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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야행(夜行)-1 악삼은 운문상회의 북경지부에 온 지 삼 일이 지났다. 그동 안 자신을 감시하는 눈들 때문에 악삼은 다른 행동을 할 수 가 없었다. 그런데 오전부터 감시인들 중에서 악삼조차 찾 는데 버거운 인물의 시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악삼은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다른 감시인들은 악 삼의 눈과 귀에 걸려들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단 한 인물이 문제였다. 그자는 악삼이 아무리 노력해도 흔적조 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시선의 주인공이 무슨 일인지 몰라도 없어진 것이다. 어둠이 깃들자 악삼은 야행복으로 갈아입고 운문상회 지부를 탐색하기로 했다. 척신명의 소굴에서 손놓고 기다리기만 하 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악삼은 눈을 감고 주 변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청각과 함께 촉각이 악삼의 몸을 떠나 확대되기 시작했다. 일 장에서 이장으로 다시 삼장, 사장... 무려 20여장이 넘는 공간까지 악삼의 제공권 안에 들어갔다. "지붕에 한 놈이 있고, 건물 바닥에 한 놈, 화단에 숨어 있는 놈은 둘, 담장 뒤에는 네 놈이나 있군." 악삼은 자기를 감시하는 인원을 모두 파악했다. 차가운 달 이 어두운 먹구름 속에 들어가자 움직일 시간이 됐다고 생각 한 악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희 미한 별빛조차 사라지자 세상은 어둠에 휩싸였다. "내가 움직인 것을 알면 곤란하지." 악삼은 바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 숨어 있는 감시 자를 향해 태을지를 사용했다. 쑥. 악삼의 손가락에서 나온 경기는 바닥을 관통했다. 그런데 지 력이 관통했는데도 바닥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바닥에 깔려 있던 먼지조차 움직이지 않아 한 점의 변화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 "컥!" 그러나 바닥을 뚫고 흘러나온 나지막한 비명소리는 변화된 상황을 말했다. 태을지의 투결(透訣)이 바닥을 뚫고 들어가 더니 감시자의 혈도를 가격한 것이다. 바닥 밑에서 악삼을 감시하던 간자는 무슨 일이 생겼는지 인지(認知)조차 못하고 기절했다. 첫 번째 목표물의 제압이 수월하게 끝나자 악삼의 시선과 청 각은 다른 매복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악삼은 지붕에 숨어 있는 간자를 향해 태을지를 사용했다. "헉!" 지붕에 숨어 있던 간자는 흉부에 강한 충격이 느껴지자 신음 소리를 내면서 기절해 버렸다. 그런데 소리는 낮과 달리 밤 에는 낮게 퍼지면서 멀리서도 들린다. 게다가 간자의 기본 조건은 귀가 밝은 것이다. 화단에 숨어 있던 간자는 신음소리를 듣고 문제가 발생했다 고 직감했다. 그래서 다른 곳에 숨어 있는 동료들에게 위험 신호를 보내기로 했다. 동료들과 연결한 가느다란 실을 잡아 당겨 신호를 보내려는 순간... 퍽. 퍽. 간자는 신호를 보내기 전에 들려온 작은 타격음을 들으면서 정신을 잃어 버렸다. 악삼이 창문을 통해 점의 요결을 사용 해 두 간자를 동시에 제압해 버린 것이다. 화단에 숨어 있 는 매복까지 제압하자 악삼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날아갔다. 휙~. 미세한 파공성을 내면서 날아가는 악삼의 움직임은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망량( )과 다름 없었다. 담장 밖에서 매복 을 하고 있던 간자들은 미약한 신음 소리와 파공성을 듣는 순간 문제가 발생했다고 직감한 그들은 본부에 신호를 보내 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일제히 담장을 뚫고 들어온 무형의 힘에 의해 기절해 버렸다. 허공을 날아가던 악삼은 담장을 향해 투결을 연속으로 네 번을 발사한 것이다. 태을지력은 담장은 털끝 하나 손상을 주지 않고 간자들의 의식을 잠재웠다. 악삼은 담장 앞에서 착지를 했다가 다시 허공으로 날아 올랐 다. 담장밖에 있는 건물의 지붕에 착지한 악삼은 주변을 훑 어보았다. 비록 사방에 짙은 어둠이 깔려 시야를 확보할 수 는 없었지만 초감각과 뛰어난 청각으로 주위를 샅샅이 훑을 수가 있었다. '다행이 더 이상 매복한 간자들은 없군. 그럼 어디부터 찾아 볼까?' 악삼은 주변에 있는 열 두 채의 건물들을 비교하며 어디가 중요한 곳인지 어디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을 수 있는지 고민 했다. 그런데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뒤에 누군가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악삼은 빠른 속도로 뒤로 돌았다. 