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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燕)나라는 백인(白人) 인종(人種)이었다?
사막지인(沙漠之人) : 사막(沙漠)의 사람(人)들〈2편〉
○ 전회(前回) (1편)에서, 「사막의 사람들(沙漠之人)」과 함께, 이들이 어떻게 조선사(朝鮮史)와 연계(連繫)되는지를 알아보았는데, 오늘(2편)의 이야기도 역시(亦是), 이와 무관(無關)치 않다. 더하여 인접(隣接)했던 「습(霫)·회흘(回紇)·연(燕)나라 사람들의 인종(人種)」도 함께 알아보기로 하자.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 같다!
특히 이들의 거점지(據點地)는 : 〈대부분(大部分) 서토(西土)에 있었고, 또는 우랄(Ural)산맥(山脈) 동서(東西)지역을 넘나든다는 사실(史實)은, 그 동(東)쪽엔 강력(强力)한 옛 조선(朝鮮)이 버티고 있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이게 정답(正答)이다. 이것을 알면 옛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대륙(大陸)의 요충지(要衝地) 땅에 걸터앉아 천하(天下)를 호령(號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살았던 곳과 거점지(據點地), 그리고 「이들은 어떤 인종(人種)이었는가?」는 조선사(朝鮮史)에서 매우 중요(重要)한 사건(事件)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1편에서 계속(繼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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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송막기문(松漠紀聞)【홍호(洪皓)】 / 白霫城(백습성)
《요(遼) : 女真乘勝入黃龍府五十餘州,浸逼中京.中京,古白霫城 : 요(遼) : 여진(女眞)이 이긴 기세로 황룡부(黃龍府) 50여 주(州)로 들어와, 중경(中京) 가까이에 와 핍박(逼迫)하였는데, 중경(中京)은, 옛 백습성(白霫城)이다.》라고 하였다.
〈백습성(白霫城)〉 : 백습성(白霫城)이란, 철륵(鐵勒)의 한 부족(部族)인 백습(白霫)의 아장(牙帳)을 말하는 것이다. 「백습(白霫)」이란 습(霫)과 같고, 선비(鮮卑)의 옛 땅에서 살던 종족(種族)이며, 「동라(同羅)와 복고(僕固)와 함께 있었다.」고 하였는데, 〈동라(同羅)는, 장안(長安)으로부터 17,500 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는데, 「백습(白霫)은, 또 백복(白服)과 같다」하였다.
〈백습성(白霫城)〉은 : 「요(遼)나라의 오경(五京)중, 가운데에 있던 중경(中京)이다.」라는 사실에 주목(注目)해 보자.〈요사(遼史) 39 지리지(地理志) 3 중경도(中京道)〉편을 보면 :
➊〈우(虞)의 영주(營州)땅이요, 하(夏)의 기주(冀州) 땅이요, 주(周)의 유주(幽州) 땅이요, 진(秦)의 요서(遼西) 땅이다. 한말(漢末)엔 해(奚)가 살았는데 “폭원(幅員)이 천리(千里)며, 큰 산(大山)과 깊은 골짜기로 험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며, 위무(魏武 : 曹操)가 북정(北征)하여 20여만(餘萬)을 항복(降伏)받은 곳이며, 이곳에 송막(松漠)이 있고, 탁발씨(拓拔氏), 요(遼)의 아장(牙帳)이 있던 곳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중요(重要)한 지리적(地理的) 요소(要素)는 뭐니 뭐니 해도, 「요서(遼西)」라는 방향성(方向性) 단어(單語)다. ‘요수(遼水)=요하(遼河)’의 서(西)쪽 이란 뜻이니 말이다. 「요동요서(遼東遼西)」란 말은, 서토(西土)와 조선(朝鮮)을 가르고, 역사적(歷史的)으로 동방(東方)과 서방(西方)을 가르는 역할(役割)을 했던 곳에 있다는 얘기다.
