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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 그 진실.
명성 황후에 대한 평가는 20여 년에 걸친 그의 집권기에 시행된 정책과 그 결과를 바탕으로 냉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명성황후를 정점으로 하는 민씨 일족이 집권한 1873년부터 1895년까지는 우리 나라로서는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 밀려드는 서양 열강, 뿌리부터 흔들리 는 봉건체제, 새로운 변화를 구하는 움직임, 이런 다양한 세력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임오군 란 , 갑신정변, 동학농민 운동 같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대원군의 정책이 '쇄국'이었던 반면에 명성황후의 대응책은 '문호개방'이었다. 명성황후는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규)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 차례로 수교를 맺었다. 명성황후에게 서양 열강과의 수교를 적극 권한 장본인은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이다. 조선에서 청의 기득권을 지키고 서양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독주를 막으려는 생각에서였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청의 이른 바 '이이제이'정책이다.
어찌되었든 문호개방을 한 조선의 당면 과제는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는 일이었다.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과 산업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낡은 봉건제도를 허물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했다. 명성황후와 민씨 정권은 이 중 어느 것 하나도 충실히 해내지 못 했다. 그 결과 어느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개화 반대를 외치며 임오군란에 참가한 군중은 명성황후를 공격의 표적으로 삼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도, 동학농민군도 모두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타도를 외쳤다. 어느 쪽의 지지도 받지 못한 명성황후는 외세에 의지 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명성황후로 하여금 재집권케 해준 것은 청나라였다.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청에 지원군을 청하여 일본군 상륙의 빌미를 제공하고 그 결과 우리 땅에서 청일 전쟁이 벌어지게 한 장본인은 바로 명성황후였다.
청일 전쟁이 우리 땅에서 벌어지게 된 이유는 동학농민 운동 때문이 아니라 명성황후가 이끄는 외척들의 부패와 무능, 외세의존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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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의 매천야록의 기록들중 일부.
(* 황현은 경술국치에 절명시를 짓고 자결한 선비로, 촌철살인의 비판적인 글을 남긴 윤치호와 같으나 윤치호는 우월한 보편인의 입장에서 '윤치호 일기'를 썼다면, 황현은 시대를 가슴아파하는 마음을 가지고 후세의 교훈을 위해 매천야록을 남겼다는 점이다. 그는 조선의 몰락을 외세의 문제도 있지만, 부패한 지도자들의 업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매천야록에서 가장 통렬하고 예리하게 비판받았던것은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집권층이었다.)
임오군란을 피해 신행으로 가장하여 달아나 한강을 건넌 민비의 가마를 보고 "새색시가 민비인지 여우인지 고년 때문에 고생한다"는 말을 했는데, 민왕후는 이에 앙심을 품었다. 뒷날 환궁하여 그 여인을 찾아내라고 명하니 죽음 앞이라 모두 시치미를 뗐다. 결국 온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 완화군 독살설
세자는 생식기가 위축되는 증세가 있었다. '세자가 고자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린 시절에 궁녀가 세자의 생식기를 빨아서 한 번 나와선 거둬지지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나이가 차츰 많아지는데도 생식기가 줄 풀처럼 늘어져, 아무 때나 오줌이 저절로 나왔다. 언제나 자리를 적셔 하루에 한 번은 요를 갈았고, 바지는 두 번 갈아 입혔다.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도 부부관계를 못해, 명성왕후가 속이 상해 날뛰었다. 한 번은 궁녀를 시켜 세자를 끼고 부부 관계를 가르치게 하였다. 밖에서 명성왕후가 큰 소리로 '잘 되느냐?' 하고 물었는데, 궁녀가 '잘 안 됩니다' 라고 대답하자 명성왕후가 몇 차례나 한숨을 쉬다가 가슴을 치며 일어났다. 사람들은 '명성왕후가 완화군을 죽인 업보다' 라고 했다
(완화군은 고종의 후궁 궁인 이씨의 아들)
- 장상궁 핍박
신묘년(1891년) 겨울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강(堈)을 의화군(義和君)에 봉하자고 권했다. 의화군은 상궁 장씨(張氏)의 아들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명성황후는 화가 나서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장씨의 거처로 가 … 큰 소리로 ‘칼 받아라’고 외치며 방으로 뛰어들었다. 장씨는 본래 힘이 세어 한 손으로는 칼자루를 잡고 한 손으로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땅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명성황후는 … 칼을 던져 버리고 웃으며 ‘과연 대전의 사랑을 받을 만하구나. 지금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만 다시는 궁중에서 거처할 수 없다’고 한 후 장정을 불러 그녀를 포박하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음부 양쪽의 살을 도려낸 후 …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후 장씨는 형제들에게 10년 동안 의지하고 살다가 그 상처로 인해 죽고 말았다.”
