찹찰에 도착한 7월 11일부터, 7월 18일 이곳을 떠날 때까지 내가 찾아간 곳과 만난 사람들과 수집한 자료를 전부 말하기는 너무 장황할 것 같아 중요한 것만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우선 내가 찾아가서 자료를 수집한 곳부터 이야기하면 찹찰 현정부(縣政府)의 어문위(語文委)·방송국·신문사·제일 소학교·교육국·시버말 교사 연수원·문화관·서점 등으로서, 나를 맞이해 많은 자료를 아낌 없이 내 주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 준 이 시버 사람들을 나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중국에서는 샤오지예쉰[紹介訊]이라는 일종의 추천서가 없으면 어떤 공적인 자료도 얻어 낼 수가 없다. 베이징에서 이곳으로 올 때 미처 만들어 오지 못했으므로 나에게는 아무런 추천서가 없었고, 또 이런 사정으로 인해 어려움도 많았으나, 결국은 목적했던 모든 시버말 관계 자료를 손에 넣는 행운을 얻었다. 자료 수집에 특히 도움을 준 시버인들의 이름을 몇 분만 적어 보면, 퉁갸 키청[佟家吉成]·퉁 슈에멍[佟學孟]·교로 춘셩[趙春生]·쾅걀 유청[關玉成]·익탄타이[伊克坦太]·퉁 유샹[佟玉香] 등이다. ‘퉁[佟]’씨 성을 가진 시버족이 많음을 보고, 이 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여진족 장군 동 두란(佟豆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으나, 시버족들은 스스로 여진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특히 현정부 어문위의 외빈(外賓) 접대 책임자인 퉁 슈에멍 씨는 아주 아름답게 생긴 여성인데, 나를 데리고 방송국·신문사·교육국 등으로 안내해 주었고, 찹찰 문화관의 호걸스럽게 생긴 교로 춘셩 선생은 시버족 민요와 전통 희곡의 녹음 테이프 및 그 원고를 만들어 주었다.
찹찰 체류 중 잊지 못할 두 가지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7월 14일 일요일날 외국인 접근 엄금의 국경 지대인 아이신 셔리[愛新舍里:‘황금의 샘’이란 뜻] 지역에 몰래 들어가 이웃 나라 카자흐스탄을 보고 온 일과, 출입국 관리법 위반 혐의로 공안국(公安局)에 불려가 벌금을 물고 온 일이다. 카자흐스탄과의 접경 지대는 광막한 황무지뿐이지만, 도도(滔滔)하게 흐르는 일리강 주변인 이 국경 지대를 꼭 보아야겠다는 욕심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갔는데, 용케 검문에 걸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했던 것이다. 경찰이나 군인들에게 발각되었다면 구속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공안국에 불려간 것은, 내가 처음 찹찰에 들어와서 외국인 체류의 허락을 받지 않았고, 또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이 외국인 숙소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이 찹찰 지역은 외국인에게 완전 개방된 곳이 아니라 제한 개방 지역이었다. 제한 개방 지역에 외국인이 오면 반드시 공안국에 신고를 해야 하는데,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건장한 체구에 노란 머리털을 갖고 있는 젊은 위구르족 경찰인 쿠르반[庫爾班]은 내 여권부터 압수하더니, 출입국 관리법을 어겼다고 벌금 2천 원(우리 돈 20만 원)을 내고 여기서 수집한 모든 자료를 내놓은 뒤 24시간 안에 이곳을 떠나라고 했다. 애써 모은 자료가 아까운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돈 2천 원 내기도 억울해서 우선 벌금 액수를 좀 깎아 달랬더니 그러면 1천 원만 내라고 한다. 다시 더 깎아서 결국 8백 원을 주고 여권을 돌려받아 공안국을 나오니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들으니 이곳에 들어왔던 외국인 치고 벌금을 안 문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법
◁ 찹찰 시버 자치현 교육국 앞. 맨 오른쪽이 글쓴이,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교육국 공산당 비서이다.
이 아주 교묘하게 되어 있어서 외국인이면 거의 모두 이 법에 걸려 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국경 지대에서 찍은 사진 필름이 발각 날까봐 걱정을 했는데, 벌금을 물고 나니까 압수했던 필름도 검사하지 않고 되돌려주었고, 자료를 내놓으라는 말도, 24시간 안에 이곳을 떠나라는 말도 쑥 들어가고, 원한다면 내가 머물던 호텔에 그대로 있어도 좋다고 하니 참말 이상한 법 집행이 아닐 수 없었다. 외국인 전용 호텔의 하루 숙박비가 2백 원이나 되었으므로, 결국 나는 벌금을 물고도 값싸게 여기 머문 셈이다.
