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형제가 사촌으로 기록되는 경우도 있는데 친형제임
둘다 아버지가 '이경하'인데 왜 둘이 6촌관계냐면
이범윤(이경하의 서자)-> 이원하(이경하의 형)의 양자로 들어감
여기까지는 두 형제가 친형제->4촌이 됨
그런데 '이원하'는 이인상(이원하와 이경하의 친부)의 아들인데 그의 이원상의 양자로 들어감
즉 이범윤은 이범진과 6촌이 된 것
근데 딱 촌수만 보면 엄청 먼 가족관계처럼 보이긴 함.
많은 이시기 창작물에서 두 인물을 먼친척 취급하는 이유가 있음.
요즘 우리도 4촌까지는 형제자매 취급해도 6촌운 거리멀게 느껴지는데
● 고종은 이범진에게 조카라고 부른적 있음
제정러시아 외교문서로 읽는 <대한제국 비사>라는 서적에서 나오는데
[짐은 궁중에서 일본의 포로로 잡혀있지만 북쪽러시아를 바라보며 짐과 백성을 자유롭게 해 주리라는 희망을 걸고 있다.
짐의 사랑하는 조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겠지만 그곳에 남아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라. 짐이 운명한 뒤에도
그곳에 남아 있으라. 일본이 수입과 지출을 통제하고 있으니 송금할 수가 없다.](1908년 1월 31일)의 서신에서
조카라고 언급함
● 매천야록에서는 이범진은 탐관오리로 묘사됨
이범진은 리경하의 서자이다. 이경하가 진주병사로 있을 때 한 기생에게서 그를 낳았기 때문에, 이름을 「범진」이라고 하였다.
(생략)
그는 가는 곳마다 음욕을 채우고 포학을 일삼아 백성들의 재산을 마구 긁어 쓰므로 그를 젖먹는 호랑이라고 지목하였다.
그는 순천에 있을 때 여러 기생들을 발가벗겨 놓고 말이 간내를 내는 놀이를 하였고, 부민들에게 형벌을 가할 때는 곤장이나 매로 치지 않고 다만 칼을 씌워 뜨락에 세워 놓고 있다가 무릎을 조금만 구부려도 발가벗겨 마구 매질을 하였다. 이렇게 수일 동안 세워 두면 다리가 퉁퉁 부어오르지 않는 사람이 없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걸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재산을 다 바치지 않으면 풀려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긴 칼을 좌우에 세워 놓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소란을 피우는 자가 있으면 이 칼로 쳐죽이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관리와 백성들은 그를 모두 원망하여 들것에 실어 쫓아내려고 하였지만, 그의 용맹이 두려워 감히 이행하지 못했다.
● 이범진은 실제로 구타로 유명했다고 함
같은 기록인 매천야록에서는
시장에서 망나니라 불리는 민영주가 상인들에게 돈을 뜯고 행패를 부리자
이범진이 "너희들은 범보를 아느냐?"며 부지깽이를 들고 구타하니까
민영주가 "아버지, 살려주십쇼." 했다고 함.(젖먹는 호랑이라고 백성들이 욕했는데 자기 별명으로 자랑하면서 쓰는것도 참 대단...)
● 청나라 상인에게 갑질을 당하다 저항해서 구타당한 이범진
이 부분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이범진이 청나라 상인에게 구타당한것에 대해서 나라망신이라서 그 일을 더 크게 키운 모양..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 윤5월 1일 갑진 3번째기사 1884년 조선 개국(開國) 493년
중국 상인을 신문한 이범진 등을 처벌하다
......... 비록 이범진으로 말하더라도 조관으로서 이런 일을 당하여 처음에는 스스로 업신여김을 당했고 마침내는 조정에 수치를 끼쳤으니, 조정의 체모에 크게 관계입니다.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니, 우선 삭직(削職)하는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국역 윤치호 일기 1884년 21일(28일, 토, 흐림, 삼가다)
저녁때 들으니 진수당(陳樹棠)이 강제로 집을 사들이고자 하여 정언(正言) 이범진(李範晉)을 잡아가 한없이 어지럽게 때렸다 한다.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마침 민운태도 자리에 있다가 같이 들었다.
내가 운태에게 말하기를, “만약 우리 정부가 강력하고 현명했다면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운태가 말하기를, “말할 것 없다. 다만 강하면 일을 성공시킬 수 있다”라고 하였다.아아. 일찍이 우리 정부가 연약하여 일이 성공된 것이 있는가. 원저자주
내가 말하기를, “내가 강하다고 하는 것은 다투어 논란하고 무리하게 억누르는 것을 강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무릇 우리나라 인민을 보호하여 우리의 권리를 잃지 않는 것을 강(剛)한 것이라 이른다. 처음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청인에 대하여 너무 약하였다. 청인이 비록 죄 없는 사람을 때려죽인다고 하더라도 정부에서는 여기에 개의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유약한 소치가 아니겠는가? 청인이 관민을 모욕하고 짓누르며 핍박하고 패만하여도 우리 정부에서 이치로 따지질 못하니 이것이 어찌 유약한 소치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라고 진짜 분노조절못하는 사람인가봄.
백성들이나 건달들에게 화를 못참는거야 그럴 수 있는데 청나라 상인들에게까지 겁을 안낸다고!?
물론 당시 청나라 수준을 알면 그럴 수도 있는데
● 동의회 부총재으로 된 이범윤
문영숙 저 <독립운동가 최재형>에 따르면
은 1908년 4월 얀치혜에 있는 최재형의 집에서 회의를 열고 동의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의병 수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총회를 열고 총장, 부총장, 회장, 부회장, 기타 임원들을 선출하였는데, 당일 임시회장으로 이위종이 회의를 주재하였다.
선거 결과 총장에 최재형, 부총장에 이위종이 선출되었다. 당시 의병세력 중에서 이범윤 세력이 막강했다. 이위종이 부총재에 당선된 이유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으려면 이위종의 부친인 전 러시아 이범진 공사의 명성과 지위가 필요하다고 느낀 세력들이 이위종에게 표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에 이범윤은 크게 분개했다. 일본의 기록은 당시의 상황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부총재 투표 개표 결과 이범윤이 1표 차이로 차점자가 되자 이범윤은 크게 좌석을 박차고 일어나 말하기를 “내가 강동에 건너와서 국사를 위하여 진력한 지 수년이나 되었는데 명성도 없고, 나이도 어린 조카 이위종에 미치지 못한다니 견딜 수 없다.”
라고 말하자 이범윤 파의 의병들도 동요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이위종이 급히 일어나 의장석으로 내려가서 이범윤을 백방으로 위로하고 스스로 부총장의 당선을 사양한 후 이범윤에게 양보하여 일이 점차 무사하게 되었다.
이범윤을 부총장으로 앉힌 후에 회장이하 임원선거를 진행한 결과 회장에는 이위종, 부회장에는 엄인섭, 서기에는 백규삼이 임명되었으며 평의원은 발기인 전부로 구성하기로 했다.
실제로 독립운동가들은 애국심 하나로 도덕성이나 초인들이 아니듯
때로는 탐관오리였었다가, 때로는 나이나 공적에 눈이 멀었다가 하는 등의 면모는 있을듯 싶음.
첫댓글 "내 밥상에 숟가락 얹지 마라!"라는 생각으로 외세랑 싸운 사람도 있었겠죠. (애국노..?) 법 지키고 도덕적으로 할 거 다 하면서 배 채우면 건전한 욕망이라고 인정해주겠지만 그러는 경우는 별로 없다는 게 문제라서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