유주(幽州) 역시 똑같이 중요한 땅이다. ‘유주(幽州)는 유릉(幽陵)이요, 유도(幽都)’라고 하는데, ‘총령(葱嶺)은 유도(幽都)의 문(門)’이라고 했잖은가! 따라서 유주(幽州)내에 요서(遼西)가 포함(包含)되고, 관할(管轄)지역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요동요서(遼東遼西)와 유주(幽州)의 땅은, 서토(西土)와 대륙(大陸)땅을 가르는 그 위치(位置)에 있었음이 확실하다.〉따라서 반도(半島)와 대륙(大陸) 땅 안(內)에서는 이를 찾을 수 없다.
탁발씨(拓拔氏)는,〈선비(鮮卑)로 서북방(西北方)에서 동남진(東南進)한 자(者)〉들이다.
이러한 자(者)들을, 〈㊀ 중원(中原) 북방(北方)의 황하(黃河) 남북(南北)안에서 자리 잡았던 자(者)들〉이라고 한다면? : ㊁ 또 이런 자(者)들을 하북성(河北省) 동(東)쪽 땅에 만들어 놓은, 21세기(世紀) 역사통설(歷史通說)은,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이 만들어낸 결과물(結果物)」이다. 선비족(鮮卑族)들과 옛 조선(朝鮮)과는 밀접(密接)한 관계(關係)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는데, 가장 먼저 이 자(者)들을 동(東)쪽으로 이동(移動)해야만 한다.
〈조조(曹操)가 북정(北征)하여 오환(烏桓) 2십여만을 항복(降伏)시킨 곳이다〉라고 하였는데, 하북성(河北省)과 요녕성(遼寧省) 사이에 〈백용퇴(白龍堆)〉의 특이(特異)한 사막(沙漠) 지형(地形)이 형성(形成)되어 있는가를 먼저 알고 난 뒤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다. 백용퇴(白龍堆) 주변(周邊)에 유성(柳城)도 있다. 이곳은 말 그대로 일만(一萬)리 서(西)쪽의 이야기다.
이 모두는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반도왕조(半島王朝)로 만들기 위한 수순(手順)의 하나로, 조선왕조(朝鮮王朝)와 인접(隣接)했던 나라(國)와 종족(種族)과 부족(部族)등을 함께 이동(移動)하면서 지명(地名)등도 따라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지형지세(地形地勢)【산(山)이나 강(江), 사막(沙漠), 호수(湖水)등등의 자연환경(自然環境)】를 손에 들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지명(地名)만 가지고 가다보니, 지명(地名)이 생기게 된 지형지세(地形地勢)와 연유(緣由)등과는 전혀 다르게 된 것이다. 즉(卽) 짝퉁지명이다.
【탁발씨(拓拔氏)니 선비(鮮卑)니 하는 종족(種族)들 역시 조선사(朝鮮史)와 함께 두 차례에 걸쳐 이동(移動)되었다. 본시(本是)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우랄(Ural)산맥(山脈) 남쪽주변(周邊)에서 : 「1차 이동(移動) : 중원북방(中原北方)의 하(河) 남북(南北)안. 2차 이동(移動) : 오늘날의 흑룡강(黑龍江) 남북(南北)안 대흥안령(大興安嶺)으로 정착(定着)되었다.」 이러한 사가(史家)들이 만든 이동사(移動史)를 고려(考慮)치 않는다면, 조선사(朝鮮史)를 일백(一百)년 연구(硏究)해도 식민사관(植民史觀)을 벗어날 수 없다.】
➋「대정현(大定縣)」은, 옛 백습(白霫)의 땅(大定縣.白霫故地)이고, 「고주(高州) 삼한현(三韓縣)은, 진한(辰韓)은 부여(夫餘)고, 변한(弁韓)은 신라(新羅)이며, 마한(馬韓)은 고려(高麗)」인데, 개태(開泰)중에 성종(聖宗)이 고려(高麗)를 쳐, 그 포로(捕虜)들을 이곳에 살게 하고는, 현(縣)을 두었는데, 5천호(千戶)였다. (高州.三韓縣.辰韓為扶餘,弁韓為新羅,馬韓為高麗.開泰中,聖宗伐高麗,俘三國之遺人置縣.戶五千.) 고 한 곳이며,
➌「흥중부(興中府)」는 : 난하(灤河)가 있고, 옛 고죽국(孤竹國)이 있었으며, 한(漢)의 유성현(柳城縣)의 땅이며, 모용황(慕容皝)은 유성(柳城)의 북(北)쪽에 있었으며, 용산(龍山)의 남쪽, 복덕지지에 용성을 쌓았는데, 유성(柳城)을 용성현(龍城縣)으로 바꿨다. 천도를 이룬 후, 화룡궁(和龍宮)이라 이름했다.(興中府.本霸州彰武軍,節度.古孤竹國.漢柳城縣地.慕容皝以柳城之北,龍山之南,福德之地,乃築龍城,構宮廟,改柳城為龍城縣,遂遷都,號曰和龍宮.)고 한 곳이다.