찹찰 방송국에서 시버말 방송 현황을 알아 보니, 라디오는 매일 오전 7시 50분부터 9시 50분까지와 저녁 7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하루 4시간씩 시버말로 방송을 하고, 텔레비전은 목요일과 토요일 이틀 동안 밤 10시부터 10분 동안 시버말로 뉴스를 내보낸다고 한다. 6년 전에는 유선 시설만으로 시버말 방송을 했는데, 이제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방송을 하고 있으니 대단한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방송국의 한족(漢族) 방송국장은 별로 성의껏 대답하는 태도가 아니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나중에 푸념하기를 3월달부터 몇 푼 안 되는 월급(우리 돈 8만 원 정도)도 못 받고 있다는 말을 하기에 적잖은 동정이 갔다. 이런 시골 지역의 공무원은 농사라도 지어 먹을 수 있으니까 월급을 제 때 안 주는 일이 많다고 한다.
찹찰 신문[Cabcal Serkin]은 시버 글자로 찍는 중국 유일의 인쇄물이다. 6년 전과 다름 없이 타블로이드 크기 활자판 4면으로 한 주일에 두 번 발간하는데, 발행 부수는 날이 갈수록 줄어 들어 현재는 9백 부만 찍고 있다고 한다(6년 전에는 1,300부를 찍었다.). 7월 13일자가 제3063호였고, 보도나 교양 기사보다도 정부 선전문을 주로 싣고 있어서 인기가 별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부터는 활자를 버리고 컴퓨터 출판을 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한다.
찹찰 시버 자치현 제일 소학교[察布査爾錫伯自治縣第一小學校, Cabcal Sibe dzajy siyan ujui ajige tacikū]는 6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 때도 방학 중이었는데 마침 학교에 나와 있던 선생님·학생 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었지만, 이번에는 막 방학을 한 때문인지 학생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선생님들 몇 분이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안 수머이[安素梅]라는 시버족 여선생님을 만나 시버말 교육 현황을 들었는데, 6년 동안 시버말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학생들도 교사들도 별로 열성을 내지 않는다는 서글픈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소학교 시절에 애써 시버말과 시버 글자를 배워도 중학교만 들어가면 써먹을 데가 없다는 것. 더군다나 시버말로 시험을 볼 수 있는 대학도, 시버학을 전공하는 대학도 없기 때문에 학생들은 소학교만 졸업하면 더 이상 시버말과 시버 글자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질린성[吉林省]의 옌지[延吉]시에 조선말로 교육하는 옌볜[延邊] 대학이 있지만 조선족 학생들조차 이 대학에 들어가기를 꺼리고, 중국말 대학에 가서 유창한 중국말을 익히려 한다는 사정에 비추어 보면 시버말의 앞날은 참으로 암담하기 짝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친절하게도 안 선생님은 자기가 쓰던 시버말 교과서 1벌(4권)과 옛 교과서 몇 권을 나에게 주었다.
찹찰 교육국을 찾아가 시버말 장학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궁금했던 일은, 현재 시버말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8개 소학교의 시버말 교사를 어떻게 양성하느냐 하는 점이었는데, 대답은 초중(初中:우리 나라의 중학교)을 졸업한 시버족 학생 중에서 3년마다 80명씩을 뽑아 3년제 진수(進修) 학교로 보내서 교육을 시킨다는 것. 그 진수 학교의 교수는 누가 되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주로 대학 인문계 출신의 시버족들이 담당한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비전문가가 언어 교육을 맡게 되면 사정은 더 어려워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7월 16일부터 두 달 동안 찹찰 제일 중학교에서 열리는 시버말 교사 진수회(進修會:연수회)에 나를 초청하겠다는 말을 교육국 당비서로부터 듣고 그곳에 간 것은, 나에게 퍽 유익한 경험이 되었다. 찹찰 지구의 8개 소학교에서 시버말을 담당하는 남녀 교사 20여 명이 재교육을 받고 있었다. 쿵구르 슈루이[孔淑瑞]라는 시버족 40대 여교사는 시버 글자부터
△ 시버말 교사들의 연수회. 중학교 교실을 빌려서 교육하고 있다.
시작하여 친절하게 교사들을 가르쳤다. 여러 시버족 학자들에게 물어 봤던 몇 가지 질문을 이 선생에게도 하였는데, 그 중 하나는 ‘ku’와 ‘kū’의 발음이 어떻게 다르냐는 것이었다. 지금껏 많은 외국의 만주 문어 학자들이 만주말 모음 ‘ū’의 음가를 규명하려고 애를 써 왔지만, 이 문제는 찹찰에 들어와서 간단히 해결되었다. 결론을 말하면 ‘ku’의 음가는 [ku]이고, ‘kū’의 음가는 [qu]로서, ‘ku’와 ‘kū’의 차이는 모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음에 있는 것이다. 외국말이나 옛말을 연구하는 음운론 학자들이 아무리 주의를 하려 해도 글자에 현혹되어 음운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일이 있는데, 이 경우도 그러했었다는 것을 또 한번 느낀 것이다.