얼마나 빨랐는지 악삼의 등과 앞이 한순간에 바뀐 것처럼 보였다. 악삼의 감각은 정 확했다. 지붕 끝에 야행복을 입은 작은 체구의 복면 인이 서 있었던 것이다. 악삼은 복면 인을 제압하려고 손가락을 뻗었다. "악 가가." 그런데 복면 인이 자신을 부르자 악삼은 태을지의 공력을 풀 어버렸다. "영매?" "네, 맞아요. 운영입니다." 악삼을 가가라고 부르는 여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복면 인은 두 여인 중에 한 사람인 갈운영이었다. 갈운영은 복면 을 벗어 버렸다. 드러나는 복면 사이로 아름다운 긴 머리카 락이 흘러내리더니 갈운영의 얼굴이 드러났다. 갈운영이 악삼에게 가가라는 호칭을 쓰기 시작한 것은 어제 부터였다. 갈운지가 악삼과 갈운영이 서로 존칭을 쓰며 어 려워하는 모습이 짜증난다면 투정을 부렸기 때문이다. 악삼 과 갈운영은 갈운지의 말은 웬만하면 다 받아주었지만 이번 만큼은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갈운지의 투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자 두 사람 은 항복하고 말았다. 처음에 두 사람은 가가나 영매라는 호 칭을 부르는 것이 곤혹해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다. 악삼은 갈씨 자매에 대해 친숙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갈 씨 자매의 외모가 악삼의 모친과 닮은 점이 호의(好意)를 만 들었다. 하지만 고락을 같이 하는 동안 쌓인 정은 그 이상의 감정을 만들었다. 악삼은 갈씨 자매를 혈육처럼 느끼고 있 었다. 그만큼 악삼은 갈씨 자매에 대해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갈씨 자매에 대한 애정만큼 많은 것을 파악해 두었고 지닌 무위와 역량 또한 알고 있었다. 악삼이 알기로는 갈운영이 자기 이목을 숨길 정도의 은신 능력은 없었다. "허!" 악삼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갈운영의 무 위가 예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내가 은신해 있던 것을 눈 치채지 못해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뜻이냐?" 갈운영은 악삼이 놀라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악 가가의 예측보다 제 무위는 높아요. 요 근래 갑자기 무공 이 증진했거든요. 하지만 악 가가의 이목을 숨길 정도의 수준 은 아니에요." "글세... 과연 그럴까?" 악삼은 갈운영의 변명을 듣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갈운 영은 악삼이 곤혹해 하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는 악 가가 보다 먼저 지붕에 있었어요." "내가 이 지붕에 내리기 전에 매복이 있는지 파악했다. 지붕 에는 아무도 없었다." 악삼은 찰향적을 사용해 이십여 장 밖에서 기어가는 개미 소 리마저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운문상단 상선의 선실에서 폐관수련을 하다 얻은 초감각은 반경 십장 안에 흐르는 공기 의 흐름도 파악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악삼의 감각을 속이는 것은 강호에 존재하는 어떤 인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갈운영은 너무도 간단하 게 악삼의 감각을 속인 것이다. 감각에 관해 어느 정도 자 부심을 가지고 있던 악삼은 그 이상의 힘이 있다는 사실에 탄식했다. "무예와 은신은 전혀 다른 분야라는 것을 악 가가도 알고 있 잖아요." "그건 맞다. 그런데 나는 운남 오독문에 은신과 잠입에 대한 무공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맞아요. 본 문의 무공 중에 은신과 잠입에 대한 것은 없어 요. 내가 가진 은신과 잠입 기술은 본 문의 어른이 아닌 다른 분께 전수 받았어요. 이것은 가족들도 모르는 비밀이에요." 갈운영이 가족에게까지 숨긴 비밀의 일부분을 말해주자 악삼 은 묘한 감동을 받았다. "그런 비밀을 나한테 말해 주다니 고맙다. 그런데 지붕에서 은신한 이유가... 혹시 나를 기다린 것이니?" "네. 악 가가를 기다렸어요." "설마... 내가 나올 것이라고 알고 있었니?" "네. 예측하고 있었어요." 악삼은 갈운영의 대답을 듣고 놀랬다. "어떻게..." "악 가가라면 당연히 척신명의 의문을 풀려고 잠행을 할 사 람이죠. 하지만 그 동안 악 가가를 감시하는 눈 때문에 움직 이지 못하셨죠." 악삼은 갈운영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갈운영 의 이야기는 한 치의 틀림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보았구나. 그런데 오늘 밤 내가 움직일 것은 어떻게 알았느냐?" "상황을 분석하면 정확한 답이 나오는 법이잖아요. 악 가가도 파악하지 못한 감시인의 시선이 사라졌지요. 