- 엄상궁 핍박
고종 을미( 乙未 ) 32년( 서기 1895년 )전에 상궁( 尙宮 )이던 엄씨( 嚴氏 )를 불러 입궐시켰다.
왕후( 명성황후 )가 있을 때 주상( 고종 )이 두려워 감히 사사로이 곁눈질하지 못했다. 십년 전에 우연히 엄씨를 주상이 사랑해 왕후가 크게 성내 죽이려 해 주상은 간절히 애걸해 면했지만 밖으로 내보냈다. 이에 이르러 불러 들어와 변( 을미사변 )이 난 후 비로소 5일째라 주상의 일편단심이 없어 도성 백성들은 다 한스러이 여겼다.
엄씨는 모양이 민( 閔 )왕후와 닮아 권모술수와 재략 역시 같았다. 이미 입궐해 대전의 은총을 오로지 해 정사에 간여하고 뢰물을 들여 일의 진행은 민왕후 때랑 같았다.
(매천야록 고종 32년)
엄상궁에 관한 매천야록을 보면 명성황후가 살아있을 때 고종은 마음대로 후궁을 곁에 두지도 못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나서야 엄상궁이 궐에 들어와 후궁으로서 지냈다고 하니..
그리고 의친왕이나 영친왕의 기록들을 보면...
(의친왕,영친왕은 고종의 후궁이던 장상궁,엄상궁(후에 엄비)의 자식들.)
조선일보 이규태 에세이의 글인데.. 장상궁의 아들 의친왕, 이강전하의 일대기 중에 이런 부분이 언급되어 있죠.
"이강전하의 생모인 장귀인은 이은 전하의 생모인 엄귀인만큼 눈치가 빠르고 처신에 능하진 못했다.두 분 다 귀인 시절에 고종의 사랑을 받고 민비의 가공할 질투를 받았는데 엄귀인은 그런 기미만 보이면 야음을 타고 아무도 모르는 여염에 숨어있기를 10여년하여 결국 을미사변으로 사랑을 쟁취하고만다. 이에 비해 장귀인은 낳은 아들과 더부러 궁밖에 쫓겨나 살다가 가진 혹독한 린치끝에 죽음을 당한다.이강은 고아 신세가되어 민비의 박해로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속에 성장했으며 성장해서는 엄귀인과 그녀의 소생인 이복 아우 인 이은에 치어 유학이라는 미명으로 일본이나 미국에 가 고독한 젊음을 보내야만 했다. "
"고종을 닮아 무척 성격이 유약했던 그(의친왕)는 이와같은 고된 환경에 단련되어 성숙하질 못하고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며 자포자기끝에 주색에 깊이빠져 방탕무뢰하다는 말도 무척 들었다.그의 큰 아들인 이건은 이렇게 아버지를 회고한다.「아버지는 생활이 문란하기는 했지만 암우한 천성은 아니었다. 일족중에 머리는 명석한 편이었다. 만약 장귀인에게 엄귀인(엄비)만한 총명함이 있고 조부가 보다 강한 성격과 소신의 소유자였던들 아버지가 왕통의 계승자는 못되었더라도 꽤 다른 양상이 벌어졌을것이다. 평생 자신을 둔 주변의 불공평에 불평한 적이 없었으나 오로지 생모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서는 저녁 반주라도 할적에는 으례이 한탄하고 슬퍼하였다. 아버지는 이처럼 비극의 사람이었다.」"
---> 여기서 생모는 장상궁을 말하는데..생모의 비참한 죽음이라... 정확한 내막은 모르지만
고종의 후궁이엇던 장상궁이 명성황후로 부터 혹독한 박해를 받았음을 짐작케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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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매체의 명성황후 미화, 어떻게 볼 것인가
채길순 교수 chea41@chollian.net
