안장에 떨어졌다가 말의 복부를
타고흘러 내렸다. 그리고 왕씨 둘째와 말의 정수리 중앙에서 붉은 선이
나타나기시작했다. 붉은 선은 이마를 타고 코를 지나 목과 몸통을 가르기
시작했다.
“주르륵...”
한 방울씩 흐르는 핏방울은 사라졌다. 대신 붉은 선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붉은 선이 두꺼워 질수록 흐르는 피의 양은 늘어났다. 왕씨 둘째의 피와 말의피가
섞여 어느 것이 사람의 피고 어떤 것이 짐승의 피인지 모를 정도로 엄청난양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피의 꽃이 점점이 피어나던 땅바닥은 피의 연못으로변해
있었다.
“쩌억!”
수박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왕씨 두 형제의 귀에 들려왔다.
환청(幻聽)이지만너무나 생생하게 들렸다.
“퍼억. 퍽.”
정수리부터 몸통까지 갈라진 사람과 말의 두 조각이 양옆으로 벌어지면서
땅바닥에처박힌 것이다. 한꺼번에 대량의 피에 휩쓸린 내장이 한 가운데로 몰렸다.
몰려온내장은 겨울잠을 자고 있는 뱀들처럼 꽈리를 틀어 어느 것이 사람의
내장이고 어떤것이 말의 내장인지 구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피와 내장 덩어리에서 올라온 뜨거운 김은 차가운 북풍에 밀려 사라지기를 여러차례
반복했다. 왕씨 두 형제는 자기 눈으로 보고 있는 장면이 현실인지 꿈인지구별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처참한 살육의 현장을 보고만 있었다.
왕씨 둘째가 타고 있던 말을 이용해 괴한을 짓밟으려고 한 것은 큰 실수였다.
괴한은 말이 일어서는 순간 돌진해 들어가면서 칼을 휘둘렀다. 칼에서 쏟아져나온
도기(刀氣)는 실보다 가늘었지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단 일격으로 말과 사람을 일직선으로 두 동강냈지만 빠른 속도로 절단했기
때문에나중에 분해가 된 것이다. 또한 왕씨 둘째는 말을 타고 있어서 말을
가르고날아오는 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나중에 도기가 자신의 뇌를 두부처럼
두동강내버리고 지나간 뒤에 겨우 인식했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던 것이다.
참혹한 시신으로 변한 뒤엔 후회조차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괴한은
왕씨형제들의 참담한 심정과 달리 자기 손으로 만든 작품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웃음을 짓고 있었다. 비록 남들이 보면 스산하고 살벌하게 보일 웃음이지만
그는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 작은 형님...”
왕씨 막내의 입에서 비집고 나온 말은 떨리고 있었다. 넋을 읽고 멍하니
처참한살육의 현장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쉴새없이 흔들렸다.
“이 죽일 놈!”
왕씨 막내의 슬픔은 원한에 의해 분노로 바뀌었다. 그는 칼을 뽑고는
말안장을박차 허공으로 날아 날아올랐다.
“죽어!”
왕씨 막내의 눈엔 핏발이 올랐다. 괴한이 서있는 자리까지 날아간 그는
칼을머리위로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 찍었다.
“위잉.”
공기를 가르는 섬뜩한 소리는 칼에 실린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칼이 괴한의 머리 위에 도달하는 순간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괴한이유령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퍽!”
칼은 땅바닥을 세차게 후려치고 말았다. 왕씨 둘째는 칼을 들고 허리를 폈다.
괴한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다섯 자 정도 뒤로 후퇴했던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않는 빠른 움직임이었다. 왕씨 막내는 괴한을 매섭게 노려보다가
격분했다.
괴한의 입가에 비웃음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절반에 불과에 코와 입은 드러나 있었다. 왕씨 막내는 칼이 들려 있는
팔을옆으로 뻗었다. 어깨와 수평을 이룬 채 괴한의 허점을 찾기 시작했다.
괴한의 실력이 자신이 가진 무위보다 한참 상위에 있다는 점을 인지했는지
왕씨막내의 눈동자는 신중하게 움직였다. 흥분은 곧 죽음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원한을 갚는데 필요한 것은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냉철한 판단력이나 신중한 태도는 압도적인 실력 차를 가진 상대
앞에서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나름대로 최상의 수비 자세를 취하고 허점을
파악하는데전력을 다하고 있는 왕씨 둘째를 비웃기나 하는 듯이 괴한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끼이이잉~.”
또다시 귀청을 찢어 버리는 듯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소음이
사라지기가무섭게 괴한은 원래 있던 위치에 다시 나타났다.