열흘 동안의 찹찰 생활을 끝내고, 29시간의 버스 여행 끝에 다시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수도 우룸치에 돌아왔다. 돌아올 때는 7월 18일 저녁 9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탔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우룸치에 도착한 것은 이튿날째 밤인 7월 20일 새벽 2시였다. 시버말로 출판되는 거의 모든 책은 이곳 우룸치에 있는 신장 인민 출판사에서 발간되고 있다. 우룸치에서 키 처샨[奇車山] 선생과 6년 만에 다시 반갑게 만났다. 7월 20일부터 24일까지 5일 동안 우룸치에 머물면서 이 키 처샨 선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지냈다. 키 처샨 선생은 찹찰 출신의 대표적인 시버말 학자로서,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 민족 언어 문자 위원회의 유일한 시버말 연구원으로 있다. 함께 우룸치의 역사 박물관, 신장 인민 출판사, 하나밖에 없는 시버말 잡지인《시버 문화》편집부, 민족 언어 문자 위원회, 신장 대학 알타이학 연구소 등을 방문하고 이미 6년 전에 만났었던, 그리고 새로 알게
△ 시버족 학자 퉁캬 키청 선생 내외분과 함께.
된 많은 학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새로 만나게 된 학자 중 시버족 어문 연구 학회 비서장인 퉁자 칭푸[佟加慶夫] 선생이 있었는데, 그 분은 많은 자신의 논저와 시버말 자료를 나에게 기증했으며, 또 그가 개발한 시버말·중국말·위구르말·몽고말·만주말·카자흐말 겸용 컴퓨터 워드프로세스 시스템을 살펴볼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이 기간 중인 7월 21일이 일요일이어서 우룸치 성당을 6년 만에 다시 찾아가 주일 미사에 참례하였다. 6년 동안 중국 천주 교회도 퍽 변화되어 있었다. 6년 전에는 1960년대 이전의 미사 순서를 따르고 있었는데, 이제 미사도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쇄신된 전례를 행하고 있었고, 라틴말 성가와 기도문도 전부 중국말로 바꾸어 쓰고 있었다. 벽 쪽으로 향하고 있던 제대(祭臺)는 신자 쪽으로 돌려졌고, 전례 중심에서 벗어나 주일 강론도 상당히 성의 있고 길게 진행되었다. 다만 성체 배령(聖體拜領)을 신자들의 손이 아니라 혀로 하고, 주일 미사 때마다 분향(焚香) 의식을 하며, 미사 후에 성체 강복(聖體降福) 예절을 행하는 것은 1960년대 이전 내가 어렸을 때 하던 예식과 다름이 없었다. 6년 전 나에게 위구르말 신약 성서를 선물하셨던 시예 팅제[謝廷哲] 신부님이 그대로 본당을 지키고 계셔서 반갑게 다시 만남을 즐길 수 있었다.
우룸치 시내에서 버스에 ‘車票售人无’라는 글구가 있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위구르말·카자흐말·몽고말·시버말 등 ‘주어-목적어-서술어’ 구문의 알타이말을 쓰는 민족이 많은 지역이라 하더라도, 한자를 이렇게 ‘서기체(誓記體)’(?) 표기로 적어 둘 리가 없을 것인데 어찌 된 것이냐고 키 처샨 선생에게 물었더니, ‘표 파는 사람이 없는 차’라는 말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 놓은 것이라고 하여 함께 웃었다. 키 처샨 선생과 같은 알타이 어족 사람들끼리니까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을 생각하니, 시버족에게 더욱 친밀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Sirame acaki, Cabcal jai Urumqi!(찹찰과 우룸치여, 안녕)’을 속으로 뇌며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온 것은 7월 24일 오후 2시였다. 베이징에서 세계적 여진말·만주말 학자이신 진 치종[金啓孮] 선생님을 역시 6년 만에 댁으로 찾아 뵈었다. 올해 연세가 80살에 가깝고(1918년 생) 당뇨가 있어 통원 치료를 받으시는 중이지만, 아직도 학문에 관한 열정은 대단하셨다. 나를 보고 더없이 반가워하시며, 동료·제자들이 치종 선생님의《慶祝執敎50年紀念論叢》을 준비 중이니 여진말·만주말 관계 논문 1편과 그 책 서두에 실을 여진 글자 축필(祝筆)을 꼭 써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신다. 나에게는 더없는 영광이라 꼭 써 올리겠다고 하니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또 선생님은 역시 여진말·만주말 학자였던 부친 진 광핑[金光平] 선생과, 치종[啓孮] 선생 당신과, 만주말 학자인 둘째따님 울히춘[烏拉熙春] 등 세 사람의 여진말·만주말 관계 논문을 모아 1천 쪽이 넘는《三代論文集》을 곧 출판한다고 하시며 그 교정지를 보여 주시기도 했다. 이런 논문집은 참으로 희귀하고 자랑스러운 책이 아닐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나라 건륭 황제의 후손으로 여진·만주 학계의 우뚝하신 이 대학자 선생님의 건강을 빌고, 귀국 즉시 여진 글자 휘호를 만들어 보내 드리리라 속으로 다짐하며 선생님 댁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