그런 기회를 악 가가는 넘길 일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감시하는 시선 중에 특별한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어 떻게 알았느냐?" 갈운영의 이야기는 악삼을 놀라게 했다. 마치 보고 있었다 는 듯 정확하게 집어내는 갈운영의 능력은 악삼에게도 뜻밖 이었다. "그건 제가 그 시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지요." "무엇이라고! 그자는 누구냐?" "석진 선배." 갈운영의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악삼에게 큰 충 격을 주었다. "석진 선배?" "네 악 가가." "그럴 리가... 석 선배가 공령문의 경공을 익혔다는 점이 이상 하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생각 밖의 인물이라 놀라셨군요." 악삼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석진 선배는 그동안 악 가가를 감시하고 있었어요. 게다가 악 가가를 감시하는 운문상회의 간자들까지 감시하더군요." "나만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간자들까지 감시를 해?" "네. 처음에 그 점이 너무나 이상해 석진 선배의 정체가 궁금 하더군요. 그런데 어제 밤에 그 정체를 짐작할 수 있게 됐어 요." "영매가 알아낸 것이 무엇이니?" 악삼은 갈운영을 바라보며 다급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 채 질 문했다. 석진마저 적으로 몰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악 삼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외로웠다. 석진마저 혁무강 과 같은 악연이 되는가 싶어 안타까웠던 것이다. 악삼은 태을궁의 암도를 탈출할 때 만났던 혁무강을 마음에 들어했다. 그런데 적으로 만나 인연 때문에 친분을 나눌 수 없었다. 태을궁 수련시절부터 주변에는 피를 나누었을 뿐 질시에 찬 인물들만 가득해 마음둘 곳이 없었던 악삼이었다. 그나마 호감이 가는 인물은 적으로 만나게 돼 언제나 속마음 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갈운영은 악삼의 마음을 느꼈는지 안타까운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석진 선배는 홍매(紅梅)의 후손 같아요." "홍매?" "네, 홍매는 원나라 때 활동하던 최고의 자객이지요. 화산파 제일의 기재였던 홍매는 어떤 사건 때문에 파문을 당한 후 강호에서 자객으로 활동했다고 알려진 인물이에요. 무려 칠백 건이 넘는 살업을 하는 동안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던 최고 의 자객이었어요. 덕분에 엄청난 원한이 쌓여 홍매의 후손들 은 정체를 숨기고 살아야 했지요." 악삼은 갈운영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칠백 건 이 넘는 살업을 저질렀다면 최소 20년 이상 자객으로 살아야 가능한 건수였고 얼마나 많은 원한을 쌓았는지 짐작이 가는 내용이었다. 갈운영은 악삼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후 말을 이었다. "홍매의 후손들은 그동안 집성촌을 이룬 채 평온하게 잘 숨 어 지냈지요. 그런데 30년 전 홍매가 남긴 일점홍을 탐낸 남 궁세가의 습격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겨우 서너 명이 탈 출했을 뿐 누구도 살아남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일점홍이 남궁세가에서 노릴 만큼 뛰어난 무공이니?" "검법으로 따지면 열 손가락 안에 들어요. 게다가 도(道)와 예(藝)를 추구하는 다른 검학과 달리 일점홍은 살검(殺劒)의 극치라 위력이 더욱 강해요." "남의 무학을 탈취하기 위해 살상을 저질렀다는 분명한 범죄 다. 살아남은 홍매의 후손들은 남궁세가의 죄는 세상에 알리 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지?" 악삼은 갈운영에게 질문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선조인 홍매가 저지른 살업 때문에 세상에 알리지 못했어요. 자신들 정체가 드러나면 오히려 전 강호인 의 눈을 피해 도망 다녀야 하는 신세지요. 게다가 남궁세가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불의와 악인을 처단하는 협객들은 강호 에서 사라진지 오래됐어요." "하아~, 한마디로 강호의 도의는 사라졌고 오직 힘이 정의인 세상이 된 것이구나." "네, 그것이 바로 강호의 본모습이에요." 악삼이 탄식하자 갈운영은 냉정한 어투로 뒤를 이었다. "그렇구나... 그런데 석진 선배가 홍매의 후손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던 게 영매에게 은신과 잠입술을 가르쳐준 그분이 홍 매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니?" "아니에요. 