“뚝. 뚝. 뚝...”
괴한의 왼손에 들려 있는 칼에 묻어 있는 붉은 피가 한 방울씩 떨어졌다.
왕씨막내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동시에 붉은 선이 나타났다.
괴한의 움직임은 왕씨 막내의 시각이 지닌 능력의 한계를 초월했던 것이다.
왕씨 막내가 인식하기도 전에 괴한은 앞에 도착하자마자 칼을 휘두르고는되돌아갔던
것이다. 왕씨 둘째를 두 동강냈던 도기는 또다시 그 위력을 발휘했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시작된 붉은 선이 심장을 지나쳐 왼쪽 어깨까지 그려져 있었던것이다.
“퍽!”
심장에서 작은 폭음이 터져 나오더니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심장의압력이 갈라진 틈을 통해 피를 분사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압력은 왕씨
둘째를가르고 지나간 붉은 선이 미미한 진동을 일으켰다.
“스르륵.”
왕씨 막내의 상체는 사선(斜線)으로 그려진 붉은 선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갔다. 두
동강났지만 아직 붙어 있던 상하의 몸체는 심장에서 터져 나온 압력으로 인해분리된
것이다.
“쿵!”
땅바닥에 떨어진 왕씨 막내의 상체는 부르르 떨다가 곧 멈추었다. 그리고
굳건하게서 있던 하체는 엎어졌다. 두 동강 난 왕씨 막내의 시신이 쓰러진
땅바닥은 또다른 피의 연못을 만들었다. 하지만 왕씨 첫째는 움직이지 않았다.
“너는 왜 움직이지 않은 것이냐?”
괴한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왕씨 첫째가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자 질문을
던진것이다.
“두 동생의 죽음보다 주군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오.”
왕씨 첫째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한 마디, 한마디가 떨리는 음색이었고
두눈동자는 차갑게 얼어 있었다.
“훌륭하군. 훌륭해.”
“고맙소.”
“나 역시 세 명의 동생이 있다. 하지만 임무에 방해가 되거나 문제를
일으킨다면언제든지 내 손으로 직접 죽일 용의가 있다.”
괴한의 목소리는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힘이 느껴졌다. 왕씨 첫째는 괴한이하는
이야기가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요?”
“죽인다.”
“그럼 왜 공격하지 않는 것이요?”
“너에게 물어 볼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왜 덤비지 않느냐?”
괴한은 왕씨 첫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나 역시 당신에게 물어 볼 것이 있기 때문이오.”
“흠, 재미있군. 좋아! 먼저 질문해라.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대답해 주겠다.
단너 역시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 만약 대답이 없다면 내 방식대로
얻을생각이다.”
“좋소. 내가 궁금한 것은 당신의 정체요.”
“나 말인가? 쓸데없는 질문이군. 이 칼을 안다면 내 정체를 알텐데...”
괴한은 들고 있는 칼을 들어 올렸다.
“도신(刀身)에 난 여섯 개의 구멍을 본다면 그 칼 이름은 육공도(六孔刀)라고 할수
있소. 그리고 육공도는 섭혼도법을 쓰는데 최상의 효과를 가진
병기로강호이대신비객 중에 한 사람인 환객의 독문병기요.”
“맞다. 나는 환객이다.”
“믿을 수 없소.”
“네 주인인 척신명. 아니 정확히는 무객(霧客) 척소람이지.”
왕씨 첫째는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무객 척소람을 거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무객 척소람! 갑자기 강호2대신비객 중에 한 사람을 거론하는
이유가무엇이요?”
“흠... 내가 바보짓을 했군. 너는 네 주인의 진정한 정체도 모르고
있구나.그렇다면 단순한 충견에 불과했군.”
스스로 환객이라고 밝힌 괴한은 왕씨 첫째가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자 분노했다. 그가 왕씨 첫째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은 운문상회의
내부정보를 빼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자기가 알고 있는 비밀조차 모르고 있자 여태까지 쓸데없는 노력을
했다는생각에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그는 왕씨 첫째가 척신명에게 있어서
단순한하인에 불과했고 자신은 헛고생만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네가 모시는 주인의 본명이 척소람이라는 것조차 몰랐느냐! 이 어리석은자야!”
“척소람! 그럼 회주님이 강호이대신비객의 한 사람인 무객 척소람이란 말이오?”
“그렇다.”
“그럴 리가... 어, 어떻게 당신은 회주님이 무객 척소람인 것을 아시오?
무객척소람은 출신을 비롯해 외모나 특징이 알려져 있지 않소. 오직
척소람이라는이름만 강호에 알려졌을 뿐이오. 그런데 당신은 무객의 정체를 어떻게
알고 있는것이오?”
