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 것이 머 알쿠가."
다시 돌아가란 듯 제주의 바람은 매섭고 시렸다. 생전 처음 남도의 땅을 밟은 육지 것이 뭘 아냐고, '4·3'을 한번 왔다 간다고 쉽게 가슴으로 느낄 수 있냐고 모질게 몰아붙였다. 그러나 내딛은 발 다시 돌리기 힘든 곳이 섬이 아니던가.
어디로도 물러설 곳 없는 절해고도. 총과 폭력만이 존재했던 그때, 제주 민중은 속절없이 목숨을 내주어야 했다. 4·3사건은 제주를 슬픔과 회한의 땅으로 만들었고, 지금도 그때의 역사는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묻혀 있다.
그러나 이틀 동안이나마 '잠들지 않는 남도'의 땅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건성으로 귀로 듣고, 눈으로만 봐왔던 이데올로기의 상처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나에겐 소중한 경험이었고, 역사의 아픔을 제대로 보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도 깨달았다.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인 3만여명이 죽어간 4·3 사건
여행은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서 현기영 선생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고향 마을의 초토화 장면은 검게 타버린 폐허를 배경으로 한 완벽한 구도의 목탄화'같은 샌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으로 시작됐다. 제주의 남쪽, 화순 해수욕장의 고운 검은 모래가 흩뿌려지며 제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검은 모래가 오름도 되고 바다도 되고 돌담도 되고 꽃도 나비도 된다. 검은 모래에 생명력이 느껴진다. 그리고 불에 타버린 마을도 보인다. 쫓겨 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늙은 소설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목탄화'를 좁은 간드락 소극장의 구석자리에서 보았다.
그리고 다랑쉬 오름에 올랐다. 까만 밤이면 둥근 달을 토해낼 것 같은 다랑쉬 오름에는 비와 바람이 뭉쳐 다녔다. 바람이 그치면 비가 멈추었고, 바람이 몰려오면 비가 내렸다. 바람에 비옷이 펄럭대고 손끝이 시렸다. 풀들도 몸을 눕히고 일어서지 않았다.
1948년 12월 18일, 다랑쉬 오름의 작은 동굴에 몸을 숨겼던 11명의 마을 사람들을 토벌대는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지고 입구에 불을 질러 목숨을 앗았다. 그리고 지난 1991년 12월 22일, 그들은 백골이 되어 발견됐다.
희생자 중에는 9살 어린이와 부녀자 3명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들은 발견 45일만에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다. 살아 있는 자들은 다랑쉬 굴이 잊혀지길 바랐다. 그들을 바다에 뿌린 뒤 며칠 후 산 자들은 포크레인으로 다랑쉬 굴 입구를 굳게 막았다. 그들은 아마 비가 흩어지는 바다 속에서 울고 있을 것이다.
다랑쉬 오름을 뒤로 두고 속냉이골로 향했다. 토벌대의 총에 목숨을 잃은 무장대의 시신이 버려져 있던 곳이다. 마을 어귀 사람들이 무시로 드나들었을 이곳에 10여 구의 시신이 버려져 있었다니. 거둬지지 못한 그들의 시신은 봉분도 비석도 없는 음지에 그대로 묻혀 있다.
그나마 도법스님과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이 지난 해 이곳에 들러 천도재를 올리고 작은 푯말이라도 세웠으니 다행스런 일이다. 모두 이데올로기의 아귀다툼에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다. 하늘가는 길이 얼마나 원통했을까.
다시 길을 떠난다. 숲길을 걸어 화산섬 제주의 비경 '사리물궤'로 들어섰다. 뿌리를 드러낸 울창한 나무, 푸른 이끼, 검은 돌이 아름다운 곳이다. 하지만 4·3사건 당시 토벌대의 방화와 학살에 쫒긴 많은 주민들이 사리물궤의 바위 틈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숨어 지냈고, 목숨을 잃었다.
섬 어디에서도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인 3만여명이 죽어간 4·3의 흔적을 지울 순 없다. 단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옅어질 뿐이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도 그날의 비극을 떠올려야 하는 가슴 아픈 현실이 안타깝다. 그 시절을 겪었던 세대의 고통은 얼마나 깊었고, 그 고통을 바라봐야 했던 제주도의 젊은 세대들의 상처는 얼마나 컸을까.
이념의 총부리 앞에 힘없이 쓰러져야 했던 그들
하루 해가 저물고, 하루 해가 떠올랐다. 눈 쌓인 한라산 정상이 잠깐 구름을 벗는다. 화가 강요배 선생의 '하산민'이 떠오른다. 토벌대의 추격을 피해 산에 갔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장대에 흰 천을 묶고 힘없이 산비탈을 내려오던 그 그림.
