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음악학자 앨프리드 스완은 1944년 자신의 친구에 관한 견해를 이렇게 정리했다. “깊은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꾸렸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거둔 커다란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의 관객이 보여준 깊은 헌신에도 불구하고 라흐마니노프는 자기 안에 갇혀 살았다. 그는 고독한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조국 러시아를 영원히 그리워했다.”
(12)
숨을 거두기 얼마 전 라흐마니노프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낯설어진 세계를 떠도는 유령이 된 것만 같다. 낡은 작곡 방식을 펼칠 수도 없고, 새로운 작곡 방식을 습득할 수도 없다. 오늘날의 음악 양식을 느껴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였지만 이는 내 능력 밖의 일임을 알고 있다. 나비부인은 남편을 위해 순순히 개종하였지만, 나는 내가 믿어오던 음악의 신들을 냉큼 버리고 새로운 신들 앞에 무릎 꿇을 수 없다. 내가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낸 러시아에 닥친 재앙과도 같은 운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음악이, 그리고 모든 음악에 대한 나의 반응이 정신적으로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고 늘 느껴왔고 지금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명을 향한 끊임없는 순종이었다.”
(23-24)
말년에 그(라흐마니노프)는 나름대로 이렇게 결론지었다.
“새로운 종류의 음악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새로운 음악의 작곡가들은 느끼기보다는 생각합니다. 그들은 – 한스 폰 뷜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 음악을 ‘환희하게’ 할 줄 모릅니다. 그들은 묵상하고 주장하고 분석하고 사고하고 계산하고 곱씹을 뿐, 절대 환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대의 정신에 입각해 곡을 쓰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당대의 정신은 음악에서 표현을 요구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작곡가들로서는 사고는 가능하되 느낄 순 없는 음악을 엮어내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애가 요구하는 표현은 사실과 문자의 장인인 작가와 극작가에게 맡겨두고 영혼의 권역에는 관여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현대음악이라 불리는 것에 관한 나의 견해를 물은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기를 희망합니다. 이런 경우도 현대적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요? 현대음악은 태어나자마자 늙어버리는 음악입니다. 고사병에 걸린 채로 태어나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74)
평생 현대 기술에 매혹되어 산 사람답게 라흐마니노프는 첫 공개 연주회 장소도 그에 어울리는 곳으로 골랐다. 바로 1892년 9월 26일에 열린 모스크바 전기박람회 현장이다. 이날 연주회에서 그는 안톤 루빈시테인의 <피아노 협주곡 4번> 제 1악장, 쇼팽과 리스트의 피아노곡을 연주했다. 아울러 전 세계 청중에게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이름을 알릴 최신곡도 초연했다. 다름 아닌 <전주고 c샤프단조>였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그해 가을에 작곡한 네 편의 피아노곡과 묶어서 출판업자 구트하일에게 건넸고, 구트하일은 다섯 편의 피아노곡을 <환상적 소품집, 작품 3>으로 출판했다.” 출판 악보에는 라흐마니노프의 작곡 스승 안톤 아렌스키에게 바친다는 헌사가 새겨져 있었다.
(107)
작가 니콜라이 텔레쇼프는 1904년 모스크바의 어느 날 저녁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샬라핀은 라흐마니노프에게 불을 지폈고, 라흐마니노프는 샬랴핀에게 박차를 가했다. 두 거인은 서로를 격려하며 진정한 기적을 창조했다. 그것은 더 이상 흔한 의미에서의 노래도 음악도 아니었다 – 그것은 가장 위대한 두 예술가가 발산하는 영감의 공세 같은 것이었다. … [라흐마니노프] 샬라핀과 가까이 지내는 동안 가장 강력하고 가장 깊으며 동시에 가장 절묘한 예술적 인상을 경험했고, 그것이 그에게 큰 혜택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 라흐마니노프는 즉흥 연주 솜씨가 기막혔다. 샬랴핀이 잠시 숨을 돌리려 하자 라흐마니노프는 믿을 수 없는 즉흥 연주 실력을 뽐냈고, 라흐마니노프가 잠깐 휴식을 휘하겠다 하지 샬랴핀은 피아노 앞에 앉아 직접 반주하며 러시아 민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색다른 콘서트는 자정을 넘은 시각까지 이어졌다. 샬랴핀을 유명인으로 만든 아리아와 오페라 발췌가 있었고, 아름다운 로망스가 장난기 가득한 음악이 있었으며, 탁월하고 매력적인 ‘라 마르세예즈’가 있었다.”
(119-120)
레오니트 사바네예프는 러시아 망명 언론에 게재한 리뷰에서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통해 강력한 사운드, 숙달된 리듬,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손 등 그야말로 리스트처럼 모든 것을 갖춘, 그리고 거기에 더해 “러시아의 영혼까지 가미된” 모든 성장을 마친 특출된 피아니스트로 우뚝 섰다고 칭찬했다. 과연 이 작품으로 올린 개가 덕분에 라흐마니노프는 직업 음악가로서의 경력에서 새로운 단계로 올라섰다. 그와 동시대를 산 누군가는 이렇게 술회했다. “모스크바는 라흐마니노프를 흠모했다. … 모스크바의 대중은 라흐마니노프라면 껌뻑 죽었다. 그는 그들의 우상이었다. 그의 연주가 모든 이의 영혼을 파고들어 다른 어떤 음악가도 건드리지 못하는 심금을 울린 게 분명했다.