왕씨 첫째는 자신을 환객이라고 주장하는 괴한의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다며항변했다. 괴한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믿어왔고 모시던 주군에게
배신을당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것을 밝히고 미래를 제시했던
주군이속임수를 사용해 자기를 이용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네 가치가
없다는것이 중요하다. 제 주인의 본명조차 모른다면 부리는 개에 불과하지.”
“그, 그건...”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군. 이만 죽어줘야겠다.”
살기가 터져 나왔다. 왕씨 첫째는 괴한의 전신에서 터져 나온 살기로
인해찔끔거렸다. 피부가 살기에 민감하게 반응해 부르르 떨렸기 때문이다.
일단살아남기 위해 등뒤에 매고 있던 금도(金刀)를 뽑아 들었다.
“끼이이잉~.”
육공도는 귀청을 찢어 벌릴 듯한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왕씨 첫째를 향해 날아갔다.
강렬한 귀곡호(鬼哭號)는 왕씨 첫째의 몸을 둔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왕씨 삼형제
중에 맏인 첫째의 실력은 두 동생과 달랐다.
“챙!”
금도를 휘둘러 보이지 않는 속도로 날아온 육공도를 막았다.
“퍽!”
“크헉!”
그러나 두 번째 공격은 막을 수가 없었다. 괴한의 오른 손이 회백색으로
변하더니왕씨 첫째의 왼쪽 가슴을 인정사정없이 쑤셔 박았다. 다섯 손가락이
흉골을박살내 버리면서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그리고 심장을 움켜지더니
가차없이뽑아냈다.
“음시조까지 사용하게 만들다니 제법이군. 척소람의 개들 중에서 제법 쓸만한
놈도있군.”
왕씨 첫째가 뽑혀 나온 자기 심장을 보며 부들부들 떨다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엎어져 버렸다. 그리고 뚫려진 가슴에서 쏟아져 나온 피는 대지를 붉게
만들었다. 움켜졌던 금도를 놓는 순간 왕씨 첫째는 두 동생이 먼저 간 세계로
여행을떠났다.
“쓸데없는 고생만 했군. 이 금도나 녹여서 노자 돈이나 만들어야겠군.”
괴한은 금도를 집어 들고선 감상하며 말했다. 낙양 땅을 울리던 이장도의
금도가가진 가치는 일개 노자 돈에 불과했다. 괴한은 금도를 들고서 북경이
있는남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열 걸음을 걷기도 전에 그는
멈춰서야했다. 앞에 한 여인이 길을 막은 채 요염한 미소를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 당신은...”
“아주 멋진 작품을 만들었어요. 환객 나으리.”
괴한의 안색은 새하얗게 탈색됐다. 앞을 가로막은 여자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요마 모용혜였고 괴한을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괴한은 앞으로
한걸음을 내밀다가 바로 뒤로 날아갔다. 순간적인 착시를 유도하는
신법으로공격하는 척 하다가 뒤로 빠지는 수법이었다. 하지만 그는 뒤로 도망갈
수도없었다.
한 노인이 배후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 노인은 호리병에 들어 있는 술을
연신들이키며 비틀거렸다. 바로 취마 포정이었다. 포정은 술에 취해
비틀거렸지만괴한이 도주할 수 있는 모든 퇴로를 봉쇄하는 움직임이었다.
좌우 앞뒤로 비틀거리면서 전 방위를 막았던 것이다. 그러나 괴한은 탈출을
포기할생각은 없었다. 비록 취마 포정이 앞을 막고 있으며 뒤로는 요마 모용혜가
버티고있지만 능히 도망갈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좌, 우측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우측에도 네 사람이 자세를 잡은 채 버티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는 순간 대부분의 정체를 파악했다.
북혈각주인 등곡과
북해방주의우호법(右護法)인 경라흉살(警邏凶殺) 강천리. 그리고 이름 모를
중년인이었다. 하나같이 쉽게 상대할 인물들이 아니었다.
특히 그의 신경을 집중시킨 인물은 경라흉살 강천리였다. 강천리의 무력이
어느정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해방은 물론
북해방에서도강천리가 지닌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괴한은
강천리가최소한 절반 이상의 무위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유일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우측으로 도망가는 것을 포기하고 좌측으로 빠지기로 했다.
최소한강천리만큼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마모용혜나 취마 포정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좌측으로 도망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퍽 소리와 함께
그는유령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좌측 방향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바람보다빠르게 달려 그의 모습은 희미한 그림자만 남겼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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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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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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