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4.9.22) 말씀/ 로마서 13:9-10 . 시편 2:12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퍼시 비시 셀리가 쓴 ‘사랑의 철학’ 이란 시가 있습니다. <샘물은 흘러서 강물과 만나고 강물은 흘러서 바다와 만난다. 하늘의 바람들은 달콤한 감정으로서로 영원히 어울린다.이 세상에 홀로 있는 것은 없다. 만물은 신성한 법칙을 따라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울리는데 그대와 나 어찌 함께하지 못하랴. 보라, 산은 높은 하늘과 입맞추고 파도는 파도끼리 서로 껴안는다만약 누가 그의 형제를 업신여긴다면 누구라도 용서받을 수 없으리. 햇빛은 대지를 얼싸안고달빛은 바다에 입맞추는데 만약 그대가 나에게 입맞추지 않는다면이 모든 입맞춤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마지막을 보면 모든 만물이 신성한 법칙을 따라 움직이며 사랑의 입맞춤을 하는데 ,,,그렇지만 그대가 나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입맞춤’이란 사랑을 의미합니다. 별이 찬란히 빛나는 하늘에 있다 해도 나에게 그 사랑이 닿지 않는다면 그냥 수많은 별 중에 외로운 하나의 별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은 온 천하 보다 더 위하다는 것입니다. 시편 말씀 2:12절에도 이 시와 유사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 여기서도 입맞추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라. 제가 처음 책을 출판할 때 제목이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였습니다. 사실 개혁 전에는 사랑에 대해서 그저 관념적으로 알앗지 사랑이 개인 삶에 있어서 신앙의 삶에 있어서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인지, 깊이 생각지를 못했습니다. 사랑이란 저의 삶의 필요한 것, 신앙생활에 좋은 것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철옹성 같은 우리 선교단체에 많은 문제가 생기면서, 잠시 교회와 신앙에 대해서 멈춤의 시간을 갖게되었을 때 근본에 대해서 고민하고 생각하며 글을 쓰며 묵살하게 된 것이 ‘사랑’ 이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사랑이고, 모든 신앙의 문제는 따지고 보면 사랑에서 빗나간 문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은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며, 최고의 가치이고, 중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눈에 시편의 ‘그 들에게 입맞추’라는 말씀이 레마처럼 들어왔습니다. 그렇구나 예수님 사랑에서 빗나간 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예수님도 사랑 당연한 것이고, 이제 까지 배워 온 것이고 또 현재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사랑인데 왜 끊임없이 문제가 생기고 있는것일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에 입맞춤이 어긋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생가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사랑하시지요?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예 당근, 주님을 사랑합니다.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죽는데 까지 따라가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지 않겠습니까?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 질문을 하셨을 때에 베드로는 처음에 당당히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세 번씩 질문하실 때는 근심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답변을 하지 못하고 그냥 주님이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정말은 사랑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것 같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정말 내가 사랑하는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는데 실에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세상 욕심이 더 많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형제를 여전히 미워합니다. 막상 현실 문제에 이르게 되면 그렇게 잘 알았던 사랑이 얼마나 빈약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장영효 집사님 큐티 댓글을 보면 자주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님, 하나님 사랑 자꾸 까먹습니다. 또 이웃 사랑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늘 은혜를 그렇게 잘 받고 힘을 얻는다는 고백을 하면서도 현실 앞에 서면 나의 부족함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형효 집사님만 그렇게 습니까? 늘 사랑을 말하고 강의하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론과 현실 앞에 절망하고 좌절하면서 다져가야 하는 것이 사랑문제입니다.