그분은 홍매의 후손은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홍매에 대한 것을 알고 있니?" "그분이 죽어가던 홍매의 후손을 구해 주셨지요. 그자는 워낙 중상을 입어 얼마 못 있어 죽었지만 죽기 전에 홍매의 모든 것을 그분께 알려주었지요. 덕분에 석진 선배의 신법이 홍매 의 신법이란 것을 알 수 있었죠." 악삼은 갈운영의 이야기를 듣다가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다. "홍매의 신법만 가지고 석진 선배를 홍매의 후손으로 단언을 내릴 수는 없겠구나." "풋, 악 가가는 지금 석진 선배가 남궁세가의 인물일 수도 있 다는 생각을 하셨지요." 갈운영은 악삼이 생각한 의심을 한순간에 파악해 버렸다. "영매는 정말로 총명하군." "고마워요. 악 가가. 그리고 제가 석진 선배의 정체가 남궁세 가의 인물일수 있다는 예상을 배제한 이유는 간단해요." "그게 무엇이지?" "남궁세가에서 얻은 것은 일점홍(一點紅)의 검초만 있는 파본 이에요. 사실 홍매의 무서움은 일점홍이 아니라 은신과 잠입 에 관한 것인데 남궁세가는 그것을 얻지 못했어요. 그런데 석 진 선배의 움직임은 홍매의 은신술과 신법을 기초로 하더군 요." 악삼은 갈운영의 명철한 설명을 들으면서 석진의 정체가 무 엇인지 생각했다. "그럼 석진 선배가 홍매의 후손일 확률이 높구나. 그렇다면 석진 선배가 운문상회에 몸을 담은 이유를 알 수 있겠구나." "그래요. 석진 선배는 원한을 갚기 위해 운문상회의 힘을 이 용할 생각이겠지요." "그만큼 운문상회의 힘이 크다는 이야기구나. 그리고 언젠가 분명히 남궁세가와 운문상회의 숨겨진 힘이 격돌하겠구나." 악삼은 운문상회의 숨겨진 힘과 척신명이 숨기는 의도가 무 엇인지 파악해야한다고 결론 내렸다. 단순한 일 개인의 문 제가 아니라 생각 밖의 큰 위험이 잠재하고 있다는 증거를 얻은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악삼은 운문상회 북경지부를 조사하기 위해 움직이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없어진 석진이 생각이 났다. 무슨 일 때문에 지금까지 해오던 감시를 포기하고 외부로 나갔는지 궁금해졌 다. "석진 선배가 간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니?" "아직은 몰라요. 하지만 내가 가려는 곳에 해답이 있을지도 몰라요." "대단해. 나는 지금까지 영매가 이렇게 뛰어난 것을 몰랐어. 생각보다 나는 어리석었어." "별 말씀을 다하시는군요. 그것보다 이 지붕에서 달구경이나 할 생각이 아니라면 저를 따라 오세요." 갈운영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모습은 갈운 지와 쌍둥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만들 정도였다. "어디로 가는 거니?" "척신명의 본모습이 숨겨진 곳이죠." 갈운영은 악삼에게 대답하고는 척씨 부녀가 밀담을 나누었던 건물을 향해 날아갔다. 일체의 소리도 없이 날아가는 갈운영 의 몸놀림은 악삼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갈운영이 밀실이 있는 건물의 지붕에 도착하자 악삼은 바로 그 뒤를 따랐다. "이 건물에 척신명이 숨기는 것이 있느냐?" "네, 이 건물의 지하에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있어요." "어떻게 알아냈지?" "3일 동안 뒤져서 찾아냈어요. 이곳을 찾아내는데 악 가가의 도움이 컸어요." 갈운영의 이야기를 악삼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무슨 도움을 줬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 "척신명의 부하들 신경이 모두 악 가가에게 집중된 덕분에 내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어요. 그 덕분에 꽤 많은 것 을 알아냈지요." 갈운영은 악삼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지붕에 있는 기와를 조 심스럽게 거둬냈다. 기와가 거둬지자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나타났다. "들어가요." 갈운영은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악삼은 갈운영이 건물 내부 로 들어가자 그 뒤를 바로 따랐다. 갈운영은 어느새 알아냈 는지 밀실에 들어가는 비밀 출입구를 열어놓았다. 악삼은 갈 운영의 뒤를 따라 밀실에 들어갔다. "여기는 어디지?" "운문상회 북경지부의 밀실이에요." 밀실은 황량한 느낌이 드는 방이었다. 가구라고는 탁자와 의자만 있을 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갈운영은 바닥과 벽을 두드리며 돌아다니더니 한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이군요." 갈운영이 가리킨 곳은 밀실의 구석에 있는 바닥이었다. 그 녀는 바닥에 엎드려서 이쪽 저쪽을 두드리다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찾았다." 갈운영은 활짝 웃었다. 비밀통로의 출구를 찾은 것이다. 