-방송매체의 위력은 실로 상상을 초월한다. TV드라마 <명성황후>가 방영된 후 그 인기의 여파로 대형서점에 가면 명성황후에 대한 출판물이 수십 종이 쏟아져 나와 있다. 가히 신드롬이라고 할 정도다. 그러나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사실(史實)이 빠진 채, 픽션만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도 진실은 묻혀 버린 채 인기에 편승하여 한 몫 벌어 보자는 심리가 더 큰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아직까지 호칭마저도 온전치 못한 상황에서, ‘명성황후’로 미화되고 곡해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역사적 진실을 파헤치는 연구가 절실하게 필요하며, 이에 편집실에서는 ‘명성황후 신드롬’에 대한 유감의 글을 여기에 소개한다. 이 글에서의 ‘명성황후’에 대한 호칭을 각 필자의 표현을 그대로 살린 것임을 밝힌다. <편집실 주>
1. <명성황후>에 없는 ‘역사성’
몇 해 전 뮤지컬 <명성황후>를 관람했다. 큰 무대로 넘쳐나는 찬란한 조명과 인물들의 화려한 의상이 인상 깊었다. 그러나 오랫 동안 동학혁명을 역사와 소설로 접근해 왔던 필자로서는 씁쓸했다. 명성황후(閔妃)1)의 후반기 생애는 동학혁명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명성황후>에는 ‘역사’가 없었다. 명성황후의 죽음이라는 비극성에만 초점이 맞춰진 채 사실(史實)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작품 같았다.
(중략‥)
3. 명성황후는 어떤 인물인가
민비는 1851년에 여흥 민씨 치록(閔致祿)의 딸로 태어났다. 여흥 민씨는 제3대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 제 19대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명문가였지만 당시는 몰락한 상태였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8세 때 부모를 여의고 고향 여주를 떠나 서울 친척집에서 자랐으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전해진다. 1864년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이 되자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대원군 이하응은 부패의 온상인 안동 김씨 일족의 세도정치를 뿌리뽑고 이름뿐인 왕권을 강화하여 쇠락해진 봉건왕조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기 위해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대원군은 외척의 세도정치를 원천 봉쇄할 계산으로 한미한 집안의 고아 소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인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아 소녀’라는 점 때문에 왕비에 간택된 것이다. 1867년 고종의 나이 15세, 민 소녀가 16세 때의 일이었다.
민비가 평화롭게 책 읽는 일로 나날을 보내던 1868년, 왕의 총애를 받던 상궁이 완화군(完和君)을 낳으니 고종과 대원군은 손이 귀한 왕실에서 오랜만에 본 아들이라 크게 기뻐하였다. 왕자 생산에 선수를 빼앗긴 민비는 위기 의식과 함께 욕망의 화신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민비는 자신의 확고한 지위 확보를 위해 왕자를 낳아야겠다고 결심하는 한편 시아버지 대원군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야겠다고 작정했다. 1871년 11월, 드디어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며칠 뒤에 죽고, 3년 뒤에 두 번 째 아들 척(拓·뒤에 순종)이 태어났다. 이 과정에서 시아버지 대원군과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틈이 벌어졌고, 아들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여서 무당을 가까이하고, 전국의 명산 대찰에 아들의 장수를 기원하느라 엄청난 재물을 축냈다고 한다.