유성(柳城)에 대해 역사서(歷史書)는 말하기를 : 「유성(柳城)호(胡)들이 있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유성(柳城)은 곧 노룡(盧龍)으로, 조선(朝鮮)인들은 말하기를 “노룡사막(盧龍沙漠)은 험난하기로 유명했다”고 하였다.【유성(柳城)에 대해서는, 우리 게시판(揭示板)에 여러 차례에 걸쳐 게재(揭載)되어 있다.】
➍「유주(楡州)」에는 : 본래 한(漢)의 림유현(臨渝縣)이며, 뒤에는 우북평 려성현(驪城縣)이 되고, 뒤에는 말갈(靺鞨)이, 해(奚)가 있었으나, 태종(太宗)이 남정(南征)하여 빼앗은 곳이다. 송산(松山)현(縣)의 변두리에는 송막(松漠)이 있다. (楡州 : 本漢臨渝縣地,後隸右北平驪城縣.唐載初二年,析慎州置黎州,處靺鞨部落,後為奚人所據.太宗南征.)고 한 곳이다.
한(漢)나라 때의 림유현(臨渝縣)이라면, 이곳에 2천여 m의 험한 산세(山勢)의 림유산(臨楡山)과 그 계곡을 흐르는 림유하(臨楡河)가 있었던 곳이며, 오늘날의 산해관(山海關)이라고 한다. 【유(渝)는 투(渝)로 발음(發音)하기도 한다.】그러나 오늘날의 산해관(山海關) 주변에는 이러한 지세(地勢)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이 말은 곧 「서토(西土)로부터 일만(一萬)리 이동(移動)되어, 오늘날의 발해(渤海)가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라는 것을 증거(證據)해준다.
요사(遼史)에서는 : 남경(南京)편에 이러한 설명(說明)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중경(中京)의 남쪽지대에 남경(南京)이 있었을 테니 당연(當然)한 이야기라고 본다.
➎〈‘백습(白霫)’은 : ‘동라(同羅)와 복고(僕固)와 함께 있었다.’〉고 하였고 〈‘동라(同羅)는 장안(長安)으로부터 17,500 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설명(說明)은 아래의 기록(記錄)과 상통(相通)하는데,
통전(通典) 북적(北狄) 철륵(鐵勒) :《鐵勒之先,匈奴之苗裔也,種類最多.自西海之東,依據山谷,往往不絕. : 철륵(鐵勒)의 선조는, 흉노(匈奴)의 먼 후대(後代)의 자손(子孫)이며, 종류가 가장 많다. 서해(西海)의 동쪽에서 살며, 산곡(山谷)에 의지하여 사는데, 때때로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인데, 이때의 서해(西海)는 곧 ‘카스피(Caspian)해(海)’이다.
➏ 위의 여러 역사서(歷史書)【고전(古典)】로 보면 : 철륵(鐵勒)의 한 부족(部族)이었던 「백습(白霫)」은 : 백습성(白霫城)이 있었던 곳, 즉(卽) 요(遼)의 중경도(中京道)는 :
◇〈신강성(新疆省) 준갈이(準喝爾)의 북방지대(北方地帶)로부터 ∼ 카자흐스탄(Kazakhstan) 발하슈(Balkhash)호 북방지대(北方地帶) ∼ 아스타나(Astana) 및 카라간다(Karaganda)와 북방지대(北方地帶) ∼ 카스피(Caspian) 해(海) 북방(北方) 일대(一帶)사이(間)에 있었다.〉 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當時) 요(遼)나라의 서경(西京)은 어디에 있었을까? 우랄(Ural)산맥(山脈) 서(西)쪽에 있었을 것이다.