용서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막상 현실 앞에 서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정식으로 공부를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주어들은 것들은 지식들 뿐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사랑을 하게 되면 세상에 달라질 정도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데 왜 초등학교 때부터 사랑을 가르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러게요” 하고 저도 공감했습니다. 실제로 학교 교과 과정에 사랑 과목이 없습니다. 그래서 50 넘어 따로 스스로 공부를 해야합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사랑이 계명의 중심이고, 정신이고, 모든 삶을 의미 있고 가치인데... 이 사랑이 제대로 삼의 중심에서 작동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밝고 아름다워지고, 또 얼마나 삶이 행복해지겠습니까? 반대로 사랑이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제대로 작동 되지 못하면 그런 곳엔 반드시 위선이 넘치고 거짓이 판을 치고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저 조금 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있는 곳은 축복과 천국이고, 사랑이 없는 곳은 저주이고 지옥입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문제들은 들여다보면 사랑 문제입니다. 오늘 시편 말씀이 뭐라고 합니까? 그 아들에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라고 합니다. 사랑 안하면 하나님 진노가 급히 임하고, 길에서 망한다고 합니다. 그런다고 망하기까지! 너무나 심하다 싶어 고전 16:22을 보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더 강력합니다. 쉽게 생각해보면 됩니다. 예수님을 절대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것이 그 절대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 돈의 지배를 받고, 주님보다 자신의 명예 자존심을 더 사랑하면 자존심의 지배를 받고, 사람을 더 사랑하면 사람의 지배, 교회 건물이나 역사 사업을 더 사랑하면 사업가가 되는 것이고, 결과 분열과 다툼이 일어나고, 죄와 탐욕의 지배를 받아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입술로는 사랑한다 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저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겠습니까? 사랑이 잘 못되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살인자가 되었고, 자신들만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한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음이 멀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척도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가까운가 먼가? 여러분들, 지난 주 명절 잘 보내셨나요? 사랑하는 가족들과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 보내셨나요? 이번 추석에 저도 사모와 누가가 서울서 내려 와서 가족과 함께 보냈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그렇게 반갑고 보고싶고 만나고 싶은 추석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사모가 저를 떠난지 20년이 가깝고,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한번씩 내려와서 가족들도 만나고 쉬어가고싶어하고 모처럼 와서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을 허용하는 것뿐입니다. 함평 역전으로 온다고 누가가 연락이 오면 가서 픽업을 하고, 또 갈 때도 픽업을 해주고, 내려와서 쉬는 것, 용납하고, 팰요를 채워주고, 누가의 경제적인 비용을 지원하여주지만 마음은 잘 가지를 않습니다. 그래도 올 때면 갈비탕이니 갈비찜이니 사서보내고, 하지말라고 해도 시장 봐서 이것 저것, 재료를 사다가 전을 만들고 음식을 만듭니다. 이번에는 광주로해서 청계에 내려왔지만 갈 때는 목포에서 kt를 타고 간다기에 청계 택시를 타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멀기도 하지만 마음이 그리 편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모는 짐도 없으니 택시 탈 필요없고 200번 타면 된다고 부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느 ㄴ택시타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전화를 해보니 이야기도 하지 하지 않고 벌써 목포역에 가 있었습니다. 왜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냥 벌써 갔냐고 하였지만 내가 내가 속이 좁았다는 생각에 픽업을 할 것을 ...후회스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그리 중요합니다. 거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사랑을 외치면서도 사랑 없는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포기가 없습니다.회개의 심정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던 사람에 대한 사랑이던 사랑이 금이 가면 모든 것이 삐뚤어집니다. 요한계시록 소아시아 교회에 쓴 편지를 보면 주님이 사도들을 통해서 세우신 교회가 왜 타락했는지 근본 사랑에서 빗나간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에베소 교회를 보면 주님이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계 2: 2-5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겉으로 보면 에베소교회는 참 훌륭한 교회입니다. 심지어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너를 책망할 것이 있다고합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랑한다고 하지만 처음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처음 사랑이 무엇입니까? 순수한 사랑, 예수님이 전부인 사랑입니다. 제자들이 처음에 주님을 따를 때 그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 부르심에 그물, 배, 부친 다 버리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에베소 교회는 그 처음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문제를 잘 모릅니다. 주님은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숙제를 내주십니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무서운 경고를 하십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겼는지? 사람들이 하는 일의 수순이 그렇지 않습니까? 