1873년, 유생 최익현이 서원을 철폐하고 양반에게 세금을 내게 한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리자 민비는 이를 빌미 삼아 고종으로 하여금 섭정을 폐하고 친정(親政)을 선포케 하였다. 민비는 민승호, 민규호 등 민씨 일족을 대거 등용하여 요직에 앉힘으로써 고종의 친정(親政)이 아니라 모든 권력이 민비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이로써 10년에 걸친 대원군의 세도정치 혁파정책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이후 을미사변(1895)까지 약 20년 동안 조선은 민씨 집권기를 맞게 된 것이다.
4. 명성황후의 실정
<고순종실록(高純宗實錄)> 고종 32년(1895) 8월 20일 조에 의하면 민비가 곤녕합(坤寧閤)에서 세상을 떴다고 전하고, 그 다음날에는 “내(고종)가 왕위에 오른 지 32년에 정사와 교화가 널리 펴지지 못하고 있는데 왕후(王后) 민씨가 자기의 가까운 무리들을 끌어들여 나의 주위에 배치하고 나의 총명을 가리우며 백성을 착취하고 나의 정령(政令)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고 탐욕과 포악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아슬아슬하게 위태로워졌다…”고 기록했다.
비록 <고순종실록>이 일제에 의해 왜곡된 기록이라지만 민비에 대한 부정적 행적은 놀랍게도 당시 많은 야사(野史)들, 특히 매천 황현(黃玹·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일치하고 있다. 곧, 가까운 무리를 배치(민씨의 세도정치), 백성 착취(탐관오리), 벼슬을 팔고(매관매직),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고(민란 및 동학혁명) 등 당시 역사적 정황에 일치하고 있다.
이런 민비의 부정적 행각을 견디다 못한 민중들은 끊임없이 궐기하는 가운데 그 세를 키우고 이러한 열망이 농축되어 동학 민중들에 의해 거대한 화산으로 분출되었으니 동학혁명이다.
5. 동학혁명과 명성황후와의 관계
우리 역사에서 동학혁명(1894)이란 ‘백성’이 ‘민중’으로 잠을 깬 사건이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홍경래난(1811)에서부터 임술민란(1862)에 이르기까지 민중 봉기는 전국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같은 민란은 그때마다 주모자 처형으로 막을 내리게 되니 민중들은 한계를 절감해야 했다. 이처럼 안으로 봉건 지배층이 민중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해 있을 때 일본 및 서구 열강의 침략은 민중을 한층 불안하게 하였다. 1860년 영·프랑스군에 의해 전통적 우방 청나라 수도 북경이 함락되더니, 조선도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강화늑약(1876)이 차례로 조인되어 본격적으로 청·러·일·미·불·영 등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렇게 나라가 안팎으로 혼돈에 빠져 있을 때 수운 최제우(崔濟愚) 선생에 의해 동학이 창도되자 민중들 속으로 들불처럼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동학은 민간신앙에 도교와 불교, 나아가 천주교의 사상까지 함유하고,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에 몇 차례에 거듭된 민란 실패를 통해서 얻게 된 현실적 요소를 반영하면서 현실 변혁사상으로 발전해 나갔다.
1894년. 민씨의 부패 정치로 인해 ‘더는 살 수 없는 세상’에 이르러 마침내 동학 민중이 일어섰다.
4월 27일에 동학군이 전주성을 함락하고, 5월 5일에 조선 조정의 청병(請兵)에 따라 청군이 아산에 상륙한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날 일본군도 인천에 상륙하였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에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동학 지도자들은 5월 7일 서둘러 전주화약을 맺는다. 그러나 마침내 5월 27일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탈한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청나라 군사를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전리품으로 요동반도를 차지한다. 이런 회오리 속에 국권이 일본에게 유린되니 나라의 운명은 마치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9월 18일, 2세 교조 최시형의 명에 따라 조선팔도의 동학혁명군이 부패한 정권과 왜군(倭軍)에 대항하여 다시 기포한다.