(176-177)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러시아정교회의 성가를 떠오르게 하는 음계 위주의 구불구불한 도입 선율부터 해서 낭만적이고 러시아적인 정취를 한껏 품고 있다. 이 뚜렷한 ‘러시아성’은 빈틈없는 주제들의 통일성 및 피아니스트로서 라흐마니노프의 기량을 뽐내기에 안성맞춤인 눈부신 기교와 더불어 이미 작곡가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친숙하던 미국 관객을 겨냥한 노림수였던 듯 보인다. 미국의 평론가들은 이 곡의 음악적 특징을 전작보다 윗길에 놓았지만, 정작 관객들에게는 그만한 인기를 끌지 못했다. 곡을 헌정받은 러시아의 동포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은 이 곡을 단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독주자가 소화해야 하는 두터운 화음 텍스처와 널찍한 음역은 호프만의 조그마한 손보다는 라흐마니노프의 전설적인 뼘 너비에 적격인 게 사실이다. 호프만은 또한 이 곡에 구조미가 부족하다면서 협주곡보다는 환상곡에 가깝다고 조롱하듯 깎아내리기도 했다. 과연 제3악장은 협주곡치고는 제법 덩치가 큰데, 다만 리처드 타루스킨은 “이례적 구성 덕순에 이 곡만의 멋진 개성이 가능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피아노 협주곡 3번>이 피아니스트들이 스탠더드 레퍼토리로 편입된 건 1928년에 있었던 블라디미르 호로비치의 연주 덕분이다. 호로비츠의 연주를 듣고 압도당한 라흐마니노프는 “작품을 통째로 삼킨 연주!”라고 상찬했다.
(197)
라흐마니노프의 인기 비결은 아름다운 선율과 풍성한 화음을 그만의 방법으로 배합한 음악에 있었다. 그의 음악을 들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대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저마다 경험한 바를 긍정받는 감정의 분출을 경험했다. 집시들이 부르는 노래, 오페레타, 그리고 문화 엘리트층이 멸시하는 ‘대중적’인 여흥과 마찬가지로 라흐마니노프가 쓴 음악을 듣는 즉시 감정이 움직인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음악은 그저 ‘비관적이고 우울하고 어두운’ 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이른 음악은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처지로서 누구나 느끼는 감정에 호소했다. M. L. 첼리시페바의 회고대로 라흐마니노프의 연주는 “모든 이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었고 다른 그 어떤 음악가도 건드릴 수 없는 심금을 건드려 소리나게 했다.”
(274-275)
<피아노 협주곡 4번>의 뿌리는 러시아이지만, 마틴은 이 곡이 “주로 뉴욕에서 쓰였고 서유럽에서 완성되었으며 게다가 섬세하고 명석한 작곡가의 작품이니 그가 수년간 주로 생활한 나라의 경치와 소리에 영향받은 게 당연하다”면서 “낭만파의 희뿌연 실안개는 영영 사라졌다”고 강조했다. 1924년의 라흐마니노프는 재즈와 안면을 튼 상태였고, 심지어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초연도 참관한 다음이었다.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피아노 협주곡 4번>은 한층 간결해진 주제를 사용하는 등 라흐마니노프가 군더더기를 덜어낸 작곡 스타일로 여전히 진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306-307)
의사까지 나서서 콘서트 일정을 줄이라고 하였지만 오히려 라흐마니노프는 역정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연주회는 내 유일한 기쁨입니다. 내게서 연주회를 앗아가면 나는 시들고 말 겁니다. 통증이 있어도 연주할 때는 사라집니다. 종종 얼굴과 머리 왼쪽의 신경통이 스물네 시간 동안 나를 괴롭힐 때도 있지만, 연주회 전에는 마술처럼 없어집니다. 세인트루이스에서는 요통 때문에 아주 고생했습니다. 무대 위의 피아노 앞에 앉은 상태에서 막이 올랐고, 연주를 할 때는 조금도 통증이 없었지요. 하지만 연주가 끝나니 일어설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막을 내린 다음에야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 있었어요. 아뇨, 연주를 줄일 수는 없습니다. 일을 멈추면 시들어버리고 말 테니까요. 안 됩니다 … 무대 위에서 죽기를 바랄 수밖에요.”
(336)
라흐마니노프는 현대 기술을 사랑했고, 색소폰 같은 현대 악기들을 탐구했다. 또한 여러 망명지를 겪은 것처럼 제정러시아 말기의 시국도 경험하였다. 다시 말해, 사상과 혁신이 난무하는 격변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않고 살아내야 할 여건으로 여기고 받아들였다. 같은 이유로 라흐마니노프는 읽어버린 나라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기꺼이 짊어졌다. 그의 음악과 정신은 1914년 부활절의 크렘린궁전을 담은 로베르트 슈테를의 그림, 즉 라흐마니노프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옛 러시아’의 이상화된 박제이자 그의 벽에 걸린 뮤즈를 동경했다. 라흐마니노프 개인에게 보이는 이러한 모순은 현대성의 본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