갈 운영이 바닥에 뭉툭하게 솟아난 벽돌을 누르자 기괴한 소음 을 내면서 바닥이 열렸다. 열린 바닥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악 가가, 내려가죠." "그러자꾸나." 악삼과 갈운영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걸었다. 두 사람이 들어가자 열렸던 바닥이 닫혀 버렸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 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지하나 동굴은 그들에게 익숙했다. 특히 악삼은 항상 횃불을 준비하고 다녔다. 화르륵. 악삼은 화섭자를 이용해 횃불을 밝힌 후 지하계단을 통해 밑 으로 내려갔다. 밑에서 속이 울렁거릴 정도의 비린내와 악취 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근 십여 장 정도 내려가자 그들 앞에 석문이 나타났다. 끼이익. 악삼은 석문을 힘차게 열었다. 석문 안에는 감옥으로 사용하 는 열 평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악삼은 횃불을 비추어 감 옥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벽에는 보기만 해도 섬뜩한 고문 도구들로 가득했고 감옥의 중앙에는 돌로 만든 침대가 다섯 개가 놓여 있었다. 악취와 비린내의 근원이 돌침대였다. 정확히는 돌침대 위에 누워있는 두 구의 시체에서 악취와 피비린내가 나오고 있었 다. 그리고 시신의 얼굴을 회라도 뜬 것인지 안면 가죽이 벗겨져 있었다. 게다가 시신의 벗겨진 얼굴 부위에 구더기가 꾸물거려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참혹하군요." "그렇구나. 이것만 보아도 척신명이 얼마나 잔인하고 위험한 사람인지 알 수 있구나. 그런데 이들은 누군데 이곳에서 죽음 을 맞이한 걸까?" "악 가가도 아는 사람들이에요." "내가 알고 있다고?" 악삼은 의아한 얼굴로 갈운영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상선에 탔던 이 장도 일행이에요." "이 장도! 이해가 안 가는군. 척신명이 이 장도 일행을 죽인 이유가 뭘까?" "얼굴을 벗긴 것을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그렇군. 얼굴 가죽을 벗기는 솜씨가 지나치게 섬세해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고문을 하려고 얼굴을 벗긴 게 아니라 인 피면구를 만들었군." 악삼은 두 구의 시신을 처다 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인피면구를 만들었다는 것은 누구를 속이려고 행한 짓인데... 과연 누구를 속이려고 한 것일까? 게다가 무슨 이득이 있다 고 수고를 한 걸까?" "그것을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간단하지요." 갈운영은 독백하는 악삼에게 간단한 방법을 제시하고 시선을 구석진 벽을 향했다. 악삼은 갈운영이 제시한 방법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갈운영의 시선이 향한 구 석진 벽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멈춰진 벽에는 외팔 이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외팔이는 얼마나 심한 고문을 당했는지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갈가리 찢겨진 의복과 산발한 머리카락은 처참한 모습을 말 해 주었다. 악삼과 갈운영은 외팔이를 향해 걸어갔다. 그 런데 외팔이는 악삼과 갈운영이 다가오는데도 움직이지 않았 다. 외팔이 자기를 향해 누가 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의식을 잃어 버린 것이다. 비록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상처를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시체라고 말해도 믿을 정도였다. 악삼과 갈운영은 외팔이의 상처를 자세히 보고 난 뒤에 입을 열었다. "완벽하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군요." "그렇구나. 그런데 전신에 난 외상이 문제가 아니구나. 내상 이 더 심각해." "네, 오장육부가 모두 손상을 입었군요. 혈맥이 모두 터져 나 갔고 뼈마디 마디가 모두 박살났어요. 게다가 단전 부위는 인 두로 지져 버렸군요." "살아나기 힘들겠구나. 차라리 죽여주는 게 인정이겠구나... 그런데 이자는 아무리 봐도 이 장도가 아닌데 어떻게 된 일 인지 모르겠다." 외팔이를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이 장도의 모습과 달라 악삼 은 의아했다. 악삼은 예상한 일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 어떻 게 움직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 외팔이의 얼 굴을 자세히 보는 갈운영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버렸다. "배에서 봤던 이 장도가 맞아요. 