이 같은 동학혁명의 전개 과정은 민씨 일파의 부패한 정치 행로와 맞물려 있다. 흔히 동학혁명의 불을 당겼다고 보는 고부 군수 조병갑이나, 고부 안핵사로 파견되어 동학군을 과잉 진압함으로써 새로운 불을 지핀 장흥부사 이용태는 모두 민비의 매직(賣職)에 의해 임명된 인물들이었다. 특히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임으로써 일본 군대가 상륙하였고, 결국 청일전쟁은 온 국토가 유린되는 빌미가 되었다. 쇠약한 민씨 정권은 동학혁명군이 재기포했을 때 일본 군대에 동학혁명군 토벌(討伐)을 맡기게 되고, 일본은 그 전리품으로 조선의 민심 수습과 국권 탈취의 두 요건을 동시에 거머쥐게 될 ‘민씨 정권의 목’을 요구한다. 민비 시해 사건도 이 같은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민비의 삶이 어찌 동학혁명사와 분리되어 논의될 수 있는가.
6. 명성황후의 외교 정책
대원군으로부터 권력을 넘겨 받은 민비는 대원군의 쇄국정책 대신 문호개방책을 채택하였다. 1876년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규를 시작으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 수교를 맺었다. 조선에서 전통적인 청의 기득권을 지키고 서양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독주를 막아 보자는 계산에서였다. 이른바 오랑캐를 오랑캐로 물리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이다. 하지만 당시 민비가 맺은 조약은 뒷날 명백한 불평등조약으로 판명되었다.
이런 민비의 행적을 두고 “탁월하고 영민한 판단력으로 서양 여러 나라와 동등한 입장에서 조약을 맺어 이이제이 정책으로 일본을 견제했다”고 그 외교력을 극찬하지만, 내 나라를 각축장으로 만드는 행위는 이이제이의 본래 면목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민비와 민씨 정권은 어느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개화 반대를 외치며 임오군란에 참가한 군중은 민비를 표적으로 삼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나 동학혁명군 모두 민비와 민씨 일파 타도를 외쳤다. 결국 어떤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한 민비는 외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동학혁명 때 민영준이 청나라 원세개(袁世凱)에게 원병을 청하면서 보낸 편지 내용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저희 나라 전라도 관할에 있는 태인, 고부 등 고을에 사는 백성들은 습성이 사납고 성질이 교활해서 평소에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었습니다. 근래에 동학 교비(敎匪)들이 무리 만여 명을 모아 십여 고을을 공략하고……임오군란, 갑신정변 두 차례 내란에도 모두 중조(中朝) 병사의 힘을 입어 평정하였습니다……”
내 백성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는데 민비의 외교력을 칭찬해야 옳은가. 민비의 외교적 수완은 제 발등을 찍는 결과가 되었다. 가령 민비가 러시아 공사 베베르 부부와 가까운 사이였고, “왕비는 계속 보호받을 것”이라는 베베르의 말을 민비는 철썩같이 믿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관계일 뿐 러시아 정부의 기본 방침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앨런과 민비의 친밀 문제와 미국 정부의 조선에 대한 정책이 달랐듯이. 시해 당시 궁궐 시위대장 미국인 다이는 시위대 3,4백 명을 경복궁의 신무문(神武門) 길에 배치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 못했다. 국모가 이런 착각에서 외교 정책을 펼쳤다면 어찌 그것이 영민함인가. 결국, 민비의 정치는 조선의 당면 과제인 자주적 근대화를 지향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바람과는 거리가 있었다. 민비가 집착한 것은 오직 왕권 강화와 왕실의 보존이었는데, 이는 자신의 명예와 부와 권력과 같은 세속적인 욕망을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7.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에 대해