한라산은 어머니의 산이었으나 모두를 품어주고 숨겨주지 못했다.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산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모습은 처연하다. 아무 잘못도 없이 그저 이 섬에서 태어나 자란 죄로 그들은 이념의 총부리 앞에서 힘없어 쓰러져야 했다.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 나섰다. 동광리 '삼밧구석'은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곳이다. 허물어진 돌담과 바람에 울고 있는 신이대만 이곳에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마을 사람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고,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던 희생자를 모신 헛묘가 나지막한 돌담에 쌓여 그 날의 아픔을 전해주고 있다.
멀리 사냥꾼의 화살을 맞은 옥황상제가 한라산의 꼭대기를 뽑아 던졌다는 산방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차가 좁은 농로로 들어선다. 갑자기 넓은 들판이 눈앞에 펼쳐진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미군의 본토 공격을 막기 위해 건설한 알뜨르 비행장이다.
일본군이 섬 주민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건설한 비행장은 해방 후 60년이 된 오늘도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언제나 희생당하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이다.
비행장 한쪽에 자리 잡은 언덕 아래에는 웬만한 폭격에도 끄떡없을 지하기지가 있다. 본토 사수를 위해 '결7호 작전'을 세운 일본군은 제주 전체를 요새화하기 위해 광분했고 알뜨르 비행장뿐 아니라 제주섬 전체에 군사용 땅굴과 진지를 모두 113곳에 건설했다. 그것은 모두 제주민중과 육지에서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의 땀과 고통으로 만들어졌다.
지하기지를 둘러보고 일본군이 건설한 비행기 격납고(알뜨르 들판에는 약 20여개의 격납고가 있다)를 지나 '섯알오름'으로 향했다. 일본군 탄약고가 있었던 자리.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하고 제주도에 진주한 미군은 탄약고를 폭파했다. 폭발로 움푹 패인 그 자리엔 132명의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이 묻혀 있었다.
4·3의 광풍이 지나간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또 다시 이념의 갈등은 심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때 예비검속으로 잡힌 132명의 무고한 양민이 이 자리에서 학살당했다. 폭발로 휘어진 철근에 희생자의 시신이 박혀 있었고, 마을 주민들이 어렵게 수습한 시신은 강제로 다시 이곳에 묻혔다.
그로부터 7년 후 유족들은 희생자의 시신을 찾아 한 곳에 모셨고, 훼손된 시신으로 희생자가 누구의 가족인지 알 수 없어 유족들은 '백 명의 할아버지에 한 자손의 묘'라는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 비석을 세우고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학살터 한 켠에는 백조일손 유족회의 발굴물 보관소가 있고, 안에는 탄피와 옷가지가 정리돼 있다.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이제 '가마오름'으로 간다. 일본군의 진지동굴이 있는 곳이다. 수많은 조선인 징용자가 끌려와 외날 곡괭이와 삽으로 배고픔과 고통 속에서 건설한 가마오름 진지동굴은 이제 평화박물관의 견학코스로 남았다.
전차가 들어갈 만한 넓이의 굴을 파내기 위해 죽어간 조선인이 얼마나 될까. 미로 같은 진지동굴은 회의실, 의무실, 장교용 침실 등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을 만큼 규모가 크다. 복원된 것만 약 1킬로미터에 이르고 미 복원 구간도 1킬로미터가 넘는다.
제주민중의 고통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어 4·3,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고통은 제주의 모진 바람을 타고 뼈 속으로 스몄다. 한이 맺혔다. 그것은 누가 어루만져 준다고 풀리고 낫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행선지 하귀리 영모원에 섰다. 하귀리 마을 사람들이 정부의 도움 없이 4·3희생자, 토벌대, 무장대 모든 이의 혼을 이념의 벽으로 가르지 않고 모신 곳이다. 이곳에 서 있는 4·3희생자 위령비의 비문이 가슴에 박힌다.
오래고 아픈 상채기를 더는 파헤치지 않으려 한다. 다만 함께 살아남은 자의 도리로 그 위에 한 삽 고운 흙을 뿌리려 한다. 지난 세월 돌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하는 뜻으로 모두가 함께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이제야 비로소 지극한 슬픔의 땅에 지극한 눈물로 지극한 화해의 말을 새기나니, 지난 50여년이 길고 한스러워도 앞으로 올 날이 더 길고 밝을 것을 믿기로 하자. 그러니 이 돌 앞에서는 더 이상 원도 한도 말하지 말라.