악 가가." "얼굴이 다르지 않느냐? 가만 배에서 봤던 이 장도라고?" "네, 우리는 아직도 진짜 이 장도를 본 적은 없어요. 다들 이 장도라고 말했을 뿐이죠." "설마 선상에서 본 이 장도는 이 자가 변장했던 것이냐?" 악삼은 갈운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인피면구라는 단어가 악 삼의 뇌를 스쳐 지나가면서 단편적으로 알아낸 정보들이 맞 추어지면서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맞아요. 그리고 이 자가 환객이에요." "환객이라고!" 악삼의 두 눈에서 증오의 불꽃의 타올랐고 낮게 깔린 목소리 는 섬뜩했다. 사부인 악풍을 죽인 원수를 생각도 하지 못한 곳에서 만난 악삼은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곳에서 죽어가고 있느냐!" 악삼의 분노는 거세게 타올랐다. 환객의 비참한 처지가 악삼 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당당하게 승부를 벌여 원한을 갚으 려는 악삼의 생각은 환객의 비참한 처지를 목격한 순간 허망 하게 변해버린 것이다. 악삼의 분노는 당연했다. "이 놈을 치료해야겠다.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원상 복구 시킨 후 내 손으로 죽여야 원한이 풀린다." "고정하세요. 악 가가. 이 자는 환객이지만 진정한 환객이 아 니랍니다. 게다가 오라버니가 찾는 환객인지 아닌지는 아직 몰라요."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냐?" 악삼의 고개가 갈운영을 향해 홱 돌아갔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자세히 말할게요." 악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갈운영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점 이 수상했지만 시급한 문제는 원수의 정체부터 파악하는 것 이라 생각한 것이다. "나는 그동안 운문상회의 비밀을 제법 알아냈어요. 그런데 그 비밀은 악 가가에게 필요한 정보이면서 내가 찾던 정보이기 도 하더군요." "내가 필요한 정보가 네가 찾는 내용과 같다고?" 악삼은 갈운영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태을궁에서 탈출한 뒤에 만난 갈운영과 지금까지 동행을 하고 있지만 자신과 특 별한 연관성과 연결점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제가 악 가가에게 여태까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은 이유는 내 비밀을 말해야 한다는 선행조건 때문이었어요." "음... 비밀은 아무도 모를 때 그 힘을 발휘하지. 나 또한 일 부로 영매의 비밀을 알고 싶지는 않구나. 그러나 복수와 관련 된 만큼 알아야겠다." 악삼에게 원수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너무도 중요 했다. "알았어요. 말해 드릴 게요." "고맙다." 악삼의 짧은 감사의 말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악 가가도 아시겠지만 저는 가문의 무공말고 다른 무공을 익혔어요. 물론 본 가의 어른들이 알면 큰일날 일이지요." 악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남 오독문은 여타 가문과 틀려 타 파의 무학을 익히는 것을 금지한 가문이었다. 사승이 전 승되는 문파와 달리 강호의 세가는 다른 문파의 무학을 습득 하는 것을 오히려 반겼지만 운남 오독문과 사천당문은 달랐 다. 두 가문이 폐쇄적인 전통을 이어가는 이유는 독과 암기를 주 로 하는 특성 때문이었다. 독과 암기는 단순한 무학 수련으 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학문적 기술적 지식이 기반이 있어야 했다. 독술을 익히는 것 만해도 수많은 식물과 동물, 광물은 기본적으로 파악해야 하며 의술까지 익혀야 했다. 그만큼 다른 문파의 무학이나 학문에 눈을 돌릴 시간이 없었 다. 두 가문이 구성원 중에 하나라도 타 파의 무학을 익히는 것을 발각하면 큰 처벌을 내리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다. 평생을 추구해도 가문의 절학을 익히기도 힘든데 다른 곳으 로 눈을 돌리지 말라는 속뜻을 내포한 가법인 것이다. 그러니 갈운영이 다른 무공을 습득한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 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아무리 문주의 딸인 그녀라 할지라도 처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런 중대한 비밀을 악삼에게 밝히려는 것이다. 갈운영이 악 삼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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