그 동안 문화 예술계에서 민비 시해 사건의 실상을 밝히는 일을 앞다투어 해 왔지만, 비극성 자체에만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민비가 집권한 20여 년 동안에 일어난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과 같은 사건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살펴서 총체적 의미를 규명해야 한다. 민비는 누가 뭐래도 당시 부패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갑오일기>는 민씨 정권 당시 충청도 청풍 북노리에 사는 이면재(李冕宰)라는 가난한 선비의 기록인데, 민비가 충북 제천의 월악산 골짜기에서 벌인 어마어마하게 큰 피난 궁터 공사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부패한 민씨 일파의 실태와 동학혁명군의 움직임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지금도 현지에는 월악 궁터 주춧돌이 남아 있어서 당시 피난 궁터 조성 이야기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다만 우리는 당시 권력 핵심부의 부패 실상과 이를 응징하려는 민중들의 움직임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또, 민비는 원자를 얻기 위해 왜 상인에게 많은 왜전(倭錢)을 빌려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제물(祭物)을 뿌려서 탕진했으며, 모자라는 재물을 채우기 위해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았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리고, 민비가 과연 덕을 지닌 국모인가. 야사는 이렇게 전한다. 임오군란 때 난을 피해 천신만고 끝에 궁중을 빠져 나와 신행 행렬로 가장하여 한강을 건너 주막에 숨어 있었다. 마을 아낙네들이 가마를 들여다보며 딱하게 여겨 “새색시가 민비인지 여우인지 고년 때문에 고생한다”는 말을 했는데, 민비는 이에 앙심을 품었다. 뒷날 환궁하여 그 여인을 찾아내라고 명하니 죽음 앞이라 모두 시치미를 뗐다. 결국 온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요즈음 민비의 입에 실리는 ‘백성’은 위선이고 허구다.
8. 역사적 평가는 사실을 바탕에 둔 총체적 해석이라야 한다.
필자는 지난 해 8월 모 주간 신문에 대중매체의 민비에 대한 미화를 경계한다는 인터뷰 내용을 게재한 적이 있었다. 대강, “민중적 합의에서 발발한 동학혁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민비에 대한 미화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역사 왜곡”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가 나간 뒤 필자는 민비를 옹호하려는 사람들로부터 벌떼 같은 공격을 받으면서 반증으로 민비의 실체를 정확하게 제시했다. 논쟁을 벌이면서 TV와 같은 대중매체의 영향이 얼마나 막강한가를 실감했고, 어떤 의미로는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중매체를 통해 전달된 민비의 이미지는 청순가련할 뿐만 아니라 위대한 국모였다. 역사의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동학혁명은 우리 역사에서 민중들의 가슴에 서슬 퍼렇게 살아서 3·1 운동과 광주학생 의거, 부마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 등으로 오늘날까지 전통적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일제의 민비 시해 사건에 공분(公憤)은 하지만 민비에 대한 근거 없는 미화는 안 된다. 민비에 대한 미화는 구천을 떠도는 숱한 민중들의 원혼을 고려한, 역사의 총체적 의미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
뮤지컬 <명성황후>가 이번 3월에 앵콜 공연을 앞두고 “공연 때마다 업그레이드를 시도해 그 작품의 완성도는 이제 마스터 피스(Master piece)를 이뤘다”고 자랑한다. 이번에는 ‘역사적 진실과의 만남’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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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길어도 읽어볼만한 내용인듯. 요즘 근현대사 배우고있는데
메가 설민석쌤이 개화파인 김옥균이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망명길에 떠났을 때
명성황후가 10년간 암살자를 보냈다고 말해줌. 결국 암살은 성공하고 시체는 고국으로 돌아와 능지처참당함... ㄷㄷ
첫댓글 사람들ㅋㅋ 왤케 명성황후를 미화하는 줄 모르겠어요. 근현대사 배울 때마다 빡침.