· 동구라파(東歐羅巴)와 러시아(Russia)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및 대륙(大陸)
회흘(回紇) 인종(人種)은?
➐ 회흘(回紇)인들의 모습은 : 《其人卷髮深目,眉脩而濃,自眼睫而下多虬髯. : 그 사람들은 권발(卷髮)이며 눈은 깊고(深目), 눈썹은 짙고 무성하며, 속눈썹은 아래가 많고 구레나룻은 뿔 달린 용과 같다.》고 하였다.
이 종족(種族)들은, 우리와 같은 동양인(東洋人)이 아닌 「현재(現在)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인종(人種)」이다. 전한(前漢)시대의 역사서(歷史書)를 비교해 봐도, 오늘날의 인종(人種)구도(構圖)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이들은 수천(數千)년 그렇게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서 살아왔다.
이런 인종(人種)의 형상(形相)은, 21세기 대한민국(大韓民國)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風景)이다.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각국(各國)에서 온 방문객(訪問客) 또는 취업자(就業者)들이 많기 때문인데, 이들은 황인종(黃人種)과 확실(確實)하게 구분(區分)된다.
연(燕)나라 사람들은 백인계열(白人系列)?
➑《奉釋氏最甚,共為一堂,塑佛像其中,中略.誦經則衣袈裟,作西竺語,燕人或俾之祈禱,多驗.婦人類男人白晢,著,青衣,如中國道服.然以薄青紗幂首而見其面. : 부처를 받드는 것이 가장 심하였는데, 함께 한 자리에, 흙으로 만든 부처의 상이 그 가운데에 있는데, (중략). 서천축(西天竺)말로 연나라 사람(燕人)들은 혹 더하여 소원을 비는데, 효험이 많다. 부인(婦人)들은 남자들과 같이 얼굴빛이 희며, 뚱뚱하고(白晳), 얇은 푸른 옷을 입고 나오는데, 중국(中國)의 도복(道服)과 같다. 엷은 청사(靑紗)로 머리를 뒤집어쓰는데 그 얼굴만이 보인다.》고 하였다.
「연(燕)나라 사람들 역시(亦是), 백인계열(白人系列)의 인종(人種)이었다」는 이야기다. 서축(西竺)이란 서천축(西天竺)을 말하는 것이다.
옛 조선(朝鮮)이 연(燕)을 침범(侵犯)하고, 속국화(屬國化)하여 질자(質子)를 요구(要求)했고, 또 어떤 때는 연(燕)이 또 조선(朝鮮)을 침범하기도 했던 관계(關係)였으므로, 일반적(一般的)으로 연(燕)나라 사람들 역시 우리들과 똑같은 황인종(黃人種)이라고 의심(疑心)조차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송막기문(松漠紀聞)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記錄)한 기문(紀聞)이란 점에 주목(注目)해야 한다. 또 여기서 연(燕)나라 사람들은 ‘백석(白晳)’이라고 하였는데, 백석(白晳)이란 말은 : 〈얼굴이 희고, 뚱뚱하다〉는 뜻이다. 만약 당시 홍호(洪皓)와 똑같은 모습이었다면 언급(言及)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연인(燕人)들은 곧 ‘백인(白人)이었다’는 이야기다.
◇ 백석(白晳)
㊀ 한자사전 / 白晳 [백석] 얼굴빛이 희고, 살이 두툼하게 잘 생김
㊁ 중국어사전 / 白晳 [báixī] (피부가) 해맑다. 뽀얗다. 희말쑥하다. 희고 깨끗하다.
㊂ 일본어사전 / はくせき[白晳] : [명사] 백석; 살갗이 흼. [명사] 白晳はくせき; 顔色かおいろが白しろくきれいなこと.
㊃ 어학사전 / 白晳 [báixī] 중국어 : (얼굴이나 피부가) 희다 : 白晳的面孔 흰 얼굴
➒ 더불어 :《辛酉歲,金國肆眚,皆許西歸,多留不反.今亦有目微深而髯不虬者,蓋與漢兒通而生也. : 신유(辛酉) 해에, 금(金)나라에서 거리낌 없이, 모두 서(西)쪽으로 돌아가도록 하였으나, 많은 자(者)들이 반항하지 않고 머물렀다. 지금 또한 눈(目)이 조금 들어가고 뿔 달린 것 같은 구레나룻가 없는 자들은, 대개 한(漢)의 젊은이들과 통하여 태어난 자들이다.》라고 하였다.