위령비를 등지고 서니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 언제나 나그네에게 떠나는 시간은 쏜살처럼 달려온다. 육지 것이 생전 처음 남도를 밟아 보았고, 변방의 역사를 숨가쁘게 둘러보았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은 없다. 다만 가슴으로 곱씹을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어제처럼 제주의 바람이 어여 떠나라 등을 떠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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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그냥 구경거리가 아닌 자신의 일부라 생각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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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생태관광 홍영철 대표 인터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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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주)제주생태관광의 김진우, 고병윤, 고제량, 홍영철 대표. |
ⓒ조경국 | 제주생태문화여행은 국회문화정책포럼(회장 이경숙)과 풀빛문화연대(이사장 황대권)가 주최했다. '새로운 관광문화정책 발굴을 위한 시범사업'으로 지정된 이번 여행은 제주관광의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제주생태관광에서 기획과 실무를 맡았고, 지난 1월 29~30일 이틀 동안 '변방의 역사, 그 숨가쁜 현장으로'라는 테마로 다랑쉬 오름등 4·3사건과 관련된 곳을 둘러보았다.
남은 테마는 2월 26일부터 매달 1~2차례 진행될 예정이다. 자세한 내용은 제주생태문화여행 홈페이지(www.jejuecotour.com)를 참고하면 된다. 다음은 ㈜제주생태문화여행 홍영철 대표와의 인터뷰다.
- 생태문화여행을 기획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제주관광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제주관광이 위기에 직면했다고 생각한다. 작년 제주를 찾은 관광객이 500만 명에 육박하고, 해마다 증가추세에 있는데도 오히려 이런 위기의식을 느끼는 이유는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제주관광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관광의 내용과 질은 수요자의 요구에 맞춰 변화, 발전해야 하는데 늘어나는 관광객의 숫자에만 만족하며 안주해온 측면이 있다. 생태문화여행은 8가지 테마에 각각 다양한 내용을 갖추고 그 내용에 대한 접근도 여행일정과 더불어 문화공연이나 체험 및 강연 등으로 다양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생태문화여행을 기획함으로써 제주를 찾는 관광객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 8회까지 계획된 이번 생태문화여행은 명사들이 참여하는 느낌이 강하다. 지속될 수 있는 여행 상품을 만들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8개의 테마여행에 테마와 관련 있는 명사들이 초청되어 참가하고 있다. 여행의 비용문제 등을 고려해볼 때 지속적으로 여행에 명사들을 초청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해된다. 테마에 초청하고 있는 인사들은 테마와 관계가 있거나, 여행을 전문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인사들이다. 명사들을 초청한 목적은 이번 여행이 새로운 여행모델을 발굴하기 위한 것으로 초청 인사들은 참가자이면서 여행의 내용과 방법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한다. 8가지 테마 이후의 여행에서 명사들을 초청하는 여행상품이 기획될 수도 있지만, 명사들을 초청하여 진행하는 방식이 이후 생태문화여행의 여행방법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 제주도가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지만 보고 즐기는 현재의 관광 형태가 달라지진 않을 것 같다. 현장에서 제주 관광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관광을 하드웨어적인 측면에서만 보고 있다. 대규모 관광단지나 리조트, 관광을 위한 도로건설, 골프장 등 시설만 해 놓으면 저절로 관광객이 온다는 생각이 문제다. 계속된 관광개발로 인해 제주의 고유한 자연환경과 문화적 유산 등이 훼손되고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소프트웨어적인 측면, 즉 관광의 내용과 질을 고민해야 한다. 관광에 필요한 인프라 구축도 필요하지만, 관광객들에게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다가서야 하는가 고민해야 할 때다."
- 첫 번째 테마가 '4·3'이었다. 여행으로 다가가기엔 너무 무거운 주제가 아닌가. "다소 무겁고 어려운 주제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행은 무조건 좋고 아름다운 것만을 좇는 것이 아니다. 제주에 와서 제주사람들의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알고 위로하며 해법을 찾는 것도 여행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첫 테마에서 단순히 4·3의 아픈 상처만을 부각하려는 의도는 아니고, 그 상처를 딛고 '화해와 상생'으로 나아가는 해법을 여행 참가자와 같이 고민하려는 목적에서 선택했다."
- 이번 여행에서 다녀온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리물궤'도 생태문화여행이나 다른 여행상품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찾으면 훼손될 가능성이 크다. "'사리물궤'와 같이 사람들이 자주 왕래할 경우 훼손될 수 있는 곳이 제주에는 많이 있다. 제주의 오름들도 최근 찾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면서 훼손되는 곳이 많아졌다. 생태적으로 민감하여 훼손될 가능성이 있는 곳에 방문할 경우, 먼저 여행참가자들이 스스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방문자들을 인솔하는 사람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태에 민감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곳의 방문은 제한을 두어야 한다. 그 제한은 인솔자 스스로의 판단도 중요하고, 또한 제도적인 장치도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 끝으로 제주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가. "화산섬으로서 가지는 독특한 자연환경과 문화다. 이 매력은 제주를 샅샅이 돌아다니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다. 단 어디에나 있지만, 천천히 음미하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행하는 사람들의 풍부한 감수성과 더불어 제주를 그냥 구경거리가 아닌 자신을 제주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주를 여행하는 동안 여행자도 제주생태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 조경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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