확실히 명성황후가 드라마로 인해 많이 미화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연 씨가 참 연기를 잘 했어요ㅎㅎ 오랑캐를 오랑캐로 물리친다는 것은 옳지는 않지만 당시에는 개화를 해야했던 것도 맞고.. 따지고 보면 명성황후가 죽기 전 까지 아버지와 아내 사이에 펴지 못한 고종도 조금 문제는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매천야록은 조금 거짓말이 있는 것 같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저는 지금 이거 읽고 처음 알았네요
민비 민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근현대사 배울때 들었는데 민비라는게 명성황후를 비하하는말로 알려져있지만 비하하는 말이 아니래요ㅋㅋ
비하하는 말 맞아요. 저 근현대사 전공했음.ㅋ고종황제니 당연히 왕비도 황후죠. 기말고사문제로 내가 명성황후였다면 어떤정책을 폈을것인가(남자는 흥선대원군) 하는 문제가 달랑하나 나와서 시험지 채운다고 식겁했던 기억이 나네요 ㅡㅡ;;
명성이라는 이름은 죽은 뒤 붙여진 시호라서 저 학교다닐때 근현대사선생님께서는 수업시간에 명성황후라는 호칭을 안쓰셨어요. 그리고 대한제국 선포전까지는 왕비이기때문에 민비라는 말이 맞긴 맞다고 해요. 그래도 일본인들이 쓴말이라 왕비 민씨로 쓰셨어요.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민비라는명칭은 좀..
다 좋은일만은 할 수 없겠죠... 링컨도 에디슨도 이제는 누가 어떤 일했다고 해도 그저그런...
대중매체에서 명성황후를 너무 미화한 탓이겠죠 명성황후 죽음의 비극성에 초점을 맞춰왔으니까요 명성황후 별로안조아함ㅋㅋㅋㅋ근현대사 배우다보면..참..독한분
222 권력욕 쩔고 그냥 거의 자기 자리 유지하기위한 국정운영이라고 생각함..
명성황후도 자신의 가문인 민씨 일파한테 권력을 쥐어주기 위한 권력꾼으로 밖에는 안느껴짐
물론 일본놈들한테 능욕스런 죽임을 당한데에는 화나지만..ㅠㅠ
헐...충격 먹었음ㅋㅋㅋㅋㅋ
뜬금없는 말이지만..... 설민석 쌤 너무 좋아요...........ㅂ
이게뭐야 오늘 모의고사에서 나온범위잖아
으이구 전에 제 댓글에 분발해서 댓글 달아셨는분 잘 아시겠나요? 그리고 을미의병은 고종의 단발과 단발령때문에 일어난거지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는 연관이 거의 없어요 그러니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나서 바로 을미의병이 안 일어났죠 고종의 단발과 함께 명성황후의 시해가 부각되었을 뿐입니다.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이 있는 법인데 명성황후 같은 경우에는 너무 좋은면만 부각되고 과장되어버려서 실제로 근 현대사를 배우고 나면 티비나 그런거 보면 참 저게 아닌데 싶기도 하죠.. 그에 비해서 대원군은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없잖아 있는거 같기도 하구요..
고등학교시절에 역사배우다가 뮤직비됴 나가거든 보면..이건 뭐ㅋㅋㅋ
알려진것처럼 조국을 위해 희생한 그런 청렴결백한 황후는 아니었다고 들었음
명성황후....좋든 안좋든...일단 어찌됬든 한 나라의 황후가 일본의 시정잡배들한테 찢겨죽었다는건...정말 말도 안될 일임..ㅠ
김옥균.. 명성황후가 자객보내서(홍 뭐였던거같은데 생각이 잘 안남) 중국에서 죽인 후, 조선으로 오는 김옥균 시체 실은 배 마중나가서 직접 시체 머리 팔 다리 칼로 다 베어버린다음에 전국에 돌렸다고 알고잇음
맞아요 파티(음.... 연회?)를 엄청 좋아해서 국고를 탕진했다고 하던데.
진짜 나도 명성황후 별로 안좋아함....왜들 그렇게 미화하는지....명성황후는 너무 미신,점술 같은것을 믿어서 그거에 돈을 엄청나게 썼다함.때문에 국민들의 원망을 많이 받았다고..그리고....지금의 용산미군기지가 원래 명성황후가 끌어들인 청나라 기지였음....진짜 역사책 볼때마다 빡침
독한여자;;;; 우리나라의 왕비긴하지만 정말 덕은없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