곧 “회흘(回紇)=회골(回鶻)과 한인(漢人)들과의 혼혈(混血)이었다.” 라고 말한다. 이러한 설명(說明)을 보면 : 당시(當時)의 대륙인(大陸人) 곧 조선인(朝鮮人)들은 우리들과 같은 황인종(黃人種)들이었고, 회흘(回紇)들과의 혼혈(混血)들은, 「눈은 조금 들어가 있으나, 구레나룻가 많지 않은 젊은이들이었다.」는 얘기다.
➓ 우리들은 지금까지 ‘옛 연(燕)나라와 옛 조선(朝鮮)’이 국경(國境)을 맞대고 있었고, 때로는 인접국(隣接國)으로 화친(和親)하여 좋은 시절을 보내기도 했고, 연(燕)에서 내란(內亂)이 있을 때는, 조선(朝鮮)에 의탁(依託)하는 백성(百姓)들도 많았다고 한다.
옛 조선(朝鮮)이 연(燕)을 침범(侵犯)하고, 속국화(屬國化)하여 질자(質子)를 요구(要求)했고, 또 연(燕)이 조선(朝鮮)을 침범하기도 했던 관계(關係)였으므로, 일반적(一般的)으로 연(燕)나라 사람들 역시(亦是), 우리들과 똑같은 자(者)들이라고 의심(疑心)조차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송막기문(松漠紀聞)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記錄)한 기문(紀聞)이란 점에 주목(注目)해야 한다. 여기서 연(燕)나라 사람들의 형상(形相)에 대해 ‘백석(白晳)’이라고 하였는데, 백석(白晳)이란 말은 : 〈얼굴이 희고, 뚱뚱하다〉는 뜻이다. 만약 당시 홍호(洪皓), 자신(自身)과 똑같은 모습이었다면 언급(言及)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연인(燕人)들은 곧 ‘백인(白人)이었다’는 이야기다.
○ 이러한 조선(朝鮮)의 역사(歷史) 이야기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하는 것은 독자(讀者)들의 자유(自由)다. 그러나 믿느냐, 믿지 않느냐하는 것 자체(自體)가 물음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실(史實)이기 때문이다.
주장(主張)하고픈 것은, 〈조선사(朝鮮史)의 전개과정(展開過程)이, 인간(人間)무리(衆)의 삶이 아닌, 신(神)들의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018년 01월 24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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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가 지금 시중에서 보고 있는 '고지도'라는 것들을 무수히 대하게 된다.
이러한 고지들의 지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위 25사라고 하는 20세기 초에 재편찬된 정사라고 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이것들은 거의 대부분 조선을 해체하고 난 뒤에 만들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그 지명에 따라 역사해설을 하게 되면 옛 조선왕조는 하북성 일부로부터 요녕성과 길림성일부, 흑룡강성일부로 한정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지명의 유래와 그 연유를 찾고, 그곳의 지형지세와 그곳에 살고 있었던 종족과 부족등과 함께 비교해 보면, 그 지명의 이동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조선사의 주요 지명은 몇 차례에 걸쳐 이동된 것이다.
특히 종족과 부족들의 연원에 대해서는 산해경이나 회남자전과 자치통감, 통전등을 함께 비교해 보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사는 곧 세계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광범위하기 때문에 한정된 사서만 보고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고 봅니다.
조선사를 공부하고 연구하시는 많은 분들께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한 말씀이니 오해없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조선사에 흥미를 갖고, 애정을 갖고, 공부하고 연구하시는데, 천문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획기적인 새오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천문학으로 찾는 위치가 우리가 지금 알아차리지 못하는 "오류"가 생길 수 있는가, 없는가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 고전에 기록되고, 지형지세까지도 같은 곳은 누가 보아도 조작할 수 없는 것임에도, 천문으로 본 위치는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지형지세인 자연환경적 요소는 왜곡과 조작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참고하시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