힘들 때는 그저 주님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좀 부요해지고, 갖추어지다보면 주님의 외에 좋은 것들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제정도 보이고, 건물도 보이고, 사람들도 보이고, 부흥하고 커가는 사역도 보이고, 세상 권위와 명예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 사랑의 본질은 뒷전으로 가게됩니다. 당연 형식과 외식 껍질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사모와의 관계가 어디서부터 문제였는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주님만을 위해 살겠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지만 결론은 화목자지 못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사모는 기독교 불모지의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할머니는 스님이었던 집안에 돌연변이고 예수를 믿고 가족들의 핍박을 피해 맨발로 띄어나온 사람입니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제주도 켐퍼스 사역을 처녀의 몸으로 섬겼고, 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저와 결혼해서 제주시 화장터에서 6년동안 학생들 밥을 해먹이며 제자양성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목포대학에 와서 어린 세 아이들을 키우며 일대일 제자양성을 하며 섬긴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실망을 한 것입니다. 저의 부족한 모습을 곁에서 보고, 저의 율법적인 신앙 사랑 없는 모습, 허물진 모습을 보고 이것은 복음이 아니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은 모든 것이 제탓입니다. 결과를 보면 일방적으로 떠난 사모탓이 죄겠지만 원인을 보면 다 내 잘못, 내 탓입니다. 평상시 기도에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더 깊히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내 탓으로 여기며 사랑으로 끌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동시에 나의 옹졸한 모습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겸비한 마음, 죄인된 심령으로 이 문제를 풀어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곧 사모에게 미안하다는 문자를 넣었습니다. 잘 올라가요 가는 것 보지 못해서 마음이 좀그랬네요 목포까지 차로 배웅 못해 준 것이 마음에 걸리고.... 과일이라도 좀 챙겨서 기차에서 먹으며 가면 좋았을텐데 미안해요~~
아뇨 피곤한데 괜찮아요 시간이 넉넉하니까 좋아요 냉장고에 고구마잎 삶은 것도 된장국 끊여 드세요 고구마 줄기뿐아니라 잎도 먹는다고 해서 집에서 된장국 끓여봤는데 괜찮아서 삶아서 냉장고에 있어요 고동 기차안에서 누가랑 잘 빨아 먹었어요 수고해주셔서 감사해요
우리는 어디서부터 회개해야겠습니까? 각자 처한 형편문제들은 다르지만 근본은 같습니다. 로마서 13장 8-10을 보시기 바랍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여기서 중요한 핵심포인트는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이렇게 사랑이 중요하다면 우리가 무엇을 붙들고,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무엇을 배워야 겠습니까? 사랑을 제쳐놓고 다른 문제들을 거론한다면 일시방편일 뿐 문제는 풀리지 않고 다시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 하나에 다 들어 있습니다. 사랑이 회복되지 않으면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회복되려면 그 근본 이 어떻게 어디서 빗가게 되었는게 문제 원인을 잡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하려고 노력이라도 하지 근본 문제를 못 찾고 사랑하라고 하면 마음이 없어서 안됩니다. 계속 남 탓하며 평행선을 달리게 됩니다. 원인을 찾고 문제 시발점을 찾아 시정하는 노력을 통해서 사랑이 싹트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빵 가게를 운영하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분이 구워내는 빵은 크기가 매우 작아서 동네 사람들에게 비난을 샀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의 별명이 대포집 사였습니다. 대표기도를 할 때 대포소리가 나도록 큰 소리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날도 힘차게 기도했는데 사람들의 눈치가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느꼈습니다. 대포 집사님을 상한 마음으로 목사님을 찾아가 상담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저를 싫어하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능력있게 살려고 힘차게 기도하는데 말입니다. 목사님은 진짓하게 권면해주셨습니다. ”집사님, 기도소리는 줄이고 빵 크기는 늘리세요.” 우수운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삶의 문제도 따지고 보면 사랑문제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이론이 아닌 실제 삶입니다. 삶이 달라질 때 사랑도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그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것입니다. 내가 굽는 빵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이 전달되어질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 기도하고 고민하면서 그는 빵을 더욱 맛있게 만들 것이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선도 할 수 있고, 다른 가계보다 이윤은 조금 덜 하더라도 좋은 질의 빵을 만어 팔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보다도 이기적 자기 사랑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고르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한다고 하면서 부모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부모도 사랑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마음처럼 쉽지 않지만 사랑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노력을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되고 안되더라도 다시 다짐하고 노력하고 시도하면서 붙잡아야할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도 도와 주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 각자 문제들이 많이 있지만 사랑으로 변화되는 기적들을 모두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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