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6차 『대한민국 임시정부 현장을 가다』 강의를 듣고/안성환
사단법인 울산문화아카데미 제416번째 강의는 수원대학교 사학과 박환 명예교수님께서 해주셨다. 지난 9월 30일 ‘독립전쟁’이라는 주제로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항일무장투쟁을 다루셨는데, 이번에는 회원들의 요청에 힘입어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다시 강단에 서셨다.
지난 강의에서 왜 ‘독립운동’이 아니라 ‘독립전쟁’인지에 대해서도 쉽게 설명을 해 주셨다. 삽이나 괭이를 든 운동이 아니라, 총과 칼을 든 진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연해주는 무장 독립투쟁의 현장이었다면, 상해 임시정부는 외교와 정치의 무대였다. 멕시코의 한인들은 사탕수수밭에서의 노동으로 독립자금을 마련한 조달청 역할을 했다고 설명하셨다,
이번의 주제는 상해 임시정부이다.
그렇다면, 왜 임시정부는 수많은 나라 중 상해에 세워졌을까?
1919년 3월 1일 이후, 서울의 한성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렇게 세 곳이 세워졌다. 서울은 일제의 감시 아래 있었고, 연해주는 러시아 혁명 이후 혼란스러웠다. 반면 상해는 서양 열강의 조계지(치외법권 지역)로 일본의 손이 쉽게 미치지 못했고, 프랑스 조계지라 국제사회의 시선과 외교의 통로를 활용하기 유리했다고 하며. 국제도시로서 외교관과 언론이 활발히 활동하던 그곳은,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고 한다.
강의 서두에서 교수님은 먼저 질문을 던져셨다.
“독립선언서에는 오직 독립만 있을까요?” 이다. 모두 가 침묵하고 있는 사이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속에는 정의, 인도, 평화라는 세계 보편의 가치가 담겨 있다”고 하셨다. 단순한 민족의 외침이 아니라, 인류의 양심에 호소한 선언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3·1운동의 주역들 가운데 여성들의 활약이었다. 학생, 주부, 기생, 노인까지 모두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유관순만이 특별히 알려진 이유는, 어린 소녀의 몸으로 끝까지 싸운 상징적인 희생 때문이라 했다.
전국의 3·1운동 지역은 무려 1700여 곳에 달한다고 했다. 우리가 독립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리더(leader)보다 리더십(leadership)을 가진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했다. 즉 리더는 인물을 말한다면 리더십은 그 인물이 발휘하는 힘과 행동 방식을 말 할 것이다. 이름 없는 민초들의 용기와 행동이 나라를 일으킨 힘이었다고 볼수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는 지금도 대부분 국립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정부의 공식 포상을 받아야 한다. 1만8천여 명 결코 많은 수가 아니다. 아직 발굴되지 못한 이름 없는 독립투사들이 국내외에 수없이 남아 있다. 특히 만주와 연해주 지역은 기록조차 남지 않아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기조차 어렵다. 유해가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많다.
해방 이후 남북의 분단은 또 다른 시련이었다. 김일성은 사회주의로, 이승만은 자본주의로 나아갔고, 김구 선생은 그 사이에서 통일을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미국의 냉담한 시선 속에 그 길은 끝내 막히고 말았다.
1919년, 낯선 이국땅 상하이에서 조선 민족의 희망의 불씨가 타올랐다. 총칼은 없었지만 그들의 펜은 총보다 날카로웠다. 나라를 잃은 민족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 상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외교와 정치로 조국의 독립을 외쳤고, 임시정부를 세워 국민 주권과 자주의 가치를 지켜냈다. 다양한 계파가 하나 되어 뜻을 모았고, 총칼 대신 말과 문서로 세계를 설득했다. 오늘의 우리는 그들로부터 국가를 위한 헌신, 통합의 정신, 그리고 어떤 위기에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배운다. 상해 임시정부는 지금도 우리 마음속 독립의 등불로 남아 있다.
2025년 11월 7일 안성환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